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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불교인이본 기독교 등록일 2008.07.20 07:43:32
글쓴이 : 임기명(lkm9338) 조회수 129 추천수 4
이 글은 서기 1992년 6월 13일에 서울의 서강대 종교. 신학연구 소에서 윤호진 교수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님께서 '불교인이 본 기독교' 란 제목으로 강연한 원고입니다.
목차
1. 서론
2. 신의 창조문제
3. 구세주로서의 예수
4. 기독교의 사랑
5. 예수의 기적과 부활
6. 결론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서론
언제인가 한 기독교 친구는 나에게 "너는 기독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지나가는 이야기로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글로 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종교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청탁 받았을 때 선뜻 승낙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라는 문제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와 불교의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종교 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럴 수 없는 벽을 서로가 확실하게 아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에 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일지라도 불교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에게 신(神)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불교인들은 교리적으로 <절대자(神)>의 존재를 받아 들 일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신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주어 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와 같은 신의 개념에는 도달 시킬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 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교인이 기독교와 접하면서(특히 기독경이나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 는 것을 그대로 말해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 글을 가능한대 로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듣기 거북하고 또 충격을 줄 수 있는 표현이라 해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인이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신의 창조문제
신의 창조문제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문제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 하는가 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문제 역시 문제로 제기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불교인들이 구약경의 창세기를 읽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나타날 리가 없다. 일종의 신화, 또는 동화와 같은 것으로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주의 중심도 아닐 뿐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세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태양계(지구가 아니고)같은 것이 1,000개 모여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이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 다시 이 중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우주 소천세계(小千世界)-태양계 중천세계(中千世界)-소천세계 1000 대천세계(大千世界)-중천세계 1000 그러므로 이 대천세계는 우리 태양계 같은 것이 100억 개 이상 모인 것을 가리킨다. 우주에는 이와 같은 대천세계가 역시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들은 어떤 에너지(業力)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가(成), 그런 상태로 유지되다가 (住), 그리고 파괴되어 (壞), 원자상태로 분해 된다 (空).
∞∞∞ 業力--->成 ▼住▼壞 ▼空 ∞∞∞
이와 같은 성, 주, 괴, 공 의 운동은 끝없는 시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생(生)과 멸(滅)을 되풀이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인들에게 구약경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창조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불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인들은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을 읽으면서 신의 인간창조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심한 반발을 느끼게 된다. 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신의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신의 무지(無知),무능(無能),무자비(無慈悲),독선(獨善) 같은 것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저지른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인해 신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들도 한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아담 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나무 (그것이 상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신이 진정으로 그의 자식과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장래를 생각했다면 그런 나무는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고, 그 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어 부득불 만들었다면 일이 잘못되고 난 뒤에 한 것처럼, 미리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 에 접근하지 못하게 무슨 장치를 설치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먹었다 하더라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옳고 그름>(선악)조차도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 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신 자신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곁에 위험한 농약병을 두었다가 아기가 그 농약 을 마시고 탈이 났을 경우 그 부모는 어린애를 벌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농약 병을 아기 곁에 둔 그 부주의에 대해 그들 자신이 책임을 느낀다. 에덴동산 이후의 일들도 비슷하다.
신이 미리부터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신은 전지한 존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거나 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전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전능)존재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자기의 창조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후에도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신 자신도 그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한 뒤 곧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들을 홍수로 모조리 쓸어버리거나, 유황불로 태워 버리거나, 또는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고대의 수메르 지역의 전설신화였다.) 구약에서는 신이 그의 피조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싸움을 하느라 고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을 읽으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신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 사랑 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은, 앞뒤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편애, 자기일 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잘못을 저지를 때는 가차 없이 벌 을 주는 무자비, 독재적이고 폭군적이고, 옹고집장이 노인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신상(神像)으로부터, 어떻게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불교인들에게 기독교는 최소한의 감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로 넌센스다.)
3.구세주로서의 예수
구세주로서의 예수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자가 보내었다는 구세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구세주론 같은 교리는 유대교가 아닌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등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붇다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신이 보낸 메시아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뒤 3일 후에 부활 했는가>라는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문제로 제기조차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기독경속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활동이나 그것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 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하기 까지 한다.불교인들은 기독경을 읽으면서, 그 자신들만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경 자체내에서도 그를 신이 보낸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예수를 <무염잉태(無染孕胎)>했다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 형제들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가 고향에서 가르치자 그들은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미쳤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까지 했음을 본다. (마가복음 3:21)예수와 오랜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사람들도 그를 <고작 집나간 목수의 아들 정도로 보았을 뿐 구세주와 같은 존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마가복음 3:21절에서 예수의 모친이나 형제들은 '우리 예수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니 붙잡으러 왔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에서의 거의 모든 행동이나 여러 말들을 구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그는 자신이 구세주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거나 정신병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오랜 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유대신이 보낼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진정으로 구세주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리 완고하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구세주로서의 품격과 관계없이 무조건 죽어야 하는 운명적 배우역할을 해야 할 숙명이라면 이는 대단히 미신적인 운명론이 된다.
유다도 그의 뜻과 상관없이 스승을 팔고 배가 터져 창자가 쏟아져 죽을 운명이라면 이런 운명론은 하찮은 무속의 운명론보다 유치하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던 것은 예수가 <사기꾼, 신성 모독자>으로서 그들의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사기꾼을 처단하는 것이 신을 더 잘 섬기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예수가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 주고 가르쳤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가 하면, 어떤 제자는 부활한 예수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지 못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확인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 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겁함과, <빈무덤>앞에서 보인 그들의 반응에서도 그들이 예수의 존재를 얼마나 믿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제자들은 두고서라도 당사자인 예수 그 자신조차도,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던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예수가 죽는 순간까지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고 하니 그 순간까지 자신도 구세주로서의 확신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가, 그리고 죽으면 삼일 후에 부활되어 유대신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하고, 또한 절망했을까.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단종애사 속의 사육신들의 의연한 죽음이나 스님 네들의 죽는지도 모르는 좌탈입망들이나 신앙인들의 순교,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애국지사들이나, 그 밖의 초연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수많은 예들과 비교해보라.)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두려움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하고,그가 이 지상에 오기 전에 이미 예정된 그 죽음 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이 (죽음 의)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제발 살려 주이소!)라고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다가, 끝내는 <나의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망해 버리고 만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이 여러 정황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그저 부활한다는 장면에 압도당하는 면이 있다. 십자가 죽움, 부활, 심판...같은 교리는 기독교 이전에 이집트, 그리스, 소아시아, 조로아스터교... 등등에 범람했던 믿음이었다.)이와 같은 사실들은 예수 자신이 부활도, 메시아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은 기독경을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것이다.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은, 인류 역사상에서 보통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상 또 는 신의 등의 이유로 죽게 되었을 때 보여주는 그 떳떳한 모습과 비교가 된다. 우리들 가까이에서 예를 들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의사, 사상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데도 예수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히 죽음 앞에 섰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기 전의 채찍질 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끔직한 고통이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그 피흘림을 기독교인들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타의에 의한 것같이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와 같은 일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신의 뜻이었지 예수 자신의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타의에 의한 죽음이 그렇게 위대한 죽음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인류사에 있어서 그 정도의 죽음은 흔해빠진 것이었다. (고문당하다가 십자가에 죽은 사형수는 고대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예수의 존재는 신의 <인류구원>이라는 시나리오에 출연한 <배우>, 또는 그의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 같이 보인다. 거의 모든 중요한 사건에 대해, <구약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유대신의 <배우>,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 했다면 예수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로서, 또는 심부름꾼으로 서는, 아무리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 만의 공로뿐일 것이다. 아니면 예수의 위대성이 그의 가르침의 내용에 있다는 것인가,
짧은 기간(고작 1년 남짓)의 그의 활동 에 있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는 신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위대성을 그가 행한 활동에서 보아야 한다면, 예수가 인류역사상의 위대한 종교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특출한 종교적인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모습이 인류 역사상에서 전혀 위대한 존재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상에 파견한 구세주라는 말은 불교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불가사이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경속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와 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이나 교리, 교세를 세울만한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다. 로마의 정치적 역할이 대단히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4.기독교의 사랑
기독교의 사랑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위대한 종교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 등에서도 증오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기독교만을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보다 특별하게 뛰어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편협하고 왜소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그대로 자기와 가까운 <이웃에 대한>, <이웃만의>사랑같이 보인다.
(구약경이나 신약경 속의 사랑은 단언 컨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구별하는 코드로서의 사랑임에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구약경과 신약경 속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구원관에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라.) 먼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다. 독선적이고, 편애 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구약경 속에서 야훼의 모습은 창세기에서 말라기 까지 거의 전체적으로 유대인들만을 위한 신, 조금의 잘못도 용서 없이 무자비하게 갓난아이까지 도륙하는 신이다.)
에덴동산에서 신이 인간에게 했던 첫 행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혹한 <시험>이었다. 우리 같은 보통 인간이라 해도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그와 같은 치명적인 시험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사랑 그 자체>라고 하는 신이 그렇게 무자비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선악과나무의 시험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서 우리는 신의 성격과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일에서도 우리는 신의 지독한 편애, 유혈이 낭자한 무자비를 볼 수 있을 뿐, 거기에서 사랑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그 뒤에 일어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서 어떻게 아브라함 가족만을 골라 그 자손들과만 계약을 맺고 그들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구약의 신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무서워하고, 존경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조차도 항상 유치하고 무자비한 시험(예를 들면 이삭을 제 물로 요구하는 따위)을 내린다. 그들이 신의 말을 잘 따를 때만 약간씩 도와준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하면, <너와 네 식구들을 죽이겠다>, 또는 <나는 그 도읍과 그 주민들을 송두리째 파멸에 넘겨 버리겠다.
비록 한 집에 열 사람이 살아남는다 해도 기어이 그들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라고 무자비하게 위협한다. 위협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에게 가차 없는 벌을 내리곤 한다. 구약에서의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교육하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같은 모습의 신이 아니라, 피조물들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공갈협박을 하고, 그들과의 싸움에 힘겨워하고 피곤해 하는 형편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유대신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의 적대감, 분노, 질투, 무자비한 형벌을 볼 수 있을 뿐이다.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에 대한 편애는 볼 수 있어도 인류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볼 수가 없다.
(유대인이 구약시대에 만든 신 야훼라는 것은 사실상 유대민족 사회의 유지 보호만을 위해 주위의 여러 신의 특징을 간추려 만든 신앙을 빙자한 정치적 임시방편적인 관념이다. 당시의 어느 유목민들이거나 이러한 신을 빙자한 정치적 부족 국가적 단속요인이 필요했다.) 신이 인류구제를 위해 그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지상에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게 한 것을 기독교인들은 신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인들에게는 그것은 사랑의 행위 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의 입장에서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신의 독선처럼 보인다. 에덴동산에서 했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시험처럼 보인다. 신이 인간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었다면 인간들에게 신의 독생자의 피를 손에 묻히게 하는 그런 시나리오는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그의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구상했던 것이 그와 같은 피비린 내나는 사건과 이상야릇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활>과 같은 방법이어야 했단 말인가. (부활이라는 고대 타종교의 코드를 통해서 급진파 유대교도들이 유대교를 개혁한 것이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푼 지극한 사랑의 행위였다는 말인가.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불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이와 같은 유대신의 행위와 모습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야훼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신약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행위와 그 가르침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느낌과 반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몇몇에 대한 사랑> 또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라는,
<받고 주는 사랑> 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에 비해, 불교는 인간은 물론 동물과 하찮은 벌레, 한포기의 풀과 한줌의 흙까지 사랑하라는 대단히 상상하기 힘든 포괄적인 사랑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구약경에서는 인간들이 자연을 정복하고 번창하고 지배하라고 신이 멍하게 명령하고 있다.) 예수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뿐이었다. (예수는 그의 의견과 반대되는 제사장, 율사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기득권층...등에게는 독사의 자식, 지옥의 이미 떨어진 자들, 위선자들..이라며 극도의 적대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이분법적 적대감이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예수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의 대리자로서 전 인류를 구제하러 왔다고 한다면 어느 계층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어느 의미 에서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병들고 가난하고 핍박받은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서 구제받기 쉬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반대했던 제사장들, 율사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 그리고 권력층의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착한 제자가 아니라 유다와 같은 악한 제자였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 번을 일곱 번 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면서도, 그 자신의 반대자들에게는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이 보인다. 처음부터 그들은 극도로 적대시하고 <원수>로 대했었다. 제자들에게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예수는 자신의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한 일은 볼 수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들...등등의 험한 욕설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제자들을 거부하는 동네에서는 발의 먼지도 털어버리고 저주하며 돌아서라고 하고 칼도 사서 차고 다니라고 한다.)그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막상 예수 자신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에게는 어떻게 했는가.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만류하고 설득하려 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저주하고, <네가 하려는 짓을 어서 하라>고 부추기까지 했다.
(기독경을 통채적으로 보건데 정말 고등종교로서의 품격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보아온 구약에서의 유대신의 사랑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범인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반대자, 원수, 또는 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 자기편,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기편이 아닐 때는 배척하고 증오하고 복수했다. 배타적인 사랑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사랑은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게 한 근본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편협하고 증오와 끼리끼리만의 코드로 똘똘 뭉친 기독교가 지난 2,000년간, 그리고 현재까지 어디에서나 분쟁과 전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세아 등에서 기독교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두 싸움이 있었고, 문화를 다 파괴하고 피를 흘렸거나 흘리게 했다. 그것은 기독경에서 볼 수 있는 그 와 같은 철저한 <배타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는 많은 피를 흘렸다. 이것도 같은 원인에 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이처럼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기독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대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이 왜소하고, 편애 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처럼 말해지고, 또한 그렇게 행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어이없어해 하는 것이다.
5. 예수의 기적과 부활
<그때 세존(붓다)께서는 물 위로 걸어 다니시는데 발이 물에 젖지 않으셨다. 카아샤파는 멀리서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문(沙門,수도자)은 물위로 다니는 구나'>(증일 15,2) <난다는 곧 그것(한 덩어리의 떡)을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바쳤다. 그래도 떡은 남았다. 난다는 사뢰었다. '아직 떡이 남았나이다.' ...그때 세존께 서는 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 떡을 가지고 여승들, 남자 신도들, 여자신도들에게 주어라.' 그런데 여전히 떡은 남았다. '너는 이 떡을 가져다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그래도 떡은 남았다.>(증일 20,28) 이것을 읽으면서 기독교인들은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기독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거의 똑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기적)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는 그들의 교주나 성인들과 관련된 이와 비슷한 기적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종교에서 그들의 교주가 행한 기적만이 참된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들은 가짜라 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들이 모두 가짜이거나, 아니면 모두 진짜여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말한다면 기독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기적만이 <진짜 기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행한 기적만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의 기적이라는 모든 행위가 기독교 이전의 당시 여러 종교나 신화와 불경에 그대로 존재하는데 이는 기독교가 이런 주위 여러 종교의 기적 이야기들을 기록에서 편집해 삽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설사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인들에게는 그 기적 이야기들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 파견한 존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해준다든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몰아내 준다든지, 몇 덩어리의 빵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였다든지, 물 위로 걸었다든지 하는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앙징스럽고 유치한 기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유대신의 대행자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왜소하게, 또한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할 뿐이다. 예수의 부활문제에 대해서도 기적에서와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부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종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모두 가짜이고 예수 의 부활만이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만약 다른 종교의 부활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부활이 가능한 것이 되므로 예수의 부활은 별 의미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 부활사건은 기독경 그 자체의 기록에 의해서 보더라도 별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두고라도 예수를 직접 따라다니면서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수 없이 보았고 죽은 후 삼일만 에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를 몇 번이나 받았던 제자들조차도 <빈 무덤>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리고 유대신 야훼의 선민으로서 메시아가 올 것을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예수가 부활 운운한 것을 <고약한 사기>라고 보고, 그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묘지를 단단히 지키게 한 사실 등에서도 그 사건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허황되게 보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하나의 희화(코메디)처럼 보일 뿐이다. 부활사건 자체의 역사성 여부는 두고라도,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불교인들에게 신이 그의 대리자를 지상에 파견하고,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그를 되 살려주었다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하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불교인이 놀라는 일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일들이 아니라, 이와 같은 보잘 것 없고 허황한 사건들이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 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심각하게 부실한 근거로 세계역사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는 원인은 헬라 그리스의 엄청난 문화 영향력, 로마의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 영국. 미국의 대단한 국력과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에 반대해 일어선 르네상스운동, 산업혁명과 과학 부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의 영향력이 역사에서 점점 축소되면서 기독교도 쇠퇴일로에 들어섰고 과학과 인권운동의 힘은 오히려 부실한 기독교의 황당한 미신적 교리를 거의 대부분 파괴하고 말았다.)
6.결론
결론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가 이룬 업적,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여러 가지 활동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또 기독교로부터 많은 것 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접할 때는 지금 까지 보아온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뿐만 아니라 거부반응까지 가지게 된다. (불교는 대단히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간적인 교리의 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서는 오히려 서양에서 폭발적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기독교의 대단히 유치하고 황당한 미신적 콘텐츠에 대해 무관심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추세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막상 좀 더 가까이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대하면서 놀랐던 것은, 불교인들 에게는 기독교 교리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특정 종교에 대한 감정의 문제라든지, 편견, 몰이해와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보다 근본 적인 이유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붉은 안경을 낀 사람에게는 세상이 붉게 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붉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푸른 안경을 낀 사람의 설명이 통할 리가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의 관점이 더 옳은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불교의 교리가 <진짜>이고, 기독교의 것이 <가짜>라든지,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가 참된 것이고, 불교의 것이 엉터리라고 주장해 보아야 아무런 해결도 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익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한 종교에 대해 확고한 입장에 서 있을 때는, 다른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해 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이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의 이해>라는 것은, 붉은 안경을 끼고 세계를 붉게 보거나, 푸른 안경을 끼고 세계를 푸르게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글의 시작 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 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렇게 할 수 없는 벽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기독교가 기독교 자체의 이분법적이고 유치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신앙적 성격을 뼈를 깎는 각오로 스스로 여과해 타 종교나 문화를 괴멸시키려고 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면서 모든 이웃 종교를 무너뜨리고 기독교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상명령이요, 신앙의 이유요, 교회의 존재 가치(-땅 끝까지 선교, 이슬람, 불교 지역에도 공격적 선교-)라고 하는 그 파멸적인 오만함을 버린다면 국가와 사회에서 그들만의 신앙으로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고, 타 종교인들이나 사회에 큰 근심거리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미트라(Mithras)는 고대 아리아인의 남신(男神)으로 빛, 진실, 맹약(盟約)을 관장했다.
BC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인 '리그베다'는 미트라의 이름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에서는 미트라(Mithra)라고 불리며, '미트라 찬가'에서 '죽음에서의 구세주','축복을 주는 자','승리자','전사(戰士)','목장(牧場)의 주인' 등으로 불렸다.
미트라의 기원에 관해서는 조로아스터교 보다도 더 오래된 고래 아리아인의 토속신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로마에 미트라교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을 무렵 이 종교는 페르시아의 조르아스터교의 영향 아래 진실과 빛의 신으로 되어 있었고, 최고의 창조신인 아후라 마즈다 신성(神性)의 한 분신으로 등장했다. 미트라는 아케메네스, 아르사케스, 사산왕조 등에서 왕조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그것이 로마제국에서는 밀의종교(密儀宗敎)로 크게 유행을 떨쳤다. 두산세계대백과는 미트라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BC 1세기 전반 그리스도교의 유럽 침투 이전에 로마제국(帝國)에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새 종교인 그리스도교와는 유력한 경쟁적 종교였다. 미트라의 기원은 고대인도, 이란의 민족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발전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자연히 로마로 전파되어 밀의종교로서 특히 군인층에 널리 신앙되었다.
미트라교에 대해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의 비문(碑文)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로마에 나타났던 종교 형태는 이미 그 내용이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소(小)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토착종교와 혼성(混成)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BC 106∼BC 48)황제의 동정(東征)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그리스도교로 개종(改宗)을 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점차 모습이 사라져 갔다. 신자의 제례는 종종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바위굴 안에서 행해졌는데, 그 깊숙한 곳 암벽에는 '수소를 도살하는 신'의 부조(浮彫)를 볼 수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그리스도교도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미트라교 (Mithraism)항목]
미트라의 비밀이 흥미로운 것은 그 종교가 기독교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공통점들 때문이다. 미트라의 전승은 기독교의 것에 비해 적어도 600년은 앞서고 있으며, 초대 기독교와 같은 시기에 번성했다. 그러나 AD 5세기에 이르면 기독교가 힘을 얻자, 미트라교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무자비하게 응징한다. 기독교는 미트라교의 추종자들을 자신들에게 편입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수많은 미트라에움들을 교회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많은 로마 교회들, 특히 로마의 성 클레멘타인 교회의 지하의 아치형 매장 토굴은 이것이 미트라에움들 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미트라 신전에 건조되었던 우상(偶像)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 많이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건조물을 포함한 종교적 유적은 현재 유럽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의 미트라 솔 인빅투스의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아래 예수는 솔 인빅투스와 동화 되어 버렸다. 심지어 카톨릭의 교황이나 주교들이 대관식이나 미사 때 쓰는 큰 모자의 이름은 '미트라'(Mitra)이다! (이 모자의 한글이름은 '주교관'이다)
미트라는 아래의 특징을 예수와 공유하고 있다.
① 미트라는 12월 25일에 태어났다.
② 미트라는 동굴, 바위, 처녀 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③ 미트라를 기리는 거룩한 主의 날은 즉 일요일(sunday)이었다.
④ 미트라는 천궁의 12궁도에 해당되는 제자를 거느렸다.
⑤ 미트라 교도들은 그가 부활한 날에 축제를 베풀었는데, 그 날은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서 춘분축제 였으며, 나중에 기독교의 부활절이 되었다.
⑥ 미트라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미트라 성 삼위일체설을 형성하였다.
⑦ 전투를 끝낸 미트라는 무덤에 들어갔으며 3일 후에 다시 일어났다.
⑧ 미트라는 소와 관련이 있으며 '목장의 주인'(목자)으로 불렸다.
최근에 20~30 명이 들어 설 수 있는 지하 동굴들이 이탈리아를 포함해서 북쪽으로는 영국, 남쪽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 했던 곳 에서는 어김없이 발견되는 이 동굴들에는 이상한 인물과 장면을 묘사 하는 그림과 유물들이 공통적으로 발견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동굴들이 미트라교의 예배 장소임을 밝혀내었다. 이 미트라 숭배의 흔적이 발견된 지역은 영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이란, 알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부 아프리카 등이다.
밀교였던 관계로 그들의 경전과 여타 정보가 전무 했지만, 부분적인 정보들이 당시 역사가들의 서술이나 초대 교회인 들의 비판서 에서 등에서 엿볼 수 있다. 태양신 미트라는 '정복 불가능한 신' 또는 '불멸의 젊은 신'으로 묘사되어 주로 신도들은 군인, 관료, 상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여성신도는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후 미트라는 귀족과 황실에서 받아들여 제국과 황제의 수호신으로도 격상 되었다.
세상의 어둠과 악을 정복하기 위해 태양신 보냈다는 미트라는 사자상 으로도 상징되었는데, 사자의 입에는 벌(Bee)이 물려져 있다. 그 벌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갈대아어에서 '벌'은 '로고스'란 뜻도 된다.)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토요일)을 지켰으나, 일요일을 신성하게 여긴 미트라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송낙원은 '제2기 사도 후 시대'(100~313년)를 정리하며 초대교회에서의 안식일(토요일) 예배가 말기에 이르러서 서서히 일요일 예배로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송낙원 / 세계기독교회사 / 이건사 / P.101]
결국 이런 문화적 토양 속에서 로마교회는 일요일 예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모든 교회가 일요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자 태양신 숭배자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Sunday)에 쉬어야 한다."고 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교회사 핸드북 / 생명의 말씀사 / P.144]
"콘스탄틴 대제는 처음으로 칙령을 내려 일요일에 정무와 사법의 일을 쉬게 하고 이어서 이날에는 군대의 조련, 공연물의 관람을 금지 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의 제도를 그대로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동방에 있어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서 지켰다." [김의환 박사 감수 / 교회사 / 세종문화사 / P.145]
초대교회의 여러 전승들에 따르면 예수도 동굴에서 태어났다. 순교자 저스틴과 3세기의 오리겐은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렀던 집이 동굴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콘스탄티누스의 모후 헬레나(Helena)는 유대 땅을 돌아다니며, 기적을 통해 예수가 매달린 진짜 십자가를 동굴에서 발견했다며 그곳에 성묘교회를 짓고, 다시 예수가 태어난 동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곳에 예수탄생교회를 지었다. 헬레나가 발견한 예수 유적이 날조된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예수와 관련된 유적이 동굴과 관련 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탄생이 동굴에서 이루어 졌다고 믿은 것이 확실하다.
미트라(Mithras) 신앙과 기독교
흔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미트라 신앙을 고대의 잡신 신앙이나 원시신앙으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미트라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태양신으로 널리 알려진 미트라에 대한 신앙은 약 사천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라 신앙은 동으로는 인도에서 중국까지 서로는 로마국경의 전 범위, 즉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사막,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미트라를 숭배했던 장소들이 영국, 이태리, 루마니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터기,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미트라 신앙은 로마제국에서 로마 군인들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 사원과 성전이 세워진다. 그들은 미트라에움이라는 자연적인 동굴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사원에서 의식을 행했는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황소를 제압하는 인물이 "미트라"로써 태양신의 아들이다.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되었다.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와 일치하며 12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 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 제도, 관습, 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즉, "미트라" 숭배자들이 믿었던 천국과 지옥,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심판의 마지막 날,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위해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최후의 전쟁,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이 신자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교리, 영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는 것, 구원, 부활, 재림 등의 교리, 최후의 만찬 이야기 등등 너무도 흡사하다.
또 미트라신은 처녀한테서 태어났는데 예수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또 미트라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가 12월 25일에 열렸는데 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의 생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세례의식과 피와 포도주에 의한 성화의례가 있다. 기독교 사제의 명칭인 파더(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기독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도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으로 죽었지만, 임종직전에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그는 평생 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로 예수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예수 역시 토요일을 안식일로 믿고 평생 살았다..
태양의 숭배자들은 항상 태양의 날이 신성한 날이라고 믿어왔다. 실제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이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압력 하에 성직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찬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콘스탄틴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다. 또 콘스탄틴은 예수의 생일을 1월 6일에서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바꾸었다. 12월 25일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경축해온 태양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발상 전체는 꾸며진 것이다.
예수는 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에 의해 예수의 생일은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둔갑된 것이다. 태양숭배자들은, 태양이 12월 25일에 탄생했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채..... 교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수호인가? 거짓의 방어일 뿐이다. 콘스탄틴은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케자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틴은 그 자신을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마지막 예언자로 만들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왕권의 원조를 원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 비지니스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 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사실은 대중들에게 공표된 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그사실을 모르고 있다."(라즈니쉬)
유래를 알 수 없는 기독신앙과 미트라교의 통합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 기독교를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로마의 공식 종교인 무적 태양신 미트라 교의 최고 사제이기도 했다. 미트라 교는 영혼 불멸, 심판의 날, 그리고 사자의 부활을 믿었다. 이 태양신 숭배는 시리아에서 시작되어 코스탄티누스 때는 로마에 건너 온지 100년 정도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에 꼭 필요한 정치와 종교의 통합을 위해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를 합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편하게도 이들 종교 사이에는 그런대로 공통점이 많아 별 무리 없이 아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 콘스탄티누스는 예수가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모두 파괴하고 오로지 신의 아들로만 보일 수 있도록 새 성서를 쓰게 했다. 이리해서 대부분의 기록들이 파괴되었고 황제의 역사를 왜곡한 새 성서를 쓰라는 명령에 새 신약을 쓰는 작가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기록들을 골라 자유롭게 덧칠하고, 왜곡하고, 윤색하고. 파괴하여 그들이 바라는 예수의 일생을 다시 써냈다. 그 결과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 예수의 어린 시절, 30대까지의 예수의 행적 등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간신히 파괴를 면한 기록과 복음서들은 각지에 숨겨져 사해 문서, 나그함마디 문서, 토마스 복음과 유다 복음, 성경 외전 등으로 내려와 현대에 다시 나타났다. 교회는 처음에 <에녹 서>를 받아들였지만 곧 빼버렸다. 마법이 등장한다는 이유였다. 즉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서는 4세기에 다시 씌여진 것이고 유대인의 손에 씌여진 것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후대 로마인들의 손에 다시 만들어진 조각난 기록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메시아가 되고자했다. 그가 본 기독교의 신은 태양신 미트라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전사, 종교지도자, 정치, 종교, 영토를 통합하는 존재였다. 예수는 실패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황제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네가 아리마대의 요셉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가설도 있다. 황제와 교회는 아예 손잡고 기독교를 새로 창조한 것이다. 유세비우스 역시 황제는 신에 가까우며 그가 예수의 열세번째 제자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제목 성경을 금서로 해야 한다.. (4) 등록일 2008.07.16 00:58:15
글쓴이 임기명(lkm9338) 조회수 182 추천수 9
1) [(여호와 가라사대) "네 동포,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 너를 꾀어 이르기를, ..... 네 열조(조상)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 (다른)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 그는 ... 네 신(神)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 죽이라`........"] (신명기 13;6~11)
* 여호와(예수) 외에 다른 신(神)을 섬기자고 꾀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부모 형제, 처자식 또는 동포(친구)일지라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덮어 숨기지도 말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이런 종류의 상황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겪고 있을 것입니다.
(2)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聖民=거룩한 백성)이라. 무릇 스스로 (병들어)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客)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可)하니라”.] (신명기 14; 21)
* 병들어 죽은 고기 즉, 불량 식품을 예수교인들은 먹지 말고, 이웃에게 먹이거나 팔아도 좋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못돼 먹은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성민(聖民)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교인들입니다.
(3) [“여호와의 신이 사울(사람)에서 떠나고, 여호와의 악신(惡神)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무엘 상 16; 14)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惡神)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사무엘 상 19; 9)
* 사울은 히브리 왕국의 초대 왕입니다. 처음에 사울은 왕이 되기 싫다고 행구(이삿짐) 뒤 에 숨기까지 했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쪽에서 강제로 끌어다가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0; 22)
그런 사울왕 속에다 여호와는 자신이 부리는 악신(惡神)을 집어넣어 못된 짓(?)하게 하여 그 벌로 비참하게 죽게 합니다. 여호와는 자신이 부리는 악신을 사람에게 집어넣고서 죄를 짓게 하고는 그 죄 값으로 벌을 내린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애굽 왕)의 마음을 강퍅(성질이 깐깐하고 고집이 셈)하게 하셨기 때문에…."](출애굽기 10; 27)
* 결국, 애굽왕 바로는 자기 성품이 아닌 강퍅한 마음 때문에 여호와의 뜻을 거역하게 되고, 마침내 애굽 백성 전체가 무차별 도륙되는 재앙을 13 번씩이나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은 여호와가 집어넣은 그 강퍅한 마음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그리고 그 죄값으로 여호와의 징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4) [“사무엘(여호와의 선지자)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無子)케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無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지명)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 을 찍어 쪼개니라.”] (사무엘 상 15; 33)
* 위의 바이블 내용은 이스라엘(사울왕)과 아말렉(아각왕)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이야기 입니다.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사람(아각왕)을 여호와가 칼로 찍어서 쪼개어 죽였다고 하 는군요. 위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먼저 아말렉으로 쳐들어가서 발발한 전쟁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특히 청년들이 많이 죽게 됩니다. 청년들이 많이 죽으면, 여인들에게는 아들이 없어지게(무자=無子)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호와(사무엘)는 여인들 이 무자(無子)케 된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데도 이를 망각하고, 그 책임을 아각왕(사람)에게 씌워 <칼날로 찍어 쪼개어> 죽였다고 합니다.
[“너희(사람들)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 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1; 20)
* 여호와(예수)를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켜버리게 하겠다고 공갈 협박합니다.
여호와의 입이 직접 쏟아 낸 말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배반이나 거절이란 말이 성립하려면, 이에 앞서서 인간과 여호와(예수) 사이에 어떤 약속이 맺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에서 그런 약속이 체결된 적이 있었던가요?
아무리 거듭해서 생각을 해봐도, 폭력배들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왜 쳐다봐? 떫어? 죽고 싶어?” 하며 공연히 트집을 걸며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교의 신 여호와(예수)는 사람을 찍어 쪼개기도 하고, 칼날이 삼키게도 한답니다.
(5) [“(예수 가라사대), 풀무 불(지옥)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 13; 42)
* 여호와의 독생자라는 예수가 사람들을 향해서 쏟아 내는 독설이요 악담과 저주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으면, 꺼지지 않는 유황불 지옥에 쳐 넣어 영원히 이를 갈며 신음하게 하겠답니다.
[“내(예수)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마태 10; 34)
* 예수는 인간 세상에다 전쟁과 불행을 안겨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신이랍니다. 예수 역시 여호와와 조금도 기울지 않는 입이 걸쭉한 XX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또, 내(예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兄弟)나, 자매(姉妹)나, 부모(父母)나, 자식(子息)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 19; 29)
* 예수를 위하여 부모, 형제, 처자식과 전 재산을 버린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영생 복락을 누리겠지만, 버림을 받아서 불행해진 부모와 처자식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7)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평화를 맺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을 맺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로 삼아 부려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을 맺을 생각이 없어서 싸움을 걸거든, 너희는 그 성을 포위 공격하여라. 너희 신 여호와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부치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 죽여라.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밖에 그 성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희 신 여호와께서 너희 원수(예수교인이 아닌 사람들)들에게서 빼앗아 주시는 전리품을 너희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여기
(근처)에 있는 민족들의 성읍이 아니고, 아주 <먼데 있는 성읍>들에는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 신 여호와께 유산으로 받은이 민족들의 성읍(이스라엘 근처)들에서는 숨 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기 20; 10~17)
* 어떻습니까?
조직 폭력배들의 행패와 예수교의 가르침에 다른 모습이 보입니까?
아니, 폭력배일지라도 저렇게 무지막지한 폭력배가 있어 본 적은 있습니까?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이 직접 다스리며 살아갈 근처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싹 쓸어 전멸시키고, 직접 들어가서 살지 않을 먼 곳에서는 남자들만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은 모두 차지해도 된답니다.
실제로, 유럽의 예수교인들은 남아메리카의 모든 남자를 도륙시키고 여자들을 모두 차지합니다. 그 결과, 현재의 남미 사람들이 바로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족 또는 인디오족입니다. 예수교의 역사는 여호와(예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해 내려오고 있는 셈입니다.
(8) [“바알(타 종교)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이르니라.”](열왕기 하 10; 27)
* 예수교 이외의 타 종교의 신전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다 공중변소를 만들었답니다.
예수교인들은 타 종교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그 증오심이 풀리지 않습니다.
타 종교를 파괴한 다음 그 자리에다 더러운(?) 변소를 만들어 놓아야 속이 시원해 집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예수교인들이 타 종교의 신전과 신상은 물론 단군상까지도 때려 부수는 짓들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9) [“너희(예수쟁이들)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義)와 불법(不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 (고린도 후서 6; 14)
* 여기에서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혼인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교인들은 타 종교 내지 비 예수교인들과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교는 의(義)와 빛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법(不法) 또는 어둠인데, “어찌 예수교인이 타(他)와 혼인을 할 수 있겠느냐?”고 호통입니다.
어쨌든, 예수교가 타(他)와 공존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10)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 유다 및 에돔 등 3국 연합군이) 그(이웃 나라) 성읍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우물)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물맷군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열왕기 하 3; 25)
* 여호와(예수)의 군대는 노략질 전쟁이 그 임무입니다.
1)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2) 가축과 금은 패물을 비롯한 모든 재물을 강탈한 다음,
3) 성읍(사람이 살만한 터전)을 쳐서 모조리 헐어 버리고,
4) 밭에다 돌을 가득하게 던져 넣어 다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만들고,
5) 모든 샘(우물)을 메워 어느 누구도 물을 마실 수 없게 하고,
6) 모든 나무를 잘라내 완전 초토화(焦土化)시키라는 것이 여호와(예수)의 지엄한 명입니다.
7) 심지어, 아이들을 메어쳐 죽이고, 아이 밴 부녀자들의 배를 갈라 죽이도록 교사하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8; 11~13, 열왕기상 19; 15)
중동 지방은 여호와(예수)의 군대가 저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기후 풍토가 심히 척박한 사막 벌판입니다. 그런데, 저런 곳에다 저러한 만행 질을 해 놓으면 그 지방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어쨌든, 이것이 여호와(예수)가 예수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거룩한 명령(가르침)입니다.
(11) [“너희 가운데 호강하며 하느작거리던 여자, 너무 호강하여 발바닥을 땅에 대본 일도 없는 여자가, 자기를 가슴에 안아주는 남편이나 아들딸을 외면하고, 궁한 나머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태째 몰래 먹어치울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치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신명기 28; 56~57)
* 여호와를 믿지도 않고 받들지도 않으면, 자식의 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것도,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이 빼앗아 먹을 까봐 몰래 숨어서 먹게 하겠다고 합니다.
너무도 호강스럽게 살아서 땅을 밟아 보지도 않던 아리따운 여자가 남편과 다른 자식들 몰래 자식의 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은 참으로 멋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 세상을 잔인하게 이끌고 있는 여호와라는 신은 어떻게 생겨 먹은 종자일까요? 참고로, 여호와의 협박을 한 가지만 더 들어 보기로 할까요?.
(12) ["... 너희가 내(여호와)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한다면, 나는 크게 노하여 너희(인간)와 맞설 것이며, 너희 죄(여호와를 믿지 않음)를 일곱 배로 징계하리라. 그리하여, 너희는 아들들의 살을 먹고, 딸들의 살을 먹어야하게 되리라."] (레위기 26; 27~29)
* 이 얼마나 끔찍한 공갈 협박이요 저주와 악담입니까?
(13) 바이블에는 <죽이다>라는 단어가 275 개 들어 있습니다.
바이블에는 <진멸>하라는 단어가 104 개 들어 있습니다.
바이블에는 <전멸>하라는 단어가 85 개 들어 있습니다.
바이블에는 <노략>하라는 단어가 92 개 들어 있습니다.
바이블에는 <칼날>로 죽여라(진멸하라)가 50 개 들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바이블에는
1) 포르노 따위의 음담패설(淫談悖說),
2) 사람을 속이고 골탕 먹이는 사기행각(詐欺行脚),
3)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과 논리와는 거리가 먼 무지막지(無知莫知) 등이 난무하고 있어서, 인류 역사 속에 예수교(바이블)보다 더 잔인하고, 지저분하고, 악독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바이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예수교 지도자)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여호와의 식물(예배)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찌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예수교 지도자)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예배)를 드리지 못할찌니, 그는 흠이 있은 즉, 나아와 여호와의 식물(예배)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레위기 21; 16~21)
* 불구자나 병자는 여호와에게 가까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문둥병 등 피부병을 가진 사람을 더럽다면서 진 밖으로 내치라고 악을 쓰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중동지방의 사막 벌판을 배회하며 노략질로 살아가던 족속들입니다.
노략질은 농업 민족과는 달리 전쟁이 그 생업입니다.
따라서, 진(陳)이란 히브리인들의 생활 근거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불구자나 병자를 더럽다면서 진(陳)에서 내치라는 말은 결국 죽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15) ["엘리사가... 길에 행(行)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城)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42 명을 찢었더라.."] (열왕기 하 2 ; 23~24)
* 엘리사는 대단히 유명한 여호와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가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라며 놀렸던 모양입니다. 이 때,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자, 암콤 2 마리가 나타나서 아이들 42 명을 찢어 죽였다는군요.
(16)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다음 날, 작은 딸이 아비와 동침함)...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창세기 19; 31~38)
*아비(롯)에게 술을 먹이고 딸 둘이서 번갈아 흘레붙는 이야기입니다.
약혼까지 했던 두 딸이지만, 여호와가 유황불로 약혼자들을 비롯 모든 사람을 죽여 없애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불륜이랍니다. 두 딸에게서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번성하게 되는데, 이 두 족속은 여호와로부터 영원히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집니다.
두 족속 모두 멋모르고 태어나서 마침내 지옥으로 직행하는 길 밖에 없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도 있을까요?
(너무 흉측 한 내용이라서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올렸습니다.)
물론, 바이블(특히 신약)에 좋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7 번씩 70 번이라도 용서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등등, 대략 20~30 가지쯤 그럴싸한 말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말은 유교, 불교, 도교 및 힌두교 등등, 어디에서도 만나 볼 수 있는 가르침들입니다.
아니, 세상(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 속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덕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눈 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바이블 속에 들어 있는 20~30 가지쯤 되는 그 그럴싸한 말들도 어떤 근거와 배경 설명 없이 단편적으로 또는 즉흥적으로 떠들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이블(예수교) 속에서 떠들어지는 그 좋은 말들이라는 것이 사실은 예수교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탈은 쓰고 있어야 되겠고, 그러려면 그럴싸한 내용은 있어야 되겠고, 마침내, 타 종교 또는 타 집단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을 이것저것 훔쳐 오다 보니, 그렇게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 것들을 여기저기에다 너덜너덜 붙여 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교의 가르침(바이블)입니다. 아직도, 바이블을 사랑하는 우리 아들딸들에게 읽히고 싶은 양서(良書)라고 판단되십니까? 바이블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矛盾)과 궤변(詭辯)을 역어 놓은 허구(虛構)일 뿐입니다.
거기에다 한 술 더 떠서, 저주(詛呪)와 악담(惡談)을 뭉쳐 놓은 무서운 내용의 악서(惡書)입니다.
이 바이블 내용을 몇 년 전, 어느 사이트에 올렸더니,
<여호와의 선지자에게는 이 정도의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 이라고 답 글을 올린 예수교인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예수교에 세뇌되면 어떤 종류의 정신세계가 형성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