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한심한 자들
신1번도로가 난 후 도로변의 마을들이 병신이 돼버렸단다.
마을집들 높이 만큼이나 돋우어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을들이
묻혀버려 졸지에 자기네 마을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엉터리 배수로로 인해 장마철이 되면 온마을이 물난리를
겪어야 하니 설계자나 시행자, 시공자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정신
병자들이 아니고서야 어디 이럴 수 있느냐고.
배수로는 몇번이나 뜯어 고쳐서 웬만해졌다지만 길을 깎아 내릴
수도 없으니 이장(김헌영)이 마을을 대표하여 기가 막히고 생병
날 만도 하겠다.
그래, 참으로 한심한 자들이다.
마을 앞을 통과할 때는 마을을 고려하여 길 높이를 조금 낮추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과연 없단 말인가.
자기 집, 자기 마을 앞이었어도 이 꼴로 했을까.
"내 마을을 내 집처럼"이라는 처인마을(전남 강진군 성전면:옛길
5회글 참조) 주민들처럼 이 마을들을 자기 마을이라 생각했다면
이 꼴로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게 돋우느라 공사비가 더 많이 들었고 배수로 뜯어 고치느라
더 많이 낭비했을 것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공사가 어찌 여기 뿐인가.
이 도로와 마을들의 관계가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니
이 늙은 나그네도 분통이 터질 듯 했다.
마을 주민들의 격해진 분위기를 달래보려는 수작이었던지 버스
정류소 대기장을 새로 지어주기로 했단다.
그러나 도로가 개통된 후 업자들이 일언 반구 없이 철수해버림
으로서 마을인들을 더욱 격분케 했다는 것.
농락당한 기분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부도덕한 사람들이니까 자기네 마을이 아니라 해서 저
꼴로 만들어 놓았겠지.
그런데 버스정류소 대기장 문제에 대해서만은 이장편이 돼주지
않고 쓴 소리 한 마디했다.
업자의 얄팍한 술수에 넘어가는 우(愚)를 스스로 범했다고.
튼튼하게 잘 축조된 기존의 적벽돌 대기장이 관리 소홀로 다소
지저분해졌을 뿐이며 새로 지은들 얼마 가지 않아 저꼴이 되고
말 건데 왜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갔느냐고.
해남에서 여기까지 걷는 동안 쌓이고 쌓인 불만을 나도 그에게
털어놓은 셈이다.
지자체들이 나름의 아이디어로 대기장들을 만들어 놓았다.
비용도 적잖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서 투성이인데다 쓰레기 하치장이 되었고 잠간 앉으려
해도 의자가 땅바닥만도 못해서 맨바닥에 앉지 않았던가.
관리를 하지 않는데 새 건물인들 새 기분이 몇날이나 가겠는가.
마을들의 반성을 촉구했더니 김헌영도 수긍했다.
해프닝들
전주길 반도 채못걷고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다니.
다시 걸으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낙동정맥 아화고개(경북 영천시 북안면과 경주시 서면 경계)를
통과할 때 갈 길 바쁜 늙은 이가 연 이틀 인생 상담사 노릇했던
기억이 나서(백두대간 46, 47회글 참조)
오죽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으면 생전 처음 보는 산타는 늙은
이를 붙들고 그토록 하소했을까.
내 긴 수염의 이미지 탓이었을까.
그나저나 지금쯤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철학교수가 온다니까 온 마을이 야단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학이란 기이한 사람들의 학문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란다.
철학을 전공하는 이는 용모부터 괴상망칙하게 생겼을 것이라
예상했기에 구경꾼이 몰려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대간, 정맥에서 종종 겪었는데 길에서도 그런다.
다시 소학교때 생각이 났다.
어느 날, 시가꾸 선생이 온다고 학교가 떠들썩 했다.
사각(四角)의 일어 발음이 시가꾸다.
머리가 사각형이라면 얼마나 기이하겠는가.
그래서 사각난 선생 보려고 소란했던 건데 정작 온 손님은 위엄
갖춘 보통사람이었다.
소학 초급반 학생들의 어휘가 부족하여 발음이 거의 같은 '시학'
(視學:장학사)을 '사각'으로 들은 해프닝이었다.
일어탁수인가 하향 평준화인가
금구 향교앞 가게에서 메로나로 더위 달래면서 한 결단을 했다.
널리 소개돼 있는 삼례까지의 옛길을 버리고 감영(監營)이 있던
전주길을 택해서 통영대로와 분기되는 삼례땅에 당도하기로.
더는 머뭇거릴 여가가 없고 서산에 걸린 해도 걸음을 다그쳤다.
김제땅(金堤) 금구(金溝) 이후 전주까지는 남아 있는 구도로가
없기 때문에 신1번국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금구(김제시) 향교
언제였던가 매운탕의 유혹에 두어번 들렀던 금구의 대률저수지
(大栗)를 지나 완주땅(完州) 이서(伊西)와의 경계를 따랐다.
이서쪽 과수원에서 잠시 쉬면서 전주의 사정을 물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언제나 찜질방인데 이 과수원 주인은 아직껏
찔질방에 가본 적이 없어 모른단다.
부인을 불러 알려주게 했으나 이 지역 지리를 모르는 내 수준에
맞춘 안내가 아닌데다 밤이 오는 시각이라 소경에게 길일러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전주 완산구를 포함해 3시군계인 쑥고개(宿虎?)를 밟고 어둠이
세를 불리려 할 무렵 드디어 전주땅에 진입했다.
어두워지긴 했어도 차량들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인도를 코
앞에 둔 지점에서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맥이 빠져갔다.
시장해서 더 그러는 것이라 판단돼 불빛 요란한 식당으로 갔다.
그러나 속에서는 빨리 들어오라는데도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아직 덜 고팠기 때문일까.
여기가 전주 맞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맛과 매너에 낙심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주에서는 아무 데나 가도 먹음직하다는 고정관념을 무참하게
깨버렸는데 이 집(완산구 삼천동 3가 289-15)을 어찌 잊겠는가.
그래도 일어탁수(一魚濁水)일 뿐이겠거니 접은 후 밤길을 묻고
또 물어서 어렵사리 찜질방을 찾아냈다.
중화산동의 '행복한 세상'이 그나마 전주의 체면을 회복시키고
행복한 밤을 제공하겠다는 건가.
여기도 오늘까지 여름 할인기간이란다.
식욕은 이미 멀리 가버렸고 맥주 1병으로 달래야만 했다.
새벽길을 재촉하여 고사동의 콩나물해장국집 '삼백집'으로 갔다.
욕쟁이 할매집으로도 알려진 이 집을 모르면 전주인이 아니라고
할 만큼이나 유명세가 붙은 집이다.
사회적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해장국먹으러 왔다가 주인 할매의
욕먹지 않고 가면 그 날 재수가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300원짜리 콩나물해장국으로 개업했다 해서 옥호를 삼백집이라
정했다니까 연조도 알만한 집이다.
할매가 세상을 뜬 후 잘 되면 으례 있기 마련인 핵분열이 일어나
지금은 바로 옆에서 가족간의 치열한 경쟁 양상이란다.
나도 전주를 방문하면 다음 날 새벽엔 당연히 이 집에 있곤 했다.
그런데 이 이름난 삼백집도 옛맛을 잃어가는가.
전주의 음식점들이 하향 평준화 동맹이라도 맺었는가.
이도 저도 아니면 내 입맛이 변한 건가.
깨질깨질하다가 모주만 한사발 마시고 일었났으니 말이다.
절만의 성취
전주천 뚝방을 잠시 따르다가 내려섰다.
천변의 산책로를 따라서 마냥 가면 고산천과 합류하고 다시 뚝
길 따라 가면 만경강으로 빠지는 길목에 삼례가 있을 것이니까.
그래서 이 길을 걸으려고 어제 짧은 이서길을 버린 것 아닌가.
한벽교에서 추천대교까지 서북서로 길게 뻗어 내리는 8.6km의
전주천 산책로는 감칠맛이 났다.
도농 불문하고 웰빙바람이 거세게 불기는 근자의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걷고, 더러는 체육시설에서 운동하고, 달리는 이와
자전거 패달을 열정적으로 밟는 이 등 남녀 연령 불고하고 활기
넘친 아침을 맞게 하는 전주천이 보배로워 보였다.
전주천 산책로(상)와 피서에 안성맞춤인 다리밑(중)
전주천 생태문화지도(하)
싱싱하고 상쾌한 전주천을 거닐고 있는데도 아침의 내 몸은 자꾸
주저 앉기를 강요했다.
잠시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정읍 북면 출신 정축생(72세)이
조금 빨리 걷기 바랄 때 주변 관찰을 핑게삼을 수 밖에 없는 내가
갑자기 서글퍼지기도 했다.
전주천에는 아마 서울 다음으로 다리가 많을 것이다.
마지막이며 가장 넓고 긴 다리인 덕진의 추천대교(楸川)아래에서
한 월남전 상이용사와 송천동 아파트단지까지 동행했다.
그는 소위 상이용사 이미지와 전혀 다르게 선량한 언행으로 삼례
까지의 뚝방길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어 나그네길을 편하게 했다.
추천대교
이렇게 해서 옛길 대신 택한 전주천 답사는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전주의 최유진(백두대간 2회글 참조)을 만나보려 했던 또 하나의
성취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했다.
서신동은 내가 아침에 걷던 전주천변이지만 너무 이른 시각이라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절반의 성취인 셈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