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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川으로의
時間旅行
전 만 수
순 서
첫째, 왜 금천인가?
금천의 약사
왜 금천인가?
동명의 유래
금천의 유적
15세기 금천주민의 생활상
시흥을 지킵시다.
둘째, 금천현의 관아터와 시흥행궁터는?
셋째, 금천의 주산 금지산
첫째, 왜 금천인가?
현재의 금천구 관할구역은 1914. 3. 1 이전까지는 현 구로구. 영등포구. 관악구. 안양시. 광명시 그리고 동작구 일부와 함께 하나의 행정구역 이였다.
이 곳을 백제가 다스릴 때의 명칭을 확인할 길이 없으나, 475년부터 76년 간 고구려가 지배하면서 “仍伐奴縣잉벌노현”이라 하였는데, 신라가 삼한을 통합한 후에는 “穀壤縣곡양현”으로 고쳐 불렀다.
그 후 고려 태조 왕건은 “衿州縣금주현”으로 개칭하였으며, 고려 제 6대 성종은 금주현의 別號별호로 “始興시흥”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을 금주현, 시흥현으로 같이 사용하였다. 이 시흥이라는 이름은 “비로소 벌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필자는 새기고 있으며, 이는 잉벌로가 한자화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이 시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도 1천5백 여 년이 넘는다.
조선 태종은 1413년에 “衿川금천”이라 고쳐 불렀다. 그러다가 제22대 정조가 1795년에 “시흥현”으로 고치고 종6품관 현감에서 종5품관 현령으로 업그레이드하였다.
그 후 1895년에 개화기를 맞아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변경되었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12월 7일에 현 시흥2동에 있던 현(군)청사 소재지가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니 시흥2동은 1천 여 년 동안 현(군)청사의 소재지였다.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름이 시흥동이다.
1914. 3. 1에는 기존의 시흥군(현 금천, 구로, 관악, 영등포, 광명, 안양 및 동작 일부)에 과천군(현 과천시에 사당, 흑석, 방배 등이 포함됨)과 안산군(현 시흥시, 안산시 등)이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시흥시는 이 때에 비로소 시흥이라는 명칭과 인연을 맺는다.
1963. 1. 1에 금천을 비롯한 영등포 등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시흥군 청사는 안양읍으로 옮겨갔다.
다시, 안양읍이 1973. 7. 1에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 청사는 갈곳 없이 안양시 내에서 몇 번을 옮겨야 하는 설음을 받다가 아무 연고도 없는 지금의 시흥시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1981. 7. 1에는 광명이 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시에서 떨어져 나왔고, 1986. 1. 1에는 다시 안산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시흥군은 1989. 1. 1 비로소 시로 승격되었다.
1. 금천의 略史약사
한국의 역사학자간에 다소 異見이견이 있기는 하나 현재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는 馬韓마한이 있었다. 北史북사나 舊唐書구당서 등에 "마한의 동쪽은 신라요, 서쪽은 바다건너 월국이며, 남쪽은 바다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으로는 한강과 접해있다."고 하였다.
마한의 뒤를 이어 백제가 통치하던 이 지역은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침공하여 평택지역까지 차지하였다. 그 후 백제 성왕이 신라의 힘을 빌어 551년에 한강유역까지 옛 땅을 회복한다. 그런데 2년 후인 553년에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깨고 갑자기 한강유역을 침공하여 빼앗으므로 이 후에 우리 금천지역은 신라가 관리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마한,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왕조의 통치를 받아왔다.
1-1. 仍伐奴縣잉벌노현
“잉벌노”는 백제와 고구려 때의 지명이다. 백제 때의 지명은 명확히 확인할 문헌은 없다. <三國史記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를 보면 “穀壤縣곡양현은 고구려 때의 잉벌노현이며, 경덕왕 때 고쳐 현재는 黔州금주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가 통치할 때의 지명이 잉벌노현 이였다면, 백제 때의 지명도 잉벌노현이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자진 대제국 이였으며 광개토왕,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정복한 지역을 말살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으며, 고구려가 백제의 땅을 빼앗은 후 지명을 고쳤다는 기록도 없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기록한 <東與圖志동여도지>에서는 이 지역이 백제 때 잉벌노현 이였다고 기록하였다. 미루어 생각하건 데 백제 때도 이 지역의 지명이 「잉벌노」였을 것이다.
1-2. 穀壤縣곡양현
553년 이 지역을 점령한 신라는 삼한을 통합한 후 757년 경덕왕 때 곡양현으로 바꾸었다.
백제나 고구려는 우리 고유어를 이두문자로 기록하였으나, 신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들여 이를 모두 한자화 하였다.
1-3. 衿州縣금주현, 또는 黔州縣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지명도 바꿨다. 이 때 곡양현이 금주현이 되었다.
그 후 6대 임금 성종은 992년에 別號별호로 始興시흥이라는 명칭을 주었다.
1-4. 衿川縣금천현
조선왕조 태종은 왕권확립에 성공한 후 1413년에 금주현을 금천현으로 고쳤다.
1-5. 衿果縣금과현, 衿陽縣금양현
1414년에 금천현과 과천현을 통합하여 금과현으로 하였으나, 수개월 후에 다시 금천현과 양천현을 합하여 금양현으로 하였다가 1416년에 금천현으로 되돌렸다.
1-6. 始興縣시흥현
조선왕조의 정조임금은 1795년에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고치면서 종6품관 현감에서 종5품관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자기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고, 매년 릉행을 하였는데 그 때 시흥에서 경숙을 했기 때문에 현 시흥2동에 幸宮행궁이 있었다.
1-7. 始興郡시흥군
1895년에는 조선의 8도제를 없애고 24개의 府부로 나누었으며, 337개의 군을 두었다. 종래 留守府유수부, 府부, 大都護府대도호부, 都護府도호부, 郡군, 縣현으로 되어 있던 지방제도를 군으로 통일하고 부에는 관찰사를, 군에는 군수를 두었다. 이때 시흥현도 시흥군이 되면서 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100년 단위로 행정명칭이 바뀐 것이다.
1795년에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1895년에는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변했으며,
1995년에는 금천구로 바뀌었다.
2. 왜 금천인가?
2-1. 「잉벌노」의 유래는?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는 이두문을 많이 활용하였다. 이두문은 뜻(훈)과 음을 차용하여 순 우리말을 한문자로 기록한 것이며, 지역에 따라 그 사용 방법이 달라 통일된 원칙이 없었다. 잉벌노의 仍잉은 인할잉(인할 인과 같음)의 훈을 차용하였고, 伐벌은 벌판, 즉 들, 갯벌 할 때의 순우리말의 음을 따서 만든 말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잉벌은 “비로소 벌판이 시작되다.”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 奴노는 지명이나 인명에 많이 사용하는 글자로 땅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잉벌노는 “비로소 벌판이 시작되는 땅(곳)”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 한 예로, 지금의 양천구는 고구려 때에 劑次巴衣제차파의현이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 孔岩공암현으로 개칭되었다. 제차라는 말은 구멍(孔)의 뜻이고, 파의는 바위(岩)를 그렇게 표현하였다.
2-2. 穀壤곡양
신라인들은 왜 잉벌노를 곡양 이라고 한문으로 표기했을까? 奴노를 壤양으로 표기한 것은 今勿奴금물노를 黑壤흑양으로 한 것과 같이 노는 내(壤)의 음차로 흙, 땅 또는 평지를 뜻한다. 그러나 잉벌을 곡으로 한 이유는 아직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2-3. 衿州금주, 혹은 黔州
고려사람들은 왜 금주라고 하였을까? 이도 또한 시원하게 밝힐 근거가 없다. 고려 초기에는 衿州금주 보다는 黔州금주라고 불렀는데 그 당시 고려인들은 黔지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름자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庾黔弼유금필, 黔剛금강, 黔式금식, 黔用금용 등이 있고, 현재의 김포시는 黔浦縣금포현이였다. 유금필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대상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는 黔弼금필이였는데(고려사에는 그렇게 기록한 부분이 많다) 왕건이 유씨성을 하사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당시에는 성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왕이 공신에게 賜姓사성(성을 하사함)하는 것은 흔한 일 이였다.
왕건은 고려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숫한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고을을 정복하고 또 많은 고을에서 스스로 항복하여 옴으로 통합하여 고려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왕건은 스스로 항복해온 고을은 “州주”자를 붙여주고, 항복하지 아니하고 도전한 고을은 州자를 주지 아니하고 낮춰 불렀다. 그 예로 922년에 하지성의 장군 원봉이라는 사람이 항복하여 오니 원봉의 본래성, 즉 하지성을 順州순주라고 주었다. 그런데 원봉이 다시 견훤에게 도망갔다. 화가난 왕건은 순주현을 하지현으로 고쳤다. 이렇게 볼 때 고려의 지역 명칭은 건국과정에서 그 지역의 책임자, 그리고 항복했느냐 아니면 대항했느냐에 따라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추측하건 데 黔州금주라고한 연유는 이 지역을 黔씨성을 가진 자가 지방관으로 있다가 왕건에게 항복하여 黔州라는 지명을 하사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또는 黔弼이 공이 많아 당시 곡양현을 식읍으로 하사 받아 관리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黔州라고 하다가 음이 같은 衿州를 같이 사용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2-4. 衿川금천
조선왕조 태종은 1413년에 행정개혁에 착수하였다. 이 때 큰 고을을 제외하고는 고려 때 붙인 州자를 떼어내고 川자나 山․寧자를 붙였다. 그래서 금주현이 금천현으로 바꿰였다.
혹자는 안양천이 있어 川자를 사용했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다. 또 옷깃 금자를 사용한 데에 대하여 시흥의 산세가 옷깃 동정과 같다하여 사용했다고 하나 필자는 이에 동의 할 뜻이 없다.
2-5. 始興시흥
고려 성종 때부터 금주의 별호로 시흥이라고 한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始興은 글자 그대로 “비로소 일어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벌판이 시작되다.”와 같은 맥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 지역을 지키며 살아온 민초들이 신라가 지배할 때 곡양이라 하여도 옛 잉벌노의 한자어인 시흥을 고집스럽게 지켜왔을 것이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광종을 거쳐 성종대에 이르자 국가 기틀이 잡히고 민심이 안정된 때에 그 지역에서 많은 백성으로부터 사랑 받는 지명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 곳뿐만이 아니고 다른 고을에도 별호를 준 것으로 확인이 된다.
조선왕조 22대 왕 정조가 애처롭게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리기 위해 매년 수원 릉행을 하였다. 이 때 금천을 지나게 되는 데 금천현 관아 옆에 행궁을 짓고 도로를 닦고, 다리도 놓는 등 많은 지역사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금천현을 시흥현이라고 바꾸었다.
3. 동명의 유래
3-1. 동명의 변천과정
o. 조선조 영조 때 기록인 <與地圖書여지도서>에 의하면 지금 시흥동은 경기도 금주현 縣內面현내면 博山里박산리였고, 가리봉동과 독산동은 각각 東面동면 加里山里가리산리, 禿山里독산리였다.
o. 1895. 5. 26자로 시흥동은 인천부 시흥군 郡內面군내면 郡內里군내리였고, 가리봉동과 독산동은 각각 인천부 시흥군 동면 가리봉리, 독산리였다.
o. 1896. 8. 4자로 인천부에서 다시 경기도로 변경되고, 군내리가 郡內洞군내동이 되었다.
o. 1914. 3. 1에 시흥동은 시흥군 동면 始興里시흥리로 변경되고, 가리봉동과 독산동은 변경이 없었다.
o. 1963. 1. 1자로 경기도에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영등포구 관악출장소 시흥동, 가리봉동, 독산동이 되었다.
o. 1968. 1. 1에 출장소가 없어지고, 영등포구 시흥동, 가리봉동, 독산동이 되었다.
o. 1980. 4. 1자로 구로구로 분구되어 구로구 시흥동, 가리봉동, 독산동이 되었다.
o. 1995. 3. 1자에 구로구에서 분구하여 금천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3-2. 동별 내역
3-2-1. 加山洞가산동
가산동의 본디 이름은 가리봉동이다. 1995년 3월 1일 금천구가 구로구에서 분리되면서 가리봉동의 일부는 구로구에 남고, 다른 일부는 금천구로 왔다. 금천구에 온 부분을 가산동이라고 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금천구는 관악구와 함께1963년 1월 1일자로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이 때 「서울특별시동장정원조례중개정조례」에 의하여 가리봉동과 독산동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묶고, 가리봉동의 “加”자와 독산동의 “山”자를 따서 “가산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동사무소는 현재 독산1동 사무소자리에 있었다.
1970년 5월 18 관할구역 변경조례에 의하여 관할구역은 변경하지 않으면서 동명칭 만 가산동에서 가리봉동으로 변경하였다. 이 때 독산동 동민들의 불만이 컸었다.
그 후 1975년 10월 1일에 관할구역 변경 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이 분리되어 각각 살림을 꾸렸는 데 가리봉동사무소는 현 가리봉시장 건물을 임대 사용하였다.
1995년 분구할 때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사용하던 가산동을 가리봉동에서 떨어져 나온 금천구 지역의 가리봉에 적용시킨 것이다. 다소 어색한 감이 있다.
그러면 예로부터 이곳을 가리봉(산)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찾아보자. 가리봉동은 이 마을 주위에 작은 산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1895년까지만 하여도 加里山里였다. 이와 유사한 지역 명칭이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의 옛 이름이 加里大里였다.
가리봉동의 자연부락 이름은 여럿이 있다. 영일초등학교 뒷편을 골말, 곰말 또는 곡촌으로 불렀다. 그리고 가리봉1동 지역을 大村이라 하였으며, 다시 지역마다 밤나무골, 사당골 등으로 불렀다. 지금의 가산동은 가리봉동 대촌의 한 부분 이였으나, 3공단 지역을 장살미, 장뱀이논 등으로 불렀다. 또 두산아파트와 독산동 경계에 있는 마을을 澤下탁하, 못아래, 무아래, 모아래 등으로 불렀다. 두산 아파트 자리에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이를 宋家澤송가택이라고 하였는데 효자 송률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삼립빵이 공장을 가지고 6․70년대 분식장려 정책을 타고 많은 돈을 벌었다. 삼립호빵은 그때 곱은 배를 채우는데 많은 공을 하였다.
< 與地圖書여지도서>에 의하면 이곳에는 원래 靑龍청룔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靑龍穴청룔혈의 산 이였는데 갈증이 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래쪽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서 물을 마셨다고 한다. 이 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못아래마을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로 쓴 것이 澤下탁하가 되었으며 후에 음전되어 모아래 등으로 변하였다.
못아래 마을 뒷산인 靑龍穴청룔혈에서 이어져 나온 작은 고개를 弔馬조마고개라 한다. 이제는 고개랄 것도 없는 언덕이지만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 만하여도 제법 높은 고개였다. 이곳은 靑龍穴과 이어져 있어 이곳에 위치한 마을이 그 기운을 받아 서울까지 뻗쳐 마치 서울을 수호하는 형국으로 되었다.
임진란 때 왜군이 서울로 진격해야 하는 데 이곳에서 뻗치는 기운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왜장이 혈이 있는 부근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졸 한사람이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왜장에게 알렸다. 왜장은 이곳이 고개의 혈임을 감지하여 들고있던 칼로 이를 끊자 부근에 서려있던 하얀 김도 없어지고 서울까지의 길도 환히 보이므로 단숨에 서울까지 진격했다고 한다. 이는 설화이다. 그러나 설화는 우리에게 할말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설화는 임진란 때 이곳에서 왜군에 맞서 크게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이후부터 이 고개에서는 서울을 수호하는 기운도, 마을을 지키는 정기도 없어졌기 때문에 혈을 지키던 용마의 죽음을 애도한다 하여 弔馬조마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가산동에 있는 수출공단(현, 서울디지탈산업단지)은 70년대에 우리가 배고픔을 참으며 가발, 쉐타, 봉제품 등을 만들어 수출하던 수출 전진기지였다. 시골처녀가 서울 가서 돈번다고 큰 기대를 가지고 왔지만 혹한 노동에 눈물을 흘리며, 그러나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돈도 부쳐드리고, 동생 학비 대는 맛으로 배고픔도 잊고 죽어라 일하던 터이다. 젊은것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별의 별 사연도 많았던, 그래서 서민의, 노동자의, 없는 자들을 대변하던 가리봉이 아니던가.
제2수출공단은 1967년 10월 28일에 착공하여 1968년 6월 30일에 완공하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만국수출박람회를 가졌다. 3공단은 1970년 공단지정에 이어 1973년 11월 24일에 완공하였다.
가산동이 개발되기 전에는 농사일을 주로 하는 순박한 농촌마을 이였다.
3-2-2. 禿山洞독산동
독산동의 禿자는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이다. 까치머리, 대머리라는 의미를 지닌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의 주산인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가 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도 독산이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를 놀리니까 마을 촌노가
“산에 나무가 없음이 어찌 산의 잘못이랴. 나무가 자랄 틈도 없이 도끼로 자르고 톱으로 베니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하고 한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자연은 우리 인간이 간섭만 하지 않으면 잘 자란다. 스스로 회복할 틈도 주지 않고 마구 훼손만 하니 당연히 피폐해 질 수밖에 없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강희의 말이 실려있다.
“내집 뒤에 산이 있는데 벌거숭이 산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원래는 소나무가 있었으나 한성 교외에 있는 까닭에 도끼로 찍히고 소․염소 따위에게 먹혀 벌거숭이가 되었다. ”
강희는 고려 강감찬 장군의 후손이며 비록 그의 생몰 연도는 확인이 안되지만 세종 21년(1439)에 문과에 급제한 사실로 보아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사람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독산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 이전 즉, 15세기 초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옛 문헌에는 금천을 본으로 하는 금천강씨가 있었다. 그 시조는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이며 그의 4대손 궁진은 고려 태조의 삼한벽산공신이다. 강감찬은 바로 궁진의 아들인데 금천현(관악구 낙성대)에 살았다. 강희는 금천강씨이며, 호는 독산이다.
지금 시흥IC자리는 꽤 높은 산이 있었는데 이곳이 독산의 중심지였다. 이 산은 1970년에 개설된 50m도로 공사와 1973년도에 개설된 남부순환도로 공사 때 허물었다.
현재 한울중학교 부근은 옛날에는 문교리였다. 문교리는 1911년 4월 27일 독산리에 흡수되었다.
1975년 10월 1일에 가리봉동과 독산동이 분리되면서 가리봉동이라는 남의 이름으로 외부에 불리던 서러움에서 벗어나 독산동의 본디 이름을 찾았다. 또 같은 날에 현 관악구 신림8동 지역의 일부가 독산동에서 떨어져 나갔다.
1977년 9월 1일에는 독산 1․2동이 분동 되면서 현재 구로3동 일부 지역이 구로구로 편입되었다. 지금은 아주 번창한 구로공단전철역 50m도로 좌우측이 독산동에서 관악구와 구로구로 된 지역이다.
독산동의 분동사를 보면
1977. 9. 1에 독산1동에서 2동이 분동 되고,
1978. 10. 10에는 독산2동에서 3동이 나뉘었으며,
1980. 7. 1자로 독산4동이 분동 되었다.
1985. 9. 1에는 독산본동이 탄생하였다.
독산동지역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전인 1973년까지는 시흥대로를 경계로 동쪽에는 육군탄약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반수마을 등 일부는 제외).
이때까지 독산동에는 반수마을, 뫼나골, 큰말뫼, 작은말뫼 등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1973년 군부대가 이전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땅값이 오르고 건설 붐이 일어 발전이 시작되었다.
자연부락을 살펴본다.
지금 독산본동 남문시장 부근을 반수(반시)마을 이라 하였다. 반수란 마을의 형태가 마치 대야에 담긴 물처럼 고요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여졌다. 반수에는 가운데마을, 웃마을, 서촌이 있었다.
또 현재 독산본동 구룡어린이공원이 있는 일대를 구룡동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백씨의 집성촌 이였으며, 백씨들이 면화를 많이 심었다 하여 뫼나꼴 이라고도 불렀다.
지금도 잘 알려진 말뫼는 시흥4동에 있는 심원사 뒷산의 이름이 두산이다. 이곳에서 뻣어 내린 산세가 마치 목을 길게 느린 말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후에 음전되어 계량하는 말[斗]로 변했다.
즉, 말뫼[馬山] → 말뫼[斗山]이 된 것이다. 옛날에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곳에서 쉬면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한다. 말뫼는 큼말뫼와 작은말뫼가 있었는데 큰말뫼는 롯데알미늄공장이 있는 일대이다. 이 마을은 1973년까지만 해도 초가지붕에 한국고유의 농촌마을의 모습 이였다. 필자가 이 부락 가가호호에게 호당 2만원의 자금을 융자해주어 초가집도 개량하고, 마을길도 그리고 하수도도 정리하면서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을 가꿔나갔다.
현 대보빌딩 자리에 미군전용 홀인 아리랑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지금 군부대자리에 있던 미군을 상대로 생활하던 여인들의 숙소가 많이 있었다.
롯데알미늄 정문 앞 철길에 건널목이 있었는데 가끔 인사사고가 나서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또, 안양천 건너에 있는 독산동 지역이 18통 이였는데 18통장이 그곳에서 목장을 경영하며 젖소를 키웠다. 18통 지역을 가기 위해서는 안양천을 건너야 하는데 배가 없어 안양천을 가로질러 늘려놓은 철사줄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배를 이용해야 했다.
문성초등학교와 엘지패션이 있는 일대를 文星문성골이라고 하였다. 이곳을 주막거리라고도 불렀는데 이 일대에 주막집이 늘어져 있어 한양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이 잠시 머물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장소였다.
협진식품에서 금천교쪽으로 난 도로의 한 가운데인 마을금고 앞쯤에 당목이 있었다. 도로를 개설하면서 특별히 보호를 하였으나, 조용히 지내야할 처지에 도로 한 가운데서 세태에 시달리는 것이 언짢았던지 끝내 이승을 버리고 저승으로 떠났다. 당목은 사당 옆에서 사당을 지키면서 우리의 애달픈 소원도 들어주던 서민들의 의지처였다.
3-2-3. 始興洞시흥동
시흥동의 유래 등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그리고 유서 깊은 곳인 만큼 각종 유적도 많고 설화도 있다. 그러한 부분들은 따로 떼어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행정적인 사항만을 확인하기로 한다.
예로부터 시흥탑골 하면 양반들이 사는 고을로 알려졌었다. 조용하던 고을에 1965년부터 시흥2동에 이주민이 정착하면서 소란해졌다. 이주자가 많아 갑자기 인구가 팽창하므로
1970년 5월 18일자로 시흥2동이 생겼다.
1975년 10월 1일에는 시흥3동이 탄생했고,
1980년 7월 1일에 시흥4동이
1983년 1월 1일에 시흥본동이 태어났으며,
1985년 9월 1일에 시흥5동이 각각 분동 되었다.
시흥에 경부철길이 개통된 것은 1905년인데 1914년에 시흥역이 생겨 인적, 물적 이동과 함께 시흥이 이 지역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맞는다. 그 영향으로 연탄공장과 대한전선(1955년), 기아산업(1957년)이 들어와 지역발전을 돕는다. 1911년 7월 1일에는 시흥초등학교가 들어서 이 지역 인재양성과 지역공동체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1970년 경수국도가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자 이 지역이 명실상부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고, 그 영향에 70년대의 부동산 붐을 타고 크게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衿川의 遺蹟유적
4-1. 虎岩山城호암산성
4-1-1. 虎岩山인가, 衿芝山금지산인가
금천구 관내에는 산이 4개가 있다. 앞에서 확인하였듯이 독산과 두산[말뫼]이 있고, 금지산과 博山박산이 있다. 박산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 시흥3동의 국악예술고등학교 뒷산을 主山주산으로하여 남서울한양아파트까지 뻗어 내린 산과 시흥3동을 감싸고돌아 석수역까지 뻗은 산을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흥동의 옛 지명이 박달리였다. 그래서 한양아파트 앞 고개를 박뫼고개라고 한다. 박산은 전국적으로 많은데 그 어원은 박같이 둥글고 크다는 뜻과 「밝다」즉 태양을 의미하는 뜻이 있다.
흔히 호암산 이라고 하는 산의 본래 이름은 무엇일까? 자못 흥미롭다.
문헌에 나타난 것을 확인해본 결과 금양잡록에는 衿山금산, 금양별업기에는 衿州山금주산, 여지도서 衿芝山금지산, 동여도지 黔州山금주산, 대동여지도 衿州山금주산, 시흥현지도 黔芝山, 조선말기에 제작된 지도 衿芝山, 시흥읍지 黔芝城, 봉은사 본말사기 衿芝山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금천의 주산이며 靈山영산인 시흥뒷산을 금천에 있는 상서로운 산이라 하여 衿芝山 이라고 불렀으며, 산 형세가 마치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어 별호로 虎岩山호암산이라고 하였다”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다(「금천의 주산 금지산」참조, 1997)
그렇다면 호암산성은 금지산성으로 불러야 하나, 이 지역 주민들이 호암이라 즐겨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전하는 듯 하다.
4-1-2. 虎岩山城호암산성
호암산성은 시흥동 산83-1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즉 시흥2동 뒷산에 있는 한우물주변이다. 서울시에서는 한우물을 정비 복원하기 위하여 1989년에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발굴조사를 한 적이 있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북동, 남서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성벽의 총 연장은 1.25㎞정도이다. 성벽은 표고 325m 능선을 따라 만든 퇴뫼식 산성이며, 산성 내부에는 제2한우물, 건물지, 석구상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지금 산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은 석구상 동쪽기슭에서부터 동남쪽 능선을 따라 약 250m 정도이다.
산성의 축조시기는 신라 문무왕 12년(672년)경에 신라가 나당전쟁시 한강을 건너 수원쪽으로 내려가는 적과 남양만에서 침입하는 해로를 방어하고, 또 공격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약 1,300년 전에 만들어진 유적이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에 선거이 장군이 이 곳에서 진을 치고 행주산성에서 전투를 벌이는 권률장군을 도와 왜군을 도성에서 몰아내는데 공이 컸다. 또, 6․25 때는 미군이 거주하면서 헬기장으로 이용하였다.
선거이 장군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왜장이 내기를 걸어왔다.
“장군 나하고 내기를 합시다.”
“하하하 ............, 내기라! 그래 어떤 내기를 원하시오?”
선거이 장군이 받으니, 왜장은
“저기 산 중턱을 보자 하니 예리한 칼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던데 그 끝에 매달려 턱걸이를 백 개하는 내기입니다.”
선거이 장군이 쾌히 승낙하였다. 왜장이 먼저 칼바위 끝에까지 걸어가 턱걸이를 시작하는데 과연 담이 큰놈이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아흔 여덟 번을 하고, 아흔 아홉 번째 팔을 당겨 턱을 바위 위까지 닿은 후에 팔을 펴는 순간 그만 칼바위 끝이 불어져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왜장은 죽고 말았다. 칼바위는 조국을 위하여 살신순국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끝이 부러진 채 애처롭게 서있다.
호암산성을 발굴한 결과 지금의 한우물 외에 남쪽으로 올라가 또 다른 우물터 하나를 발굴하였고, 그 주변에서 將臺장대 등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4개를 찾아냈다. 그리고 한우물에 이르는 등산로 중간에서 문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문터를 찾았고, 건물터 동쪽에서는 暗門암문으로 추정되는 터를 찾았다. 산성을 출입하는 문은 서문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암문은 적을 속이고 은밀히 출입하기 위한 비밀문이다.
이 산성은 유사시에 금천현청 관리와 주민이 이곳에 집결하여 적과 대치하거나 대피하기 위한 시설 이였다.
4-2, 한우물[天井천정, 龍湫용추]
한우물은 호암산성안에 있는 우물이다. 산 정상 부근에 우물이 있다는 자체가 상서로운 일이다. 그래서 이곳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천정, 용추 등으로도 불린다.
이 우물은 가물어도 수량이 줄지 않아 가뭄이 심할 때는 祈雨祭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고, 전시에는 군사들이 마시는 우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우제에 관한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에 있다.
“호암산에 옛 성이 있는데 그곳에 우물이 하나있다.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냈다.” 임금은 가뭄으로 백성이 고통을 받을 때는 고대에는 산천을 찾아 기우제를 지냈으나, 조선조 때에는 사직단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이곳에서는 지방수령이 기우제를 지내며 백성의 고통을 마음속에 새겼을 것이다.
산성은 유사시에 군이 주둔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 우물이 군용수로 사용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산성에 물이 없으면 장기간 주둔이 불가능하므로 물이 있는 곳에 산성을 축조하는 것이 도리인데 이 곳은 현청사와 가까운 거리이고 물이 풍부하니 천혜의 산성 이였다.
또 다른 설은 消火說소화설이다. 이 산성에 있는 해태는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 후 도성과 궁궐을 창건할 때 만든 경복궁의 해태와 시대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화신인 해태를 세우고 우물로 방화를 하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한우물 북동 50m 지점에 서있는 石像석상은 해태상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우선 광화문 앞에 서 있는 해태나 경복궁 앞에 있는 해태와는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박물관팀이 한우물을 해체하고 복원할 때 조선시대 때 축조한 석축의 석재에서「石狗池석구지」라는 글자가 나왔다. 지금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이 못을 석구지라고 하였다면 석상은 당연히 개의 모습이다.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석상은 분명 개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개상을 만들어 놓았을까?
호랑이는 개떼를 귀찮게 여겨 개를 보면 도망하곤 한다. 그러한 속성을 이용하여 호랑이산의 호랑이 등에 개를 올려놓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한우물의 네 면 벽은 화강암 쌓기로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17.8m와 폭 13.6m의 장방형 이였으나, 조선조시대에 다시 축조하면서 22m, 폭 12m로 고쳐 쌓았다.
이 우물은 가물어도 수량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데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우물 동측 석축밑 두 세 곳에서 쉼 없이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1989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기 이 전에는 지금보다 한결 운치가 있었다. 우물 주변에는 잡목이 적당히 자라고 있었으며, 산행하다 허리를 자연스레 굽혀 손으로 물을 떠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는 곳 이였다.
잔잔한 물위에는 연꽃이 한가로와 한 여름 녹음 속에서 다소곳한 모습이 찾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주었다. 그 창연하던 우물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 우물은 현재 사적 제343호이며, 우리 관내에서는 유일한 사적이다.
한우물을 발굴할 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1기종에 개체수는 467점인데 현재 서울대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출토 유물 중에는 토제어망추, 원형토제품, 숫돌, 석제용기, 청동제 숟가락, 청동제 방울, 철제고리, 당나라 철도끼, 무문토기저부, 석촉, 백자접시, 기와 등이 있다.
우리도 <금천구박물관>을 건립하여 이러한 자료를 찾아와서 활용해야 할 것이며, 그 날에 대비하여 지금부터라도 사라져 가는 옛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유물을 찾아 간수해야 할 것이다.
4-3. 이런․저런 유적들
4-3-1. 幸宮址(행궁지)
행궁은 임금이 거둥(거동)하면서 머무는 別宮별궁을 말한다. 시흥행궁은 조선 제22대 정조임금이 아버지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후 수원성을 쌓고 매년 릉행을 할 때 머물던 宮 이였다.
정조는 숭례문을 출발하여 한강배다리(가교) - 노량진 용왕봉저정(이 곳에서 점심식사) - 만안 고개 - 노량진 장승박이 - 대방3거리 - 신대방동 - 마장교(공단전철역 앞) - 시흥대로를 거쳐 무지개 아파트 앞에서 시흥행궁에 이르렀다.
시흥행궁은 정조18년(1794)에 경기감사 서용보가 건립하였으며, 그 규모가 114칸 이였다고 한다. 행궁터를 여러 곳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필자는 시흥동 827, 828번지 일대로 비정한 바 있다(「시흥행궁터는?」1999. 참조).
행궁에서 조용한 밤을 지낸 정조임금은 새벽에 서둘러 수원으로 출발하였다. 역시 수원에서 환궁할 때도 이 행궁에서 경숙하였다.
정조19년(1795) 환궁할 때 문성골에 父老부로들을 모아 놓고 정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물었다.
“그냥 보통으로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에도 은혜를 베푸는 방도를 생각해 주기 마련이다. 더구나 오늘의 경우는 자궁의 행차를 모시고서 재차 시흥행궁에서 묵기까지 하였고 돌아가는 길이 모두 편안한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사스럽고 다행스럽게만 느껴지는 나의 마음으로 볼 때 백성들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 시흥백성들을 위해 반드시 역을 경감해 주고 폐단을 제거해 줌으로서 자궁의 은혜를 펼쳐 보여주는 동시에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다. 더구나 행차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그리 행차의 威儀를 구경하는 것 이라기 보다는 뭔가 혜택을 입고자 바라보았고, 나 역시 그들을 불러 물어보게 된 만큼 정말 고질적인 병폐와 제거해야할 폐단이 있다면 숨김없이 모두 진술토록 하라.”
하고는, 이어서
“지난해 추수 때 상환기한을 연기시켜 주었던 환곡을 모두 탕감한다.”고 명하였다.
정조임금이 행차할 때는 공식적인 수행인원이 2,779명이며, 동원되는 말이 779필이고, 릉행에 참여하는 총 인원은 대략 6천명 이였다. 이로 보아 시흥행궁에 머무는 인원만도 동시에 2천여명 이였을 것이니 주변 주민들의 고초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행여 관리들이 민을 지나치게 혹독하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지 않을까 싶어 자기가 릉행을 할 때는 암행어사를 주위에 파견하였다.
정조21년(1797) 1월에 시흥, 화성, 광주, 과천고을에 어사를 파견하여 행차 때 연로의 폐해를 살피게 하였다. 이 때 범법한 서리 등을 관사에 회부하여 법에 따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정조는 1880년에 승하하지만 그 후 순조임금도 부왕의 장례와 왕대비전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순조21년(1821)까지 이곳을 여러 차례 이용하였다.
순조21년. 3월 9일에 대왕대비전이 승하하자 수원에서 장례를 치른 후, 9월 10일에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9월 14일에 재우제를 지냈다. 그 후로는 아마 이 행궁에서 공식적인 국가행사가 없었다고 본다. 이 행궁은 철종9년(1858) 1월에 실화로 불에 타 없어졌다. 그 때 경기감사 김대근이 그 책임을 받고 징계를 당하였다.
4-3-2. 시흥현 官衙관아터
시흥현 관아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필자가 나름대로 밝혀본 것에 의하면 현 시흥5동 836번지일대라고 본다. 지금은 시흥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옛 형태를 찾기 어려우나 1910년 당시 지적도와 관아 마당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800년 이상 된 은행나무의 위치가 그 사실을 무언중에 말해주고 있었다.
적어도 1천여 년 간 이 지역을 관리하던 관아의 터가 이제는 위치도 찾을 길 없이 사라졌다는 현실에 마음 아프다. 금천구청에서 이 곳을 매입하여 복원은 못한다 하여도 문화원을 건립한다거나 할 때는 이러한 의미를 살려 관아터를 매입하여 짓도록 하는 마음씀이 요구된다.
4-3-3. 始興鄕校시흥향교터
향교란 지방에 있던 文廟문묘와 거기에 부속된 학교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방에 설치된 일종의 교육기관이다. 향교의 기원은 고려 중기인 인종5년(1127)에 중앙에는 국자감을 두고 지방에는 국자감을 축소한 학교를 설치하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향교에는 공자를 제사하는 文宣王廟문선왕묘를 중심으로 하고, 강당으로 명륜당을 설치하였다.
시흥향교는 인조20년(1642)에 세웠는데 그 위치는 현의 동쪽 1리에 있다고 하였다. 시흥향교는 비교적 최근까지 있었기에 지역 원로 분들의 증언과 조선말의 문언을 확인한 결과 어렵지 않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시흥5동 259번지 버스종점일대이다. 이 향교는 1944년까지 이곳에 있다가 과천향교와 통합하는 바람에 이곳을 떠났다.
정조임금이 시흥행궁에 머무를 때 예조판서 등을 향교에 보내어 공자의 영전에 작헌예를 행하게 하였다.
4-3-4. 社稷壇사직단터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도성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지방에는 관아 부근에 사직단을 세우고, 致祭치제하여 국태민안과 풍년을 빌게 하였다.
시흥현의 사직단터는 현남쪽 1리에 있으며, 규모는 한칸으로 정남향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장택상별장자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우리습관 중에 들이나 산에서 식사를 할 때는 사람이 먹기 전에 일부를 던지면서 “고시례”한다. 이 말의 기원은 곡식신인 「곡신에게」 하는 기도문에서 기원한 듯하다.
4-3-5. 厲壇여단터
여단은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지내던 제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태종1년에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이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한다. 여단터는 현 북쪽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라서 시흥현에서도 현북쪽 2리에 세웠다고 하는데, 시흥동 172번지 동양연립 부근으로 추정한다.
4-3-6. 3層石塔층석탑
3층석탑은 시흥2동 230-40번지에 있다. 시흥동을 별호로 탑골이라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로 보고 있으나 시기를 판명할 아무런 근거는 없다.
구전에 의하면 손이 없는 아낙네가 탑에 공을 들이면 득남하였다고 한다. 전에는 원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1년에 한번씩 동네의 평온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4-3-7. 檀君殿단군전
단군전은 시흥4동 196번지 53호에 있었다. 이 단군전은 일제 때 명월관과 식도원 등을 경영하였던 안순환이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사재로 이곳에 녹동서원을 세우고 그 좌측에 단군전을 1930년에 세웠다. 단군의 초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1936년에 단군상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해방된 후에 시흥군을 중심으로 단군전봉건회가 결성되어 1948년 2월에 단군전이 옛 모습 그대로 중수되었다. 이 단군전은 1981년에 다시 헐려 안양으로 이전된 후로는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렵고 지금은 단군연립주택이 들어섰다.
단군전은 정문 우측에 석문이 있고, 承化門승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啓新堂계신당이 한 채있으며, 그 뒤에 단군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별채가 1동 있었다.
4-3-8. 비석거리
비석거리는 선정비가 세워졌던 거리라서 불리게 되었다. 선정비는 수령이나 관찰사 중에서 민에게 덕이나 은혜를 베푼 일이 있을 때 그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이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지방민이 세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권문 세도가의 수령에게 뒷사람들이 아첨으로 세운 경우도 있고, 비를 세울만한 공이나 은혜가 없는데도 본인이 직접 세우든지 또는 후인에게 부탁하여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시흥의 본래 비석거리는 종전의 차 없는 거리였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의 시흥2동 이주민 입주와 70년대의 토지구획정리 사업 등 개발의 영향으로 비석이 버려졌다. 당초에는 18기가 있었으나, 이 때 소실되고 4기만이 개천에 나뒹굴던 것을 그 후에 건져서 길가에 세웠으나, 최근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동하였다.
5. 15세기 금천주민의 생활상
우리 금천현에 살다 가신 분으로 자랑할 만한 분이 있다. 바로 강희맹(1424 - 1483)이다. 이 분은 우리역사상 최초로 農書농서를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우리에게 전한 분인데, 그의 <衿陽雜錄>을 지금은 일본에서 보관 중이다.
강희맹은 1447년 을과에 장원급제한 후 좌찬성을 지냈다. 그는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52세에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1년여간 처가에 머물면서 금양잡록을 저술하였다.
그의 처가는 시흥4동에 있는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 앞에 있었는데 순흥안씨 양도공파 경공의 손자 안숭효의 사위다. 금양잡록은 강희맹이 금천땅에 머물면서 늙은 농부와 대화를 통해 농사짓는 법을 물어 정리한 책이다. 그러므로 금양잡록에 나타난 그 당시의 농민생활은 바로 15세기 후반 금천의 모습일 것이다.
o. 고을 동쪽에 금산이 있는데 서북쪽으로는 한강에 연결된 농토가 있으나, 수해와 가뭄이 반반으로 메마른 땅이 많고 기름진 땅이 적으며, 물이 가까운 곳에 있어도 가물면 마르고 비가 내리면 수해로 10은 잃고 9를 얻으므로 모여 사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무릇 남에게 품팔이하는 사람은 그 집에서 먹게 되는데 반드시 다섯 그릇을 갖추어야 비로소 즐겨 일하고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났다 핑계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
o. 강희맹이 늙은 농부에게
“논과 밭을 깊게 갈아 밀파하고 일찍 심어 자주 김을 매면 이로운 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고 물으니, 농부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것을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형편상 못한다. 이 마을 100가구중 소를 기르는 농가는 겨우 10여 가구인데 그나마 두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송아지라서 100가구의 농지를 갈지 못한다. 그리고 요사이 도독 떼가 한낮에 소를 잡아먹거나, 재난이 없는 마을이라 하여도 매년 8 -9회 초상이 나므로 농사지을 사람은 몇 없기 때문이오.”
한다. 그 당시 이 지역 주민의 어려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o. 늙은 농부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가을에 풍년이 들어도 헤아리는 量이 들어오지 않는데, 아무리 독촉해도 밀린 빚을 무엇으로 갚으며, 집에는 한 말의 먹을 좁쌀도 없는데 관에까지 바칠 것이 없다.
이랑을 세어가며 필요한 씨앗을 받아 두려고 하나, 배를 주려 창자가 타들어 가는데 감히 나중에 이로움을 바라겠는가. 이로 인하여 섬 곡식은 말[斗]곡식으로 줄고, 말 곡식은 홉[合] 곡식으로 줄어들으니 어찌 씨앗을 배게 뿌릴 수 있을까?
본 고을은 서울이 가까워 使者사자가 자주 오고가나 이들에게 제공하는 숙식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고, 또 열 식구가 있는 농가의 7, 8명은 외지에 있어 어느 겨를에 농사를 잘 짓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가 일찍이 심지 못하고 자주 김매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고 대답하고 있다.
6.「시흥」을 지킵시다
태초에 금천에서 생활터전을 잡은 先人들은 이 지역을 "비로소 벌이 시작되는 곳", 또는 "비로소 뻗어나는 곳"이란 뜻에서 「仍伐奴잉벌로」라고 불렀다.
그 후 신라는 당나라 문명을 받아들여 지역 명칭을 漢字化한자화 할 때 곡양으로 불렀고, 고려 태조는 금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 성종은 992년 11월에 전국의 주․부․군․현과 관․역․강․포 등의 이름을 개정하였다. 개정하게된 이유는 상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 때 금주현을 시흥현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금주는............................ 성종14년에 단련사를 두었으며, 현종2년(1011)에 감무를 두었다.
시흥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고 적었다.
이러한 예를 몇 가지 더 들어보면,
“과주(현 과천)는 富安이라고도 하는데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행주는 德陽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등 여럿이 있다.
왜 금주라는 고을 명칭을 시흥으로 부르도록 하였을까?
이 곳의 土着人토착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명칭을 그대로 한문으로 표현하면 “始興”이다. 그런데 신라나 고려 조정에서 당초 지역명칭인 시흥과는 관련 없이 정치적 이유에서 곡양, 금주로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이 곳 백성들은 끈질기게 「잉벌노」, 또는 「시흥」이라고 고집하며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文治문치를 편 현명한 성종은 지역 백성의 정서를 받아들여 지명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은 992년 말부터 시흥이라는 본디 이름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제1차 이 지역 백성들의 승리였다.
또, 조선 정조는 1795년 2월 1일에
“黔川縣금천현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를 始興으로 바꿨다. 이는 옛 읍호를 따른 것이다.”라고 개명 이유를 조선왕조실록은 적고 있다.
정조는 수원 릉행을 위하여 이 지역을 오가고 또 경숙을 해야할 입장에서 이 곳 백성에게 가까이 접근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예부터 시흥이라고 부르는 지역 백성들의 뜻에 따라 시흥현으로 개명하지 않았나 싶다. 이것이 시흥 백성의 제2차 승리이다.
시흥인들의 세 번째 승리는 1914년에 있었다. 현재 시흥동은 縣名稱현명칭이 시흥 이였지만 마을 명칭은 박산리, 또는 縣․郡 소재지라 하여 현내리, 군내리, 군내동 등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1914. 3. 1에 시흥동으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시흥군 청사가 4년 전에 이미 영등포로 이전한지라 이곳은 군 소재지도 아니였다.
그런데도 예부터 현․군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시흥동을 굿이 시흥이라고 개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곳 주민들의 애향심 이였을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영등포 지역의 개발을 목적으로 군의 청사를 옮겨갔다 하여도 시흥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지켜야 했기에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정책결정자들에게 항의도 하고, 사정도 하면서 강하게 의견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주민들의 끈질긴 노력과 그들의 합리적 주장이 받아들여져 시흥동으로 바꾸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 대의 세월동안 아끼고 사랑하며, 때로는 투쟁하여 지켜온 이 “시흥”을 우리는 지켜나가야 한다.』는 과제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시흥은 지켜야 한다.
둘째, 금천현의 관아터와
시흥행궁터는?
1. 衿川縣官衙와 始興行宮터는 어디였 을까?
현재의 시흥2동과 시흥5동 일부지역을 塔洞이라 했다. 그 이유는 시흥2동 230번지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3층석탑이 있기 때문이었다.
탑동초등학교앞에서 확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서울시보호수인 향나무와 함께 오래된 3층석탑이 가년스럽게 서있다. 어느 기록에 보면 이곳이 虎押寺터 였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고 호갑사는 虎壓寺의 다른 이름이 아니였나 싶다. 어쨋든 이탑의 영향으로 이곳일대를 탑고을(탑골, 탑꼴)이라 불리어 내려 왔다
1-1, 1910년 당시의 塔골 모습
1795년까지 금천현 이었으며, 1895년까지는 시흥현 이었고, 1910년까지 시흥군 청사로 존재했던 관아터의 위치가 탑골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자세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10년 12월7일에 총독부령에 의하여 탑골에 있던 시흥군청사가 시흥군 하북면 영등포리로 옮긴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나 그 위치 등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수령 800여 년 된 은행나무 3그루가 그 위치를 말해주는 듯싶다. 금천현, 시흥군청의 관아는 어디에 있었을까?
해석하는자의 몫으로 남은 이 시점에서 여러 가지 정황을 참고하여 찾아보기로 한다
탑골에 있던 관아를 영등포로 옮긴 시점인 1910년대의 이곳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10년대에 제작되어 사용된 지적도와 1872년(고종9년)에 제작된 시흥현 지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衿之山(왜 금지산이라 해야 하는가는 졸저 “금천의 주산인 금지산”을 살펴 주시기 바람)을 主山으로 관악산을 祖山으로 하며 박산(박뫼)을 安山으로, 수리산등을 朝山으로 하는 탑골은 北과 東은 금지산이 바람을 막아주고〔藏風〕안양천의 물을 받아드리니〔得水〕풍수지리상 명당이다. 다만 백호가 허하여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나 안양천과 시흥대로가 氣를 막아주니 명당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다.
1910년경의 탑골 모습을 확인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제작된 지적도 위에 현재 사용 중인 지적 현황도를 덮어 대비되도록 별도 지적도를 마련했다.
1-1-1, 塔골의 道路
우리 조상분들은 도로를 만드는데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길로 임금이 행차하고 군대가 이동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간다. 丁若鏞은「牧民心書」에서 우리나라의 길이 좁고 관리가 안 된다고 개탄하면서 “길을 닦아 놓아 나그네로 하여금 그 길을 다니기를 원하게 만드는 것도 훌륭한 목민관의 정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길은 외적이 침입할 만한 해안지역이나 도읍으로 통하는 주요도로를 일부러 넓힌다든지 다듬는 治道를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험하게 버려두는 정책이 不文律이었다.
시흥이라하여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795년부터 정조임금이 행차한 도로 즉 御道의 폭이 겨우 3~6M에 불과했다.
금천현에는 충청도와 경기도에서 땔감이나 쌀등 농산물을 한양으로 운반하고 사람의 이동을 위하여 도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 구로공단전철역이 있는 곳 즉 도림천과 시흥대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馬場橋가 있었으며 이를 건너 시흥 IC에 이르면 문성골앞길이다.
시흥IC자리에는 ’70년에 시흥대로가 확장되고 ’73년도에 남부순환도로가 개통되기 전만하여도 꽤 높은 산봉우리였다. 이산이 禿山이다. 이 고개를 넘어 막 내려서면 현 문성초등학교 부근에 店村이 있었다.
한양으로 가던 나그네가 이곳에서 잠시 다리를 쉬면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국밥으로 요기도 했던 마을이다. 이를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말뫼고개를 넘게 되고 이 고개를 넘으면 시흥고개에 이른다.
시흥고개에는 驛站이 있었다. 역참은 정부에서 운영하는「驛」였으며 주로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암행어사는 마패를 소지하며 마패에는 말의 숫자가 양각되어 있는 되 이는 그 어사가 역참에서 비상시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말의 숫자를 표시한 것이다.
「經國大典」에는 전국적으로 역참이 540여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역에는 역장과 역리, 역졸을 두었으며 역의 운영은 역에 속한 驛田으로 경비를 충당하고 인건비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 경비가 부족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잦아 雇馬廳을 두고 필요할 때에는 민간의 말을 징발할 수 있도록 하여 운영비를 줄여 나갔다.
이 驛站所가 시흥고개에 있었음은 사실이나 그 규모 등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역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의 시흥역이 역참소 자리였다 하나 이는 그렇지 않다고 보며, 혹 현 대한전선, 자동차학원, 무지개아파트 등의 토지와 함께 역에 소속된 토지와 주택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흥고개에서 은행나무가 있는 탑골까지 이르는 길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시흥대로변 무지개아파트 상가 앞에서 분기되는 구 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70년도 경수국도가 확장될 때까지는 대한민국 1번 국도였다. 지금도 이 지점에서부터 금천구 의회건물 앞을 지나 기아자동차 담장까지 당시의 도로폭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무지개아파트 상가에서 시작하여 대한전선 복지매장 건너편 즉 광천분식점과 대명안마 건물사이를 지나 이열정형외과 건물사이로 난 좁은 길이 옛부터 우리의 조상이 다니던 주도로였다.
이 길은 시흥대로에 이르러 끝나며, 시흥대로 건너 중소기업은행건물(삼우빌딩)과 김 소아과 건물사이의 좁은 길을 만나게 된다. 이 도로가 옛 도로다. 계속하여 동화장여관 건물앞을 지난 D.C마트 건물옆 소도로를 찾아들면 노폭 2m정도의 길이 계속되어 남도한의원 뒤를 지나 은행나무길에 다다른다.
이 좁은 길은 1968년도에 계획된 시흥지구 토지구획정리 시에도 그대로 살려둔 유일한 옛길이다.
탑골에서 내려가는 길과 시흥역참소에서 들어오는 길과의 사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중소기업은행 건물자리이다. 즉 이 건물은 옛하천을 메우고 지은 것이다. 은행나무길을 따라 몇 걸음 옮기면 화랑기원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앞에는 횡단보도가 있으며 이를 건너면 대명시장 북문이다. 현재의 횡단보도 자리에는 탑골에 이르는 두 번째 다리가 있었다. 이 부근이 店幕이다. 경수국도 즉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금천에서 가장 번화한 저자거리였다고 보아야 한다. 고을 원님이 계신 縣의 관아가 코앞이니 현관아에 볼일이 있어 찾아드는 객도 있을 것이고 경기도, 충청도에서 한양을 가다가 유숙해야 하는 나그네도 있었을 터이니 주막집, 밥집, 여인숙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며 생활필수품의 교환을 위한 시장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대명시장이 들어서고 시흥4거리에 상권이 형성된 연원도 다 이에 기인한다고 보면 “역사는 현실이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곳에서 은행나무길 남측 즉 대명시장 쪽으로 탑골을 향해 좀 오르다보면 오른쪽에서 신양약국(시흥동 886-9)을 만나게 된다.
그 앞에서 우측으로 난 소방도로를 따라 계속가다 보면 현재 시흥2동과 시흥대로를 잇는 도로 즉 은행나무가 있는 곳에서 백산주유소 까지의 길에 이른다. 이 길이 옛길이다. 물론 현재보다 소폭이고 굽은 정도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비교적 유사하다.
또 하나의 길은 현재 오치과앞의 은행나무 즉 비석이 서있는 곳에서 대우당 약국 - 독산동길 횡단 - 시흥대로를 따라 박뫼를 넘어 안양에 이르는 길이 있었다. 현재 범일운수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이다. 이 길도 옛길이나 현재의 도로와 대부분 일치한다. 물론 여기에 소개한 길 외에도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또는 이웃마을에 이르는 좁은 길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양에서 안양에 이르는 길과 그 길에서 탑골에 이르는 길을 소개하였다.
1-1-2, 塔골의 河川
탑골은 금지산에서 가파르게 흐르는 빗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하천이 많은 편이다. 호압사 부근에서 시작되는 계곡수가 산복도로를 건너 혜명양노원 앞을 흘러 관악농협 시흥지점에서 우측으로 굽어 은행나무 앞에 이른다. 또 하나의 하천은 시흥재개발지역에서 시작하여 동일여고 앞으로 흘러 버드나무가 있는 하천과 합류한다.
그런가 하면 범일운수 앞을 지나 농협앞에서 합류하는 하천등 3개의 하천이 있다. 비석이 있는 곳 까지는 백년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비석앞에서 직선으로 시흥사거리에 이르는 현재의 시흥천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굽이굽이 여유있게 흘렀다.
관악농협앞에서 합류한 하천은 비교적 큰 모습을 갖추고 비석이 서 있는 녹지대에서 남성프라자 땅을 지나 831번지, 836-18번지, 835번지, 837-50, 51, 52, 53번지를 지나 독산동길을 건너 895번지, 894번지, 893번지, 현 어린이 놀이터를 경유하여 896-9번지 현대간판앞에서 좌측으로 굽어 현재의 은행나무 길을 따라 흘러서 안양천에 이른다.
1-1-3, 衿川의 邑內里
옛날 탑골의 주택지는 현재 독산동길 대우당 약국에서 비석이 있는 곳에 이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측(908, 909, 910, 920, 921번지)일대 이다. 이 도로는 탑골에 이르는 주도로였으며 이 도로를 비석거리라고 불렀다.(현재 비석이 있는 곳은 본디 위치가 아니고 개발후에 옮겨놓은 것이다)
현재 비석이 서 있는 녹지대 웃쪽(시흥2동쪽)으로는 이렇다 할 도로가 없이 하천옆에 소도로가 있을 뿐이다. 그 외 간간히 대지가 보이나 이는 주택지가 아니고 외딴집, 향교, 사직단터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는 郡․縣과 같은 관아가 있는 곳의 주택지나 저자거리를 內里, 郡內里, 邑內里등으로 불렀다. 바로 이곳이 지금도 시흥 사람들이 읍내라고 부르는 금천현의 읍내리이다.
1-2, 衿川縣 官衙터
금천현의 관아가 있던 곳은 이 지역 원로나 관련서적 등을 종합하면 ① 현재 은행나무가 서있는 곳 ② 남성프라자 신축지(시흥동831-6) ③ 시흥5동사무소 자리(시흥동832) ④ 범일운수가 있는 곳(시흥동 262-4)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근거로 한곳 한곳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위 4개장소의 최초 토지주를 확인하기 위하여 구로․영등포․시흥․안양 등기소를 방문하였으나 확인이 불가능 했다. 다만 위 4개소 중 시흥 향교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1-2-1, 始興鄕校터
시흥향교가 과천으로 이전하기 까지는 시흥동 263번지와 262번지에 있었다. 현 범일운수가 있는 곳은 시흥향교에 소속된 논였으며 현재는 일단의 주택지 사업으로 수도 없이 분할된 263번지위에 향교가 있었다. 그리고 향교앞인 조흥샛별아파트 단지 내에는 御井이 있었다.
1-2-2, 官衙터
4개의 가능 지중에서 3개소로 축소되었다. 시흥5동사무소가 있는 곳은 주 진입도로가 없을뿐더러 1910년경에 자목이 밭이다. 그러므로 가능지에서 배제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은행나무가 있는 곳과 남성프라자 신축지가 남는다. 이 두 곳 중 한곳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현재 시흥동 827. 828번지 일대가 당시에 1,300평 정도의 대지였다. 또 현대아파트와 220번지 일대의 토지가 당시에는 약 3천평정도의 대지로 존재했다. 이 두 곳 중 현대아파트는 당시에 주 진입로가 없었으며 197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99칸짜리 저택이 있던 땅이므로 관아가 있던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 후보지 중에서 가능성이 희박한 곳을 배제하고 보니 현 은행나무 있는 곳과 남성프라자 신축지가 남는다. 이 곳일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첫째, 이곳은 수령 8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으며 이 은행나무는 관아의 정원수 였다는 전언이 있다.
둘째, 이곳은 탑골의 주 진입로의 마지막 지점에 위치하며 그 윗쪽으로는 현 828번지 일대에 진입하는 도로 외에는 변변한 도로가 없다.
셋째, 이곳의 서남쪽에 주 진입로가 있으며, 주 진입로 주변에는 주택지 즉 읍내가 있다.
이 주 진입로는 역대 현령들의 공적을 기리는 공덕비가 즐비하게 서 있다하여 비석거리로 불렀다.
이상의 정황으로 보아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 금천현 관아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3, 官衙터의 現在狀態
옛 관아터가 현재 존재하는 상태를 보면 비석이 서있는 녹지대와 그 일대 도로로 대부분 포함되고 일부는 신진한약방 건물이 있는 곳(836-35번지) 과 그 옆집(836-34번지), 은행나무가 서있는 곳으로 분할되었으며 남성프라자 부지로 일부 들어갔다. 이 남성프라자 부지는 관아터 땅과 그 인근 밭, 그리고 하천을 메운 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관아터는 딱히 현재 어디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모습이 일그러졌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터를 확보하여 관아를 복원한다 하여도 도시계획(도로)이 전면 재 획정되지 않는 한 터의 확보가 불가능한 상태다. 그러나 이곳을 관아터라 하여도 하나의 의문은 남는다.
최초에 대지를 물색할 때 왜 뒷면에 하천을 두었을까 하는 점이다. 風水에서 背山臨水라 하였는데 어째서 배수가 되었을까?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풍수는 도선국사가 그 시초라하며 신라말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陽宅 즉 사찰, 관아, 집터를 잡는데 중점을 두었으나 그 후 陰宅 즉 묘자리 잡는데 관심이 옮겨갔다.
금천현이 고려조 때 터가 잡혔든, 조선조 때 잡혔든 배수로 관아를 배치했다는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건물이 북향이어야 하나 이곳에서는 지형상 북향일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이곳도 관아터로 보기에는 문제의 소지가 남는다 하겠다.
1-3, 始興行宮터
행궁이란 임금이 擧動(거둥이라 읽음)중에 經宿하는 곳을 말한다. 시흥행궁은 조선조 제22때 임금인 정조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이 있는 수원에 행차하면서 오다가다 머무는 곳이다.
정조는 1795년부터 1800년까지 6년간 시흥현이 있는 이곳으로 능행을 하였다.(그 이전에는 과천길을 이용했음)
1-3-1, 정조임금의 수원 능행
정조임금은 1795년 윤2월9일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보신각 앞길, 명동부근, 남대문을 거쳐 용산에 도착한다.
한강위에 설치된 배다리(가교)를 건너 노량진 본동에 있는 용왕봉저정에서 점심을 드시며 백성들에게도 막걸리를 하사한다. 만안고개(정조임금이 지어준 이름)를 넘어 노량진 장승박이에 이른다. 다시 대방 3거리에서 구 공군사관학교 후문 쪽으로 언덕을 오르다 우측으로 돌아 강남중학교 앞길을 따라 신대방동을 거쳐 마장교를 건너 문성골 앞길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잠시 행차가 쉬는 사이 정리사 윤행임은 시흥행궁에 먼저 도착하여 일을 챙겨 임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임금 일행은 탑골 진입로를 따라 시흥행궁에 도착한다.
이 행궁은 이번 행차를 위해 새로 지은 집이다. 이때 이제까지의 금천현을 시흥현이라 고친다. 임금은 房舍가 안온한 것을 흡족해 하며, 시흥현령 홍경후에게 3품직을 제수하고 이곳 首鄕과 首校, 首吏에게 상을 내린다. 시흥행궁 옆에는 임금의 음식을 준비할 10칸짜리 수라가가와 수행원을 위한 음식을 준비할 5칸짜리 공궤가가를 지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임금은 대박산앞길(석수역앞)을 거쳐 염불교(안양 유원지 입구), 만안교(정조행차를 위해 이번에 신설한 다리이며 정조가 지어준 이름임)를 거처 사근평 행궁에서 점심을 든다. 다시 지지대고개를 거쳐 노송지대, 장안문, 팔달문을 지나 화성행궁에 도착하여 혜경궁 홍씨 회갑연과 능배 등 공식행사를 마치고 간 길을 되 집어 저녁 무렵 시흥행궁에 도착한다.
다음날 아침 묘시(05~07시) 시흥행궁을 떠나 문성골 앞길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임금의 사전지시를 받은 시흥현령 홍경후가 백성들을 데리고 길옆에서 어가를 맞이한다. 왕은 잠시 쉬면서 각본에 의하여 백성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쌍한 백성들은 임금이나 현령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에 있는 현실적인 얘기는 못하고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만 임금님께 바친다.
임금은 영을 내려 가을 환곡을 탕감하는 등 몇 가지 특혜를 베푼다.
이렇게 하여 우리 관내에서의 거둥은 끝난다.
1-3-2, 行宮(幸宮)터
이러한 시흥행궁의 위치는 어디일까?
1795년 능행 시 임금의 능행에 직접 참여한 인원이 1,779명이며 말은 779필이었다. 그러나 이 능행에 참여한 총인원은 대략 6천명이었다. 시흥행궁에서 머무는 인원은 1,779명 외에 음식준비 등에 필요한 인원을 포함하면 최소 2천명이 넘었을 것이다.
2천명이 먹고 잘 수 있는 시설이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엄청난 시설이 필요하다. 과연 어떻게 해결했을까? 정조임금은 대충 민폐를 눈감아주는 군주는 아니였다. 동원된 목수는 누구이며, 아무개는 몇일 몇 나절을 일했고 그 품값은 몇 전 였다고 까지 기록에 남긴 능행이었다.
시흥행궁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앞서 밝힌 탑골의 모습을 참고하기로 했다. 탑골 내에 있는 가능한 부지중 앞에서 검토한 시흥현 관아터를 제한다면 지금의 시흥동 827, 828번지 일대의 땅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縣官衙터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윗 편에 위치하며 토지면적도 관아터보다 넓은 1,300평이다. 또 관아 정문에서 행궁 정문에 이르는 도로는 충분히 넒으며 하천위에는 넓직한 다리가 놓여있다. 전하는 말에 “관아에 石橋가 있어 운치가 좋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러므로 행궁에 이르는 하천의 다리는 석교였으며 이는 당연하다 하겠다.
始興還御行列圖에 보면 행궁 입구옆에 별채가 보여 홍제전서에 기록된 내용과 같다.
시흥골 내에 관아나 행궁과 같은 중요건물이 들어설 자리는 앞서 검토한 관아터 외에는 이곳뿐이다. 이는 도로사정이나 위치로 보아 그렇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이라 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시흥환어행렬도와 도면 또는 현장이 일치하지 아니한다. 환어행렬도는 김홍도의 감독하에 궁에 소속된 화가들이 그렸을 것이므로 사실에 입각했을 것인데도 일치되지 않는다.
분명 정조임금은 석수역앞에서 박뫼고개를 넘어 선린교회앞 도로를 진입하여 독산동길을 건너 비석이 있는 곳(당시 비석거리)에 다달아 행궁에 들어갔을 것인데 환어행렬도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시흥현 지도에서 행궁은 서남향을 보고 있는 데 이 위치는 행궁 정문과 건물의 정면이 일치하는 지리적 조건이므로 시흥현지도가 맞다 하겠다. 그러나 환어행렬도 대로라면 임금은 산복도로 방향에서 거둥하는 결과가 되어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또 시흥현 지도에는 행궁서쪽에 客舍, 司倉(社倉)이 있다고 표시 하였는데 행궁내에 이러한 시설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며 이는 앞서 밝힌 현 관아터에 있던 시설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글에서 밝힌 관아터와 시흥행궁터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묵묵히 서있는 3그루의 은행나무 중 비석이 있는 곳의 은행나무는 관아 정문옆에 있었으며, 남성프라자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관아 한 가운데에 있었고, 나머지 한 은행나무는 관아 후정에 있었다 하겠다.
셋째,衿川의主山『衿芝山』
1, 글 머 리
금천구 관내에는 4개의 산이 있다. 하나는 시흥2동 뒷산인 금지산, 또는 호암산, 혹자는 삼성산이라 부르는 산이다.
두 번째는 두산이다. 시흥4동 심원사의 뒷산을 주봉으로 하여 독산1동 말뫼고개까지 이어 지는 산의 모양이 마치 말[馬]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산 이름을 지어 달았다.
말산[馬山]이 → 말산[斗山] → 두산으로 음전되어 두산, 또는 말뫼가 되었다.
세 번째 산은 禿山이다. 지금은 산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으나 시흥인터체인지 부근의 높은 지대를 이름한 것이다. 독산이라 한 이유는 산이 나무 없이 벌거숭이가 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내 번째는 박뫼이다. 시흥3동의 앞산을 이름한다. 박같이 둥근 달이 둥실 떠오르는 모습이 아름다워 박산이라 하였을 것이며, 또는 산 모양이 둥근 박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듯하다.
여기에서 두산, 독산, 박뫼(박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시흥동 뒷산은 衿芝山(혹은 黔芝山), 衿州山, 衿山, 虎岩山, 三聖山 등 사람에 따라 또는 기록에 따라 달리 불리고 있다. 한편, 호암산은 북쪽만을 이름하고 금지산은 남쪽을 이르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기록도 있다.
우리 금천의 主山이라 할 수 있는 뒷산 이름이 통일성 없이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어 혼란스럽다. 그래서 이 산 이름을 바로 알아보기로 한다.
2, 文獻을 통해서 본 산 이름
옛 문헌에 나타난 산 이름을 살펴보기로 하자.
2-1. 衿陽雜錄
시흥4동에 있는 묘군의 주인인 순흥안씨 양도공파 敬恭의 손 자 안숭효가 있었다. 그 사위 姜希孟(1424 - 1483)은 그가 52세 되던 해에 묘군 앞에 있는 처가에서 「衿陽雜錄」이라는 農書를 저술하였다. 이 금양잡록 農談2편에 “고을 동쪽에 ‘衿山’이란 곳 이 있고”라 기록하였다.
2-2. 衿陽別業記
강희맹의 아들이며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낸 姜龜孫(1450 - 1505)은 그가 쓴 금양별업기에 “ ........... 정숙공이 그의 부친인 효령부원군을 衿州山 서쪽기슭에 장사지내고 여막을 지은 것이 집이 되었으며, ...... ”라 적었다.
이로보아 15C 경에는 금산, 금주산으로 불려졌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2-3. 與地圖書
1757년부터 1765년 사이에 제작된 여지도서는 衿芝山이라 기록했고, “금지산은 관악산 서쪽에 있는 支山으로 읍의 동쪽에 있으며 縣의 鎭山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三聖山은 현 동쪽에 있으며, 무학, 나옹, 지공 세분 스 님이 이 산에서 공부를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18C에는 衿芝山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 다. 한편, 여지도서에 실려있는 지도를 보면 시흥계곡 쪽, 즉 한 우물 남측에 있는 바위를 虎岩이라 하였으며, 한우물을 龍湫라 고 했다.
4. 東輿地圖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인 현종 이후 철종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지도에는 금천의 山川을 소개하면서 “黔州 山은 현 북쪽 3리에 있고, 호암산은 현 동쪽 5리에 있으며 虎甲 寺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성산은 현 동쪽 10리에 있다고 적었다. 그 주산이 현 동쪽 3리에 있고, 호암산이 동쪽 5리에 있다면 縣廳에서 금주산 이 더 가까이 있다는 표현인데 지금의 어느 산을 이르는 말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금주산과 호안산을 달리 표현한 것에 관심이 간다.
5, 大東輿地圖
1861년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상에는 시흥현 뒤쪽 동산을 衿州山으로 기록했다. 또한 청구도에도 같다. 주목할 것은 같은 사람이 작성한 것인데도 동여도지에는 금주산과 호안산을 다르게표기했고대동여지도에는금주산만을표기했다는점이다.
6. 始興縣 地圖
1872년(고종 9년)에 제작된 시흥현 지도에는 현재의 삼막사가 있는 산을 삼성산으로, 시흥동 뒷산을 黔芝山으로 기록하였다. 그 리고 한우물을 용추, 그 남쪽 바위를 호암으로 표기했다.
7. 시흥군 邑誌
1899년도에 발간된 시흥군읍지에는 虎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군의 鎭山인 꼭대기에 마치 호랑이가 걸터앉은 듯한 모습을 하 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양에 도읍을 정했을 때 바위 북 쪽에 돌사자를 묻고 남쪽에 돌로 된 개 4마리를 묻어서 호랑이로 하여금 북쪽을 두려워하고 남쪽의 개를 불쌍하게 여기게 하려한 것이다.”
8. 조선말기 제작 지도
시흥현 지도와 연대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나 제작자는 알 수 없는 조선말 지도에는 삼성산, 금지산, 호암(한우물 남쪽 바위), 용추, 호압사 등이 각각 표기되어 있다.
9. 봉은사 본말사지
봉은사 본말사비에는 “조선 태종7년에 나라에서 衿芝山, 虎岩 아래에 창건하고 虎壓이라고 寺額을 걸었다. 이 산의 형세가 호 랑이 모양이므로 과천 및 도성에 虎患이 많이 발생한다는 術士의 말에 따라 .....”라 적고 있다.
10. 서울民俗大觀
서울시에서 발행한 서울민속대관 11, 12, 13편에서는 삼성산, 호암산, 금지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三聖山
동국여지승람 금천현조에 삼성산은 현동쪽 10리에 있는 데 진산 이라고 적었다. 지공, 나옹, 무학 세 聖僧이 이 산에 서 수도하였다고 하여 삼성산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來脈은 관악산에서 호암산을 거처 금지산에서 맺고 그 餘氣가 독산동의 독산에 이른다.
② 虎岩山
“신동국여지승람 금천현 산천조에 범 모양의 바위가 있으 므로 이름이 되었다. 尹慈의 설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이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고,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호암산은 시흥의 금 지산과 연결되어있다.”
또 다른 장에서는 동물의 이름이 붙은 지명을 소개하면서 호암산을 가리켜 “산의 형상이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 덮칠 것 같은 형세에서 연유한다. 그 꼬리로 향하고 풍수 壓勝사 찰인 호압사가 있다.”고 적고 있다.
③ 衿芝山(黔芝山)
“동국여지도에는 금주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시흥군 읍지에 금지산을 진상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금지산이 맺은 명당이 금천현이다.”
④ 또 서울의 山徑을 설명하면서 “관악산에서 서쪽으로 삼성산과 호암산을 건너 금지산으로 이어져 시흥에 닿는다.”라 적었 다.
살펴보면, 서울민속대관에 이 글을 쓴 사람은 지금의 호압사 동쪽 산을 호암산이라 했고, 한우물이 있는 산을 금지산이라 보고 있다.
시흥동 뒷산의 이름은?
지금까지 밝힌 문헌을 살펴보면 산 이름이 衿山, 衿(黔)州山, 衿(黔)芝山, 虎岩山으로 불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빈도를 보면 총 11회 중 금산 1회, 금주산 3회, 금지산 5회이며, 호암산은 2회이다.
1. 三聖山
금천구에 거주하는 주민 중 일부는 시흥동 뒷산을 삼성산으로 이해하고 있다. 관악산을 主峰으로 하여 현재 삼막사가 있는 산은 그 支山이며 이를 삼성산이라고 하고 또 다른 지산을 금지산이라 고 표기한 옛 문헌을 볼 때나 현재 산형으로 볼 때나 삼성산과 금지산은 명백히 다르므로 긴 글로 이를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衿(黔)芝山
고려조 때 이 지역은 衿(黔)州縣이였다. 공식적인 가록에 옷깃 금자(衿)를 사용하고, 간혹 귀신이름 금자(黔)도 사용했다. 살펴 본바와 같이 그 후의 문헌에서도 衿과 黔이 혼용되고 있다. 이 문제는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금산, 금주산이라고 불린 이유는 금주현에 있는 주산이라하여 지어졌을 것이다. 혹자는 금주현이 금주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갔다.
고려조 때 금주라고 한 것은 이 고을이 고려 창건당시 고을 수 령이 왕건에게 협조를 하였기 때문 이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조선 태종13년에 금천으로 고쳤다. 이렇게 볼 때 금지산 은 금주현의 이름을 받은 것이라 하겠으며, 금산은 이를 줄여 부 른 까닭이라 하겠다.
조선조 말인 18C 이후부터는 衿芝山으로 불렸다. 물론 금자는 금천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초지자(芝)는 어디에서 연유 하였을까?
芝자는 芝閣, 芝雲, 芝草, 芝眉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상서로 움]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이렇게 볼 때 금지산은 「금천에 있는 상서로운 산이다.」라 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금지산의 형세가 호랑이 형 상인 데다 석구상과 한우물이 있는 등 靈山이라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 금산, 금주산, 금지산은 같은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 로 보아야 한다. 다만, 시대에 따라 또는 기록한 사람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을 뿐일 것이다.
그래서 시흥동 뒷산 금천구의 主山 이름은 衿芝山으로 부르 고 적는 것이 온당하다 할 것이다.
3. 虎岩山
호암산은 호랑이 모양을 한 산이라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 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산 전체가 호랑이 모양이어서 호암산이냐, 아니면 호랑이 를 닮은 바위가 있는 산이라서 호암산이냐.
둘째, 시흥동 뒷산 전체를 호암산이라고 해야하는지, 아니면 뒷 산 중 어느 한 부분만을 호암산 이라고 해야 하느냐이다.
먼저, 호암산 이라고 한 이유를 알아보자.
호암산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를 설명할 때 옛날부터 많아 인용하 는 尹慈의 글 중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이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고.”라는 표현을 생각한다.
이는, 산 전체의 모양이 범[虎]형상을 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다. 그러나, 윤자는 곧 이어서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초기에는 산 전체 모양이 호랑이 형상이라 서 호암산이라 부른다는 사람과 호랑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 산이라하여 호암산으로 부른다는 사람이 있었음을 뜻한다 하겠 다.
또 「신동국여지승람」에서는 “범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이 름이 되었다.”고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흥군 읍지」에서는 “금지산 꼭대기에 마치 호랑이가 걸터 앉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 다소 애매한 표현을 하였다.
「봉은사 말지」는 호압사를 설명하면서 “금지산 호암 아래에 창건하고”라 표현했다. 또 “이 산의 형세가 호랑이 모양이므로”라 하여 산 전체가 호랑이 형상이라고 하면서도 호랑이 모양의 바위 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어 윤자와 같은 입장이다.
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성을 쌓는 데 자꾸 문어지고, 불이나 도성을 쌓을 수가 없어 고민이 심했다. 하루는 잠을 자는 데 호랑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물으려 한다. 화들짝 놀라 깨어보 니 식은땀이 온몸에 흥건한 데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산이 있 는 데 이 산이 우리관내에 있는 금지산이였다. 이성계는 이 기운 을 누르기 위하여 절을 짓고 虎壓寺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금지산의 전체 모습이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 호암산이라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에는 한우물 남측에 있는 바위를 「호암」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문헌에 나타난 것으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즉 산 전체 모양이 호랑이 형상이라서 호암산이라고 했 고, 호랑이 모양의 바위가 있는 산이라서 호암산이라고 부르기도 한 듯하다.
마치는 글
필자의 견해에 동의를 못할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며, 필자가 일천한 식견으로 문헌을 찾지 못하여 우를 범하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크지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금천구의 主山이며 靈山인 시흥동 뒷산은 금천현에 있는 「상서로운 산」이라 하여 금지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 호암산은 금지산의 別稱으로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그러므로 “금천에 있는 상서로운 산이라하여 衿芝山이며,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일명 虎岩山 이다. ”라고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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