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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결합의 어려움
I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나 내가 본 한국 영화 중에 주인공이 독문과 학생이거나 스토리의 배경이 독문과와 관계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은 물론 더할 것이다. 이 시대 한국인의 디지털 감성에 독문이나 독일이라는 화두가 어필하기엔 너무 무겁고 아날로그적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문과 시간 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줄거리의 배경도 상당부분 독문과를 깔고 있는 <경의선>은 예외라기보다는 차라리 시대에 맞서보겠다는 반항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소한 흥행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만든 영화임에 틀림없다. 틀린 추측이 아닌 것이 <경의선>은 2007년 5월에 나온 영화라고 하는데 며칠 전 내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까지 아무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제목이다. 그래도 몇몇 평문을 읽어보니 흥행엔 실패해도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좀 세밀한 줄거리나 해설을 달아놓은 것은 아니었다.
한 때 독문과에 잘못 발을 들여놓아 아직도 그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고향 냄새가 나는 이 영화에 뒤늦게나마 관심을 좀 가져주어야 될 것 같아 한 자 써 본다. 무리하게 요약하면, 이 영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결합 혹은 재결합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II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동일한 공간을 왕래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시간 강사를 하고 있는 한나는 서울역과 신촌을 지하철로 오락가락한다. 카메라는 일과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는 그녀의 피곤하고 힘없는 모습을 비춘다. 노처녀이긴 해도 그리 볼품없는 자태는 아닌데, 눈에 윤기가 없는 것이 말 못할 근심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편 서울역과 일산을 오가는 지하철을 운전하는 기관사 만수, 단조롭고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건전한 청년이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 역시 그리 생동감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오래된 외로움 때문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까지 다니면서 여자 친구 한 명 없는 것도 그렇지만 홀아버지에게 밥을 얻어먹고 있는 처지다.
한나의 근심은 정리도 결합도 되지 않는 한 남자 때문이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헤세를 좋아해 독문과를 간 한나는 운동권 대학원 선배를 좋아하는데, 이 선배(김호)는 대학원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유학을 간다. 그녀도 대학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건너가고, 다시 만난 둘은 이국 땅에서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김호는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는데 단순한 이별은 아니다. 그는 귀국하여 곧 교수가 되고 결혼을 한다. 물론 상대는 한나가 아니다. 수년 뒤에 공부를 마치고 모교로 돌아온 한나도 시간 강사를 하며 힘겹게 지내는데, 그게 단지 "하늘의 별을 따다 크리스마스 츄리에 다는 것만큼 어렵다는 독문과 교수 자리" 때문은 아니다. 그녀의 슬픔은 여전히 김호라는 인간을 떨쳐내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그와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해 오던 한나는 결국 남사스러운 수모를 겪고 일대 전환점에 선다. 즉 한나는 일본으로 출장가는 김호에게 출장 날짜를 하루 연장하도록 하고 제주도에서 밀회를 계획하는데, 그의 부인에게 사전에 발각된다. 길거리에서 온갖 모욕을 당한 한나는 제주행 비행기 대신에 경의선에 몸을 싣는다. 참담한 마음으로 기차 안에 앉아 있다가 임진강 종점까지 와 버린다.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생전 처음 와 보는 곳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돌아가는 열차도 없다. 그렇게 한나가 임진강 역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데서 영화의 본론이 전개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기에는 낙동강 오리알이 하나 더 있다. 역시 기차 의자에 하염없이 묻혀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경의선의 종점에 떨어진 사나이는 바로 만수다. 현역 기관사가 그런 실수를 한 것은 그의 마음이 그 만큼 다른 데 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니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사다. 성실한 그에게 무슨 일이? 그 내역이 뭔지는 조금 뒤에 밝혀진다.
눈 덮인 허허 벌판에 떨어진 낯선 두 남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경계태세를 취한다. 한나는 핸드폰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뒤따라 만수도 허구의 약혼자에게 전화를 걸어 너스레를 떤다. 서투른 전화 짓은 어렵지 않게 연기라는 것이 간파된다. 한나는 만수가 흑심을 품을까 경고의 사인을 보낸 것이고 마음 착한 만수는 그런 한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또 사인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택시조차 안 오겠다는 임진강 역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두 사람은 일단 걷기로 한다. 눈 쌓인 밤길을 걷기만 할 수는 없으니 서로 입을 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픈 사연을 조금씩 발설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모텔을 하나 발견하여 들어가지만 모텔 안에서도 별 다른 액션은 없고 이야기만 계속된다. 이 이미지의 시대에 서사(스토리)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은 독문과 출신의 감독이 아니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나의 아픈 현실은 언급한 대로이지만 베를린 생활이 좀 더 자세히 소개된다. 나머지는 대체로 종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날 종수가 아무 생각 없이 경의선 종점 임진강 역에 떨어진 배경에는 어떤 사람의 죽음이 깔려 있다. 그러니까 종수는 열흘 전 자신이 모는 기관차 앞에 몸을 던진 소녀의 시신을 치워야 했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이날 아무 목적 없이 경의선 기차 안에 자신을 내던지고 갈 데 까지 가라는 심사가 된 것은 그런 경우 받게 되는 특별 휴가 중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말이 휴가지 충격을 완화시키라고 주는 시간이다. 죽겠다고 뛰어든 사람을 구하지 못한 게 기관사의 책임은 아니지만 자신이 모는 기차에 사람이 자살해 죽었다는 것은 큰 쇼크일 수밖에 없다. 마음 착한 종수에게는 특히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간접 살인자라는 괴로움에 휘둘려 경의선에 몸을 실고 무작정 서울을 떠나다가 종점까지 온 것이다.
뻔한 흐름이기는 하지만 그의 위기는 임진강 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나의 위로로 수습되기 시작한다. 종수의 이야기는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한 바탕 눈물을 흘리는데서 절정을 이룬다. 절반은 각자의 처지에 대한 서러움이고 절반은 상대의 아픔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다. 함께 흘리는 눈물의 카타르시스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새 힘을 얻어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으로 결합될 것이라는 암시 같은 것은 없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한나의 귀에 "지상에는 화이트 크리마스를 예고하는 눈이 온다"는 기관사의 인사말이 들려온다. 그게 종수의 목소리임을 알고 미소를 짓는 것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최소한 눈 내리는 밤 모텔에서의 하루 밤이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는 식의 진부한 결말로 빠지지는 않는다. 55년이 넘도록 결합되지 않는 경의선의 차가운 현실을 앞에 두고 세계가 다른 두 남녀가 하루 밤 인연으로 바로 결합한다면 분단의 역사는 희화화 되어버릴 것이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과 10년을 넘게 업치락뒤치락 씨름해 왔지만 행복한 결합과는 먼 현실을 살고 있는 한나의 세계 인식이 그렇게 단순 소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세계가 경이롭게 바라보는 가운데 환희의 포옹을 했던 동서독이 여전히 하나 되지 못하는 내적 현실을 목격하고 온 사람이다. 종수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홀아버지 밑에서 가난과 씨름하여 청춘을 보낸 그의 망막에 세상이 장밋빛으로만 맺힐 리 없다. 어느 젊은 여자가 기관사실 창문으로 <샘터>와 먹을 것을 건네준 것이 몇 달이 지났지만 이름 한 번 물어보지 못할 만큼 그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닫아두고 있는 남자다. 그는 모르는 것 같지만 빵 모자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기관차에 몸을 던진 사람은 바로 그 짝사랑의 여자였다.
독일의 통일사가 보여주듯이 만나는 것은 가능하지만 진정한 결합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국가 간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연이든 계획적이든 하루에도 수없이 이루어지는 남과 여의 만남이 진정한 결합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경의선>은 만남과 결합의 문제를 민족과 남녀라는 이중의 층위에서 문제화 한다. 그것은 영원히 결합되지 않는 선로의 운명처럼 끝내 해결되지 않는 미완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주제화될 것이다.
III
<경의선>은 제목만으로도 남북 분단을 이슈화하고 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경의선은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로 1906년 일본에 의해 개통되었으나 1951년 운행이 중단되므로 남북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다가 6·15 남북 정상 회담을 계기로 복원이 계획되어 2007년에는 역사적인 시험운행이 있었다. 그 후 2007년 12월부터 문산역과 판문역을 화물열차가 다니기 시작했으나 얼마 전부터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운행은 중단된 상태다. 화물열차가 다니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여객 열차가 사람들을 실고 오가려면 얼마의 세월이 더 필요할 지 알 수 없다. 물론 영화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신 독일의 '내적 통일 innere Vereinigung'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김호 교수가 강사들을 모아 일종의 연구 프로젝트를 만드는데 그게 독일의 내적 통일에 관한 것이다. 미래의 통일 한국을 생각하는데 중요한 화두이기도 한 이 말은 동서독이 통일 된지 15년이 넘었지만 내적으로 아직 통일에 이르지 못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즉, 동쪽과 서쪽의 문화적 의식이 같아지지 않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의선>은 독문과 사람들을 등장시켜 독일의 통일을 자연스럽게 끌어오면서 한국의 통일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이건 말 그대로 생각하게 할 뿐 영화 속에서는 전혀 화제가 되지 않는다. 요즘 그런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 성공할 수 있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예술 속에서 거대 담론이 사라진지 오래다. 가볍고 달콤한 것이 아니면 소화가 안 되는 세대다. 어차피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은 너무 지난하고 복잡한 문제다. 그건 50년이 넘게 경의선의 종점으로 되어버린 임진강 역의 황량한 겨울 풍경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가 거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남북의 결합이란 참으로 요원하고 힘겨운 숙제다. 형식적인 결합 이후가 더 문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 털고 타불라 라사가 되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한나와 종수가 아무 전제 없이 만나 대화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영화 초반에 종수는 지하철을 출발시키면서 마이크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KTX를 타는 것도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닙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어디 쉬운 일인가! lee
영화보기:
첫댓글 선배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잘 정돈된 글이다 싶습니다. 전혀 모르던 영화이고, 영화에 흥미가 거의(?) 없는 제가 경인선이라는 영화가 보고 싶어지게 한 글이네요!..제가 어지럽히는 은사가 있어서 그런지 잘 정돈된 걸 보면 왠지 모르는 동경이 생깁니다.....^&^....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어지럽히는 은사 ㅎㅎㅎ 그 은사도 필요해요.
정돈이랄 게 있나. 생각나는대로 두드리는 거지. 문학으로 doktor 증까지 받은 사람의 글쓰기 치고는 남사스러운 수준이쟤. 목사들이야 말 잘하는 은사만으로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나. 문자의 시대는 가고 구술의 시대가 온다고 했으니 글은 웬만큼 잘 쓰지 않으면 반시대적 행위가 되는 거지. 문학자는 작가들이 어질러 놓을 것을 정돈하는 게 업이니, 오히려 많이 어질러 놓는 사람을 좋아하지. 정리정돈 잘 하는 천재는 내가 아는 한 없다. Chaos와 Genie는 거의 같은 자리에 찾을 수 있어. 이런 의미에서 어지럽히는 은사를 감사하며 더욱 개발하길.
공안들이고 또 영화 한편 떼고 갑니다. 영화를 봐야 감독의 의중을 알겠지만 이 영화는 선배글을 읽는 것이 더 확실할 것 같고 읽으면서 떠올린 이미지의 연속으로만 기억할랍니다. 사랑이 쉽지는 않지만 자신을 향해 죽음을 불사하는 한 여인의 사랑마저 눈치채지 못하는 기관사의 메마른 삶이 참 갑갑합니다. 가끔씩 주변을 한번 둘러봐요. 선배에게 눈길보내는 여인이 없나...
두분 선배님께서 귀히 봐 주시니 은근히 그리고 살짝 좋습니다.....ㅋㅋ.....문제는 말 잘하는 은사도 없다는게 문제죠!....가끔 뵙고 조언도 듣고 해야하는데....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