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이코 마키는 1928년 도쿄 출생이다. 이 노(老)대가의 나이는 올해로 72세가 되었다. 72세! 우리 주위의 그 누구가 70대가 되도록 연필로 잡고 스케치하며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건축설계를 하고 있는가? 40세만 넘으면 연필대신 골프체를 잡고 도면 대신에 결제서류나 힐끗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조소어린 비아냥 거림은 사실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한다 하더라도 육순을 넘겨서도 끊임없이 디자인에 전력투구하여 연구하며, 예술가며 장인으로서 스스로를 연마시키는 일본의 많은 건축가들을 보면 부러움도 생기고 경외감마저 들게 된다. 일본의 많은 건축가에 비해 후미히코 마키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저명한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닦았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교직생활을 통하여 연구하며 실무하며, 실무하며 연구하는 것을 따로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교수 겸 건축가이다. 이번 Paper에서 다루게 될 마키의 후쿠오카 대학 센타는 2년전에 일본기행에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마키의 건축관과 공간과, 형태에 관하여 다루어 보고자 한다. 예전에 마키 이름조차 몰랐던 저의 지식을 탓하며 본 Paper를 시작하고자 한다.
ㆍ약 력
1928년: 도교 출생
1952년: 동경대 건축과 졸업
1953년: 크랜브룩 예술학교 건축과 졸업
1954년: 하버드 건축대학원 졸업
1954-1956년: S.O.M, New York 및 Sert, Jackson 사무소 근무
1956-1958년: 워싱턴대학 조교수
1960-1962년: 워싱턴대학 부교수
1962-1965년: 하버드 대학 부교수
1979-현재: 동경대학 교수
1965-현재: 마키건축사무소 운영, 약 30여명의 직원들과 작품활동 중
주요수상 경력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1993) 및 다수의 일본 및 외국인 건축상,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 후미코 마키 Project Chronology
ㆍ1960년
Steinberg Hall at Washington University
St. Louis, USA
ㆍ1962년
Nagoya University Toyoda Memorial Hall
Nagoya
ㆍ1968년
Rissho University Kumagaya Campus
Kumagaya, Saitama
ㆍ1969년-92년
Hillside Terrace Apartment Complex, PhasesⅠ-Ⅵ
Shibuya-ku, Tokyo
ㆍ1971년
Kanazawa, Ward Officers
Kanazawa, Yokohama
ㆍ1972년
Kato Gakuen Elementary School
Numazu, Shizuoka
ㆍ1974년
Tsukuba Academic New Town
Tsukuba, Ibaraki
ㆍ1974년
Toyota Kuragaike Memorial Hall
Toyota, Aichi
ㆍ1975년
Japanese Embassy
Minato-ku, Tokyo
ㆍ1978년
Maki Residence
Shinagawa-Ku, Tokyo
ㆍ1979년
Iwasaki Art Museum
Ibusuki, Kagoshima
ㆍ1980년
Kawawa Lower Secondary School
Yokoyama, Kanagawa
ㆍ1981년
Keio University Library, Mita Campus
Minato-Ku, Tokyo
ㆍ1982년
Kota Kinaballu sports center
Sabah, Malysia
ㆍ1983년
Dentsu Osaka Office
Kita-ku, Osaka
ㆍ1985년
Spiral
Minato-ku, Tokyo
ㆍ1986년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Kyoto
Sakyo-ku, Kyoto
ㆍ1987년
Competition for Vienna Messepalast
Vienna, Austria
ㆍ1990년
Tokyo Metropolitan Gymnasium
Shibuya-ku, Tokyo
ㆍ1990-94년
Keio University Shonan Fujisawa Campus
Fujisawa, Kanagawa
ㆍ1993년
Sandoz Tsukuba Research Imstitute
sukuba, Ibaraki
ㆍ1993년
YKK R&D Center
Sumida-Ku, Tokyo
ㆍ1994년
Kirishima International Concert Hall
Makizono, Kagoshima
ㆍ1995년
Floating Pavilion
Munich, Germany
ㆍ1996년
Fukuoka University Student Center
Jonan-ku, Fukuoka
ㆍ1998년
Nippon Convention Center(Makuhari Messe), PhaseⅡ
1. 메타볼리즘
신진대사의 뜻, 본래는 생물학용어였지만, 건축, 도시 계획의 분야에서는 1960년의 세계 디자인 회의를 위하여 결성된 그룹과 그 설계이론, 도시 이론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대사 건축론, 생성 건축론, 인공 토지론 등 건축가에 따라서 그 이론은 각각 다르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영원 불멸의 건축을 부정하고, 또한 근대건축의 스태틱한 기능주의를 비판하고, 건축과 그것에 의하여 구성된 도시는 다이나믹하게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메타볼리즘이란 다가올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그룹의 명칭이다. 우리는 인간사회를 원자로부터 대서운에 이르는 우주의 생성 발전하는 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특히 메타볼리즘이라는 생물학상의 용어를 이용 한다는 것은 디자인이나 기술을 인간 생명력의 외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의 신진대사를 자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촉진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기관지 <메타볼리즘> 제 1호에는 쓰고 있다.
<우리가 제안한 것은 아니다 도시의 혼란과 마비가, 그리고 건축의 모순과 정체가 제안한 것이라고 기큐타케 기요노리는 말하였는데, 변화하는 도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건축과 도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 먼저 있었다. 메타볼리즘 그룹은 차차로 도시의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있다. 기큐타케 기요노리의 <해상도시>등이 그러하다. 알기 쉽게 말하면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메저 스트럭취와 마이너 스트럭춰등을 구별하고 내용 연한에 따라 공간이나 설비를 교체한다는 것이 그 곳에서의 공통 사고 방식이다.
물론 도시화의 진행에 수반하여 변전에 짝이 없는 혼란과 파괴의 생태 뿐은 아니다. 새로운 상황으로서텔레비젼 영화 등 커무니케이션 수단의 발달에 따른 건축의 미디어로서의 상대적 지위가 저하하여 왔던 점, 기술 혁신에 뒷받침된 대중 소비 사회가 실현하기 시작한 일 등도 의식되고 있다. 그러한 중에서 실로 새로운 건축의 개념이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메타볼리즘의 중심적 이데올로기라 하여도 좋을 川添登(천첨등)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우선 성장, 변화, 대사, 과정, 유동성과 같은 시간에 관계하는 모든 개념을 건축에 도입하여야 하는 점이 메타볼리즘 이론에서 주장된 것이다. 메타볼리즘 그룹의 도시 및 건축의 개념을 가장 잘 이미지 시킨 것은 캡슐이다. 또한 메타폴리스다. 캡슐이란 모든 장치가 빌트 인 된 이동 가능한 공간 단위이다. 그리고 공장 생산되고, 따라서 이동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공간 단위로서의 캡슐에 의하여, 항상 신진대사를 반복하면서 구성된 것이 메타폴리스라는 도시의 이미지다.
메타볼리즘은 당초 극히 낙천적인 미래주의에 입각한 조리였다고 해야 한다. 그 미래 도시의 프로젝트의 현실성이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러나 이론 자체는 스크렙 앤드 빌드를 반복하는 일본 도시의 현실에 적합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점에서 메타볼리즘은 일본의 60년대를 대표하는 건축이데올로기였다.
건축의 60년대를 통하여 확실히 나타났던 것은 공간 자체의 상품화 경향이다. 부동산의 동산화라 하여도 무방하다. 프리패브 주택의 등장과 정착이 알기 쉬울 것이다. 공간의 여러부분뿐 아니라, 공간자체, 토지나 건물 전체가 상품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 자체의 상품화하는 공간의 균질화, 경량화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건축의 공업화, 프리패브화, 부품화, 표준화의 움직임과 불가분하다.
캡슐의 이미지는 공간 자체가 공업 생산된 부품인 점, 교환 가능한 점 등을 멋있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메타볼리즘 이론은 시대를 앞서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2. 일본 현대건축의 이론적 기반으로서의 메타볼리즘
서구건축의 영향을 흡수했던 근대건축기를 보낸 일본 건축가들에게 독자적인 이론을 확립해야만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 행사가 1960년에 개최되면서 일본 현대건축은 시작되었다. 일본 건축건축가들의 독립선언은 그들이 새로운 장르에 확신을 느끼기 시작한 1960년 도쿄 세계디자인대회였다. 그것은 일본을 세계건축의 한가운데로 끌어드리는 신중한 시도였으며 새로운 운동을 집중시키는데 상당히 성공했다.
그 정점에서 메타볼리즘그룹이라 불리는 협회가 형성되었다고 말한 로빈 보이드의 말은 이 사건을 잘 대변하고 있다.
국제주의 양식의 대변장이었던 C.I.A.M이 1956년 제 10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1959년 해산후 개최된 국제회의가 바로 도교에서 1960년 개최된 세계디자인회의였고 이 회의에서 일본의 독자적이고 통일된 주체가 요구되었다.
일본 건축가들은 개성- 개별성, 지역성, 세계성, <가능성>-사회, 기술,<실제성>-환경, 생산, 커무니케이션,<디자인 교육>이라는 이 회의의 주제에 맞는 독자적인 주제가 필요하였고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메타볼리즘 이론이었다.
메타볼리즘 이론은 현대도시는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하며 이 신진대사는 현대뿐만 아니라 일본 전통건축에도 존재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 것으로 불교의 윤회사상과 유기체의 신진대사 이론, 영국의 아키그램에 의한 플러그 인 시스템, 요나 드리드 팬 등에 의한 공중도시계획 등의 개념이 용해된 이론이라고 할수 있다.
이 메타볼리즘그룹은 초기에 가와조에 노보루, 구로카와 키쇼, 키쿠타케 키요노리만이 모였지만 군조형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던 오다카 마사로, 마키후미이코가 합세했으며 단게 겐죠는 이 그룹을 배후에서 후원하였다. 이소자키 아라타는 초기에는 동조하였으나 정식 구성원은 아니였다.
서구인들은 일본 현대건축을 거론할 때, 메타볼리즘을 또 올리는 것은 상기한 건축가들이 후에 일본의 거물급내지는 거장으로 부각된 점과는 무관하지 않으며 일본 현대건축가들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것도 사실이다.
메타볼리즘 이론은 디자인의 착상단계에 있어 조작을 자극하는 모멘트가 되는 개념으로
ㆍ군화(群化:엔트로피, 단위, 확률, 다양성)
ㆍ결합(콘넥터, 중합,공존,매개, 교환, 증폭, 절단의 개념)
ㆍ성장(증식,교환, 분열, 파괴의 개념)
ㆍ효율(속도, 밀도의 개념)
ㆍ자극(촉매의 개념)
ㆍ유동(정보유통의 개념)을 이용하여 원형(原形), 전형(典型), 유형(類型)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법론을 채용하고 있다.
마키 후미이코는 메타볼리즘의 구성원이기도 하였지만 작품경향은 오히려 하바드 대학원졸업의 경력답게 근대건축에 기반을 둔 건축을 전개하였다. 그의 다케얀마 집합주택, 스파이럴, 테피아, 일본 컨벤션센터는 일관되게 근대건축에 기반을 두고 전개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수정 발전시키고 있으며 일본 전통미학도 공간적인 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다케얀마 집합주택 일명 힐사이드 테라스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건축양식은 근대적 틀을 취하고 있지만 건축의 가장 전통적인 역할인 장소성을 만드는 것을 중요시 함을 알수 있다. 즉 부지를 조작 가능한 영역으로 인식하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공적인 장소로서 형태를 준다는 프로세스를 중시하고 있다.
마키가 <집합체의 연구>라는 책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개개의 건물을 하나의 총체로 인식하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들은 의미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공간 언어가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집합주택을 설계하는데 있어 컨텍스트, 시간 , 역사, 그리고 단편적ㆍ부가적 질서에 준해서 단계적으로 건축물을 세워나가는 것이 의미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키는 60년대는 구로카와나 이소자키에 비해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80년대 들어오면서 스파이럴이나 테피아, 일본 컨벤션 센터를 완성하면서 일본 건축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테피아에서는 네덜란드의 데스틸 미학을 전개시키는 등 근대의 미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으며 일본 컨벤션 센터는 라투레트 수도원이 르 꼬르뷔제 조형언어의 결산인 것처럼 마키후미이코의 조형언어의 결산처럼 보인다.
3. 후미코 마키의 건축사고
산업화가 시작되고 있던 1920년대의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시절 많지는 않지만 일본의 기존 도시구조 내에서는 매우 특이한 몇몇 모던이즘 계열의 주거건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기존의 가치쳬계나 양식이 근대화, 산업화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지적인 원리로서의 모던 이즘을 건축학교에서 배웠다. 또한 모던 이즘이 전성기를 구하던 1950년대에는 근대 거장 한 사람인 월터그로피우스의 영향 아래 있던 하버드 건축대학원에서의 공부와 S.O.M등에서의 실무 및 연구 경험은 그의 밑바탕이 '모던이즘'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모던이즘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간략히 몇가지 중요 어구로 정리해 보면 역사주의에서 탈피, 기능주의, 형태의 순수성, 표현의 진실성, 장식의 배제, 새로운 공간개념 등으로 볼수 있다. 이는 19C 말의 과거로의 회기적인 역사주의 및 과잉된 절충주의에서 새로운 시대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새시대의 수단으로 창조하려는 사고와 노력의 결과이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기능에서 이탈해서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복고적인 형태와 과잉된 장식에서 벗어나 형태의 순수성을 추구하려는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로 건축을 구성하며 각 구조와 기능을 진실되게 표현한다는 모토와 함께 사치하고 과도한 장식을 죄악시하며 장식을 배제 하였다. 새로운 공간 개념은 사방이 막힌 구조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의 결합에서 자유로운 평면, 상호관입하는 공간 그리고 어디서나 균질할수 있는 새로운 보편공간의 추구 등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작된 모던 이즘의 양산과 무분별한 복제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비판을 받게된다. 이 비판의 대표적인 양대 세력 중 하나가 포스트모던이즘이고, 또 하나는 유럽 일부와 아시아 등에서 펼쳐진 지역주의 볼수 있다. 이중 후자로 볼수 있는 마키는 모던이즘을 부정하지 않고 계승하나 그 문제점을 수정해나가며 새로운 모던이즘을 수정해가는 네오 모던니스토로 볼수 있다. 이러한 후미코 마키의 건축사고는 크게 세가지로 볼수 있다. 그것은 공간과 장소성 그리고 물질성이다.
ㆍ공간-건축추구의 시작과 중심
마키의 건축의 시작과 그 본질에 있어 공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설계초기 단계에서 대상이 되는 건축의 전모를 하나의 명확한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넓이를 갖는 공간체로써 출발한다. 이러한 공간체험의 상태를 우선 이미지화 하면서 점차 그러한 공간을 포함한 형태ㆍ모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고무풍선 또는 구름과 같다고 칭한다. 이 구름과 같은 공간체는 형태적으로 아직 명확한 상태가 아니다. 그의 논리와 같이 그의 창작 스케치는 스쳐지나가는 그리고 여러번 겹쳐 그린 선과 점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초기 공간을 불명확한 구름으로 해석하는 그의 디자인 방법론과 정확히 일치한다. 창적도구로서 스케치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의지표시를 나타냄과 동시에 애매함, 의심, 불확실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 건축의 디자인이란 불가사의한 행위라 생각한다. 이는 머릿속에 그려진 것, 혹은 갑자기 생각난 모양이나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것 외에 스케치 과정중에 또 하나의 새로운 형태나 아이디어가 태어나기도 한다. 또한 스케치의 세계는 자기에게도 미지의 세계, 의심되는 부분, 여백을 남겨둔다."
그는 공간계획을 하는데 있어서 주어진 프로그램을 재구성하고 재편성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첫단계에서부터 디자인, 프로그램, 공간 그리고 형태는 서로 분리할수 없는 것으로 그는 확신한다. 공간에의 주된 관심은 형태 등이 각각의 족립된 항목으로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을 작가의 의도로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이를 공간으로 구축하여 그 공간에 섬세한 막을 부여하는 것이 그의 형태에 대한 생각임으로 이 둘이 하나로 녹아져서 디자인 되는 것이다.
ㆍ장소성-시점의 복수성
건축에 있어서 시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디에 서서 바라보느냐는 것은 부분에서 전체까지를 좌우하게 된다. 형태의 형식을 중요시 하는 시점은 건축 밖에 있게 되고 공간을 중요시 하는 건축가는 건물 안에 선 시점에서 건축을 느끼고 분석하고 설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와 내부의 시점의 통합과 조화로서의 건축을 만들어내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의 개성과 문화적인 배경에 의해 다양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마키는 어느쪽이냐 묻는다면 우선 풍부한 공간을 내포한 것에서 출발한다. 일단 공간이 창조되면 이것이 형태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하며 형태를 위해 공간을 희생하는 일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이 피막을 디자인 하는데 있어 중요한 인자가 바로 장소성이다. 즉 내부의 공간과 그 외부로 퍼지는 공간 혹은 외부의 풍경, 장소성과 관련성에 따라 피막의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외부의 풍경과 문맥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고 동시에 이러한 내측 양상이 그대로 밖에서 통시될수 있게 주의깊게 디자인 한다. 그러므로 그의 건물이 도시 및 그 장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명쾌하게 인식할 수 있는 동시에 이것이 또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매체라는 것을 각인 시킨다. 따라서 그의 건물에 있어 피막은 형태의 한 형식임과 동시에 장소와 그 건물을 결합하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마키는 이러한 시점의 복수성을 통해 되살려내는 장소의 의미로 장소성의 결여라는 모던이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ㆍ물질성-재료 및 디테일의 새로운 가능성
1. 장푸르베의 영향
1971년에 실시한 <조르주 퐁피두 국립 예술 문화센터>의 국제 콤피티션. 현대 건축의 조류에 있어 이만큼 Epoch-making 한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 때 심사위원장을 맡은 사람이 장 푸르베였다. 푸르베는 후에 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선택에 후회 없다>고 답하여 피아노+노저스 안의 가치와 그 후 7년에 걸쳐 완성된 퐁피두 센타의 아름다움에 절찬의 말을 보내고 있다. 퐁피두 센터의 등장은 현대 건축이 컨셉에서 일관하여 공간ㆍ소재ㆍ기술을 종합화한 형으로 우유부단함의 도전을 감행할수 있는 것으로서, 극언하며 퐁피두 센터는 푸르베의 심사에 있어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그 대담한 결단이야 말로 우리에게 푸르베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까지 생각되는 것이다. 현대 거장들로 하여금 푸르베의 건축에 대한 열거 방식은 현재에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현대에 계승되고 있는 푸루베의 유산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것이다.
1) 최신 기술에 대한 진지한 지향이다.
18세에 주조공장에서 일하고 그 경험에서 많은 발상을 얻어 결국에는 생산성의 유니트화라는 건축에 적용할수 있는 새로운 어프로치를 발견할수 있었던 궤적이 그것을 여실히 이야기하여 준다.
2) 디테일의 발견이다.
새로운 경금속 재료에 의하여 형성된 새로운 건축에는 그것에 걸맞는 건축 부재간의 배합이 필요 불가결해진다. 기계 시대의 미학을 배경으로 하여, 기둥, , 면과 모든 부분의 새로운 형태 관계의 추구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건축을 위한 새로운 무기 제작이기도 하였다.
3) Craftsman ship의 실천이다.
그것은 창조하는데 실험정신으로서 여겨 아틀리에 푸르베에서는 설계한 것을 바로 이웃 공장에서 실험, 연구를 하고 검토 발전해 간다는 창조 프로세스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4) 구상의 웅대함과 장르를 초월한 스탠드이다.
푸르베의 영향을 받은 마키는 전술한 그의 피막에 섬세한 비례로 제어된 재료를 부여한다. 모던이즘이 형태를 추상화할 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추상화하여 물질로부터 일체의 소재감을 단순, 축소 그리고 박탈했다면 그의 소재에 대한 감각은 매우 독특하고 또한 일본적이라 할수 있다. 즉 마키에게 있어 물질은 추상적이며 동시에 소재감이 약한 독특한 소재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소재감이 물질의 특유의 생기를 주고 있다. 이러한 추상성과 소재감의 양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섬세한 비례 격자로 장식되어 있는 창조적 디테일 처리에 있다. 이는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에 근거하여 생명력이 없는 디테일로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모던이즘 계열의 복제품들 속에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기술을 사용하고 조절하여 재료를 색다르게 처리 함으로써 새로우면서도 다의적인 물질성을 살려내고 있다.
2. 디테일
공간을 중요시 여기는 마키는 공간을 이루는 실체이자 공간의 질 그리고 공간을 형성하는 방식으로서 디테일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모던이즘에서 잃어버렸던 것은 이러한 세세한 실체들이고 마키에게 디테일이란 과거의 장식으로 이해된다. 마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의 건물들은 장인들의 솜씨를 바탕으로 엄청난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도 현대의 재료들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요? 모던이즘 사회는 이러한 실체를 배제한 채-장식을 제거함으로써-건물을 효율적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중성적이고 따분한 공간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는 포스트 모던이스트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가 공간을 실체화하는 것이지 단순히 이미지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마키는 과거의 장인들이 장식에 몰두했던 것처럼 그의 공간 구축의 실체로서의 디테일의 연구 및 디자인에 그의 모든 것을 불어넣는다.
3. 작품
ㆍ테피아(Tepia): Hi-Technology Pavilion, Tokyo
마키는 루이스 칸 처럼 비교적 늦게서야 중요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후반 세워진 후지사와 시립 체육관, 스파이럴 빌딩, 교토 현대 미술관 그리고 테파아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네오 모던 이즘의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테피아는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줄인 말로써 국제적 산업 협력 추진 및 국제 교류를 활성화하며 기계 정보산업에 관련된 첨단 기술의 소재와 그 미래를 전망하는 국제적 정보 교류의 장으로 계획된 것이다. 첨단 기술의 교류와 소개라는 기능에 걸맞게 도교의 중심부라 할수 있는 메이지 신궁외원의 녹지를 배경으로 하여 카페, 회의실, 스포츠시설 등을 갗춘 도시공원내의 파빌리온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테피아는 지상 4층, 지하 2층의 건축물로 1층은 입구 홀, 3개의 전시 및 다목적 공간과 사무실, 2층은 도서실과 카페 및 강의실, 3층은 전시실, 4층은 테피아 홀과 회의실 및 테피아 클럽, 지하 1층은 주차장 및 레스토랑, 지하 2층은 헬스클럽과 기계실로 구성되어 있다.
ㆍSpiral
마키의 도교에 있는 스파이럴 건물은 직관적인 모던이즘의 완벽한 실레이다. 흰색, 그리고 은색 그리고 회색, 변화하는 외곽선, 다른 스케일로서 사용된 사각형 동기로 가득찬 엄청난 복잡성등은 양식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내부에서 정적인 추상과 감각적인 상세로부터 유래한 평화적인 인본주의라고 생각한다. 평화로운, 그러나 자극적인 것은 이 작품의 모순어법적 성격인 것이다. 마키는 강조되는 동질성이 1.35m의 알루미늄과 유리판 격자에 의하여 제공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사각형 동기는 대각선 상에서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예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운동감을 실제적으로 증가시킨다.
Spiral을 통해서 나선형에의 꼬르뷔제식 통행로는 전면 파사드 상에 나선형으로 제안되었다. 여기 문화적 이미지의 부조화-일본식 조경, 스타인 버그의 격자, 바우하우스의 초기형태, 그리고 신전, 인디안의 유적등 일련의 여섯 개 격자형 틀속에 배열되어 있다. 그 암시는 그 자체가 하이테크 유적 형식인 나선형의 상상의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실제로 바우하우스 형태는 유일한 하얀색 원추형인 의상박물관을 위한 전시실로 된다. 반면에 마키가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 번쩍이는 최상층은 건축주를 위한 메조네트 아파트가 되었다. 굴곡진 하얀색 피아노 형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바(bar)이다. 이러한 즉흥적 연출은 모두 프랑크 게리의 와스크 하우스를 떠오르게 한다.
게리는 해체적이고 분리적인데 반해 마키는 독특하고 매우 정교하다. 마키의 양심, 놀라움, 배열 등의 상당 부분이 포스트모던 공간의 관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마키가 지닌 상상은 극단적으로 냉정하고 과학기술적이다. 그는 20년 동안 "하얀"건축이 낙관적 약속을 제시한 그러한 건축적 방법으로 글을 썼으며, 또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리처드 마이어의 것에서와 같이 향수적 미래의 운치를 느낀다.
Case Study
ㆍFukuoka University Student Center
ㆍDesign by: Fumichiko Maki
ㆍ위치: 일본 후쿠오카 대학
ㆍ규모: 지하 1층 지상 6층
ㆍ공사기간: 1994년-1996년
ㆍ개요
창립 60주년을 맞이한 후쿠오카 대학의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이 60주년 기념관은 기존 캠퍼스에의 증축이나 현재 동시에 계획되어 있는 강의동과 함께 앞으로 새로운 마스터플랜하에 재구축 되어가는 캠퍼스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기대되고 있다.
프로그램은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갖춘 로비, 오케스트라 연습실을 겸한 음악홀, 그리고 전시 갤러리의 3개를 기둥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갤러리의 3개를 기둥으로 하고 있다. 그외에 소음악연습실, 회의실, 일실, 응접실 등 기존의 캠퍼스에 부족한 기능이 여러 가지 쌓여져 있고 전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합성이 높은 건물들로 대어있다.
배치계획
시치와이 남단 부근에 위치하는 60주년 기념관으로의 어프로치는 당면은 북측의 교실군으로 되어있으나 장차 지하철이 캠퍼스 남단에 설비될 예정이고 서측에서의 어프로치도 중요한 동선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부지지반면의 4m의 레벨차이를 그대로 살린 1, 2층의 투명도가 높은 공공공간에 대하여 시각적인 연속성을 연축해서 통행을 용이하게 해주고 있다.
전체구성
전체구성은 기단위에 만들어진 투명한 로비 공간위에 음악홀과 전시갤러리가 부유한다고 하는 구상에 따라서 결정되고 있다. 3가지의 주요한 기능이 제각기 1, 2층, 3, 4층 5, 6층의 3가지 평면 레벨에 대응해서 전개한다.
3층에 두어진 18m각의 정사각형 평면을 갖는 음악홀은 음향적인 성능을 만족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자연광을 끌어들이므로 일잔적인 음악홀이 닫혀진 상자와는 다르다. 자연의 빛이 넘치는 쾌적한 공간을 겨냥하고 있다.
연창이 갖는 수평성이 지배적인 기존 캠퍼스와의 차이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 건물의 형태는 수직성을 기조로 하는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스카이 라인에 돌출하는 전시갤러리는 그 상징적 존재이고, 건물의 여러 가지 부분이 2층분의 높이를 형태단위를 하고 있다.
작은방군에 의해 구성된 비교적 매시브한 인상을 주는 북측 입면에 대하여 그 거의가 로비, 라운지, 화이에, 갤러리 등의 공공적인 공간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남측입면은 2층분을 단위로 한 알루미와 글라스의 커튼월의 표현에 의해 투명도가 높은 패서어드가 되어있고 어프로치의 방향을 따라 건물의 표정이 변화도록 의도되어 있다.
기조가 되는 외부 마무리는 콘크리트의 타설이나 음악홀을 싼 곡면벽이 알루미형 스팬드릴, 전시실의 큐브는 알루미 플랫페널 그리고 계단실이나 레스토랑 옆의 자립하는 벽면은 셀라믹 타일과 같이 건축구성상의 특징을 돋보이게 하는 재료가 제각기의 요소로 선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