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여운형 암살범이 1945년에 월남하였다면 한지근은 반공청년이다. 그러나, 1947년 7월에 남한에 오자마자 여운형을 암살하였기에 그는 북한 거주자였다.
1. 러시아군의 권총을 가지고 삼팔선을 넘는 것은 소련군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2. 桂洞자택부근 광화문통 동소문로터리 부근 약도와 여씨 사진 역시 공산당 조직이 아니고는 한지근에게 줄 수 없었다.
3.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곧 바로 송진우 암살범의 집에 기거하였다는 것은 공산당 조직 내에 연락망이 있어 사전 범헹 준비를 해 주었음을 의미한다.
4. 공산당 동지들을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암살하는 것이 스탈린 통치의 방식이었다. 스탈린이 군 조직을 이용해 공산당원 삼천 만명을 암살한 수법과 동일하다.
5. 한지근이 평양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지 두 주 만에 암살을 했다는 것은 그간에 남한의 다른 단체나 인물들과의 접촉 가능성을 배제한다.
6. 이미 북한에서 2년간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은 청소년이 반공주의 사상가일 가능성은 극히 적다.
7. 소련군정은 여운형이 자기네 지령을 그대로 따르기에는 이미 너무나 미군정에 가까워진 인물임을 보았기에 남한 좌익의 지지층이 갈라지지 않고 남로당에 결집되도록 공작할 필요성을 느꼈다.
8. 아무 연고 없이 러시아 군용 권총을 들고 서울에 온 북한 청년을 두 주간이나 먹며주고, 재워주고, 길 안내해 주는 조직이 있었다는 것은 소련군정과 남로당이 합동으로 자행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9. 그러면 왜 소련군정과 남로당은 북한 청소년을 기용하였을까? 아마, 그 이유는 남한 당국에서 범인의 배후를 캐는 것이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0. 청소년이 어떻게 러시아 군용 권총을 발사할 줄 알았을까? 사전에 사격 훈련을 북한에서 받았음을 의미한다.
11. 북한은 여러 차례 남한 요인들 제거를 위한 암살단을 보낸 바 있다.
12. 그러면, 왜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한 후에 암살하였을까? 김일성과 만났다는 것은 북한의 고급 기밀이 여운형에게 누설되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여운형은 미군정을 자주 출입하며 미군정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때였다.
13. 한지근이 우익청년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직 남한 사람들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말뜻을 모르며, 아직 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때에 북한 청소년이 남한에 온지 두 주만에 민주주의 사상가로 돌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는 북한을 출발할 때부터 러시아 군용 권총을 들고 왔다.
14. 스탈린의 통치 방식이 간단했다. 그는 하부 조직에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스탈린의 정책이나 결정에 걸림돌이 되는 공산당원이 있으면 암살 지령을 그 지역 군부에 내려보냈다.
15. 스탈린의 숙청방식에 의한 통치 방식을 스탈릲식 공산독재라고 하며, 그대로 북한 공산주의에 이식되었다. 북한에서의 공산당원들에 대한 숙청은 남한의 공산당원에게까지 적용되었다.
16.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였으되 마르크스-레닌주의져였지 스탈린주의자는 아니었다. 김일성이 스탈린 지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였던 데 비해, 여운형에게 스탈린주의 국가가 그가 추구하는 국가 모델일 수 없었다.
17.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였으되 스탈린은 견제되어야 했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며, 그 견제 세력으로 미국을 등에 업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8. 김일성과 여운형의 면담에서 김일성은 여운형의 생각을 읽었을 것이며, 김일성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스탈린에게 보고하여야 했다. 스탈린 편에서 여운형과의 회담 결과에 대해 보고를 요청하였을 것이다.
19. 김일성은 여운형이 내놓은 중대 재안에 대해 홀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가 여운형으로부터 들은 말은 그대로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20. 스탈린은 미국처럼 자국 국민이 결정하도록, 일이 복잡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암살하는 것이 스탈린의 습관이었다.
21. 소련군정이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은 남로당을 선택하였다는 스탈린이 남한에서 여운형의 당이 아니라 박헌영의 남로당을 선택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실로 희얀한 일이 1946~1947년에 있었다. 공산주의 여운형이 내놓은 좌우합작안을 미군정이 합리적인 대안으로 빋아들였던 반면에, 좌우합작안을 남북합작으로 발전시키려는 그의 고집 때문에 소련 군정 하수인 한지근에 암살당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왜 소련 군정은 19세의 청소년 한지근을 내려보냈는가?
1. 스탈린은 소련 군정에 여운형 암살 지령을 내려 보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지는 않았다.
2. 러시아군이 삼팔선을 넘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고 서울 지리를 모르는 러시아군이 여운형을 직접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3. 청소년은 아직 여운형이 누구인지 모르는 세대였다. 이미 2년간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은 청소년은 그저 당이 시키는 일을 할 뿐이었다.
4. 한지근은 북한에서 자란 1세대 공산주의였으며, 스탈린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있었던 청년이었다. 그래서 남한 사람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기가 명령받은 일을 심지어 그것이 암살이라 하더라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청소년으로서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은 그가 민주주의 사상가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그는 체포 직후 자신의 정체성을 우익으로 자백하였는데 이것은 배후 세력이 공산당임이 탄로나지 않도록 사전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韓智根은 평북출생으로 1946년 7월 평북 龍文중학을 졸업하고 가사에 종사하다가 동년 10월 용문중학 동창생인 金仁千으로부터 권총 한 자루와 실탄 8발 그리고 呂씨가 빈번히 출입 통과하는 桂洞자택부근 광화문통 동소문로터리 부근 약도와 여씨 사진을 받아가지고 지난 6월 26일 단신 평양을 떠나 7월 1일 서울에 도착 동 11일부터 시내 신당동 34의 243 韓賢宇 집에 있으면서 전기 3개소를 배회하며 여씨 저격을 계획중 7월19일 오전10시경 여씨가 탄 자동차가 돈암동방면으로부터 내려와 惠化洞으로 질주하는 것을 보고 혜화동 우편국 앞 노상에서 그 회로를 기다렸었다. 당일 하오1시15분경 여씨 자동차가 나타남을 보고 추격하여 약 1미터가량 되는 거리에서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3발을 발사하였다.
수도경찰청 여운형 피살사건의 진상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