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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룡정 원문보기 글쓴이: 현일
서문
이글을 쓰는 이유는 그동안 내 글이 틀을 부수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없지 않다. 대의련법이나 자광신도법으로 자천하는 방법을 쓴 것도 사실이지만 좀 더 구체적이고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써야 할 거 같아서 다시 쓴다.
수련법 위주로 쓸 것이기는 하지만 무조건 틀만 만들어서 형식을 말하지는 않고 무형식적인 것과의 의미를 구분하면서 나름의 이해를 주고 싶어서 쓴다.
그동안 틀 없고 구애받지 않고 자천하는 것을 말하다가 왜 틀을 만들고 형을 만들어서 뭐하자는 것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오해인데 무조건 틀을 제거하고 뭐든지 마음이면 다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진정으로 주(도)를 이루고 자기 길을 가는 방법을 논하고 싶었던 것이며 그 와중에 불필요하고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많은 개념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생각과 관점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체를 하지만 해체만 한다고 주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재구성하고 함양하며 성취하는 방법을 말해야 하고 신체 움직이고 마음 다루는 방법도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쓴다.
틀을 말하면 틀이 되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방법으로 자천을 한다면 그 방법과 자기의 성취와 도를 일치하려는 짓을 한다. 이러면 당연히 그 틀을 비판하게 된다. 해야 할 것은 틀을 만들고 유도하는 자가 되는 것이지 틀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길을 내고 물을 유도해서 물을 저장하고 그 저장한 것을 다른 논에 흐르게 해서 논에 물을 대고 또 다른 논으로 흐르게 한다. 이럴 경우 자기가 물이 흐르는 고랑이 아니라 물을 유도시키는 고랑을 만드는 자라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된다. 내 신체를 다루고 움직이게 하고 멈추게 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그 형식이 있다고 해서 그 형식에 목숨 걸고 그거 아니면 안 되며 형식 자체를 경외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수련법을 정법이라고 하는 것이나 이러한 방법으로 앉고 이러한 방법으로 호흡하고 기를 유도하고 이러한 것을 깨우치고 이렇게 호수를 외우고 이걸 알아야 하고 이걸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들은 모두 형식이다. 이런 것은 틀이며 틀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자천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을 이용해 원하는 주를 얻으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틀이 되지 말고 그 틀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방법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며 내가 만든 하나의 틀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무조건 따라만 하는 원숭이는 원하지 않는다.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엉성함은 자천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처음
누구나 처음을 알고 싶어 하고 처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난 거기까지 알지 못한다. 이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런 말은 과학에서나 하는 연구이지 자천에서 말하지는 않게 된 거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야 할 그곳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의 하늘을 창조하는 것이 관심이고 그것은 내가 도달해야 하는 그곳이 이 지구의 자연이고 산천이며 이곳에 합일 하면서 지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천으로서 이 세계의 시작은 우선 지구의 시작을 말해야 한다. 누군가의 의도로 이 지구가 만들어진 건 사실인 거 같다. 그게 "창조주냐?" 이렇게 말한다면 좀 생각의 크기가 작은 거라고 말하고 싶고 그냥 지구를 말하는데 벌써 창조주 운운하면 앞서가도 너무 간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거기 가보면 알 방법이 있다. 그리고 지구 넘어 태양계인데 태양계에서 자기 입지를 정할 정도면 더 이상 이 글은 소용없는 정도이니 말 안 해도 된다.
은하 너머 그 너머로 한참을 가야 하지만 그건 인간이 할 수 있지도 않고 아직 몇 없다.
그래서 자천에서 지금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이만큼이다. 우주의 시작은 심히 교만이고 그 이상은 터무니없다.
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가끔 이런 걸 안다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허풍이 심함을 알 수 있다. 과거부터 창조를 말하는 많은 것은 그저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크기 정도에서 생각한 세상 창조이다. 은하의 크기를 알지도 못하고 은하를 포함한 더 큰 세계를 알지도 못한다. 장자에서 말하는 우주는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우주는 아니다. 사고의 엄밀함이 요구된다.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누가 세상을 또는 지구나 태양을 만들었는지를 관심가지기 보다 거기에 도달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우리의 학문연구법이라고 까지 난 말한다.
내 처음
세계의 처음은 그렇고 자천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기의 처음이다. 내가 윤회를 거슬러 언제부터 나라고 할 만한 자아가 있었는지 또 자아는 아니지만 부가 만들어 졌는지 그것을 알 수 있으면 좋은데 분명 곤란함이 크다.
이런 건 해결하기 힘든 것이고 그것보다 자천에서 말하는 자기의 처음 알기란 무에서 유가 되고 생멸을 항상하는 이금 이 순간을 말한다. 내 생각이 시작하고 감정이 시작하는 그 시기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기틀이고 발하는 그 경계이다.
생각하기 시작하는 기점, 감정이 일어나는 그 기점을 창조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인데 외부의 세상 창조가 아니라 내 자신이 항상 창조되는 지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때론 이런 생각과 감정이 나오는 기점에서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오르기도 하는데 암튼 이러한 내 시작을 의미하는 항상 항상이기만 한 것에서 순간의 분기점을 말하다.
시작이라는 것이 태초의 시작이나 내 존재의 비롯됨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지금 행하는 이러한 행동의 시작 그것을 태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태극이라고 하면서 음양이 갈라지는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외로운 투쟁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럼 과거와 내가 선택하는 태극 이전은 모두 무극이 된다. 난 태극이고 음양은 선택의 갈등이다. 세상은 점점 무극 속으로 침잠되어가며 무극을 바탕으로 태극에서 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떠한 무극이냐로 내 선택의 폭은 넓어질 것이며 그 무극의 확장과 바로 세워짐으로 태극의 자유로움과 현명한 판단이 될 것이다.
내가 시작되는 그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자천의미
보편되기
자천의 의미는 우선 보편이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과거에 무극이나 하늘이 된다는 것이나 순수한 근원에 도달하거나 불교적으로 불성을 깨치는 것이 결국은 보편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체개념인 다양한 근원이나 본질에 대한 이론들이 이러한 평등하고 전일하며 보편적인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이론은 결국 그것에 도달하고 그것이 되려는 목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신이 된다거나 하늘이 된다거나 하는 것이며 이것이 개체를 넘어 전일성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러한 목적을 두는가? 그건 우리가 전하늘에서 온 것이어서 우선 그곳에 도달하고 싶은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며 전하늘에 도달 한 후에 전하늘 자체의 고향이 절대계에 대한 향수라고 봅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 이렇게 근원이나 보편을 느끼거나 합일하거나 들어가면 행복합니다. 법열이라고 하는 것인데 좋아서 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건 이러한 보편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개체성의 추구가 된다는 역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과거에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관념과 체계와 형식에 바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했습니다. 일자를 추구한다고 모든 사람을 일의 의미로 보려고 해선 안 됩니다. 당양한 개성과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서구의 영향으로 이게 당연한 거라서 가치를 이해못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지금도 하나의 가르침과 하나의 법만을 추종하고 정법과 이단을 논하며 자기와 다른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면서 지나친 심력의 소모를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기 마음을 소모하고 흐르게 한다는 것은 자천의 기초적인 원리인 회광반조도 모르는 것으로 적어도 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모르는 게 아닌가 합니다. 감정이나 지나친 생각으로 자기의 마음을 소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보편과 합일 한다면 그렇게 합일한 “나”라는 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보편이 되어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전일성을 이해하고 체득한 더 큰 의미로 초월하는 것으로 전혀 다른 삶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자천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은 상당히 원론적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일상의 생활에선 인격의 도야로 나타납니다. 일반인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며 관심도 다르고 행동하는 목적이나 삶의 의미도 달라서 과거엔 대인이라고 했고 성인이라고 추앙했지만 지금은 현실적응 못한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기도 합니다. 화를 안내는 것은 아니고 화내는 이유가 일반인보다 멀리 보는 것이 있고 어떠한 감정과 사고도 남들보다 다양한 차원과 넓이에서 보기 때문에 일상에선 꿈꾸는 듯하고 전혀 현실에 무심한 듯 하기도 합니다.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사회에 자기 주위에 국가에 인류에 이바지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미와 가치판단이 전혀 다르니 그렇습니다.
이러한 인격이 달라짐이 자천의 의미입니다.
또 세상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과학보다는 엄밀함이나 자세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이진 못합니다. 이건 이러한 것에 관심있는 사람의 영역일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아우르고 통괄할 수 있는 다른 지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데 그걸 견해나 지혜나 안목이라고 하는데 지식과 인생의 의미와 홍익행과 본의적인 전반적인 통일성에서 나오는 지식을 추구해서입니다. 하나의 지식에 운명이 있고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으며 바람이 있다는 그러한 통찰입니다.
지식은 내가 지금 그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실행해야 하는 것이지 알고 마는 것이 아니며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거지 남이나 아무나 해도 되는 것도 아니며 그러한 이유는 내가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체계 자체가 달라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천은 실천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를 알고 하나를 실천하고 하나를 또 알게 되면 또 실천으로 가는 것이지 공허한 정보나 지식 남발이 아닙니다. 그러한 앎과 행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나를 이기는 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것이나 자기감정만을 위하며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숙으로는 안 되며 생각도 의미 있고 필요한 것만을 하는 간략함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몸으로, 이런 자아로 만들기 위한 것이 자천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자천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이나 세상을 느끼는 감이나 세상과 함께 하는 함이 우리가 해야 하는 길이며 이 길로 가는 의미가 됩니다.
영생이나 건강이나 다른 능력이 아닌 바름을 원하고 사회생활과 경체활동에서 내가 당장 판단할 그 바름을 알기위한 현명함을 기르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용기를 기르며 그러기 위해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움과 돈, 명예, 권력, 이익 등에서의 결단력과 자기의 감정을 이기는 극기와 바른 사고의 이어짐을 위한 진지함이 있어야 하고 전체를 보는 안목에서 나오는 신념이 있고 작은 것에서 전일적인 맥락을 보는 섬세함도 갖추어야 합니다.
보편의 정도
하늘이 된다고 해도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하늘도 무조건 하늘이라고 말하면 정해진 크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분명한 것을 한정을 지어야 하며 또 이미 정해진 크기가 있습니다. 명확하게 나누어 객관적인 지표로 보여줄 순 없지만 내가 커져가고 하늘이 되어가는 그 과정이 분명 있습니다. 보편도 보편이라고 하면 무조건 절대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 적용 범위가 있는 것이겠죠. 시대를 거치면서 크기는 당연히 달라졌으며 의미도 조금씩 다를 것인데 그리고 사람마다 이해하는 의미가 다르며 문화나 나라나 민족마다도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보편의 크기, 하늘의 크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확장하기 위해 자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보편을 확대해가는 것은 영단부터이지만 분명 이러한 것이 주입니다.
기초적인 자세
자천하기 위한 기초적인 것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간단히 하면 자기가 해봐서 좋으면 하고 아니면 안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누가 시키는 대로만 사는 것은 학창시절이나 청소년 때이고 성인이 되면 자기의 판단은 자기가 하려고 해야 하며 이것도 훈련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았어야 성인이 되어서 더욱 훌륭한 자기 주체성을 가지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사회생활하면서 스스로 해쳐가야 합니다. 무턱대고 하다보면 실수나 시행착오가 있는데 그렇다고 실수나 시행착오가 무서워서 도망갈 필요는 없고 역시나 해보면서 자기만의 인생을 살면 된다고 봅니다.
음식
음식은 어떤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자천에 좋은 약이나 음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기가 부족한 경우 진기보충을 하는 약도 있고 음식도 있습니다. 기타 건강이나 몸의 불편을 덜고 더 나은 효과를 위한 다양한 것이 있는데 이런 것에 의지해서 자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거지 그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주(도)는 자기의 삶입니다. 살면서 항상 조심하고 극기하며 내면을 관찰하면서 바르게 이끌어가는 것이지 어떤 것에 의지해서 한 번에 해결되거나 이루어져서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건강을 위해 음식조절과 삶의 윤택함을 위한 규칙적인 식생활이나 적절한 운동과 성실한 몸 관리가 좋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자천하다보면 음식에 따른 다양한 신체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아서 속이 불편하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기도 하며 맞거나 덜 불편하고 아니면 좋게 느껴지는 음식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역시 자기가 해보고 맞는 것을 먹으면 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술이나 담배는 무조건 금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건강을 해치고 인생을 힘들게 하거나 남에게 해로움을 주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해결하면서 즐기느냐 입니다.
일상생활
자천하려고 산 속에 혼자 들어가거나 출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들이 주의 주축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의를 행하기 위하고 홍익을 위하는 것인데 출가나 혼자만의 공부는 첨부터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나 집에서 자천 할 경우 가족 분들의 이해와 배려가 있으면 좋지만 지금 대개가 그러지 못한 게 현실이니 안타깝습니다. 딱히 해결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각자 알아서 가족과의 관계를 잘해가면서 하라고 밖에 할 방법이 없습니다.
친구들이나 사회에서 대인관계에서도 지금은 이 분야가 그렇게 각광받거나 하지는 않고 건강이나 취미생활 정도의 활동으로 인정받는 게 그나마 나아진 것일 텐데 그렇게라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도 닦아서 돈 버냐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와 접목이 되면 좋지만 아직은 요원하니 역시 할 말이 없습니다. 공부 많이 해서 그러한 세상이 되게 해야 한다고 해야겠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함께 하는 공부였으면 합니다. 그 바탕에는 본의에(이기와 이타의 합일된 마음) 의한 홍익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진짜로 한다면.......
자천을 진짜 대단 이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충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음을 다지거나 준비하라는 의미로 할 말이 있는데 자천은 분명 인간개조에 가깝습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것이든 변화에 저항하며 버티려고 하지만 그래서 자천이 어렵고 힘들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을 이기고 자천하면서 왜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안다면 분명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인생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변한다는 것은 행동이 변하고 운명이 바뀐다는 의미도 됩니다. 생각이 바뀜으로 해서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변화가 아닐까요? 사회에서 성공하며 경제적인 풍요를 위해 대학 다니고 직장을 구하다가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그런 성공보다 자기의 인격과 인성의 성장이 더 우선하다는 생각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그렇게 사회성공을 위한 악착같은 살벌함이 우리 인간의 의미가 아니라는 생각만 해도 분명 삶은 많은 달라짐을 가질 것입니다.
사람 따라 사귀던 애인의 모습에서 그전에 대단해 보이던 것이 유치하고 수준 낮아 보일 지도 모릅니다. 사람에 대한 가치판단이 달라지면 외로워지거나 대인관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전에 소중하고 대단하다고 여기던 것이 그렇게 대단하거나 소중해 보이지 않고 다른 것에 관심 가지게 되는 변화도 일어납니다. 가치관의 변화 이거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것을 알게 되느냐로 인한 인생의 변화를 모른다면 자천이 아직은 낮은 단계이지만 그런데도 주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충격이 그만큼 심하거나 인생이 혼란함이 될 것입니다. 각오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대단 이상이 목적인 사람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면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걸 방지하는 방법은 처음부터 더 큰 생각과 더 큰 범위에서 선택하고 받아들인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의 선택도 이러한 더 넓게 깊게 본 관점에서 선택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이거나 자기 가족이나 주위만이거나 그런 정도의 크기로 선택한 것은 대단이 넘어가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정말 진정으로 자기가 오른 대단의 성취라면 계제에 따른 본의가 있어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그 엄밀한 계제의 힘이 있습니다.
돈 벌고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가지려고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이상과 뜻을 이루기 위해선 저러한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자천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가려고 하거나 우화등선하고 안빈낙도를 추구한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만두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 자천 벌래가 더 나쁩니다. 돈에 관심가지는 것보다 훨 나쁩니다.
하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일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돈 벌면서 인생의 꿈을 가지면 그것이 홍익이니까요. 일만이 아니라 예술이든 학문이든 문화든 어떤 것이든 사람은 가까운 것부터 더욱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부터 만족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거창한 뜻이나 이상만 말 할 수 없습니다. 자천해서 고단자가 된다면 그러한 사람들의 작은 것부터 신경 써야 하고 그러한 것에서 충족 되어야 더 나은 것을 원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위한 사회의 경제나 학문이나 정치나 무엇이든 인도해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성생활
이건 과거부터 금지하는 말들이 많아서 따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생활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자천하다보면 초기에 욕구가 강해지기도 하고 다양한 재미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금할 순 없습니다. 기의 민감도가 생겨서 자기 욕구도 클 뿐더러 애인이나 이성의 감정도 전이 되면 그 강도가 심히 클 것인데 무조건 참으라고만 할 순 없습니다. 애인과의 정상적인 관계라면 맘껏 즐긴다고 나쁠 건 없고 미련한 지식으로 자기학대하는 게 더 바보 같은 것입니다. 우린 뜻을 두고 살려는 거지 금욕으로 자기의 수명을 늘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별로 관심 없고 딱히 욕구가 없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닌 경우 이런 것으로 지나친 고민을 할 것인데 너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천에 대한 마음가짐을 잃지만 않으면 됩니다.
감정처리
자천에서 감정 처리는 중요합니다. 자천이 진행되면서 내 안에는 그전에 없던 힘이 발생하는데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니지만 또 별거라면 너무도 고민되는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힘을 기라고 하면 기는 안에 생긴다고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교류를 하는데 이 교류는 일상의 변화가 됩니다.
기는 단순히 신체안의 경맥을 흐르는 그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흐름과 변화와 사건을 일으키는 총체적인 무엇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기의 질적 또는 양적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에 따른 운명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인생으로 다가올지 그건 모두 다릅니다. 그리고 또다른 것으론 일상의 사건 흐름이나 주위의 사람에게 일종의 그렇게 되라고 하는 힘이 강해집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일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어날 것을 미리 생각하거나 원하는 것이어서 내가 생각한대로 일어난 게 아니라 일어날 것을 미리 생각한 거꾸로가 더 많은데 정말 진심을 담고 생각하거나 감정을 일으키면 사건이 그리 되기도 합니다.
자천 초기에 자기의 마음이 혼란하고 마음 끝에 살기를 거두지 못하는 정도의 고요함의 이룸이라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생각대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직 공부가 부족한 것이지 더 대단 것은 아닙니다. 고요함을 이루기 위해 더 넓은 마음을 이루기 위한 것이 자천이라서 이러한 사사건건에 해당하는 일상에 영향 받고 영향 주는 것은 자천의 본래는 아닙니다.
그 이상의 세상에서 내 주에 맞는 또는 뜻에 맞는 일에만 영향을 주고 받아가야 합니다. 내 가족의 병은 고치지 못하지만 인류의 병은 고칠 수 있는 그러한 범위의 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천하는 분들은 자기 안에서 생각하고 자기 안에서 감정을 가지며 신체 외부로 내보내거나 방출하지 말며 감정 일어날 때, 욕심이 일어날 때, 그때가 자기 성찰하는 때라는 것을 명심하고 겸손하고 배려심을 가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의지의 힘을 어디에 적용할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름의 감정 해소법을 가져도 되겠지요. 너무 참아도 병이 되고 너무 외부 탓으로 해도 옳은 것은 아니니 자기의 감정을 해소하고 긍정적으로 자기를 이끌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이러한 감정 처리에만 빠지면 습관이 되기도 하니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것에 종속되면 안 됩니다.
마음자세
자천을 위한 마음자세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화엄경에선 초발심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듯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말하는 아싸법처럼 하나의 이룸을 이룬다는 것일까요? 아님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요?
초기에 자천을 무슨 목적으로 하는지 그것이 확실해야겠지요. 재미로, 건강으로, 취미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이런 이유로 한다면 그 정도의 것만 보고 관심 가지며 더 이상의 깊은 것은 너무 접근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괜히 허황된 목적을 두고 한다면 이도저도 아니며 건강도 해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고 도에 대한 얻음을 위한다면 확실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감상적인 것이나 황당한 것은 안 되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느 정도의 것을 원하는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자천도 등급이 있어서 무조건 가장 위나 최고나 궁극을 원하는 것은 바라기가 어렵습니다. 자기가 갈 수 있을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천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나 지식을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치를 알 만큼은 알아보고 해야지 무턱대고 덤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각오
그래서 정말 대단 이상을 원한다면 대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알아보고 자기가 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때 그에 해당하는 마음을 정할 수 있습니다. 난 대단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인간이 아닌 거겠죠.
인간이 아니면 뭐냐고 하냐면 그냥 전생의 공부가 있는 분이라는 거지 별 말은 아닙니다. 쉽게 한 번의 생애로 공부가 진행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 해보면 알죠. 맘대로 안 되니까요. 다만 내가 어디까지 갈지 그건 알 수 없어서 고민이지만요.
일반적으로 이생에서 공부해서 오를 수 있는 계제는 생각보다 낮습니다. 자기 생을 통틀어서 이번이 첫 자천이면 공영단이 한계가 될지 모릅니다. 이만큼이라도 간다면 입지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사실 가기는 좀 쉽습니다. 그것보다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느냐가 더 힘듭니다. 이걸 난 도지력이라고 하는데 도를 이루기보다 도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듭니다. 과거에 공영단 정도 갔다면 당연히 이번 생은 대단 이상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너머는 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섭섭할 것이니 여기까지 오고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암튼 정말로 주를 이루고 싶다면 여기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자천할 때의 마음
자천을 할 때 어떻게 마음을 정해야 하는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겠죠.
호흡한다면 하단전이라고 기해나 석문이나 관원이나 그쯤 어딘가나 뱃속 어딘가나 하면서 많은데 딱히 어디라고 주장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 상관없는데 딱 여기가 맞다고 할 필요는 없을 거구요. 자기가 속한 곳이 있다면 거기대로 하고 가르침이 맘에 드는 가르침대로 하면 되겠죠,
아니면 어림잡아 아랫배 정도면 된다고 봅니다. 때론 뱃속으로 집중되기도 하고 때론 외부로 나오기도 하고 때론 기 따라 움직이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론 아랫배에 처음에 의식을 두는 것으로 시작하고 익숙해지면 신경 쓰는 정도면 되고 더 익숙해져서 의식과 마음이 분리되면 마음 한쪽을 아랫배에 두면 됩니다. 암암리에 마음 두는 것이면 되죠.
아랫배에 마음을 두는 이유는 단전을 형성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건 초기에 그런 것이고 마음을 내리기 위해서 아래로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마음을 내린다는 것이 고요함이고 이 고요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마음을 아래로 두는 것이지 단전에 기 모으고 운행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자천을 하든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나 의식이라는 것이 기이고 또 몸이기 때문에 그때에 따라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절로 마음은 고요해지고 이 고요함이 아래로 마음 두는 것 같은 느낌이고 의식은 맑게 있거나 퍼져있거나 합니다. 아니면 마음이나 의식이 그저 그런 상태로 딱히 어디라고 할 필요 없이 그냥 있습니다. 그때 그때에 따라 맘 두기와 의식 두는 것을 하면 됩니다. 고요하면 됩니다. 그게 다입니다. 고요!
평상시
평소에는 어떻게 마음 두는가 하면, 그건 의지를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지 어떠한 사람이 될지 이런 것을 확고히 정한 다음 그것을 위한 자천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면 됩니다.
이런 것이 내 깊은 곳에 심층 깊은 곳에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이 심층에서부터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 내가 원하는 뜻으로 발현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자천입니다.
구체적으로 일일이 어떻게 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를 두고 그에 맞게 사는 것이 자천입니다.
자천원리
가마오
자천이 되는 원리엔 이 가마오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이 가마오의 변환으로 형성된 것이며 이것의 변화를 이용해 더 나은 몸으로 갱신하는 과정이 자천입니다. 단전이 만들어지는 것도 처음에 오의 운행으로 정을 모으는 작용을 하며 마운행으로 상부를 끌어내려 마음을 모으면 이게 신기합일(神氣合一 마음이나 의식과 기의 합일)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가운행이 일어나 바른 의기가 나옵니다. 이러면 단전이 형성 된다고 합니다.
이후의 내주천이나 파조선이나 하늘운행은 이러한 가마오의 자기 확대입니다. 가마오 확대는 마음의 고요와 뜻의 크기로 인해 일어나며 각성이 그 방법입니다.
환명
그리고 환명은 외부의 운명과 기와 교류하는 관문으로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생을 결정짓고 수명을 관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내가 살아가는 삶이 되는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천은 환명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원천
원천은 내 본체입니다. 내가 자각하고 변한 만큼 본체가 드러납니다. 자세한 건 대의련법에 있습니다.
심법
위의 것은 몸의 구성적인 면이고 내가 주체적으로 해가는 방법으로서의 원리는 심법입니다.
간단히 내가 원하고 바라는 그대로 몸이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암시효과나 최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확고한 결단을 한다면 분명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로 앞의 목적을 두고 무엇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마음을 먹고 자천에 임하면 당장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차차 진행 될 것입니다. 너무 앞선 것을 정하거나 먼 것을 하면 곤란하니 그런 건 의지로 깊이 두는 것이고 당장의 것을 두면서 하면 이것도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런 깊은 것과 당장의 것을 서로 원활하게 이용해야죠. 뒤에 설명한 시간이나 장소나 자천방법들이 그러한 심법을 정하는 것을 위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습관들이고 그렇다고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자기 암시를 긍정적으로 다루면 커다란 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두 마음 혹은 세 마음
자천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진리란 근원적인 곳이고 난 천원계라고 합니다. 불교적으론 진여가 될 거 같습니다. 이러한 진리에 다가가는 것만 부각해서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에 현혹되어 그것만 바라면서 수련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생에 살고 있는 한 이것은 온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자천하다보면 감정 사라짐이나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나 정말 이게 바로 법이구나 진리이구나 이게 바로 열반인가 보다 하는 고요함과 법열을 느끼지만 그건 역시나 잠깐 진의 세계에 드는 것이고 경험입니다. 그 상태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요함 중에 하나를 경험하는 것이구요.
그리고 진의 마음과 현실의 마음과 다시 여기에 이러한 진의 세계를 경험 한 마음이 있어서 이걸 경험한 사람은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는 정도는 진의 세계를 얼마나 강하게 경험하느냐와 견해가 이루어 졌느냐 이겠죠. 경험해도 이치이해가 안되면 바르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진의 세계에 들어가면 이세상의 각종 얽매임에서 벗어나 홀가분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다시 현실에 오면 얽매이던 것들이 하나둘 다시 일어납니다. 그것도 심히 괴로운 일이지요. 그러한 것을 경험하면 일상의 감정 일어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합니다. 어디를 기준으로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어렵죠. 진의 세계로만 살면 아무도 이해해 주지도 않고 심하면 사회문제도 됩니다. 이세상의 윤리체계나 법이나 관습과는 전혀 다르니까요. 이러한 현실의 굴래와 진리의 광활함 사이에서 방황 할 수도 있고 그러다 주위사람이나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서 진리를 버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진리는 그만큼 무겁습니다.
자천단계
계제
계제에 대해선 하늘공부 1에 있습니다.
자천방법
자천하는 방법은 호흡이나 호수 등을 나누어서 설명하지만 세상엔 더 많은 방법이 있는데 그 안의 원리는 상통한 것이니 함께 익히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만 알거나 하나만 고집하면 자천의 전체적인 안목에 이로움이 없습니다.
기본적인 것
자세
자세가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분명 자세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자세이어야 한다고 굳이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문의 말대로 틀이 중요한 게 아니라 틀을 이용해 내가 얻으려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세는 앉는 것을 위주로 합니다. 눕거나 서거나 다양하게 하는 것도 분명 있지만 앉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다른 자세도 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세든지 한 번 하게 되면 그것을 지속적으로 하고 어느 기간 동안 나름의 성취를 이룰 동안 그자세로 꾸준히 하기를 바랍니다. 이거저거 마구 섞어서 혼란하게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손모양이나 발모양이나 허리나 목이나 눈을 두는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데 난 굳이 그러지 않습니다. 분명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해보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자세를 정하고 그것을 꾸준히 익숙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세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어떤 자세든 한두 가지로 습관들이는 것을 더 중시합니다.
자세도 암시라서 그자세가 되면 마음이 편해지고 잡념도 줄어들고 신체가 저절로 반응하며 자천 모드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자천습관 들이는 자세를 하는 것입니다.
장소
모든 장소, 모든 차원, 모든 그곳이 되는데 역시 나태해지고 집중이 어렵고해서 한정짓는 방법을 택합니다. 자천장소를 따로 정할 수 있으면 그 장소에 아니면 일상 생활하는 방이나 내가 할 수 있는 그 장소면 됩니다. 어떤 한 장소에 의미를 두는 것인데 자천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두면 그 장소를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천이 되게 하는 강한 암시를 줄 정도의 의미주기를 하면 됩니다.
이런 건 오래 그리고 규칙적으로 해가면서 형성되는 것이지 단기간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장소를 따로 마련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게 안 되면 자기 방에서 그런 분위기 연출을 하면 됩니다.
자천하는 방석을 따로 마련하거나 불끄기나 조명을 이용하는 것이나 향을 피우거나 음악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연출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천한다는 장소가 굳이 어떤 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적인 방이라도 방의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로 그 자천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나 불이면 불, 향이면 향으로 자천모드로 진입한다는 암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응용을 하면 이러한 장소가 굳이 한 곳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홀로 하는 곳을 정하기도 하고 카페나 도로나 공원이나 산이나 들이나 어디라도 자기만의 마음 유지를 할 수 있으면 그러한 곳도 자기의 자천장소로 만듭니다. 만드는 방법은 그렇게 습관들이는 것이니 자기가 해보면서 적당한 자기 암시를 하면 됩니다.
봄 햇살이 들 때면 공원에 가서 잠깐 앉아 있으면 따뜻한 햇살이 온몸을 녹이며 환하고 밝은 빛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꽃이 있으면 그 향기가 또 다른 흥분을 일으키며 자기만의 삼매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러면서 주천화후 하는 분들은 기운행을 유도하거나 단전의 의기를 강하게 하고 호수를 하는 분들은 그 집중을 하면서 호수하며 각성을 하는 분들은 영감을 얻고 직관의 비약을 얻습니다.
시간
평생이라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천하고 싶다고 정하면 됩니다. 이런 정도의 광범위한 시간 정함을 할 수 있다면 분명 보통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해야 합니다. 시간이라는 게 소유자가 있는 게 아니니 아무나 소유하면 자기 시간이 됩니다.
정확히는 이런 결단을 할 그 시점부터 죽음 혹은 죽음 이후의 어느 시간까지, 이후의 윤회나 더 먼 시간 혹은 다양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암시하면 됩니다.
백년, 천년, 식의 시간단위나 몇 생을 나누거나 그건 하기 나름입니다. 하지만 항상 결단을 하는 것이지 엉성하게 그러려니 하거나 되겠지 하는 식은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한 자기 마음잡기를 해야 합니다. 심법 걸기나 암시나 취면이나 자기 정함이라거나 이런 것인데 그렇게 된다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뭐든지 이러한 실재가 아닌 것은 자천에선 불필요합니다. 뭐든 실재입니다.
이런 장기간의 시간 정함을 하고 또 주기적이고 구체적인 시간 정함도 하는데 하루 중에 자기가 시간 낼 수 있는 그 시간을 정합니다. 자기 전이라거나, 일어나서거나, 밥 먹고나, 밥 먹기 전이나, 외출하기 전이나, 티비 보는 중이거나, 전이나, 음악 듣고서나, 듣는 중이거나, 듣기 전이나, 이런 식의 시간을 정하면서 자천합니다.
시간이 꼭 시계의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때고 의미를 준다면 그건 내 시간이 됩니다. 그러한 내 시간에서 살면 됩니다.
그리고 가장 흔한 건 정해진 시계시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에 앉고 그 장소에 앉고 자천을 하면 되며 그렇게 하루의 일과를 정합니다. 자기가 다니는 도장을 이용해서 규칙적인 도장 나가기로 해도 되고 시간표를 만들거나 하루 일과를 정해서 하는 것도 있는데 어느 것이나 자신이 편하게 그리고 항상 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하면 됩니다. 너무 빡빡하거나 힘들게 시간을 정하고 무리해서 자천하다보면 그 장소나 시간이 오히려 부담이 되고 역효과가 납니다. 그 장소에 가기가 싫어지고 그 시간이 다가오는 게 거북해지는데 이런 건 초기에 자천을 무리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면서 그 안 좋은 기억이 오히려 부작용이 되어 일어나는데 항상 즐겁고 쉬우며 간단하게 해야 하며 너무 집착하고 힘들고 얽매이는 방법을 쓰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이건 명심해야 합니다. 항상 간단하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부담되고 불편하다면 당장 일어나고 때려치울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싫은데 고집하고 더 하려고 하고 늘어지고 불편함을 견디고 안 되는 것을 억지 쓰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런 식으론 안 됩니다. 언제나 간단하고 쉬워야 합니다. 즉, 간단하고 쉬워야 합니다.
연시간
내 생애에 얼마의 자천을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하고, 두 번 하고, 하루 하고, 이틀 하고 이런 횟수의 누적이 자천의 누적과 진행으로 만들기 위한 정함입니다.
실로 예를 들면 전체 실 길이가 이생의 자천의 길이라고 하면 그 길이가 10m 인지, 100m 인지, 만 미터인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한 번 정좌함으로서 1cm 든, 2cm 든 얼마만큼은 나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5 분에 1cm 인지, 1시간에 1cm 인지 그건 모릅니다. 한 번에 당연히 진행되는 그 자천 누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한 자천진행 거기에서 오늘은 그 다음 자천이 이어서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기를 대추혈 까지 열었다면 내일은 대추혈 부터 열기 시작한 다는 것입니다. 일부로 거기부터 열려고 애쓰지 않아도 몸은 스스로 알고 진행할 자천을 이어서 해갑니다. 난 그것을 기다리면서 진행을 지켜보면 됩니다.
자천을 인위적으로 오늘은 이것을 해야지 오늘은 이거부터 해야지 하면서 할 필요 없고 자세한 과정은 몸이 하는 것이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진도 나가는 것은 이런 식으로 어제나 저번에 했던 거기부터 알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믿고 한다면 훨 수월 합니다.
기란?
기의 본래적인 의미는 여기저기 설명을 했는데 여기선 간단히 마음을 뜻한다고 하고 마음이 마로 상승하기 위한 욕구가 함유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천하기 위한 수단적인 설명을 위해 사기와 의기로 나눕니다.
사기와 의기란?
음기와 양기식의 나눔이 있는데 차이나의 영향으로 이러한 구분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구분을 해왔을 것인데 자세한 것은 지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단체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기의 구분을 하는데 간단하게 선과 불선이나 의와 불의 같은 이원적인 분류로만 하겠습니다. 너무 장황하면 그것도 헷갈리니까요.
사기와 의기라고 구분한 건 간단합니다. 의로운 기냐 삿된 기냐 그 정도의 구분입니다.
사기는 불교적으로 탐진치만의를 비롯해 각종 번뇌와 망념과 무명과 희노애락애오욕 같은 감정이나 성욕이나 교만이나 질투나 명예심이나 권력욕이나 그저 그런 감정이나 쓸쓸함이나 소외감이나 어떠한 감정이나 모두 해당하고 이기적이며 사치스러운 것이나 이러한 가치의 전도 된 것들과 어리숙한 것이나 뭐나 머리 나쁜 것 심리적인 것 행동적인 폭력이나 좋은 일이나 나쁜 행위나 사기나 속이는 것이나 암튼 모든 것이 사기에 해당합니다.
질투를 예로 들면 누군가 무엇을 질투하면 그로인해 어떤 상태의 기운이 안에서 생겨납니다. 그런 것이 생겨나고 모이고 쌓이면 질병까지 가겠지만 암튼 이것이 자천에 방해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좋아하거나 사랑이나 좋은 일이나 이러한 긍정적인 것도 방해가 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은 분명 다른 삿된 기보다는 낫지만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사기와 의기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굴 좋아한다면 그 좋아하는 것은 분명 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아해서 하는 행동은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그러한 것이 전부 바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은 의기가 사기로 바뀌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이성이 다른 이성과 친한 것을 보고 질투가 생기면 또는 불편함이 생기면 역시 사기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의 감정이 의기다 사기다 이렇게 말하기보다 그 감정이 이어지고 다른 것으로 변해 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사기가 나오고 그것이 안에 축적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나 행동 역시 살아가면서 이어지는 다양한 상황에 어떠한 기로 나에게 그리고 남이나 세상에 주고 있는지 그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기와 의기는 몸속에 쌓이고 흐릅니다. 그래서 관심가지는 것이지 있다가 말고 별거 아니라면 관심가질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기나 의기가 얼마나 있느냐로 생각, 감정, 행동은 달라지며 그로인한 인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사기가 있으면 그게 어떤 감정을 일어나게 하며 감정이 일어나면 행동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행동 할 것이고 이러면 돌이키지 못합니다.
의기는 당연히 바르고 의로우며 옳은 감정이나 생각과 행동을 했을 때 일어나며 일정하고 항상하며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가지는 것이어야 하지 즉흥적인 선행이나 좋고 의로운 생각, 행동만으로 안 됩니다.
이러한 의기가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안에서 형성되고 흐르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한두 번 또는 별다른 신념이나 철학 없이 하는 생각이나 행동의 선함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선이 흐르는 것이며 그 선함이 생각의 선함으로 감정의 선함으로 행동의 선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선함이 배에 형성된 것이 단전이고 이것이 독맥을 흐르고 임맥을 흐르며 온몸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름으로 몸을 만드는 것이 바른몸 입니다. 이러한 선하고 의로운 기가 의지가 되고 뜻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의지를 세움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귀기
일반적으론 간혹 있지만 자천세계에선 자주 있기도 하는 것인데 사기 중에 귀기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은 백이나 저급한 신장들이나 영, 혼 등인데, 때론 일반사람들의 염에 의한 기운이 접촉되는 경우도 있고 동물들의 죽은 백들이 접근한 것도 있고 기타 다양한 것인데 역시 이런 경우 이것부터 제거해야 하지만 제거하는 것보다 이러한 것이 접근 되어 있는 원인을 알아야 하고 그 원인을 명확히 인지해서 다시는 이러한 것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접근 한 것을 제거하는 것은 쉽지만 대개는 생각이나 관심에 따른 것으로 쉽게 원인 요소가 제거되지 않아 반복적으로 제거해도 다시 다른 것이 접근하는데 접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부르고 있는 그 당사자의 무지가 더 어렵게 합니다.
두려워서 자꾸 떠올리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가슴에 뭔가에 대한 두려움을 품는데 이것이 그 존재들을 부르며, 어떤 신체의 이상 증상이나 불편하기만 해도 이거 때문인가 하면서 지나친 집착을 하며, 어떤 경우는 이유를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해 반복되기도 하는데 미묘한 사고의 진행과 마음의 작용이 있는 경우 알아채기나 이해할 만한 지적능력이 부족하고 관찰력도 없어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또 태생이 이러한 것이나 명의 흐름에 민감한 경우가 있는데 자천이 공단 이상이 되면 스스로 제어하고 나름의 견해로 당당히 살 수 있지만 이 경지까지 가기가 심히 어려우며 저러한 것의 영향으로 그때까지 인내하면서 공부하지 못합니다.
또 결단력이 부족해 알면서도 반복하는 경우 긴가민가하며 신뢰하지 않는 경우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본인의 마음과 생각의 원인으로 이러한 것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또는 수련을 저러한 것을 이용한 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견해의 차이라서 뭐라 말하기 그렇습니다.
각성
견성이나 깨우침을 말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당연히 자천이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천은 일차적으로 지적능력 향상입니다. 이 능력이 수학을 잘하고 물리학을 잘하면서 지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인식의 지평을 넓혀서 남보다 수학이나 철학을 더 잘할 수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게 된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자천의 성과가 있다면 어떠한 일을 하든 어떠한 공부나 어떠한 연구나 어떤 것을 하든지 남보다 월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이건 지혜라고 하는 것인데 다각적인 시야로 사물을 보고 이치의 이면을 볼 수 있고 사람들의 심리를 알 수 있으며 고정관념이 줄어들고 선입견이 줄어들어 새로운 발상과 창의력이 생기고 사회관념이나 통념에서 자유로워서 기발함도 가집니다.
이러한 것이 자천에서도 막대한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자천의 목적이라고 까지 할 정도인데 이러한 각성이 부족하면 아래에서 설명할 고요함이 어느 이상 이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순고요에서 여고요 또 준고요 등으로 오르기 위해선 오랜 기간 자천하는 것으로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안 되며 이 각성이 이루어져야 서로 보완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몸이 의식과 마음과 신체의 총화이기 때문에 하나만 가지고 공부할 수가 없습니다. 신체가 고요하다고 되지 않고 마음도 고요해야 하고 의식도 고요해야 하는데 이건 마음에 대한 이해와 신체 변화에 대한 이해와 의식의 체계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자천이고 단순 반복 이상은 아니며 고리타분해 집니다.
각성 함양
각성하기도 힘들지만 각성한 것을 함양하기도 힘듭니다. 유교에서도 각성하지만 그것을 함양하는 방법에 대해선 별로 내려오거나 가르침이 약합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을 연구한 서점의 책들을 보면 유교 교리에 대한 설명은 있어도 이것을 함양하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은 유교를 자천으로 보지도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정도로 이 함양에 대한 것이 어렵습니다.
우선 함양해야 할 곳이 단전입니다. 꼭 단전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하는 게 알아듣기 쉽고 하기도 쉽고 이런 수련이 있으니 빗대어 말하면 됩니다.
원래 지금 하는 기운행을 이용한 자천이라는 게 이것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은 하나의 교리가 되어 선도나 단학이나 도교나 하면서 유불선으로 비교하며 하나의 종교처럼 하는 것 같은데 아마 차이나의 도교와 헷갈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보기에 차이나의 이러한 연정화기, 연기화신, 연신환허 식의 자천은 하나의 함양법이지 그이상은 아니 거 같습니다. 유불선에서의 선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은 여기에 인간과 삶과 세상에 대한 더 많은 이치가 있습니다.
암튼 자기가 깨우친 것을 단전에 두고 형성시킨 것이 기이며 이러한 것을 숙성시키고 단련하는 것이 주천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신과 기의 결합으로 설명하면서 말하는데 이때의 신은 의식이기도 마음이기도 하고 고요함이기도 한 것인데 역시 각성한 의식 또는 마음이겠죠.
이러한 각성을 호수로서 함양하면 호수공부가 되고 정좌만으로도 해도 되며 암시법이나 수인이나 어떠한 방법으로든 됩니다. 오직 이 각성이 있은 후에 어떠한 함양을 할 것인지를 정해야지 그저 버릇처럼 습관처럼 자천한다면 역시나 단순반복일 뿐입니다.
각성하기
그럼 각성을 어떻게 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각성하면 깨달음이고 견성이며 불교적인 이해로 보려는 것이 지금 너무도 많은데 이게 오히려 신선하고 일상의 각성경험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가림이 되고 잘못된 각성을 추구하면서 인생을 허비하게 하며 뭔가 깨우침이 있다면 교만하게도 하는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교 나름의 방법을 하겠죠. 거기 것을 굳이 일일이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각성이라고 할지 엄밀한 이해를 위한 기존의 알던 지식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새롭게 알아가려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지식과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각성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나 일상의 상식이나 과학,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지금 우리의 지식을 형성한 모든 관념에서 스스로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그러한 것에서 자기 의지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는 그 작업이 이미 각성입니다.
상식! 그대의 그 상식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다음 전공한 학문 그것을 버려야 하구요. 그다음이 자기가 알지 못하면서도 이미 지식으로 있는 것들, 세세하며 그러면서 우리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고 또 자기의 내면에 깊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그 지식들을 찾아내는 겁니다.
즉 모든 것, 정말 모든 것을 신선하게 볼 수 있는 그것이 각성입니다. 모든 것이란 어디부터 어디까지 어떤 것까지 인지 이러한 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그래야 합니다.
넌 어디까지 신선하게 보니? 자기 자신? 이정도 당연하고,
부모? 진짜 해본거야?
가까워서 눈이 멀고, 멀어서 눈이 멀고, 알아서 눈이 멀고, 몰라서 눈이 멀고, 익숙해서 눈이 멀고, 두려워서 눈이 멀고, 돈 때문에 눈이 멀고, 가족 때문에 눈이 멀고, 이거 저거 이런 저런 이유로 스스로 눈을 닫고 사는 그러한 것을 알아내어 가야죠.
이런 각성이 있다면 이제 자천을 진짜 해봐야죠.
고요법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천법입니다.
선정이나 삼매라고 하는 것이지만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선정이라고 해도 상당히 모호한 것이고 용도나 의미를 알기도 어렵습니다.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4선정이나 다양한 선정이 있으며 선정의 깊이나 의미가 다른 것을 설명한 것이 많은데 선도에서도 분명 중요합니다. 단전을 만들 때도 이 고요함에 들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말합니다. 고요하게 해서 나온 기가 아니면 별로 좋게 치지도 않을 정도로 그 의미가 큽니다. 고요에 의한 기이고 고요에 의한 내주천이고 고요에 의한 하늘주천이며 고요에 의한 금단이고 고요에 의한 바름몸 기르기입니다. 고요에 의한 것이 아닌 어떤 기나 운행도 바르게 보지 않는데 이것이 사기를 버리고 의기로 가는 방법이라고 설명하며 오직 대정이라면서 고요함만을 말합니다.
즉 자천의 성패는 이 고요법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고요류
고요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마음이 안정되는 것부터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집중하면서 생각도 없고 감정을 억제해서 몰입할 수 있지만 이건 몇 초에 불과하고 그 상태로 몇 분을 할 수 있다면 초인이겠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깊은 고요에 들어도 주기적으로 고요와 비고요를 왔다갔다 하면서 리듬을 탑니다. 생각이 안 일어나다가 언뜻 생각하다가 또 안하다가 하면서 있는 것이고 마음도 고요해서 좋다가 다른 마음으로 있다가 다시 고요함으로 깊이 들어가다가 하면서 있는 것입니다.
순고요 : 암튼 처음엔 요동하던 것이 안정을 찾는 그 정도의 고요입니다. 감정이 수그러드는 것인데 이렇게 마음이 안정되면 더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고 원하는 집중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면서 더 나은 발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고요 : 그다음 고요는 일종의 관조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내가 볼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이러한 심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오랜 자천이 필요 합니다. 일반인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이런 분도 나름으로 오랫동안 이러한 습관을 들이면서 해온 것이지 저절로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닐 겁니다. 이렇게 자기를 볼 수 있는 그러한 힘이 생깁니다. 이러한 자기 보는 것도 고요의 하나입니다.
준고요 : 그다음은 고요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인데 감정이 아래로 내려가거나 비어지거나 사라진 듯이 몇 분이나 상당히 오랫동안 고요한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앉으면 됩니다. 그렇다고 생각도 없고 의식도 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른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고요하다는 것을 조금은 압니다. 즉 고요와 생각, 감정이 분리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전고요 : 그 다음 고요는 외부와 상관없이 자기 고요를 유지하거나 일으킬 수 있는 것이며 평상시에도 그렇게 홀로만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신감의 형성입니다. 이건 자천 정좌할 때가 아니라 일상에서 느끼는 자기만의 마음 안정입니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 자존감의 충만으로 홀로 떳떳함입니다. 개인주의 같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고 홀로 만족함으로 나서려고 하지도 않고 은근하고 지긋한 고요함입니다. 고요를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라서 분명 다릅니다.
주고요 : 이다음은 나만이 아니라 내 주위와 외부마저도 고요하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건 주의 크기가 되고 주력이기도 한 심오함이 있어서 더 이상은 함구입니다. 그저 얼마나 넓은 곳에 자기 고요를 나투느냐가 있습니다.
고요하기
고요하게 하려고 한다면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어떤 자천이든지 이 고요가 있고 고요를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고요에 해당하는 방법을 쓴 게 있어서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는데 그냥 모든 자천법이 다 이 고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법을 하든지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합니다.
대의련법에 적정을 하는 방법을 쓰라고 했는데 땅해자천이나 얼음법이나 천중이나 중의나 모두 이런 것인데 그 외도 많습니다. 암시법도 이런 것이어서 무극이나 허나 무나 적멸이나 진이나 태허나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고 심법 걸듯이 한다면 이것도 고요가 됩니다.
암튼 고요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정좌를 해야지 아니면 몸만 고생합니다.
호흡법
이건 단전호흡이나 기호흡이나 기수련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하지만 내가 이러한 방법으로 공부한 건 이미 오래전이고 기록도 없고 기억도 안 나서 자세한 안내는 버겁습니다.
그래서 시중에 책을 소개하는 것을 먼저 하고 싶은데 금단의 길이나 천서나 용호결이나 금선기공이나 단월드에서 나오는 것이나 국선도에서 나오는 것이나 어디서 나온 것이든 한번은 읽어보고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이러한 책이 자기의 공부를 전부 밝힌 것은 아닐 것이며 나름의 의도가 있어서 내놓은 것인데 그들의 단체에 가서 배워도 좋고 책만으로 참고 해도 좋은데 어느 정도 의미이해를 했으면 합니다. 대충 읽으면 안 되겠죠. 차이나의 것도 번역되어 나오는 게 많은데 역시 읽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좋거나 맞거나 하지는 않고 혼란하고 헷갈리고 복잡하기도 한데 그렇다고 한 가지만 붙잡고 수련한다고 될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단체에 들어가서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야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홀로 자기 길을 가는 거라면 다양한 서적과 방법들을 두루 봐야 합니다.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이나 시비를 가리는 것도 해야 하고 한두 권이나 한두 가르침에서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비록 남들이 외도라고 하고 사이비라고 해도 내가 그 내용을 보고 나름으로 얻거나 이해한 게 있으면 됩니다. 그런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목적인거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남이 기르는 대로 길러지기만 하는 것이 자천이 아닙니다. 부작용이나 잘못된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린다면 그것도 바른 것은 아닙니다. 용기와 혜안을 가지려는 것인데 내가 보고, 겪어보고, 경험하면서 그 안에서 분별할 수 있는 그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부작용
이 수련의 문제는 다른 것은 그렇다고 해도 차이나에선 편차라고 하고 기공병이나 우리에겐 상기라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 있는데 위로 열이 올라 생기는 것이나 기운이 신체의 한쪽으로 쏠리거나 치우침으로 또는 기가 적체되어 생기는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이걸 방지하기 위한 또 나름으로의 방안이나 예방이나 치료가 있다고도 하는데 이러한 기병이 꼭 이러한 기수련의 공부로 인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라서 전반적인 이해가 없으면 치료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쌓인 경험이나 방법을 제시하는 곳에서 공부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부터 자기 맘대로 하지 말고 정상적이고 바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작용은 우선 자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다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기는 상기하게 만든 원인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기는 내가 알지 못한 경로로 잘못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기가 거기로 흘러갔다면 그렇게 흘러가도록 만든 원인이 나에게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찾아서 해결해야 하며 너무 심한 경우는 상기 자체부터 치료해야 할 것입니다. 치료하는 방법은 상기의 종류마다 달라서 한두 가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상기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 수련법 자체에 있거나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부터 이겠죠.
수련하다가 겪는 부작용이나 어려움보다 인생을 살아가는 힘겨움이 더 큽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쉽고 간단한 방법만을 원해서 지름길로만 간다면 그 성취는 인생의 굴곡에서 좌절당하면 깨지기 쉬운 유리가 되기 쉽습니다.
자천이 금단이 되고 바른몸을 만들고 대단이 되어도 사랑의 좌절과 인생의 실패와 경제생활의 힘겨움과 사회생활하기 위한 악착같은 삶의 현장에선 부서지고 퇴보하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배워야 하며 이단이나 외도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거기서 뭔가를 얻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천하다 잘못되어 몇 년을 고생해도 그 뜻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끈기와 인내가 없다면 어차피 수월하게 주를 이루어도 월급 받다가 허물어지는 별 거 아닌 주일 수가 있습니다. 이건 내가 경험한 것입니다. 사회의 험난함이 어떤 자천의 험난함보다 강합니다. 사회와 우리 현실보다 무섭고 힘든 것은 없습니다.
내주천을 연다는 것은 분명 신체적인 수련입니다. 그러다보니 독맥과 임맥을 빨리 여는 방법은 신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빨리 여는 것과 늦는 것에는 우선 진기 즉, 신장의 기운이 강한 것이 우선입니다. 이게 정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강한 생명력을 가지는 경우와 허약 체질이 있는 것처럼 진기가 강하고 약한 경우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난 허약한 경우라 별로 이 부분에선 이득이 없었습니다. 적극적이고 건강하며 튼튼한 신체이며 싱싱한 생명력이 좋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진기의 강함입니다. 그래서 어릴수록 좋다고 하는 것은 이부분이 가장 좋을 때입니다.
그다음은 살면서 자기의 진기 소모를 많이 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하게 태어났어도 살면서 병들고 직장생활고 사회생활로 지치고 무리를 많이 했다면 당연히 진기의 고갈과 탁기로의 변화가 있어서 이런 경우가 안 좋습니다.
과거엔 이중에 정액 유출을 가장 안 좋게 보는데 지금은 정신없는 사회생활로 인한 피폐함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것이든 지나치고 무리한다면 신체에 이상을 초래하고 망가져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운동과 적절한 휴식과 음식조절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체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 것은 심리적인 원인으로 어느 경맥의 한 부위가 지나치게 응결된 경우인데 마음의 상처와 억압이 그렇게 만듭니다. 이건 진기의 소모와 함께 흐름 자체의 경직으로 가서 더욱 문제가 됩니다.
이런 것이 아니면 주천의 열림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진행되어 갑니다. 너무 빠르게 하려고 하거나 억지로 열려는 것을 하지 않아도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의수단전
단순히 의식을 단전에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나 감정을 수그러지고 아래로 내려가기 위한 것입니다. 의념을 단전에 두려고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리고 마음과 하단전이 하나 되는 듯이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이렇게 마음이 내려가면 잡념이 줄고 마음의 응어리도 풀리고 후련하거나 편하고 의식은 맑아집니다.
이런 것을 정에 들고 허가 된다고 하는데 완벽한 선정이나 무아의 경지가 되지는 않지만 서서히 생각이 줄어들고 정리되며 욕구분출이나 감정 흔들림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원할 때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단초를 얻은 거지요.
코호흡
애초에 호흡은 코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의 들고 남을 말합니다. 기를 들고나는 것은 몸의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기를 원하는 곳에 모으고 흐르게 하는 것을 위한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선 의식을 어디에 두고 어떻게 하느냐 또 어떤 의식이냐로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을 다루는 것을 위한 몸동작이 코 호흡 입니다. 그러니 코 호흡이 기를 들이거나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는 들고 나고 이것을 호흡이라고 하며 의도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코 호흡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코로 자기 신체조절을 하고 정신집중을 하는 그러한 자기조절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단전형성
과거에 언제인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하면서 단전에 기 모으기를 열심히 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단전에 기가 모이면 이러 저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배가 팽창하기도 하고 꾸르륵 거리기도 하고 소리 나고 움직이고 아프기도 하고 열도 나고 뜨겁기도 하고 뭔가 움직이는 것도 같고 좌우로 쏠리는 것도 있고 묵직하고 덩어리가 느껴지기도 할 것인데 이런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이제 단전이 형성되어 간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딱 언제다 하면서 그 시점을 정하고 알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단전만 붙잡고 있으니 차이나의 여러 글들을 보면 때를 잘 알아서 단을 채취해야지 안 그러면 큰일 날 것처럼 이 부분을 대단히 강조 합니다. 차이나에서도 단전만 붙잡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분들이 많았는가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이러한 부분을 집착하면서 떠들 이유가 없겠지요. 그것만이 아니라 아마 수련하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아서 일겁니다. 글을 보면 천기라고 비밀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정말 천기라고 그런 건지 알려주기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나는데 다른 이유론 아무나 안다고 좋을 게 없다고 보고 아무나 수련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지금 보면 아무나 공부 시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어서 공감하기도 하는데 암튼 여러 이유로 알기 힘들게 되어서 단전만 수련하는 경우가 많았는가 봅니다.
이 때를 알아서 독맥으로 운행시키라는 것인데 이 때를 안다는 것이 심히 어렵습니다. 뜨거운 열기나 따듯함이 있을 때이거나 움직이려고 요동할 때나 뭔가 덩어리가 있으면 운행시키거나 여러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혼자 한다면 나름으로 이거 저거 해보면서 적당한 자기만의 시기를 아는 방법을 찾겠지요.
다만 최초의 운행시기를 아는 게 좀 어렵습니다. 너무 이르면 미숙한 기라서 헛수고가 되고 너무 늦으면 정체된 것이라 그것도 제대로 된 기가 아니라고도 하는데 이른 것보다 늦은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서두르고 미숙한 기를 의욕이나 의념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힘으로 끌어 올리다가 상기되고 병나기도 하니까요.
암튼 이 최초의 시기를 어떻게 정하느냐가 제일 관건인데 나머지는 시일이 문제지 어떻게든 독맥으로 흐를 것이고 임맥으로 흐르겠죠. 그래서 가장 좋은 건 누군가가 단전이 형성된 것을 봐준다면 젤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분께 도움을 받는 것이 낫습니다. 그게 안 된다면 기가 스스로 가게 내버려 두는 게 두 번째로 좋습니다. 단전만 단련하거나 기를 모으기만 하거나 그 외 독맥을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이러한 운행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즉, 이러한 생각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단전이 형성되면 기는 알아서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게 지나친 성급함이나 조급증이나 빨리 이루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이고 느긋하게 자기를 관조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신뢰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이게 어렵다면 세 번째가 있는데 그것은 단체마다 오운행 즉 오행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운행 즉 대맥운행을 하기도 하는데 아마 상기에 대한 두려움인지 기운행의 예비연습인지 그러한 것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단전의 충실함을 이루고 또 기운행하는 요령을 터득한다면 그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이런 운행을 하면서 기의 충실함이나 허실 정도를 느낄 수 있으면 독맥으로 서서히 보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음이나 미려를 간다면 나머지는 부위마다 느리고 빠름이 있는 것이지 안 되거나 잘못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조심해야 할 것이 생각이나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감정을 내서 화내거나 욕심 부리거나 하면 그에 따라 기가 오르고 신체 여기저기로 흘러가거나 경맥을 막아서 병이 되는데 과거 기를 모르거나 못 느낄 때와는 정도가 다른 힘이 있습니다. 내 감정에 따라 신체가 변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이때도 상기 위험이 있는데 이건 자기가 기를 움직이고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기가 오르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생각을 못해서 주의 부족으로 일어난 것이니 항상 마음다루는 그러한 감정조절을 하시길 바랍니다.
마치기
그래서 이때 봉고라고 하는 수련을 마치고 일어나기 전에 기를 안정시키는 것이 있는데 너무 빠르게 일어나거나 움직이지 말고 서서히 손 풀고 다리 풀고 하면서 일어납니다. 손은 부비거나 주무르거나 하고 얼굴도 부비거나 주무르고 다리도 부비거나 주무르면서 기지개를 켜고 하품도 일부로 하면서 서서히 일어납니다. 기를 느끼는 경우는 기를 굳이 단전에 보내놓고 일어나려고 하지 않아도 되며 마음으로 이제 그만 수련해야지 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기가 스스로 자리를 잡고 안정됩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로 인해 기가 반응을 하니 마음을 먼저 정하고 다음에 기다리는 시간을 잠깐 갖고 하는 좀 더 여유 있게 신체를 다루길 바랍니다. 이제 부터는 신체는 과거처럼 막 움직이고 막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달래고 순서를 정하고 마음이 또는 생각이 신체를 다루고 이끈다는 것을 알고 움직여야 합니다. 항상 마음으로 먼저 뭘 할 건지 확실히 정하고 즉, 의사결정을 확실히 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임독 열기
이후에 서서히 기는 회음 쪽으로 가고 미려로 가면서 뜨거운 듯 차가운 듯 한 것이 흐르는데 독맥으로 갈수록 뜨거워지고 백회에서 다시 열이 식으면서 임맥으로 부드러운 것이 내려옵니다. 사람 따라 회음, 미려, 협척, 대추, 코나 입, 목, 가슴, 윗배 등에서 멈추고 흐르지 않거나 더딘데 일부로 열려고 하고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기는 흐릅니다. 그뿐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답답하고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조급히 여기면 그 불안하고 서두르는 자신의 검정을 바라보면서 성찰하고 자신의 마음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를 힘들어하거나 이것도 못 참나, 그렇게 서두를 것이던가? 하는 자기 관찰하면서 조급함이나 성급하고 눈앞의 성과를 위해 멀리 보는 마음의 깊이를 갖지 못하는 것을 알며 당장의 이득만 보는 근시적인 감정 일어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여유와 멀리 보는 안목이 더욱 질 높은 기의 상승이 일어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자천이지 기운행이 아니고 그로인해 어떤 효과도 아니며 항상 이런 결정적일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수련성패와 나가고 못나가는 순간이 됩니다.
임독을 열 때
이 단전을 형성하고 독맥을 열어갈 경우 기를 느낀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동반하게 됩니다. 환상과 기이한 것들이 보이면 그냥 무시해야 합니다. 이땐 그러한 것의 허실과 의미구분이 어렵고 그러한 것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중에 견해가 깊어지면 나름의 이해력이 생기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무시하면서 단전에 마음 두거나 무심하게 있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거나 장소에 가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면 몸이 불편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그때뿐이니 너무 신경 쓰거나 관심가지면 더 악화되기도 하니 역시 무시하거나 음식은 몸에 편한 것을 먹고 장소는 좋은 곳을 가리고 사람도 겪어가면서 요령을 가지면서 해가야 합니다. 이런 것으로 자천의 의지가 꺾이거나 약해진다면 더 나아가기는 힘들 것이니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또 어제는 수련이 잘되었는데 오늘은 답답하고 아닌 거 같고 하는 여러 이유로 인해 수련이 집중이 안 되거나 곤란해진다고 해도 역시 결의 부족이니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임해야 합니다.
때론 두통이나 배가 답답하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하면서 신체가 불편해지기도 하는데 무조건 상기나 병으로만 보지 말고 자기의 생각이 위로 오르거나 잘못될 소지를 가진 것이 있는지 살피고 그중에 수련이론에 대한 오해나 수련방법을 잘못한 것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일시적이거나 수련에 따른 몸의 변환 과정이니 참고 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 일시적인 통증이거나 불편이어야지 지속적이고 심해져서 못 견딜 정도면 당장 그만두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내가 힘들면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미련 두거나 혹시나 하면서 미적대 봐야 소용없습니다. 명확한 이해와 간략한 이론에 의한 것이어야지 잘 모르면 그만두고 어려우면 안해야 합니다. 다시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 때 다시 하는 것이니 문제점이 생겼는데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맥을 열어가는 간단한 방법은 없습니다.
빠르고 쉽게 할 생각 말고 단전에 마음을 두고 기의 유통을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미려를 가든, 영대를 가든, 대추를 가든, 그런 건 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한다고 빠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몇 개월은 그냥 두고 보는 것이니 느긋하게 가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운동하고 음식 잘 먹고 건강하게 해서 진기를 기르고 컨디션을 좋게 하는 것이어야 하고 바른 자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독맥을 빠르게 여는 것이지 있는 힘껏 억지로 의념을 쓰는 것이나 오래 한다고 힘들게 앉아 있는 것이나 호흡을 길게 하거나 멈추거나 하면서 힘쓰거나 배에 힘주거나 지나친 애씀은 독이 되기도 하니 일상의 건전하고 규칙적인 활동으로 몸의 상태를 좋게 하는 것이 훨 좋다고 봅니다.
청정
사기가 완전히 의기로 되지는 않습니다. 음기가 완전히 양기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기가 사사로움을 뜻하는데 개인적인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다면 내 개성도 사라지는 것도 되어 불가함이 있습니다. 물론 자천이 보편의 진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지만 또 그러면서 개체성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나를 초극해 하늘이든 신성이든 완전함에 합일하려고 하지만 그건 항상 어느 정도이고 국한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난 아무리 초월해도 나입니다. 나를 사라지게도 소멸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기는 의기로 완전히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단전에서 뜨거워지던 것이 차가워지고 시원해지기도 하고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알 수 없는 것도 있는데 열이나 양만으로 진행하다간 무화되고 흩어지기 때문이며 음이 되고 자기로 돌아오는 회귀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즉 봄을 지나 여름의 열기는 토를 거쳐 가을이 되어 겨울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단전의 기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완성된 기가 됩니다.
또 자천이란 자신을 바른 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른 기가 흐르고, 바른 기가 생각하고 마음가지고 행동하며 이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바름으로 몸을 만들어 바른몸이 되면 됩니다. 차이나 식으로 양신입니다.
음기를 제거하고 양기로 채우는 것이 불교적으론 번뇌를 제거해서 여래가 되는 것입니다. 삿됨을 제거해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으로 양기로 단전 만들고 양기로 주천하고 더욱 영기로 진보한 다음 다시 단전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번뇌제거해서 불성을 닦는 것이 단전을 닦는 것이고 불성이 비쳐지며 온몸을 청정하게 해가는 것이며 청정신이 되면 됩니다. 다 같습니다. 그런 것이다.
수인법
수인은 손가락으로 모양을 만들어 어떤 의도를 이끌려는 것으로 언제부터 시작했고 누가 처음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옛 책에 이것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만들고 발견 했는지 명확치 않습니다. 인도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있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인도의 유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수인은 수련이 시작 될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수도의 역사가 언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나는 배달 이전 지인들이 최초라고 믿지만, 이는 내 생각이고 일반적으로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기가 불가능합니다. 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지금 부도를 보는 사람이 없으니 하루 빨리 이런 분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아무튼 이런 것이 같이 시작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이유는 수인은 자천자가 경지에 오르면 누구나 사용합니다. 스스로 깨달아 행하며 누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억지로 의념을 써서 기운을 단전이나 어디로 보내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가만히 있고 수인을 한다면 수인에 따라 몸은 반응을 하고 기도 인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의식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래야 뭔가 하는 것 같고 또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며 확실한 효과를 바라서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는데 수인을 하고 정좌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됩니다. 다른 호흡이나 호수나 뭐나 굳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수인하나가 하나의 자천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천법의 하나로 이렇게 소개 합니다.
기본적인 정좌
우선 앉을 때 다리의 자세를 정하는데 반가부좌를 합니다. 결가부좌는 좀 힘들어서 이렇게 하는데 왼발을 올리는 자세는 중맥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뭉쳐집니다. 오른 발을 올릴 경우는 좌우로 갈라지는데 이때 양 신장 부근이 열이 나기도 하고 좌우로 기운이 강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왼발을 올리면 안으로 모으고 아래로 내릴 때 하면 좋습니다.
결가부좌의 경우 오른발을 나중에 올리는 경우는 중맥이 오르고 왼발을 나중에 올리면 중맥이 내려갑니다.
자천 초기엔 상부의 열을 내리고 단전에 집중하는데 이땐 소인을 엄지를 붙이는데 엄지를 붙이면 좌우의 기가 서로 만나고 집중됩니다. 또 왼손을 위로 올리면 인중이나 두정이나 임맥으로 기가 내려오고 산부의 전체적인 기운도 내려와 아랫배에 모여듭니다. 이때 엄지를 붙이면 아랫배에서 박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좌우 기가 만나서 서로 뭉쳐져서 그렇습니다. 이때 엄지를 때고 그냥 두면 사라집니다. 좌우 기운이 흩어집니다.
오른손을 위로해서 하면 가슴부근으로 기가 오르는데 그렇게 불편하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해보고 조심해서 하면 됩니다.
또 깍지 끼는 경우가 있는데 깍지 끼면 몸의 좌우 전체기가 서로 엇갈리며 교차해서 반대편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깍지 낄 경우 오른 손이 위로가게 끼면 기가 시계방향으로 돌며 왼손이 위로가게 하면 반대로 돕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기와 생각과 마음의 상호 연관성을 얻는 것입니다. 엄지를 붙이면 인당이나 전중이나 하단전으로 또 임맥으로 신체의 오른쪽과 왼쪽의 기가 만납니다. 이렇게 기가 모이게 되면 의식은 집중하게 됩니다. 기에 다라 한 곳으로 모여지게 되며 이에 따라 의식도 집중하는 것인데 그러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자꾸 어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을 물고 이어지면서 끝없이 갈지 모릅니다. 엄지를 떨어뜨리면 그 집중이 풀어지면서 생각하던 것이 사라지고 마음도 풀어져서 긴장이 풀리는 듯하고 생각을 안 하게 되고 고요해집니다.
이런 게 기의 모임과 풀어짐에 의한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인데 기가 의식을 따르고 의식이 기에 따르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처음부터는 안 되고 오랜 자천으로 그만한 고요함이나 마음의 비어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을 안 하거나 하는 그러한 움직임을 보면서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관찰하는 조하가 있어야 하며 마음을 불 수 있을 정도의 마하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다고 굉장히 먼 얘기고 상달한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쉽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민감한 분은 며칠 내에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그러한 것이니까요.
수인법들은 블러그에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자천법들은 대의련법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