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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 목사 옥중기
이글은 한상동 목사의 옥중생활을 글로써 공개한 최초의 책(주님의 사랑, 부산: 성문사, 1954)이자 유일한 옥중기 자료로서 박윤선 목사가 옮겨 적었다.
1.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까지
주께서 지금도 저와 같이 계심을 믿어서 알고(마28:20) 찬양을 받으실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이 글을 쓰게 됨을 감사하는 바이다.
저는 나이 여섯 살 되던 해에 부모와 남녀 8형제나 되는 가족을 떠나, 10리 가량 떨어진 곳(다대포)에 있는 5촌 당숙의 집에 양자로 가서 어릴 때부터 고독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었다.
21세 때부터 인생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견디지 못하여 자살까지도 생각해 보았으나 24세 되던 봄부터 주께서 불러 부산 다대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25세 때에 세례를 받고 신앙으로 살게 됨에 따라 핍박이 시작되었다. 우리 풍속은 특히 선조의 제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저는 양자로 간 사람이니 만큼 본래 무자(無子)한 사람이 양자를 구함은 선조의 제사 문제가 중대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미리부터 예측한 바이었지만, 예측 그대로 양가(養家)에서 쫓겨났다. 쫓겨나왔다가 양가 부모의 감정이 좀 식어지면 다시 들어가고, 또 쫓겨났다가 또 들어가고 하여 약 3년간이나 쫓겨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중 별별 사건도 많았다. 그 중에 몇가지 예를 든다면, 양가 부친께서 주야 3일간이나 가슴을 치며 무자하심을 한탄하여 통곡하시는데, 이는 진정 쫓겨나옴을 당함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한 번은 문중회의(門中會議)가 열렸는데, 우리 동리는 전 인구가 약 800명 가량으로 그 중에 우리 일가인 한씨가 약 250명이며, 이 사람들 중에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 30-40명이 모여서 일가족을 위한 사건의 회의를 하고 내게는 파양선고(破養宣告)를 한 것이다. 그때 양모되신 어머님이 목을 매어 죽은 모양이라 대문 밖에서 들으니 온 식구들의 곡성이 진동하였다.
나는 들어갈 수가 없어 대문 밖에서 듣다가 이제는 멀리 도망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전도사를 찾아 방문하고 사연을 말한 후 도망하겠다 하였더니 오늘 밤은 전도사 댁에서 자고 내일 되어가는 형편을 보아서 어떻게 해라 하여 거기서 자고보니, 소식이 들리는데 별세하지는 아니하셨고 목을 맨 까닭으로 아직도 괴로와 하시는 모양이라 하며, 양가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를 찾아 왔었다. 이는 양가에서 생각하기로 축출을 당한 자식이 자살이나 하지 않았나 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양가에 들어갔으나, 가정의 불평은 여전히 계속되어 3년이란 세월을 지난 27세 되던 9월 경에는 아주 축출을 당하였다(눅12 49-53). 그 당시 경남 진주읍 호주(濠洲)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에 교편을 들고 있었으나, 그때부터 전도의 사명을 느껴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 서울 피어선(皮魚善)고등 성경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생각만 간절하여 마침 경남 여전도회 사업으로 전도인의 사명을 받아서 교회도 없고 신자도 없는 곳으로 전도하러 갔었다.
2. 전도와 목회
경남 고성군 학림리란 곳은 옛날 풍속의 예의에 너무 완고한 곳이라 부부간에도 내외를 하는 곳이었다. 옛날 풍속에 남자만 거처하는 사랑방이 있어 이 남자가 자기 부인 방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어 들어갈 때에는 뜰에서부터 기침을 하여 부인에게 들어갈 뜻을 알려주면, 그 부인은 주의하여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남자가 보이지 않는 다른 문을 열고 슬금 나갔다가 자기 남편이 방에 들어와서 볼일을 다 보고 나간 후에야, 부인은 다시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고래(古來)의 풍속을 그대로 지키는 동네였다. 또 한 가지 다른 남자와 서로 대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라 하여 남자가 길을 가다가 여자가 오면 옆으로 돌아서고 여자는 남자의 뒤로 지나가는 법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길을 가다가 남자를 만나면 좀 머뭇머뭇해 보아 남자가 돌아서지 않으면 이 남자는 하인이라 여기고 예의를 알지 못하는 하인은 내외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마주 보고 지나가 버린다. 이와같이 아직도 고풍스러운 예의를 지키는 곳에 처음으로 나선 나 자신으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동리에 있어서 전도인에게는 가옥도 빌려 주기 않기로 하며, 동시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더불어 이야기하며 전도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냉수를 마시고 1주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여도 여전히 전도는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하기를 말만 지혜있게 잘해서 듣는 자로 하여금 답변할 수 없도록 하여 말로써 이기기만 하면 그사람들이 믿어 신자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유치하였다. 가정에서 쫓겨 나오기까지 한 나로서는 전도가 되지 아니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재산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왔거늘 왜 전도가 되지 않는가’ 하고 실망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다른 전도지로 옮길 때에 나를 한 번만 더 전도인으로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전도회에 청원하였다. 전도회에서는 만 2년 내에 교회를 세우고 다른 전도지로 이전하는 것이다. 전도회에서는 이번에는 아주 불량자들이 많은 시골 장터인 경남 하동군 진교리로 가도록 허락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서 진정한 기도의 재미를 맛보았으며 경험을 얻었다. 밤 2시, 혹은 3시 늦으면 4시 경에 일어나서 산에 올라가 숲 속에서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에 무슨 짐승이 나 오는 것 같아서 무서움으로 기도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성령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셔 주시마고 약속하신 말씀이 믿어졌다(마 28:20). 나는 바람 소리도,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도무지 육신의 감각이란 것을 모르고 오직 주님과 이야기 하기를 시작하면 그 시간이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동안 괴로운 줄도 모르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기도할 수 있게 되어, 그 기도하는 시간이 나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즐거운 시간이 되어졌다.
전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이 오고 나가는 것과 다른 사람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렇게 기도의 재미를 본 나는 일 외계로부터 오는 모든 것에 감각이 없어지고 오직 주님만 향하여 기도하는 데만 정신이 집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도가 되고 안됨을 나는 하등 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여 진실한 신자가 차차 많아졌다. 이는 정녕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확실하였다. 그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두 학기 앞두고 앞으로 교회로 나가 섬김에, 어찌하며 또한 어찌될까 함이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갈 때에 2,3년간은 아무 염려가 없도록 설교 준비가 되어 교회로 나가는데, 나는 설교 하나 준비없이 그대로인지라 할 수 없이 두 학기를 앞두고 새벽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토요일이 되면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 교회에 조사(助師)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있어서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로 가지 않고 조사로 가는 일은 별로 없는 일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사로 간 것 만큼 그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감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2개월 가량 지난 후에 그들이 자복하며 말하기를 “한 조사님은 옛날의 한 조사님이 아니고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생각하여도 설교나 기도에 있어서 전과는 다름을 느끼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크게 은혜를 받아 교회가 부흥되는데 새벽마다 은혜를 받으니, 형편상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은 늘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1년 중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기도회는 계속하였는데, 주께서 성령으로 친히 일하심을 알게 하여 주셨다. 그 후 나는 경남 마산에 있는 문창 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는데, 내가 가기 전에 그 교회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어떤 장로님이 사람을 내게 보내어 하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 공동 의회를 열어 가결이 되어 목사로 청하였으나 사실은 모든 청년들과 기타 유력한 직분자들 중에서는 환영하지 않으니 우리 교회로 오지 않는 것이 좋겠읍니다. 만일 우리 교회에 왔다가 배척을 당하면 교역 첫걸음이 되는 일 만큼 한 목사의 앞길이 막힐까 합니다. 또 우리 노회에서도 어떤 목사는 아직도 경험도 없고 유치한 사람이니 문창 교회 시무는 합당하지 않다고도 하는 등 의논이 많았읍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문창 교회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전지 전능하신 주께서 어떻게 하여서라도 가지 못하게 하시고, 만일 문창 교회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오면 내가 그 교회에 가서 배척을 당하여 쫓겨나며, 동시에 교역할 길이 막혀 세상 교회에서 버림을 당할지라도 이 희생을 달게 받겠나이다. 아버지여! 이 종의 희생을 돌아보지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 나니 의외에도 나를 오지 말라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말하던 장로님이 친히 와서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고, 꼭 우리 교회로 와야 될 것을 역설하며 또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노회에서 문창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의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이줄 알고 문창 교회 목사로 갔었다. 의외에도 첫 시간부터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 두 달이 지나메 청년들이 자복하며 ‘자기들이 목사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에 조사일 때보다도 지금 한 목사는 주님과 같이하는 생활을 매일매일 힘쓰고 있으며, 주님께서 같이하셔서 내 모든 것을 주장하심을 알지 못하고, 한 목사인 사람만을 보는 청년들의 하는 말인 것이다.
3. 환난의 시작
수년 전부터 일본 국가가 강요하던 신사참배 문제로 직접 교회와 마산 경찰서에서 마찰이 시작되었다. 지방 시골 교회에서 오는 조사님들의 말을 들으면 신사참배 하지 않는 자는 죽지 않을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어떤 조사님을 꿇어 앉혀 놓고 다리 사이에 큰 몽둥이를 넣어 한 시간 이상이나 있다가 그도 부족하여 순사 2명이 그 양단(兩端) 위에 올라 앉아 다리 뼈가 으스러지는지, 어찌되는지 감각이 없고 걸음도 못 걸을 지경에 이르게 한 후 집으로 보냈는데 치료한 후 겨우 불구자는 면하였다고 한다.
나의 고민은 차라리 죽어지면 오히려 다행이겠는데 만일 불구자가 되면 이 일을 어찌하나 함이었다. 이에 나는 기도하기를 “오, 주여! 이 몸을 드리나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불구자가 되어도 주님께 영광만 된다면 나는 이로써 만족하겠나이다. 전지 전능하신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데 하루는 마산 경찰서에서 마산 시내에 있는 각 교회 제직 전부를 불러 좌담회를 한다고 하였다. 우리 당회에서도 각 직원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경찰서장 이하 서원 전부와 시내 중등학교 교장(일본 사람)들도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경찰서장 간단히 취지 설명을 한 후 마산 중학교 교장이 미리부터 단단히 준비를 하여 가지고 와서 신사참배를 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 일장(一場) 연설을 하였다. 그 때 연설이 끝나자 서장이 나에게 신사참배의 가부를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들어갈 때부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 주심이 믿어졌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교장이나 서장이 말한 것에 대하여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힘있게 증거하였다. 이렇게 힘있게 증거하게 된 것은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 믿어졌던 까닭이었다. 그 자리에 낮았던 우리 믿는 형제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한 것은 한 목사가 너무도 강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하였은즉 오늘 한 목사는 크게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짐작하였던 까닭이다.
우리 믿는 형제들은 나를 동정해 마지 않았으며 한편 서원들은 서장의 명령 한 마디에 나를 검속할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장의 태도는 의외에도 나를 주목하여 보다가 서원들을 보면서 검속하지 말라는 뜻으로 도리질을 하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아-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은 진실로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었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무사히 나왔는데 같이 갔던 우리 형제들은 그 되어진 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다.
그후 마산 경찰서에서는 매일 나 혼자 불러서 갖은 곤난을 주었다. 그러는 중에 한가지 증거하고자 함은 신사참배를 못할 이유를 기록하여 달라고 하며 만일 그 신사참배 못할 이유가 합당치 못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위협한 것이다. 나는 기도하였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법관 앞에 설 때에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내가 말할 것을 주리라 하신 주님이시여! 이제 나에게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순간에 여섯 대지(大旨)로 신사참배 못할 이유가 환하게 알아지는데 그대로 기록하여 주었더니 서장이 나보고 “너 같으면 신사참배 못하겠다 나가라!”고 말하였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같이 계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점점 형세가 흉악하여 마침내 나는 문창 교회에 시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못하나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문창 교회에 있으므로 나 자신의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그 보다도 온 교회 교인들에게 갖은 고난을 주게 되는 것이었다. 혹 어떤 교우 중에서는 한 목사가 사임하였으면 좋겠다는 이도 있었다. 이는 교우들이 너무 괴로움을 당하는 까닭이었다.
4. 신사참배 반대 운동
떠나기 어려운 나 자신! 보내기 싫은 문창 교회 형제들 아- 가슴에 뭉친 한없는 한탄에서 말 못하고 흐르는 눈물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잊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부산으로 나와 일년이란 세월을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방법은 신사참배하는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에는 교인으로 하여금 출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며, 신사참배한 목사나 교인들에게는 인사도 아니하며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함을 교우들에게 보여주니,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참석하지 아니하며 신사참배한 사람과는 인사도 아니하고,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하는 교인이 차차 많게 되어 마침내 전국적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어느 주일 날 예배하는 순서에 따라 찬송도 하며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며 설교도 하여 모든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 축복 기도도 하여야겠는데 앞에 교인이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두손을 들어 우리 강산 교회를 향하여 축복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국교회가 장차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것을 기뻐하였다. 그 후 1939년 여름이었다. 부산 근처인 수영 해수욕장에서 몇 사람의 동지가 모여 수양하면서 기도하였다. 이 때가 우리 한국 교회 재건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도하던 중 한국 교회를 위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음을 깊이 느낀 것이다.
이 수양회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루는 문창 교회 김 두석(金斗石)이라는 여학교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이 되니 어떻게 해결할 방침이 없을까 함이었다. 나는 즉시 마산으로 가서 만나 보았으나 문제는 단순하지 못하였다. 여학교 선생으로 처녀인데 이 여선생의 받는 월급으로 늙은 어머니와 홀로 있는 오빠, 이 세 식구가 그날그날 생활하여 가는 것이다.
만일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선생으로 있을 수 없으니 3식구의 생활은 물론이고, 신사참배를 하려니 신앙 양심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요, 참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선생으로 봉직하려니 남자도 견디지 못하는 일을 처녀의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 예수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세 식구를 향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께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는데 그냥 내버려 두시겠읍니까? 모든 생활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학교 선생직을 사직할 수밖에 없읍니다”고 말이 떨어지자 늙으신 모친은 “나는 이대로 주림을 당하여 죽을지언정 신사참배하고 받는 월급으로 먹고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김 두석 선생은 쾌활하게 “나는 학교 일 보는 것 그만 두겠읍니다” 하며 이제 3식구의 생사 전부를 주님게 맡긴다는 기도로 그 밤을 나하고 네 사람이 혹은 울며 혹은 기뻐하며 지냈다. 이는 목사인 나 역시 생활의 앞길이 막연하였다.
그 후 김 두석 선생은 2년 동안 옥 중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활로 전 한국 신도에게 무언의 설교가 되었다. 동시에 그 오빠와 그 어머님, 아!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생활, 그 쓰라림의 사정을 누가 알 사람이 있으리오.(김두석 선생은 1991년 현재 제주도에 생존) 1939년 10월 경이었다. 내가 밀양군 마신리란 작은 시골 교회에 가서 2,3개월간 고요히 침묵하고 있을 때에 된 일 중에 한 가지를 증거하고자 한다. 이 작은 시골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1주일 전에 세례를 베풀 것과 성찬을 먹을 광고를 하고 그 주일 안에 세례 내용과 성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주일을 당하여,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는데 내 일생을 통하여 기도하던 중 그 때와 같이 어려움을 당한 경험은 나 자신 외에는 알 자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 어떻다고 말하여야 좋을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도가 되어 지지를 않는다는 것인데, 기도만이 안 된다는 것보다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무서운 세력이라 해야할지 형언할 수 없는 일을 당한 나는 견디다 못하여 산으로 도망하여 5일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경찰서에서 목사, 장로, 집사, 제직 전부를 호출하였다. 그리고 목사가 산으로 간 후 교우들은 철야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고 기도하여 많은 은혜를 받아서 성례를 거행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힘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직 전부가 경찰서에 갔었다. 사건은 신사불참배한 일인데 나에게 신사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라 하기에 나는 산에서 기도하고 온 것 만큼 힘이 있었으므로 열심으로 신사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는 중에 중지를 당하였다. 그리고 동행한 장로, 집사들에게 신사참배 가부를 물었으나 전부가 힘있게 반대하였다. 이상하게도 경관들이 힘을 잃어 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오늘은 그만 두고 수일 후에 교회로 가서 전 교인들 있는데서 신사참배에 대한 인식을 시킬 터이니 그리 알고 오늘은 다 돌아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무사히 돌아와 승리의 기도로 감사를 드리고 수일 후에 오겠다는 순사를 기다리면서 기도하였다. 하루는 정복 혹은 사복 입은 순사 4명이 그 이웃 동네에 있는 경방대원(警防隊員)인 청년 3,4명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둘러싸며 시위를 했다. 시골사람들은 큰 야단이 난 것처럼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불신자들은 교회가 당장에 없어지는 것같이 구경을 했다. 목사인 나에게 한 시간 이상이나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 장로를 불러서 말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니 “전에 한 목사가 오기 전에는 어찌하여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였느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전에는 너무 강제로 위협함에 부득이하여 하겠다고 하였지만 이제는 죽어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순사들은 목사와 장로에게는 실패한 줄 알고 교인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여 인식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순사들이 돌아가면서 “내일 아침에 목사와 장로는 경찰서로 오라”하고 가더니 이튼날 아침 일직 와서 하는 말이 “한 목사 오늘 어디로 갈 일이 없느냐”고 묻기에 그때 미리부터 부산에 가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산 갈 일이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순사들은 말하되 “그러면 부산으로 가라, 그리고 한 목사가 경찰서에 오지 않으니가 장로도 경찰서에 올 것 없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아! 진실로 우리와 같이 계셔주시는 주님은 어찌 이렇게도 권능을 베푸시는지! 성찬을 베풀려던 그 주일날에 기어이 산으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시고 온 교회로 하여금 또한 기도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받은 은혜로 이렇게 승리하게 하시니, 과거 기독교 역사 중 목사가 성찬을 베풀기로 준비한 주일에 교회를 비워두고 산으로 도피하였다는 것은 보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정신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지내고 보니 어찌 그리 하였던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는 참으로 찬송한다.
1939년 12월 경이었다. 경찰서에서 다시금 우리 교회 제직 전부를 호출하여 목사 장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2주일인 15일을 지나, 이 목사와 장로는 경찰의 수단과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자기들의 낙망에서인지는 모르나 우리들을 출옥시켰다. 그리하여 일반신자들은 우리를 의심하였다. 신사참배하기로 허락하지 않고는 결단코 2주일만에 출옥할 수 없다 하여 우리를 불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었던 밀양 경찰서 서원이 이를 증명하였다. 검속당한 지 2주일만이었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불러 인식을 시켜 보려고 할 때에 나는 기도하기를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내 연약함을 아시오니 이때에 주님께서 저를 돌보아 주시옵소서”하며 나는 전심으로 주님께로 향하였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주목하여 보더니 하는 말이“신사참배를 못하겠다 하니 만일 앞으로 다른 법에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하며 고등계 주임을 보고 출옥시키라는 것이었다. 장로님을 모시고 우리는 출옥하여 우리 교회를 향하여 돌아오는 도중에서 온 교우들이 나와 우리를 영접하여 주었다. 그 중에 한 젊은 여성도가 나에게 묻기를 “목사님 어떻게 되었읍니까?” 했다. 이는 ‘신사참배하기로 허락하고 출옥하십니까?’라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나는 “주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요, 주님만 신뢰하여라! 그러면 권능을 얻으리라”고 대답하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검속되었다가 2주일만에 무사히 출옥됨은 전국에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반 신자들이 우리를 의심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1939년 12월 경이었다. 이 인재 형님이 평양 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개학을 못하니 평양 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교수를 받고 있었다. 이때 어떤 청년이 와서 돈 4백원을 주면서 말하기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사용해주기를 바란다고 하기로 그 돈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상의하는 것이었다. 이 인재 형님은 부산 근처의 수영 해수욕장에서 같이 수양하며 기도하던 분이요, 신사참배 운동을 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 자유를 부르짖으며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을 하리라는 나의 중심을 아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이 인재 형과 같이 경남 각 지방 순회하며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각자 개인 신앙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실행할 조목은1.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 (이는 신사참배하는 목사가 그 교인을 인솔하여 가지고 수시로 신사참배하러 가기 때문이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3. 신사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아니할 것.(우리 개인 신앙 부흥 운동하는 일에 연보하여 도와주기 위한 까닭이다.4. 교회 출석 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드릴 것...... 등. 경남에 있어 분담하여 일할 구역은 부산 지방, 마산 지방, 진주 지방, 거창 지방, 통영 지방의 5구역으로 하여 각각 책임자를 세워 맡겼다. 그리고 서울, 평양으로 내왕하며 북한에도 신사참배 반대를 하며 개인 신앙 부흥 운동과 함께 연락을 취하였다. 이렇게 운동하며 다니던 중 가는 곳마다 모든 신도들이 크게 환영하여 주었다.
신사참배한 목사들 중에도 이 운동에 가입하는 목사도 있었고, 가입하지 아니하는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배척을 당할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 중에 한 가지 내가 담대하여 진 것은, 어느날 나는 마산에 있는 김 두석 여자 선생 집에서 자고 새벽 여섯시 경이나 되었을 때에 의외에 마산 경찰서 고등계 형사 한 사람이 와서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이 집에 없던 손님이 오지 아니 하였느냐?”고 묻는다. 나는 경찰서 고등계에서 와 묻는 줄 알았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니 무엇이 두려우리요? 나는 곧 나서면서 “예 제가 왔읍니다” “한 목사요?”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답을 하엿다. 물론 이 형사는 어떻게 알았는지 한 목사가 김 두석 선생 댁에 와서 자고 있는 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문답은 다시 계속 되었다. “한 목사 요사이 무엇 하느라고 이곳 저곳 다니느냐?”고 한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하러 다니노라. 그리고 이 반대 운동은 결단코 비밀로 하지 아니하겠노라. 왜 그런고 하니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다 하여 놓을지라도 또다시 당신들이 경찰의 힘으로 탄압을 할터이니 우리들의 운동이 무슨 효과가 있으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합법적으로 정부가 양해되도록 할 터이니 안심하시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잘 되느냐?” “물론 잘 됩니다.” 신자로서 누가 있는가 하였다.
나는 물론 금명일 간에 검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후 2,3개월이 되도록 검속하지 아니하였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신다.
5. 옥중생활
1940년 7월 3일이었다. 나는 경남 도경찰부(道警察部) 유치장에 구검이 되어 인생으로서는 차마 견디지 못할 어려움을 당하였다. 나는 그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의 전 생명을 맡기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우리 주님께서 나를 천당으로 데리고 가신다고 믿었다. 형사는 물론 나의 숨이 끊어지도록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향하여 다른 세계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얼굴은 태연하였다. 평화의 세계를 참으로 맛보았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나는 그때 맛보았다. 그 사랑은 샘 솟듯하였다. 나는 갖은 어려움을 당하며 나의 몸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주님께로부터 오는 한없는 그 사랑, 아- 나는 너무 감격에 넘쳐서 울었다. 내가 부산에서 검속된 지 수개월 동안 취조를 당하던 중 심문하는 조건은, 1)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 문제로 수개월 동안 당하였고, 2) 외국 선교사에게 돈을 받고 스파이 노릇을 하였다고 고초를 당하고, 3) 주님의 재림시 천년왕국 건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한국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일에 대하여 취조를 하는데 물론 어려움을 당하였고 다음으로는 외국 선교사에게 돈 받고 스파이 노릇을 하였다 함에 있어서도 물론 또 어려움을 당하였다. 만 1년을 지나 1941년 7월 10일에 평양으로 갔다.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주님의 은혜로 뜻하지 않게, 이미 순교를 당하신 주 기철 목사님이 갇혀 계신 방으로 들여 보내어 주었다. 나는 너무나도 반가왔으며 그 밤은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주 목사님과 모든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주 목사님과의 마지막 말씀이 될 것인 줄 나는 이미 각오한 바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두고 난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시고 다음 말씀을 하지 못하였다.
간수는 “주 목사님과 말씀 다 했지요” 했다. 부산과 다름 없는 평양 간수였다. 때에 주 목사님은 눈물에 잠기어 침묵하였다. 다음 날에는 검사의 간단한 심문이 있은 후 나는 평양 대동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서 약 일개월 반 가량 검속되어 있었다. 나는 오후마다 매일 열이 나기 시작하여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의사의 진찰을 요구하였으나 쉬이 출옥하려는 핑계로 진찰을 시켜 주지 아니한다. “오 주여! 뜻대로 하소서” 하는 기도가 매일매일 그날 그날의 나의 생활이었다. 1941년 8월 25일 경에 평양 형무소로 옮겨 가서 만 5년 이상 미결로 옥 중에서, 독방으로 혹은 감방에서 지냈다. 이제 형무소에서 체험한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일 몇가지를 증거하고자 한다. 형무소에 들어간 지 3일 만에 진찰을 받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27세 때에 오후마다 열이 나며 기침이 나므로 부산 철도 병원 내과 박사에게 진찰을 받은 결과, 의사는 상세한 이야기는 아니 하였으나 부산이나 기타 도시를 떠나서 공기 좋은 시골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그때 다행히 경남 여전도회 전도인으로서 교회 없는 곳에 가서 전도하기 시작하므로 병에 대하여는 잊어 버리고 지냈던 것이었다. 진찰한 의사는 전에 중병으로 고생한 일이 없느냐고 묻더니 벌써 알았다며 그날부터는 폐병 환자로 취급하여 폐병에 필요한 약을 주었다.
나는 낙망하였다. 폐병 환자로서 옥중에서 생명을 보존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6. 하늘의 음성
수일을 지낸 후 어느 날 밤에 잘 시간이 되어 누워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의외로 누가 나의 이름을 큰 음성으로 부름에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독방인 것 만큼 너무도 고요하였다. 나는 폐병 환자인 만큼 또한 고달파서 그대로 누웠으나 잠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밤이었다. 다시 공중에서 크게 나를 부른는데 이번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한 목사라고 부르는데 똑똑하고 확실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지시하시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달픈 몸이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밤인지 주께서 꿈 속에 나타나 나의 몸이 건강할 것을 보여주셨다. 옛날 사무엘을 부르시던 주님께서 지금 저와 같이 계셔주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 한국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여 주시는, 외국에 계신 부모 형제 자매여! 안심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님이 한국에도 살아 계셔서 친히 일하심이 확실합니다. 만 천하 형제여!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나이다. 나는 그때부터 의사의 친찰도 약 먹는 것도 다 그만 두었다. 의사와 간수는 염려하였다. 그 다음해 3월 경인지, 또다시 기침도 나며 담이 나오는데 피도 심하게 나왔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니 의사는 비웃었다. 그들을 본 나는 기도하였다. 주께서 또 나에게 결코 이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을 보여 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매일 진찰하고 약도 매일 먹었다. 그런 중에 의사가 나의 태도에 있어서 이상하게 본 것은, 모든 사람들은 병아닌 것도 병이라 하여 병보석(保釋)으로 출옥하여 보겠다고 별별 수단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의사가 나를 볼 때에 병은 중한데 한 번도 자신에게 병 보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함을 보고, 병세를 보아서는 보석으로 출옥을 시켜야 되겠는데 한 번이라도 자신에게 머리 숙이는 태도를 보이기만 하면 출옥시키려 했으나 최후까지 주님만 바라보는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의사는 나를 병실에 보낼 것인데 나의 태도로 보아서 하루라도 일찍 병보석으로 출옥시킬 심사로 매일매일 나의 입으로 자신에게 청원하여 나갈 수 있도록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간수는 내가 진찰하러 나갈 때마다 나에게 말하기를 “아무쪼록 의사에게 말을 잘하여 속히 집으로 나가 치료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 나의 전부를 맡기는 동시에 또한 보석되어 출옥함이 주님의 뜻이고 유익이 된다면 의사의 마음을 주님이 주장하사 출옥하게 하시라고 몇 번이나 말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의사가 친히 독방에 있는 나에게 와서 가장 친절히 하며 주사도 놓아주고 하여 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말을 아니 하려는 것보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나의 책임 문제이니 전국에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일으킨 일에 대하여 물론 다른 사람도 반대를 아니한 것은 아니로되 특히 내가 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전국뿐 아니라 만주에까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내가 가서 말한 곳에서 내 말을 들은 사람마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검속되었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며 계속 검속되고 있는 까닭에 다른 형제들은 옥중에 두고 나 혼자 나가 평안히 누워서 치료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또는 내가 검속되기 전에 각 교회에 다니면서 부탁한 말은 금일 가담한 이 문제에 있어 희생은 우리가 당할 터이니 아무쪼록 하나님게 기도만 하여 달라고 부탁한 것인데 이미 내가 희생을 당하겠다고 각오한 바이었고 또한 만일 우리가 출옥하게 되면 전국에 숨어 있는 형제들의 기도가 끊어지는 까닭이었다.
7. 기이한 현상
또 한가지 더욱 큰 문제는 주님께서 도저히 어떤 문제로든지 출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이에대한 나의 증거는 이러하다. 내가 병으로 인하여 오랫 동안 식사를 잘 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밤 잘 시간이 되어 누워 잠을 자려할 때 비몽사몽간이었다. 곳은 여전히 내가 갇혀있는 형무소 독방인 감방인데 언제나 감방에서 주는 그 밥을 받아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눈을 떠 보니 캄캄한지라 ‘아마 나의 신경이 약한 관계인가’하고 또 잠을 자려 하는데 두 번째 또 그와 같이 밥을 주는 것을 다 먹어 버렸다. 나는 여전히 예사로 생각하고 또다시 잠을 자려고 할 때 세 번째 또 그와 같이 주는 밥을 다 먹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이상히 생각 되었다. 네 번째 또 그렇게 주는 밥을 다 먹어 보았다. 그제야 나는 일어나 기도하기를 “주여! 내일은 식사에 대하여 주는 밥을 다 먹는 것이 주님의 뜻이오면 먹기가 어려울지라도 다 먹겠읍니다.”라고 기도하고 잤더니 그후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아니하였다.
그 다음 날이었다. 아침 밥, 점심 밥, 저녁 밥을 다 먹었다. 간수는 저녁식사 후 나의 감방 문을 열고 말하기를 “오늘은 밥을 다 먹은 것을 보니 병이 좀 나은 모양이로구나”하였다. 나는 “예, 괜찮습니다” 간수는 “아무래도 속히 출옥하여 치료하여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날 밤이었다. 주님은 나에게 말 할 수 없는 기이한 영광을 보여주시는데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께 순종하면 크신 영광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주님과 나의 관계는 세상이 알지 못하고 혹은 세상이 나를 향하여 신비가라고 할지 모르나 나와 같이 계셔주시는 주님께서 나의 전부를 주장하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 왜 식사에 대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는 그날 식사에 대하여 다 먹지는 못하는 것을 보아서 병보석으로 출옥시킬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출옥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이 사실을 세상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못하게 되어 진찰도 하여 주지 않고 약도 주지 않고 기타 정신적으로 나에게 무수히 고난을 주었다. 그러나 주님게서 보호하여 주심에는 승리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8. 최후의 각오
1942년 9월 경이었다. 예심 판사가 30명이나 되는 소위 공범자인 우리를 차례로 불러서 간단한 심문이 있은 후였다. 하루는 간수가 내게 와서 문을 열고 말하기를 “287번!” 하고 불렀다. 형무소에 있어서 나의 이름은 287번이었다. “3일 후에는 집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하면서 위로를 하여 주었다. 또 다른 간수들도 여러 사람이 와서 한 가지로 말하며 출옥하게 됨을 축하하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런 지 3일만이었다. 조반을 먹은 후 간수는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법정에 가서 예심 판사를 만나보고 밤에는 집으로 나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법정으로 가는 간수도 “오늘은 집으로 나간다”고 하면서 친절히 하여 주었다. 법정에 가서 예심 판사를 만났는데, 대단히 친절히 하여 주며 묻는 말이 ‘왜 예수를 믿었느냐?’ ‘신앙의 동기 또는 신학을 한 동기’ 등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성의가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국가를 위하여 힘써 달라는 말로 회유하고 그날 출옥시킬 예정인 것이다.
그리고 나도 출옥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나의 맘을 어둡게 만들어, 온 천지가 캄캄하여 이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도록 내 입을 막으시는 체험을 나만이 알 수 있었다. 검사는 다시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검사의 말이 목사로서 일본 국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너무도 의외의 대답이라고 하여 내가 능히 대답할 수 있는 정도로서 가르쳐 준다. 20분 가량이나 기다리다가 검사는 분이 발하여 하는 말이 “금일 우리 일본 청년들이 누구를 위하여 전지(戰地)에 나가서 죽느냐?” 하며 “바가 바가 바가” 수십 차례나 거듭하며 욕하는 말이 “이놈아 잘 묶였다. 잘 갇혔다. 이놈아 죽어라. 이놈아 썩어라” 하며 분이 나서 날뛰고, 법원 서기 역시 분이 나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그 문제는 다 해결이 되었는데 말 한마디 하지 못해서 출옥하지 못함이 심히 안타까와 하는 태도이었다.
나는 형무소로 돌아와서 그때부터 더욱 심한 고난을 당하였다. 전에 신사참배하지 못할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 주다시피 하시더니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 하겠다는 말은 기어코 하지 못하게 하심이었다(막10:10-20). 진실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여전히 그대로 변함없이 이루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나의 폐병은 날로 위중하여 형무소에서도 이 사람은 아무래도 살지 못할 사람인 줄 알고 있으며 나 역시 타계로 갈 줄 알고 몇 번이나 “오- 주여, 어서 데리고 가시옵소서 나의 한 날의 생활이 괴롭습니다”고 부르짖었다. 나의 마음은 뜨거웠다. 나는 주님 위하여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너무 감사하였다. 아- 나는 진실로 나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었다.
나는 밤마다 “오늘 밤이나 데리고 가실는지!” 하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주님은 다시 나에게 보여 주시었다. “결단코 너는 세상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믿었다. 의외에도 그 옥중에서 날이 갈수록 병이 물러갔다. 기침도 점점 없어지고 담도 차차 줄어지며 가슴의 괴로움도 차츰 없어졌다. 이것은 이적 중에도 큰 이적이다. 이때는 더우기 전쟁중 일본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때이다. 식료품은 짐승도 먹지 못할 것을 주는 때가 많았으며 그 방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웠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 병이 낫는다는 사실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이며 오직 주님의 능력만이 역사하신 것이다. 형무소에서 뿐 아니라 나의 폐병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을 부모 형제나 기타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은 다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병이 낫기를 시작하니 형무소 안에 있는 소장 이하 직원들은 자기 국가의 정체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이적을 시기하여 무한한 곤란을 주는 것이었다. 당한 곤란을 다 말할 수는 없으나 몇가지 예를 든다면 첫째, 식사에 대하여 미결에 있는 많은 사람의 밥을 가지고 와서 내 감방 문 앞에 놓고 내게 다 보인 후 그 중에서 제일 적은 밥을 골라서 내 방에 넣어주며 문을 탁 닫고는 자기에게 있는 감정을 다 풀어 나에게 보이며 어떻게 하여서라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하였다. 나는 병이 낫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식에 대하여는 얼마든지 먹고 싶었다. 이런 기회를 타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수개월 뿐만 아니라 수년을 이렇게 하니 나의 육체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남더니 나중에는 전신이 부어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사실은 형무소 안에 미결로 있는 사람이 다 이렇게 부은 것은 영양부족이 원인이라고 하겠지만, 유독히 이렇게 부은 것은 영양부족으로 혈약 순환이 잘 안 되어서 부었다고 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부어서 생명이 위태할 때에는 좀 더 먹여 부은 것이 좀 나아지면 다시 이 상태로 배를 곯리는 것이었다.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끔찍하고 잔인무도하였다. 그리고 시장함을 이용하여 고통을 주는 한 가지 예는 밥을 특별히 적게 먹인 후에 일본 사람들의 김치(다꾸앙) 매우 짠 것을 가장 사랑하고 동정하는 듯이 많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하던 차에 그것을 주는대로 먹어버리고 나면 다음 문제는 물을 먹고 싶으나 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을 좀 달라”고 하면 “오늘 우리 국민 중에 전지에 나가서 물이 없어 곤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건방지다”고 하면서 매를 때리는 것이었다.
여름 더위에 물을 마시고 싶은 것과 또는 여름 더운 때에 뜨거운 국을 끓여서 먹을 수 없는 것을 주면서 “그릇이 부족하니 속히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름에는 더위로 말미암아 피부병이 생기고 가을이 되면 그 아픔이란 것은 글로 나타내기 어렵다. 겨울이면 얼음덩이가 된 밥을 다 식어진 국물에 말아 먹고 나서 한 시간 이상은 참새 새끼처럼 벌벌 떨던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 나의 생명이 살아서 나온 것은 참으로 주님의 신기한 능력이요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9. 주님의 사랑
1942년 2월 경이었다. 옥 중에 있는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슬픈 소식이 들렸다. 즉 일본이 승리하여 싱가폴을 함락하였다고 하여 형무소 안에서는 만세 소리와 의기가 양양하였다.
이제 나는 이 땅 위에 살 곳이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의 가슴은 터질 듯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주님 앞에 엎드려서 “오- 주여, 오- 주님이시여!” 이 한 마디로 그치고 한없이 울었다.
아- 내가 참으로 한없는 슬픔과 고독 가운데서 나의 가슴이 쓰라린 것은 비할 곳이 없었다. 그때 비몽사몽이었다. 사람의 시체가 보이며 그 시체에서 벌레가 나오는데 그 벌레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 사실은 즉시로 해석이 되어지는데 시체는 일본이며, 벌레는 일본 군인들이요, 불이 나오는 것은 총질하는 일본 군인들의 전쟁하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전쟁에는 패전하게 하시고 복음으로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경륜을 생각할 때에 눈물로 감사하면서 “아-. 주님은 일본을 사랑하시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였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지극히 적은 일로부터 지극히 큰데까지였다.
1943년 겨울이었다. 북풍 한설에 독방에서의 옥중 생활이란 것은, 더우기 평양에 있어서 너무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철창 사이로 불어오는 무정한 바람! 살을 베는 듯이 올라오는 마루 사이의 바람! 어떤 날 창문 틈과 청마루 틈을 휴지로 막았는데 이것이 형무소에 범칙(犯則)이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밤중이었다. 잠이 들기 전 비몽사몽간에 나 자신이 형벌을 받고 있는데 두 손이 결박을 당하고 꿇어 앉아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나는 잠을 깨어 내 신경이 연약한 까닭인가? 하고 다시 잠을 자려할 때에 또다시 그와 같이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모양으로 두 번 세 번 보여주어 나로 하여금 깨달아 알 때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청마루 틈에 막았던 종이를 빼어 버렸다. 조반을 먹은 후 간수들이 검사할 시간이 되어 나 있는 방문을 열더니 간수들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하여 보기에 대단히 흉하였다. 이것은 수일 전에 창문 틈과 마루 틈을 막았던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고 상관에게 보고하여서 나를 처벌하려던 것이었다. 이 날 아침에는 상관의 명령에 의하여 처벌하려던 것인데 의외에도 막았던 종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자기들의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저희들끼리 고개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날 저녘에 간수가 나의 방문을 열고 하는 말이 “날시가 매우 춥다”고 하면서 나를 위로 한다. 나는 말하기를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고 견디기 어려워서 종이로 틈을 막았더니 잘못한 것이지요?” 하고 물어 보았더니 간수는 대답하기를 “물론 범칙이지마는 저녘에 막았다가 아침 검사하기 전에 빼버리면 상관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간수 눈을 속이는 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만일 검사할 때 빼야 하면 평시에도 막지 않아야지요” 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수일 전에 창문 틈을 막았던 종이를 상관들에게 보이고 처벌하려던 그 날에 어찌하여 빼어 버렸을까? 이것은 분명히 어떤 간수가 미리 알려준 것이라하여 그 전날 밤 당번인 간수들을 불러다가 엄격하게 심문한 모양이다. 그날부터는 한국인 간수를 나 있는 곳으로 보내지 않았고, 나는 출옥할 때까지 그 간수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처음 입옥할 때에는 성경을 허락하더니 얼마 후에는 성경을 다 거두어 가고 성경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통일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혹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였다.
김인선 조사님께서 내게 성경이 없는 줄 알고 비밀히 ‘요한 1,2,3서’를 간수가 보지 않는 기회를 이용하여 내 방에 던져 주었다. 나는 직감으로 “나에게는 비밀이 없노라”고 말하였던 일이 기억났다. 즉 어느 날 간수가 와서 내게 하는 말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말하고서 출옥하여 참배를 아니 할지라도 누군가 따라 다니면서 신사참배 하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렇게 수단적이 아니다.
만일 내가 형무소에 오기 전에 경찰서에서 신사참배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겠다고만 대답 하였더라도 아무 문제없이 이렇게 형무소에까지 들어오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양심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 하면서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노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비밀로 던져준 이 성경을 어떻게 하느냐? 가 나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을 보고 싶어 하였고, 또한 주님 앞에서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성경을 숨겨 가면서 간수의 눈을 피하여 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편 형무소에서는 어떻게 하여서라도 내 방에서 무슨 비밀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성경을 비밀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감방문을 열고 간수가 들어오므로 성경을 숨길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방석과 같이 사용하는 담요 속에 집어 넣고 기도하기를 “오- 주여, 저희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시어 보지도 못하고 또한 만져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옵소서, 만일 내가 망신하면 주님의 이름이 그릇될까 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검사를 당하였다.
이 날에도 주님께서 눈을 가리워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여 무사히 통과되었다. 10. 해방과 출옥 1944년 11월 경이었다. 독일이 망하였다는 정보를 들은 나는 이어서 일본이 망할 것을 알았다. 나는 출옥의 날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날마다 기다리게 되었다.
나는 이제 출옥한다면 수도원 같은 수양원을 만들어서 일본 정치 아래서 양심이 마비되어 타락한 목사들이 수양하여 한국 교회의 앞날을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며, 또한 신학교를 설립하여서 진리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할 전도인을 기르며 또한 전도하여 이 나라를 기독교국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수개월 전부터 기도하였다. 다시 말하면,
1. 수양원을 설립하여 일본 정치하에 타락된 목사들을 수양할 것.
2. 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서 한국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할 목사를 양성할 것.
3. 전도인들을 길러서 교회를 설립할 것.
마침내 한국 민족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을 맞이하고 8월 17일에 나는 출옥되었다. 과거 5년 간의 옥중 생활을 묵묵히 회고하여 볼 때 그 생활 전부가 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추호도 없다. 진실로 주님은 살아계셔서 나의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고 계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하였다. 오- 땅위에서 주를 믿고 성도의 생애를 걷고 있는 형제여! 안심하라 주님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느니라. 나는 병으로 인하여 눕기 전에는 끊임없이 힘 미치는 데까지 한국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겠다는 일편단심에 불타고 있다. 하루도 아직 휴양이라고는 해 보지 못했다.
나는 출옥 당시에는 걸음도 잘 걷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건강하다. 이것 역시 주님의 은혜이다. 나의 폐병을 나는 사람, 내가 사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나의 체험 전부가 아니요, 대략 기록한 것 뿐이다. 지금 나의 사업은 한국 교회의 재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재건 운동이란 과거 일본 정치하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도 생활과 동시에 선지자격으로 외치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줄 수 있는 목사를 양성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각처에 전도인을 파송하려는 것이 나의 몇가지 사업이며, 이 사업을 위하여 나의 일생을 바치려 함은 오늘 우리 대한 민족은 아무리 하여도 주님의 복음이 아니면 살길이 없는 까닭이다. 만 천하 형제여! 기도로 물질로 동정을 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