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면(淸河面)
청하라는 지명을 육청(六淸)에서 유래하여 맑은 시냇물 때문에 지었다는 설도 있고 청계리(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의 『청(淸)』과 고현(河芳[하방])의『 하(河)』를 합친설도 있다.
육청(六淸)이란?
時淸而河淸(시청이하청) : 시절은 맑고 물 또한 맑으며, 官淸而心淸(관청이심청) : 관리가 깨끗하니 민심 또한 맑도다. 風淸而睡淸(풍청이수청) : 바람이 맑으며 잠자리 또한 맑도다.
[청 계 2 리]
회학지
작은 방축을 쌓아 보를 막으니 학이 즐겨 찾아와 서식을 하다가 돌아가곤 하기에 회학제 라 이름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위에 학 모양을 한 산, 즉 학봉 혹은 화학산에서 유래했 다고도 전함) 그런데 사(師)자는 스승『사』자로 쓰인 것이 아니라 군사사자의 뜻으로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이 지역에서 대결할 때 학은 북으로 언젠가는 되돌아간다는 습성처럼, 고구려 군사들은 필히 북으로 되돌아 가리라는 비유에서 지어진 별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활골
못의 남서쪽 5∼60m 지점의 계곡, 시날의 궁노수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라고 활골짜기, 혹은 화랑들이 들끓던 곳이라고 화랑 골짜기란 이름이 붙였다 함.(관송지에서)
[서 정 2 리]
모과정
이 마을에 약 400년생 모과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이에 동이름을 목과정이라 하였다 한다. 모과나무 아래에 샘이 있어 木瓜井(목과정)이라고도 한다.
명암리 옛날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 하나가 한밤중 세 번 울었기 때문에 그 바위를 울바위라 했고 이에 연유하여 명암리라 칭하였다고 하며, 옹기굴의 고장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아주 먼 옛날 이곳까지 바다였을 때 배를 매었다해서 배바위(舟岩[주암])라고 한다.
[서 정 1 리]
금정리의 전설
이 마을 어귀에 이르르면 미륵보살 좌상의 석불이 서 있다. 먼 길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는 어김없이 이 석불 앞에서 합장을 하거나 절을 하면서 인사를 차렸다고 한다. 이 석불의 동북쪽 30m 위치에 샘이 있어 옛날엔 이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의존했던 것인데, 어느날 앉은뱅이와 장님 남매가 지나가는 길에 물을 먹으로 왔다가 샘속의 금덩이를 발견하고 환성을 지르니 장님인 오빠가 눈을 번쩍 떴다는 전설에 의하여 金井理(금정리)란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소 동 리]
까치고개 유래
조선 숙종대왕이 평복차림으로 밤중에 까치고개 역에 이르러 이 고개를 넘으려는 참인데, 야밤중에 까치가 세 번 짖는지라, 왕은 직감에 불길함을 알고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넘었다고 한다. 다음날 재를 넘노라니 도적의 무리에 살해 당한 시체들이 나뒹구는 것을 목격하고 왕은 까치에게 고마워 하면서 이 재의 이름을 까치고개라 불럿다 한다.
[용 두 1 리]
용산리
고주봉(高主奉)의 한지맥인 용의 머리 형국을 한 용산동 편에 있는 마을로 산 이름을 따서 龍山里라 하였는데 이 마을이 발전하여 지금은 용두1리로 되었다.
[필화 1 리]
오두리 전설
오두리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오두(烏頭)리라 하기도 하고 자라머리 같다고 하여 오두(鼇頭) 또는 오디라 부르기도 하며 별두(鼈頭)라고도 한다.
오암대사
가락국 김수로왕 후손 김준(金逡)씨와 어머니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용산 아래 오두리에서 이조 숙종 36년(1710년)에 출생, 20세 이전에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의 모든 전적을 달통한 영재였다고 한다. 20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탈상후 세상의 무사함을 깨닫고 유점사(금강산에 있는 절)로 들어가 의민(義旻)이라는 법명을 받아 중이 되었다. 서산대사의 9세손이 되어 후생을 보경사에서만 사셨으니 이는 당신의 고향을 지극히 사랑한 연유라고도 한다. 수백수의 시를 모은 『오암집』이 있고 崔天翼(최천익) 진사와의 시짓기 내기 시합은 당대의 유명한 사건이었다고 한다. 83세에 진영송(眞影頌)과 임종계(臨終係)를 쓰고 나서 소연히 숨을 거두셨다. 선교정사의 칭호를 받아 비문에 새겨지니 그는 선교, 양종의 최고 지도자급 인물이라는 찬사를 받으신 분이라 하겠다.
청계리(淸溪里)
천령산[해발 775m, 정상 주봉을 우배봉이라 함]에서 발원한 물이 안청계리 쪽으로 한 가닥, 바깥청계 쪽으로 한 가닥 흘러내려 삼송원, 즉 월포천을 이룬다. 천령산은 원래 신구산이라 불렀으며 이 산의 중턱에는 상태사지가 있다. 부근에는 5∼6호의 화전민촌이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지고 없다. 주진산인 호학산은 청계도사가 학을 불러서 놀았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며 신증동국여지승탑에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신라가 세력다툼을 할 때 격전지로 전해 내려온다. 그 지명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도끼재 - 안청계리에서 회학지로 넘어오는 재, 도끼로 쪼은 듯 혈을 자른자리이며 고구려 군사들이 도끼와 같은 무기류를 버리고 간 곳이란 얘기가 전해진다. 이 아래 도칫골이 있다.
거진련- 고구려군이 폐전하여 진을 거두고 송라쪽으로 넘어간 고개, 외청리의 동북방이 된다.
호학제 - 삼국시대에 막은 못으로서 고구려 군사가 언젠가는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회학지라 부르기도 한다. 이 못은 1933년 중수하였으며, 만수면적 11㏊이다.
백리두들·백리전원 - 경주에서 백 리되는 지점에 있는 언덕배기로서, 이곳에서 고구려와 신라 양군이 일전을 치루었고, 여기서 패한 고구려 장수의 항복을 예대두들에서 받았다 전한다.
용잠이등골, 용와등 - 회학지 동편 상능선으로서 용의 등을 닮았으며 이곳에 용의 깃발을 든 신라군이 진을 쳤다 한다.
진등곡 - 용잠이등골 동편 골짜기로서 고구려군의 진영이 있었으며, 그 때의 모닥불이 사방을 환히 밝혔다 전한다. 지금도 활무덤이란 지명이 있어 무기를 묻어버린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
|
안청계·안청리
도끼재 동편 5여 호 사는 산촌이다. 영천이씨제실이 있고 마을어귀 팽나무 당산목 아래 제당에서 정월보름에 청송성씨 터주신위에 제사를 지낸다. 호룡골 못이 있고, 그 아래 작은 저수지를 1988년 하나 더 축조하였다.
바깥청계·외청리
원래는 개천 건너 언덕에 있었는데 뱀의 극성으로 이주하여 현 위치에 마을을 일구었다 한다. 맑은 냇물이 사시장천 흐르는 지역이라 하여 청계라 불렀다 한다. 현재 70호 정도 살고 있으며 쌀농사를 주로 하는 마을이다. 청안이씨 가문에서 이순창 의사가 배출되었으며 마을 북서쪽에는 서포정[서포선생 숭봉지처]이 있었고, 마을 속에는 청학정[청안이씨 제실]이 있다. 고려 때는 신지부곡이 있었다 전한다. 마을 서쪽 가까이 1965년 준공된 만수면적 12.29㏊의 청계지가 있고, 용지를 가까이는 사실지[만수면적 4.1㏊]가 있는데 1958년 준공되었으며 사적당지라고도 불렀다. 호학산의 삼용추를 거슬러 오르면 옛날 사기그릇을 굽던 사구장터란 마을이 있었다 한다. 외청리에는 1974년 설립된 청계교회가 있고, 동제사는 정월보름에 순흥안씨 터주와 영천이씨 골목신위를 모시고 지낸다. 이 마을 동편에 청계숲이 있으며, 400년생 느티나무 노거수 다섯 그루가 남아 있다. 1989년 경지정리를 완공한 지역이며 이를 기념하는 비를 들 가운데 건립하였다. |
유계리(柳溪里)
청하천의 발원처인 궁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따라 덕성산과 호학산 줄기가 형성한 큰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유천, 황배이, 서계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 유계리라 개칭하였다. 상옥으로 가는 샘재 굽앗길이 서계마을을 돌아간다. |
|
유치이·유천
마을 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았을 때 유천리라 하였으며, 마을 윗돔에 흘러 넘치는 샘이 있어 유천이라 하니 이에 연유하여 유천리라고도 불렀다 한다. 이 마을 북쪽으로 활 모양의 계곡이 펼쳐지는데 궁곡, 활골이라 부른다. 궁곡에는 한때 신라군의 궁노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골짝 깊숙이 자리한 절터 혹은 탑골이란 곳에 탑산사가 있었다 한다. 1953년 이 골짜기의 물을 용두현 넘어 회학지로 끌어넣기 위하여 궁곡수로동굴을 뚫었다. 용두현에는 이여송이 혈을 자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 어귀 상수리나무 당산목엣 정월보름날 문씨 터주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황배이·황암리
황배이골 어귀의 바위가 누른색인데 연유한 지명이다. 월성최씨 집성촌이다. 광산골에는 조선조에 이동신공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서 한때 비스무스 광산이 있었다. 여기서 골짝 깊이 들어가면 상사바위 입구 기암절벽 사이에 성문과 같이 틔어진 곳이 있어 위명동이라 부른다. 임란 때 이 안골에 피난하고 있던 주민들이 이곳에는 위병을 돌과 바위로 무찔러 쫓으니 울며 달아났다고 하여 위명동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이 안골 깊은 곳에 1943년 법성사가 건립되어 있는데, 이 절터에는 나대의 절 황방사가 있었다 한다. 청하면의 농업용수 학보를 위한 유계저수지가 축조중인데 완공되면 유천·황암은 수몰지구가 된다.
서계리
이 고을의 서쪽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조선 명종 원년(1545) 을사사화 때, 황해감사로 있던 유상문이 이 고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지명이라 전한다.마을 앞 하천 바닥에 돌이 많아 물이 바닥으로 스며들어 버리니 일명 건천동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북쪽에 7호 정도 살고 있는 중리란 마을이 있고, 그 안골짜기 월곡(월곡)에 금광이 있었다 한다. 마을 동편 하천변에는 오리에 뻗친 풍치림이 있었는데 일제말기에 자력갱생사업의 명목으로 대부분이 벌채개간되고, 1,000여 평에 50여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 있다. 500년생 느티나무 당산목(가슴둘레 6m)은 도목으로 보호되고 있으나 고사 직전에 있다. 정월보름에 모씨터주 윤씨골목 신위에 제사를 지낸다.이 마을 남쪽 들에 1917년 건립된 유계교회가 있고 서편 대밭 아래에 윤백위와 그의 자윤빈을 기리는 상덕사와 죽림사가 있다.
명안리(鳴安里)
엿재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에 형성된 안심, 명안, 정말과 같은 마을을 합하여 1914년 명안리라 하였고 1·2구로 나누었다. 마을 어귀에 있던 월성이씨 문중묘역인 안심을 베어내고 1971년 유역면적 850ha의 안심지를 축조하였다. 이에 배바우 마을도 이주를 하여 가고 2호만 남아 있다. 배바우는 못가에 남아 있으나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많이 묻어 버렸다. 옛날 이곳에 바닷물이 차 있을 때 배를 정박시키던 곳이었다 한다. 고려 때 간천부곡이 있었다. |
|
명안리
마을 서편 1㎞ 거리에 초가삼간 크기의 움푹패인 구멍바위가 있는데 어느날 한밤중에 얼음장 깨어지듯 울었다 하여 불리운 지명이다. 아주신씨와 월성김씨 세거마을이며 정월보름에 300여 년생 떡갈나무 당산목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달성서씨 터주와 남평문씨 골목신위를 모신다.
안심리
안심계곡 어귀에 위치하며 안심지가 안수시엔 마을 앞에까지 못물이 출렁인다. 30여 년 전까지 안심이숲이 마을 앞에 가로막아 있어서 외부에 마을이 노출되질 않아 잦은 왜구의 침입이나 전란에도 안심하고 숨어 살 수 잇는 곳이라 하여 안심리라 불렀다고 한다. 서쪽 1.5㎞ 거리엔 폭포가 있고, 그 안골에 절골 혹은 절터바탕이란 곳에 나대의 절 안심사가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 한다. 여기서 장구재를 넘어가면 신광의 마북에 닿는다. 정월대보름에 월성김씨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당산목은 고염나무이다.
점마을
엿재로 넘어가는 길가에 형성된 마을로서 예부터 옹기굴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엿재는 한때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대였다 전하는데 호랑이나 산도적이 무서워 열 명이 모여서야 넘어 다닐 수 잇던 곳이라 하여 열재라 부르던 것을 발음이 와전되어 엿재라 한다. 삼짇날 300여 년생 적송 당산목(22m × 4.1m ×15m)에서 동제사를 지낸다.(김해김씨 터주) | |
서정리(西井里)
청하의 진산인 호학산 주맥이 동남주하다가 우족산[가로질산이라고도 부른다]에 이르러 큰 혈을 이루었는데 그 남쪽 산기슭에 김호, 감정, 밤나무지이, 모과장과 같은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를 합하여 1914년 서정리라 하고 1, 2, 3동으로 분동하였다. |
|
금호·금전
아혜현기가 있던 마을로서 신라가 점유하여 화방으로 현기를 옮겨갈 때까지 이 지역의 중심 마을이었다. 옛날 달골에는 금광이 있었고, 마을 북동 산골짜기에 금씨골이란 지명이 있고, 마을어귀 샘에서 장님 오빠와 물을 먹다가 금덩이를 샘 속에서 발견하고 놀라 소리치는 통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전설 등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 금이 산출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금정리란 지명은 이에 유래한 것이며, 금호동이란, 나대의 풍수서인 성지비결에 『물위에 뜬 금바가지 형국』의 혈이 있다고 한데서 연유한다. 고려 때에는 김해부곡을 , 조선조에는 금정원을 두었으며, 쇠발골에 향교가 있었는데 숙종 39년 (1973년) 덕성리로 옮겨갔다. 마을 어귀엔 곤노차나불이 있는데 두부는 파손되었다. 그 옆에 고려 때 성도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 한다. 월성이씨 이 마을 입향조 농산이동국추모정인 농산정이 있다. 월성이씨 문주지역은 노송림이 울창하였는데 1988년 개벌을 하였으며, 그 뒷골에는 1943년 창건된 아혜사란 작은 절이 있고 남쪽 옛 마을터 앞에는 윤락충효리란 돌 비석이 도로의 이동을 따라 30여m 북쪽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마을 서편에 서부초등학교가 폐교(현재 경락한의원)가 되었고, 그 앞에는 월성이공동신영세불망비가 있다. 안심지 아래에 양돈장이 있고 부근 도로변에 안학서영세불망비가 있다.
감정리
30여 호의 작은 마을로서 물맛이 좋은 샘이 있어 이에 감정리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 서편 도로변에는 임란 때 곽재우 장군을 따라 출전하였던 성균관진사 김득경 의사와 그의 아들 문용 의사의 기단비가 있다.
모과지이·목아정
감정리 밤나무지이와 더불어 서정2리에 속하는 마을로서 400여 년생 모과나무 당산목 곁에 샘이 있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며, 정월보름날 동제를 감정리와 더불어 지낸다. [터주는 달성서씨]
밤나무지이·율전
시지골 안골짝에 접어들면 언덕위에 30호 정도 사는 마을이 있는데 밤나무 가 많았을 때 불려진 지명이다. 이 마을 북쪽 골짜기 건너 사실못 남쪽 옛 용지마을 터에 제당이 있어 덕성2리와 합동으로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낸다. 모시는 신위는 산신령과 담양전씨, 황주변씨 터주에 월성최씨 골목 신위이다. 청하면 당시 사직제를 지내던 사직당이 사실지 북쪽 둔덕에 있었다 하며 사실지를 사당지라고도 부른다. |
상대리(上大里)
봇갓산 동편 기슭 청하천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70여 호가 사는데 김해김씨와 월성김씨, 연일정씨가 많이 산다. 마을 북쪽에는 상대숲이 일부 남아 있고 하천변 제방을 따라 30ha 두산포도원이 1974년에 설치되어 마주앙 포도주의 주원료를 생산하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도원은 없어지고 화훼단지가 조성되었다가 개간하여 쌀농사를 짓고 있다. 웃한들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표기에 따라 상대평이라 했는데 1914년 상대리로 하였다. 욋골[기와굽던 곳, 와곡], 따복골, 소등골과 같은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한다.동제는 200년생 소나무 당산목에서 정월보름에 지낸다. (터주 연일정씨, 골목 김해김씨)
하대리(下大里)
청하천 남쪽에 넓은 들이 있어 한들이라 부르며, 그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아래한들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대평이란 말 대신 하대리로 통칭하였다. 앞 들에 조선조 영조대 현감 한우창 재임시 축조한 한들못이 있고 앞산 등너머에 왓골, 그너머에 살알, 암자가 있었다 하며 불의동이라고도 불리는 불묏골이 있다. 면안리에 안심지가 축조되기 이전까지는 봇물과 한들못에만 의존하여 소량의 벼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지라 주로 전작에 의존하여 살아온 마을이다.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 먹기 어렵다던 얘기가 전해지며, 가뭄을 많이 타는 들이란 뜻으로 한들이라고도 풀이하기도 한다. 정월보름에 마을 남쪽 들녙에 있는 제당[당산목은 200년생 적송]에서 어진 골목님네 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앞산 까치고개 서편 일원에 1990년 청하농공단지(50,000여평, 21개업체수용)가 조성되어 있다.
고현리(古縣里)
까치고개 [작현]와 별래재 [별내현, 성현, 장자봉 181m]를 잇는 7번국도의 서편 일원에 고현1리와 2리(하방, 이장곡, 배곡)가 있다. 1914년 네 개의 자연부락을 합하여 중심부락의 이름인 고현으로 통칭하였다. |
|
고현·고천하리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해아라 개칭하고 화방의 앞 들에 토성을 쌓아 현기를옮겨와 수백 년을 있다가, 고려 현종조에 덕성리로 옮겨가니 그 자리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화방과 구분하여 고현 혹은 고청하리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고현원이 원뒷들 남쪽에 있었으며, 청하군 당시에는 남면사무소가 있었다. 서편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건지봉이 있어 곤지봉 혹은 달봉만디라 부른다. 지씨터주와 곽씨 골목 신위에 동제사를 지낸다. (정월보름, 말채나무 당산목, 제당유) 마을 속에 경수정(곽씨문중)이 있고 옛날 별래재를 넘어가는 길목 후동봇가에 있던 포산곽공시은비가 이 마을 진입로변에 옮겨 세워져 있다. 그리고 원뒷들에 김해김공두수공적비가 있다. 서편산록에 고현교회가 있다.
하쌍·화방·하방(河芳)·하방(河坊)
배골에서 흘러내리는 하방천이 이 마을 중심을 흐르며, 옛날에는 이 안골짝으로 배나무 또한 많았던 고을이라 배꽃 만발한 풍경을 보고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이 번창했던 조선조 후기에 이르기까지 달봉산 [망월봉] 동남 들녘에 넓게 주택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절도 있었다 한다. 달봉산과 작현 서편 및 개축 일원에는 6∼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석실고분 백수십여기가 있어 이 일원이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문물이 크게 번성했던 고을임을 입증하여 준다.
배골·이곡·이화동
매봉 (172m)과 달봉산 사이의 배나무밭이 많았던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고려 때 남계부곡이 있었다. 인조(1628) 때 부제학 유축이 송라 학산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7년을 살다가 형조참판으로 재등용되어 떠났으며, 달봉산 북쪽에는 당시에 밤낚시를 즐기며 노닐다가 밝은 횃불의 정취에 감탄하여 못 이름을 지었다는 어화지가 일부에 남아 있어 못안못이라 부른다.
이장곡
고주산 [해발 348m, 고주봉산이라 했으며 내륙으로 연결되는 봉화산이었음] 동편 깊숙한 골짜기에 형성된 촌락이다. 1958년 만수면적 8.46ha의 고현지가 축조되어 있으며, 배나무밭이 많고 골짜기가 깊은 산촌마을이다. |
소동리(蘇東里)
청하읍성의 조산인 용산(203.3m)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하며 범바우, 손등, 지릿골과 까치곡 일부를 합하여 1914년 소동이라 하였다. 범바우마을 서편 소동천변에는 100여m에 걸쳐 옛 숲의 일부가 남아 있다. |
|
손등·소동
마을의 지형이 손등 같은데서, 혹은 소의 등과 같다 하여 손등·소등이라 하던 것을 한자식표기로 소동(蘇洞)이라 했다 한다. 마을 남쪽엔 둔전들이 펼쳐져 있는데 조선조 때 둔전이 있었다. 창의대장 김진규 의사의 출생지이며 공의 묘는 가라현에 있다. 뒤 큰골에는 저수지가 있고, 솔밭산 서편에 일솔곡이 있다. 김해김씨와 의성김씨 세거지로서 영모정(김해김씨 입향조 숭봉지처)이 마을 안에 있고, 1961년 건립된 소동교회가 있다. 동제는 2년마다 정월보름에 지낸다. [터주는 기장이씨, 골목은 김해김씨]
범바우
이 마을 동편 산록에 범 모습의 큰 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가 묻히면 이 마을이 쇠하고 노출되면 소동이 쇠한다 하여 두 마을간에 충돌이 잦았다 한다. 작현천이 이 마을과 청하초등남부분교 사이를 흐른다. 동제는 유둣날 500년생 노송에서 지내다가 사라호태풍때 도복고사하자 400여 년생 모과나무에서 다시 이어지다가 폐지되었다.
까치곡
고현교 주위에 위치하며 까치고개의 전설에 유래하여 까치골이라 부른다. 옛날의 주막촌이 있던 지역이나 지금은 1호가 남아 있고, 이 일원에는 석실고분이 있다. 옛길은 여기서 땅골로 이어졌었다 한다. 철교가설을 위해 일제시대 때 뚫은 까치곡굴이 있다.
지리골·지예곡
손등 북쪽 마을이며 이암층의 풍화지대인지라 비가오면 몹시 질걱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예곡(知禮谷)은 한자식표기일 뿐이다. 이 마을 위 용산자락에 수십 기의 석곽고분이 있다. |
신흥리(新興里)
본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옛날 호수지역이라 한다. 청하군의 동면 지역으로서 1914년 소동의 일부와 흥해군 검단동 일부를 번현에 병합하여 신흥리라 하였다. 원래 마을의 중심은 뒷산인 변현 산기슭에 있었는데 칠포가 수군만호의 진기가 되어 번창하게 되자 이웃 골안의 이 마을도 마을 앞 평지로 이동하여 신주택지가 형성되니 번현마을과 구별하여 신흥이라 불렸다 한다. |
|
번현
그 산 꼬리의 모습이 되돌아 굽어 있는고로 반현이라 불렀는데 훗날 번현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남서쪽 산록, 서낭재로 가는 길목에 문등골이 있는데 나환자의 발생으로 폐촌되었다 한다. 반현에는 도장골이 있고, 솔등에는 김해김씨 청하입향조 제단각이 있다. 마을 남쪽 북골에는 오줌바위가 있어 눈병에 좋다는 약수가 오줌누듯 흘러 나온다. 반현 북쪽 산기슭에는 두산농산의 대형 도사가 있고, 남쪽 서낭재만디에는 지석기 4기가 있다. 구월 중기에 300여 년생 팽나무(수고 20m, 가슴둘레 3.3m) 당산목이 있는 제당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
청진리(靑津里)
월포만 남단 해안 돌출부위에 형성된 어촌으로서 3리인 보리진은 흥해읍의 오도리와 경계를 이루며, 마을 남서쪽에는 옛 봉화산인 묵은봉 [구봉산, 해발 104m]이 있다. 1914년 대곶이 (1리)와 흥해군의 푸나리 (2리), 보리진 (3리)을 합하여 청진이라 하였다. |
|
대곶이·죽관
바다 쪽으로 뾰죽히 나온,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50년 전까지는 마을 앞 해변에 있는 장군바위에서 동제사를 지냈었다. 달선서씨 터주와 김해김씨 골목신위에 구월 중기에 지낸다. [마을 동산에 제당을 지었음.] 마을 어귀에 청진교회가 있다.
푸나리
원래는 길 서편 골짜기 송림 울창한 곳에 있었으므로 송정리라 했었는데 바닷가로 이주하여 푸른나리, 푸나리 [청진]라 이름을 바꾸었다. 동제사는 영신당에서 김해김씨터주와 월성최씨 골목신 위를 모시고 해마다 두 번씩 (정월보름과 구월중기) 지내고 5년마다 별신굿을 한다. 도로변 이양진씨 묘역에는 가슴둘레 4m가 넘는 300여 년생 팽나무 기형목 한 그루가 있다.
보리진·포이포·포위진·모진
임란 때 왜적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는 구전도 있으며, 보리가 잘 되는 어촌이었다는 설도 있다. 안동권씨와 김해김씨가 세거하였다.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내며 제당 서편 골짜기에는 안동권씨상운공추모지소인 해와제가 있다. |
이가리(二加里)
1914년 백암동 이지로포, 그리고 소동과 청진의 일부를 합하여 이가리라 하였다. |
|
백암동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마을인데 바다가 멀어지면서 대부분이 바닷가로 이주하고 소수의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원래 마을보다 서편 산록으로 옮겨서 정착해 있다. 도씨와 김씨, 서씨가 세거하였던 마을로서, 백암이 보이는 언덕에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기에 연유한다고도 한다. 이 마을 서편 언덕 위엔 황새마을이란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이는 송림 속에 황새가 깃들던데서 연유한다.
이지로포·이기로진·이가리
옛날 둘 기생이 청진과 백암의 갈림길에 터를 잡고 늙도록 마을을 개척하면서 살았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 전하기도 하며 도씨와 김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하여 각각 집성촌을 일구었는데 차츰 번성하면서 서로 합하여 한 마을이 되었다 하여 이가리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정월보름이면 김씨터주와 도씨골목 신위에 제사를 지내고 4년마다 용왕제 굿을 한다. 이가초등학교와 이가교회가 있다. 청진과의 경계지점 너래바위짬 언덕에 1983년 8월 등대를 설치하였다. |
방어리(方魚里)
다래산 동편 산기슭에 자리한 어촌으로서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서편 언덕배기 제당이 있는 주변이라 한다. 마을 어귀 해변의 큰 바위가 말같다 하여 말바윗골이라 불렀는데 방어가 잘 잡히는 현 위치로 마을이 이동하게 된 후 방어진이라 부른 데서 방어리라 불리게 되었다. 영일정씨 터주에 월성이씨 골메기 신위를 모시고 동제사를 올리는데 정월과 구월에 두 번 지낸다.국립수산진흥원 포항수산종묘배양장이 있고, 방어리침례교회가 있다.
월포리(月浦里)
월포만을 끼고 있는 본면 연안최대의 마을이다. 근년에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여름 한철 크게 붐빈다. 1리는 적은포, 2리는 개포, 3리는 월아구와 중휘리를 합친 마을인데, 1914년 월아구의 『월』자와 개포의 『포』자를 취하여 월포라 이름하였다. |
|
적은포·소근포
월포천변 월현산[월래산, 달애산, 달래산, 해발 106m 대보름달이 덕성에서 보며 이 산마루에 돋아뜬다] 남쪽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다. 개포가 군사기지 항구일때 이 마을 앞에 강물을 따라 올라와 작은 어선들을 정박할 수 있었기에 적은포라 하였다 한다. 30년 전까지 어업조합이 있었고, 지금은 방어리와의 사이에 100여m의 방파제가 완공되어 있다. 남서쪽 논들에 지석기 1기가 남아 있다.
낫개·개포
청하천과 월포천이 날라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육지와는 샛강으로 인하여 따로 떨어진 새터에 신라 때 수군만호진영기가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들막·달래두들·월아구
지석기군으로 추정되는 큰 어금니모습의 바위들이 있는, 달이 뜨는 언덕이란 뜻으로 불려지는 마을이다. 근년에 이르러 이 바위들은 없어졌으며, 마을 역시 동쪽 언덕 아래로 이동하여 버리고 언덕은 논으로 변모하여 있다.
중휘라리·중휘리
수군만호가 개포에 있을 때 이곳에 중군 지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월포초등학교 동편 늪지는 옛날 청하천이 이리로 흐른 흔적이며, 이곳에서 화살촉과 칼 등의 병기류가 출토되었으며, 지석기로 추정되는 입석 1기도 남아 있다. 월포침례교회와 우체국이 있다. |
용두리(龍頭里)
청하천의 하구인 용산 머리 북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새마을(1리), 새터 오두, 허후리(이상 2리)와 같은 자연부락과 화지동 일부를 합하여 1914년 용두리라 하였다. |
|
용산리
용산 기슭에 자리했던 마을인데 새마을을 일궈 모두 이주해 버리고 지금은 전답으로 변해 있다. 지석기 4기가 있다.
새마을·새마리
용산리가 이동하여 일군 새마을이다. 해변엔 풍광 좋은 조경태가 있는데 옛날 조선조에는 정자가 있어 이곳에서 백일장이 열리긷 했었다 원래는 조경대라 했는데 인조 2년 유축이 이곳에서 놀고 있을 때 마침 이 앞에서 고래를 잡는 장관을 구경하게 되자 이름을 바꿔 조경대라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른다. 그 북편 사장에 포항종합제철연수원이 근년에 건립되었다. 3년마다 삼짇날 배씨터주와 유씨골목신위에 제사를 드린 후 별신굿을 한다.
새터·신기동
월포초등학교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오두리의 이좌도가 명당터를 찾아 이사를 와서 개척한 마을이다. 후에 서씨가 이주하여 와서 무과에 급제하니 이씨는 오두리로 되돌아갔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허후리·외휘리·외휘라리
중휘리 남동 해변 마을로서 개포에 수군만호가 있을 때 외곽 수비대의 지휘소가 있었다 하여 불려진 지명이라 전한다. 고려 때 등정부곡이 있었다 하여 불려진 지명이라 전한다.
오디·오두리
강성산(해발 150m) 동편 산기슭에 10여 호 남아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에 이르기까지 12우물을 먹는 현내 연안최대의 부촌이었고, 서당이 있었다 한다. 영천이씨와 김해김씨가 세거하면서 효우 이원량과 오암대사를 배출시킨 마을이다. 학봉 김성일이 어린시절 이곳에서 자랐다는 구전이 있다. 대홍수로 하천이 범람 물길이 바뀌고 흉년이 겹치면서 마을이 급기야 쇠퇴하였다 한다. 강성산은 옛날 부족국가시대의 토성지로 추정되며, 이 일원에 석곽고분군이 있어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산의 모습이 마치 자라와 같고 그 머리부위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오두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앞에 효우여가 있고 400여 년생 회화나무(17m X 3.8m) 당산목이 있다. |
필화리(筆花里)
7번국도가 이 마을 1·2리 사이를 갈라 지나고 있으며 옛 봉송전 서쪽머리 자리에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에 의하여 10여 호가 새마을을 이루어 있다. 1914년 하필봉과 화지동을 합하여 필화리라 불렀다. |
|
해필미·하필봉·하필미·구석필미
마을 뒷산이 붓끝 같다 하여 필봉, 필미라 했으며 바다쪽의 마을을 하필미, 혹은 해필미라 불렀다 한다. 그 작은 산봉우리는 일제 때 철도역부지를 닦으면서 깎아버렸다 한다. 김해김씨와 영천이씨 세거지로 조선조 말기 이 마을 훈도 서포 이백 선생 문하에서 창의대장을 지낸 김진규 의사, 중군장을 맡았던 이순창 의사, 소집장을 맡았던 이창모, 이도상, 서기 이기철 의사 같은 분들이 배출되었다. 정월보름날 마을어귀 노송림 당산목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곶이골·화지동
1리 구역으로서 옛날 이 마을 앞으로 청하천이 휘감아 흐를 때 현내사창이 있었고, 지형의 모습에 의해 곶이골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성균진사에 이필성이 합격하여 화짓대를 꽂고 석달 열흘을 잔치를 벌였던 것에 연유하여 화지동이라 부른다 전한다. 한편, 김해김씨 문중에서도 대파급제하여 화짓대를 꽂았다 하며 도산서원장을 지냈다 전하는 말도 있으나 확실치가 않다. 샛돔에 있는 회화나무 당산목에서 정안이씨 신위를 모셔놓고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
미남리(美南里)
1914년 위필미, 남천, 새장터, 관덕, 호암의 일부를 합하여 미남리라 하였다. |
|
위필미·필미(筆尾)·필미(筆美)·필봉
하필미의 뒷산이 붓끝 같은데 연유하며, 이 산의 철도역 부지를 닦을 때 없어지자 붓과 함께 생활하는 선비가 많다는 뜻으로 필미(筆美)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형이 행단형이라 하여 마을 가운데 돛대의 상징인 찜대를 세워 두고 있으며, 배가 떠내려 감을 막는다는 뜻과 홍수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마을 남서쪽 필미수(筆美數)라는 송림을 60년 전에 조성하였다. 이 방풍림이 조성된 이후부터 가난하던 마을이 부촌으로 변모하였다 한다. 일제 때부터 과수원이 많던 곳이다. 마을 남서쪽에 일제 때 축조된 폭 5.5m, 길이 108m의 청하교가 있었으나 1990년 개축하였다. 200여 년생 상수리나무 당산목이 마을 남쪽 송림 속에 있으며 정월보름날 초계정씨(터주)와 평택임씨 골목 신위를 모시고서 동제사를 지낸다.
남치이 남천
용산 자락에 형성된 마을인데 미남천의 남쪽에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려졌다. 마을 북동쪽 하천변에 있는 탕갓봉 중턱 서당골에 순흥안씨가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일구었는데 7번국도가 생기면서 마을이 양분되었다. 남쪽 쌀알들에는 1989년까지 미군항공관제소가 있던 곳에 해운항만청 포항해상무선표지소가 있고, 칼바위 앞 골짜기에 원각사 (195년 건립)란 작은 절이 있다. 동제는 정월보름날 지낸다. [당산목은 200여 년생 팽나무, 순흥안씨터주, 김해김씨골목]
땅골·당동
용산 속의 한 골짜기에 두세 집이 남아 있다. 초계정씨 제실과 김해김씨 제실이 있으며 천재단기도원이 있다. 옛날에 신당이 있었다 하여 당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용산 정상 남서 허리목에 용산사지가 있다. 소동리의 범바우마을로 이어지는 까치고개가 이 마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석실고분이 다수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이미 도굴되었다 한다.
새장터·사장터
조선조 때 궁술을 연마하던 곳으로서 1910년대까지 망실루가 있었다. 그 당시엔 오막사리 한두어 채 있던 곳이라 전한다. 덕성리 북동 도로변에 있던 청하파출소가 1958년 이건되어 오고, 1952년 해아중학교(현 청하중학교)가 부근 관송전 속에 설립되고, 5.16직후 덕성리에서 서던 장이 가까이 옮겨옴에 따라 새장터라 부르게 되면서, 마을이 급속히 커지게 되었다. 약 25년 전까지 극장이 있었으며, 농협창고, 정부미도정공장, 농협회관이 있고, 1988년 농협청하 단위조합 건물이 신축 이건되었다. 주위에 과수원이 많이 들어섰다. 정월보름에 마을 제당에서 원덕신위에 제사를 지낸다.
관덕동
관덕관송전의 북동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이라 전할 뿐이다. 관덕은 덕성을 바라다 보는 위치에 마을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관덕관송전은 세종조에 조림된 숲으로서 그 일부가 남아 기청산농원이 보전하고 있다. |
덕천리(德泉里)
청하군 역면지성이던 것을 고종 32년 (1895) 내북면에 편입시켰다가 1914년 관동과 송천, 외일동과 외삼동의 일부를 병합, 큰 샘(버덩우물)이 있다 하여 덕천리라 하고 송라면에 편입시켰다.1973년 3월 12일 법령 제6542호에 의거 주민의 편이를 위해 다시 청하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75호 정도 살고 있다.
|
|
관동
조선조 때 송라도찰방이 있던 마을이며 내일동이라 부르던 것을 고종 32년 찰방이 폐쇄되자 관아소재지라 하여 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둘레 521척, 높이 5척의 석축 담장이 있었다 하며 연당이 있던 부근에 300~400여년생 은행나무 당산목이 있어서 정월보름이면 유씨터주, 진씨골목 신위를 모시고 동제사를 지낸다. 조선조 후반기에 이르도록 관전장(8일, 18일, 28일)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 동편 7번 국도변에 관동못이 있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면민복지회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동편 사거리 마을은 5~6호 살았는데 없어지고 한전청하출장소가 들어서 있다. 1921년 설립된 침례교회는 덕성리로 옮겼다.
송천
내이동이라 부르던 것을 찰방이 없어지자 송천수 속에 펑펑 솟아 흐르는 샘이 있어 마을 이름도 송천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샘에 일인들이 혈을 질렀다 한다. 스무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 있는 송천 숲 서편에 제당이 있어 정월대보름마다 안씨터주 신위에 제사를 지낸다. |
덕성리(德城里)
고려 8대 현종 9년(1018) 지금의 성터에 토성을 쌓아 하방에 있던 현기를 옮겨오고 덕성 현이라 하였다. 이에 연유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향교골, 핑이골, 비달골, 동문걸, 서문밖, 덕성과 같은 자역부락을 합하여 덕성리라 통칭하였다. 성터에는 청하초등학교, 면사무소, 농업기반공사 청하출장소, 보건소와 같은 공공건물이 자리하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보전되어 있던 일체의 건물들이 한일합방 이후부터 하나 둘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해방이 되자 완전 철거되고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 석축마저 대부분 허물어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일부에 남아 있다. 성터에 남은 유일한 노거수는 400여 년생 회화나무(10m X 4.9m x 10m)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 614m, 높이 3m∼9m, 두 개의 성문과 성문루가 있었고, 두 개의 샘이 있었다. |
|
동문걸·동밖
덕성동문 밖에 형성된 마을로서 주로 상가를 이룬다. 우체국, 농촌지도소 청하농민상담소, 제일교회(1914년 서문 밖에 설립되었다가 1959년 이건)가 있다. 성터에서부터 이 거리에 이르러 청하장이 섰는데 5.16이후에 새장터로 옮겨졌다.
서문밖·섬밖
덕성서문 밖에 형성된 마을로서 지금은 비달골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치도길이 7번 국도가 포항, 영덕간에 뚫리기 이전까지 경주, 대구, 서울로 가는 주도로가 연결되던 곳으로서 금은방은 물론 각종 점포가 있었던 지역이다.
비달골
원래는 현재의 위치보다 서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인데 비달먹다[비루먹다]라는 어원에서 생긴 지명이라 전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부락이었기에 생겨난 지명이라 보여진다.
핑이골
빙골이란 뜻으로서, 덕성1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인데 성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형성된 촌락이라 전한다. 옛날 바다에서 큰 거북 한 마리가 여섯 마리의 새끼 거북을 이끌고 이 마을에 올라와 살았는데 그 후부터 마을이 번창하였다 하며, 해마다 정월보름이면 제당에서 이 일곱 거북신위에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 성의 동편 골짜기에 위치하며 그늘진 곳에 빙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빙판이 생겨 잘 녹지 않으므로 빙골이라 하였던 것이 핑이골로 발음이 변천하였다 한다.
덕송
동문걸의 큰길 건너 동편에 노송림이 울창하여 덕송이라 하였는데 차츰 마을이 형성되었다. 저자걸이 있고 덕천리에 이건해 온 청하침례교회가 있다.
교동
향교가 있어 향교골, 교동이라 불렸으며 2리에 속한다. 월성이씨의 집성촌으로서 골원님의 사저와 아전사속들의 사택 등 고급주택들이 즐비하던 마을인데, 대부분의 골기와집들은 없어졌으며, 향교 앞에 송암정봉용추념비가 있다. 이 마을은 동제를 용지라는 옛 마을터(이 마을 서쪽 5리)에 있는 제당에서 지내고 있으며, 이 마을에 이주해 온 주민들 다수가 용지마을 주민들이고 덕성이 축조된 후 마을이 없어졌다 전한다. 용지는 일명벌지라고도 했으며 [둘레 일만 삼백자] 이 북편 억던에 사직단이 있었는데 1914년 철거되었다 하며 그 대신 청하초등학교 교정에 신사를 세웠다 한다. 구 청하지서 터 서편에 월성이씨 가문의 정여각이 있었는데 6.25때 파손되었다.
| |
첫댓글 친구들 시간 나면 마을 유래 읽어보길 바란다.
넘 잘 읽어 보고 갑니다. 늘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