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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의 단계가 다른 각 민족들이 모여 한 연방 국가를 이룬 만큼 경제적 부의 재분배 문제는 각 공화국 간의 분쟁을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유고 연방 내에서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후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쪽 지역과의 격차는 민족주의와 맞물려 민족간의 반목을 부채질하였다.
연방 정부는 정권 수립 직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1947~1951)을 세우긴 했으나 사회주의 경제 구조를 정착시키는 데 너무나 많은 문제가 발생해 목표로 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때문에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고 1년 단위의 단기 계획으로 순발력을 확보해 나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회주의 경제 실험을 10년간 해본 결과는 어떤 방식으로든 저개발 상태에 있는 남쪽 지역의 경제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방 정부는 1957년부터 다시 5개년 단위의 중기 경제 계획을 세워 실천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남쪽의 저개발 지역에 대한 개발 동기를 부여하는 투자 보장 정책을 가장 중요한 골자로 결정했다. 이때 각 공화국 간에 이견이 발생했는데 과연 연방의 집중 투자가 이루어지는 저개발지역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놓고 심각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공화국을 기본 단위로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으로 양분했었다. 당연히 문제가 생겼다. 세르비아 공화국은 개발 지역에 포함되었는데 이 때문에 세르비아 관할 지역인 코소보 주는 투자 보장 정책의 특혜를 하나도 받을 수 없었다. 특히 코소보 주는 유고 연방 전체에서 가장 극빈한 지역이었다.
코소보 주
크로아티아 공화국측은 즉각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저개발 지역을 공화국을 단위로 나누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며, 각 공화국마다 저개발 지역이 존재하고 있으니 지역 구분을 보다 세분화하자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1961년 연방 정부에서 공식 채택되었다.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 세르비아의 남부 지방,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대부분이 다시 저개발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후 저개발 지역에 대한 특별 지원을 통한 경제 개발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저개발 지역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배려는 상당히 임의적이었고 제도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리적인 정책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의적이고도 단편적인 정치 파워가 좌지우지하는 형편이었다. 특히 공산당 정책 결정자들은 자본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경공업 중심의 소비재 생산 구조보다는 중공업 부분을 집중 개발했다. 대체로 경공업은 단기적으로 자금 회전이 빨라 고용 증대 효과가 뛰어나고 소득 증대도 바로 성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중공업 부문을 저개발 지역에 배치한 것은 해당 지역 주민의 소득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구조적으로 남북의 소득 격차를 더욱 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1953년부터 1970년까지 저개발 지역은 평균 북부 지역 소득의 65%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업 유치를 통한 소득 증대 작업의 실패로 1971년의 경우 저개발 지역의 소득은 개발 지역의 소득에 비하여 50% 선으로 떨어져 양측의 구조적 격차가 더욱 심화되었다. 지역별로 보면 소득이 가장 많이 떨어진 곳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3년에는 저개발 지역 중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아 전체 저개발 지역의 74%에 달했으나 1971년에는 53%로 떨어졌다. 가장 극빈 지역인 코소보 주는 42%에서 28%로, 마케도니아는 60%에서 56%로, 그리고 몬테네그로는 60%에서 58%로 각각 소득이 줄었다.
여기에서 저개발 지역으로 분류된 각 지역을 간단히 살펴보자. 저개발권에서 그나마 나은 형편에 속하는 마케도니아는 산업 생산의 72.4%, 고용 인구의 82.9%가 경공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고 중공업 종사자는 17.1%에 그쳤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은 섬유, 담배 산업이며 중공업 부문에서는 철강이 가장 비중이 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산업 발전의 원동력인 인력 충원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평생 동안 3년 이하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1953년 50%에서 1971년에는 25%로 떨어졌지만, 최근까지도 4년 이상 7년 미만의 이른바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만을 받은 사람이 전 인구의 45%에 육박한다.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1.4%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전형적인 농업국이었다. 1947년 통계를 보면 전인구의 77%가 농업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났고 인구의 14%만이 이른바 산업 부문에 몸을 담고 있었다. 실업자는 14%에 달했다. 게다가 산업 발전의 기본인 도로가 극히 낙후되었다. 철도는 전장 1,781㎞만이 건설돼 있는 등 사회 간접 자본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주택의 5분의 1만이 전기가 들어왔다.
이러한 낙후 상태에서도 보스니아는 처음에 비낙후 지역으로 분류되어 정부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소득 증가율은 1952년에서 1968년 사이에 유고에서 최저인 4.2%(유고 평균 6.4%)에 불과했다. 1971년 통계를 보면 농업 인구는 40%로 감소했지만 전반적으로 소득 증가율은 더뎌 1960년의 경우 유고 평균 소득의 34%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전통적으로 지하 자원을 많이 보유한 곳이었기 때문에 항상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각축장이 되었다. 철광석은 유고 전체 매장량의 81%, 석탄은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력 발전의 28%, 목재의 30%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공급했다.
몬테네그로는 전후 기간을 통틀어 매년 14.1%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그 견인차가 바로 원자재의 공급이었다. 그러나 험악한 산악 지대인 몬테네그로는 산업 발전의 하부 구조인 수송 체계가 극히 미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특히 1979년 4월 발생한 대지진은 그나마 이루어 놓은 경제 발전을 뒤집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몬테네그로의 지방 풍경
코소보도 유고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의 하나이다. 최고의 실업률, 최고의 문맹률, 최고의 출산율 등이 코소보의 상태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게다가 1947년부터 1955년까지 세르비아의 직할 자치주라는 이유 때문에 저개발 지역에 포함되지 않고 개발 지역에 편성돼 정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유고 연방 정부는 1960년대에 들어 저개발 지역을 지원하기 위한 항구적인 기금 설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선 연방 정부는 1963년 각 공화국 혹은 자치국별로 각 지역 내의 낙후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공화국 기금(FREDUD)'를 창설토록 촉구했다. 각 공화국별로 FREDUD가 설립되자 연방 정부는 이듬해 열린 제8차 당 대회에서 연방 내의 저개발 지역을 효율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방안을 집중 연구토록 촉구했다. 또한 연방 정부의 전문가들을 투입해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전 연방의 저개발 지역을 지원하는 목적을 가진 새 기금을 설립키로 결정했다. 1965년 2월 연방 의회는 만장일치로 ’저개발 공화국 및 코소보 주 개발 촉진 기금(FADURK)'를 창설했다.
FADURK는 6개 공화국에서 선임하는 6명의 위원과 연방 국회가 선임하는 7명의 위원 등 13명으로 기금 운영의 책임을 맡는 이사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 공화국이 매년 사회 생산의 1.85%를 일괄적으로 내는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FADURK는 처음부터 각 공화국이 머리를 싸매고 서로 많은 기금을 공여받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FADURK는 첫 의도와는 달리 민족주의의 각축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기금은 무상 지원이 아니라 일종의 차관 형식을 띠고 있었다. 각 지원 산업별로 각기 다른 조건이 붙어 있었다. 예를 들어 에너지, 철강, 기초 화학, 셀룰로오스, 제지 및 시멘트 산업 부문은 20년 상환에 2%의 이자를, 관광 산업의 경우에는 25년 상환에 1%의 이자를 내도록 했다. 기술 지원 부문은 5년 상환에 1%의 이자만 내면 되었다.
FADURK는 처음부터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특히 잘사는 북방 지역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기금 자체가 세르비아 인의 자의대로 쓰여지고 있다고 비난함으로써 오히려 민족 문제를 자극하는 요소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이들은 세르비아가 FADURK를 통해 합법적으로 북쪽 지역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함으로써 양측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자금 배분을 둘러싼 분쟁이 가속화되면서 결국 북부를 대표한 크로아티아와 중남부의 맹주 세르비아가 정면대결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세르비아의 경제 위협을 부각시키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 사건 직후인 1971년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 후원으로 열린 크로아티아 사회학회 학술 대회가 그 단적인 예였다.
크로아티아 사회학계의 권위자였던 란둘리르 박사는 ‘인구, 이민 그리고 고용’이라는 제하의 주제 발표를 통해 크로아티아의 우수한 노동력이 상당수 서유럽으로 진출하자 세르비아 인이 대거 크로아티아 역내로 유입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인구 증가율이 제로 상태를 밑돌고 있는 크로아티아 인구 문제를 가장 ‘침울한’ 어조로 부각시켰다. 실제로 10년이 지난 1981년의 통계를 보면 그의 주장이 결코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인은 1971년의 경우 351만 명이었으나 1981년의 인구 센서스에서는 345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통틀어서도 10년 전(452만 명)에 비해 10만 명 가까이 줄어든 442만 명이었다.
이 당시 자료를 꼼꼼히 훑어보면 그 첫 번째 이유는 1960년대부터 크로아티아 인의 해외 진출이 급격히 늘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크로아티아 전체 인구의 5.2%가 외국에서 이랗고 있었다. 그나마 이들 중 50.7%가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이었으며, 또 이들 중 62%가 남자들이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인을 걱정케 하는 것은 연방 전체 내에서 출산율이 최저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 인은 지금도 상당수가 해외에서 일하고 있고, 유고 내전이 발발했을 때에 독일이 크로아티아 승인 문제를 유럽 공동체 국가 중에서 제일 먼저 제기했던 것도 바로 60만 명이 넘는 자국 내 크로아티아 근로자들의 입장을 감안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연방 정부의 개발 기금 재분배 문제와 함께 인구 문제를 한꺼번에 묶어 세르비아를 싸잡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논리는 간단했다. 즉 크로아티아는 다른 연방 국가들보다 열심히 일해 잘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측이 이를 가져다가 세르비아 민족을 위해 전용한다는 것이었다. 즉 세르비아가 다른 연방 구성국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논리가 급격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크로아티아 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첫째, 대은행, 주요 보험 회사, 그리고 가장 흑자를 많이 남기는 대기업들의 본부는 베오그라드에 있다. 따라서 연방의 수도이자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자연스럽게 재정의 중심이 되었으며 모든 돈이 베오그라드로 몰려 들어가고 있다.
둘째,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연방 공화국의 외화 수입 대부분을 벌어들이고 있으나 연방 정부는 이에 상응하는 외화를 크로아티아에 배당하지 않고 있다.(크로아티아의 외화 수입은 바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절경인 아드리아 해를 방문한 서유럽 관광객들이 뿌리고 간 관광 비용이다.) 게다가 유고 연방 공화국 무역의 80%가 바로 아드리아 해에 있는 크로아티아 공화국 항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크로아티아 자체 수입의 30%가 다른 공화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연방 정부로 흡수되어 낭비되고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크로아티아 공산당도 맞장구를 치며 연방 정부에 포문을 열었다.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좌장격인 미코 트리팔로, 사브카 다브체비치-쿠차르 등은 즉각 공화국 정부에 더 많은 정치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탈집중화 정책이 이루어져야 하며, 은행 제도와 외환 규제에 따른 문제들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미코 트리팔로
크로아티아 공산당도 처음에는 지식인들과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가 주도하는 일련의 민족주의 흐름에 대해 관망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1970년 1월 15일부터 3일간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제10차 회의가 속개되었는데 이때 주도적인 분위기 역시 민족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 지도부는 성명을 통해 공화국 지도부는 크로아티아 정치 단체의 자격으로서 크로아티아의 이익에 입각한 정책을 수립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이 시기는 크로아티아 공산당이 민족주의를 본격 수렴하면서 그 전위로 나선 중요한 해로 기록되었다.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이 문제를 좀더 포괄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같은 해 3월 크라핀스케 토플리체(Krapinske Toplice)에서 ‘사회주의와 민족 문제’라는 제목의 대규모 학술 회의를 개최했다. 이 학술 회의를 지배한 주제는 현 단계에서 사회주의가 근거하고 있는 계급 이론과 민족 개념이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집중되었다. 사실상 공산당 이론에서 거의 무시되고 특히 유고에서 터부시되던 민족주의 문제를 크로아티아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후원한 학술 대회의 주의제로 상정한 것만도 상당히 큰 모험이었다.
학술 회의가 열린 크라핀스크 토플리체
이 대회에서 나온 결론은 사회주의 이론과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참석자의 한 사람인 즈덴코 로테르(Zdenko Roter)는 주제 발표에서 “민족주의를 단순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통합과 창조성을 자극하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학술 대회는 그야말로 민족주의를 합법적인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일대 ‘사건’이었다.
즈덴코 로테르
이 학술 대회 이후 크로아티아의 분위기는 ‘민족 재발견’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고, 이는 곧바로 민족의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 내는 시민 운동으로 번졌다.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영웅으로 부활한 첫 번째 인물은 크로아티아 농민당을 창설한 이후 민족운동에 몸바치다 암살당한 스테판 라디치였다. 문제는 라디치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크로아티아 중앙당 서기인 미코 트리팔로는 현직 유고슬라비아 국가 원수이며 유고 연방의 창시자이기도 한 티토(3위)를 제치고 2위에 랭크되는 이변을 낳았다.
스테판 라디치
이른바 ‘민족 영웅 되찾기’는 영웅의 동상 건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공산당 외곽 조직인 ‘크로아티아 학생 연맹’ 지도부는 1971년 8월 라디치 전농민당 당수의 동상 건립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은 연방 정부와 세르비아를 심하게 자극할 수도 있다는 일부 여론에 밀려 동상을 수도인 자그레브에 세우지 못하고, 결국 지방 도시인 메트코비치에 세우게 되었다. 심지어 극단 민족주의자들은 크로아티아의 왕이었던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동상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
일련의 영웅 되찾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이슈는 19세기에 자그레브의 상징으로 불려졌던 요시프 옐라치치(Josip Jelacic)의 복권 문제였다. 옐라치치는 공산주의의 대부 칼 마르크스가 한때 보수,반동주의자로 몰아 격렬히 비난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옐라치치는 1848년에서 1849년까지 계속된 헝가리 혁명을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는 ‘반동적 행태’를 보인 인물이었다.
요시프 옐라치치
이 때문에 유고 연방은 공산주의 수립과 함께 옐라치치를 기념해 만든 자그레브 시의 옐라치차 광장(Trg Jelacica)을 ‘공화국 광장’으로 개칭토록 했었다. 이제 와서 그를 새삼 복권시킨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민감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복권 문제는 없던 것으로 결론이 낫지만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의 기관지 <흐르바츠키 티예드니크(Hrvatski Tjednik)>에는 그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해야 한다는 독자 편지가 쇄도했다. 일부 지식인들이나 정부 관리들에 의해 당겨진 민족주의의 불길을 일반 크로아티아 시민들에게 전달했던 매개체도 바로 <흐르바츠키 티예드니크>였다.
자그레브의 옐라치치 광장
이 기관지는 1971년 9월부터 11월까지 세르비아의 경제적 지배를 지적한 일련의 시리즈물을 통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물은 크로아티아의 일부 지식인들이 비밀리에 작성한 청서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는데, 청서에는 베오그라드의 은행이 어떻게 달마티아의 금융업을 장악했으며 심지어 크로아티아 은행을 어떻게 착취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흐르바츠키 티예드니크>가 보도한 구체적 사례를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베오그라드에 소재한 수출 회사들이 크로아티아를 불법적으로 착취하고 있다. 예컨대 베오그라드에 본부를 둔 수출 회사 프로그레스 사는 1971년 내내 크로아티아 공화국 선적의 상선을 리베리아나 룩셈부르크에 등록된 가공의 선박 회사에 매각했다. 그런데 프로그레스 사는 이들 상선을 이중으로 매각해 막대한 불법 이익을 챙겼다.
2. 베오그라드 무역 회사들은 또 연방 기구를 통해 정치적 압력을 넣어 외화를 벌어들이는 창구인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일급 호텔들을 장기 임대했다. 이 조치로 크로아티아의 호텔 사업으로 인한 민족 자본은 식민지 하에서 지배를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베오그라드에 본부를 둔 제너럴 엑스포트 사였다. 이 회사는 달마티아 해안에 있는 옐사와 프리모스텐에 있는 호텔 두 곳과 10년간의 합작 계약을 체결했고 차브타트에 있는 1개 호텔과는 무려 20년간의 합작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제너럴 엑스포트 사는 정치 압력을 통해 단지 호텔 구매 가격의 10%만 투자했지만, 각 호텔의 외화 수입 가운데 최소한 50%를 베오그라드로 송금받을 수 있는 법률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특히 제너럴 엑스포트 사는 아예 경영권을 간섭할 수 있는 ‘호텔 서비스 위원회’라는 규정에도 없는 조직을 만들어 호텔이 적자를 기록하더라도 정해진 외화를 베오그라드로 가지고 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또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는 이런 시리즈물 외에도 교통 표지판에 세르비아 어만 표기되어 있던 것을 개선하는 운동을 벌여 세르비아 어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어 표기도 병기하도록 하는 등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크로아티아의 민족 운동은 마침내 넘을 수 없는 선까지 넘기 시작했다. 1971년 여름 크로아티아 정부 요인이 포함된 민족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연방 정부에 공식 요청했다.
1.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 민족이 주권을 가진 민족 국가임을 인정하라. 크로아티아의 주권은 연방 탈퇴권을 포함한 자결권에 기초하고 있다.
2. 크로아티아 어는 유일한 공용어이다.
3. 크로아티아 당국은 크로아티아 내에서의 세금 징수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다.
4. 크로아티아는 독자적인 금융 정책을 편다.(독자적인 화폐 발권을 시사)
5. 유고 인민 해방군에 입대하는 크로아티아 병사는 오직 크로아티아 공화국 내에서만 근무한다.
6. 크로아티아 내에서 향후 독자적인 크로아티아 방위군을 조직한다.
이같이 극렬한 민족주의는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 때까지 유고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특히 11월에는 자그레브 대학을 중심으로 이의 실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었다.
드디어 연방 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군을 동원했다. 크로아티아 공산당 지오자인 트리팔로와 다브체비치-쿠차르는 사임당했으며 공직에서 추방된 크로아티아 인사는 4백 명에 달했다. 민족주의 선동자로 낙인 찍힌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는 1840년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데다 크로아티아 일반 시민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 폐쇄는 면했지만 완전히 재조직되었으며 활동 영역 역시 극도로 축소되었다.
티토는 이러한 조치가 일견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승리로 비쳐져 또다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행동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다음해 10월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인 마르코 니케지치를 실각시킨 뒤 당 고위 인사에 대한 대대적 인사 이동이 단행되었다. 티토가 노린 정치적 효과는 연방 체제를 위협하는 각 공화국의 민족주의는 단호히 대처해 나간다는 경고였으며,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에 대해서도 똑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마르코 니케지치
티토는 크로아티아의 위기를 가까스로 수습한 뒤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우선 자신의 나이가 70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유고 연방의 기틀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 장치를 강구해야만 했다. 결국 그 방향은 각 공화국이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각 공화국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화국 간의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1974년에 제정된 신헌법은 바로 티토의 발상이 최종적으로 완결된 것이었다. 실제로 이 헌법은 연방을 보다 느슨한 형태인 국가 연합으로 근접시켰다. 각 공화국은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받았으며 연방 내 최대 세력인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세르비아 공화국 관할의 자치주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에게도 공화국의 지위와 맞먹는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연방 정부는 국방, 외교, 그리고 전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을 책임지며,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행정 업무는 거의 대부분 각 공화국의 정부 관할로 이양되었다.
1974년 헌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세르비아였다. 언제나 끊임없이 세르비아 패권주의를 추구해 왔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견제 역할을 한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티토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족 해방 운동을 수행한 정통성 있는 지도자답게 기본적으로 모든 소수 민족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연방 정부 수립 후 민족 문제에 관한 첫 입장 표명은 1959년 공산당 중앙 위원회 명의로 모든 당 하부 기관에 보내진 서한에서였다. 이 편지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소수 민족의 권리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또한 신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을 강조했다. 물론 이 서한이 발송된 직접적 계기는 세르비아 공화국측이 관장하고 있는 코소보 지역에서의 민족 갈등이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취해진 탈집중화 정책과 경제 개혁에 대해 세르비아 인은 이른바 티토를 중심으로 반세르비아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실제로 티토의 이 두 가지 정책은 기본적으로 슬로베니아 공산당 이론가였던 에드바르드 카르데이(Edvard Kardeji)가 주장해 왔던 ‘경제 개혁은 민족 간의 평등이 확립되어야 가능하며 두 요소는 서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명제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2년 유고 공산당 제6차 전당 대회에서 티토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출발점으로서 탈집중화 정책을 채택한다.”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대세르비아주의에 제동을 건 출발점이 되었다. 티토는 기본적으로 유고슬라비즘이라는 거창한 구호 하에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세르비아의 패권주의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연방 체제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티토는 항상 폭발할 가능성으로 가득 찬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유지하는 유일한 안전핀이었다.
에드바르드 카르데이
유고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이후 말 그대로 복마전인 민족 문제를 어떻게 다뤄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유고 공산당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사상 첫 통일 국가인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왕국’이 건설되었으며, 이때 첫 공산당인 세르비아 사회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18년 11월 25일 창당 대회를 치른 세르비아 사회 민주당은 그 명칭에 걸맞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몇 구절을 빼고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그대로 간직하였다. 창당식에서 통과된 당 강령은 새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의 연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또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는 본래 한 민족이다. 왜냐하면 이 세 민족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분간할 수 없는 똑같은 인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세 민족 모두 한 민족임을 느끼고 있고 통일을 원한다.”고 지극히 낭만적으로 규정했다.
창당된 직후부터 세르비아 사회 민주당 내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갈라져 파문을 일으키면서 몇 달 뒤 좌파는 딴살림을 차린다. 이것이 바로 유고 공산당의 창당이었다. 1919년 4월 창당 대회를 연 공산당은 민족 문제에 대한 언급에서, 모체인 세르비아 사회 민주당의 입장에서 상당히 발전했지만 지극히 비현실적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원칙적인 입장만 천명했던 정도였다. 창당 대회에서 발표된 공산당의 입장을 간추려 보자.
1.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적 현상이다.
2.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는 민족도 소멸하고 국가고 결국 소멸한다.
3. 사회주의만이 민족의 화합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공산당의 전통은 2차 세계대전 때의 아브노이를 거쳐 결국 유고슬라비즘을 근간으로 한 사회주의 연방 국가 수립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민족 정책은 이른바 각 민족 간의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한 유고슬라비아 내에 있는 모든 민족의 일체성을 창조하는 근본으로서 유고슬라비즘을 강조했다. 이것이 절정에 이른 때가 1958년에 열린 유고 공산당 제7차 전당 대회였다. 이 대회는 각 지역의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중심 개념으로 유고슬라비즘을 특별히 강조했다.
공산주의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멸을 전제로 하기 있었기 때문에 민족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해 왔다. 특히 초기 유고 연방의 분위기가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오다 마침내 민족 문제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1964년 12월에 열렸던 유고 공산당 제8차 전당 대회였다.
전당 대회는 마지막 날 채택한 결의문을 통해 “(유고에서) 민족들이 사회주의화 단계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오류이다. 때문에 통일된 유고슬라비아 민족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유고슬라비즘)이 필요하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 근저에는 각 공화국이나 자치주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혹은 그 외의 다른 기능을 무시해 온 경향이 도사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의문이 채택된 것은 이미 유고 내에서 민족 문제가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으로 치부될 성질의 것이 아닌 정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변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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