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복싱]에반더.홀리필드 챔프 스토리 관련자료:없음 [1279]
보낸이:김동호 (NORRIS ) 1997-07-14 11:09 조회:738
제목:[복싱]에반더.홀리필드 챔피언 스토리
올린이:김동호(NORRIS)
안녕하세요.NORRIS 김동호입니다. 얼마전 호야의 이야기를 올렸는데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더군요.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조금더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조금더 호야보다 대중적이고 유명세도 있는 WBA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홀리필드 에 대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홀리필드는 저 역시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복서이고 많은분들 역시 좋아하실겁니다. 저는 다음에 또 다른
글로 찾아뵐께요. 그럼...
*에반더.홀리필드 신상명세
1.생년월일:1962년 10월 19일생
2.출신지:미국 앨라바마주 애트모아
3.아마전적:174전 160승(75ko) 14패
4.프로데뷔:1984년 11월 15일
5.프로전적:37전 34승(25ko) 3패
6.신장:188.5cm
7.리치:196.6cm
8.주먹둘레:33cm
9.스타일:라이트 복서겸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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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 a Champion
1963년 10월 19일 앨라바마주의 주도인 애트모아에서 가난한 농가의 8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에반더.홀리필드는 8세가 되던 어느날 복싱을 하던 옆집 아저씨를
따라가서 우연히 봅.포스터와 프랭크.데.파울라와의 L.헤비급타이틀 매치를 보게
되었다. 그 경기는 흑인이던 챔피언 봅.포스터가 백인 도전자를 단1라운드에
세차례나 다운시키면서 파울라의 양눈을 모두 갈라놓는등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장면이었다. 그후부터 어린 홀리필드는 영웅심에 부풀면서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풀기위한 최선의 방법이 복싱이라 생각하고 글러브를 끼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8세때 였다. 하지만 당시 30KG의 어린 홀리필드는 자기
또래중 몸도 제일 컸으며 나이보다 훨씬 조숙해 있었다. 홀리필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달만에 주대항전에 참가 6연속KO승으로 우승을 거두곤
소리내어 마구 울었다. 그리고 기자들의 인터뷰에 그는 대뜸 Iam a
Champion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였다. 아마추어
경기는 아무리 실력이 좋은 세계적 선수이건 신예 유망주이건 9분간의 싸움, 즉
3라운드 경기를 갖게 되어있다. 그들은 곧 프로복서들이 12라운드까지 쏟는
에네지를 단 3라운드에 모두 쏟기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욱 힘이 벅차다고도
할수있다. 홀리필드의 아마추어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서두른다기 보다는 너무
승부욕이 강해 흥분이 금방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활화산 같은
선수라고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의 경기는 매번 화끈하면서도
통쾌하다고 볼수있다. 그렇지만 그는 헌즈나 타이슨 같은 펀쳐는 아니다. 단지
인파이팅이 돋보이고 주먹의 각도가 정확한 선수이다. 그에게는 174전
160승(75ko,rsc)14패라는 화려한 아마추어 전적이 있다. 그안에는 숱한 크고
작은 입상경력이 있는데 그중에는 올림픽에서 3위로 입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는 평생토록 잊지못할 치욕의 기록이다. 모두 24명이 참가했었던
LA올림픽 L.헤비급경기에서 홀리필드는 단연 우승후보로 꼽혔었다. 이런
홀리필드는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위해 체격조건이 좋은점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스피드를 앞세운 공격성 복싱을 구사하여 팬들을 열광시켰다.
승승장구로 준결승에 진출한 홀리필드는 역시 지친모습없이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의 상대였던
케빈.베리(뉴질랜드)는 개시공이 울려도 경기엔 응하지않고 노골적으로 도망만
다니는등 선수로서도 부적합했다. 당시 링 주위를 꽉 메운 1만 3천의 관중들은
도망자 베리에게 야유를 퍼부어댔다. 하지만 주심은 경고는 주지않고 가볍게
말로만 충고하는데 그치는등 편파적인 경기진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결국
1라운드에 뉴질랜드 선수는 두번의 파울을 당했다. 그러나 설상가상격으로
2라운드엔 한차례 홀리필드의 강한 레프트를 보디에 맞고 다운되더니 일어나질
못했다. 3라운드가 시작되어도 베리가 싸울태세를 가지지 않자 주심은
홀리필드의 실격패를 선언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깡통이 링안으로
마구 날라 들었다. 그 경기의 판정에 대해 관계임원들 역시 주심의 실수라고
주장하며 오판을 인정했으나 당시 주심의 변명은 그럴듯했다. 주심은 베리선수가
쓰러지기 직전 실격을 선언하려고 스톱하고 경기를 중단시켰으나 홀리필드는
이를 무시하고 펀치를 날렸기 때문에 홀리필드의 실격패를 선언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주심의 스톱 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결국 이사건은 오랜 마라톤 협상끝에 주심의 판정을 인정하는 대신에 원래
메달을 가질수 없는 홀리필드(실격당한 선수는 입상하지 못한다 는 올림픽헌장
제17조)에게도 동메달을 수여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결국 뉴질랜드의
엉터리복서 베리만이 대어를 낚는 행운을 얻은 셈이되고 말았다.
올림픽이 끝나자 메달리스트 등 대표출신의 선수들은 일제히 프로전향을
선언했다. LA올림픽에서 석연찮은 실격패를 당한 홀리필드도 더 이상 아마추어에
남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84년 9월 메인 이밴드사의 로우.두바와 프로계약을
맺고 동년 11월 15일 다른 대표들과 함께 뉴욕서 프로데뷔전을 가졌다. 첫
상대는 무명의 라이오넬.피아트.바이암이라는 선수였다. 그러나 프로는 확실히
틀렸다. 때릴만큼 때렸는데도 쓰러지기는 커녕 바이암은 더욱 강렬한 반격을
가했다. 만약 이 경기가 8라운드였다면 승패가 엇갈릴 정도로 홀리필드는
체력에서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승리는 홀리필드의 것이었고 경기후 대전료
7만5천달러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홀리필드에겐 불만이었다. 자기보다
아래체급인 웰터급의 마크.브릴랜드가 10만달러를 받았는가 하면 타선수도
자기와 같은 액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고보자,세계챔피언은 내가 먼저
될테니...라며 주먹을 불끈쥐고 강추위에도 아랑곳없 많은 땀을 흘리는 열성을
보였다. 그후 그는 KO로 연승을 달리며 서서히 전미랭킹의 상위랭커로 오르게
되었으나 유망주라는 소리한번 듣지못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통쾌한
승부가 아니고 부상또는 중단에 의한 TKO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세계랭킹에 첫 얼굴을 내민것은 당시 WBA 4위였던체산타.무티(잠비아)를
2라운드 kO로 잡고 부터이다. 이 경기는 당초 리키.파키가 세계도전 전초전을
가지려다 부상을 당해 대타로 출전한 것인데 홀리필드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
결과 홀리필드는 경기도 이기고 세계랭킹에도 명함을 내밀었다. 홀리필드는 아주
냉정한 경기운영으로 매서운 펀치를 마구 퍼부어 3연속KO승을 거두며 순식간에
WBA 2위까지 오르는 빠른 속도를 보였다. 무더우면서도
비한방울 내리지 않고 건조했던 86년 7월. 세계정상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홀리필드는 여유만만한 마음가짐을 보였다. 챔피언 콰이에게는 이번이 두번째
방어전이었고 통산 8번째 세계타이틀 매치였다. 하지만 챔피언보다 무려
15cm이상의 신장과 리치차이를 보인 거미같은 도전자 홀리필드는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으로 경기를 진행하였다. 이처럼 첫회부터 마지막회까지 자세의
흐트러짐없이 계속 같은 작전으로 밀고나간 홀리필드는 45분간의 사투에도 전혀
지치지않은 건재한 모습으로 경기를 마무리 했다. 뉴 챔피언 에반더.홀리필드
라는 링 아나운서의 판정 발표가 나자 그의 매니져 였던 제리.피겔로는
홀리필드를 번쩍 들어올리며 어쩔줄 몰라했다. 그후 그는 WBC왕자인 레온과도
통합전을 갖는 등 흰별을 계속 추가했지만 마땅한 상대가 없는 타이틀을
지킬수가 없었다. 결국 홀리필드는 본 체급을 반납하고 체급을 올려야 했다.
1988년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리며 새활로에 나선 홀리필드는 더 열심히 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L.헤비급이나 크루져급 같은 아래
체급선수들이 헤비급으로 올려 성공한 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벅찬 상대라고 생각되는 전 톱랭커 J.틸리스를 상대로 시험무대를
가졌다. 그는 파워도 꽤 있는 역전의 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적수가
되지를 못했다. 홀리필드의 강타에 안면이 만신창이가 되면서 피투성이가 된끝에
7라운드 TKO로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헤비급으로의 첫 경기를 성공리에
마친 홀리필드는 그후 독스,스튜어트,맥도나 등 내노라 하는 강호들을 연파하고
86년 12월 이래 12연속 KOT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이슨에게 줄기차게
도전장을 내며 정사위협존재 제1호로 특명을 받았다. 그러나 타이슨이 90년 2월
더글라스에 패하자 타이틀전은 계속 뒤로 밀리면서 2번의 유산과 3번의 연기를
거듭하며 경기성사가 불투명할 위기에 까지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홀리필드의
끈질긴 집념과 오기는 끝내 챔피언 더글라스를 3R에 KO시키고 정상을 정복하고
말았다. 에반더.홀리필드의 WBA헤비급 챔피언 재등극은
프로복싱 사상 가장 큰 이변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복서로서는 황혼기에 접어든
34살의 나이에다 심장병까지 앓고있는 홀리필드가 천하재통일을 꿈꾸는 핵주먹
마이크.타이슨을 단숨에 격침시킨다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홀리필드의 복싱인생은 그의 12년 경력만큼 파란만장했다. 94년 4월
마이클.무어러(미국)에게 판정으로 패하며 WBA,IBF통합 타이틀을 잃은
홀리필드는 설상가상으로 심장질환진단까지 받으며 전격은퇴를 선언할수밖에
없었다. 복싱을 계속할 경우 생명에 지장이 있다. 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연습으로 몸을 만든 홀리필드는 지난 5월 보비.치즈와 복귀전을 KO승으로
이끌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데뷔 4년만인 88년 WBA,WBC,IBF 등 3개기구
크루져급 통합챔피언에 올랐고 90년 10월에는 도쿄반란의 주인공
제임스.더글라스를 KO로 누르고 첫 헤비급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92년 숙명의
라이벌 리딕.보우(미국)에게 챔피언 밸트를 넘겨줬으나 이듬해 다시 보우를 잡고
왕좌를 되찾는 저력을 보여줬다. 결국 심장병까지 겹치며 퇴물복서 로 취급되던
홀리필드는 타이슨마저 잠재우고 무하마드 알리에 이어 사상 두번째로 3차례나
헤비급 정상에 오르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오늘의 승리는 신이 준 선물 이라고
말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홀리필드는 악의 영웅처럼 비쳐지고있는
타이슨과는 달리 사생활마저 깨끗해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성화주자로 나서는 등
국민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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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필드 링 레코드
1935년 1월 4일 생인 "플로이드 패터슨"은 1952년 올림픽 미들급 금메달
리스트입니다. 아마추어에서 40승 4패에 37차례 KO 및 RSC 승을 거두며 프로
전향 전서부터 인기를 끌어모았습니다.
페터슨은 라이트 헤비급 선수로써 프로로 전향했고, 데뷔 초 13연승을 기록
하지만, 테크니션 "조이 맥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판정패하면서 첫 패배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페터슨은 1955년과 56년에 걸쳐서 11연속 KO
승을 거두면서 세계 정상에 바짝 다가섭니다.
"로키 마르시아노"라는 헤비급의 맹주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1956년에, 페
터슨은 첫 번재 기회를 잡습니다. 페터슨은 공석이 된 헤비급 타이틀 결정전
에 나설 선수를 결정하는 경기에서 "허리케인"이라는 거창한 닉네임을 가진
"토미 잭슨"을 근소한 차이의 판정으로 제압하고, 결정전에 나서서 42세의
두체급 석권을 노리는 L 헤비급 맹주 "아치 무어"를 5회 KO로 격파하고 챔피
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 정확히 말하자면 21년 10개
월 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마이크 타이슨"에 의해서 깨어질 때 까지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헤비
급에 도전했던 무어는 최고령 타이틀 도전자로 남았습니다. 이 기록도 "조지
포먼"이나 "래리 홈즈"에 의해서 깨졌겠네요.
페터슨은 그 후 네 차례 방어전을 모두 KO승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마쳤
으나 1959년 6월 스웨덴의 "잉게마르 요한슨"에게 3회 KO로 패하면서 타이틀
을 상실합니다. 1960년 6월 20일에 벌어진 리턴매치에서 5회KO승으로 설욕하
면서 타이틀을 재탈환 합니다. 요한슨과의 리턴 매치는 최초로 유럽 전역에
중계되기도 할 만큼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페터슨은 61년 3월에 요한슨과 3차전을 가져 다시 6회 KO승을 거두면서 확실
한 우위를 점하며, 헤비급의 최고수로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페터슨은 그 후 1962년 9월 25일에 괴물복서 "소니 리스튼"에게 1회 KO로 무
릎을 꿇으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10개월 후 벌어진 리스튼과의 재경기에
서도 역력한 힘의 차이를 보이며 1회 KO패 당합니다. 그 후 1965년에 리스튼
을 꺾은 젊은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하지만 역시 12회 KO패 하면
서 물러서게 됩니다. 그는 1967년 10월 WBA 챔피언 "제리 쿼리"에게 도전하
지만 패배를 기록하였고, 다시 1968년에 공석중인 WBA 헤비급 타이틀을 놓고
"지미 앨리스"와 대전하지만 15회 판정패 하면서 헤비급 정상에 대한 욕망은
영영 좌절돼고 맙니다.
페터슨은 1972년에 알리에게 패하면서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만,
1995년에 뉴욕을 중심으로 한 프로복싱 커미셔너로 변신합니다. 통산전적 64
전 55승 1무 8패 40KO
1959년 10월 29일 생인 "윌프레도 고메즈"는 푸에르토리코가 낳은 세계적인
강펀처입니다. 그는 세계 프로복싱사에서도 손꼽히는 강타자 인데, 그가 기록한
44승중 42승을 KO로 기록하였으며, 데뷔 첫 경기를 무승부로 장식한 후 32연승에
32연속 KO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또한 데뷔 후 기록한 40차례의 승리는
모두 KO로 장식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재능있는 복서이기도 했으며, 상대가 의식하지 못한 다양한 각도에서
펀치를 구사하는 전형적인 파이터 였습니다. 또한 세 체급을 석권한 복서이기도
하며, J페더급 챔피언으로써 타이틀을 17차례 방어해 내서 이 체급에서 최다 타이틀
방어의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고메즈는 1974년 아마추어 세계 선수권을 획득한 후 이듬해에 프로로 전향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경기는 6회 무승부로 기록이 되었지만, 이 이후 벌어진 서른 두
차례의 경기는 단 한번도 판정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속 KO승 기록은
산체스에게 KO패 하면서 종지부를 찍지만, 그 경기를 제외한다면 1984년에
"강철턱"이라는 별명을 가진 "후안 라포르테"에게 판정승을 거둘 때 까지 그가
승리한 모든 경기를 KO로 장식하였습니다.
고메즈는 처음에는 밴텀급으로 출발하였습니다만, 곧 J 페더급으로 올리게 되고
1977년, 그의 프로데뷔 17전 만에 WBC J페더급 챔피언이었던 한국의 "염동균"을
12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후 그는 타이틀을 17차례 방어해
내는데, 그의 상대중에는 일본의 기교파 복서 "로얄 고바야시", 밴텀급의 강타자
"카를로스 사라테", 한국의 "이승훈"을 꺾었던 "루페 핀토르"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J 페더급에서 더 이상 상대가 없어진 고메즈는 1983년 한 체급을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전에 고메즈는 한 번 페더급을 넘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상대가
바로 멕시코의 영웅 "살바도르 산체스" 였는데, 고메즈는 이 경기에서 전에 없이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1회 한차례 다운을 포함 8회 KO패 당합니다. 그러나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산체스가 사망한 후인 1983년에 그는 "후안 라포르테"를 꺾고
페더급에 입성합니다. 하지만 2차방어전에서 만난 "아프리카의 표범"이라는 별명의
"아주마 넬슨"에게 11회 KO패 당하면서 단명 챔피언에 그치고 맙니다.
넬슨에게 패한 후 다시 한 체급을 올린 고메즈는 세체급 석권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체급을 올릴수록 전성기에 못 미치는 기량을 보여준 고메즈는 1985년에 자국에서
벌어진 "로키 로크리지"와의 경기에서 간신히 승리하며 세체급 석권에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1차 방어전에서 "알프레도 라인"에게 9회 KO패 하면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그 후 고메즈는 1989년도에 J 웰터급으로 "마리오 살라자르"와 대전하여 2회 KO승을
거두어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기는 하지만, 다시 은퇴를 선언하며 팬들의 곁을
떠납니다. 통산전적 48전 44승 1무 3패 42KO
1956년 7월 13일생인 마이클 스핑크스는 빌리 콘, 아치 무어, 밥 포스터와
함께 L 헤비급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 4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입니
다. 그러나 콘과 포스터 그리고 무어가 실패한 헤비급 제패의 꿈을 이루어
낸 선수입니다.
스핑크스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입니다. 77년 프로로 전향
하여 단 7전의 일천한 전적으로 백전노장 "게리 슈마허""톰 베사"등을 격파
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는 다양한 각도에서 주먹을 구사하는 대단히 상대
하기 거북한 스타일의 선수로, "스핑크스 징크스"로 명명된 강력한 라이트를
결정타로 구사하는 선수입니다. 그는 이러한 주무기를 발판으로 훗날 IBF S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 돼는 "머레이 서덜랜드"와 "라몬 란쿠엘로""윌리 타일
러"를 제압합니다. 서덜랜드는 박종팔 선수와도 싸워서 IBF S 미들급 타이틀
을 상실하는 선수로 국내 팬들에게도 낯이 익은 선수입니다.
1981년 3월에 에, 스핑크스는 전 챔피언 "마빈 존슨"을 제압하고, 그 4개월
뒤에 "에디 무스타파 무하마드"를 판정으로 꺾고 WBA L 헤비급 타이틀을 석
권합니다. 1983년, 그는 WBC 챔피언인 "드와이트 브랙스턴"을 꺾고 통합 챔
피언의 자리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L 헤비급 최강의 자리에 오른 스핑크스
는 세 차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크루저급을 건너뛰어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립니다.
스핑크스의 타킷은 IBF 헤비급 챔피언 "래리 홈즈"였습니다. 홈즈는 스핑크
스와 싸우기 전까지 48승 무패의 기록으로 "로키 마르시아노"의 헤비급 49연
승으 기록에 1승만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5년 9월 네바다에서
벌어진 두 선수의 대결에서 스핑크스는 체중에서 무려 22파운드가 더 나가는
홈즈를 상대로 몸싸움에서 오히려 합도하며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이끌
어냅니다. 7개월 뒤에 열린 재 대결에서도 스핑크스는 근소한 차이의 판정승
을 거두어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스핑크스는 1986년 벌어진 "스테판 탕스타드"와의 방어전을 4회 KO승으로
성공적으로 치러내지만, 5개월 뒤 IBF타이틀을 자진 반납합니다. 그는 1987
년 6월, 백인의 우상 "게리 쿠니"를 제압하고 스스로 "무관의 제왕"임을 자
처하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마이크 타이슨과의 경기였습니다. 타이슨은 데뷔때부터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지만, 스핑크스와 싸우기 전까지는 대다수의 전문가들
이 스핑크스보다 타이슨을 한 수 아래로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경기는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스핑크스는 단 91초만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게 되
고, 이 경기 직후 스핑크스는 은퇴를 선언합니다. 통산전적 33전 32승 1패
21KO
1949년 1월 30일 생인 미구엘 칸토는 강한 주먹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가 만만한 선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칸토는 가공할만한 스피드와,
"링의 대학교수"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능수능란한 기교로써 상대를 압도하는
선수였습니다.
칸토는 1969년부터 1982년까지 13년동안 74전을 싸웠습니다. 그는 초창기에는
멕시코를 주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WBC 플라이급 챔피언이 됀 후에는, 자국인
멕시코 뿐만 아니라 미국, 베네주엘라, 일본, 한국등 전 세계를 돌며 타이틀을
방어했습니다.
칸토는 1973년 WBC 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바칠리오 곤잘레스"에게 도전하지만
15회 판정패로 물러납니다. 하지만 2년 후, 세계 랭킹 1위의 자격으로 공석중인
챔피언자리를 놓고 일본에서 랭킹 2위인 "오꾸마 쇼지"와 WBC 플라이급 타이틀
결정전을 벌려서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후, 4년동안, 칸토는 무려 14차례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냅니다. 그의
상대 중에는 "안토니오 아벨라"와 그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곤잘레스 외에,
결정전에서 만났던 오꾸마 와의 두차례 방어전이 포함돼어 있습니다. 오꾸마는 그
후 칸토를 꺾었던 한국의 "박찬희"를 꺾고 결국은 WBC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1979년 3월 18일에, 칸토는 15차 방어전에서 만난 한국의 "박찬희"와 부산에서
대전하게 됩니다. 이 경기는 칸토의 타이틀 방어전 횟수(14차례)보다 적은 전적의
박찬희(11전만에 타이틀에 도전)와의 대결로 압도적인 칸토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의외로 15회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하게 됩니다. 6개월 후 벌어진 두
선수간의 재 경기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함으로써 칸토는 타이틀 획득에 실패합니다.
그 후 칸토는 1982년까지 간간히 경기를 하긴 합니다만 5차례의 경기에서 4패를
기록하면서 은퇴합니다. 통산전적 74전 61승 9패 15KO
1932년 5월 8일 생인 "소니 리스튼"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헤비급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는 괴력의 강타자였을 뿐만 아니라, 프로복싱 사상 손 꼽힐
정도로 위력적인 '잽'을 가진 선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험악한
인상은 경기 시작 전부터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데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무하마드
알리"도 경기에서는 리스튼을 이기기는 했지만, 경기 전에는 "리스튼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라는 공포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그는 무려 25 남매 중 한 명으로, 어린 시절부터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으며,
심지어는 강도짓을 하다가 몇 차례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3년에
프로로 전향한 후 탁월한 싸움꾼으로써 자질을 보이며 세계 랭킹이 급상승
하였습니다.(제가 참고로 하는 영문기사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leaving a stream of kockout victims in his wake"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클리블랜드 윌리엄즈""니노 발데스""자라 폴리""에디 마친"등과 대결하여
연승을 거두었고, 1962년 9월 25일에 플로이트 페터슨을 단 1회에 날려버리며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10개월 후 벌어진 페터슨과의 재경기에서도 똑같이
1회에 끝을 냅니다.
아무도 꺾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던 리스튼의 연승행진은 1964년 젊은 도전자
"캐시어스 클레이"에게 7회에 KO로 패함으로써 깨지게 됩니다. 1년 뒤, 클레이와의
리턴 매치가 벌어지기는 하지만 어이없게도 1회에 KO패 당하고 맙니다. 사람들은
클레이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고, 리스튼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캐시어스 클레이"가 누군지는 다 아시죠? 바로 "무하마드 알리"의 개명 전
이름입니다.
그는 1970년 "처크 웨프너"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합니다만, 은퇴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1970년이 끝나가는 12월 30일에 라스
베가스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그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습니다.
만약, 알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명예와 부를 축적할
수 도 있었을...한마디로 비운의 복서였습니다. "알리"라는 산이 너무 높았지요.
통산전적 54전 50승 4패 39KO
1929년 8월 14일에 태어난 "딕 타이거"는 나이지리아 태생이며 1952년에 프
로로 전향했습니다. 데뷔전에서 2회 KO승을 거둔 타이거는 데뷔 초에 나이지
리아와 영국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1959년에 미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영국
미들급 챔피언을 지냈습니다.
타이거는 아프리카 출신 선수답게, 대단히 호전적인 기질이 강한 복서였습니
다. 그는 상대의 주먹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진기어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인
파이팅 일변도의 경기운영으로 상대를 부수는 스타일이였습니다. 타이거는
강한 주먹을 가지고 있었고, 유독 강했던 레프트 훅을 앞세워 상대를 실신시
키는 야성의 복서였습니다.
1962년에 타이거는 미국에서 "플로렌티노 페르난도자"를 KO로, "헨리 호크"
를 판정으로 제압하고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승리로 타이거
는 WBA 미들급 챔피언인 "지니 풀머"에게 도전할 기회를 잡으며, 이 경기를
포함하여 풀머와 숙명의 3연전을 벌입니다.
1962년 10월에 풀머에 도전한 타이거는 WBA타이틀을 획득하고, 1963년 2월에
풀머와 재대결을 벌려서 무승부로 타이틀을 방어하며, 다시 63년 8월에 다시
만난 풀머를 TKO로 제압하며 진정한 챔피언으로 인정받습니다.
타이거는 1963년 12월에 "조이 지아델로"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상실합니다만
65년10월에 가진 재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두고 다시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두
경기를 더 치른 타이거는 1966년 4월에 체급을 올려 도전해 온 웰터급 세계
챔피언 "에밀 그리피스"에 패하여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리피스에게 타이틀을 상실한 후, 타이거는 라이트 헤비급으로 체중을 올려
1966년에 챔피언인 "호세 토레스"를 제압하고 두 체급을 석권합니다. 당시
서른 일곱의 나이였던 타이거는 토레스와의 재대결과 "로저 로스"와의 타이
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르지만, 1968년 강타자 "밥 포스터"에게 4회 KO로
패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 후 타이거는 "프랭키 디팔로아""니노 벤베누티""앤디 캔달"을 연파하지
만, 1970년 가진 그리피스와의 재대결에서 패하면서 복싱인생에 종지부를 찍
고, 1971년 12월 14일 사망합니다. 통산전적 81전 61승 3무 17패 26KO
30년의 복싱인생동안 "슈거 레이 로빈슨"이 이룬 업적은 놀랄 만 합니다. 그는
웰터급 챔피언이었고, 미들급 타이틀을 무려 다섯 차례나 차지하는 괴력을
보였습니다. 그의 기교는 마치 무용처럼 우아했고, 완벽한 파워를 구사했으며
그러면서도 거의 맞지 않는 권투를 했습니다. 그는 체급을 무시한 복싱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는데 항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수입니다. 역시 올타임 랭킹에서
로빈슨과 1, 2위를 다투는 "슈거 레이 레너드"가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닉
네임인 "슈거 레이"를 따 온 일화는 유명하죠. 그의 닉 네임인 "Sugar Ray"는 그의
경기가 복싱경기 같지 않고, 마치 "설탕처럼 달콤하다"라고 묘사한 신문기사가 나고
난 이후 붙여졌습니다.
그는 18명의 세계챔피언과 주먹을 섞었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복서중 "헨리
암스트롱""키드 가빌란""카르멘 바질로""제이크 라모타""로키 그라지아노""지니
풀머""프란츠 지빅"이 모두 로빈슨의 재물이 돼었습니다. 로빈슨은 대단히 효율적인
복싱을 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전성기를 구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42년, 그리고 약 9년 뒤인 1951년에 "올해의 복서"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1921년 5월 3일 생인 로빈슨의 본명은 "워커 스미스"이고 1940년에 프로로
전향했습니다. 그리고 라모타에게 불의의 1패를 당하기 전까지는 흠집없는 40연승을
구가했습니다. 라모타에게 패배한 후, 로빈슨은 8년동안 무패의 기록을
유지했습니다. 1942년에, 그는 전 챔피언 지빅과 훗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마티 세르보"를 판정으로 제압하고, 1946년 그의 76번째 경기에서 "토비 벨"을
누르고 공석중인 웰터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웰터급 챔피언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미 도일""척 타일러""베르날드 독슨"
"키드 가빌란""찰리 프사리"등을 상대로 하여 타이틀을 방어하였습니다. 1951년 2월
14일에 그는 숙적 "제이크 라모타"에게 도전하여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며 13회 KO
승을 거두고 미들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것이 로빈슨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복서와 겨룬 마지막 경기입니다.
1951년에 로빈슨은 영국챔피언 "랜디 툴핀"에게 의외의 판정패를 당합니다만, 두 달
뒤 벌어진 리턴매치에서는 10회 KO로 설욕하고 챔피언을 재탈환합니다. 그는
그라지아노와 올센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후 한 체급 올려 L 헤비급 챔피언인
"조이 맥심"에게 도전합니다.
로빈슨과 맥심의 대결은 1952년 여름에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집니다.
당시의 경기는 밤에 벌어졌지만, 그 열기는 대단했고, 그 열기는 맥심보다는
로빈슨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13회까지 로빈슨은 채점에서 앞서고 있었지만,
14회 종이 울렸을 때, 로빈슨은 경기에 임하지 못할 만큼 체력이 고갈돼
있었습니다.
로빈슨은 맥심과의 경기 후 은퇴를 선언하였고 1955년에 다시 링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미들급에서 올센, 풀버, 바질리오등과 경기를 벌여 승과 패를 반복하였고
1965년에 44세의 나이로 마침내 은퇴를 선언합니다. 로빈슨은 통산 전적에서 19패를
기록하였는데, 그 중 16패는 1955년 이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서는
1989년 4월 12일에 사망했습니다. 통산전적 202전 175승 6무 19패 109KO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거의 모든 복서들은 세계 챔피언 출신들이죠. 몇몇 복서들은
한 체급이 아니라 두체급 혹은 세체급의 다 체급 석권 복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헨리 암스트롱"(본명 헨리 잭슨)은 페더급, 라이트급, 웰터급을 동시에 석권한
유일한 복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은 대단히 경이적인 것이고, 혹자는 이
"허리케인 호크"(암스트롱의 별명)가 세계 프로복싱 역사상 진정한 최고의 복서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1912년 12월 12일 태생인 암스트롱은, 4살이 되던 해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피츠버그를 거쳐 로스엔젤리스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아마추어의 케리어를 쌓습니다. 그는 1932년 올림픽 선수선발에서 탈락한 후 프로로
전향합니다. 그는 1931년에 프로로 전향해서 그해 6월에 "메들리 잭슨"이라는
이름으로 두 경기를 가지며, 1 판정승 1 KO패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암스트롱"으로 개명합니다.
그의 (암스트롱이라는 이름으로의) 데뷔전에서는 4회 판정패를 당합니다.
실질적으로 프로에서 1승 3패를 기록한 셈인데, 그 후 그는 착실하게 전적을 쌓아서
1936년까지 52승 10패 6무승부를 기록합니다. 이 전적중에는 페더급 세계 랭커와의
4차례 대전에서 거둔 승리도 포함돼어 있습니다.
1937년에, 암스트롱은 최전성기를 맞습니다. 그 한해에만 27전을 싸워서 전승을
거두며 그 중 26KO승을 기록하는 쾌조를 보입니다. 그 중 다섯차례는 세계랭커와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그는 그해 11월 19일에 세계페더급 챔피언인 "페티 사론"을
격파하고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그의 태풍같은 연타를 앞세워서 1938년에도 연승행진을 계속하여 그 해에만
14전 전승에 10KO 승을 기록합니다. 그는 3월 31일에 웰터급 챔피언인 "바니
로스"를 꺾고 웰터급 정상의 자리에 오르며 8월 17일에는 라이트급 챔피언 "루
엠버스"를 15회 판정으로 누르고 라이트급 정상에 오릅니다.
엠버스를 누른 후 암스트롱은, 훗날 미들급 정상에 오르는 "치페리노 가르시아"를
상대로 웰터급 타이틀 방어전을 벌려서 성공정으로 방어를 합니다. 연이어 1939년
8월 22일에는 전 챔프 엠버스를 상대로 라이트급 방어전을 벌이는데, 이 때
암스트롱은 46연승을 기록 중이었고 웰터급 방어를 일곱차례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승행진은 엠버스에게 15회 판정패 하면서 끝이나게 됩니다. 이 후
암스트롱은 페더급 타이틀을 반납하고 웰터급 타이틀을 8차까지 방어한 후, 전에 한
차례 꺾은 바 있으며, 당시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가르시아에게 도전하여 전대미문의
4체급 석권에 나섭니다. 1940년 3월 1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암스트롱은 우세한 경기를 벌렸지만, 무승부가 선언됩니다. 암스트롱은 상체를
세우고 연타로 상대를 공격하는(wear-him-down)스타일로 보통의 경우 대단히
효과적이었으나, 이러한 전술은 상대적으로 키가 큰 파이터들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그 후에 있었던 세차례의 웰터급 타이틀 방어전과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던 "루
젠킨스"와의 한차례 논 타이틀전에서 승리한 암스트롱은 1940년 10월 4일에 "프란츠
지빅"에게 15회 판정패 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41년 1월 17일에 벌어진
지빅과의 리턴매치에서도 12회 KO패한 암스트롱은 센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지빅과의 3차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타이틀을 재 탈환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여, 15개월 후인 1942년 10월 26일, "프레디 코치린"에게
패하여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그 후 암스트롱은 더 이상 세계 타이틀전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연이은 세계
랭커들과의 경기에서 승리하였습니다. 1943년부터 2년 뒤 그가 은퇴할때까지 그는
35전을 더 싸웠으며, 세계랭커들과의 대전에서 11승 5패 1무승부를 기록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는 잠시 알콜중독에 빠지기도 했었으나 특유의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훗날 목사가 돼어 말년을 보내다가 1988년 10월 24일 사망합니다. 통산전적 181전
151승 9무 21패 101KO
1958년 10월 18일생인 "토머스 헌즈"는, 만약 80년대에 "슈거 레이 레너드"가
없었더라면,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혔을 선수입니다. 고성능 레프트 잽과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주 무기로, 80년대 중량급을 풍미했습니다.
1977년 11월 25일에 "제레미 힐"을 2회 KO로 꺾으면서 프로에 전향한 헌즈는 그
해에만 3번의 경기를 벌려 모두 KO로 장식하고, 1979년 4월 3일 "알폰소
헤이만"에게 10회 판정승을 거둘때 까지 17연승에 17연속 KO승을 거두며 단번에
유망주로 떠오릅니다. 디트로이트 태생인 그는 "디트로이트의
코브라""저격수(히트맨)"등의 별명을 얻으며 각광을 받게 됩니다.
데뷔 초 부터 대부분의 경기를 5회 안에 KO로 마무리 지으며 연승행진을 벌이던
헌즈는 80년 8월 2일 "턱 분쇄기"라는 별명을 가진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를 2회
KO로 깨끗하게 손보고 대망의 WBA 웰터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후 "루이스 프리메라""랜디 쉴즈""파비오 바에즈"를 모두 KO로 꺾고 3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숙명의 라이벌 "슈거 레이 레너드"와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1981년 9월 16일 벌어진 이 "역사적" 경기에서, 헌즈는 초반 레너드의 스피드에
다소간 밀리는 경기를 벌렸지만, 중반부터 예의 날카로운 잽이 살아나면서 확실한
우세를 잡습니다. 그러나, 데뷔부터 대부분의 경기를 초반 KO로 마무리 지었던
헌즈는 10회가 넘어가면서, 체력에서 역력한 열세를 보이며 경기의 흐름을
레너드에게 넘겨주고 결국 14회에 크게 밀리며 레너드의 불꽃같은 연타에 TKO로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첫번째 패배가 됩니다.
그러나, 헌즈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3차례의 경기에서 3승 2KO를 거두며 재기에
성공하고 82년 12월 3일에 레너드에 버금가는 천재복서로 일컬어지는, "윌프레도
베니테즈"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WBC J 미들급 타이틀을 석권합니다.
2체급을 석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너드에게 당한 뼈아픈 1패때문에 항상 2인자로
불려온 헌즈는 다른 쪽에서 명예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J 미들급 타이틀을 반납한
헌즈는 4차례의 경기를 가져, 훗날 IBF S 미들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며 한국의
박종팔 선수에게 타이틀을 상실하는 "머레이 서덜랜드"와의 10회 판정승과
"돌주먹"이라는 별명의 "로베르토 두란"과의 2회 KO승을 포함 4승 2KO를 거두며 한
체급위의 미들급을 노리며 세체급 석권의 야심을 키웁니다. 당시 미들급 챔피언은
"마블러스(경이로운) 마빈 헤글러".
1985년 4월 15일 벌어진 이 경기는 당시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노리던 헌즈는 허무한 3회 KO패를
당하며, 두번째 검은별을 답니다.
미들급의 맹주 "헤글러"를 넘지 못한 헌즈는 미들급 석권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한체급 더 올려 L 헤비급을 노립니다. 1987년 3월 7일, 헌즈는 "데니스
안드레스"에게 도전하여 10회 KO로 꺾고 WBC L 헤비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후 1988년 6월 6일에 헤글러의 패배와 새 챔피언 레너드의 반납으로 공석이 된
미들급으로 내려와 "후안 롤단"과 공석중인 WBC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을 벌여 4회
KO로 승리를 거두고 대망의 미들급 석권에 성공합니다.
그 뒤, 1989년 6월 12일 레너드와 숙명의 재대결을 벌이지만, 2차례 다운을 포함
완벽한 우세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승부로 기록됨으로써 복수에는 실패합니다.
그 후, 1990년 한차례 경기를 벌인 헌즈는, 은퇴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1991년 6월 3일 "버질 힐"을 꺾고 WBA L 헤비급 챔피언으로 재등극하는데 성공,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이지만, 1992년 3월 20일, "면도날-이란 버클리"에게 12회
판정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이 후 몇 차례 경기를 더 벌리기는 하지만
1997년 1월 31일에 벌어진 "에드 돌턴"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링을 떠닙니다. 그의
레프트 잽은 역대 웰터급 선수중 가장 정교하고 강도높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때는 "마이크 타이슨"을 겨냥하기도 한 뛰어난 복서였습니다만,
체력에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턱이 약한 단점이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또한 레너드와 헤글러라는 명복서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는
것이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만, 그들이 같은 시기에 활동했기에 세계
복싱팬들을 평생 잊지 못할 명승부전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통산전적 62전 57승
1무 4패 45KO
제 목:[복싱] 최고의 경기가 다가온다... 관련자료:없음 [2684]
보낸이:김대연 (fc1ajax ) 1999-03-09 23:58 조회:271
제가 봤던 최고의 경기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경기 내용 뿐만 아니라.. 경기 전 긴장감 까지 합쳐서..)
헤글러 VS 헌즈 호야 VS 차베스 홀리필드 VS 리딕보우 정도...
뭐 타이슨의 경기는 충동적인 중학교때 봤을땐 잼있었는데..
상대 선수가 지명도가 떨어지는 선수들이라서.... -_-
홀리필드 VS 타이슨 전은 관심은 많이가고.. 홀리필드가 KO 로 이기긴했지만
홀리필드의 클린치(괜찮은 작전이나) 와.. 7회 인가의 버팅으로
이미 대세는 홀리필드 쪽으로 기운 경기였고..
2번째 경기는 핵이빨을 보여준 경기...
그러나 이번에 열리는
루이스 VS 홀리필드 시합은 가히 폭발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이견이 없을것 같군요.
아주 오래전.. 5~8 년 전부터.. 국내신문에
헤비급 5강 구도로 판명났던
리딕보우, 조지포먼, 홀리필드, 타이슨, ??? (루이스였던가???)
이 5선수들의 경기에 관심이 쏠려 있었지만..
홀리필드와 타이슨의 경기는 최근에 치뤄졌었고
단, 오래전에 보우와 홀리필드의 경기만이 있었을 뿐..
포먼과 타이슨 경기도 성사되지 않았고(?)...
타이슨이 감옥에 가는 바람에.. 빅 매치가 이루어지기 힘들었었죠..
그리고 타이슨이 홀리필드에게 나가떨어지고..
포먼도 템포 느린 경기에 관심이 적어지고..
리딕보우도 은퇴해 버리고 난 지금..
홀리필드와 루이스의 경기는
사상 최고의 헤비급 매치라고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뭐 알리, 프레이저 등등 빅매치는 여러번 있었지만..
그땐 제가 어렸을적 이야기이고..
우선.. 홀리필드와 루이스의 경기는
옛날의 5강 중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경기가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보우야 뭐 88 올림픽 때..(LA 올림픽이었나??) 루이스에게 KO패 당했고
프로에 와서도 챔피언 벨트를 버려서라도 루이스를 피했을 정도고..
타이슨도 루이스와의 경기를 기피했다고 하니..
이번 경기는 최대의 빅매치가 될것 같군요..
몇달전 타이슨의 경기 후에 이 게시판에 올린적이 있어서 부언은 하지않고..
단지 제 예상으로는 루이스가 이기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아무 의미가 없는것이지만..
우선 리딕보우와 홀리필드가 비슷하다고 가정할때..
엔드류 골로타 라는 신인이.. 리딕보우를 무지막지하게 때려버렸고..
(경기 결과는 모름... 둘이 난타전 하는걸 봤는데.. 골로타의 우세였던 장면)
그 골로타가... 루이스한테.. 1회인가.. 2회인가..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맞고.. KO 당했을 정도니..
난타전에서도 루이스가 유리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토니터커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타이슨과도 경기를 치뤘었죠.. (결과는 타이슨의 판정승)
이 선수를 루이스가.. 5~8 라운드 중.. 에.. 한번 다운을 뺏고
일부러 힘들이지 않고.. 점수관리하면서 판정승 했었죠..
그런 점에서도.. 경기 운영 능력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음..
단.. 살이 무쟈게 마니 쪄서.. 그게 걱정임..
예전에.. 루이스 VS 홀리필드의 경기를 썼던 적이 있어서.. 쩝..
다시 쓸려니.. 하핫..
지금까지 약 20명 정도의 복서에 대한 기록을 올렸습니다.
lt 복싱.. 하시면 볼 수 있고요.
앞으로도 약 20명 정도 더 올릴 생각입니다만, 불행히도 정작 한국선수에 대한 건
올리기 어렵습니다.
전에도 밝혔지만, 지금까지 올린 선수기록은 인터넷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
을 토대로 해서 게시가 가능했지만, 인터넷 어디에도 한국선수에 관한 기록은 없습
니다.
전에 홍수환 선수와 박종팔 선수에 대한 기록을 올린 바는 있지만, 그건 오로지 제
기억을 토대로 해서 올린 것이기 때문에 자료로써는 가치가 없고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선수열전을 올리면서 했던 생각은.... 지금은 비록 복싱
동호회가 없지만, 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기존의 스포츠란에 올렸던 내용들을 갈
무리 해서, 스포츠전문 동호회로의 구색을 갖출수 있도록 해야 겠다는 생각이었
는데, 아무리 뒤지고 또 뒤져도 우리 선수에 대한 기록은 찾을수가 없군요.
한국복싱위원회는 ... 요즘 개인도 가지고 있는 홈페이지 하나 없습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이 ... 다른 능력있는 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군요.
한국복서에 대한 기록을 기다리시는 분께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성은(toytee)님께도 게시판을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 목:[복싱] 신시네티의 태풍 "아론 프라이어" 관련자료:없음 [2688]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3-10 22:24 조회:389
J 웰터급사상 가장 강한 선수로 손꼽히는 아론 프라이어는 1955년 10월 20일
생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복서 "알렉시스 아르게요"와의 두 차례 대
전에서 모두 KO승을 거두면서 세계 복싱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신시네티의 태풍""독수리"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야성적이고 공격 일변도의 파이팅으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스타
일의 선수입니다.
1976년 11월 12일 고향 신시네티에서 "래리 스미스"를 2회 KO로 누르고 데뷔
한 프라이어는 그 후 24전 전승에 23KO승을 거두며 최고의 기량을 선보입니
다. 그 중에는 16연속 KO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라이어는 프로데뷔 25전
만에 WBA J 웰터급 챔피언 "안토니오 세르반테스"를 4회 KO로 격파하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하였습니다.
그는 아르게요와 대결하기 전까지 "게튼 허트""레녹스 블랙모어""듀안 존슨
""미구엘 몬틸라""카메다 아키오"등과 5차례 방어전을 가져서 모두 KO승을
거두는 탁월한 기량을 선 보입니다.
타이틀 5차 방어에 성공한 프라이어에게, 네체급 석권을 노리고 아르게요가
습격해 온 것은 1981년 11월 12일 마이애미의 "오랜지볼 구장"에서 였습니
다. 아르게요와의 첫 번째 대결은 힘과 기량에서 복싱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격찬을 받았습니다. 훗날 "올해의 경기"로 뽑히기도
하였던 이 경기에서 프라이어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린 끝에 14회에 기회
를 잡고 폭풍같은 연타를 퍼부어 아르게요를 실신시킵니다. 이 때가 프라이
어의 최 전성기로써, 역시 당시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슈거 레이 레너드"마
져도 가장 위협적인 상대로 프라이어를 지목하기도 하였습니다.
1983년 WBC S 라이트급 전챔피언이었던 한국의 김상현이 프라이어에게 도전
했으나, 레너드마저 두려워한 프라이어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4월 2
일 아틀란틱 시티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김상현 선수는 경기 시작전부터
기가 꺾인듯한 무기력한 경기를 벌리며 일방적으로 몰립니다. 비록 3회 초반
프라이어의 눈 위를 찢어놓기는 하였지만, 피를 본 프라이어는 더욱 흉폭하
게 김상현을 몰아부쳐 결국 3회 KO로 타이틀을 방어합니다.
1983년 10월 9일. 약 11개월만에 프라이어는 아르게요와 다시 라스 베가스에
서 조우합니다. 역시 빛지고는 살지 못하는 아르게요와 치열한 접전을 벌립
니다만, 네 체급을 올리면서 스피드와 순발력이 떨어진 아르게요가 프라이어
를 잡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역시 10회 KO. 승리는 프라이어에게 돌아갑니
다.
그러나 아르게요를 격파한 후, 딜레마에 빠진 모습을 보이던 프라이어는 WBA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IBF 새 챔피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1984년과 1985
년에 단 한 차례씩의 방어전을 가져 15회 판정으로 타이틀을 가까스로 방어
했던 프라이어는 결국 85년 말에 IBF 타이틀 마져 반납하고 야인으로 돌아섭
니다. 그 후 프라이어는 마약에 손을 대게 되고 1987년에 가진 재기전에서 "
보비 조 영"이라는 무명 선수에게 7회 KO패 하면서 그의 명성에까지 흠집을
남깁니다. 그 후 88, 89, 90년 각 한 차례씩 경기를 가져 모두 KO승을 거두
기는 했지만, 다시 선수로써 재기는 하지 못하고 경기중 눈 부상까지 겹치며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1996년에는 세르반테스와 아르게요 두 명의 "명예
의 전당"헌액 복서를 물리쳤다는 업적이 인정되어, 자신의 이름도 "명예의
전당"에 올리게 됩니다. 통산전적 40전 39승 1패 35KO
제 목:[복싱] 멕시코의 강타자 "루벤 올리바레스" 관련자료:없음 [2689]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3-10 22:26 조회:287
전통적인 복싱강국 맥시코에서 배출한 숫한 세계 챔피언들 중에서도, 인기도
로 따지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선수가 바로 전밴텀급 챔피언 "루벤 올
리바레스"입니다.
1947년 1월 14일생인 올리바레스는 대단히 터프하고 강력한 펀치를 구사하는
선수입니다. 1965년 1월 4일 "이시돌 소텔로"를 1회 KO로 격파하면서 프로에
데뷔한 올리바레스는 주무기인 레프트 훅을 앞세워 1967년 "필리페 곤잘레스
"에게 10회 판정승을 거두기 까지, 22연승 22연속 KO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합니다. 1969년 그가 "라이오넬 로즈"를 5회 KO로 제압하고 세계 밴텀급
챔피언이 돼었을 때, 그의 성적은 놀랍게도 51승 1무 49KO승 이었습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른 올리바레스는 1969년 12월 "알렌 루드킨"을 상대로 한 1
차 방어전에서도 2회 KO승, "쿠쵸 카스틸로"와의 2차 방어전에서도 15회 판
정승을 거둠으로써 롱런이 예상되었지만, 70년 4월에 3차 방어전이자 "쿠초
카스틸로"와의 재대결에서 14회 TKO패 함으로써 타이틀을 상실하고 첫번째
검은 별을 달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 세번째 만난 카스틸로와의 대결에서
다시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타이틀을 재탈환합니다. 그 후 올리바레스는 "겐
자와 가즈요시"와 "헤수스 피멘텔"을 상대로 연속해서 KO승을 거두면서 두
차례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지만 72년 "라파엘 에레라"에게 8회 KO패 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무관이 된 올리바레스는 재기를 노리지만 에레라와의 재대결과 "아트 하피"
에게 KO패를 당하면서 밴텀급에서 한계를 느끼고, J 페더급을 건너뛰어 페더
급으로 체중을 올려, 1974년 공석중인 WBA 타이틀을 놓고 일본의 "우타가와
겐스케"를 6회 KO로 꺾고 정상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1차 방어전에서, 역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복서 "알렉시스 아르게요"에게 13회 KO패 함으로
써 단명에 그칩니다.
1975년, 올리바레스는 WBC 페더급 챔피언 "보비 챠콘"을 2회 KO로 꺾고 챔피
언의 자리에 오릅니다만, 다시 1차 방어전에서 "데이비드 쿼티"에게 판정패
함으로써, 역시 단명에 그치고 맙니다. 12월에는 인디언의 후예 "대니 로페
스"에게 7회 KO패를 당하면서 생애 첫 2연패를 기록한 올리바레스는 그 후에
도 계속 경기를 가지며 재기를 노리다가 1979년 마지막으로 세계 정상을 노
크합니다만, 불행히도 상대는 페더급 역대최강으로 꼽히는 "에우제비오 페드
로사"였습니다. 뛰어난 기량의 올리바레스였지만, 전성기를 구가하던 페드로
사를 꺾기에는 너무 노쇄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12회 KO패 함으로써 정상 등
극의 꿈이 좌절 됩니다. 그 후에도 올리바레스는 간간히 한 두 경기를 가지
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인 은퇴상태에 들어갔으며 1988년 3월 "이가시오 마드
리드"에게 4회 KO패 한 경기를 마지막으로 링에서 모습을 감춥니다. 통산전
적 104전 88승 3무 13패 78KO
브라질 출신의 에델 조프레는, 브라질 국내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위대한 챔피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벤텀급 올타임
랭킹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그는, 야성적인 파이터 이면서도 프로통산 78전을
싸우는 동안 단 한차례도 다운을 당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인 선수이기도 합니다.
1956년 올림픽에 브라질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한 조프레는, 이듬해인
1957년 자신의 생일인 3월 26일 프로로 전향했습니다.
그는 프로 전향후 37전을 싸우는 동안 3무승부를 기록했을 뿐 단 한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은 호조를 보이던 조프레는, 1960년 11월 18일에 LA에서 공석중인 WBA
밴텀급 타이틀을 놓고 "엘로이 산체스"와 겨뤄 6회 KO승을 거둡니다. 4개월 후에는
"피에르 롤로"와 가진 방어전에서 10회 TKO승을 거둠으로써 일급 챔피언으로써의
발판을 굳힙니다.
그는 밴텀급 타이틀을 일곱차례를 방어했으나, 1965년 5월 17일에 일본 나고야에서
벌어진 "파이팅 하라다"와의 대결에서 15회 판정패를 함으로써 첫 번째 검은 별을
답니다. 조프레는 1966년 토쿄에서 하라다와 재경기를 벌이지만 다시 15회 판정패를
당함으로써 쌓아온 명예에 먹칠을 하게 돼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3년 후, 그는 재기를 선언하고 파죽의 14연승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합니다. 그는 결국 1973년 5월 5일에 브라질의 브라질리아에서 벌어진
WBC 페더급 챔피언인 "호세 레그라"와의 대전에서 15회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챔피언에 재등극합니다. 그는 그해 10월 "빈센트 살디발"과의 방어전을 4회 KO로
장식하며 방어에 성공하지만, 이듬해에 챔피언을 자진 반납합니다. 그 후에도 그는
일곱차례의 논타이틀을 벌여 전승을 기록하지만, 1976년 은퇴를 선언하고 팬들의
곁을 완전히 떠납니다. 통산전적 78전 72승 4무 2패 50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