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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스크랩 김일손의 편지
성헌 추천 0 조회 95 12.09.19 08: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글쓴이: 이희수] 제목: 김일손의 편지 2002-09-15 11:00
 
 김일손의 편지

  김일손(金馹孫)이 젊었을 적부터 재주가 있다는 소문들이 사방에 퍼져서 한 무장(武將)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일손은 일부러 문장을 못하는 척 방구석에 들러앉아서 {십구사략}만 읽었다. 산사(山寺)에 올라가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장인에게 편지라도 보낼 일이 있으면 짤막하게 용건만 말할 뿐 인사말 같은 것도 없었다. 하루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문왕이 죽으니 무왕이 나왔다. 주공주공 소공소공 태공태공(文王沒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
  간단하기 짝이 없는 글이요 무슨 말을 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장인은 편지를 보고서는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얼른 소매 속에 감추었다. 무식한 사위를 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 때 마침 글 잘하는 선비 한 사람이 한자리에 있다가 김일손의 편지라기에 한 번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서 그 장인에게 편지를 좀 볼 수 없느냐고 하였는데 장인은 굳이 감추고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떼를 써서 억지로 빼앗아 보니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글자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선비는 필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번 세번 거듭 읽어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색이 공손해지면서 몸을 바로 하였다. '실로 천하의 기재로다.' 그 선비가 풀어본 글의 뜻은 이러하였다. 문왕의 이름은 창(昌)이요, 무왕의 이름은 발(發)이다. 창은 방언으로 신발 밑을 창이라 하고 발은 사람의 발과 음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창이 죽어서 발이 나왔다는 말은 곧 신발 창이 떨어져서 발이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었다. 또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니 이것은 아침을 이르는 조(朝)요, 소공의 이름은 석(奭)이니 이것은 즉 저녁 석(夕)과 음이 같은 것이다. 태공은 망(望)이니 이것을 정리하면 조조석석망망(朝朝夕夕望望), 즉 아침마다 저녁마다 바라고 바란다는 말이었다. 곧 신발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장인은 크게 기뻐하여 곧 신발을 사서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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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의 발단은 무엇일까? 이극돈과 김일손의 악연으로부터 출발? 011. 12. 25

 

김일손과 이극돈의 악연이 만들어낸 무오사화의 속사정
흔히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의 원인을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에 넣었다가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발견하고 이를 유자광과 모의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일러바쳐 김일손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림파들이 희생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사화의 중심에 있던 김일손과 이극돈의 사이에서는 과연 무슨 악연이 있었던 것일까?
김일손은 호가 탁영이고, 본관은 김해이며, 사헌집의 김맹의 아들이다. 그는 성종 17년 소과와 대과를 모두 급제하여 관직의 첫 발을 내디뎠고, 이어 진주의 교수로 파견되었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몰두했다. 바로 이때에 김종직의 명성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후 다시 상경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사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항상 평탄한 길보다는 왜곡되고 부패한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또한 사림의 힘을 기르기 위해 동료 사림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도움을 주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광주에서 토착한 세력으로 조선건국 시기 그의 증조인 이집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금 올림픽공원 일대인 둔촌동과 그 주변이 이집의 주활동 무대였기에 그의 호 또한 둔촌이다. 지금의 강남 서초 송파가 그 당시 광주이던 시절이다 이극돈은 5형제인데 모두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문벌을 자랑하던 집안이었다. 당시 몇 대에 걸쳐 한두 사람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떠들던 때였으니 둔촌 집안의 성세는 가히 짐작할수 있다.
성종 17년 병오년에 과거시험이 있었다. 출제와 채점을 담당하는 시관은 예조에 소속된 이극돈 윤필상 유지 등이었다. 이극돈과 김일손의 첫 대면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김일손이 고향 청도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몇달 전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했다가 다시 재차 대과인 병오년 문과에 응시한 것이었다. 김일손의 문장은 이미 조정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엇고, 이극돈 또한 이를 익히 듣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 채점을 하던 도중 모두 입을 모아 장원이라고 여기던 답안지는 바로 김일손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극돈이 나서서 1등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가로막은 것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하고 능숙한 문장이라는 점은 이극돈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시험에서 글을 짓는 것은 일반적인 제술과 달라 일정한 격식이 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응시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답안지 관리가 엄격했지만 이극돈은 그 답안지가 김일손이 작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김일손을 결국 장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2등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것이 김일손과 이극돈의 첫번째 악연이다. 그 후 이극돈이 이조판서가 되어 이조낭청을 뽑아야 할 일이 생겼다. 이조낭청이란 좌랑과 정랑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들은 인사권을 장악한 막강한 자리였다. 반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낭청들이 한결같이 김일손을 추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극돈은 그 사람은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란 핑계로 望에 넣어주질 않았다. 망이란 三望, 즉 3배수 후보자를 임금께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김일손과 이극돈이 맺은 두번째 악연이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사귄 벗들이 修己에 치중하는 모습에 내심 불만을 가진 김일손은 당면한 현실개혁에 매달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가 言官으로 활약할 때에는 直言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외직으로 나가서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금기사항으로 여겨지던 昭凌복구 상소까지 올렸다 소릉은 단종 어머니 권씨의 무덤이다. 사육신 사건 때 파혜쳐졌던 소릉을 복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세조정권의 부당성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김일손의 서릿발 같은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사초를 작성하는 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세조비였던 정희왕후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극돈이 기생과 놀아난 일, 뇌물에 관한 일 등의 비리를 사초에 남긴 것이 두 사람의 세번째 악연이었다. 이극돈이 자신에 관한 사초가 실록에 기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한 것이다. 세번째 악연은 결국 김일손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신진 사림 전체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 악연치고는 너무나 큰 악연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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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이희수] 제목: 김효성의 기지(機智)2002-09-15 10:59

 

김효성의 기지(機智)

  판원(判院) 김효성(金孝誠)은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다. 부인도 또한 질투가 지나치게 심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공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문득 보니 부인의 자리 옆에 검정색으로 물을 들인 모시가 한 필 놓여 있었다. 이에 공이 물었다.
  "저 검정 모시는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이기에 부인의 자리 곁에 놓아두었소?"
  그러자 부인은 정색을 하며 대답하였다.
  "당신이 뭇 첩들에게 혹하여 본 아내를 원수처럼 대하시기에, 저는 결연히 중이 될 각오를 하고 물을 들여 놓았던 것이오."
  공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본래 호색하여 기녀(妓女)·여의(女醫)로부터 양인(良人)·천인(賤人)·현수(絃首)·침선비(針線婢)에 이르기까지 자색만 있다 싶으면 반드시 모두 정을 통하였소. 그런데 여승의 경우에는 아직 한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소. 그대가 여승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정작 내가 바라는 바요."
  부인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검정 모시를 접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뿐이었다.

<청파극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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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희수] 제목: 지기삼사(知機 三事)(선덕여왕) 2002-09-15
 
 선덕여왕의 지기(知機) 三事

  27대 임금 덕만은 시호가 선덕여대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년(63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16년 동안 다스렸다. 미리 알아낸 일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 일은 이렇다.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 서 되를 보내 오니,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다."
  이내 뜰에 심었더니 그 꽃이 피어서 떨어질 때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두 번째 일은 이렇다.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 떼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상스럽게 여겨 왕에게 물으니, 왕은 각간 알천, 필탄 등에게 급히 명해, 정예 군사 2천을 뽑아 서울 서쪽으로 급히 가, 여근곡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터이니 덮쳐서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군사 천 명씩 거느리고 서울 서쪽으로 탐문하니, 부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 병사 5백인이 거기 와서 숨어 있으므로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란 자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어서 포위해 쏘아 죽였다. 또한 후속 부대원 1천 3백 인이 오거늘, 공격해서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 일은 이렇다. 왕이 병이 없을 때,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라."
  신하들이 그 자리를 몰라 어느 곳인가 물으니, 왕이 말했다.
  "낭산 남쪽이니라."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거늘,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십여 년 뒤에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다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했다. 그래서 대왕이 신령스러운 줄 알았다. 그 당시에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째서 모란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이 그런 줄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은 그렸으면서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줄 알았다. 그것으로 당나라 황제가 짝 없는 나를 놀렸다. 개구리는 성낸 모습이라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은 여자 성기이다. 여자는 음이라서 그 색이 희다. 흰색의 방위는 서쪽이다. 그래서 병사가 서쪽에 있는 줄 알았다. 남자 성기가 여자 성기에 들어갔으니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쉽게 잡을 줄 알았다."
  이에 신하들이 그 뛰어난 지혜에 탄복했다. 세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줄 알아서인가. 선덕, 진덕, 진성이라는 이들이 세 여왕이다. 당나라 황제도 알아맞추는 능력이 있었다. 선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 스님의 전기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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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이희수] 제목: 양반전(兩班傳)(박지원) 2002-09-15 
 
 양반전(兩班傳)

  양반이란 사족(士族)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군(旌善郡)에 한 양반이 살았다. 이 양반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집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양반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고을의 환자를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석에 이르렀다. 강원도 감사(監使)가 군읍(郡邑)을 순시하다가 정선에 들러 환곡(還穀)의 장부를 열람하고는 대노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軍糧)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게 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도 없었다. 양반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부인이 역정을 냈다.
  "당신은 평생 글 읽기만 좋아하더니 고을의 환곡을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군요. 쯧 쯧 양반, 양반이란 한푼어치도 안 되는 걸." 그 마을에 사는 한 부자가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 말도 못하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정하배(庭下拜)를 하는데 코를 땅에 대고 무릎으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 이제 동네 양반이 가난해서 타먹은 환자를 갚지 못하고 시방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양반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양반을 사서 가져 보겠다."
  부자는 곧 양반을 찾아가서 자기가 대신 환자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양반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부자는 즉시 곡식을 관가에 실어 가서 양반의 환자를 갚았다. 군수는 양반이 환곡을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해 몸소 찾아가서 양반을 위로하고 또 환자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귀하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시는가요?"
하고 말했다. 양반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소인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았습지요. 동리의 부자가 양반이올습니다. 소인이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양반을 모칭(冒稱)해서 양반 행세를 하겠습니까?"
  군수는 감탄해서 말했다.
  "군자로구나 부자여! 양반이로구나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다급하게 여기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양반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 팔고 사고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송사(訟事)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를 증인 삼고 증서를 만들어 미덥게 하되 본관이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고 군수는 관부(官府)로 돌아가서 고을 안의 사족(士族) 및 농공상(農工商)들을 모두 불러 동헌뜰에 모았다. 부자는 향소(鄕所)의 오른쪽에 서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섰다. 그리고 증서를 만들었다.
  건륭(乾隆) 10년 9월 모일에 이 문서를 만드노라. 몸을 굽혀 양반을 팔아서 환곡을 갚으니 그 값은 천석이다. 오직 이 양반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사(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되고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이다. 무반(武班)은 서쪽에 늘어서고 문반(文班)은 동쪽에 늘어서는데 이것이 '양반'이니 너 좋을 대로 따를 것이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옛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五更)만 되면 일어나 유황에다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서 눈은 가만히 코끝을 보고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앉아 {동래박의(東萊博義)}를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구차스러움을 남에게 말하지 아니하되 고치·탄뇌(叩齒彈腦)를 하며 입안에서 침을 가늘게 내뿜어 연진(嚥津)을 한다. 소매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을 지나치게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끄은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 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떠 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 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奴僕)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 재(齋)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官)에 나와서 변정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군수(旌善郡守) 화압(花押)·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이에 통인(通引)이 탁탁 인(印)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嚴鼓) 소리와 마주치매 북두성(北斗星)이 종으로, 삼성(參星)이 횡으로 찍혀졌다. 부자는 호장(戶長)이 증서를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라는 게 이것 뿐입니까? 나는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다시 문서를 작성했다.
  "하늘이 민(民)을 낳을 때 민을 넷으로 구분했다.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士)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않고 약간 문사(文史)를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문과(文科) 급제요, 작게는 진사(進士)가 되는 것이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길이 2자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인 것이다.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있는 음관(蔭官)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日傘)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서 기생이 귀고리로 단장하고, 뜰에는 학(鶴)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능히 무단(武斷)을 하여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디리붓고 머리끄뎅이를 회회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가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는 증서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부자는 평생 다시 양반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연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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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이희수] 제목: 절명시(絶命詩)(황현) 2002-09-15
 
 절명시(絶命詩)

황 현(黃玹) 

亂離滾到白頭年    난리를 겪다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다.
幾合捐生却未然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다.
今日眞成無可奈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오늘
輝輝風燭照蒼天    까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친다.

妖氣掩帝星移    요망한 기운에 가려져 제성(帝星)이 옮겨짐에
九闕沈沈晝漏遲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딤을.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부터 조칙(詔勅)을 받을 길이 없음에
琳琅一紙淚千絲    아름다운 한 조서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네

鳥獸哀鳴海岳頻    새와 짐승도 슬피 울며 산천도 찡그리는데
槿化世界已沈淪    근역(槿域) 삼천리 강산은 이미 침륜(沈淪)되었다.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가리고 천고를 회상할 때
難作人間識字人    인간으로 선비 노릇하기 지난함이여.

會無支廈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단지 인(人)을 이룰 뿐, 충(忠)은 아닌 것을,
止竟僅能追尹穀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陳東    당시의 진동(陳東)을 밟지 못함이 부끄럽네.

<매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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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김세군] 제목: 조의제문`(김종직) 2002-09-15   
 
 김종직(金宗直)과 조의제문(弔義帝文)

  정축년 10월 어느 날 내가 밀성(密城; 현 密陽)으로부터 경산(京山; 현 星州)에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훤칠한 모습으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의 손에 시해되어 침강(침江)에 던져진 사람이다."
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깨어 놀라 생각해보니
  '회왕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봐도 강물에 던져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황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시해하여 시체를 물 속에 던진 것인지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슬퍼하였다.

하늘이 만물의 법칙을 마련하여 주셨으니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
중국이라 넉넉하고 동이족이라 모자란 것 아니거늘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동이족으로 천년뒤에 태어나서
삼가 초나라 희왕께 조문을 드리네
옛날 진시황이 병사를 몰아서
사해의 물결이 핏빛으로 변했네
비록 보잘 것 없는 생명체라도 살아날 수 있을까
그물을 벗어나기 급급했도다.
당시 여섯 나라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평민들과 짝이 되었네
항량은 남쪽 나라의 장종으로
진승과 오광을 뒤따라 일어났다네
왕위를 얻고 백성들의 소망을 따르려 함이여
끊어졌던 웅역의 제사를 보존했네
천자가 될 상서를 잡고 임금자리에 오름이여
이 세상에는 미씨보다 존귀한 이 없었다네
장자를 보내어 광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인의의 마음을 알고도 남는다네
흉악한 무리들이 관군을 마음대로 죽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 형세가 그렇지 못함이여
내가 왕을 생각하니 더욱 두렵네
도리어 시해를 당했으니
정말로 천운이 어긋난 것이네
침산이 우뚝하여 하늘을 찌를 듯
해는 니웃니웃 저물어 가는데
침의 강물이 밤낮으로 흘러 흘러
넘실 거리는 물결은 돌아 올 줄 모르네
이 천지가 다하도록 그 원한 다할까
넋은 지금도 구천을 맴도시는데
내 마음 금석을 꿰뚫음이여
임금께서 갑자기 꿈속에 나타나셨네
주자의 사필을 본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경건히 사뢰며
술잔을 들어 강신제를 드리나니
영혼이시여 흠향하시옵소서

<점필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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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게이터]  京板本 | 방각본이야기 2011.10.22.

 

조선시대 서울에서 출판된 방각본(坊刻本). 소설을 비롯한 각종 국문본과 천자문·운서(韻書)·규장전운(奎章全韻) 등 각종 한문본을 판각, 출판하였다. 서울이 모든 분야에서 나라의 중심이었듯이 방각본 출판에서도 서울이 전국을 주도하였다. 서울을 논외로 하면, 완판본(完板本 : 전주판)이 방각본의 대표격이 된다고 하겠다.

국문 경판본(고소설)의 경우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자체나 판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자체는 경판 특유의 흘림체 행서에, 판광(板匡)은 단란(單欄)이었다. 대략 세로 6∼7촌, 가로 5∼3촌이며, 본문에 묵선이 없고, 15행이었다.

1행은 20여 자에서 35자로, 판구(板口)에 ‘춘’(춘향전), ‘홍’(홍길동전) 등 간략화된 표제가 들어 있다. 판구 하란에 장 수가 표시되었고, 대개 20장에서 30장 내외이다. 현존하는 경판본의 목기(木記 : 刊記)에 의한 동네별[坊別]출간 서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야동(冶洞 : 서대문 밖, 의주로 1가)·홍길동전·숙향전(2책, 1858). 홍수동(紅樹洞 : 창신동)·숙영낭자전(1860)·월봉기(月峰記)·당태종전(唐太宗傳, 1858)·양풍전(梁豊傳)·삼국지(三國志, 1859)·장한절효기(張韓節孝記)·신미록(辛未錄, 1861)·조웅전(趙雄傳).화천(華泉 : 순화동)·임장군전(1875). 유동(由洞 : 을지로 1가)·삼설기(三說記, 1848)·현수문전(玄壽文傳)·진대방전(陳大方傳)·금향정기(錦香亭記, 2책)·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1851)·월왕전(越王傳). 유천(由泉)·월봉기(月峰記). 송동(宋洞 : 명륜동 2가)·금령전(金鈴傳)·심청전(沈淸傳)·쌍주호연(雙珠好緣)·백학선전(白鶴仙傳)·흥부전(興夫傳). 자암(紫巖 : 봉래동 1가)·장화홍련전. 미동(美洞 : 다동)·삼국지(三國志)·장경전(張慶傳, 1852). 동현(銅峴 : 을지로 입구)·위지경덕(尉遲敬德, 1864). 무교(武橋 : 무교동)·옥주호연(玉珠好緣, 1581). 화산(華山 : 자하문 밖)·서유기(西遊記, 1856). 석교(石橋 : 영천 남쪽)·용문전(龍門傳).

광통교(廣通橋)·초기 한문 방각본 출간.

기타·구운몽(九雲夢, 32엽)·임진록(壬辰錄, 3책)·곽분양전(郭汾陽傳, 3책)·금원전(金圓傳)·금수전(禽獸傳)·정수정전(鄭秀貞傳)·적성의전(翟成義傳)·양산백전(梁山伯傳)·수호지(水滸志, 2책, 1860)·김홍전(金紅傳, 2책)·징세비태록(懲世否泰錄)·황운전(黃雲傳)·설인귀전(薛仁貴傳)·남정팔난기(南征八難記)·소대성전(蘇大成傳)·장백전(張伯傳)·춘향전(春香傳).

경판본 소설로는 1848년에 나온 삼설기(三說記)가 그 중 오래 되었다. 방각본은 당초 광통교 부근에서 시작해 을지로 입구 일대, 남대문, 서소문 밖, 명륜동, 창신동 등지로 전전하며 출간, 유통되었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방각본은 육전 소설에 이어 활판 딱지본에 밀려 마침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도 백두용(白斗鏞)의 한림서림(翰林書林)이 방각본의 명맥을 근근히 이어온 바 있으나, 6·25 전에 판목 20여 종을 전형필(全鎣弼)에게 넘겨서 보관하게 한 바 있다. 1920년대 이후 판각 인쇄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대신 석판 인쇄나 활판 인쇄를 하게 되면서 방각본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참고 문헌≫ 坊刻本論攷(安春根, 書誌學 創刊號, 韓國書誌學會, 1968), 이야기책(古代小說)板本誌略(李能雨, 古小說硏究, 二友出版社, 1980), 서울坊刻本의 槪觀(金東旭·黃浿江, 韓國古小說入門, 開文社, 198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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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笑子] 허균의 『홍길동전』 (경판본) 2007.09.29

화설(話說) 조선국 세종조 시절에 한 재상이 있으니, 성은 홍(洪)이요 명은 모(某)이라. 대대 명문거족으로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매, 물망이 조야(朝野)에 으뜸이요 충 겸비하기로 이름이 일국에 진동허더라. 일찍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일자(一子)는 이름이 인형(仁衡)이니 정실 류씨 소생이요, 일자는 이름이 길동(吉董)이니 시비(侍婢) 춘섬(春蟾)의 소생이라.

선시에 공이 길동을 낳을 때에 일몽(一夢)을 얻으니, 문득 뇌정벽력(雷霆霹靂)이 진동하며 청룡이 수염을 거스리고 공에게 향하여 달려들거늘, 놀라 깨달으니 일장춘몽이라. 심중에 대회하여 생각하되,

“내 이제 용몽을 얻었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으리라.” 하고 즉시 내당으로 들어가니 부인 류씨 일어 맞거늘, 공이 흔연히 그 옥수(玉手)를 이끌어 정히 친압(親狎)코자 하거늘, 부인이 정색 왈,

“상공이 체위 존중하시거늘 연소 경박자의 비루(鄙陋)함을 행코자 하시니, 첩은 봉행치 아니하리로소이다.”

하고 언파(言罷)에 손을 떨치고 나가거늘, 공이 무료하여 분기를 참지 못하고 외당에 나와 부인의 지식이 없음을 한탄하더니, 마침 시비 춘섬이 차를 올리거늘 그 고요함을 인하여 춘섬을 이끌고 협실(夾室) 들어가 정히 친압하니 이때 춘심의 나이 십팔이라.

한번 몸을 허(許)한 후로 문외(門外)에 나지 아니하고 타인을 취할 뜻이 없으니 공이 기특히 여겨 인하여 잉첩(*妾)을 삼았더니, 과연 그 달부터 태기 있어 십삭(十朔) 만에 일개 옥동(玉童)을 생하니 기골이 비범하여 진짓 영웅호걸의 기상이라. 공이 일변(一邊)기꺼하나 부인에게 나지 못함을 한(恨)하더라.

길동이 점점 자라 팔세 되매 총명이 과인(過人)하여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하니 고이 더욱 애중(愛重)하나 근본 천생(賤生)이라 길동이 매양 호부호형(呼父呼兄)하면 문득 꾸짖어 못 하게 하니, 길동이 십 세 넘도록 감히 부형을 부르지 못하고 비복(婢僕) 등이 천대함을 각골통한(刻骨痛恨)하여 심사를 정치 못하더니, 추구월(秋九月) 망간(望間)을 당하매 명월은 조요하고 청풍은 소슬하여 사람의 심회를 돕는지라. 길동이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문득 서안(書案)을 밀치고 탄왈(歎曰),

“대장부가 세상에 나매 공맹(孔孟)을 본받지 못하면 차라리 병법을 외어 대장인(大將印)을 요하(腰下)에 빗기 차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국가에 대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냄이 장부의 쾌사(快事)라. 나는 어찌하여 일신이 적막하고 부형이있으되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 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어찌 통한치 않으리오.”

하고 말을 마치며 뜰에 내려 검술을 공부하더니, 마침 공이 또한 월색을 구경하다가 길동의 배회함을 보고 즉시 불러 문왈(問曰),

“네 무슨 흥이 있어 야심(夜深)토록 잠을 자지 아니하는다.”

길동이 공경 대왈, “소인이 마침 월색을 사랑함이어니와,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내시매 오직 사람이 귀하오나 소인에게 이르러는 귀하옴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이까.”

공이 그 말을 짐작하나 진짓 책왈(責曰), “네 무슨 말인고.” 길동이 재배(才拜) 고왈(告曰),

“소인이 평생 설운 바는 대감 정기(精氣)로 당당하온 남자 되었사오매 부생모휵지은(父生母*之恩)이 깊삽거늘,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 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 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이까.”

하고 눈물을 흘려 단삼(單衫)을 적시거늘 공이 청파(聽罷)에 비록 측은하나 만일 그 뜻을 위로하면 마음이 방자할까 저어 크게 꾸짖어 왈, “재상가 천비 소생이 비단 너뿐이 아니어든 네 어찌 방자함이 이 같으뇨. 차후(此後) 다시 이런 말이 있으면 안전(眼前)에 용납지 못하리라.” 하니 길동이 감히 일언을 고치 못하고 다만 복지유체(伏地流涕)뿐이라. 공이 명하여 물러가라 하거늘 길도이 침소로 돌아와 슬퍼함을 마지아니하더라. 길동이 본디 재기(才氣) 과인(過人)하고 도량이 활달한지라 마음을 진정치 못하여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일일은 길동이 어미 침소에 가 울며 고왈,

“소자가 모친으로 더불어 전생 연분이 중하여 금세에 모자 되오니 은혜 망극하온지라. 그러나 소자의 팔자 기박하여 천한 몸이 되오니 품은 한이 깊사온지라. 장부가 세상에 처하매 남의 천대받음이 불가하온지라.

소자가 자연 기운을 억제치 못하여 모친 슬하를 떠나려 하오니, 복망(伏望) 모친은 조사를 염려치 말으시고 귀체(貴體)를 보중하소서.” 그 어미가 청파에 대경(大驚) 왈,

“재상가 천생(賤生)이 너뿐이 아니어든 어찌 협(狹)한 마음을 발하여 어미 간장을 살오느뇨.”

길동이 대왈(對曰),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은 천생이로되 십사 세에 그 어미를 이별하고 운봉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유전하였으니, 소자가 그를 효칙(效則)하여 세상을 벗어나려 하오니, 모친은 안심하사 후일을 기다리소서.

근간 곡산모(谷山母)의 행색을 보니 상공의 총(寵)을 잃을까하여 우리 모자를 원수같이 아는지라, 큰 화(禍)를 입을까 하옵나니, 모친은 소자가 나감을 염려치 말으소서.“ 하니 그 어미가 또한 슬퍼하더라.

원래 곡산모는 본디 곡산 기생으로 상공의 총첩이 되었으니 이름은 초란이라. 가장 교만 방자하여 제 심중에 불합하면 공에게 참소하니 이러므로 가중(家中) 폐단이 무수한 중, 저는 아들이 없고 춘섬은 길동을 낳아 상공이 매양 귀히 여김을 심중에 앙앙(怏怏)하여 없이함을 도모하더니, 일일은 흉계를 생각하고 무녀(巫女)를 청하여 왈,

“나의 일신을 편안케 함은 이 곧 길동을 없이키에 있는지라. 만일 나의 소원을 이루면 그 은혜를 후히 갚으리라.”

하니 무녀가 듣고 기꺼 대왈, “지금 흥인문(興仁門)밖에 일등 관상녀(觀相女)있느니 사람의 상을 한번 보면 전후 길흉을 판단하나니, 이 사람을 청하여 소원을 자시 이르고 상공께 천거하여 전후사(前後事)를 본 듯이 고하면 상공이 필히 대혹하사 그 아해를 없이코자 하시리니, 그 때를 타 여차여차(如此如此)하면 어찌 묘계가 아니리이꼬.”

초란이 대희(大喜)하여 먼저 은자(銀子) 오십 냥을 주며 상자(相者)를 청하여 오라 하니, 무녀가 하직고 가니라.

이튿날 공이 내당에 들어와 부인으로 더불어 길동의 비범함을 일컬으며 다만 천생임을 한탄하고 정히 말씀하더니, 문득 한 여자가 들어와 당하(堂下)에 문안하거늘 공이 고이히 여겨 문왈, “그대는 어떠한 여자완대 무삼 일로 왔나뇨?”

그 여자가 왈, “소인은 관상하기로 일삼더니 마침 상공 문하에 이르렀나니이다.”

공이 차언(此言)을 듣고 길동의 내사(來事)를 알고자 하여 즉시 불러 뵈니, 상녀가 이윽히 보다가 놀라며 왈,

“이 공자의 상을 보니 천고영웅이요 일대호걸이로되 다만 지체 부족하오니, 다른 염려는 없을까 하나이다.”

하고 말을 내고자 하다가 주저하거늘 공과 부인이 가장 고히 여겨 왈, “무슨 말을 바른 대로 이르라.”

상녀가 마지못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왈, “공자의 상을 보온즉 흉중(胸中)의 조화가 무궁하고 미간(眉間)에 산천정기가 영롱하오니 진짓 왕후(王侯)의 기상이라. 장성하면 장차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오리니 상공은 살피소서.”

공이 청파에 경아(驚訝)하여 묵묵반향(默默半*) 마음을 정하고 왈,

“사람의 팔자는 도망키 어렵거니와 너는 이런 말을 누설치 말라.” 당부하고 약간 은자를 주어 보내니라.

차후(此後)로 공이 길동을 산정(山亭)에 머물게 하고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엄숙히 살피니, 길동이 이 일을 당하매 더욱 설움을 이기지못하나 할 길 없어《육도(六韜)》ㆍ《삼략(三略)》과20) 천문지리를 공부하더니, 공이 이 일을 알고 크게 근심하여 왈,

“이놈이 본디 재조(才操)가 있으매 만일 범람(氾濫)한 의사를 두면 상년의 말과 같으리니 장차 어찌하리오.”

하더라. 이때 초란이 무녀와 상자를 교통하여 공의 마음을 놀랍게 하고 길동을 없이코자 하여 천금을 버려 자객을 구하니, 이름이 특재라. 전후사를 자시 이르고 초란이 공께 고왈, “일전(日前) 상녀가 아는 일이 귀신 같으매, 길동의 내사를 어찌 처치하시나니이까? 천첩도 놀랍고 두려워하옵나니 일찍 저를 없이 함만 같지 못하리로소이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찡기어 왈, “이 일은 내 장중에 있으니 너는 번거히 굴지 말라.”

하고 물리치나 심사가 자연 산란하여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인하여 병이 된지라. 부인과 좌랑(佐郞) 인형이 크게 근심하여 아무리할 줄 모르더니 초란이 곁에 모셨다가 고왈, “상공 환후(患候)가 위중하심은 길동을 두심이라, 천하온 소견은 길동을 죽여 없이하면 상공의 병환도 쾌차하실 뿐 아녀 문호(門戶)를 보존하오리니 어찌 이를 생각지 아니시나니꼬?”

부인 왈, “아무리 그러나 천륜이 지중하니 차마 어찌 행하리오.”

초란 왈, “듣자오니 특재라 하는 자객이 있어 사람 죽임을 낭중취물(囊中取物)같이 한다 하오니, 천금을 주어 밤에 들어가 해(害)하오면 상공이 알으시나 할 길 없사오리니 부인은 재삼 생각하소서.”

부인과 좌랑이 눈물을 흘려 왈, “이는 차마 못할 바로되, 첫째는 나라를 위함이요, 둘째는 상공을 위함이요, 셋째는 홍문(洪門)을 보존함이라. 너의 계교대로 행하라.” 초란이 대희하여 다시 특재를 불러 이 말을 지시 이르고 금야(今夜)에 급히 행하라 하니, 특태가 응낙(應諾)고 밤 들기를 기다리더라.

차설(且說) 길동이 그 원통한 일을 생각하매 시각을 머물지 못할 일이로되 상공의 엄령(嚴令)이 지중하므로 할일없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차야(此夜)에 촉(燭)을 밝히고 《주역》을 잠심(潛心)하다가 문득 들으니 까마귀가 세 번 울고 가거늘, 길동이 고이히 여겨 혼자말로 이르되, “이 짐승은 본디 밤을 꺼리거늘 이제 울고 가니 심히 불길하도다.”

하고 잠깐 팔괘(八卦)을 벌여 보고 대경(大驚)하여 서안(書案)을 물리치고 둔갑법(遁甲法)을 행하여 그 동정을 살피더니, 사경(四更)은 하여 한 사람이 비수를 들고 완완(緩緩)히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지라. 길동이 급히 몸을 감추고 진언(眞言)을 염하니, 홀연 일진음풍(一陣陰風)이 일어나며 집은 간데없고 첩첩한 산중의 풍경이 거룩한지라.

특재가 대경하여 길동의 조화가 신기함을 알고 비수를 피(避)코자 하더니, 문득 길이 끊어지고 층암적벽(層巖絶壁)이 가리웠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사면으로 방황하더니 문득 저 소리가 들리거늘,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일위(一位) 소동(小童)이 나귀를 타고 오며 저 불기를 그치고 꾸짖어 왈, “네 무슨 일로 나를 죽이려 하는다. 무죄한 사람을 해하면 어찌 천앙(天殃)이 없으리요.”

하고 진언을 염하더니 홀연 일진흑운(一陣黑雲)이 일어나며 큰 비가 붓듯이 오고 사석(沙石)이 날리거늘, 특재가 정신을 수습하여 살펴보니 길동이라. 비록 그 재조를 신기히 여기나, ‘어찌 나를 대적하리요’ 하고 달려들며 대호왈(大號曰),

“너는 죽어도 나를 원(怨)치 말라. 초란이 무녀와 상자로 하여금 상공과 의논하고 너를 죽이려 함이니 어찌 나를 원망하리요.”

하고 칼을 들고 달려들거늘 길동이 분기를 참지 못하여 요술로 특재의 칼을 앗아 들고 대매(大罵) 왈,

“네가 재물을 탐하여 사람 죽임을 좋이 여기니 너 같은 무도한 놈을 죽여 후환을 없이하리라.”

하고 한번 칼을 드니 특재의 머리가 방중(房中)에 내려지는지라. 길동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이 밤에 바로 상녀를 잡아 특재가 죽은 방에 들이치고 꾸짖어 왈, “네가 날로 더블어 무슨 원수가 있건대 초란과 한가지로 나를 죽이려 하더냐?”

하고 베이니 어찌 가련치 아니하리요.

이때 길동이 양인을 죽이고 건상(乾象)을 살펴보니 은하수는 서(西)으로 기울어지고 월색은 희미하여 수회(愁懷)를 돕는 지라. 분기를 참지 못하여 또 초란을 죽이고자 하다가 상공이 사랑하심을 깨닫고 칼을 던지며 망명도생(亡命圖生)함을 생각하고 바로 상공 침소에 나아가 하직을 고(告)코자 하더니, 이때 공이 창외(窓外)에 인적이 있음을 고이히 여겨 창을 열고 보니 이 곧 길동이라. 인견(引見) 왈, “밤이 깊었거늘 네 어찌 자지 아니하고 이리 방황하는다.”

길동이 복지(伏地) 대왈(對曰), “소인이 일찍 부생모휵지은을 만분지일이나 갚을까 하였더니, 가내(家內)에 불의지인(不義之人)이 있사와 상공께 참소하고 소인을 죽이려 하오매, 겨우 목숨은 보전하였사오나 상공을 모실길이 없삽기로 금일 상공께 하직을 고하나이다.”

하거늘 공이 대경 왈, “네 무슨 변고가 있건대 어린 아이가 집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는다.”

길동이 대왈, “날이 밝으면 자연 알으시려니와 소인의 신세는 부운(浮雲)과 같사오니 상공의 버린 자식이 어찌 방소(方所)를 두리이꼬.” 하며 쌍루종횡(雙淚縱橫)하여 말을 이루지 못하거늘 공이 그 형상을 보고 측은히 여겨 개유(開諭) 왈,

“내가 너의 품은 한을 짐작하나니 금일로부터 호부호형(呼父呼兄)함을 허(許)하노라.”

“소자의 일편지한(一片至恨)을 야야(爺爺)가 풀어 주옵시니 죽어도 한이 없도소이다. 복망(伏望) 야야는 만수무강(萬壽無彊)하옵소서.” 하고 재배 하직하니 공이 붙들지 못하고 다만 무사함을 당부하더라. 길동이 또 어미 침소(寢所)에 가 이별을 고하여 왈,

“소자가 지금 슬하를 떠나오매 다시 모실 날이 있사오리니 모친은 그 사이 귀체(貴體])를 보중하소서.”

춘랑(春랑)이 이 말을 듣고 무슨 변고가 있음을 짐작하나 아자(兒子)의 하직함을 보고 집수통곡(執手痛哭) 활,

“네 어디로 향코자 하는다. 한 집에 있어도 침수가 초간(稍間)하여 매양 연연하더니, 이제 너를 정처없이 보내고 어찌 잊으리요. 너는 수이 돌아와 모자 상봉함을 바라노라.”

길동이 재배 하직하고 문을 나매 운산(雲山)이 첩첩하여 지향없이 행하니 어찌 가련치 않으리오. 차설 초란이 특재으 소식 없음을 십분(十分) 의아하여 사기(事機)를 참지하니 길동은 간데없고 특재의 주검과 계집의 시신(屍방중(房中)에 있다 하거늘, 초란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부인께 고한대, 부인이 또한 대경하여 좌랑을 불러 이 일을 이르며 상공께 고하니, 공이 대경실색(大驚失色) 왈, “길동이 방에 와 슬퍼 하직함을 가장 고히 여겼더니 이 일이 있도다.”

좌랑이 감히 은휘(隱諱)치 못하여 초란의 실사(實事)를 고한대, 공이 더욱 분노하여 일변 초란을 내치고 가만히 그 시체를 없이하며 노복(奴僕)을 불러 “이런 말을 내지 말라.” 당부하더라.

각설(却說) 길동이 부모를 이별하고 문을 나매 일신이 표박(漂泊)하여40) 정처없이 행하더니, 한 곳에 다다느리 경개(景槪) 절승(絶勝)한지라. 인가를 찾아 점점 들어가니 큰 바위 밑에 석문(石門)이 닫혔거늘 가만히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원 광야에 수백 호 인가가 즐비하고 여러 사람이 모두 잔치하며 즐기니 이곳은 도적의 굴혈이라. 문득 길동을 보고 그 위인이 녹록(碌碌)치 않음을 반겨 문왈, “그대는 어떤 사람이완대 이곳에 찾아왔느뇨. 이곳은 영웅이 모이었으나 아직 괴수(魁首)를 정치 못하였으니, 그대 만일 용력(勇力)이 있어 참여코자 할진대 저 돌을 들어 보라.”

길동이 이 말을 듣고 다행하여 재배 왈, “나는 경성 홍판서의 천첩 소생 길동이러니 가중 천대를 받지 아니려 하여 사해팔방으로 정처없이 다니더니 우연히 이곳에 들어와 모든 호걸의 동료됨을 이르시니 불승감사(不勝感謝)하거니와 자부가 어찌 저만한 돌 들기를 근심하리요.” 하고 그 돌을 들어 수십 보를 행하다가 던지니 그 돌 무게가 천근이라. 제적(諸賊)이 일시에 칭찬 왈,

“과연 장사로다. 우리 수천 명 중에 이 돌 들 자가 없더니 오늘날 하늘이 도우사 장군을 주심이로다.”

하고 길동을 상좌에 앉히고 술을 차례로 권하고 백마(白馬) 잡아 맹세하며 언약을 굳게 하니, 중인(衆人)이 일시에 응낙하고 종일 즐기더라. 이후로 길동이 제인(諸人)으로 더불어 무예를 연습하 수월지내(數月之內)에 군법이 정제(整齊)한지라. 일일은 제인이 이르되, “아등(我等)이 벌써 합천 해인사를 쳐 그 재물을 탈최코자 하나 지략이 부족하여 거조(擧措)를 발(發)치 못하였더니, 이제 장군의 의향이 어떠하시니꼬?” “내 장차 발군(發軍)하리니 그대 등은 지휘대로 하라.”

하고 청포흑대(靑袍黑帶)에 나귀를 타고 종자(從者)수인을 데리고 나가며 왈, “내가 그 절에 가 동정을 보고 오리라.”

하고 가니 완연한 재상가 자제라. 그 절에 들어가 먼저 수승(首僧)을 불러 이르되,

“나는 경성 홍판서 댁 자제라. 이 절에 와 글공부하러 왔거니와, 명일에 백미 이십 석을 보낼 것이니 음식을 정히 차리면 너희들로 한가지로 먹으리라.” 하고 사중(寺中)을 두루 살펴보며 후일을 기약하고 동구를 나오니 제승(諸僧)이 기꺼하더라. 길동이 돌아와 백미 수십 석을 보내고 중인을 불러 왈, “내가 아무 날은 그 절에 가 이리이리 하리니 그대 등은 뒤를 쫓아와 이리이리 하라.”

하고 그날을 기다려 종자 수십 인을 데리고 해인사에 이르니 제승이 맞아 들어가니, 길동이 노승을 불러 문왈,

“내가 보낸 쌀로 음식이 부족지 아니하더뇨?”

노승 왈, “어찌 부족하리이까. 황감하여이다.”

길동이 상좌에 앉고 제승을 일제히 청하여 각기 상을 받게 하고 먼저 술을 마시며 차례로 권하니 모든 종이 황감하여 하더라. 길동이 상을 받고 먹더니, 문득 모래를 가만히 입에 넣고 깨무니 그 소리가 큰지라. 제승이 듣고 놀라 사죄하거늘 길동이 거짓 대로하여 꾸짖어 왈, “너희 등이 어찌 음식을 이다지 부정케 하뇨? 이는 반드시 능멸함이라.”

하고 종자에게 분부하여 제승을 다 한 줄에 결박하여 앉히니, 사중(寺中)이 황겁(徨怯)하여 아무리할 줄 무르는지라. 이윽고 대적(大賊) 수백여 명이 일시에 달려들어 모든 재물을 다 제 것가져가듯 하니 제승이 보고 다만 입으로 소리만 지를 따름이라.

이때 불목하니가 마침 나갔다가 이런 일을 보고 즉시 관가에 고하니, 합천 원(員)이 듣고 관군을 조발(調發)하여 그 도적을 잡으라 하니 수백 장교가 도적의 뒤를 쫓을새, 문득 보니 한중이 송낙을 쓰고 또 장삼(長衫) 입고 뫼에 올라 외쳐 왈,

“도적이 저 북편 소로(小路)로 가니 빨리 가 잡으소서.”

하거늘 관군이 그 절 중이 가르치는 줄 알고 풍우같이 북편 소로로 찾아가다가 날이 저문 후 잡지 못하고 돌아가니라. 길동이 제적을 남편 대로로 보내고 제 홀로 중의 복색으로 관군을 속여 무사히 굴혈로 돌아오니, 모든 사람이 벌써 재물을 수탐(搜探)하여 왔는지라. 일시에 나와 사례하거늘 길동이 소왈(笑曰), “장부가 이만 재조 없으면 어찌 중인의 괴수가 되리여.”

하더라. 이후로 길동이 자호(自號)를 활빈당(活貧黨)이라 하여 조선 팔도 다니며 각읍 수령이 불의로 재물이 있으며 탈취하고 혹 지빈무의(至貧無依)한 자가 있으면 구제하여 백성을 침범치아니하고 나라에 속한 재물은 추호도 범치 아니하니, 이러므로 제적이 그 의취(意趣)를 항복하더라. 일일은 길동이 제안을 모으로 의논 왈,

“이제 함경감사가 탐관오리(貪官汚吏) 준민고택(준民膏澤)하여 백성이 다 견디지 못하는지라. 우리 등이 그저 두지 못하리니, 그대 등은 나의 지휘대로 하라.” 하고 하나씩 흘러 들어가 아무 날 밤에 기약을 정하고 남문 밖에 불을 지르니 감사가 대경하여 그 불을 구(救)하라 하니 관속이며 백성들이 일시에 내달아 그 불을 구할새, 길동의 수백 적당이 일시에 성중에 달려들어 창고를 열고 전곡(錢穀)과 군기(軍器)를 수탐하여 북문으로 달아나니, 성중이 요란하여 물 끓듯 하는지라.

감사가 불의지변을 당하여 아무리할 줄 모르더니 날이 밝은 후 살펴보니 창고의 군기와 전곡이 비었거늘, 감사가 대경실색하여 그 도적 잡기를 힘쓰더니, 홀연 북문에 방(榜)을 붙였으되

“아무 날 전곡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하였거늘, 감사 발군(發軍)하여 그 도적을 잡으려 하더라.

차설 길동이 제적과 한가지로 전곡을 많이 도적하였으나 행여 길에서 잡힐까 염려하여 둔갑법과 축지법(縮地法)을 행하여 처소에 돌아오니 날이 새고자 하였더라. 일일은 길동이 제인을 모으로 의논 왈,

“이제 우리가 합천 해안사에 가 재물 탈취하고 또 함경 감영에 가 전곡을 도적하여 소문이 파다하려니와, 나의 성명을 써 감영에 붙였으니 오래지 아니하여 잡히기 쉬울지라. 그대 등은 나의 재조를 보라.”

하고 즉시 초인(草人) 입곱을 만들어 진언을 염하고 혼백을 붙이니, 일곱 길동이 일시에 팔을 뽐내어 크게 소리하고 한 곳에 모여 난만(爛慢)히 수작하니, 어느 것이 정 길동인지 알지 못하는지라. 팔도에 하나씩 흩어지되 각각 사람 수백 명씩 거느리고 다니니 그중에 정 길동이 어느 곳에 있는 줄 알지 못할러라.

여덟 길동이 팔도에 다니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술법을 행하니, 각읍 창곡(倉穀)이 일야간(一夜間)에 종적없이 가져가며 서울 오는 봉물(封物)을 의심없이 탈취하니, 팔도 각읍이 소요(騷擾)하여 밤에 능히 잠을 자지 못하고 도로에 행인이 그쳤으니, 이러므로 팔도가 요란한지라. 감사가 이 일로 장계(狀啓)하니 대강 하였으되,

“난데없는 홍길동이란 대적이 있어 능히 풍운을 짓고 각읍의 재물을 탈취하오며 봉송(封送)하는 물종(物種)일 올라가지 못하여 작난이 무수하오니, 그 도적을 잡지 못하오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 줄 알지 못하오리니 복망 성상(聖上)은 좌우 포청(捕廳)으로 잡게 하소서.” 하였더라. 상이 보시고 대경하사 포장을 명초(命招)하실새, 연하여 팔도가 장계를 올리는지라. 연하여 떼어 보시니 도적의 이름이 다 홍길동이라 하였고, 전곡 잃은 일자를 보시니 한날 한시라. 상이 크게 놀라사 가라사대,

“이 도적의 용맹과 술법은 옛날 치우(蚩尤)라도 당치 못하리로다. 아무리 신기한 놈인들 어찌 한 몸이 팔도에 있어 한날 한시에 도적하리요. 이는 심상(尋常)한 도적이 아니라 잡기 어려우리니 좌우 포장(捕將)이 발군하여 그 도적을 잡으라.”

하시니 이때 우포장 이흡이 주왈(奏曰),

“신이 비록 재조가 없사오나 그 도적을 잡아오리니 전하는 근심 말으소서. 이제 좌우 포장이 어찌 병출(幷出)하오리이까.64).”

상이 옳이 여기사 급히 발행함을 재촉하시니 이흡이 하직하고 허다 관졸을 거느리고 발행할새 각각 흩여져 아무 날 문경으로 모도임을 약속하고 이흡이 약간 포졸 수삼 인을 데리고 변복(變服)하고 다니더니, 일일은 날이 저물매 주점을 찾아 쉬더니 문득 일위 소년이 나귀를 타고 들어와뵈거늘 포장이 답례한대 그 소년이 문득 한숨지며 왈,

“보천지하(普天之下)에 막비왕토(莫非王土)요 솔토지민(率土之民)이 막비왕신(莫非王臣)이라 하니, 소생이 비록 향곡(鄕曲)에 있으나 국가를 위하여 근심이로소이다.” 포장이 거짓 놀라며 “이 어찌 이름이뇨.”

소년 왈, “이제 홍길동이란 도적이 팔도로 다니며 작난하매 인심이 소동하오니 이놈을 잡아 없이치 못하오니 어찌 분한(忿恨)치 않으리요.” 포장이 일 말을 듣고 왈, “그대 기골이 장대하고 언어가 충직하니 날과 한가지로 그 도적을 잡음이 어떠하뇨.”

소년 왈, “내 벌써 잡고자 하나 용력 있는 사람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대를 만났으니 어찌 만행(萬幸)이 아니리요마는, 그대 재조를 알지 못하니 그윽한 곳에 가 심헙하자.” 하고 한가지로 행하더니 한 곳에 이르러 높은 바위 위에 올라 앉으며 이르되,

“그대 힘을 다하여 두 발로 나를 차 내리치라.” 하고 낭 끝에 나아 앉거늘 포장이 생각하되,

‘제 아무리 용력이 있은들 한번 차면 제 어찌 아니 떨어지리요.’

하고 평생 힘을 다하여 두 발로 매우 차니, 그 소년이 문득 돌아앉으며 왈,

“그대 진짓 장사로다. 내가 여러 사람을 시험하되 나를 요동하는 자가 없더니, 그대에게 차이어 오장(五臟)이 울린 듯하도다. 그대가 나를 따라오면 길동을 잡으리라.” 하고 첩첩한 산곡으로 들어가거늘 포장이 생각하되.

“나도 힘을 자랑할 만하더니 오늘 저 소년의 힘을 보니 어찌 놀랍지 않으리요 그러나 이곳까지 왔으니 설마 저 소년이 혼자라도 길동 잡기를 근심하리요.” 하고 따라가더니 그 소년이 문득 돌쳐서면 왈,

“이곳이 길동의 굴협이라. 내가 먼저 들어가 탐지할 것이니 그대는 여기 있어 기다리라.”

포장이 마음에 의심되나 빨리 잡아옴을 당부하고 앉았더니, 이윽고 홀연 산곡으로조차 수십 군졸이 요란히소리 지르며 내려오는지라. 포장이 대경하여 피코자 하더니 점점 가까이 와 포장을 결박하여 꾸짖어 왈,

“네가 포도대장 이홉인다. 우리 등이 지부(地府) 왕명(王命)을 받아 너를 잡으러 왔다.”

하고 철삭(鐵索) 목을 옭아 풍우같이 몰아가니 포장이 혼불부체(魂不附體)하여 아무런 줄 모르는지라. 한 곳에 다다라 소리 지르며 끓려 앉히거늘 포장이 정신을 가다듬어 치밀어보니 궁권이 관대한데 무수한 황건역사(黃巾力士)가 좌우에 나열하고 전장(殿上)의 일위 군왕이 좌탑(座榻)에 앉아 여성(*聲) 왈,

“네가 요마필부(**匹夫)로 어찌 홍장군을 잡으려 하는고. 이러므로 너를 잡아 풍도(*都)섬에 가두리라.”

포장이 겨우 정신을 차려 왈, “소인은 인간의 한미한 사람이라 무죄히 잡혀 왔으니 살려보냄을 바라나이다.”

하고 심히 애걸하거늘 전상에서 웃음소리 나며 꾸짖어 왈,

“이 사람아. 나를 자시 보라. 나는 곧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 그대가 나를 잡으려 하매 그 용력과 뜻을 알고자 하여 작일(昨日)에 내가 청포 소년으로 그대를 인도하여 이곳에 와 나의 위엄을 뵈게 함이라.”

하고 언파에 좌우를 명하여 맨 것을 끌러 당에 앉히고 술을 내와 권하여 왈,

“그대는 부질없이 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가되, 나를 보았다하면 반드시 죄책(罪責)이 있을 것이니 부디 이런 말을 내지 말라.”

하고 다시 술을 부어 권항 좌우로 명하여 내어보내라 하니, 포장이 생각하되 내가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어찌하여 이리 왔으며, 길동의 조화를 신기히 여겨 일어 가고자 하더니 홀연 사지를 요동치 못하는지라. 고히 여겨 정신을 진정하여 살펴보니 가죽부대 속에 들었거늘, 간신히 나와 본즉 부대 셋이 나무에 걸렸거늘 차례로 글러 내어 보니 처음 떠날 제 데리고 왔던 하인이라. 서로 이르되,

“이것이 어찐 일인고. 우리가 떠날 제 문경으로 모이자 하였더니 어찌 이곳에 왔는고.”

하고 두루 살펴보니, 다른 곳 아니요 장안성 북악(北嶽)이라. 사인이 어이없이 장안을 굽어보며 하인더러 일러 왈,

“너는 어찌 이곳에 왔느뇨.”

삼인이 고왈, “소인 등은 주점에서 자옵더니 홀연 풍운에 싸이어 이리 왔사오니, 무슨 연고를 아지 못함이로소이다.”

포장 왈, “이 일이 가장 허무맹랑하니 남에게 전설치 말라. 그러나 길동의 재조가 불측(不測)하니 어찌 인력으로써 잡으리요. 우리등이 이제 그저 들어가면 필경 죄를 면치 못하리니 아직 수월(數月)을 기다려 들어가자.”

하고 내려오더라. 차시(此時) 상이 팔도에 행관(行關)하사 길동을 잡으라 하시되 그 변화가 불측하여, 장안 대로(大路)로 혹 초헌(*軒)도 타고 왕래하며 혹 각읍에 노문(路文)77) 놓고 쌍교(雙轎)도 타고 왕래하며 혹 어사(御史)의 모양을 하여 각읍 수령 중 탐관오리하는 자를 문득 선참후계(先斬後啓)하되 가어사(假御史) 홍길동의 계문(啓文)이라 하니 상이 더욱 진노하사 왈,

“이놈이 각도에 다니며 이런 작난을 하되 아무도 잡지 못하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여.”

하시고 삼공육경(三公六卿)을 모아 의논하시더니 연하여 장계가 오르니 다 팔도의 홍길동이 작난하는 장계라. 상이 차례로 보시고 크게 근심하사 좌우를 돌아보시며 문왈, “이놈이 아바도 사람은 아니요 귀신의 작폐니 조신(朝臣) 중 누가 그 근본을 짐작하리요.” 일인이 출반주왈(出班奏曰), “홍길동은 전임 이조판서 홍모의 서자요 병조좌랑 홍인형의 서제(庶弟)오니, 이제 그 부자를 나래(拿來)하여 친문(親問)하시면 자연 알으실까 하나이다.”

상이 익노(益怒) 왈, “이런 말을 어찌 이제야 하는다.” 하시고 즉시 홍모는 금부(禁府)로 나수(拿囚)하고 먼저 인형을 잡아들어 친국(親鞫)히실새 천위(天威) 진노하사 서안을 쳐 가라사대,

“길동이란 도적이 너의 서제라 하니 어찌 금단치 아니하고 그저 두어 국가의 대환이 되게 하느뇨. 네 만일 잡아들이지 아니하면 너의 부자의 충효를 돌아보지 않으리니, 빨리 잡아들여 조선 대변을 없게 하라.”

인형이 황공하여 면관돈수(免冠頓首) 왈, “신의 천한 아우가 있어 일찍 사람을 죽이고 망명도주(亡命逃走)하온 지 수년이 지나오되, 그 존망을 아옵지 못하와 신의 늙은 아비가 이로 인항 신병이 위중하와 명재조석(命在朝夕)이온 중, 길동의 무도불측함으로 성상에 근심을 끼치오니 신의 죄만사무석(萬死無惜)이오니, 복망 전하는 자비지택(慈悲之澤)을 드리옵시어 신의 아비 죄를 사하사 집에 돌아가 조병(調病)케 하시면 신이 죽기로써 길동을 잡아 신의 부자의 죄를 속하올까 하나이다.”

상이 문파(聞罷)에 천심이 감동하사 즉시 홍모를 사하시고 인형으로 경상감사를 제수하사왈,

“경이 만일 감사의 기구(機構)가 없으면 길동을 잡지 못할 것이오. 일년한을 정하여 수이 잡아들이라.”

하시니, 인형이 백배사은하고 인하여 하직하며 즉일 발행하여 감영에 도임하고 각읍에 방을 붙이니, 이는 길동을 달래는 방이라. 기사(其辭)에 왈, “사람이 세상에 나매 오륜(五倫)이 으뜸이요 오륜이 있으매 인의예지(仁義禮智) 분명하거늘, 이를 알지 못하고 군부(君父)의 명을 거역하여 불충불효되면 어찌 세상에 용납하리요. 우리 아우 길동은 이런 일을 알 것이니 스스로 형을 찾아와 사로잡히라. 우리 부친이 너로 말미암아 병입골수(病入骨髓)하시고 성상이 크게 근심하시니, 네 죄악이 관영(貫盈)한지라. 이러므로 나를 특별히 도백(道伯)을 제수하사 너를 잡아들이라 하시니, 만일 잡지 못하면 우리 홍문(洪門)위 누대청덕(屢代淸德)이 일조에 멸하리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바라노니 아우 길동은 이를 생각하여 일찍 자현(自現)하면93) 너의 죄도 덜릴 것이요 일분을 보존하리니, 아지 못게라, 너는 만번 색각하여 자현하라.“ 하였더라

감사가 이 방을 각읍에 붙이고 공사를 전폐하여 길동이 자현하기만 기다리더니, 일일은 한 소년이 나귀를 타고 하인 수집을 거느리고 원문(轅門) 밖에 와 뵈옴을 청한다 하거늘, 감사가 들어오라 하니 그 소년이 당상에 올라 배알(拜謁)하거늘 감사가 눈을 들어 자시 보니 때로 기다리던 길동이라. 대경대희(大驚大喜)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그 손을 잡아 오열유체(嗚咽流涕)95) 왈,

“길동아. 네가 한번 문을 나매 사생존망(死生存亡)을 알지 못하여 부친께서 병입고황  하시거늘, 너는 가지록 불효를 끼칠 뿐만 아녀 국가에 큰 근심이 되게 하니, 네 무슨 마음으로 불충불효를 행하며 또한 도적이 되어 세상에 피치 못할죄를 하는다. 이러므로 성상이 진노하사 나로 하여금 너를 잡아 들이라 하시니, 이는 피치 못할 죄라. 너는 일찍 경사(京師)에97) 나아가 천명을 순수(順受)하라.”

하고 말을 마치며 눈물이 비오듯 하거늘 길동이 머리를 숙이고 왈,

“천생이 이에 이름은 부형의 위태함을 구코자 함이니 어찌 다른 말이 있으리요. 대저 대감께서 당초에 천한 길동을 위하여 부친을 부친이라 하고 형을 형이라 하였던들 어지 이에 이르리이꼬. 왕사(往事)는 일어 쓸데없거니와 이제 소제를 결박하여 경사로 올려보내소서.” 하고 다시 말이 없거늘, 감사가 이 말을 듣고 일변 슬퍼하며 일변 장계를 써 길동을 항쇄(項鎖) 족쇄(足鎖)하고 함거(檻車)에 실어 건장한 장교 십여 인을 빠 압령(押領)하게 하고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올려보내니, 각읍 백성들이 길동의 재조를 들었는지라 잡아옴을 듣고 길이 메여 구경하더라.

차시팔도에서 다 길동을 잡아올리니 조정과 장안 인민이 망지소조(芒知所措)하여 능히 알 이가 없더라. 상이 놀라사 만조(滿朝)를 모으시고 친국(親鞫)하실새 여덟 길동을 잡아올리니, 저희 서로 다투어 이르되 네가 정 길동이요 나는 아니라 하며 서로 싸우니 어느 것이 정 길동인지 분간치 못할레라. 상이 고이히 여기사 즉시 홍모를 명초(命招)하사 왈,

“지자(知子)는 막여부(莫如父)라 하니 저 여덟 중에 경(卿)의 아들을 찾아내라.”

홍공이 황공하여 돈수청죄(頓首請罪) 왈, “신의 천생 길동은 좌편 다리에 붉은 혈점이 있사오니 일로 조차 알리로소이다.”

하고 여덟 길동을 꾸짖어 왈, “네 지척에 임금이 계시고 아래로 네 아비가 있거늘 이렇듯 천구에 없는 죄를 지었으니 죽기를 아끼지 말라.” 하고 피를 토하며 엎더져 기절하니, 상이 대경하사 약원(藥院)으로106) 구하라 하시되 차도가 없는지라. 여덟 길동이 이 경상(景狀)을 보고 일시에 눈물을 흘리며 낭중(囊中)으로조차 환약일 개씩 내어 입에 드리오니, 홍공이 반향 후(半향後) 정신을 차리는지라. 길동 등이 상께 주왈,

“신의 아비가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사오니 신이 어지 감히 불측한 행사를 하오리이까마는, 신은 본디 천비(賤婢) 소생이라 그 아비를 아비라 못 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 하오니 평생 한이 맺혔삽기로 집을 버리고 적당(賊黨)에 참예하오나, 백성은 추호(秋毫) 불범하옵고 각읍 수령의 준민고택(浚民膏澤)하는 재물을 탈최하였사오나, 이제 십 년을 지내면 조선을 떠나 가을곳이 있사오니 복걸(伏乞) 성상은 근심치 말으시고 신을 잡는 관자(關子) 거두옵소서.”

하고 말을 마치며 여덟 길동이 일시에 넘어지니, 자시 본즉 다 초인(草人)이라. 상이 더욱 놀라시며 정 길동 잡기를 다시 행관(行關)하여 팔도에 내리시니라. 차설 길동이 초인을 없이하고 두루 다니더니 사대문에 방을 붙였으되,

“요신(妖臣) 홍길동은 아무리 하여도 잡지 못하리니 병조판서 교지(敎旨)를 내리시면 잡히리이다.”

하였거늘 상이 그 방문을 보시고 조신을 모아 의논하시니 제신왈,

“이제 그 도적을 잡으려 하다가 잡지 못하옵고 도리어 병조판서 제수하심은 불가사문어인국(不可使聞於隣國)이로소이다.”

상이 옳이 여기사 다만 경상감사에게 길동 잡기를 재촉하시더라. 이때 경상감사가 엄지(嚴旨)를 보고 황공송률(惶恐悚慄)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일일은 길동이 공중으로 내려와 절하고 왈,

“소제기 지금은 정작 길동이오니, 형장은 아무 염려 말으시고 소제를 결박하여 경사로 보내소서.”

감사가 이 말을 듣고 집수유체(執手流涕) 왈,

“이 무거(無據)한 아이야. 너도 나와 동기(同氣)어늘 부형의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일국이 소동케 하니 어찌 애닯지 않으리오 네가 이제 정작 몸이 와 나를 보고 잡혀 가기를 자원하니 도리어 기특한 아이로다.”

하고 급히 길동의 좌편 다리를 보니 과연 흠점(홍점)이 있거늘, 즉시 사지를 각별 결박하고 함거에 넣어 건장한 장교 수십을 가리어 철통같이 싸고 풍우같이 몰아가되 길동의 안색이 조금도 변치 아니하더라.

여러 날 만에 경성에 다다르니 궐문에 이르러는 길동이 한번 몸을 요동하매 철삭이 끊어지고 함거가 깨어져 마치 매아미 허물 벗듯 공중으로 오르며 표연히 운무(雲霧)에 묻혀 가니 장교와 제군이 어이없어 공중만 바라보고 다만 넋을 잃을 따름이라. 할 수 없어 이 연유로 상달하온대 상이 들으시고 왈, “천고에 이런 일이 어디 있으리요.”

하시고 크게 근심하시니, 제신 중에 일인이 주왈,

“그 길동의 원이 병조판서를 한번 지내면 조선을 떠나리라 하오니, 한번 제 원을 풀면 제 스스로 사은(謝恩)하오리니 이때를 타 잡음이 좋을까 하나이다.” 상이 옳이 여기사 즉시 홍길동으로 병조판서를 제수하시고 사문(四門)에 방을 붙이니라. 이때 길동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사모(紗帽) 관대(冠帶)에 서띠[犀帶] 띠고 높은 초헌을 헌거롭게 높이 타고 대로상에 완연히 들어오며 이르되,

“이제 홍판서가 사은하러 온다.” 하니, 병조 하속(下屬)이 맞아 호위하여 궐내에 들어갈새 백관이 의논하되,

“길동이 오늘 사은하고 나올 것이니 도부수(刀斧手)를 매복하였다가 나오거든 일시에 쳐 죽이라.”

하고 약속을 정하였더니 길동이 궐내에 들어가 숙배(肅拜)하고 주왈,

“소신의 죄악이 지중하옵거늘 도리어 천은을 입사와 평생 한을 푸옵고 돌아가오나 영결(永訣) 전하(殿下)하오니, 복망 성상은 만수무강하소서.” 하고 말을 마치며 몸을 공중에 솟어 구름에 싸이어 가니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더라. 상이 보시고 도리어 차탄 왈,

“길동의 신기한 재조는 고금에 희한하도다. 제가 지금 조선을 떠나노라 하였으니 다시는 작폐할 길 없을 것이요, 비록 수상하나 일단 장부의 쾌한 마음이 있는지라 족히 염려 없을랏다.”

하시고 팔도에 사문(赦文)을 내리와 길동 잡는 공사를 거두시니라.

각설 길동이 제 곳에 돌아와 제적에게 분부하되,

“내가 다녀올 곳이 있으니 여등(汝等)은 아무 데 출입 말고 내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즉시 몸을 솟구어 남경으로 향하여 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이는 소위 율도국(*島國)이라. 사면을 살펴보니 산천이 청수(淸秀)하고 인물이 번성하여 가히 안신(安身)할 곳이라 하고, 남경에 들어가 구경하고 또 제도라 하는 섬 중에 들어가 두루 다니며 산천도 구경하고 인심도 살피며 다니더니, 오봉산에 이르러는 진짓 제일강산이라 주회(周回) 칠백 리요 옥야답(沃野沓)이 가득하여 살기에 정히 의합한지라. 내심에 헤오되115) 내 이미 조선을 하직하였으니 이곳에 와 아직 은거하였다가 대사를 도모하리라 하고, 표연히 본곳에 들어와 제인더러 일러 왈, “그대 아무 날 양천강(陽川江) 변에 가 배를 많이 지어 모월 모일에 경성 한강에 대령하라. 내가 임금께 청하여 정조(精粗) 일천 석을 구득하여 올 것이니 기약을 어기지 말라.”

하더라. 각설 홍공이 길동이 작난 없으므로 신병이 쾌차하고 상(上)이 또한 근심 없이 지내더니 차시 추구얼 망간에 상이 월색을 띠어 후원에 배회하실새 문득 일진청풍(一陣淸風)이 일어나며 공중으로서 옥저[玉*] 소리 청아한 가운데 한 소년이 내려와 상께 복지하거늘 상이 경문(驚問) 왈, “선동(仙童)이 어찌 인간에 강굴(降屈)하며, 무슨 일을 이르고자 하나뇨?”

소년이 복지주왈, “신은 전임 병조판서 홍길동이로소이다.”

상이 경문왈, “네가 어찌 심야에 온다.”

길동이 대왈,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실까 하오나 천비 소생이라. 문(文)으로 옥당(玉堂)에 막히옵고 무(武)로 선천(宣薦)에 막힐지라. 이러므로 사방에 오유(傲遊)하와 관부에 작폐하고 조정에 득죄하옴은 전하가 알으시게 하옴이러니, 신의 소원을 들어 주옵시니 전하를 하직하고 조선을 떠나가오니 복망 전하는 만수무강하소서.”

하고 공중에 올라 표연히 가거늘 상이 그 재조를 못내 칭찬하시더라. 이후로는 길동의 폐단이 없으매 사방이 태평하더라.

각설 길동이 조선을 하직고 남경땅 제도섬으로 들어가 수천호 집을 짓고 농업을 힘쓰고 재조를 배워 무고(武庫)를 지으며 군법을 연습하니 병정약족(兵精糧足)하더라.

일일은 길동이 살촉에 바를 약을 얻으러 망탕산(芒*山)으로 향하더니 낙천 땅에 이르러는 그곳에 부자 백룡(白龍)이란 사람이 있으니 그는 일찍 한 딸을 두었으되 재질이 비상하매 부모 애중하더니 일일은 광풍이 대작하며 딸이 간데없는지라. 백룡 부부가 슬퍼하며 천금을 흩어 사방으로 찾으되 종적이 없는지라. 부부가 슬퍼하며 말을 펴 왈,

“아무라도 내 딸을 찾아 주면 가산(家産)을 반분(半分)하고 사위를 삼으리라.”

하거늘 길동이 그 말을 듣고 심중에 측은하나 할 일없어 망탕산에 가 약을 캐며 들어가더니 날이 저문지라 주저하더니, 문득 사람의 소리가 나며 등촉(燈燭)이 조요(照耀)하거늘 그곳을 찾아가니 사람은 아니요 괴물이 앉아 지저귀거늘, 원래 이 짐승은 울동이란 짐승이라 여러 해를 묵어 변화가 무궁하더라. 길동이 몸을 감추고 활로 쏘니 그 중 괴수가 맞은지라 모두 소리 지르고 달아나거늘, 길동이 나무에 의지하여 밤을 지재고 두루 약을 캐더니 문득 괴물 수삼 명이 길동을 보고 문왈,

“그대는 무슨 일로 이 깊은 곳에 이르뇨?”

길동이 답왈, “내가 의술을 알매 이 산에 들어와 약을 캐더니 그대 등을 만나니 다행하도다.”

그것이 대희(大喜) 왈, “나는 이곳에 산 지가 오래더니 우리 왕이 부인을 새로 정하고 작야(昨夜)에 잔치하더니 천살(天煞)을 맞아 위중한지라. 그대가 명의라 하니 선약을 왕의 병을 고치면 중상을 얻으리라.”

하거늘 길동이 헤오되, “이놈이 작야에 상한 놈이로다.”

하고 허락한대 그것이 길동을 인도하여 문에 세우고 들어가더니 이윽고 청하거늘, 길동이 들어가 보니 화각(畵閣)이 광려한 가운데 흉악한 것이 누워 신음하다가 길동을 보고 몸을 거동하며 왈,

“복(僕)이 우연히 천살을 맞아 위태하더니 시자의 말을 듣고 그대를 청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살림이라. 그대는 재조를 아끼지 말라.”

길동이 사사(謝辭)하고 왈, “먼저 내치(內治)할 약을 쓰고 버거 외치할 약을 씀이 좋을까 하노라.”

그것이 응낙하거늘 길동이 약낭(藥囊)의 독약을 내어 급히 온수에 화(和)하여 먹이니, 식경(食頃)은 하여 한 소리 지르고 죽는지라. 모든 요괴가 일시에 달려들거늘 길동이 신통을 내어 모든 요괴를 짓치더니, 문득 두 소년 여자가 애걸 왈,

“첩 등은 요괴가 아니라 인조(人曹) 사람으로서 잡히어 왔사오니 잔명(殘命)을 구하여 세상으로 나가게 하소서.”

길동이 백룡의 일을 생각하고 거주를 물으니 하나는 백룡의 딸이요 하나는 조철의 달이라. 길동이 요괴를 소청(掃淸)하고 두 여자를 각각 제 부모를 찾아 주니 그 부모가 대희하여 즉일에 홍생 맞아 사위를 삼으니, 제일 백소저(白小姐)요, 제이 조소저라. 길동이 일조(一朝)에 양처(兩處)를 얻고 두 집 가권(家眷)을 거느려 제도섬으로 가니 모든 사람이 반기며 치하하더라. 일일은 길동이 천문을 보다가 놀라 눈물을 흘리거늘 제인이 문왈,

“무슨 연고로 슬퍼하느뇨.” 길동이 탄왈. “내가 부모를 천상 성신(星辰)으로 안부를 짐작하더니, 건상(乾象)을 본즉 부친 병세가 위중하신지라. 내 몸이 원처(遠處)에 있어 미치지 못할까 나노라.”

하니 제인이 비감하여 하더라. 이튿날 길동이 월봉산에 들어가 일장(一張) 대지(大地)를 얻고 산역(山役)을 시작하되 석물(石物)을 국릉(國陵)과 같이 하고, 일척(一隻) 대선(大船)을 준비하여 조선국 서강(西江) 강변을 대후(待候)하라 하고, 즉시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일엽 소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하니라. 각설 홍판서가 홀연 득병하여 위중한지라. 부인과 인형을 불러 왈,

“내가 죽으나 무한(無恨)이로되 길동의 사생을 알지 못하니 유한이라. 제가 생존하였으면 찾아올 것이니 적서(嫡庶)를 분별치 말고 제 어미를 대접하라.” 하고 명이 진(盡)하니 일가가 망극하여 치상(治喪)할새 산지(山地)를 구치 못하여 민망하더니, 일일은 문리(門吏)가 보(報)하되, “어떤 중이 와 영위(靈位)에 조문(弔問)하려 하나이다.”

하거늘 고이히 여겨 들어오라 하니, 그 중이 들어와 방성대곡하니 제인이 곡절을 몰라 면면상고(面面相顧)하더라.131) 그 중이 상인에게 일장통곡한 후 가로되, “형장이 어찌 소제를 몰라보시나이까.”

하거늘 상인이 자세히 보니 이 곧 길동이라. 붙들고 통곡 왈,

“현제(賢弟)야. 그 사이 어디 갔더뇨. 부공(父公)이 생시에 유언이 간절하시매 어찌 인자(人子)의 도리리요.”

하고 손을 이끌고 내당에 들어가 모부인을 뵈옵고 춘랑을 상면할새 일장통곡한 후 문왈,

“네 어찌 중이 되어 다니느뇨.” 길동이 대왈, “소자가 조선을 떠나 삭발위승하여 지술(地術)을 배웠더니 이제 부친을 위하여 대지를 얻었으니 모친은 물려(勿慮)하소서.”

인형이 대희 왈. “네 재조가 기이한지라. 길지(吉地) 곧 얻었으면 무슨 염려가 있으리요.”

하고 명일에 운구(運柩)하여 제 모친을 데리고 서강 강변에 이르니 길동의 지휘한 바 선척이 대후한지라. 배에 올라 살같이 저어 한 곳에 다다르니 중인이 수십 선척을 해후한지라. 서로 반기며 호위하여 가니 거룩하더라.

어언지간에 산상에 다다르니 인형이 자세히 본즉 산세(山勢)가 웅장한지라. 길동의 지식을 못내 탄복하더라. 산역을 마치매 한가지로 길동의 처소로 돌아오니 백씨와 조씨가 존고(尊姑)와 숙숙(媤叔)을 맞아 뵈온 후 인형 춘랑이 못내 길동의 지식을 탄복하더라.

여러 날이 되매 인형이 길동과 춘랑을 이별하고 산소를 극진히 모심을 당부한 후, 산소에 하직하고 발행하여 본국에 이르러 모부인을 뵈온 후 전후수말(前後首末)을 고한대 부인이 신기히 여기더라.

각설 길동이 제전(祭奠)을 극진히 받들어 삼상(三喪)을 마치매 모든 영웅을 모아 무예를 익히며 농업을 힘쓰니 병정양족 한지라. 남중(南中)에 율도곡이란 나라가 있으니 옥야(沃野) 수천리의 진짓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길동이 매양 유의하던바이라. 제인을 불러 왈, “내가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나니 그대 등은 진심(盡心)하라.”

하고 즉일 진국할새 길동이 스스로 선봉이 되고 마숙으로 후군장(後軍將)을 삼아 정병 오만을 거느려 율도국 철봉산에 다다라 싸움을 돋우니, 태수 김현충이 난데없는 군마가 이름을 보고 대경하여 일변 왕에게 보하고 일지군을 거느려 내달아 싸우거늘, 길동이 맞아 싸워 일합(一合)에 김현중을 베이고 철봉을 얻어 백성을 안무하고 정철로 철봉을 지키우고 대군을 휘동하여 바로 도성을 칠새, 격서를 율도국에 보내니 하였으되,

“의병장 홍길동은 글월을 율도왕에게 부치나니, 대저 임금은 한 사람의 임금이 아니요 천하 사람의 임금이라. 내가 천명을 받아 기병(起兵)하매 먼저 철봉을 파(破)하고 물밀 듯 들어오니 왕은 싸우고자 하거든 싸우고 불연즉(不然則) 일찍 항(降)하여 살기를 도모하라.” 하였더라. 왕이 남필(남畢)에 대경 왈,

“아국(我國)이 전혀 철봉을 믿거늘 이제 잃었으니 어찌 저당(抵當)하리요.” 하고 제신을 거느려 항복하니, 길동이 성중에 들어가 백성을 안무하고 왕위에 즉(卽)한 후 율도왕으로 의령군을 봉하고 마숙 최철로 좌우상(左右相) 삼고 기여(其餘) 제장은 다 각각 봉작한 후 만조백관이 천세(千歲)를 불러 하례하더라.

왕이 치국(治國) 삼 년에 산무도적(山無盜賊)하고 도불습유(道不拾遺)하니 가위(可謂) 태평세계러라. 왕이 백룡을 불러 왈,

“내가 조선 성상께 표문(表文)을 올리려 하나니 경은 수고를 아끼지 말라.” 하고 표문과 서찰을 홍부(洪府)에 부치니라. 백룡이 조선에 득달하여 먼저 표문을 올린대 상이 표문을 보시고 대찬(大讚) 왈,

“홍길동은 진짓 기재(奇才)로다.” 하시고 홍인형으로 위유사(慰諭使)를 하이사 유서(諭書)를 나리오시니 인형이 사은한 후 돌아와 모부인께 연중 설화를 고한대, 부인이 또한 가려 하거늘 인형이 마지 못하여 부인을 모시고 발행하여 여러 날 만에 율도국에 이르니, 왕이 맞아 와 향안(香案)을 배설하고 유서를 받자온 후 모부인과 인형으로 반기며 산소에 소분(掃墳)한 후 대연(大宴)을 배설하여 즐기더라. 여러 날이 되매 류씨 홀연 득병하여 졸(卒)하니 선릉(先陵)에 쌍장하고, 인형이 왕을 하직고 본국에 돌아 복명(復命)하온대 상이 그 모상(母喪) 당함을 위유(慰諭)하시더라. 차설 율도왕이 삼상(三喪)을 마치매 대비가 이어 기세(棄世)하매 선릉에 안장한 후 삼상을 마치매, 왕이 삼자 이녀를 생하니 장자 차자는 백씨 소생이요 삼자 차녀는 조씨 소생이라. 장자 현으로 세자를 봉하고 기여(其餘)는 다 봉군(封君)하니라. 왕이 치국 삼십 년에 홀연 득병하여 붕하니 수(壽)가 칠십이 세라. 왕비가 이어 붕하매 선릉에 안장한 후 세자가 즉위하여 대대로 계계승승하여 태평으로 누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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