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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사는 인생 시편116:12 축복하는 명절2007.2.18
설날을 맞이하여 하나님 아버지앞에 예배하러 나오신 성도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올해는 성도여러분과 가정에 평강과 형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저께 금요심야기도회 시간에는 몇가지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를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EBS방송에서 도올 김용욱씨의 요한복음 강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영방송에서 특종종교의 내용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방송한적은 이 프로그램이 처음입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장안의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도올의 강의면 프로그램이 흥행이 있음을 알고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복음전파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복음전파의 역효과일뿐 아니라 한국교회와 신학자는 물론이고 성경의 근본까지도 흔들고 있는 김용욱씨를 보면서 기독교의 깡패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 예로 성경의 구약을 페기처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오기전의 약속을 기록한 책은 지금 우리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거에요. 기독교 이단아입니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부흥하려면 자기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도울 김용욱씨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면 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했던 사울이 예수를 만나 이방인의 증인으로 쓰임받고 오늘날 신약성경의 절반이 넘는 성경을 기록으로 남긴 사도바울처럼 도울도 변화시켜 사도바울처럼 쓰임받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환경속에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좌절하고 절망한 나머지 그 귀한 생명을 끊는 일이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도 서울 강동구에 살았던 한 어머니는 한복가게를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그 상가 근방에선 장사가 안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언제나 환하게 웃고 밝은 분으로 아주 소문난 분이십니다. 가끔 가게문을 닫고 기도원에를 다녀올 정도로 신심도 좋은 분이었습니다. 올해는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아주 유명한 미술대학에 합격을 했어요. 남들은 들어가기도 힘든 대학인데,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 등록금! 아주 비싼 등록금 돈이 문제였습니다. 미대는 등록금이 다른 대학보다 높지요? 600만원이나 되는 등록금을 구하려고 은행에 알아보고 동사무소에 알아보았지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딸의 등록금도 마련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과 가난을 뒤로하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유서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 힘이들고 날아가고싶다. 딸아! 미안하다.” 주위사람들의말이 언제나 환하고 웃는 얼굴에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끔 가게문을 닫고 기도원을 다녀올 정도로 신앙도 좋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 신앙도 물질의 어려움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방법이 있는데 말입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과 백성들을 위해 이 정부와 사회, 부한자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을 하고있었단 말인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혹시라도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말로 할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을때,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예수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교회로 찾아주세요. 목사인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이 시절들을 함께해야합니다. 함께 가야합니다. 교회가 돕겠습니다. 교회와 목사와 온 성도가 함께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설날아침이면 부지런히 옷을 챙겨입고 윗동네에서 아랫동네까지 훝으고 다닙니다. 일년에 한 번씩 있는 공식적인 용돈농사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일년농사이었지요. 아는 집이든 모르는 집이든 저에게는 상관없었습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는 넙죽 인사를 하고는 구씨네집 막내아들입니다 하고는 세배를 하면 아무튼 세뱃돈을 주셨으니까요. 저에게 오직관심은 세뱃돈이었습니다. 집이 으리으리하다고 세뱃돈이 많은 것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게 사는 이웃집이었어도 세뱃돈만큼은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세배를 하러 간 집에서 식혜도 주고 과일도 주고 음식을 주시느데, 저에게는 오로지 세뱃돈이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만해도 절로 신나고 설날의 기분이 나지요.
에릭 프롬이라고 하는 분이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인간을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소유 (to hav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존재 (To b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에릭 프롬은 전자를 소유형의 인간(having mode)이라고 정의하였고 후자를 존재형의 인간(Being mode)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현대사회는 점점 더 소유형의 사회로 치닷고 있는 듯 싶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교육도 점점 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기술을 배워 주는 쪽으로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너무 바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과 법에 대하여는 정말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 우를 그것도 아주 큰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유형의 인간은 철저히 물질중심적입니다. 그러면 소유중심의 인간은 무엇을 가장중요시하는 것인가?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알고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전능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은 특별히, 특별히 지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옷을 만들어 입고, 장갑과 양말과 구두를 만들어 신고, 요리를 해먹고, 집을 짓고, 자전거와 자동차와 배와 비행기를 타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만 그렇게 지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생김새도 다릅니다. 이렇게 걸어 다니며 살고, 귀가 밝아서 눈을 감고 들어도 앞에서 나는 소리인지 뒤에서 나는 소리인지 압니다. 전화기로 미국에 있는 사람의 소리를 들어도 그 사람이 동생인지, 제수씨인지, 조카인지 압니다. 눈도 기가 막힙니다. 눈꺼풀이 자동으로 깜빡깜빡해서 보배로운 눈을 보호해주고 티끌이나 먼지가 들어오면 눈물이 동원되어 밀어내줍니다.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도 눈이 자동으로 운동을 하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아침에 일어나면 눈곱이 끼어 있는 것입니다. 또 밥을 먹든 고기를 먹든 생선을 먹든 사과를 먹든 우리가 먹는 것이 다 소화되어 온 혈관을 통해 구석구석 머리끝까지 영양이 전달됩니다. 우리가 마신 산소도 온 몸에 배달됩니다. 그러니 최고의 배달부는 혈관입니다. 그리고 기둥과 서까래 같은 뼈대가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신경 조직은 또 얼마나 예민한지, 왼손 등에 모기 한 마리가 붙으면 왼손의 신경이 꿈틀하면서 사령관인 두뇌에 보고합니다. 사령관님, 불순분자가 왼손 북방 몇 도 지점에 침범했습니다. 그러면 사령관 두되가 눈에게 명령합니다. 눈아, 확인해 보아라. 눈이 확인합니다. 왼손 몇 도 지점에 모기 한 마리가 침범했습니다. 그러면 보고를 받은 사령관이 또 오른손에게 명령합니다. 오른손아, 번개같이 그놈을 처치해라. 오른손이 처치하고 나서 보고합니다. 처치했습니다. 완료했습니다. 그러면 두뇌는 또 눈에게 명령합니다. 눈아, 성공적으로 처치했는지 확인해라. 눈이 확인합니다. 죽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끝나는 것이 18분의 1초라고 합니다. 째깍이 1초인데, 손등에 붙은 모기 한 마리를 확인하고 완전히 처치하는데 18분의 1초가 걸리는 것입니다. 18분의 1초 만에 그 모든 일이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 자동 시스템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그냥 누립니다. 밥, 고구마, 생선, 불고기 같은 것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꿀을 즐기며 사는 복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주신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이것만 해도 감사한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특별한 은혜, 특별한 은총을 누립니다. 이 은혜는 정말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여집사님의 시댁은 가부장적인 집안이었던지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이 여집사님이 딸만 하나 낳은 겁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못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손주만 기다리는 시어머니의 불같은 성화가 얼마나 심했던지!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눈물로 기도를 시작한 겁니다. 억울해서도 울고! 또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도 아들만 잘 낳던데 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울고! 한편으로는 자신도 아들을 하나 갖고싶은 마음도 간절하고해서 눈물고 아들 하나 달라고 울고! 사무엘상1장에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던 한나처럼 기도했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시작한지 7년이 지나가도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집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한나의 기도의 응답스토리를 마음속에 품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어느 날 임신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집안에 경사가 났습니다. 그렇게도 구박하고 괄시하던 시어머니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 며느리! 장하다! 장해! 집안에서 최고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낳은지 6개월이 지나면서 호흡을 고루하지 못하더니 몸이 파리해지면서 결국 7개월만에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이 몽땅 날라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이 장례를 치르고 세상 살맛이 하나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숨만 쉬는 엄마에게 옆에 앉아있던 하나 밖에 없는 8살짜리 딸아이가 “엄마! 동생 지원이도 엄마가 기도해서 낳았잖아! 내 생각에는 지원이가 천국가서 건강한 남자동생 하나를 보내줄꺼야! 그렇니까 엄마! 다시 기도하면 되지 않아?” 그러더랍니다. 그 말을 듣는데 딸 아이에게 엄마로서 얼마나 부끄럽고 눈물이 나던지! 그 여집사님에 어린 딸아이의 말 한마디는 은혜 그자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주어진 모든 환경이 은혜입니다. 은혜의 눈과 은혜의 관점으로 보면 볼수록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울면서, “그래 네 딸 말이 맞네! 우리 딸이 엄마보다 믿음이 더 좋네!” 그래 그 다음 날부터 딸아이 말마따나 믿음으로 다시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답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여 3년이 지나 임신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이 집사님에게 임신이 되었고 건강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같은 출산으로 집사님의 시댁식구들이 몽땅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그래서 아들의 이름도 경신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와하며 살라고 경! 믿음으로 살라고 신! 그래서 경신이라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의 믿음은 첫 번째 기적을 경험하였고 엄마의 믿음은 어린 딸에게전수되어 동생을 잃고 괴로워하는 엄마에게 믿음의 딸이 되어 믿음으로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여 두 번째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홍산교회도 믿음의 고백으로 은혜를 경험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오늘같은 설날이라고하는 명절이 있는 것이 참으로 귀한 절기입니다. 오늘같은 날이라도 있기에 서로 흩어져있던 부모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형제의 우애를 다지고 서로에 대한 은혜를 나눌수 있는 시간이 있음은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을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날 세배할때에도 우리는 현대의. 소유적이고 물질적인 인사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만 합니다.
자칫 인사말을 잘못주고받으면 설날 아침에 어르신들에게 세배하면서 설의 즐거운 마음에 상처가 될수도 있고 열받고 스트레스가 될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배하러 오시기전 아침 설세배를 나누고 오셨을텐데... 무슨 덕담을 나누셨나요?
설명절 인사할때도 공부하는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주면서 으레히 이렇게 말들을 하지요. “야! 이번에는 너 놀지만 말고 성적좀 올려라! 그래가지고는 대학에 들어가기 힘들다! 이 얘비가 무슨 낙이 있겠니? 너 잘되라고 하는 고생인데... ” 물론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하고픈 말일수도 있지요. 그러나 설날 인사하는 날엔 아들에게 축복하는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하면 기분나지 않겠어요? 예를들면, 부담없는 편안한 말로 “아들아!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나는 너를 믿는다! 이 얘비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믿음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거란다!”
저희 아버님 살아계실 때 설명절때의 일입니다. 저희 7남매가 명절을 맞아 아버님 집에 다 모였습니다. 아침에 이제 손주손녀들이 한꺼번에 세배를 합니다. 큰집 손주들부터 세배를 시작합니다. 셋째 형님의 아이들이 할아버지에게 새배를 하고는 아버님께서 준비하신 샛빠도 돈을 세뱃돈으로 손주 두놈에게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놈들아! 공부잘해야한다”하니까 그 옆에서 있던 셋째형님이 하시는 말! “아버님! 이놈들이요! 공부는요! 맨날 놀기만하구요 정말 큰일났어요. 이놈들한테 세뱃돈은 무슨 세뱃돈을 주셔요.”아니! 그날만이라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것도 여러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쪽주는 말을 해야겠어요?
공부만 말하고 성적을 지적하는 것도 결국은 존재에 관심하기보다는 물질, 소유에 관심하는것 아니겠어요?
설에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지요.
시집장가 못간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
장가가려면 직장은 잡아야지? 네가 벌써 그렇게 나이가 들었냐?
시집은 언제갈래? 너도 많이 늙었다!
야! 전에 우리 앞집 살던 김씨네 아들은 이번에 대기업에 입사했다더라!
윗층의 박선생댁 대학교 졸업한 딸은 이번에 그렇게 힘든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네.
듣는 아들! 딸! 열받지요. 비교하지 말아야지요.
거! 너도 알지? 그 녀석! 재주는 있어서 예쁜 여자만나 장가들었어?
너는 언제 갈려고 그러냐? 공부를 못하면 연애하는 재주라도 있어야지? 쯧쯧
며느리에게 면박주는 말
좀 일찍 출발하지 그랬냐? 벌써 가려구 구려냐? 네 남편 피곤하게 친정엘 뭐하러 가냐?
반찬이 에게 뭐냐? 왜 이리 짜냐? 네집안은 소금 칠줄도 모른다냐?
그래도 없는 살림에 사과 한 상자를 사고갔는데...
박스를 열어보는 시어머니!
“야! 사과가 뭐 이렇게 골았다냐?”“뭐 하나를 사려면 덤벙대지 말고 해야지!”
“그래가지고 어떻게 살림을하냐?”
며느리가 주든 아들이 주든 용돈든 봉투를 건네받으면
뭘 또 아들내외 보는 앞에서 봉투를 열어봐요.
아무 말도 안하고 뜹뜨름한 표정을 지어요.
그럴때, 얘들아! 어려운 살림에 고맙구나! 하면 얼마나 좋아요.
야! 이 것가지고는 이번달 기름값도 모자란다.
부부간에 트집잡기하는 말
그래도 우리 어머니 시집살이에 비하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부모만 부모야?
설 보너스는 얼마나 받았어? 옆집 아저씨는 이번 설에 백만원이나 보너스를 받았다는데..
설날 아침에 떡국을 먹는데 조금 짰어요? 떡국이 이렇게 짜나? 그랬더니
돈이나 재대로 벌어오면서 짜니마니 타령이나 하라지?
월급은 제대로 받아오면서 그런 말이나 해야지?
설날에 친척들이 와서 아이들이 새배를 하니까
어른들이 새배돈을 주면서 올해에는 공부들 잘해라! 하니까
옆에서 가만 있으면 될 것을
“아이고 얘들이요 공부는 노는데 전문이예요.”
그래도 이정도는 괜잖아요. “얘들이 지 얘미를 닮아서 공부를 못해요”
아니! 설 명절날에 왜 아이들하고 엄마하고 아빠하고 비교를해요.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야! 너 이번에 성적은 올랐니?
아이들을 향한 모든 관심이 아이의 성적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면 안되지요.
누구는 공부 잘하고 싶지 않은 아이가 어디있겠어요?
해도 해도 안되는걸요.
여러분도 공부하는 과정을 지나오셨지만 공부가 어디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던가요? 아니지요.
이번에 너 어느 대학교 들어갔니?
서로 비교되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요.
정작 그렇게 말하는 부모나 어른들은 얼마나 공부를 잘했길래!!!
역지사지!여야지요.
재수라고! 재수한다고 성적 올라가는 학생을 내가 보질 못했다
재수생들의 성적이 안올라간다고 말하면
지금 아이는 재수해서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인건데
재수한다고 성적 올라가냐는 식으로 말하면.
시작부터 기를 꺽어버리는 말이지요.
그렇지 말고 일단은 아무데나 들어가!
아니!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는데 아무데나 들어가라니요?
공부하기 싫거든 기술이나 배워라!
물론 기술을 배우면 좋지요.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할 일은 공부인데
결론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안되지요.
너! 공부못하면 시장 바닥에 지개꾼되는거야! 알겠니?
테레비를 보면서 연예인, 가수들이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데
나도 연예인이 되야지! 나도 저렇게 춤출수 있는데... 하면
야! 니 주제를 알아라!
글구 가수! 연예인된다고! 너 지금 하는 공부나 열심히해라!!!
아이들 기 팍팍 죽이는 말이지요.
‘동서 사이에 오가는 말’도 적잖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응답자들은 “설 보너스 얼마 받았어?” “집값은 올랐어?” “애들 공부는 잘해?” 같은 질문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이 밖에 “서방님 승진은 멀었어?” “동서, 이런 거 평소에 못 먹을 테니 많이 먹어” 등등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쪽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형님, 더 날씬해지신 것 같아요” “동서는 머리 스타일 바꾸니까 훨씬 좋네” 하는 식의 가벼운 칭찬으로 대체하는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너! 취직했니? 너 시집은 언제가니? 야! 너 많이 늙었다! 어떻하려구 그렇게 혼자 사니?
시골집 어머니집에 왔던 자식들이 하는 말!
어머니! 방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돈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불떼세요.
용돈이나 팡팡 보내면서 하면 그래도 괜찮지? 쯧쯧
어머니! 옷입은 것이 그래요? 옷 한 벌이라도 사다드리면서 하면 또 몰라!
어머니가 식사를 재대로 못하고 끅끅 거리니까
어머니! 그렇게 속이 안좋으면 병원에라도 가셔야지요.
평소에 한 번 어머니 모시고 병원엘 데리고 가본적이 있느냐? 나쁜 놈!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 아들내외에게 귀여운 손주녀석들에에 이말 저말 하면
어머니! 이말 저말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해요.
너무 걱정마세요.
오순도순 말 한 마디도 못하게 하는 자식들!
설날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고 독약을 먹는 날이되는 것 아닌지요!!!
“롤프 가복”이라는 사람이 쓴 책 「하루에 한번 자녀를 축복하라」는 책에 나오는 축복의 방법들을 소개함으로 말씀의 결론을 삼고자 합니다.
1. 부모의 손은 자녀를 축복하기 위해 모두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축복하는 부모가 되라.
2. 이 땅의 모든 가정을 축복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라. 그 이름을 위해서 너는 부모로 부름을 받았다.
3.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은 힘이 있고 은총이 넘친다.
4. 축복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된다.
5. 모든 일을 축복으로 시작하고 그 축복이 임하는 모습을 보고 인생을 즐겨라.
6. 자녀를 칭찬하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7. 나쁜 꼬리표를 떼고 좋은 이름을 붙여 축복하라.
8. 자녀에게 말해 왔던 부정적인 말의 힘을 파괴함으로 저주를 끊고 축복을 이어가라.
9. 크리스챤은 불신자가 읽은 유일한 성경책이다. 불신자를 축복할 기회를 찾아라.
10. 축복을 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축복이 당신을 통해 흐르게 하겠다 결단하라.
오래전 미국의 보스턴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보스턴에서 가장 거부였던 바턴씨를 찾아가 2천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보증이 될 만한 사람도, 아무도 담보물도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는 분명하니 믿고 빌려주시면 그 은혜를 결코 잊지않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고 보장도 없는 스트로사에게 담보나 보증인도 없이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니 빌려주지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웬지 이 청년 스트로사의 용기과 그꿈에 가득해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주위 사람들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모험을 걸고 그 자리에서 그 당시 2천불을 그냥 주었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과연 스트로사는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지 약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씨의 사업은 완전히 파산되었고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스트로사는 수소문하여 바턴씨를 찾았습니다. 그 때 바턴씨가 진빚은 7만 5천달러였습니다. 스트로사는 바턴씨가 진 빚 전체를 갚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자네는 오래 전에 나에게 빌려갔던 돈을 이미 갚았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하면 바턴씨는 깜짝 놀라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분명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요. 그러나 선생님께서 그 때 제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는 제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는 항상 저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감사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에 선생님께서 2천불을 빌려주지 않으셨으면 저의 오늘의 이 거대한 사업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바턴씨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바턴씨를 도왔습니다. 결국 바턴씨는 스트로사의 도움으로 회사를 살릴 수 있었고 바턴씨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도왔던 스트로사의 기업도 성장하여 미국내 100대기업에 들어가는 큰 회사로 성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철저한 성격을 지닌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용돈을 줄때마다 기록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투자를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날 아이가 용돈을 타가면서 십년후에 이자를 붙여 갚아 드리겠다고 말하면서 고마움은 커녕 당당하게 받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갚을 것이니 미안해하거나 고마울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과연 이자를 붙여 돈으로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은혜를 물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은혜는 바라지 않고 단지 베푸는 것입니다. 자그만 선행일지라도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베푸는 은혜가 후에 엄청난 열매를 맺히게 되는 일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만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 은혜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은혜에 영원히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된 사도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조국에 대하여 빚진자의 마음을 갖어야 합니다. 여기에 조국애가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하여 빚진자의 마음을 갖어야 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몸된 제단을 향한 헌신과 충성의 도가 있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에 대하여 빚진자의 마음을 갖어야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하는 형제들과 성도들에 대하여 빚진자의 마음을 갖을때 형제와 성도들을 귀하게 여길수 있고 섬길수 있는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직장을 다닐때에도 회사에 대하여 빚진자의 마음을 갖을 때 충성된 직원이 될수 있습니다.
홍산교회를 목회하는 저도 홍산교회와 성도들에게 빚진자의 마음을 갖을 때 그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성실과 정직으로 목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모두 빚진자의 마음! 받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갖으십시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해 도망자의 길을 10년이상이나 방황하면서도 사울에 대하여 단 한번의 원망이나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고백처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며 자신의 모든 환경을 은혜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강원도 홍천에서 있었던 이런 효자이야기가 있습니다.
첩첩산중작은 마을에 칠순 노모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엇습니다. 뮈 산중에 사는 가난한 아들에게 누가 시집을 올수 있겠어요. 홀어머니에 나이 40세가 넘는 노총각 아들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에게 한 가지 유명한 것은 온 고을에 소문이 자자한 효자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툭하면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푸념하는 어머니를 참으로 극진히 모셨습니다.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주던 어느날, 어머니가 더듬는 소리로 말을 합니다. “얘! 아들아 여기선 멀지?”“어디가요? 어머니?”“아! 서울이라는데 말이다.”“왜요? 가고싶어서요?”“아니다. 이꼴로 가긴 어디를 가겠냐?”
태어나서 단 한번도 산마루를 넘어 읍내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서울이라는 데를 구경하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버스만 타면 멀미하는 통에 아무데도 갈수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 결국 이아들 효자는 어머니가 멀미도 하지 않고 서울을 모시고 갚 방법을 찾았습니다. 바로 리어카를 개조해서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어머니! 이제 서울갈 준비를 다했습니다.”
서울 간다는 말에 어머니는 아들아! 가만 있어봐라! 그럼! 짐을 싸야지!“하시며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내가지고 보자기에 싸가지고 나오신 것은 고이 간직해 둔 수의였습니다. ”어머니! 아니 이걸 왜요?“
아들은 당황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알것도 같아 차마 말릴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이 될수도 있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개조된 리어카를 끌고 서울을 향해 출발합니다. 리어카를 끌고 가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이마에 땀방울을 훔치며 아들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앞에서 수레를 끌고 갑니다. 이제 홍천을 빠져나와 양평을 거치고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선인 남양주를 지나 망우리언덕을 넘어 마침내 서울 문턱에 다다랐을때 잠시 쉬어나 갈까하고 “어머니! 하고 수레 뒤를 돌아다보면서 아들은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서울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수의 보따리를 꼭 끌어안은 채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 땅을 다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을 나그네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제는 아침 일찍 교회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양지장례예식장 빈소를 둔 한 상주가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저희 어머님께서 죽기 직전에 유언을 남기셨는데, 내가 죽으면 기독교식으로 해달라고 하셨다는거에요. 그래서 가까운 교회를 찾아 오다가 목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래 저는 기쁜 마음으로 입관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40여명의 유가족들이 모였는데, 찬송을 부를줄 아는 가족은 서너명뿐이었습니다 그래 저는 우리 홍산가족의 장례를 집례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화장장에 가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유가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인생은 은혜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다시는 볼수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어머니앞에 불효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어머니 가시는 마지막 길에 어머니가 유가족들에게 가장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가신 믿음의 길을 따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유가족 여러분! 어머니에게 평소 불효했던 여러분의 마음에 이제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믿고 신앙생활하겠다고 어머니앞에 약속하시기를 바랍니다. 약속하시는 유가족들은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했더니 어찌나 크게 아멘을 하던지요! 그야말로 눈물로 통곡하던 유가족들이 아멘으로 바뀌는 은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저는 어제 또 한 번의 목회자로서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엇습니다.
야곱은 늙어 애굽의 바로왕 앞에 나갔을때, 바로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만 못되니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마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험악한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방법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길입니다.
돈으로 사는 것 아닙니다. 힘으로 사는 것 아닙니다. 은혜로 살다가 은혜로 천국가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방후에 북한에서 기독교 청년운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소련군 점령지역에서는 죄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붙들려 수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재판을 받던 날이었습니다. 소련군 대령이 재판관으로 앉았고,, 북한군 소령이 통역관으로 배석했습니다. 기왕 죽게 될 것! 할 말이나 하고 죽이라라 마음 먹은 젊은이는 법정에서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소련군이 이 민족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민족이 해방된 것이다. 이 민족을 살리 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이제 젊은이는 사형언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나온 판결은 “오늘 석방이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재판관은 “동지! 동지!”하면서 오히려 반가워하더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웬일인가하여 의아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재판에서 통역을 맡았던 북한군 소령이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대가 말한대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해주시오”
나중에 알고보니 북한군 통역관 소령이 소련군 재판관에게 통역을 할때에 모든 말을 다 바꾸어 말을한 것입니다. 죽음의 길에서 새 생명을 얻은 이 청년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신학대학에 입학하였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들의 아픔과 함께하는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릴만큼 자신의 전생명을 바친 분이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교단의 존경받는 이국선 목사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은혜받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일평생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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