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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에 나타나는 유병헌 의사(劉秉憲 義士),
일제강점기의 순국의사 유병헌(1842. 11. 29~1918. 7. 20).
을사오적 처형요구, 매국노 성토 통문으로 투옥되어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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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강릉(江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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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주현(周顯) |
호 | 만송(晩松)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항일운동 |
출생지 | 칠곡 |
주요수상 |
대통령표창(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헌충사에 순국선열 위패로 모셔저 있다. |
1842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서 유익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910년 한일병합 때 매국노들을 성토하는 글을 대로변에 게시하고
일본 총독과 내각에 만행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1911년 5월에 일제가 수여하는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는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지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1911년 충청도 청산(靑山)에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청산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비의 건립을 저지하였다.
1911년 10월 납세 거부를 통해 일제의 모든 통치행위를 부정하고
심지어 "왜왕의 머리로 술잔을 만들어 마시겠다."는 시를 써 총독부 경부에게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유병헌은
약목헌병대(若木憲兵隊),
김천헌병대(金泉憲兵隊),
김천경찰서(金泉警察署) 등에서 심한 고문과 문초를 받았고,
대구 감옥에서 3차례나 납세거부 불복으로 투옥되었다.
1918년 7월 20일 단식 결행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구에서 칠곡 상강리까지 100여리 상여 운구 길에
구름같이 몰려나온 백성들이 술이며 고기며 밥을 내어 접대하니,
왜경과 헌병들이 민란을 걱정하여 총,검으로 저지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만송 유선생 순국기념비(晩松 劉先生 殉國紀念碑)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는데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사한 유병헌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김정설이 비문을 지어 1963년 8월에 건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통일로 251(서대문동립공원 내)
(02)365-4386(회장실)
(02)365-4387(사무국)
(02)365-4388(월간잡지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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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자 주현(周顯), 호 만송(晩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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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시대 | 근대 |
출생 - 사망 | 1842년(헌종 8) ~ 1918년 |
성격 |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
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 |
성별 | 남 |
본관 | 강릉(江陵) |
대표관직(경력) | 대통령 표창, 건국포장, 애국장 |
1842(헌종 8)∼1918. 독립운동가.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주현(周顯), 호는 만송(晩松). 경상북도 칠곡 출생.
1905년 일제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군민들을 모아 일제의 불의와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으며,
더욱이 한국인은 조선총독부에 일체의 세금을 납부해서는 안 되고 은사금(恩賜金)도 모두 거부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친일분자들에 의한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송덕비축조계획에 반대하여 이를 규탄, 저지하였다.
1918년 그의 양조장 경영에 대한 세금납부를 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 투옥되었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투옥된 지 7개월 만에 단식을 결행,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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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출생-사망 | 1842. 11. 29 ~ 1918. 7.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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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강릉(江陵) |
자 | 주현(周顯) |
호 | 만송(晩松)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항일운동 |
출생지 | 칠곡 |
주요수상 | 대통령표창(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주현(周顯), 호는 만송(晩松)이다.
1842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서 유익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910년 한일병합 때 매국노들을 성토하는 글을 대로변에 게시하고
일본 총독과 내각에 만행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1911년 충청도 청산(靑山)에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청산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비의 건립을 저지하였다.
1918년 납세 거부로 3차례나 대구 감옥에 투옥되었고
같은 해 7월 20일 단식 결행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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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집』
설명문 |
조선말기 유학자이자 독립유공자인 유병헌의 시문집이다.
; 문집 가운데 「납세창덕궁소(納稅昌德宮疏)」는 당시 왜인들이 세금을 수탈하자 조세를 조정에 직접 바치면서 올린 상소로, 척일(斥日)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서(書) 중 「답곽면우종석(答郭?宇鍾錫)」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입어 징사(徵士)가 되었으나 왜적을 철저히 배척하지 못한 곽종석을 규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1 |
제작일자 | 2009년 2월 3일 |
제작 | 대경문화재연구원 |
제공일자 | 2009년 2월 2일 |
제공 | 칠곡문화원 |
저작권 | 조승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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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형 |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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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근대 |
성격 | 시문집 |
편저자 | 유병헌 |
제작시기 | 1925년 |
권수·책수 | 4권 2책 |
간행·발행·발급자(처) | 유재순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
조선 말기의 의사 유병헌(劉秉憲)의 시문집.
4권 2책. 석인본. 1925년경 손자 재순(載純)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인보(鄭寅普)의 서문과 권말에 이수기(李壽麒), 손자 재순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2에 부(賦) 1편, 시 55수, 소(疏) 1편, 서(書) 17편,
잡저 27편, 설(說) 7편, 논(論) 1편, 서(序) 3편, 기(記) 8편, 명(銘) 2편, 찬(贊) 3편,
제문 1편, 권3·4는 부록으로 사우증언(士友贈言)에 시 71편, 서(序) 4편, 기 2편, 명 1편,
만송절의비운(晩松節義碑韻) 73수, 만사 106수,
상의계안서(尙義契案序) 1편, 제문 15편,
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명·수갈고유문(豎碣告由文)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의 「납세창덕궁소(納稅昌德宮疏)」는 당시 왜인들이 세금을 수탈하자
조세를 조정에 직접 바치면서 올린 상소로, 척일(斥日)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서(書) 가운데 「답곽면우종석(答郭俛宇鍾錫)」은
당시 고종의 총애를 입어 징사(徵士)가 되었으나 왜적을 철저히 배척하지 못한 곽종석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잡저 가운데 「책오적(責五賊)」은
매국오적(賣國五賊)인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 등의 죄목을 낱낱이 적은 성토문을 만들어 게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은 왜인이 주는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면서 쓴 글이다.
이밖에도 헌병·경찰·총독부서기 등 일인들과 문답한 기록 10여종이 있다.
이 글들은 납세, 전지(田地)의 팻말, 묘적(墓籍), 주세(酒稅) 등의
왜법에 불복했다는 죄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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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칠곡군 향토문화백과)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영어의미역 Eunsubyeonparok Anti-Japan Discours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성격 논설
작가 만송(晩松) 유병헌(劉秉憲)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유병헌(劉秉憲)이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며 쓴 항일 논설.
[개설]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은사금과 작위를 수여하였다.
1911년 5월에 칠곡군 북삼 출신의 유생인 유병헌은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고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통해 일제를 규탄함으로써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구성]
유병헌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단식·순국하고자 하였으나
마음을 돌려 일제의 강제병합과 매국 역적을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11년 5월에 일제가 수여하는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는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지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1911년 10월 납세 거부를 통해 일제의 모든 통치행위를 부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병헌은 약목헌병대(若木憲兵隊), 김천헌병대(金泉憲兵隊), 김천경찰서(金泉警察署) 등에 호출되어 문초를 받았다.
논설 「은수변파록」은 구국의 의지를 보여주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전문.
은혜와 원수를 변별하여 배격 파멸시켜야 한다.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白과 黑과 같아서 변별할 필요 없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내 나라를 빼앗고
내 임금을 쫓아내고
내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저놈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은사금'으로 유혹 하니,
이 어찌
黑을 가리켜
白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말 것이다.
진실로 흑과 백을 분별하는 사람이면
누가 즐겨 죽을 함정에 빠지겠느냐.
만약 이 함정에 빠지면
빠져나올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운 일이 어찌 아니겠느냐.
돈을 받고 거주성명(居住姓名)의 도장을 준다면
끝내 왜놈의 노예(奴隸)가 되고
왜국의 종자(從子)가 되어
철권(鐵券)에 기재되어
무궁토록 전하여
그 자손들에게 미칠 것이니
노예(奴隸)되면 다시 속죄를 할 수 없고
오랑캐의 종자(從子)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심장은 갈수록 혹독한 분통과 울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창자와 쓸개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따를 것이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밥을 못 먹을 지경 일 지어다.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 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말아야 하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시라.
무릇 우리 조선인은 이를 보고 또 경계하고 삼가할지어다.
[의의와 평가]
일제의 조선 병합에 저항하여 은사금 수령과 일제의 통치를 거부하였던 순국의사의 기개를 보여준 논설로서
조선의 고관 대작 관료 지사들에게 경고의 뜻이 담겼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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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운동을 전개한 사람.
[개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거나 일제강점기에 국내외에서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의 범위는 한일병합을 기점으로 앞선 시기에는 크게 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으로 설정할 수 있고,
이후 시기에는 국내외 무장투쟁,
3·1운동,
노동·농민·학생운동 등
대중운동, 문화운동, 독립운동 자금모금 등과
임시정부 활동 등이 설정될 수 있다.
[시기별 운동]
칠곡 지역 독립운동가의 저항운동은 조선 말기 일제의 침략에 맞서면서 시작되었다.
경북 지역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
칠곡에서는 유병헌(劉秉憲)의 상소와 격서 항쟁과
척사위정계열의 강원형(姜遠馨)의 투서 항쟁이 일어났다.
한일합병 이후 칠곡군에서는
1910년대 대표적 비밀 결사단체인 대한광복회(단) 운동과
조선국권회복단(달성친목회 사건) 사건 등에 관련된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에는 3·1만세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는 가운데
칠곡군에서는 3월 12일부터 4월 10일까지 인동면 진평동(현 구미시) 만세시위,
약목 장터 시위 모의, 약목면(현 기산면) 평복동 만세시위,
석적면 중동 만세시위, 석적면 성곡동 만세시위 등이 발생하였다.
유림계에서는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칠곡군의 유림 장석영(張錫英)이 깊이 관여하였다.
이 운동은 파리장서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이념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진행되었다.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대한독립 후원 의용단,
군정서의 의용병·자금 모집 등 비밀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주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모집 등의 활동이 펼쳐졌다.
또 무장투쟁과 폭탄 테러 등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임정 군자금 모집 운동,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의열단 활동, 김창숙과 군자금·동척 사건 등이 일어났다.
청년운동·노농운동 등 대중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일제의 침탈로 인한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원호하거나
대중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협동전선을 구축하여 민족운동의 대표 기구를 설립하자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나
신간회가 창립되자 칠곡군에서도 그 흐름에 따라 신간회 칠곡지회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 이후 칠곡에서는 청년동지회 사건, 보손 진흥회 등을 통해 민족차별 반대,
대중들의 경제 옹호 활동 등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칠곡에서는 왜관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농민운동이 일어났는데,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그것이다.
이는 1930년대 중후반 대표적 농민조합운동의 하나였다.
1939년 7월에 근로보국대의 이름으로 왜관 지역의 경부선 철도 복선화 공사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보다 많은 작업량이 배당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이른바 왜관사건을 일으킨다.
그 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문예부·연구회·다혁당 등 비밀결사를 만들어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칠곡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국외에서도 일제로부터 민족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및 연해주에서 결성된 신흥무관학교,
중국 관내 지역의 상해 임시정부,
의열단 등 등 독립운동 단체,
한국 광복단 등에 참여하였다.
[특징]
칠곡 지역 독립운동의 특징은 경북 지역의 유교적 전통이 시대적으로 배경이 되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유교적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척사위정 계열의 운동이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비밀 결사운동이 펼쳐졌고,
파리장서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대표적 독립운동인 3·1만세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고, 대중운동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칠곡 지역의 운동가들은 전국적인 흐름에 동참하면서,
지역의 사회문제를 민족문제와 연관시키면서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갔다.
곧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의 전개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194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칠곡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를 비롯하여 국외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칠곡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식민지 민족운동이 전국적으로 승화되고,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을 형성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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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일어난 독립운동(獨立運動 ;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정의]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개설]
조선 후기 국권회복 운동으로 전개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그리고 구국운동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리하여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과 1920년대 국내외의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반대하고 나아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국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말기 국권회복 운동]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그리고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칠곡군의 경우 국권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의병전쟁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의 결성은 없었지만,
칠곡 출신의 유병헌(劉秉憲), 장준호(張俊灝), 장성우(張性愚), 손기찬(孫基燦) 등이
영천에서 결성된 산남의진에 투신하였다.
한편 계몽운동에서 칠곡 출신의 인사들은 계몽운동단체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그리고 교남교육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조직된 대한자강회의 회원으로 칠곡 출신 장지연(張志淵)·강원형(姜遠馨)이 참여하였고,
1908년 11월 칠곡군에는 대한협회 인동지회가 설립되었다.
대한협회 인동지회는 대한협회 인동군시찰원 윤효정이 참석한 가운데 옥성학교에서 발기회가 개최되었는데,
회장 장지영(張志英)·부회장 홍종순(洪鍾舜) 등이었다.
그리고 1908년 3월에 조직된 교남교육회에 참여한 칠곡 출신은
장길상(張吉相, 인동)·장정상(張正相, 인동)·이상화(李相和, 칠곡) 등이었다.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계몽운동은 신교육기관인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칠곡 출신의 인사로 강원형 등은 언론상소운동을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폭압 정치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은
대한독립의군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 비밀결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칠곡군의 경우에는 일제의 은사금 거부 및 세금거부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단식 자결한 유병헌(劉秉憲)의 투쟁이 특히 주목된다.
또한 비밀결사의 투쟁 과정에서 의병 계열의 대한광복회가 벌인
경상도관찰사 장승원암살사건(張承遠暗殺事件)이 일어난 지역이었고,
산남의진에 참가하였던 손기찬(孫基燦)이 회원이었다.
한편 계몽운동계열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참여한 장건상(張建相, 칠곡)·신상태(申相泰, 칠곡),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장석영(張錫英) 등이 있다.
[1919년의 3·1운동]
칠곡 지역에서의 3·1운동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을 필두로 같은 해 4월 9일까지 약목·북삼·석적 등지에서 전개되었다.
칠곡 3·1운동은 1919년 4월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의 항일투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혜성단의 단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칠곡 출신은 이영옥(李榮玉)·이명건(李命健, 일명 李如星)·이덕생(李德生)·이수건(李壽鍵) 등이었다.
한편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했던 장석영(張錫英) 등의 활동도 주목된다.
[1920년대의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국내외의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특히 국내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전개한 무장투쟁과 국외인 만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단체의 무력 항쟁,
그리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칠곡 출신으로 장석영·이수일(李壽逸)·장익원(張翼遠) 등은 1924년 유림단의 독립운동자금모집사건에 관여하였고,
정명준(鄭命俊)은 진우연맹사건(眞友聯盟事件), 장택원(張澤遠)은 ‘ㄱ’당사건(‘ㄱ’黨事件),
장진홍(張鎭弘)은 대구조선은행지점투탄사건(大邱朝鮮銀行支店投彈事件),
이덕생(李德生)은 만주 군정서의 의용병 및 군자금모집사건 등을 통해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19년에 창립된 왜관소년회(倭館少年會),
1920년 8월에 창립된 왜관청년회(倭館靑年會),
1926년에 창립된 칠곡청년연맹(漆谷靑年聯盟),
1928년 4월에 결성된 신간회 칠곡지회(新幹會 漆谷支會)의 활동도 주목된다.
[193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
1930년대 이후 항일 독립운동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반대하고 나아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칠곡 출신으로 권쾌복(權快福, 인동)은 1938년 대구사범 학생의 소위 왜관사건(倭館事件)에 연루되었고,
왜관 출신의 전경원(全京元, 왜관)은 일본 경도에서 재일교포의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옥성신정(玉城信正, 왜관)과 산본상문(山本相文, 칠곡)은 징병 반대 등을 통해
조선 독립을 부르짖다가 체포되어 형을 살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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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헌의 자 홍렬(洪烈),흥열(興烈)형제의 독립운동.
장남, 홍열(洪烈)은 1865년(고종 2)∼1933년卒.
조선 말기 유학자로서 자는 여범(汝範)이고, 호는 자하(紫下)이다.
차남, 흥열(興烈)은 戊辰 年 生 ~丙辰 年 卒,
조선 말기 유학자로서 자는 오범(五範)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경북 칠곡군 북삼면(北三面) 강진리(江津里)에서 태어났다.
시조는 고려시대에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했던 유승비(劉承備)이다.
증조부는 유우동(劉遇東), 조부는 유익원(劉翼源)이며,
모친은 송희규(宋希奎)의 딸 야성송씨(冶城宋氏)이다.
홍열(洪烈), 흥열(興烈) 형제는 아버지 밑에서 한학 배우기를 시작하였는데
고금의 인물들과 친족들의 세계(世系)를 기록하는 데 능숙하였다.
효행도 뛰어나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비와 눈을 맞아가며 성묘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본에 항거하다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 때
밤마다 슬피 울며 통탄하여 반드시 원수 갚을 것을 소리쳐 다짐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일제에 굴하지 않고
항상 꿋꿋한 태도로 아버지 유병헌과 뜻을 함께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차남 흥열(興烈)은 소장사 등, 상업(유통업)을 하여
틈틈히 군자금을 만들어 아버지 유병헌을 통하여
지인(안중근 동생 안정근, 만해 스님 등)들을 통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냈고,
왜경과 친일 장택상 일족의 침탈에서 대항하여 가업을 이어나가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원인모르게 사망하셨다.
당시 유씨 집안 삼부자와 일가 모두가 외적과 외경의 압박에 항거 하였다.
문집으로 『자하선생문집(紫下先生文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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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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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삼읍[Buksam-eup,北三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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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삼면은 동쪽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칠곡군 석적읍(石積邑),
남쪽으로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서쪽으로 김천시,
북쪽으로 구미시에 접한다.
2003년 7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북부에는 금오산(金烏山:977m),
서부에는 영암산(鈴岩山:782m)·서진산(棲鎭山:742m)이 솟아 있고,
중앙부에는 경호천(鏡湖川)이 동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른다.
남쪽은 오선들을 형성하며 동부는 낮은 구릉과 낙동강 범람원으로 구성된다.
경지율이 다른 면에 비해 높고 논의 비중도 가장 높아 주곡농업이 활발하다.
범람원에는 사과과수원이 넓게 분포하고 채소·양송이 재배 및 양잠도 성하다.
구미공업단지 인근에 있어 공장종업원의 주거지가 되는 한편 소규모의 하청공장이 많다.
또 산림부산물을 원료로 하는 갈저 가공공장이 있다.
이와 같은 구미공업단지와의 의존관계 때문에 군내에서 인구가 감소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경부선 철도가 읍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로 대구광역시·김천시에 연결되며,
구미시를 거쳐 상주시로도 통한다.
읍의 서북면은 금오산도립공원, 금오산성에 해당한다.
문화재로는 선봉사 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보물 251),
칠곡 인평리 사지(仁坪里寺址),
칠곡 어로리 성지(漁蘆里城址),
어로리 고분군,
칠곡 숭오리(崇烏里) 사지,
유병헌 묘(劉秉憲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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