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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행선지 |
세부 일정 |
비 고 |
2015,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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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 |
반포현대증권 앞 |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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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단내 성가정 성지 |
십자가의 길 |
도보순례 |
10:30 |
단내성지 |
미사 참례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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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미사 |
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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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
미사참례 끝 |
기도와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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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13:00 |
성지식당 이동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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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15:30 |
순례길 걷기 |
예수성심상- 굴바위- 검은바위 |
약5.2km |
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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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걷기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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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
단내 성가정성지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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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하남 은 고개 |
형제적 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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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반포 |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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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신청자. 강지양 글라라 유영제 마틸다 김정란 마틸다 김종식 파스칼 신명희 필로메나 장은기 데레사 회계 김정자 아네스 유경숙 릿다 안동훈 세베리노 진행 김애경 빌린다 이영주 펠리지아 김영선 세실리아 김금중 크리스티나 박순옥 수산나 김순분 프란치스카 이향임 체칠리아 황영진 세례자요한 정경숙 실비아 장인숙 안젤라 유남수 헬레나 박종옥 요한나 성인신 모니카 김종숙 안젤라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로를 따라 조성된 오솔길을 따라 들어오면 오래된 수도원 같은 느낌의 성지가 나타납니다. 앞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시냇물이 흐르고 뒤로는 울창한 숲의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성가정 성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성지입니다. 성가정 성지에는 숲이 울창하면서도 인적이 없는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 5.2km의 순례코스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예수성심상이 있는 전망 좋은 와룡산 정상에서는 이문우 성인의 고향과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 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으며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박해받는 신자들의 은신처였던 검은바위와 굴바위에서는 박해를 피해 숨어살았던 신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는 성가정 성지의 순례코스는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피정하는 마음으로 순례하기에 더없이 좋은 순례코스입니다.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정은 바오로의 시신이 안장된 곳입니다. 성지 개발 위원회에서는 순교자 정은과 그 가족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기리기 위해 이곳을 개발하고 1987년 9월 15일에 수원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의 집전으로 축성된 곳입니다.
이천 지역의 천주교는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이 이존창과 함께 권철신의 문하생이 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이 그 제자들과 함께 강학회를 여는데 여기에 이총억이 참석하였습니다. 이기양은 이익의 제자이자 초기의 천주교 신자였던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친밀한 사이였는데, 45세 때인 1788년부터는 외가가 있던 이곳 단내에 와서 살았습니다. 이기양의 외사촌이며 정은의 사촌 형인 정섭은 1785년에 명례방(지금의 명동) 사건이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된 후 동료와 함께 형조를 찾아가서 성성과 교회 서적을 돌려달라고 항의했던 유명한 분입니다. 이후 정섭은 윤유일(바오로) 등과 교류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광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종형 정옥 또한 이 박해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났으나, 매를 심하게 맞은 탓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 길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단내는 한국 교회 창건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신앙으로 고수해 온 참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입니다. 한국교회 창건기의 교우촌을 찾아가 보면, 초기 신자들의 후손은 대부분 배교하고, 그 마을은 신자 한 사람 없는 외교인촌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러나 단내는 그렇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면면하게 신앙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단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한 표본적인 구교우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신품을 받고 1845년 10월 국내로 입국한 후 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10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짧은 기간 사목활동을 하셨고 사목활동지 또한 그리 많지 않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목방문을 한 곳으로는 용인, 양지터골, 은다라니, 이천의 동산밑과 단내, 시어골 등이 있습니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성사를 주러 다니실 때 항상 밤에 다니셨습니다. 성가정 성지 앞마을인 동산리 교우촌에 먼저 들러 성사를 주고 밤이 되면 이곳 단내로 넘어와 정은 바오로와 그 가족들을 만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정 생원, 정 생원”하며 대문밖에서 정은 바오로를 찾으셨습니다. 정은 바오로 식구들은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고 있는데 그런 그들에게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시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라고 복사가 말을 하면 혹시나 이웃이 알게 될까 쉬쉬하며 신부님을 방으로 모시고 성사 받을 준비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준비는 간단하게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숨겨놓았던 십자가를 정성되이 모셔 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님께서 단내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시고 ‘골배마실’(현 양지 본당)에 들러 ‘은이공소’까지 가시면 날이 새었다고 합니다. 떠나시는 신부님을 전송하기 위해 정은 바오로와 그 가족들이 밖으로 나오면 신부님께서 진심으로 만류하시며 “내가 이렇게 밤중에 다니는 것은 나 자신보다도 교우들에 대한 외인의 이목 때문이니 부디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으시오.”라고 하셨답니다. 그래도 얼마쯤 나가보겠다는 생각에 산모퉁이까지 쫓아 가보지만 신부님과 복사는 벌써 얼마쯤이나 가셨는지 찾을 수 없고 그저 섭섭한 마음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성가정 성지에는 그 당시에 김대건 신부님께서 걸으셨던 길이 진입로로 조성되어 있고, 대성당과 소성당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정은 바오로는 신유박해가 끝난지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났습니다. 천주교 신자였던 사촌형(이기양, 정섭, 정옥)들이 유배되거나 사망한 터였으므로 그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하였습니다. 성장한 뒤 자신의 등창을 치료해 주던 조사옥이라는 의원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그가 입교한 뒤 모친인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정은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생활하던 중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 신자로 고발되었고 음력 11월 13일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정은 바오로는 “잡혔으면 가야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겠는가.”하시며 태연히 떠나셨다고 합니다. 정은 바오로가 잡혀가시자 재종손인 정양묵 베드로도 “나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대부(代父)를 따라 치명하러 왔으니 나도 죽여주시오.” 하며 스스로 광주 영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음력 12월 8일 여러 교우와 함께 백지사(白紙死: 죄인의 손을 뒤로 묵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서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이 막히게 하여 죽이는 것이다. 당시 천주교인을 처형하는 데에는 주로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 칼로 목을 베 죽이는 참형(斬刑), 목을 매 죽이는 교수형(絞首刑) 등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에는 너무 많은 천주교인을 잡아 죽이게 되므로, 포졸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진저리를 내게 되어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발라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가 유행하였었다. 곧, 사람을 죽이는데 염증을 느낀 포청의 형졸들이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백지사였던 것이다.)로 순교합니다. 이렇게 순교한 교우들의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東門) 밖 개울가에 버렸는데, 수십일 혹은 수개월 동안 버려져 있었기에 많이 상한 시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은 바오로가 광주 영문에 잡혀가시자마자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포졸들은 남아있는 식구를 잡으려고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결국, 남은 식구들은 눈 덮인 산으로 피신해, ‘검은바위’나 ‘옥시울 양지골’, 그리고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후손들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장소인 ‘굴바위’에서 은신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년놈들을 내쫓든지 아니면 모두 잡혀가 몰살을 하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동네가 시끄러워서 살 수 있나. 그 년놈들을 집에다 숨겨주고 밥을 주는 놈이 누구냐? 그놈부터 내쫓아야겠다.”라고 악담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정은 바오로가 치명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 일동 방지거와 수동 필립보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버려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달라고 매부 박서방의 8촌 박선여에게 부탁을 합니다. 생사(生死)가 왔다갔다하는 일이기에 고민 끝에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박선여는 낮에 동문 밖으로 갑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바위 밑에 굴러떨어져 있는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풀을 베어 덮고 큰 돌로 표시를 해 둡니다. 밤이 되어 아들 둘은 낮에 표시해둔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들쳐메고 이곳 단내에 와 산소에 모셨습니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고향 단내를 떠나 30여 년을 산속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00년이 되어서야 다시 고향 단내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함께 치명하셨던 정양묵 베드로는 그 시신을 찾지 못해 후에 성지를 조성하면서 남한산성 동문 밖 흙을 거둬 정은 바오로 산소 옆에 모셨습니다. 성가정 성지에는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 묘소와 정은 바오로 가족들이 숨어지내던 ‘검은바위’, ‘옥시울 양지골’, ‘굴바위’가 그대로 남아있어 순례길을 따라 과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피신처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 ‘정양묵 베드로’는 ‘정 베드로’라고만 알려져 있었을 뿐 그 이름을 알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성가정 성지 전담 신부(이정철 바오로)가 ‘광주부유영장계등록(廣州府留營狀啓謄錄)’과 ‘동래정씨창원공파보(東萊鄭氏昌原公派譜)’의 비교 연구를 통해 146년만인 2012년 봄에 정 베드로의 이름이 양묵(亮默)임을 밝혀냈다.
* 순교일에 관하여도 날짜의 혼동이 있어왔다. ‘검은바위(정운택 안드레아 신부, 유림문화사, 초판1977/1999, p20-22.)’에는 잡히신 날짜가 “1866년 12월 2일(음력 11월 3일)”이며 순교일이 “12월 27일(음력 12월 3일)”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여기에 나와 있는 양력과 음력이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순교자 윤유일, 정은 평전(하성래, 황석두루가서원, 1988, p286.)’에는 잡히신 날짜가 “1866년 11월 13일”에 순교일이 “12월 8일(양력 12월 27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음력과 양력이 맞지 않는다. 또한, 정운택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엮으신 ‘검은바위’의 날짜와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형옥과 천주교 신자들의 옥살이(교회사학, 원재연, 수원교회사연구소, 2004, p263)’에는 순교일이 12월 18일로 나와 있다. 이는 앞서 나온 ‘검은 바위’와 ‘순교자 윤유일, 정은 평전’과도 맞지 않는 날짜이다. 게다가 성가정 성지에 있는 십자가 비석도 순교일이 12월 27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쓰여진 정규량 레오 신부님(1882-1952)의 ‘단내정씨가사’에도 잡히신 날짜가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2일)로 나오며 이 또한 음력과 양력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순교일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오는데 처음에는 12월 18일(양력 12월 27일)로 두 번째는 음력 12월 8일로 음력과 양력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교일도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자면 일단 양력 1866년 12월 27일은 음력으로 11월 21일이 된다. 그러나 이 날짜는 원사료(原史料)인 ‘단내정씨가사’에 나온 날짜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양력 12월 27일은 잘못된 날짜이다. 다음으로 원사료인 ‘단내정씨가사’에서 서로 다른 두 날짜(음력 12월 18일과 12월 8일)가 나오는데 내용 중 잡히신 지 25일 만에 순교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잡히신 날짜가 음력 11월 13일이므로 순교일은 음력 12월 18일이 아닌 12월 8일이 맞는 날짜다.
첫댓글 김종숙안젤라 신청합니다
유남수참석입니다
박종옥 요한나 참석합니다
점심 식사는 성지에서 해결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