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를 지금까지 몰랐다 치고 에베소서를 보게 되면,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접하는 용어들,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오는 말들이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적어 보겠습니다. “신령한 복.” ‘신령한 복’이라는 말은 잘 안 나옵니다. “예정되었다”,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10절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이런 이야기는 학교에서도 잘 안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학교에서 이야기되는 그런 이야기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은 이런 이야기가 쏙쏙 이해가 잘 되는 새로운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들은 못 알아듣는데,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라고 알아듣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신령한 복, 예정,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이런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좋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좋을까요?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좋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새로 만든 사람들만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여러분이 학교에서 상장 받고, 대회 나가서 일등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도 기쁘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모른다면, (예를 들어서 김연아 선수 같은 경우는 세계피겨스케이트 대회에서 일등을 했어요. 본인도 그렇고 온 국민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하지만 김연아 선수에게 물어 보세요. 그의 피를 아십니까? 몰라. 예정하심을 아는가? 몰라. 그러면 피겨스케이트는 잘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못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은 이런 이야기가 이해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에게만 하늘나라가 허용되고 입장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야 될 사람인데, 웬 은혜인지 웬 큰 사랑인지, 신령한 복, 예정하심, 죄 사함 받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이런 이야기가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면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은 몰라도 된다고 버리는 이야기가, 나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이야기로 다가와서 ‘정말 이 말씀대로 내가 지음받았구나’, 이런 신령한 복, 죄 사함, 예정,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런 말로 누구를 만들었습니까? 이런 말들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은, 신령한 복, 예정, 그의 피, 죄 사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런 것들이 막 들어오는 겁니다.
이 사람 속에 아무개의 이름을 적어 보세요. 적어보면 ‘나’라는 사람에게 이런 신령한 복이 들어있고, 예정이 들어 있고, 그의 피가 들어 있고, 죄 사함이 들어 있고, 예수 안에서 통일이 들어 있는데 우리가 기뻐해야할 최고의 기쁨이 바로 이겁니다. 이런 것이 느껴진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요. 세상에 좋다, 부럽다, 좋다하는 것이 다 시시합니다. 그 대단하다, 하는 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그의 피로 죄사함을 알아?”
“몰라!”
“봐, 모르잖아. 바보네.”
에베소서에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특별히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는 그런 뜻으로 여러분은 생각을 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를 던집니다. 성경이 한글로 적혀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를 왜 모를까요?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7절에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왜 모를까요?
그것을 모르는 이유가, 사람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자신만 고수하다 보니까 모르는 겁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아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어느 정도로) 선할까? 나는 (어느 정도로) 악할까? 이것밖에 몰라요. 나는 얼마나 선해질 수 있을까? 혹은 나에게서 얼마나 악을 제거할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할까? 이런 것을 매일 매일 생각합니다.
교회 나와서도, 제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저 착하지요? 부모님 말씀대로 해놓고도, 제가 부모님 말씀대로 숙제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착하지요? 사람은 항상 내가 착할까, 내가 나쁜 사람에 속할까, 아주 착한 사람, 약간 덜 착한 사람, 중간인 사람, 약간 나쁜 사람, 아주 나쁜 사람,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어디쯤 속할까? 위로 올라갈까, 밑으로 내려갈까, 를 늘 생각하는데 이것을 다 없애야 됩니다.
내가 착할까, 악할까를 생각하는 이것이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밖에 안하고 이것이 통채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없애버리고 거기에 예정을 집어넣어 보세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이 안에 들어오면 내가 선할까, 악할까,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예정되어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선과악 사이에서 물결치듯이 매일 왔다 갔다(나는 착한 일을 했기에 더 착해졌을거야, 나는 악한행동 했으니까 벌받을거야)하는 이 전체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용서 받아서 의인되었다, 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혼자서 자기가 만든 자기에 빠져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짐승들도 그런데, 자기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곤 합니다. 어른들도 그런 경험을 하곤 하는데, 불 꺼진 캄캄한 방에 들어 왔는데 갑자기 불이 켜지고 보니까 왠 사나이가 거기 있더라는 겁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거울에 자기 모습이 비친 겁니다. 원숭이는 거울을 비쳐주면 자기 우리에 남이 들어왔다고 여기면서 거울 속에 있는 자기와 대판 싸웁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서 매일 누구와 씨름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하고(악하면 안 돼, 착해야 돼) 씨름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면 나는 전보다 더 형편없는 내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내가 지금처럼 된 것도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이만큼 되었는데 나쁜 짓 한 것 때문에 그것이 하루아침에 다 깨어지는데 그리 되면 안 되지, 안 되지, 라고 매일 매일 고민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하루 종일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아요.
가끔 개를 보면서 개가 철이 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집에 있는 강아지는 북한의 핵문제로 고민하는 법이 없어요. 서해바다에 기름 떴다고 고양이가 고민하는 것 봤습니까? 세상은 저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 개나 고양이, 돼지가 엘리뇨(바다의 수온이 높아지는 기상 이변, 서에서 동으로 바닷물이 밀려서 한쪽은 가뭄이 들고 한쪽은 홍수가 나게 되는) 현상 때문에 고민하는 것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눈 오면 눈오는 대로, 혹 돼지우리에 화재가 발생하면 그냥 바비큐가 되고, 고민할 것이 없어요. 사람이 개, 돼지만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천국에 살 사람은 우리가 스스로 고민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셔서, 창세전에 예정하사 예수님의 피를 보내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서, 나중에 천국에서 통일되게 하심은 이미 하나님께서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서, 자 알아들어라 이것이 너에게 해당되는 운명이고 너의 인생이다, 라고 성경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집에 있는 신문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겁니다. 방송드라마보다 더 우습게 여깁니다. 드라마 보면서 나도 빨리 검사되어야지, 나도 빨리 변호사 되어야지, 매일 생각하는 것이 지금보다 내가 더 나아질까, 얼마나 착한 일을 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혹시 내가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 지금보다 훨씬 안 좋은 처지로 완전히 추락하는 고생길이 될거야,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주니까,
“성경 치워라 나, 안 본다.”
“왜?”
“성경에는 내가 출세하는 것도 없고 복 받는 것도 없고 돈 버는것도 없는데 내가 이것을 왜 보는데?”
개, 돼지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마치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어리석게 자기가 자기와 씨름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때리면 누가 맞습니까? 자신이 맞지요.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50대쯤 된 분이 술이 거나하게 취했습니다. 광고지나 벼룩전단지 넣어진 통을 발길로 걷어차네요.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인생관이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며 내 장래는 무엇인지,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줘도 믿지도 않고, 그저 세상만사 내 뜻대로 안된다고 술 한잔 하고 성질부리는 겁니다. 개나 돼지 보다 더 못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성경)을 왜 줬습니까? “네가 생각하는 너를 이제는 철수시켜라.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려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은 상관없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하면 끝난 이야기지 새삼스럽게 나는 예정될래, 나는 예정될래, 그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나 예정된 사람 하고 싶어요, 나 예정되게 해주세요,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초등학교 애가 동생이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서는,
“나도 엄마 품에 안길래.”
“너는 다 컸어.”
“아니야, 안길래. 안길거야.”
“너는 옛날에 많이 안아 줬잖아.”
“그래도 안길래!!!”
다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돌이킬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나는 저것이 좋으니까 저것을 가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세요. 나는 저것이 나쁘니까 그 나쁜 길을 내가 안가야지, 라는 생각도 포기하세요. 사람이 죄짓는 것도 나쁘지만 훌륭한 사람 되는 것도 그 이상으로 나쁜 겁니다. 일부러 억지로 죄짓는 것도 나쁘지만, 내가 훌륭한 사람으로 남아야지, 하는 것도 그보다 몇 배 몇 배 더 나빠요.
왜냐하면 사람은 예정된 대로 사는 것이지 자기가 뭐가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우리의 착각, 우리의 망상이기에)는 하나님이 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생각하는 너는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 고 꼴도 보기 싫어합니다.
“제가 학교 때 상을 몇 번 탔고요,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요.”
“저리 가! 그런 이야기 다 듣기 싫어.”
그런 것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그의 피로 죄 사함 받는 것, 을 예정하신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을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령한 복은 안중에도 없고, 더 못한 나를 더 낫고 훌륭한 나로 변화시켜 보려고 하나님께 아부나 하고,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나름대로 성경공부하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께서는, 웃긴다,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 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구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훌륭한 사람 되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 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고 내가 쓰지 않는 일기장이네, 내가 쓰지 않는 일기장이 있어야지요, 내가 매일같이 쓰지 않는 일기장이 에베소서입니다.
이 계획대로 그 길을 갈수 밖에 없고 가고 있는 중입니다. 부질없이 내가 내 인생 따로 만들려고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지옥 가는 사람들, 천국에 못가고 믿을 구석이 없고 성경도 안보고, 믿을 것이라고는 술 한 잔 먹고 취하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가는 자기밖에 기대를 걸 것이 없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은 죽으나 사나 자기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기에게 투자해서 훌륭한 사람 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모르고,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는 것도 모르고, 부활하는 것도 모르고, 구름타고 다시 오시는 것도 모르고,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을 정한 것도 모르고, 그 뒤는 심판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뒤에 죄와 상관없는 자에게 두 번째 오시는 것도 모르고,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 잘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입니다.(히브리서9:27,28)
사람들은 대선에 출마한 분들을 보면서, 야, 저 사람들 좋겠다, 하는 소리를 하는데, 그들은, 온 동네 선전벽보마다 붙어 있는 자기 얼굴에, 나는 지금 지옥에 잘 가고 있습니다, 하는 그 소리를 써 붙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훌륭하게 되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알면 됩니다.
에베소서1:7에 보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훌륭하게 될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누구냐, 를 알면 된다고 했지요. 이제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제가 방금 에베소서 1장 7절을 읽었는데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우리가 누굽니까? 죄인입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될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죄를 갖고 있는 사람 되었다는 이것이 차기 대통령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겁니다. 대통령 되었다고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대통령 되면 천국에 넣어준다면 저도 5억 걸고 나갑니다. 대통령 되어야 천국에 간다면 성경 덮어버리고 우리도 다 출마해서 선거운동 나갑시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펼쳐 봅시다. 죄인이 죄 사함 받으면 천국 갑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간에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거든 나와 보라고 하세요. 없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쁜 소식을 기쁘게 여기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이제부터 생각할 것은, 어떻게 해서 내가 죄인인가, 를 알면 됩니다. 나 죄인 아니다, 라고 도망치지 마시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 됩니다.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신령한 복, 예정, 이런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자기를 악한데서 선한 곳으로, 못한 곳에서 더 나은 곳으로, 실패한 인생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변모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 그래서 내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나를 내가 가지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고, 예수님의 피를 무용지물로, 소용없는 짓으로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예수님의 피가 소용없다, 소용없다, 그런 이야기를 수백 번 씩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잘하는데 예수의 피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배고프면 밥 먹으면 돼. 배고프면 누워서 자면 돼. 마려우면 화장실 가면 돼. 예수의 피가 왜 필요한데!! 밥 먹는다, 잠잔다, 화장실에 간다, 여러분은 밥을 먹으면서, 혹은 잠자면서, 화장실에 가서 죄를 느낍니까?
우리가 죄를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는 그 사실 앞에서, 왜 저분이 피를 흘렸을까? 그것은 바로 나에게 죄가 있고 그 죄는 예수님의 약속의 피와 약속의 살점으로만 죄가 없어지기에 저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렸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죄인이 맞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나는 그 피로 이미 용서 받은 사람이다, 나는 의인이 되었다, 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행복, 행복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들, 일 년 연봉이 일억 불이 넘는 그 부자들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돈에 파묻히면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돈에 파묻혀 살면, 나는 부자 되어야 합당해, 나는 부자 될 만한 사람이야, 왜, 워낙 훌륭하고 워낙 착하니까 신께서 나를 부자 만들어준 것이 나에게 너무 합당해, 이렇게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요.
부자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되고 싶어도 안 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던, 가난뱅이가 되던, 여러분은 상관없이 실패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실패자도 아니고 부자라고 해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 예수님께서 왜 피를 흘렸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백날 살아도 거울 속에 있는 원숭이와 싸우는 것처럼, 자기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자빠지고, 자기가 자기에게 질겁하면서, 매일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채,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죄인들이 몽땅 끌려가는 지옥으로 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정되지도 않은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인데 왜 그 이야기를 하는가?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당신은 예정되지 않았기에 지옥으로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인사를 해 줘야 합니다.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이야기를 해 줘야 합니다. 예정되었다, 안 되었다를 어떻게 아느냐? 예정하신 뜻이 나타난 것을 거부하면 예정되지 않은 것이고, 예정한 사람만이 예정하신 뜻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석류꿀차가 있습니다. 이 차를 다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석류꿀차가 천국 가는 생명수라면 제가 이렇게 죽 다니면서 권하면서, 드시겠습니까? 안 드시겠다고요? 안녕히 가십시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권할 때, 나, 그거 좋아하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창세전부터 석류차를 좋아하도록 예정되어 있네요, 라고 되는 겁니다.
예정된 뜻이 뭐냐?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죄용서 해준다는 것이 예정된 뜻입니다. 따라서 이 석류차처럼 들고 다니면서 그 이야기를 해 주는 겁니다. 해서 그 이야기를, 아!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예정된 사람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런 것이 없이 내 힘으로도 착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도 죽어서 좋은 나라 갑니다, 라고 하는 그런 사람은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석류차(생명)를 석류차인지도 모르고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천국에 태어나기도 전에 어떻게 아느냐고 하는데, 천국에 가기도 전에 주님께서 웨이터처럼 이렇게 접시에 담아서, 창세전에 우리보고 가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뜻을 협의했던 그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석류차(생명)를 갖다 바치면서, 이게 예정된 뜻인데 받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는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창세전으로 도로 돌아갈 필요 없이, 예정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들이댈 때, 제가 그 피를 마시겠습니다, 라고 나오면 당신은 예정되었기 때문에 마신다, 마시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니고, 예정된 자에 한해서만 마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래 법칙이 그렇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사람이 죽어서 어디 가느냐, 하는 것은 아무도 안 가봐서 모른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죽어서 어떻게 됩니까, 에 대한 정답은 뭐냐?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어떻게 될 것인지가 예정되었으면 그 끝은 그대로 가는 거예요.
“죽어서 가봐야 알지.”
“안 가봐도 압니다.”
죽어서 안 가봐도 창세전에 결정된 것이 일관성 있게 죽 붙어 나가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어디가지, 라고 물을 필요도 없이 창세전에 예정된 것, 그 이야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어떻게 압니까? 창세전으로 가봐야 합니까? 가 볼 필요 없습니다. 창세전에 예정하기로 합의한 분이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와서 창세전에 예정된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밀 때, 이 피를 마시겠나이다, 라고 되어 버리면, 그것이 곧 예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수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안가 봐도 하늘나라 계신분이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곧이들으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을 영접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편리하게 했습니까? 우리보고 뭘 하라고 했습니까? 도를 닦으라고 했습니까? 그저 와서, 너는 이런 인간이다, 확인해 줄때, 맞습니다, 제가 그런 인간입니다, 라고 확인만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얼마나 기뻐요. 다른 할 것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교인들은 일요일날 바쁘다고 확인하러 교회를 안 나옵니다. 자기의 가치를 더 높이는 그 일에, 허깨비같은 자기 자신에 몰두한다고 바빠서 뻔질나게 교회 빠지고,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품질 향상시키는데 매진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 하면 듣기 싫다하고, 다 안다 하고. 갑자기 제가 너무 심하게 나무란 것 같은데, 하고 나니 예정된 분들에게는 참 미안합니다.
에베소서 1:1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같은 사람들끼리 상대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친구하고 선생님하고 상대하지 하나님하고 상대 안 하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은 사람하고 상대하는데, 여기 보면 사도바울은 누구와 상대합니까?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상대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 할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사람들과 관계가 없었습니다.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음성과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아! 45일 동안 모로 누워라, 그러면 꼼짝없이 예, 하고 눕는 겁니다. 이번에 이쪽으로 돌아누워라, 그러면 또 돌아서서 눕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미쳤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가 누구 말을 들어야 됩니까? 하나님이 안계시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마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그 하나님의 뜻이 뭔지, 궁금증, 관심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옛날에 솔로몬이란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그 솔로몬 임금님은 거판하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솔로몬아! 너의 기도가 정말 훌륭한 기도구나, 하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자, 솔로몬 임금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그렇게 칭찬했을까요? 솔로몬 임금님의 기도는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첫째, 부자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습니다. 두 번째,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습니다. 세 번째 나를 해코지 하는 사람(원수)이 망하게 해달라는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기도의 수능시험이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부자 되는 것, 오래 사는 것, 원수가 망하게 되는 것을 기도하지 않았더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그렇게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기도한 내용이 뭐냐? 아버지의 뜻이 나를 관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꾸밈없이 그대로 전달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욕심에 의해서 걸치지 않고, 그대로 깔끔하게 나를 통과해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와 같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에게 합격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와서 기도했다 하면, 빠짐없이 하는 기도가 뭡니까? 부자 되게 해주세요. 십일조 많이 내게 해주세요. 그래서 교회가 부흥되어 빨리 이사 가게 해주세요. 그 다음에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게 하옵소서. 세 번째, 미운 사람이 있는데 콱 죽고, 망하게 해주시고, 저주받게 해주소서. 이 기도를 하면 우리의 속이 탁 트이죠. 이것은 누구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의 뜻입니다.
자기 뜻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은 교회 와서도 자기를 못 버립니다. 원숭이가 거울 속에 있는 자기와 싸우듯이 자기하고 대판 싸워서 부자 되어서 질 좋은 나를 만들고, 건강하게 되어서, 나 복 받았잖아, 하면서 남에게 으시대는, 그런 질 좋은 자기를 만들고, 자기에게 해코지 하는 사람은 다 망해서, 나 건드리면 다 망한다고 해서 질 좋은 자기를 만드는, 이런 기도에 우리는 전념하고 몰두합니다.
제가 이 강의를 했더니만,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해요.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 는 그 기도는 왜 안합니까? 그것은 하기 싫습니다. 왜? 그것은 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하고 관계없는 그런 기도는 안하겠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기도한 것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뭐냐? 솔로몬의 뜻이 뭐냐? 이 에베소서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신령한복, 예정, 그의 피, 죄 사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런 이야기를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전했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도 고스란히 받으면 됩니다. 받고 내가 알아서 내가 나를 관리한다든지, 조절한다든지, 질 좋은 사람을 만들겠다는 이런 수고를 하지 마시고,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를 확인하면서, 내가 이미 구원되었구나, 라는 것을 기쁨으로, 구원받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막는 게 있어요. 그게 누구 뜻입니까? 나의 뜻입니다. 그 나의 뜻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구원하기로 합의를 본 그 합의자인 예수님께서 직접 와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니까, 아, 나는 구원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방법은 주의 피,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나의 뜻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의 뜻은 선악, 선과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겁니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 받는다. 복은 받고 싶고 저주는 안 받고 싶은 그 사이에서 늘 복만 받는 사람 되고자 따로 나를 만들고자 애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나의 뜻이고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모든 방법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고, 선악적으로 나를 훌륭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 모든 방법은 누가 만들어 냅니까? 내가 만들어 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아주머니들 보면 아파트 청약할 때, 4동 444호 하시겠습니까, 하면 아니오, 합니다. 왜? 죽을 ‘사’(死)자가 네 개라고. 여러분, 4자가 많이 붙으면 지옥 갑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러면 4자가 많은 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내 뜻이지요. 찝찝하잖아요. 있으니까 찝찝한 것은 찝찝한 것이고 다시1장을 보면서, 뭘 발견합니까? 아,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찝찝함, 이게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처음 알지요.
4동 444호가 왠지 찝찝하게 여기지는 것. 13일의 금요일에 444호에 가는 것이 왠지 찝찝한 겁니다. 그런 것을 찝찝하게 여기고, 그런 것을 기분 나쁘게 여긴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내 안에서 여전히 죄가 밑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서 솟구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교회 수련회를 좋은 장소에서 하는 것보다, 음침한 공동묘지 근처나 귀신이 출몰한다고 소문난 폐가, 밑에는 습기가 많아서 잡초가 무성하며, 거기에 목매어 죽은 처녀 귀신, 남편에게 얻어맞아 죽은 아줌마 귀신, 교통사고 나서 죽은 애 귀신이 한 가족을 이루어서 사는 아주 집값 헐게 매겨진 집에서 그것도 밤중에 수련회를 해봐야 합니다.
과연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미 신령한 복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는지, 안 그러면 왠지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지. 애를 키우다 보면 새벽 세시나 네 시에 깜짝 놀라서 엄마 방으로 뛰어오는 애들이 있을 겁니다. 꿈에 귀신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는 무서워서 잠을 못잡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특히 여자 분들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 분들은 남편 없이는 혼자서 못잡니다. 꼭 친구를 불러와서 잡니다. 그렇게 무서워해요.
그런데 요한1서 4장에,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자기가 평소에, 내가 나를 지켜야 된다는 이것이 습관화 되다 보니까, 내가 나를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귀신이 나타나면 귀신에게 잡혀가세요. 그러면 그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되는데 귀신한테 잡혀가면 지옥인줄 알고 있어요. 지옥, 천국은 내가 안 잡혀 가야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벌 안 받아야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아도 천당 갈 사람은 천당 가게 되어 있고, 잡혀 가도 잡혀 간 그곳이 천국입니다.
자꾸 내 선악적인 선입감을, 그 외투를 벗어 버리시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로 푹 젖으시기 바랍니다. 홍의를 입은 분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잖아요. 붉은 옷으로 여러분은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창세전에 이미 여러분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3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 우리가 착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복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는 복 마다하지 마세요. 그냥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폭설 내리듯이 옵니다. 오는 눈 오지 말라고 하면 눈이 안 옵니까? 오게 되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3-5, 7)
어렵지만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정되었다고 해놓고 왜 우리에게 죄인 되게 해서 죄 사함 받으라고 하는가? 예정되었다면 처음부터 의인되어야 할 텐데, 예정되었다 해놓고, 아예 우리를 죄인 만들어 놓고, 용서는 용서대로 와서 예정된 대로 구원받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정되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죄도 짓지 말아야 하는데, 예정되었다 해놓고는 죄인 만들어 놓고, 죄인을 용서해 놓고는 그것이 예정된 뜻이라는 겁니다.
참 희한합니다. 예정된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도 예정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왜 예정되어 있는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