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자랑하라
갈라디아서 6:14
<십자가 갤러리>를 개관하고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다. 축하드린다. 감사드린다. 십자가가 이곳에 있는 동안 주인의 심정으로 열심히 사랑해 주시길 바란다.
십자가를 전시할 때마다 늘 받는 질문이 있다.
“제일 비싼 것이 어느 거냐?” (의도가 궁금하다)
“가장 비싼 것은 얼마쯤 하냐?” (참 용기가 있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카드를 긁고, 지갑을 비웠을 뿐인데, 하나님이 채워주셨다.
1994년부터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2005년 사순절부터 ‘세계의 십자가 전’을 열었다. 지금까지 13차례. 그때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미처 몰랐다.
첫 전시회 때, 인터텟 포털 사이트 <다음> 첫 화면에 이틀 간 떴다. 기자들에게 제공한 십자가 사진 10점이 반복하여 소개되었다.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
나는 댓글을 읽어보고 크게 흥분도 하고, 또 적잖이 실망하였다. 절반은 “대단해요”, “십자가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 등 감탄사인데, 나머지 절반쯤은 기독교에 대한 힐난과 트집이었다.
그때 배웠고, 또 깨달았다.
십자가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진실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교회,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자랑해야 할 것이다.
독일에 살 때에.. 벼룩시장을 기웃거리다가 CD 케이스 크기만한 타일조각 하나를 발견하였다. 하얀 타일에 검은색으로 또렷하게 인쇄된 세 단어.. “Das Reich Komme”즉 주기도문의 한 구절, “나라가 임하시오며”였다. 눈에 확 뜨이더라.
그 타일조각은 정말 눈부셨다. 많아야 한 5 마르크(3천원)면 되겠지 싶었는데, 놀랍게도 200 마르크(10만원)를 불렀다. 아마 내가 외국인이니까 얕잡아 보고, 겁 없이 값을 불렀던 모양이다. 몇 번 더 깎으려고 했지만 주인의 태도는 꿈쩍도 안했다. 결국 포기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구입을 못하니 좀 분하더라.. 그래서 마음을 삭히고 혼잣말로 이렇게 위로하였다.
“그럼 그렇지!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싸구려 취급을 받으면 되겠나!”
그렇다. 십자가는, 십자가의 삶은 결코 싸구려 취급을 받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두 개의 십자가가 있다. 내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 늘 비교하며 사랑하며, 자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유일한 자랑은 오직 십자가 뿐이다.
그는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였다.
두 가지 의미에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6:14a).
여기에서 “세상”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에서 “육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세상이나 육체에 따라 살아가던 실패한 옛 생활 방식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6:14b). 마침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나로 하여금 실패한 옛 생활방식을 버리게 하고, 새로 지음 받은 새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그 십자가는 무엇인가?
1) 골고다의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이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해마다 반복하는 고난주간 수난예식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인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흥미로운 일은 그는 여러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렘브란트는 순교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사람으로, 빌라도의 재판에서 소리를 지르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는 탕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듯 하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나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 악역의 자리에 서 있어야할 사람이다. 비로소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골고다 십자가 사건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바로 고난과 영광이란 모순과 역설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2) 골고다의 십자가는 자랑할 만한 사건이다.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명패를 달면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NRI)라고 썼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요 19:20).
당시 지방어뿐 아니라 세계화된 언어들로 이 사건은 소개된 셈이다. 매우 국제화된 사건이었다. 우리는 이 여러 가지 언어 속에서 저 마다 다른 이해관계를 읽을 수 있다.
로마 통치자들은 로마시민 아닌 사람과 노예에 대한 처형 방식으로 십자가형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몸서리쳐지는 가장 잔혹한 처형방식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가 이제는 자랑이요,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사실 십자가를 보는 사람마다 자기 눈으로 이해한다.
어떤 경우, 아픔이나 대속의 신비는 사라진 채 십자가가 값싼 부적으로 취급받기도 하였다.
초대교회인 2세기 무렵, 십자가의 효험에 대한 소문이 커졌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니면 만사형통 할테니 그 조각이라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진품명품을 자랑하고, 작퉁들조차 매매 되었다.
얼마나 극성스러웠든지,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우려하였다.
“그리스도가 매달리셨다고 주장하는 십자가를 다 모으면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십자가를 통해 전해진 메시지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소식인가?
아픔조차 얼마나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난으로 가득한 슬픔조차 얼마나 진정한 기쁨의 노래를 담고 있는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경험할 수 있었다.
수원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본부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목적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고..
하루는 심방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어. 밥을 먹으며 아내에게 오는 월요일에 천안에서 손님이 오니 특별히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대뜸 못하겠다는거야.
당연히 화가 났지. 아니 그럼 손님을 앉혀놓고 나더러 밥을 하란 말이야? 세상에.. 화가 나니 목소리가 높아지더군.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그러다가 들어가 잠을 청했지.
씩씩 거리는데 잠이 와야지.. 누워서 주님께 물었어.
“주님! 제가 아내와 싸워 졌습니다. 우리 집사람 쎈 것 아시죠? 이럴 땐 어떻게 좀 해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안다. 하지만 나도 네 아내에게 진다.”
“예?”
“내가 너에겐 이기는 줄 아느냐? 나는 너에게도 진다. 이 땅 모든 사람에게 졌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거야. 그래서 나를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지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내 제자가 되는 권한을 준거야.”
“아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이 그 내용이군요.”
“그래 맞다”
“그럼, 이 말씀을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대신, 자기 부인하고 싸움에서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로 읽어도 되겠습니까?”
“미안하다. 나도 부인하고 싸워봤어야 네 제안을 이해 할텐데.. 미안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친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십자가는 ‘남에게 지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선택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한 방식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려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라고..
이기려니까 십자가고 뭐고, 목소리를 높이고, 흥분하고, 씩씩거리는 것이 아닐까?
날마다 예수님처럼 지고 살고, 비난 받고 살고, 죽음으로써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늘 이기는 방법만 찾았던 것이다.
십자가를 자랑하라!
내 옛 사람을 지워버린 그 십자가를.. 나로 새 사람을 살게 하신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아니다. 날마다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믿음의 원리’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고난주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누가복음에는 “날마다”가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는 어쩌다 한번 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반복해서 행해야할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든 십자가의 전문가이다. 포기함으로써 얻게 될 것이다. 죽음으로써 부활 할 것이다.
여러분 모두 그런 참된 십자가 전문가의 삶을 살기를 축원드린다.
첫댓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