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宗의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 태릉(泰陵)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 <泰康陵 소재>
사 적 : 제 201 호
泰陵의 특징
: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文定王后 약사(略史)
: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태어나 17세{중종 12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중종(中宗)과의 슬하에 명종(明宗)과 네 공주를 두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일생이 아주 화려해서 자신이 왕비(王妃)에 오른 것도 중종의 제1계비(繼妃)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인종(仁宗) 출산 후 승하해서 이루어졌고, 아들 명종(明宗) 역시 인종(仁宗)의 요절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천운(天運)이 작용한 것 같다는 속설(俗說) 전해오는데, 더욱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 8년간이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기에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인종(仁宗)의 외척 세력을 제거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 이후 권력의 정상에 군림했던 문정왕후가 생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중종(中宗)의 옆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종과 능역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재 서삼릉(西三陵)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옆에 조성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성종(成宗)의 선릉(宣陵) 가까이 있는 봉은사(奉恩寺) 곁으로 옮겨 놓았지만 낮은 지대로 인해 자주 침수되어 문정왕후 자신은 결국 그곳에 묻히지 못하고 현 위치로 정해진 것입니다.
또한 문정왕후는 불교(佛敎)에 심취하여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에 많은 작업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死後) 보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