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가에 우뚝 솟은 응봉(鷹峰 81m)이다.
그 정상이 중구 신당동, 용산구 한남동, 성동구 옥수동의 경계를 이룬다.
응봉을 정점으로 동쪽 방향으로 무학봉·큰매봉·작은매봉·달맞이봉 등이 이어졌다.
이 응봉을 매봉산이라고도 한다. 응봉은 산이 높지는 않으나 경치는 빼어났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나온 한북정맥은 대성산 백운산을 거쳐 북한산으로 솟구친다.
북한산에서 서남진한 용맥이 한양도성의 주산 백악에서 다시 양쪽으로 갈린다.
동쪽으로 고개를 튼 용맥은 좌청룡으로 동남진(東南進)해 응봉 낙산을 거처 동대문 청계천으로 내달린다.
백악에서 오른쪽 서쪽 급경사를 타고 내닫는 용맥은 자하문을 지나 인왕산으로 치솟는다.
그 맥세는 인왕산에서 남쪽으로 달리면서 한양도성을 감싸고 흐른다.
그리고 남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솟아났다. 남산에서 숨을 고르고 남동진한다,
그 지맥은 남산에서 남동진으로 내닫다 응봉(鷹峰)에서 생기를 쏟아낸다.
그 옛날에는 남산에서 대현산 금호산 응봉산 등을 하나의 줄기로 응봉으로 불리었다.
도시개발로 인하여 지금은 응봉산, 매봉산, 금호산, 대현산, 대현산배수지 등 5개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응봉산 그 기슭은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한강과 중랑천을 대하고 있는 이곳이 그 유명한 입석포(立石浦)이다.
이곳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모양을 하고 있다.
갈증을 견디지 못한 말이 급히 한강으로 뛰어든다.
이곳은 뒤로는 응봉이 솟고, 아래에는 큰돌이 우뚝 서 금잉어를 낚던 곳이다.
동남방에는 한강이 넓게 들어와 눈앞이 광활하고, 강 건너에는 압구정이 아득히 보여
선비들이 마음을 쉬고 휴식하던 장소로 사랑을 받았다.
"입석포터(立石浦址)
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입석포는 한천변의 큰 바위들이 사람처럼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돌개라 불리기도 하였다. 넓은 평야와 강 가운데 저자도를
포함하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은 조선조 문인 서거정, 강희맹 등의 예찬 시로도 유명하다."
입석포(立石浦)가 있었던 자리임을 밝히는 표석의 내용을 옮긴 글이다.
응봉 기슭의 입석포(立石浦)이다.
한강변의 큰 바위들이 사람처럼 서 있다고 해서 입석포라고 했다.
우리말로는 선돌개라 하였다. 입석포는 수려한 경치로 인하여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들었다.
입석포 바로 앞에는 저자도(楮子島)라는 섬이 있어 유람객이 오고 가기도 하였다.
입석포를 즐겨 찾은 인물로는 조선 초 문인인 서거정(徐居正)과 강희맹(姜希孟) 등이 있으며,
이들은 입석포를 예찬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입석포의 수려한 경치와 천연의 낚시터로서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성종 때에 한양을 대표하던 열 가지 볼거리인 ‘한양십영(漢陽十詠)’ 안에
입석조어(立石釣魚; 한강 입석포에서의 낚시)가 당당히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많이 변했다.입석포 그 자리에는 성수대교가 놓였다.
도시개발 한강개발 등으로 그 아름다운 입석포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올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참으로 푹한 겨울이었다. 느닷없이 코로나19가 덥쳐 온세상이 난리였다.
겨울이 춥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온세상이 북새통이었다.
그래도 봄은 찾아왔다. 서울에서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곳이 응봉이다.
예년보다 봄꽃이 일찍 피었다.
보통 4월 초 3월 말에 응봉은 개나리꽃으로 샛노랗게 변했다.
그러나 올해는 일주일에서 보름이나 일찍 개나리꽃이 만개했다.
3월 23일 찾았다. 온통 개나리꽃으로 응봉이 노랗게 치장했다.
응봉 정상에 정자가 있다.
현판은 '鷹峯山亭子'로 되어있다.
응봉을 중심으로 국왕의 사냥터로서 주목을 끌던 곳이었다.
여기서 날린 화살이 뚝섬 도요연에 떨어졌다.그래서 살곶이벌이라고 했단다.
응봉 기슭에는 매 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의정부에서 남쪽으로 흘러온 중랑천이다. 원래 이 하천은 큰내 한천(漢川)으로 불리었다.
태종 때 중랑천으로 그 이름을 바꾼다. 효심이 강한 처녀 중랑의 아버지 사랑이야기에 감동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중랑이의 내 중랑천으로 고쳤다고는 이야기이다.
중랑천은 서출동류의 청계천을 만나 입석포로 흘러들고 있다.거기서 한강을 만난다.
한강의 대표적인 '동호의 섬' 저자도(楮子島)이다.
그 저자도(楮子島)는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저자도는 조선시대에 촌락까지 형성됐던 섬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모래와 자갈만이 쌓이게 되면서 무인도로 변했다.
이 섬은 동서로 2000m, 남북으로 885m, 총면적 118만㎡(36만평)의 섬으로 1970년대까지 존재했다.
저자도는 한성백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덕무는 저자도에 온조왕의 옛 성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낙랑을 공격할 때 아차산 아래를 지났다는 기록이 있다.
아차산과 가까운 저자도에 온조의 군대가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선 초기부터 왕실 소유의 섬으로 왕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저자도에서 양화도까지 선유(船遊)를 베풀었다.
기우제를 올리고 출정하는 병사들의 전송 행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고려 때부터 문사들의 별서가 있었던 큰 규모의 섬이었다.
저자도는 고려 말에는 정승 한종유의 소유였다. 조선 초에는 태조의 이복형제인 의안대군 이화의 소유였다.
세종 대에는 정의공주에게 하사하고, 공주는 남편 안맹담에게 주었다. 다시 막내아들 안빈세에게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사대부 자제들의 학습처가 되었으며 연산군, 성조, 중종 때는 군신의 유희처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까지는 명망 있는 문사들의 은둔처가 되었다.
광해군 때 구용, 효종 때 허걱, 숙종 때 홍득우, 이세백, 김창흡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김창흡은 ‘현성(玄城)’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남한산을 오가며 풍류를 즐겼다.
근세에는 개화파 금릉위 박영효가 이 섬에 정자를 지어 동지들과 자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68년경에 공유수면매립사업이 추진되면서 이 섬은 1972년 완전히 사라졌다.
이 새로운 땅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그 아파트 건설 때는 이 섬의 모래를 사용하였다.
2010년에는 사라진 저자도 그 자리에 모래와 돌 흙이 쌓였다.
"저자도가 살아나고 있다!"
주민들과 관계기관에서 저자도 회복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언론의 보도로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갑자기 이 일대 준설사업을 했다. 그로부터 저자도 회복은 자취를 감추었다.
응봉산 서쪽 금호동은 무수막에서 유래한다.
무수막은 수철리(水鐵里)로, 이를 다시 금호동(金湖洞)으로 바뀐다.
금(金)은 철(鐵)에서 나오고 호(湖)는 수(水)에서 인용된 것이다.
원래 이곳은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이곳에 무쇠를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해서 국가에 바치거나
시전에 내다 파는 야장(冶匠)들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대장간이 많이 몰렸다.
그래서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을 수철리(水鐵里)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왕십리에 채소장수가 유명하듯 금호동에 무쇠골 솥장수도 유명했다.
조선시대 이곳 마을 이름은 수철리였다.
일제강점기 1936년 금호정(金湖町)으로 바뀌었고 1946년 금호동으로 개명되었다.
남산에 동쪽으로 달려온 한 산줄기는 극동아파트를 끼고 독서당길을 따라 흐른다.
그 맥세는 옥수터널 위를 지나 옥수 전철역 동쪽 83m의 달맞이봉으로 이어져 또다른 경승지를 이룬다.
달맞이봉은 옥수동 미타사와 현대아파트가 있는 뒷산이다.
서양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이다. 그곳에서는 태양을 맞이하는 '선텐(Suntan)'을 즐긴다.
한국은 달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돋보인다. 달빛을 즐기는 달맞이놀이 '문텐(Moontan)'이 발달한 한국이다.
예전부터 정월 보름에 이곳 주민들이 이 동산에 올라기 달을 맞이하였다. 일찍이 그들은 문텐을 즐겼다.
그래서 이 산봉우리를 달맞이봉으로 명명하였다.
한강변에 우뚝선 바위산 달맞이봉이다.
이 달맞이봉은 한강을 가깝게 바라볼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이 산봉우리의 강변 쪽은 경관이 수려하다. 그러나 가파르고 위험한다.
두 곳의 계단길이 있다. 그곳이 올라가기가 보다 쉽고 또 안전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