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티카16호 양효숙 수필>
쉰 살
비로소 쉬어도 된다는 의미의 쉰 살일까. 숨을 다시 한 번 몰아쉬며 나아간다는 숨 살로도 읽힌다. 한 살은 한 해를 살았다는 것이고 그 살마다 사람살이가 숨어있다. 두 번째 스무 살인 마흔이 지나고 찾아오는 어느 한 지점인 채, 쉼표로 다가오는 쉰 살! 오십 살이라 하지 않고 쉰 살이라 부르니 뭔가 다른 느낌이다. 쉼표 찍고 다시 나아가라는 추진력마저 내재되니 백세 시대에 그 의미가 빛난다. 누구나 먹는 나이가 그야말로 아니기에.
나이를 띄어쓰기 해보면 ‘나’이다. 묻혔던 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나이를 주도적으로 먹고 살면 제 나이에 당당하다. 물건 깎듯이 깎을 필요도 없고 굳이 만으로 눌러 담을 필요도 없다. 지나온 나이와 함께 앞으로 살아갈 자신과도 깎듯이가 아닌 깍듯이 대면하면서.
스무 살보다 더 좋은 쉰 살이기에 스무 살 젊음과도 바꾸지 않을 테다. 이미 살아봤고 지나간 스무 살보다는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나날이 매력 있다. 스물의 스물을 거쳐 완성된 완성도가 이후의 미완성마저 불러들인다. 쉰 살 안에는 지나온 과거만 있는 게 아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함께 들어있다. 쉰 살을 거쳐 간 엄마 인생도 다시 살아보고 까마득하게만 바라봤던 숫자 감각을 되살린다.
연말연시에 떡국 한 그릇 먹고 미리 나이 진급을 자축했더니 강의 기회가 내게로 왔다. 경기도의회 대회의실이 무대다. 도의원들 앞이 아닌 같은 직종 사서들 앞에 선다. 그야말로 오십 년 준비한 강의를 하려한다. 인생 이력서를 마이크 잡고 풀어갈 생각하니 진땀나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힐링이 주제라니 그에 맞는 이야기로 ‘성장열쇠, 공감능력’이라 정하고 자기 성찰 단계를 거친다. 지리산 산수유마을에서 태어나 이 자리에 있기까지의 성장담이 진솔하게 들춰지겠지. 죽을 때까지 사람은 성장하고 누군가와 공감해야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성장하는데 따라붙는 통증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 통증에 대한 얘기가 오갈 때마다 서로 공감하겠지.
함께 느낀다는 게 뭘까. 혼밥과 혼술을 하는 이들에겐 공감과 공감능력이 절실할지도 모른다. 혼자 해야만 하는 일도 있고 여럿이 어우러져야할 때도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 불안하고 불편한 경우도 있다. 한 집에서 같이 살아도 하나의 집이 아닌 여러 집으로 또 다시 나뉜다. 각자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때론 섬이 된다. 함께 느끼는 일이 점점 도태돼 여러 능력 가운데 하나로 공감능력은 부각된다.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은 홀로 독(獨)이 또 다른 독(毒)을 뿜어내는 게 아닐까 염려하면서.
공감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이 곧 사랑이기에. 한자 함께 공(共)을 손 글씨로 써 봤더니 다가오는 게 있다. 수평적인 관계와 수직적인 관계가 보이고 그 안에서 두 개의 느낌표를 발견한다.
공감하는 게 여러 능력 중 하나가 아니라 최고의 능력으로 다가온다. 공감능력이라 부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사람과 사물을 아우르는 품이 남다르고 만날수록 기분 좋고 새로운 사람. 스스로 공감력이 뛰어나 겪는 불편함도 때론 있다고 말하는 그녀가 좋다. 나보다 더 나를 공감해주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내 얘길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는데 스스로도 어쩌지를 못하는 경우라니. 쉰 살을 이미 겪은 그녀 앞에서 풀어놓을 이야기가 많다.
이 만큼 살아보니 사는 게 이렇더라는 말을 해도 좋은 나이가 쉰 살이지 않을까. 주제넘지 않게 다가오는 그 담담한 이야기에 그저 공감하면 될 뿐. 뒤돌아보고 다시 되돌아가도 그렇게밖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공유하면 되겠지. 생각의 성장판을 열어둔 채 살다보면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붙으니 성공만을 향해 가는 이들과 다른 행보를 해야 하지 않을까 되물으면서.
때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가운데 잘못 해석하기 좋은 나이기도 하다. ‘어, 어?’반복하며 앞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 달라 해도 밉지 않다. 장례식장 간판이 재래시장으로 잘못 읽혀도 웃고 넘어가기 좋은 나이다. 실제 장례식장을 재래시장처럼 드나들며 내 돌아갈 곳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기이기도 하고.
제 나이를 사랑하고 나이 듦에 대해 자축까지 할 정도의 자존감이 필요하다. 하나의 터닝포인트를 다시 만들고 싶은 적당한 욕망 읽기도 병행되면 좋고. 나이는 깎아야 맛이 아니고 들어야 제 맛이라고 넉살좋게 말하며 웃고 넘길 나이 쉰 살.
며칠 전 카카오톡으로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 이번 강의에 꼭 오셔서 응원해 주시면 ‘아니 오시는 것 자체가 응원이네요’문맥상 오해의 여지가 있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분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답글 없이 떠있는 그 말을 뒤늦게라도 발견하고 수습해서 다행이다. 아니 오시는 것 자체가 응원이라니! 아니, 오시는 것 자체가 응원이고 힘이 된다는 뜻인데 쉼표 하나가 이렇게 큰일을 해내는구나. 우리 또래의 귀여운 실수라며 내 마음을 다 아니까 죄송 안 해도 된다는 그녀와 나의 나이 쉰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