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절대 권력에 도전했던 왕후들의 이야기!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팩션형 조선 역사서 작가 이수광이 오랜 고증과 치밀한 추리로 되살아난 조선 퍼스트레이디들의 숨소리를 이야기한다. 사극이나 소설에서 다뤄지는 왕후들은 단아하거나 정치력 있는 모습보다는 왕의 총애를 둘러싸고 암투와 모함, 독살로 얼룩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다뤄지던 왕후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치밀한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로 정치력을 발휘했던 왕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 속에 있었으나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조선의 국모들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총 16명의 왕후들과의 대화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 그녀들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 CP 추천 | 이런 점이 좋습니다!
남성 위주로 써진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저 왕 뒤에서 다투기만 했던 여자들이 아닌, 한 나라의 국모로, 그리고 정치가로써 그들의 모습을 재조명해 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당당했던 16명의 왕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자소개
추리소설에서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우리 시대의 마에스트로. 팩션형 역사서의 새 장을 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탄탄한 대중적 입지를 갖고 있지만 마이너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작품 속에는 항상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이 흐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절대 권력에 도전했던 왕후들의 삶을 그려 냄과 동시에 그녀들의 사랑과 슬픔, 분노 등 여성적 감수성을 녹여 냄으로써 다양한 여성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특히 실록 외의 다양한 자료를 통섭하고 행간에 숨은 의미를 치밀하게 추론하여 기존 역사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입체적인 왕후사를 복원한 것은 이 책만의 독보적인 미덕이다. 지금은 수 년 안에 한국뿐만 아니라 영미권 독자들을 사로잡을 작품을 쓰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사자의 얼굴》로 제10회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고 현재 계간 미스터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나는 조선의 국모다》 등 다수의 저작을 발표했다.
목차
프롤로그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당당한 16인의 왕후들
제1부 조선의 운명을 바꾼 불꽃의 왕후들
1. 조선의 초석을 다진 킹메이커 원경왕후 민씨
2.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은은한 리더십 소헌왕후 심씨
3. 격변의 세월을 넘어 개혁 군주의 파트너가 된 효의왕후 김씨
4. 무너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 했던 명성황후 민씨
제2부 조선의 산천초목까지 다스린 정치적 왕후들
5. 조선왕조사상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여인 문정왕후 윤씨
6.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딘 인목왕후 김씨
7. 북벌을 위해 역모 사건을 파헤친 인선왕후 장씨
8. 수렴청정으로 여군의 권세를 누렸던 정순왕후 김씨
9. 대원군 독재의 시대를 연 신정왕후 조씨
제3부 조선을 울린 비극의 왕후들
10. 왕위를 찬탈당한 비극의 여인 정순왕후 송씨
11. 후궁의 권력 아래 숨죽여야 했던 장렬왕후 조씨
12. 왕손들을 독살한 복수의 화신 선의왕후 어씨
제4부 왕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왕후들
13. 조선왕조사상 가장 불행했던 여인 폐제헌왕후 윤씨
14. 폭군의 아내로 비운의 생을 살다 간 연산군부인 신씨
15.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난 단경왕후 신씨
16. 희대의 요부로 기억되어야 했던 희빈 장씨
출판사 서평
팩션형 조선 역사서의 최고 작가 이수광,
오랜 고증과 치밀한 추리로 되살아난 조선 퍼스트레이디들의 숨소리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조선의 왕후는 중종의 왕비인 폐제헌왕후, 즉 폐비 윤씨다. 그녀의 생애는 우리가 갖고 있던 왕후들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왕의 총애를 둘러싼 암투, 모함, 그리고 끝내는 독살되고 마는 운명.
이러한 왕후들의 이미지들이 달라지고 있다. 왕실의 꽃이나 궁중 암투만을 일삼던 여인들에서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졌던 살아 있는 인간으로 재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다산초당에서 펴낸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은 치밀한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로 정치력을 발휘했던 왕후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 왕후들의 실체를 우리 눈앞에 불러낸다. 책의 출간을 기념하여 16인의 왕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인터뷰를 했다.
저자: 낡은 고서책 속에서 몇 줄의 글로 흔적을 찾던 분들을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꼭 여쭤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사료들을 보면 왕후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소략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원경왕후 민씨(태종 비): 조선은 남존여비의 풍조가 뚜렷한 사회였습니다. 고려시대만 해도 딸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등 어느 정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에서는 아무리 왕후라 해도 여성의 이야기를 함부로 사책史冊에 남길 수 없었지요. 이번에 선생님께서 쓰신 책을 보니 참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실록에 기록이 없는 탓에 다른 여러 사료들을 통섭해야 했을 테니까요. 일부에서는 이러한 사료들을 야사로 취급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온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관의 기록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료들과 개인의 문집 등을 취합한 후에 그것을 재편성했습니다. 즉, 정사와 야사의 뚜렷한 경계선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양한 자료들과 치밀한 추론을 통해 실제 왕후들의 모습을 복원하려 한 선생님의 시도는 참 반가운 일입니다.
저자: 부족한 책을 과찬해 주시기 부끄럽습니다. 조선을 뒤흔들 만큼 정치에 깊이 개입했던 왕후들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생소합니다. 요즘 들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조선의 왕후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문정왕후 윤씨(중종 비): 왕후들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국정을 좌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조선왕조사상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대비이자 권력에 눈이 멀었던 표독한 여인으로 인식돼 있습니다. 아들인 명종에게도 "네가 왕이 된 것은 다 나의 힘 덕분이다"라고 누누이 말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권력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당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윤원로 형제의 누이로서 장경왕후를 중심으로 한 윤임 일파에 의해 폐위될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실제로 후궁들인 경빈과 희빈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요. 이러한 경험 때문에 권력을 잡지 않으면 죽음을 당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명종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력을 발휘했습니다. 인종이 승하할 당시 제가 대궐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문무백관들이 모두 그 위세에 눌려 명종을 왕으로 추대할 수 밖에 없었지요. 태종과 세종이 모두 신하들의 압력을 못 이겨 포기했지만 저는 보우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시켰습니다. 권력 투쟁을 일삼는 남성들 사이에서 정치력을 발휘한 여성이었던 셈이지요.
인선왕후 장씨(효종 비): 저는 세종의 왕비였던 소헌왕후 심씨의 예를 들고 싶군요. 세종의 치세 뒤에는 은밀한 정치력을 발휘했던 소헌왕후 심씨가 있었습니다. 세자빈 김씨와 봉씨의 폐출 사건도 내명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소헌왕후가 주도한 일이었지요. 저는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서 8년 동안이나 인질 생활을 했고 그 때 겪은 고초 때문에 북벌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를 위해 조정 내 친청파를 제거해야 했는데 저는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 사건을 밝혀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남자들도 그들의 권세가 두려워 벌벌 떨던 때에 여자인 제가 직접 손에 피를 묻혔던 것이지요. 물론 북벌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왕후들이 군주의 파트너로서 담당했던 역할에 대해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명성황후 민씨(고종 비): 저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구한말은 그야말로 내우외한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대원군은 오로지 쇄국 정책을 고집했지요. 저는 그것만으로는 무너져 가는 조선을 부강하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면서 개국해 나가는 정책을 선택했지요. 남편 고종이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제가 정국을 주도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측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만 국모로서 할 바를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남성들이 팔짱만 끼고 여러 나라들의 눈치를 보던 시기에 저마저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더욱 비참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저자: 그렇다면 그 동안은 왜 왕의 총애를 둘러싼 암투 등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을까요?
정순왕후 김씨(영조 비): 무엇보다 역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조 임금이 승하한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사실상 군주 역할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기 때문에 여군女君 운운하며 반대하는 자들은 숙청을 하겠다고 선언했지요. 일부에서는 저를 세도 정치를 굳히고 사학금령을 내려 천주교인들을 몰살한 악독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척이 정치에 관여했던 것은 이방원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친정의 힘을 활용했던 원경왕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오래된 일입니다. 사학금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를 반대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이념 중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켰던 것도 서학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요. 그런데 여성인 제가 했다고 해서 암탉이 울어서 집안이 망했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희빈 장씨(숙종 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가 대립했던 숙종 대의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왕의 총애를 둘러싼 암투로만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와 다릅니다. 숙종 대는 서인과 남인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던 때이고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당쟁을 이용했습니다. 남인에게 권력을 주었다가 하루아침에 그들을 쓸어버리고 서인들을 등용하는 식이었지요. 인현왕후가 서인 명문가 출신이었다면 저는 남인 계열로서 비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정치적 배경이 부족한 저로서는 당쟁의 와중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사가들은 저를 희대의 요부로 그리고 인현왕후는 현숙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현왕후 역시 저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벌였습니다. 그녀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자: 얼핏 보면 왕후라는 자리가 신데렐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에 있는 탓에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 같습니다.
선의왕후 어씨(경종 비): 저는 경종의 아내로서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와 대립해야 했습니다. 경종이 재위할 때부터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둥 노론 측의 압박이 심했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제 남편이 결단을 내려 노론 대신들을 조정에서 쫓아냈지만 화근을 자르지 못해 독살되고 말았지요. 영조가 즉위한 후에 제가 영조의 자식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어미로서 지아비의 원한을 풀어 주는 일을 어찌 잘못되었다고만 하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 본 후 독자들께서 평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효의왕후 김씨(정조 비): 저는 정조의 왕비였지만 남편이 세손이었던 시절에는 노론 측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고, 왕후가 된 이후에는 홍국영의 위협 때문에 편히 지낼 수 없었습니다. 홍국영은 탕약에 독을 넣어 저를 죽이려 했는데 제가 기지를 발휘하여 남편 앞에서 마시는 시늉을 하고 피를 토하고 나서야 그 음모가 밝혀졌습니다. 결국 홍국영의 권력이 몰락하고 외방으로 내쳐지는 바람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요.
저자: 정말 참혹하군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조선 왕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했는지 손에 잡힐 듯 선하게 그려집니다.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인목왕후 김씨(선조 비): 반정이 일어나 광해가 물러나기까지 저는 궁궐에 유폐되어 홀로 공포와 싸우면서 10년의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광해군 대에는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모 사건들이 가장 많이 조작되었습니다. 제 아버지와 아들도 이 와중에 희생됐지요. 그 때 저는 살아남아 권력을 다시 찾는 것만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내 가족의 한을 풀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왕후들의 삶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느냐 아니냐가 생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궁중 암투로 세월을 보냈던 여인네들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 왕후들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저자: 오늘 여러 왕후님들을 만나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 힘든 세월을 보내셨던 만큼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책속으로
심씨는 아버지가 죽고 친가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궁중에서 투기나 질투를 일체 하지 않았다. 세종 또한 그러한 심씨를 깍듯이 공대했다.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에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세종은 왜 소헌왕후 심씨를 이토록 공경했는가? 이는 심씨가 드러내지 않고 세종에게 정치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세자빈(문종의 부인)을 둘이나 폐출시켰다. 첫 번째 세자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뱀의 정액 가루가 담긴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는 이유로 폐출되었고 두 번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로 폐출되었다. 이 때 폐출을 주도한 인물이 소헌왕후 심씨였다.
-제2장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은은한 리더십 소헌왕후 심씨> 중에서
인종의 가냘픈 생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지고 있을 때 문정왕후 윤씨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인종은 병세가 악화되자 경복궁에 있는 청연루로 침전을 옮겨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 문정왕후 윤씨는 인종의 병세가 걱정된다면서 자신의 딸인 의혜공주의 집으로 가겠다고 선언하고 어가를 향하게 했다. 인종의 병이 악화되고 있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문정왕후 윤씨의 어가를 막고 이러한 일은 전례가 없다고 만류했다. 왕비가 되면 좀처럼 대궐을 나갈 수 없고 한 번 대궐을 나가게 되면 경호와 절차 등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대부분의 왕비들이 대비가 된 뒤에도 대궐 밖을 나가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대신들이 만류하자 못 이기는 체 하고 어가를 멈추었다.
윤씨의 이러한 행동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인종이 승하했을 때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대신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시켜 인종 승하 후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제5장 <조선왕조사상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여인 문정왕후 윤씨> 중에서
광해군은 명나라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가 구원을 청하자 마지못해 강홍립을 파견하면서 형세에 따라 대응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 강홍립은 명군과 합세하여 후금과 싸우는 체하다가 그들에게 투항해 버렸다.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일가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일축했다.
마침내 서인 이귀, 김자점, 신경진, 심기원 등이 폐모론과 광해군의 배명 정책을 이유로 반정을 일으키고 인목대비에게 달려와 인빈의 손자 능양군을 추대할 것이니 교지를 내려 달라고 청했다.
"이혼(광해군의 본명)을 죽이라."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일 것을 반정 공신들에게 요구했다.
-제6장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딘 인목왕후 김씨> 중에서
청나라 사신이 오자 효종은 북벌 계획은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알리고 많은 뇌물을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김자점이 명나라의 연호를 쓴 장릉(長陵 :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의 지문誌文을 증거로 청나라에 고했다. 이는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청나라가 이 문제를 따지자 영의정 이경석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다.
인선왕후 장씨는 내명부에서 조소용의 궁녀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리하여 조소용과 김자점 일당이 숭선군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꾸미고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 금부 당상, 양사 장관을 불렀다. 빈청에 모이니 봉서封書를 내려 보여주었는데, 바로 선대왕의 후궁인 조귀인이 저주한 일이었다.
효종실록 2년(1651) 11월 23일의 기록이다. 이는 궐 안에서 이미 조귀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효종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선왕후 장씨의 작품이었다.
-제7장 <북벌을 위해 역모 사건을 파헤친 인선왕후 장씨> 중에서
영조는 순정과 세정을 친국한 뒤에 능지처참을 했다.
순정이 동궁 나인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세자와 옹주들을 독살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반면에 어씨가 독살당한 경종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들을 독살했다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지만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조가 말한 '나의 혈속을 모두 제거하려고 했다'라는 말은 의미가 심장하다. 영조의 혈속을 모조리 죽이려고 한 것은 복수극일 가능성이 높고, 복수극이라면 경종의 독살에 대한 것 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야사에는 순정과 세정의 일이 발각되자 어씨가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12장 <왕손들을 독살한 복수의 화신 선의왕후 어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