금산사 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모악산母岳山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金山寺가 있는 모악산은 김제의 명산으로 산이 깊고 넓어 비경을 많이 감추고 있다. 예로부터 호남 사경四景을 말할 때 금산사를 가장 먼저 꼽는 것도 바로 영산인 모악산에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진표眞表 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진표 율사는 숭제 법사의 법을 이어받아 수행하였고, 그 뒤 변산의 불사의방에서 17년이나 극한적 고행 수도인 망신참亡身懺을 하여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다는 표지인 간자簡子를 건네받은 이야기는 불교사상 유명하다. 그 뒤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762년부터 766년 동안 금산사를 대찰로 중창하였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후삼국시대인 935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이 지역 최대의 사찰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는 1097년 혜덕왕사가 중창을 하였는데, 이때가 금산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이루었던 시기다. 가람배치도 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으로 구획되어 86동의 건물과 43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금산사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뇌묵 처영 스님이 이끄는 의승병의 거점이 되어 호국에 앞장섰으나 정유재란 때 왜구의 주공격 대상이 되어 가람이 불타 버렸다. 그 뒤 수문守文 대사가 대사구 지역을 복구하면서 중창을 이루었다. 금산사의 명성은 이어져 1725년 환성 지안 스님이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전국에서 1,4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할 정도였다. 근래에는 1961년 월주月珠 스님이 중창을 시작하여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교, 극락교, 향적당, 적묵당, 보현당, 설법전, 요사채, 나한전, 조사전, 전통찻집, 보제루 등을 새로 짓고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등을 해체 복원하였다. 아울러 방등계단 성역화 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금산사에는 숱한 문화재가 있다. 그 가운데 지정문화재만 들더라도 오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노주(보물 제22호), 석등(보물 제828호),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 제24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석련대(보물 제23호) 등이 있다.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 대적광전大寂光殿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존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로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1635년 수문 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정유재란 때 절이 불탄 뒤 대사가 중창하면서 소실되기 전에 있었던 대웅전·대광명전·극락전·약사전·나한전 등의 다섯 전각을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대적광전은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진표 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 서 있었을 것이다. 동쪽의 방등계단이 계율사상의 중심 역할을 하고, 이 건물에서는 직접 수계와 설법 등의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1986년 12월 6일 밤 불타기 전의 대적광전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기둥을 올렸으며 귀솟음기둥을 세워 처마 끝이 하늘로 향하게 하였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안에는 기둥을 높다랗게 세우고 뒤쪽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두어 이 앞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 :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진한다.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 · 노사나불 ·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 관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일광보살 그리고 월광보살이다. 5여래는 모두 목조 좌상으로 높이는 대개 2.56m 안팎이고, 6보살은 모두 소조 입상으로 높이가 2.73m 정도다. 수인은 불상에 따라 각기 선정인 · 지권인 · 시무외인 등을 취하였고, 보살상은 한결같이 화관花冠으로 장엄하였다. 조선 중기에 전각을 중창하면서 불보살상도 이때 조성한 듯 간략화한 법의와 다소 경직된 상호 등에서 조선 중기의 일반적 경향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5여래와 6보살을 봉안한 전각은 그 유례가 없다. 한국의 불교는 흔히 통불교通佛敎라고 한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주존불을 어떻게 모셨는가에 따라 중심 전각만이 대웅전 · 무량수전 · 비로전 등으로 나뉠 뿐이고,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관세음신앙과 지장신앙 · 약사신앙 등이 어우러져 있다. 심지어 재래의 토속신앙마저 융화시켜 산신 신앙으로 불교화 하고 있음은 이러한 한국 불교의 통불교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 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 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 외부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大寂光殿>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이 1991년 쓴 글씨다. @ 황욱(黃旭, 1898~1993)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는데, 이 편액도 악필법 쓴 황욱의 글씨로는 이 외에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일주문에 걸린 <大華嚴寺>와 <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 육각다층석탑 : 보물 제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보물 제27호 육각다층석탑이 있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 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 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 왔다. 본래 12층으로 조성되었던 탑은 현재 11층만 남아 전체 높이가 218㎝다. 탑은 기단부 · 탑신부 · 상륜부로 구분되는데 각각의 구조는 모두 별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기단은 탑신과 달리 화강석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체감되도록 육각 3단으로 쌓았고 각 면에는 사자를 양각하였다. 기단과 탑신의 사이에는 육각의 점판암으로 연화대, 곧 앙련석과 복련석을 두었는데 그 사이에 중석을 끼웠던 자리가 남아 있다. 탑신부 역시 육각으로 옥신과 옥개석이 모두 1매씩이지만 옥신은 10층과 11층만 남았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남아 있는 옥신석은 육각의 면에 모두 모서리기둥이 있고 면석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으로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기단부의 연화대 위에 겹겹이 쌓았는데, 추녀 밑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이고 윗면의 경사는 완만하지만 전각에서는 반전을 나타냈다. 옥개석 아래면 가운데에는 탑신받침이 있고 그 주위에 초화문草花紋 · 용문龍紋 등을 가늘게 새겼다. 옥개석의 상하에는 탑신을 끼우는 홈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의 부재로 탑신을 올린 것이 아니라 각 면을 한 개씩의 판석으로 맞춰 끼웠던 흔적이다. 상륜부는 화강석으로 보주를 올렸는데 이는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 방등계단方等戒壇 : 보물 제26호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鍾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은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받는 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로 한국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양산통도사, 개성 불일사佛日寺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구조를 보면 상하의 2단으로 정사각형의 기단을 만든 뒤 그 위에 석종형 부도가 놓였다. 하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25㎝, 높이가 80㎝며 상층기단은 길이가 850㎝, 높이가 60㎝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기단은 대석·면석·갑석으로 구성되는데, 2단의 면석 모두에는 고려시대의 기법이 잘 표현된 불상과 각종 신장상이 있다. 이들 조각 가운데는 조선시대에 새롭게 추가된 것도 있어 방등계단 자체를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층기단의 4면에는 난간을 둘렀던 것으로 보이는 석주가 남아 있고 이 석주에는 인왕상인 듯한 조각을 했다. 또한 난간의 사방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세워 그 내부가 성스러운 불법의 공간임을 상징하고 있다. 계단의 중심에는 한 돌의 판석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부도를 세웠다. 부도의 기단 모서리에는 사자의 머리를 크게 새겨 불법을 지키는 용맹의 정신을 나타냈고, 가운데 부도를 받치는 곳에는 복판의 연꽃을 돌렸다. 화강석의 부도는 범종을 본떠 만든 듯 아래에 꽃무늬의 띠를 돌리고 정상에 아홉 마리 용을 조각했다. 용머리 위에는 다시 별개의 돌로 앙련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그 위에 복발과 보주를 얹었다. 이와 같이 석종형 부도 자체만으로도 고려시대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불교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석종형 부도는 단순히 묘탑의 역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계의식을 거행하는 계단의 의미가 합쳐져 불탑계단佛塔戒壇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한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 출처 : 금산사 홈페이지. @ 계단의 중앙에 석종형石鐘形 부도(보물 제26호) 1기가 있다.
# 오층석탑 : 보물 제25호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松臺에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 방등계단 앞에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곳에서는 석등 대신에 석탑을 조성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대개 사리신앙과 관련을 갖는 듯하나 그 조성배경은 알 수가 없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0㎝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률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2단인데 하층의 면석 각 면에는 양쪽에 모서리기둥을, 그리고 중앙에는 사잇기둥 하나씩을 정연하게 새겼다. 하층기단의 갑석은 여러 장의 판석이고, 그 위에 상층기단을 받치는 굄대가 있다. 상층기단의 갑석은 8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굄대가 있다. 탑신은 1층만이 옥신과 옥개가 별개의 부재이고, 2층 이상은 옥신과 옥개를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1층의 옥신은 좌우에 우주가 새겨진 판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앞뒤로 면석을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체감이 둔화되면서 올라가는데 모두 옥개받침을 3단씩 마련했다. 낙수면의 경사는 위에서 급히 내려가다가 중간부터는 완만히 내려가고 전각에서는 반각을 이룬다. 상륜부는 노반부터 보주까지 온전히 남아 있다. 노반은 일반적인 석탑보다 크고 넓은 각석형으로 양쪽에 우주가 있는 등 얼핏 보면 또 하나의 옥개석으로 잘못 보기 쉽다. 노반 위에 복발이 있고, 다시 그 위에 앙련을 새긴 앙화와 보륜·보주가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석탑은 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에 비추어 볼 때 하층기단이 탑신에 비해 협소하고 옥개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신라시대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경종 4)년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 중창기와 함께 금동 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적멸보궁 寂滅寶宮 : 안에서 방등계단에 있는 석종형 부도를 볼 수 있도록 창이 만들어져 있다.
# 대장전大藏殿 : 보물 제827호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전각이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 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 노주露柱 : 보물 제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분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 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는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현재 이 석조물의 구조는 지대석 · 하대석 · 중대석 · 상대석 · 상륜부로 이루어져 총 높이가 230㎝다. 지대석은 하나의 돌인데 윗면을 평평하게 하고 1단의 높은 괴임을 두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사각형으로 우주와 탱주가 있고 위아래를 구분하는 횡대를 새겼다. 각 면에는 안상을 표현하였고, 그 안에는 아래에 꽃문양을, 위에는 복련을 조각했다. 하대석 윗부분은 두 단의 괴임과 몰딩으로 구성되어 중대석 즉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석탑의 탑신부와 같이 단순한 모습이다. 상대석은 복판의 앙련을 새겼는데 하대석의 그것과는 달리 좁고 긴 모습이다. 윗면에는 사각형의 높은 괴임 1단이 있어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원형으로서 보개와 연꽃모양의 보주로 이루어졌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석조물의 기능이 석등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상륜부는 지금의 상대석 위가 아니라 그 사이에 화사석과 같은 부재가 놓인 후 맨 위로 올라가야 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대체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 석련대 金山寺石蓮臺 : 보물 제23호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하대는 엎어놓은 연꽃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석등 : 보물 제828호 . 금산사 대장전 앞뜰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그 밑에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윗받침돌로 3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아래받침돌은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그 위의 세워진 가운데기둥은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모양이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보다 크고 무거운데, 역시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네 면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창 주위에는 구멍이 3개씩 뚫려있는데, 창문을 달기 위한 구멍이었던 듯하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작은 꽃조각으로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붕돌의 꽃조각, 석등 각 부분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
# 미륵전 : 국보 제62호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 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 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미륵전을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이후 미륵전은 금산사의 상징처럼 오랜 세월동안 중수를 거듭하면서 금산사의 미륵신앙,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5년(인조 13) 수문 대사가 중창하였고, 그 뒤 1748년(영조 24), 1897년(광무 1), 1938년, 1994년 등 여러 차례의 보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의 3층 구조를 하고 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줄어든다. 전각을 세우기 위해 장대석의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막돌 초석을 올렸다. 여기에 민흘림의 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짜 올리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얹은 다포 건물로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고 추녀에는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미륵전은 용화전 · 산호전山呼殿 · 장륙전 등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 <大慈寶殿>, 2층에 <龍華之會>, 3층에 <彌勒殿>이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대자보전이란 미륵을 뜻하는 범어 Maitreya를 한자로 번역하여 자씨慈氏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하였다. 용화지회는 미륵보살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 사바세계에 도래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용화지회는 미륵의 하생을 뜻한다. 그리고 3층의 미륵전은 말 그대로 건물 안에 미륵불을 봉안하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의 건물에 3개의 편액이 걸렸지만 결국 미륵을 모셨다는 미륵전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아진다. 미륵전은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독특한 장엄으로 꼽힌다.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우면서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하나의 통층通層으로 이루어졌다. 계단이 있어 맨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래부터 위까지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미륵삼존불과 협시 보살 2위가 봉안되어 있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 삼존불 중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입상이다. 신라시대 진표 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 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 수문 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塑造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 화재로 일부가 불탔다. 4년 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 대좌는 언제 조성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 미륵불과 우협시보살을 지금 공사중임) 본존불 양옆의 협시 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아래 사진)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 원통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 대비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을 갖추고 @ 아래 사진은 십일면관음보살 + 천수관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전, 대비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 나한전 현판 :
# 명부전 극락전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극락전의 이름에 걸맞게 아미타보살을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봉안하였다. 그 뒤로는 석가 · 비로자나 · 약사의 후불탱을 걸었다. 좌우 벽에는 1961년에 당시 주지 영전映傳 스님과 법주 대법화보살이 봉안한 지장탱 · 극락탱 ·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잘 다듬은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기둥을 올린 후 기둥마다에 공포를 올려놓은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연혁은 1857년(철종 8)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할 뿐 그 이전의 일은 알지 못한다. 다만 1598년(선조 31)에 정유재란의 화를 입어 절이 소실되기 직전의 기록에 ‘시왕전 9칸’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지금의 명부전은 조선 중기의 시왕전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 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상호는 비교적 각진 모습에 도식화된 느낌이 들어 아마도 명부전의 중수가 이루어지던 1857년 무렵에 조성된 듯하다. 지장삼존의 뒤에는 지장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61년(철종 12)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되어 이안되었다는 화기가 보인다. 지장삼존의 좌우로 시왕상 10위와 판관 · 녹사 · 인왕상 · 동자상 각 2위가 명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한편 내부 정면의 출입문 위에는 <금산사시왕전중수기>를 비롯한 현판 8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장신앙이 번성한 것은 일찍이 신라 때부터인데 시대를 달리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신앙되고 있다. 더욱이 금산사의 명부전에서 펼쳐지는 지장신앙은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출현한 지장보살을 생각할 때 더욱 각별해진다. 진표 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철저한 수행의 힘으로 마침내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고, 더욱 정진하여 미륵에게서 다시 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진표 율사의 수행에서 지장신앙은 미륵신앙과 함께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 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는 누각 건물이 보제루普濟樓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누각은 조선시대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서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 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 잡고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 보제루에는 각종 동물의 조각상이 있다. #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직사각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기단석은 4매의 장대석으로 직사각형을 이룬다. 각 측면마다 모서리기둥과 사잇기둥을 두어 면을 둘로 구분하였고, 또 앞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볼록한 띠를 둘렀으나 좌우의 옆면에는 중앙과 가장자리에 수직의 띠를 양각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둘로 나뉜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지주 높이는 355㎝로 상,중,하 세 곳에 홈을 파고 당간을 고정시켰던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지주의 안쪽 면은 수직을 이루나 바깥 면은 꼭대기 부분에서 안쪽으로 굽혀져 날렵한 느낌을 준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 삼층석탑 : 보물 제29호 심원암 인법당의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정상을 향하여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고려시대의 건물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축령암鷲嶺庵 터로서 잘 다듬어 쌓은 석축이 남아 있고 주위에서 기와와 청자편들을 볼 수 있다. 이 위쪽에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450㎝고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얹었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층기단을 얹었다. 하층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사잇기둥이 있으나 하대와 면석, 갑석들의 넓이가 거의 동일하여 신라 전형의 석탑에서 퇴화된 양식을 보인다. 상층기단은 4매의 판석으로 만들었는데 2면에는 모서리기둥과 사잇기둥이 있는 판석을 끼우고, 다른 2면에는 사잇기둥만 있는 판석을 끼웠다. 탑신은 별개의 화강석으로 옥신과 옥개석을 조성하였다. 옥신에는 사잇기둥 없이 모서리기둥만 나타냈고, 옥개석은 넓은 편으로 추녀 밑이 곡선을 그리며 반전하는 고려시대 특유의 양식을 지녔다. 옥개석은 낙수면이 급하고 전각의 끝부분에서 반전을 이루어 예리한 귀퉁이를 만들었다. 추녀 끝의 좌우에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있고, 옥개받침은 4단씩으로 고려 중기 이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알게 한다. 상륜부에는 노반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 보개나 보주 등은 모두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기단에서 시작하여 탑신에 이르기까지 체감률이 적어 안정감이 부족하다. 또한 석재의 결구에 있어서도 규칙성을 잃었고, 우주 등의 표현이 미약하다. 이러한 현상은 깊은 산중에 탑을 세우면서 어쩔 수 없이 그저 탑의 기본적 골격만을 염두에 두었던 탓이라 생각된다. 1층과 2층의 탑신이 부분적으로 파손되기도 하였다.
# 해탈교
@ 사악한 것의 침입을 막는 용두... 다리 아래의 천장에 달려 있다.
# 일주문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 <모악산 금산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다. 1975년에 세운 목조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현판은 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다 #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金剛門이 보인다.
금강문에는 가람의 외곽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을 봉안한다.
이 건물은 1994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새로 지어 안에는 인왕상 위체와 사자를 탄 문수 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 동자를 모셨다.
@ 본래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다. 현재의 금강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에 <모악산 금산사> 편액이 걸린 앞면 1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그것이다. 1994년에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왼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 세운 금강문에 자리를 내주고 전각 이름마저도 사라졌지만, 1556년(명조 11)에 인언仁彦 · 경휘敬輝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의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이다.
# 천왕문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천왕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4년에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했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 범종각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범종각이 오른 쪽에 위치하는 이유는 불교의 체용설體用說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쪽은 체體 왼쪽은 용用에 해당하는데, 소리는 곧 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종각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곧 우리들 일심의 작용이요, 부첨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인 것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 법고
# 불이문 일주문-금강문-천왕문-불이문...의 순서로 배치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금산사의 불이문은 명부전에서 담을 지나 다른 곳으로 나가는 문으로 되어 있다.
# 부도전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가는 동쪽 길을 300m쯤 오르면 왼쪽 산기슭에 부도전이 있다. 이곳이 고려시대의 봉천원으로 혜덕 왕사의 비도 여기에 있다. 나지막한 돌담 안에 2기의 비와 12기의 부도가 ‘ㄷ’자형으로 늘어서 있는데, 이들 부도는 고려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금산사에서 머물렀던 고승들의 묘탑이다. 입구의 오른쪽에서부터 차례로 부도의 이름을 열거하면, 1. 용봉 대선사, 2. 소요당 대사, 3. 혜덕왕사진응탑비, 4. 남악당, 5. 백곡당, 6. □운당, 7. 진표 율사(1984년 조성), 8·9·10. 불명, 11. 해운당, 12. 서봉당 13. 벽허당, 14. 인봉당 등이다. 그 밖에 명문당의 부도가 최근에 세워졌다.
# 혜덕왕사 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 금산사 안에 서있는 탑비로, 혜덕왕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 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에는 혜덕의 생애·행적, 그리고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것은 예종 6년(1111)으로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 향로대좌 현재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산사 향로 대좌다. 향로는 사라지고 대좌만 남았는데 높이는 28㎝, 지름은 35.5㎝다. 대좌의 가장자리에 1178년(명종 8)에 조성하여 미륵상 앞에 봉안하였다는 명문이 적혀 있다. 이 향로 대좌가 어떻게 건너가게 되었는지 연유야 알 수 없다.
@@ 미륵불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것으로 이것은 자비를 갖춘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비라는 것은 포용력을 가지고 인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말로 적극적인 종교적 실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미륵신앙은 삼국의 불교인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신앙이었다.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해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된 미륵신앙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륵신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하나는 미륵상생신앙이다. 미륵상생신앙이란 아직 보살의 신분인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보고 죽은 후에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신앙형태로 도솔천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십선도를 일심으로 열심히 닦아 죄업을 참회 수행하여야 한다는 신앙이다. 도솔천에 태어난 후 미륵불 옆에 있다가 이윽고 미륵이 하생할 때 미륵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와 삼회의 설법을 들어 깨달음의 길로 인도 받는다는 신앙이다. 2)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신앙이다. 모든 중생들이 자비심을 가지고 십선을 열심히 닦아 자비와 평화의 불국토를 만들어 대자대비의 세상이 되었을 때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3회의 설법으로 오랜 업장을 소멸하게하고 위없는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미륵 하생신앙이다. @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계에 오셔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구원 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핍박받고 괴로움에 처했을 때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사회의 개조와 인간개조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후천개벽적인 내용이 아니다. @ 그래서 미륵신앙은 열심히 십선의 도를 닦아 자신의 억겁을 참회함으로써 불국토를 열어 모두 다같이 성불하자는 기도와 참회의 신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이 신라시대에는 미륵이 화랑으로 화하여 세상에 현신해 줄 것을 기원하는 화랑도와 결합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후고구려의 궁예에 의해 본래의 신앙에서 벗어나 혹세무민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려말 우왕 때 니금이라는 사람이 미륵불을 자칭하고 나타나 민중들을 우롱하다 처형당하였고 조선시대 숙종 때 승려 여환이 석가시대는 가고 미륵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미륵신앙을 퍼뜨려 왕권을 도모하다 처형당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암울한 시기에 굶주림과 억압의 고통에서 허덕이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의 실현을 약속하는 민중 신앙과 결합하여 미륵신앙이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자신들의 교리 속에 미륵신앙을 자의적인 해석과 절충을 통하여 후천 개벽적인 신흥종교로 발전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보면 미륵신앙은 때로는 본래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자칭 미륵의 화신이라는 자들이 나타나 후천개벽을 이야기하며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도 나타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 십선도 身業으로서의 殺生 偸盜 邪淫과 業으로서의 妄語 兩舌 惡語 綺語, 意業으로 서의 貪心 疑心 癡心 등의 10惡을 여의고 열 가지 善行을 닦아 行을 하는 것으로 ① 불살생(不殺生)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② 불투도(不偸盜) :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③ 불사음(不邪淫) :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④ 불망어(不妄語) :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⑤ 불기어(不綺語) : 현란스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⑥ 불악구(不惡口) :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⑦ 불양설(不兩舌) :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⑧ 불탐욕(不貪欲) :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⑨ 부진에(不瞋) : 화를 내서신의 억겁을 참회함으로써 불국토를 열어 모두 다같이 성불하자는 기도와 참회의 신앙인 것이다. ⑩ 불사견(不邪見) :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 금산사의 설화 신라 성덕왕대. 전주 벽골군 산촌대정 마을(지금의 김제군 만경면 대정리) 어부 정씨 집에 오색구름과 서기가 서리면서 아기 울음 소리가 울렸다. 이 상서로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장차 크게 될 인물이 태어났다고 기뻐하며 축하했으니 이 아기가 바로 유명한 진표율사다. 아버지 진내말과 어머니 길보랑 사이에서 태어난 진표는 자라면서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율사가 11세 되던 어느 봄날. 친구들과 산에 놀러간 소년은 개구리 10마리를 잡아 끈에 꿰어 물속에 담가 두고는 그만 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다시 산에 가게 된 소년은 작년에 두고 온 개구리 생각이 나서 가보니 개구리 10마리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순간 소년의 가슴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개구리를 풀어 준 소년은 친구들과 떨어져 조용한 곳에서 생각에 잠겼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나서 죽는 것일까?」하는 생각에 골똘하다 문득 먼 산을 바라본 그는 그곳에 가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떻게 산을 넘고 내를 건넜는지 자신도 모르게 달려 어두워서 당도한 곳이 모악산 기슭에 자리한 금산사였다. 『날이 저물었는데 어디서 온 누구냐?』 『예, 대정리에 살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오게 됐습니다.』 『오, 전생의 인연지인 모양이구나. 그래 잘 왔다. 언젠가는 이곳의 주인이 되겠구나.』 노스님은 소년이 기특한 듯 쓰다듬어 주며 반겼다. 이튿날 집에 돌아오니 집에선 소년이 금산사에 다녀온 것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장정도 이틀이 걸리는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날부터 말이 적어지고 늘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저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공부하기 위해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어요.』 『어, 그래. 장한 생각이구나. 그러나 너는 아직 어리니 3년만 더 집에서 시중들다가 가도록 해라.』 비록 어부였지만 불심이 돈독한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을 막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해와 격려 속에 소년은 평생해야 할 효도를 3년간에 다하기 위해 열심히 부모님을 도우며 봉양했다.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두 자나 되는 큰 붕어를 낚아 왔다. 그 금붕어는 소년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아버지께 금붕어를 자신이 키우겠다며 팔지 못하게 부탁했다.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며 정성껏 돌봐주는 가운데 어느덧 3년이 흘러 소년은 집을 떠나게 됐다. 집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꿈에 웬 처녀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도련님, 이제 저도 인연이 다하여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디 출가하시거든 성불하시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간의 은혜에 보답키 위해 제가 살던 곳에 값진 것 하나 놓고 가니 그것을 팔면 부모님께서는 평생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마지막으로 금붕어에게 밥을 주고 작별 인사를 하려고 보니 붕어는 죽어 있었고 항아리 속에는 큰 진주가 하나 있었다. 소년은 부모님께 진주를 드리면서 간밤 꿈 이야기를 하고는 곧장 3년 전에 가 보았던 금산사로 떠났다. 덕 높으신 순제법사 문하에 들어간 소년은 3년간의 행자 수행을 거쳐 진표란 법명을 받았다. 『여기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과 점찰선악업보경占擦善惡業報經이 있으니 수지독송하고 정진하여 미륵부처님과 지장보살을 친견, 중생구제의 법을 널리 펴도록 해라. 법을 구함은 쉬운 일이 아니니 큰 인욕과 원을 갖고 공부해야 할 것이니라.』 『예, 명심하여 수행하겠습니다.』 미륵부처님과 지장보살 친견을 서원한 진표 스님은 그 길로 스승께 3배를 올린 후 운수행각에 나섰다. 선지식을 두루 만난 진표 스님은 공부에 자신이 생기자 찐쌀 2말을 가지고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갔다. 하루에 쌀 5홉을 양식으로 하고 그중 1홉은 절을 찾는 쥐에게 먹였다. 그렇게 3년간 뼈를 깎는 고행을 하면서 스승이 내리신 두 권의 경을 공부했으나 아무런 감응이 없자 스님은 스스로 절망했다. 진표 스님은 업장이 두터워 평생 공부해도 도를 얻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이 몸 버려 도를 얻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는 높은 절벽 위에서 업장 소멸을 기원하며 몸을 던졌다. 이때였다. 몸이 막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데 어디선가 홀연히 청의동자가 나타나 두 손으로 스님을 받아 절벽 위에 올려놓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진표 스님은 다시 생각을 고쳤다. 『이는 필시 부처님의 가피일 게다. 죽은 몸 다시 태어난 셈이니 더욱 참회 정진하리라.』 스님은 바위 위에서 오체투지로 절을 하며 3·7일 기도에 들어갔다. 3일이 지나자 진표 스님의 손과 무릎에선 피가 흘렀다. 7일이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금장을 흔들며 나타났다. 『오, 착하고 착하구나. 네 정성이 지극하니 내 친히 가사와 발우를 주노라.』 지장보살의 가호를 받은 진표 스님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원상태가 되었다. 스님은 이 같은 신령스런 감응에 감동하여 남은 기도 기간 동안 더욱 용맹정진 했다. 단식을 하여 허기진 상태였으나 날이 갈수록 정신은 또렷해지기만 했다. 3·7일 기도회향일. 진표 스님은 드디어 천안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때였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도솔천 대중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와 스님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계를 구하기 위해 이같이 신명을 다해 참회하다니 과연 장하구나! 이 간자를 줄 터이니 중생을 구제토록 해라.』 지장은 계본을 주고 미륵은 나무간자를 주었다. 간자에는 제8간자와 제9간자라 쓰여 있었다. 미륵보살이 말했다. 『이 간자는 내 새끼손가락 뼈로 만든 것으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유한 것이니라. 8자 본각은 성불종자를, 9자 시각은 청정비법을 뜻하니 이들을 점찰 방편에 사용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되느니라.』 수기를 준 미륵과 지장보살은 꽃비와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오색구름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수계를 받은 진표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금산사로 갔다. 때는 경덕왕 21년(762) 4월이었다. 스님은 금산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할 원력을 세웠다. 『옳지, 저 연못을 메꾸고 거기다 미륵전을 세우자.』경내를 둘러보던 스님은 사방 둘레가 1km나 되는 큰 호수에 눈이 머물렀다. 불사는 바로 시작됐다. 돌과 흙을 운반하여 못을 메꾸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바위를 굴려 넣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연못은 메꿔지려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더 이상 인력과 비용을 댈 수가 없게 되자 진표 스님은 지장보살과 미륵불의 가호 없이는 불사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곧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미륵부처님 그리고 지장보살님 제게 힘을 주옵소서.』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이었다. 미륵불과 지장보살은 진표 스님 앞에 강림하시어 이렇게 계시했다. 『이 호수는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바위나 흙으로 호수를 메꾸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숯으로 메꾸도록 해라. 또 이 호숫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는 사람에게는 만병통치의 영험을 내릴 것이니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고 불사를 원만 성취토록 해라.』 진표 스님은 신도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병이 있는 사람은 금산사 호숫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무슨 병이든 완치될 것입니다. 그 대신 반드시 숯을 양껏 가져다 호수에 넣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여야 합니다.』이 말을 들은 신도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스님이 백일기도를 마치고 나서 좀 이상해지셨나 봐요.』 『아녀, 절을 세울 수가 없으니까 이젠 별소릴 다하는군.』 그러던 어느 날, 경상도에서 한 문둥병자가 숯을 한 짐 지고 금산사에 도착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스님, 저는 기쁜 마음으로 미륵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왔습니다. 설사 스님께서 절을 세우기 위해 거짓말을 하셨다 하더라도 불사를 위해 하신 말씀이니 기꺼이 동참할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는 지고 온 숯을 호수에 넣고 발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이 호수의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 후 제 몸의 병이 낫지 않더라도 저는 스님이나 부처님을 원망치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의 이 작은 보시공덕으로 불사가 원만히 이뤄지고 다음 생에는 좋은 인연 받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친 문둥병자는 호숫물을 마시고 막 목욕을 끝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씻고 또 씻었다. 분명 못가에 서기가 피어오르면서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시더니 자기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 착하고 착하구나. 과연 장한 불심이로구나.』 미륵부처님은 문둥병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스님! 제 몸이 씻은 듯이 깨끗해졌습니다.』문둥병자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흉칙하던 몸이 말끔해지다니, 너무도 신통한 부처님의 가피였다. 『오! 미륵부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신도들은 잠시나마 진표 스님을 의심한 것을 참회하며 너도나도 숯을 지게에 가득히 지고 금산사 호수로 모여들었다.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금산사 호수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호숫물은 며칠 안가서 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수 주일이 지나자 호수는 아주 메워져 반듯한 터를 이루었다. 호수가 다 메꾸어지던 날 해질녘, 한 청년이 새로 다져진 절터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어인 일로 이곳에서 울고 있는가?』 『예, 저는 남해에서 어머님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호수가…….』 『참으로 장한 효심이로구나. 자네의 효성을 미륵부처님께서 알고 계실 테니 너무 상심치 말고 여기 연화좌대에 손을 얹고 기도해 보게나.』 진표 스님은 청년을 위로하면서 미륵부처님의 가피력을 함께 빌었다. 청년은 스님이 시키는 대로 쇠로 된 연화좌대에 손을 얹고서 모친의 병이 완쾌되길 간곡히 염원했다. 1주일 정진을 마친 청년은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고향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그 청년은 어머니를 모시고 금산사를 찾았다. 『스님, 부처님 가피로 건강을 회복하신 저의 어머님께서는 여생을 스님들 시중을 들며 불사를 돕고자 하십니다. 저의 어머님 청을 들어 공양주 보살로 허락하여 주십시오.』 진표 스님은 청년의 노모를 금산사 공양주로 있게 했다. 이 소문이 다시 곳곳에 퍼져 갖가지 소원을 지닌 사람들이 또 금산사로 모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연화좌대에 손을 얹고 소원을 기원하여 가피를 입었으나 불효자나 또는 옳지 않은 일을 기도한 사람들은 손이 좌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국에서 모여드는 신도 수는 날로 증가하여 금산사 불사는 쉽게 이뤄졌다. 혜공왕 2년 미륵전이 낙성됐고, 다시 2년 후에는 거대한 청동 미륵불상과 양대 보살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미륵불이 봉안되자 전국에서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친경 예경했다. 그리고는 금당 건립을 발원, 진표 스님은 776년 대적광전을 왕성하고 자신이 미륵부처님께 수기 받던 형상을 법당 남쪽 벽에 그려 봉안했다. 신도들이 기도하던 연화좌대는 30년 전까지 둥그런 기도처였는데 요즘은 붕괴될 우려가 있다 하여 미륵부처님 불단 밑으로 통로를 만들고 기도하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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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꽃과 솔나리 원문보기 글쓴이: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