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拳鬪)라고도 함.
2명의 선수가 양 손에 글러브를 끼고 서로 공격과 방어를 하는 운동.
개요
복싱 /마이크 타이슨을 10라운드 KO로 ...
시합은 퀸즈베리 룰에 의해 3~15라운드로 벌어지며 1라운드는 3분이고, 각 라운드 사이에 1분의 휴식시간이 있다. 선수들은 체급별로 나뉘어 같은 체급의 선수끼리 상대방의 주먹을 피하면서 자신의 주먹으로 상대방을 가격(加擊)한다. 20세기에 들어와 복싱을 뜻하는 용어로 '푸질리즘'(pugilism)과 '프라이즈파이팅'(prizefighting)이란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푸질리즘은 라틴어에서 주먹을 의미하는 푸그너스(pugnus)와 관련되어 '주먹싸개를 끼고 싸우는 사람'이란 뜻의 푸질(pugil), 또는 그리스어의 '주먹을 꽉 쥐고 싸우는 사람'을 뜻하는 픽스(pyx)에서 유래되었다. 프라이즈파이팅이란 용어는 돈을 목적으로 한 운동경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경기를 하기 전에 아마도 수세기 동안 주먹을 논쟁의 해결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종전에는 BC 1500년경 고대 크레타에서 권투를 한 것이 최초라고 알려졌지만, 최근에 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권투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BC 4000년경의
이집트에 보급된 것은 이집트가 에티오피아에 여러 차례 원정을 가서 승전한 이후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집트 문명이 번성함에 따라 권투는 지중해 연안과 중동지역으로 전파되었다. BC 686년경 고대
올림픽 대회 종목으로 채택될 만큼 완전히 개량 개량되었지만 지금의 복싱과는 달랐다. 그 당시에는 옥외에서 관중들에 둘러싸여 상대방이 더이상 시합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했다. 비록 선수들은 명예를 위해 싸웠지만 승리한 선수에게는 대개 금이나 가축, 승리의 기념품 등의 충분한 보상이 있었다. 선수들은 손과 손목을 보호하기 위해 주먹과 때로는 팔뚝의 2/3 정도를 부드러운 가죽끈으로 감쌌다. BC 4세기에는 가죽끈을 더 딱딱하게 만들어 보호장비뿐만 아니라 공격무기로 변형시켜 사용했다.
로마 제국 말기에는 황동이나 쇳덩어리를 단 '
세스투스'라고 하는 글러브가 개발되었으며, 또한 관중의 즐거움을 위해 노예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강요했다.
그리스도교의 성장,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오락으로서의 권투는 수세기 동안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록에 따르면 권투로서 형식을 갖춘 시합은 일찍이 1681년에
영국에서 처음 벌어졌으며, 1698년
런던 왕립극장에서 공식적인 시합이 벌어졌다. 런던이 성장하면서 '프라이즈파이팅'으로 알려지게 된 권투시합이 벌어져 런던에서 꽤 인기를 얻었다. 관중들은 내기를 했으며 선수들은 내기돈을 올리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이러한 시합은 대개 장갑을 끼지 않고 규칙 없이 진행되었다. 체급별 구분이 없어 챔피언도 단 한 사람뿐이었고, 체중이 가벼운 사람이 물론 불리했다. 각 라운드는 구분되었지만 시합은 한 선수가 더이상 싸울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격투가 허용되어 상대방을 바닥에 집어던진 후 그 위를 덮치기도 했으며, 1700년대 중반까지도 쓰러진 상대방을 가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권투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18세기초 영국에서 하나의 스포츠로 다시 등장했다. 최초의 챔피언은 1719년 관중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로 인정받은 제임스
피그였으며, 그는 타이틀을 15년 동안 보유했다. 1734~50년 영국의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잭
브로턴은 권투를 스포츠다운 스포츠로 자리잡도록 했다. 1743년 그가 최초로 만든 경기규칙은 1838년 좀더 세부적인 내용을 갖춘 '런던 프라이즈 링 룰'이 마련될 때까지 당시의 모든 권투시합에 적용되었다. 이전의 선수들은 술집에서 싸움을 하듯이 난폭하게 시합을 했지만 그는 주로 주먹에 의존하는 시합을 펼쳤다. 브로턴이 만든 규칙에 따라 한 라운드는 한 선수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며 선수가 쓰러진 뒤 30초가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면 경기가 완전히 끝나며 30초 후 상대방의 90cm 앞에서 팔꿈치를 펴 공격자세를 취하면 시합은 계속된다. 또한 레슬링처럼 서로 맞잡고 씨름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쓰러진 선수를 때리거나 허리선 아래를 잡는 것은 금했다. 또한 '권투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로턴은 선수들의 손과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글러브의 초기형태인 '머플러'를 개발해서 권투에 보다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잭 슬랙이 브로턴에게 타이틀을 빼앗은 후에 부정시합이 자주 벌어져 권투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다니엘
멘도자와 '젠틀맨' 존 잭슨과 같은 우수한 선수도 배출되었다.
멘도자는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데 처음으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한 선수로 1780년대말 발놀림과 왼손 잽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멘도자의 뒤를 이은
잭슨은 유명인사들로 하여금 권투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돈을 목적으로 하는 프라이즈파이팅 경기에서 단순한 스포츠로 전환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1814년 경기를 관리하기 위해 런던에서 '권투협회'가 설립되었으며 1838년에 이르러 영국과 미국에서
런던 프라이즈 링 룰을 받아들였다. 이 룰은 1839년 제임스 '데프' 버크가 윌리엄 톰프슨 '벤디고'에게 영국의 챔피언 타이틀을 내준 시합에 처음 적용되었으며, 선수들은 2줄의 로프로 둘러싸인 7.32㎡의 4각의 링에서 시합을 벌였다. 각 라운드와 시합종결에 관한 규정은 브로턴의 규칙과 같았지만 쓰러진 선수는 세컨드의 도움없이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했다. 만약 선수가 시합이 시작된 후 8초 이내에 링에 나오지 않으면 심판은 패배를 선언하며 발로 차기, 손가락으로 찌르기, 머리로 박기, 물기, 허리 아래 가격하기 등은 확실한 반칙으로 규정되었다.
런던 프라이즈 링 룰이 권투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상류층의 후원자를 확보하기 위해 규칙을 더 많이 고쳐야 했다. 1867년 아마추어 체육클럽의 존 그레이엄
체임버스는 기술과 기량을 강조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그는 이 규칙의 명칭에 퀸즈베리의 9대 후작인 존 숄토 더글러스의 이름을 땄으며 또 후원도 받았다. 퀸즈베리 룰은 런던 프라이즈 링 룰과 4가지 면에서 다르다. ① 선수들은 글러브를 끼고, ② 1라운드는 3분이며 각 라운드 사이에 1분간 휴식을 취하고, ③ 레슬링을 해서는 안 되고, ④ 쓰러진 선수는 도움 없이 10초 이내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때 일어나지 못하면 녹아웃(KO)으로 선언되면서 시합은 끝나게 된다. 또한 이 규칙이 적용되던 시기에 처음으로 체급별 시합이 이루어졌다. 초기에 젊은 선수들은 이 규칙을 선호했지만 많은 권투전문가들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여 프로 선수권대회에는 런던 프라이즈 링 룰을 적용했다. 미국의 챔피언인 존 L.
설리번은 런던프라이즈 링 룰에 따라 경기를 한 마지막 선수였으며 1892년 '젠틀맨 짐' 제임스 J.
코벳은 퀸즈베리 룰에 따라 설리번을 물리치고 최초의 챔피언이 되었다.
20세기초에 이르러 복싱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름길이 되었다. 경제성장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이민의 물결로
미국은 프로 복싱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일랜드계 선수들은 초기에는 헤비급에서만 우세를 보였지만 1915년경에는 모든 체급을 휩쓸게 되었다. 유대계 선수들은 1915~30년에 특히 돋보였다. 타니 칸조네리, 로키 마르시아노, 조니 던디, 윌리 펩 등의 이탈리아계 선수들이 192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한편 흑인들 가운데에는 이미 19세기부터 재능있는 선수들이 있었지만 인종적 차별에 부딪혀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잭
존슨은 사실상 헤비급 챔피언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지만 실질적인 도전권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가 챔피언이 된 것은 1908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후 흑인 선수들은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기간 동안에도 복싱 경력을 쌓아갔다. 1937~49년에 헤비급 챔피언을 지내면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조
루이스는 흑인선수들의 나쁜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그 이후에 탄생한 헤비급 챔피언 가운데는 백인보다 흑인 선수가 더 많았다. 또한 '슈거' 레이 로빈슨, 아치 무어, 에자드 찰스, '저지' 조 왈콧, 프로이드 페터슨, 소니 리스턴,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등의 흑인 선수들이 여러 체급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슈거' 레이 레너드, '마블러스' 마빈 해글러, 토머스 헌스, 래리 홈스, 마이클 스핑크스, 마이크
타이슨 등과 같은 걸출한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흑인이 복싱계를 지배했다. 카를로스 몬손, 파스칼 페레스, 로베르토 두란, 알렉시스 아겔로와 같은 라틴아메리카계 선수들도 알려지게 되었다. 필리핀의 판초 빌라가 1923년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으며, 20세기 후반 동아시아가 권투의 온상지가 되면서 많은 아시아의 선수들이 헤비급을 제외한 모든 체급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1867년 처음으로 아마추어 선수권대회가 퀸즈베리 룰에 따라 열렸다. 1880년 영국에서 최초의 아마추어 복싱 조직체인 아마추어 복싱 협회(Amateur Boxing Association/ABA)가 결성되었다. 이듬해 ABA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아마추어 선수권대회를 주관했다. 1888년 미국에서는
아마추어 경기연맹(Amateur Athletic Union/AAU)이 설립된 후 매년 경기를 열었다. 1926년
〈시카고 트리뷴〉지(紙)가 발족시킨 복싱 대회가 1927년부터
골든글러브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열렸으며 AAU 대회와 대등한 이 대회는 전국 규모로 성장했다
(→ 골든글러브). 아마추어 복싱은 세계 여러 나라로 급속히 전파되어 몇 개의 주요국제대회가 열린다. 주요대회로는 유럽 경기대회, 영연방경기대회, 범미주경기대회, 아프리카 선수권대회, 세계군인대회 등이 있다. 모든 국제대회는 1946년 설립된
국제 아마추어 복싱 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Boxe Amateur/AIBA)에서 관리하며 이 협회의 본부는 런던에 있다.
모든 공산국가에는 정치적·사회적 정책으로 프로 복싱선수들이 없지만
소련은 1950년 AIBA에 가입해 1952년 올림픽 대회 때부터 출전했으며, 폴란드·헝가리·
쿠바 등이 아마추어 복싱의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한편 카스트로 정권이 프로 복싱을 금지하기 전까지 우수한 프로 선수를 많이 배출했던 쿠바는 아마추어 복싱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헤비급의 테오필로
스티븐슨은 1972, 1976, 1980년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프리카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독립한 후 복싱에 있어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세계 프로 복싱계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단일 조정기구가 없다. 영국의 근대적인 프로 복싱 단체는 1887년에 결성된 펠리칸 클럽이었지만 이 기구는 1891년 영국 스포츠 클럽에 자리를 빼앗겼다. 영국 복싱 조정위원회(1919)가 1929년부터 사실상 영국 스포츠 클럽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1920년 미국에서 민간조직인 미국 복싱 협회(National Boxing Association/NBA)와 정부기관인 뉴욕 주립체육평의회가 설립되었다. 1962년 NBA는
세계 복싱 협회(World Boxing Association/WBA)로 개편되어 완전히 미국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기구로 1963년
세계 복싱 평의회(World Boxing Council/WBC)가 결성되었다. 이 두 기구는 각각 선수권대회를 주관하며 챔피언을 공인하는 일에 관여했으나 1965년부터 서로 다른 챔피언을 지명하면서 그 수준이 낮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3년
국제 복싱 연맹(International Boxing Federation/IBF)이 창설되어 보통은 각 체급에서 3명의 세계챔피언을 갖게 되었다. 1920년대에 미국의 흥행사인 텍스
리카드가 복싱 경기로 100만 달러의 입장 수입을 올린 결과, 복싱은 첫번째 전성기를 누렸다. 모든 체급이 인기를 끌었지만 헤비급이 가장 우세했다. 잭
뎀프시는 굉장한 인기를 누렸던 선수로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랫동안 헤비급 챔피언을 지낸 조 루이스도 인기가 높아서, 그 당시 선수권대회를 중계한 라디오 방송은 높은 청취율을 기록했다. 조 루이스가 1949년에 은퇴할 무렵 프로 복싱의 2번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복싱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것이 1950년대말까지 인기가 있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지방의 복싱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유명한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구경하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지방의 복싱 클럽과 선수들은 더이상 관중을 끌어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수권대회의 텔레비전 중계료 수입은 계속 늘어났다. 1980년대에 이르자 중량급 한 경기당 1,500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초에 걸쳐 복싱이 대중화되면서
체중이 가벼운 선수가 체중이 무거운 선수와 시합을 벌여야 하는 불합리성을 없애기 위해 헤비급을 제외한 모든 체급이 구분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체급구분이 서로 다르지만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8가지 체급은 다음과 같다. 플라이급(50.80kg 이하), 밴텀급(53.52kg 이하), 페더급(57.15kg 이하), 라이트급(61.23kg 이하), 웰터급(66.68kg 이하), 미들급(72.57kg 이하), 라이트 헤비급(79.38kg 이하), 헤비급(79.38kg 초과) 등이다. 모든 국제·국내 경기에서는 체급 제한이 엄격히 지켜지며 만약 선수가 한계체중을 초과하게 되면 규칙에 따라 규정된 체중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 주어진다. 도전자가 주어진 시간에 체중 조절에 실패하면 그 시합은 무효가 되고 챔피언이 실패하면 타이틀을 박탈당하게 된다. 한편 WBC는 크루저급(86.16kg 이하), 슈퍼 미들급(74.84kg 이하), 슈퍼 웰터급(69.85kg 이하), 슈퍼 밴텀급(55.34kg 이하), 슈퍼 플라이급(52.61kg 이하), 라이트 플라이급(49.89kg 이하), 스트로급(47.62kg 이하) 등 새로운 체급을 인정했다.
프로 복싱을 조정하는 단일기구가 없어 각 국가들은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경기는 4개의 로프로 둘러싸인 4.88~6.10㎡의 링에서 벌어진다. 프로 복싱 경기는 3분을 1라운드로해서 4~12라운드까지 진행되며, 타이틀전은 12라운드이거나 15라운드이다. 또한 선수들은 8온스(약 227g)에서 10온스(약 284g) 정도의 글러브를 착용한다.
주심은 선수들과 함께 링 안에 들어가서 경기를 조정한다. 주심은 채점에 관여하지 않고 링 주위에 있는 부심들만이 채점할 수 있다. 선수가 쓰러져 일어날 수 없는 경우나 주심이 10까지 센 후에도 경기를 재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될 때 경기는 끝난다. 한편 주심이나 링 닥터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선수나 세컨드가 경기를 계속할 수 없다고 결정할 때도 경기는 끝날 수 있는데 이런 경우를 TKO(Technical Knocked Out)라고 한다. 아마추어 경기는 3회전이며 선수들은 머리보호대를 착용한다. 주심은 경기만 진행하며 3~5명의 부심들이 경기내용을 채점한다.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실격패가 흔히 일어난다.
가장 효과적인 공격은 상대방의 방어를 뚫을 만큼 빠르고 강한 펀치를 가하는 것이다. 한편 주먹을 얼굴 앞으로 올리고 상대선수의 공격반경 밖에서 옆이나 뒤로 스텝(발놀림)을 밟거나, 머리와 상체를 구부리거나 비틀면서 상대선수의 펀치를 막거나 피하면서 방어한다. 스텝은 공격과 방어에서 중요하다. 발의 자세에 따라 왼손과 왼발을 앞으로 하는 정공법(오서독스 스타일)과 그 반대인 왼손잡이법(사우스포 스타일)으로 구분된다. 또한 양손잡이 선수는 경기 도중 자세가 자주 바뀌는 선수를 말한다.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어떤 자세든지 가격하는 손을 몸의 앞쪽으로 뻗고 다른 손은 턱을 보호하기 위해 턱 가까이에 대며 턱은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고 어깨는 움츠린다. 기본가격법으로
잽·
훅·
어퍼컷·
크로스 등이 있다. 잽은 오서독스나 사우스포 모두 앞쪽에 있는 팔을 어깨에서 곧바로 뻗으면서 찌르듯이 치는 타격이고, 훅은 충격을 가하는 순간 팔꿈치와 손목을 구부려서 팔과 주먹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공격하는 기술이다. 어퍼컷은 아래로부터 주먹을 올려치는 공격법이고, 크로스는 어깨 높이에서 몸을 가로질러 가격하는 것으로 보통 잽을 가한 후에 다른 손을 이용한다.
한국에 복싱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12년 10월 7일 광무대와 단성사의 주인인 박승필(朴承弼)이 체육의 보급을 목적으로 유각권투구락부(柔角拳鬪俱樂部)를 조직하여 그 회원들이 권투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후 1916년에 미국인 선교사 P. 질레트가 권투 글러브를 가지고 들어왔으며 1922년부터 권투시합이 중앙 기독교청년회(
YMCA)에서 연례행사로 거행되었다. 1925년 1월 30일 중앙 YMCA 주최로 열린 제9회 실내운동회 때 권투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스포츠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27년 9월에는 중앙 YMCA 체육부에서 권투부를 개설하여 30명의 부원을 정식으로 지도했으며, 1928년 6월에는 중앙 YMCA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하여 제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고, 1929년에는
황을수(黃乙秀)가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아마추어 권투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황을수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당시 라이트급 전일본선수권을 따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3년 전일본선수권자를 체급별로 보면 플라이급에 서정권, 밴텀급에 황을수, 웰터급에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참가한 이규환 등으로 한국 선수가 당시의 일본 권투계를 주름잡았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1월에 성의경, 이혜택, 장권, 강낙원, 김동준, 서정훈, 가나이 도시요, 다카야 스로우 등 각 단체별로 2명씩이 참가하여 유억겸(兪億兼)을 초대 회장으로 한 전조선 아마추어 권투연맹이 발족했다. 이후 권투가 적성 스포츠라 하여 일제에 의해 배격당하자 많은 권투인들은 중국 상하이로 가서 활동하기도 하고 일부는 독립군을 돕기도 했다. 8·15해방 후 권투인들은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단체를 조직하여 한국 복싱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5년에 문현승의 대한권투연합회와 황을수의 조선권투연맹 등이 조직되었고 두 단체는 1947년 3월 대한권투연맹으로 통합되었다가 1965년 5월
한국 복싱 위원회(KBC)로 발족되어 한국의 프로 복싱을 관장하고 있다. 또한 안동원(安東原)을 초대 회장으로 한 전조선 아마추어 권투연맹이 1945년 10월에 창립되어 1947년 국제 아마추어 권투연맹에 가입했으며, 아시아의 복싱 발전을 위한 아시아 아마추어 복싱 연맹(FAABC)이 1962년에 창설되었다. 1964년 7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스포츠로서의 순수한 발전을 도모하고자 '권투'라는 용어 대신 '복싱'이라고 원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연맹의 명칭도 '
대한 아마추어 복싱 연맹'이라고 개칭했다. 이러한 기틀을 발판으로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전체급을 석권하는 드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1935년 프로 권투와 아마추어 권투가 서로 분리되면서 프로 권투만의 조직체인 조선권투연맹이 창설되었는데, 일찍이 프로 권투선수로 활약한 인물은 김정연(金正淵)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다. 그후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 6위에 올랐던 서정권,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했던 황을수,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이상묵(李相默) 등이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조선권투연맹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8·15 해방과 함께 복싱 단체들 사이에 세력다툼이 일어나 혼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1947년 12월 대한권투연맹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정복수(鄭福壽)·송방헌(宋芳憲)·박형권(朴炯權) 등이 국내무대에서 활약했으나 국제적인 지명도는 없는 상태였다. 1955년 한국·필리핀·일본·타이 4개국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프로 복싱을 관장하는 동양복싱연맹(OBF)이 창설되고 1960년 강세철(康世哲)이 동양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이 된 뒤부터 한국 권투의 국제무대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그뒤 한국은 1963년 세계 복싱 평의회(WBC)에 가입했고, 1965년에는 1921년에 창설된 세계 복싱 협회(WBA)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한국은 1966년 6월 김기수가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이 되면서 프로 권투의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뒤를 이어 홍수환(洪秀煥)·유제두(柳濟斗)·김태식(金泰式)·김환진(金煥珍)·유명우(柳明佑)·최희용(崔熙墉)·문성길(文成吉) 등이 WBA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 복싱 한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한국선수로 가장 먼저 WBC의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는 염동균(廉東均)으로, 1976년 6월 일본의 로얄 고바야시를 물리치고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후 김성준(金性俊)·김상현(金相賢)·박찬희(朴贊希)·김철호(金喆鎬)·장정구(張正九) 등이 WBC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다. 1983년에는 새로운 기구인 국제 복싱 연맹(IBF)이 창설되었으며 역시 많은 한국선수들이 IBF 챔피언에 오르는 개가를 올렸다. 한편
장정구는 1988년 11월 WBC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자진 반납할 때까지 15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끝냄으로써 동급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다. 또한 유명우는 1991년 4월 WBA 주니어 플라이급 17차 방어에 성공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밖에 문성길(WBC 슈퍼 플라이급)·박영균(WBA 페더급)·변정일(WBC 밴텀급)·이형철(WBA 주니어 밴텀급)·최용수(WBA 주니어 라이트급)·조인주(WBC 슈퍼 플라이급)·최요삼(WBC 라이트 플라이급)·백종권(WBA 슈퍼 페더급)·지인진(WBC 페더급) 등이 챔피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