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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2006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참가한Compagnie Mossoux-Bonte의 그림자 무용극 ‘Light' 중에서가물거리는 촛불이 반대편 벽 위에 길쭉한 내 몸을 그려놓고, 내 동생들의 몸들도 길게 늘려 그려놓고 히물거리던 때가 있었다. 정전이 자주 되던 그 시절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촛불을 붙여놓고, 손가락으로 날개 짓하는 새와 컹컹 짓는 강아지 그림자를 만드는 재미에 빠져 잠 잘 때를 놓치곤 했었다. 허리를 부여잡고 킥킥거리면 어느 사이 똑같이 쿡쿡 따라 웃는 그림자가 내 동작을 흉내 냈다. 짐짓 심각한 듯 허리께에 손을 올리고 뚫어지라 벽을 응시하면 그림자도 시커멓게 굳은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룽거리는 그림자 셋의 키는 벽면을 넘기고 천장에 까지 기울어져 겨우 벽의 중간에나 닿을 듯 말듯 작은 꼬마 셋의 키를 모두 합친 것 보다 길 때가 많았다.
요즈음은 어디나 훤해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고서는 물상의 그림자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형광등의 불빛은 모든 그림자를 지워버릴 정도로 사방을 골고루 환하게 비춰준다. 방을 들어서자마자 천장에 매달린 작은 백열등의 스위치를 켜던 시절은 달랐다. 낮은 촉수의 은근한 불빛은 모든 사물이나 생물 옆에 바짝 붙어있는 정령의 존재를 그림자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오래전 고대인들은 그림자를 영혼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만질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살아 있는 현존감을 표현하기 위해 시노파도스(Synopados, 뒤에 따라는 자)라는 말로 그림자를 표현했다고도 전한다.
가끔 나는 어린 마음에 나를 늘 뒤따르는 그림자란 존재를 두려워도 했다. 심지어 한낮에도 태양빛 아래 내 옆에 바짝 붙어 다니던 그림자를 감히 발로 밟게 될까 걸음걸이도 신경이 쓰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어린 마음에도 원시적인 신앙의 흔적이 존재했기 때문이 듯 싶다. 프레이져(Frazer)는 그의 유명한 저서 ??황금의 가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야만인은 그의 그림자나 영상을 그의 영혼이라고 보거나 어쨌든 자신의 살아있는 부분으로 간주했으며 그런 만큼 그것은 그에게 위험의 근원이기도 했다.”
프레이져가 말한 야만인들처럼 나도 내가 그림자를 밟거나 남에게 내 그림자가 밟히면 내 자신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 같은 근거 없는 주술적 마법에 스스로 걸려 있던 시기이다.
‘Light' 중에서 Moussoux(모쑤)의 그림자가 거대한 괴물로 형상화된 모습
조용한 폭풍이라도 찾아올 것 같은 여름밤이면, 창호지문 너머로 보이는 라일락 나무는 긴 손을 흔들며 음산한 소리로 나를 불렀다. 달빛 그림자에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듯 라일락 나뭇가지들의 그림자가 창호지문을 통과해 맡은 편 벽 위로도 제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방안 가득 오싹할 정도의 찬기가 들도록 머리채를 흔들곤 했었다. 그 뿐이랴? 무섭기로 치면 달 빛 아래 나를 쫓던 내 그림자처럼 무서운 것이 또 어디 있을려고. 우리 집 인근에는 까치 뿐 아니라 꿩도 날아다니는 제법 우거진 숲이 있었다. 그 숲을 지나야 버스 정류소가 나타난다. 나는 피아노 레슨이 늦게 끝나는 날에는 당시 대학원생이던 겁쟁이 피아노 선생님을 그 곳까지 모셔다 드려야만 했다. 레슨 중에는 연습 부족이나 손모양이 흐트러졌다는 이유로 나무 자를 세워 내 손등을 때리던 선생이었다. 그러나 기실은 어찌나 겁쟁이든지 흐릿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세워진 그 숲에 이르러서는 내 팔짱을 바짝 끼고 두 다리를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겁이 잔뜩 났지만 몇 대의 매타작을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겁먹은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입을 꼭 다문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야무지게 굴고 싶었다. 하지만 피아노 선생님을 버스 정류소까지 모셔다 드리고 혼자 그 숲길을 되돌아 올 때의 사정은 전혀 딴 판이다.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하는 각오하는 달리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또박또박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숲 속에 메아리치면 점점 다급해진 마음으로 발을 자주 놀리게 된다. ‘걸음아 나 살려라’라고 외치고는 내 그림자에 잡힐까 숲 속을 질주하게 된다. 숲을 간신히 빠져나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나면 이내 뒷골이 서늘해진다. 히뜩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내 그림자만이 내 모든 어리석은 행동을 관찰하고도 모른 채 할 뿐이다.
물론 어린 시절의 경험은 나만의 유일한 체험은 아니다. 장자(莊), ??어보(漁父)??편을 보면 제자들과 함께 공자가 숲속에 들어가 쉬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난 고기잡이 늙은이로 부터도 내 경험과 거의 유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처럼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것은 비단 원시인이나 어린 나만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입관 시 관뚜껑을 씌우려 할 때 가장 가까운 가족 이외의 문상객들은 모두 몇 발자국 뒤로 몰러서거나 아예 다른 방에 가 있곤 한다. 산사람의 그림자가 관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건강에 해가 끼친다는 미신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믿는 주술적 신앙은 멀리 남태평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적도에 가까운 암보이나(Amboyna)섬 사람들은 한낮에 그림자가 없어지거나 매우 짧기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영혼의 그림자를 잃지 않기 위해 대낮에는 밖에 나가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제 다시 그림자에 관한 즐겁고 밝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예전 중국의 소동파(蘇東坡)는 어느 날 벗들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벽에 비친 제 옆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옆 사람을 시켜 벽으로 가서 자신의 그림자의 윤곽을 그리게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신기(傳神記)??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사람 중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박한 호기심으로 그림자놀이를 즐긴 이들이 제법 있다. 그 중 책만 읽은 바보로 알려진 이덕무의 경우는, 구름이 걷힌 가을날 문종이를 바른 창 위에 국화꽃이 또렷한 제 그림자를 남기는 것을 보고 얼른 붓으로 국화꽃을 그렸다고 한다. 그 순간 마당에 핀 국화위로 나비 한 쌍이 꽃잎 위에 앉았다고 한다. 마음이 다급해져 붓질도 빨라졌는데, 왠일일까? 참새마져 날아와 자신도 그려달라며 가지에 매달렸으니, 이 모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창호문 위에 그린 한 점의 그림은 비록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도록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목구심서??에 전한다. 낮 동안 햇살에 의해 생긴 그림자를 즐기는 풍류만 전하는 바는 물론 아니다. 정약용의 ??국영시서(菊影詩序)??는 호롱불 앞 그림자놀이에 초대된 조선 후기 선비들의 정겨운 풍경을 담고 있는데 이야기는 이러하다.( ??미쳐야 미친다??, 그림자 놀이, 270,271쪽에서 재인용, 정진, 푸른 역사)
국화의 빼어난 운치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로 등불 앞의 그림자를 꼽을 수 있다. 매일 밤 방의 벽면을 치우고 등잔을 차려놓고 국화 그림자를 혼자 즐기곤 한 다산은 하루는 남고(南?) 윤이서에게 들렀다 그를 초대한다. 한밤중에 국화를 볼 수 있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윤이서를 불러놓고 다산은 동자를 시켜 등잔을 잡게 하고 꽃 한 송이에 바짝 대게 하고 윤이서를 당겨서 이를 보게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별로 신기하게 여기지 않은 윤이서도 기이한 무늬와 희한한 형상이 갑작스레 벽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고 황홀경에 곧 빠지게 된다.
스투트가르트 인형박물관에 전시된 중극 그림자극 인형들 앞에서 필자
벽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오묘한 현상을 즐기는 일이 이쯤 되면 어린이들만의 장난거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변화 없는 무풍의 일상 속에 상상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그림자의 세계는 다소 과장된 현실 너머의 세계를 무채색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는 평면이다. 그러나 이 평면이 너울대고 어른대고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일 때 동심을 잃은 각박한 우리들의 마음도 울렁이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그림자를 즐기는 아취가 이제는 일상 밖으로 사라져 버린 지 너무도 오래 되었다.
여름날 밤, 하얀 홑겹 이불을 꺼내 베란다와 방 사이의 커다란 창에 매달고, 램프 불을 켜고 어설프게 만든 종이 인형들을 간이 무대에 세운다. 줄거리는 엉성하지만 즉흥적으로 한여름 밤의 꿈이 공연된다. 구경꾼이라 봐야 유치원 다니는 꼬마 동생이 전부이지만, 하얀 천위에 드리워진 종이 인형의 그림자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부실한 극본의 허점을 채워 주기 족할 만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나마 그림자 인형극도 추억도 가뭇하다. 너무 오래 전 추억이라 그 느낌까지는 생생히 기억되지 않아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의 문명화된 사회는 그림자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 그림자를 제거해 버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자는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속도에 내몰린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전근대적 속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자가 없는 우리는 이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신화가 살아있는, 옛이야기가 살아있는 제3의 차원을 전부 잃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곤한 잠에 빠져있는 이 무의식의 형체인 그림자를 깨우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정전이 되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과학 기술과 편리의 문명이 제공한 정전 없는 나날들은 삶에서 낭만적 변화의 계기마저 앗아가 버렸다. 아, 그리워라. 우리들의 어설펐던 그림자 극장!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그림자는 빛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분신이다. 그 분신은 빛 속에 가려진 우리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부정적인 온갖 것들을 보여주는 투사된 이미지들이다. 우리에게 ??끝없는 이야기??, ??모모??의 작가로 알려진 미하일 엔데는 그림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의 그림자에 관한 철학이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에 담겨 프리드리히 헤헬만의 그림과 만났다. 자, 그럼 숨을 죽이고 오필리아가 있는 그림자 극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기로 하자.
오필리아는 연극과 함께 살아온 할머니다. 이름마저도 세익스피어의 극 ??햄릿??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에서 따온 것으로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그녀의 부모님이 장차 오필리아가 위대한 여배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정작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배우로는 살 수 없었다. 무대 옆의 작은 상자에 몸을 숨기고 무대 위에 오르는 다른 배우들이 대사를 잊는 경우 작은 목소리로 대사를 알려주는 일이 그녀의 임무였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가 된 그녀는 그나마도 할 수 없다. 연극을 보러 오는 이들의 숫자도 줄어 극단들도 하나 둘 씩 문을 닫아야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연이 끝난 밤, 텅 빈 극장에 홀로 남은 그녀는 평생을 지내온 작은 상자에 앉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고 있었다. 그 때 무대 배경 위로 그림자 하나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그녀 주변을 뱅뱅 돌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오필리아가 물었다. “너는 그림자니?” 그러자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아가 또 물었다. “하지만 그림자에는 주인이 있게 마련이쟎니?” 그림자가 곤란해 하며 대답했다. “그렇지만은 않아요. 이 세상에는 주인 없이 혼자인 그림자들이 꽤 많아요.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그림자들이죠. 저도 그 그림자들 중 하나고요. 제 이름은 ‘그림자 장난꾼’이예요.” 오필리아는 그림자 장난꾼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제안을 한다. “그럼 나한테 오지 않으련? 나도 혼자란다.” 오필리아는 자신에게 본래 있던 그림자를 잠시 잊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 장난꾼은 오필리아의 친절한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어 머뭇거렸다. 그제서야 깨달은 오필리아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야, 내 그림자랑 너랑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거야.” 이렇게 해서 오필리아와 그림자 장난꾼은 늘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물론 오필리아의 그림자까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 낮 동안 그림자 장난꾼은 작은 손가방 안에 들어가 있었지만, 밤에는 자유로웠다.
어느 날 오필리아가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동안 하얀 벽 위에 또 다른 커다란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외로움에 지쳤던 이 그림자의 이름은 ‘무서운 어둠’이었지만, 간절히도 할머니와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오필리아는 이 그림자도 받아들여 그녀의 그림자는 세 개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 거의 날마다 주인 없는 그림자들이 오필리아를 찾아왔고 오필리아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네 번째 그림자의 이름은 ‘외로움’ 다섯 번째는 ‘밤앓이’, 여섯 번째는 ‘힘없음’ 그리고 일곱 번째는 ‘덧없음’이었다. 그림자 친구들이 많이 생겨 오필리아의 작은 방은 북적거렸다. 덕분에 오필리아도 예전처럼 외롭지는 않았지만 그림자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며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내면서 그림자들을 화해시키며 지내다 기운이 다 빠져버린 오필리아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평생을 읊조린 아름다운 비극과 희극의 대사들을 이 그림자들에게도 가르쳐주면 그림자들이 언젠가는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림자들도 더는 싸우지 않고 성실히 대사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제 그림자들은 제각각 난쟁이, 거인, 바보, 왕, 마법사, 심지어 나무와 책상의 역을 맡게 되었다.
오필리아는 그림자들로 구성된 극단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며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커다란 흰 천을 나뭇가지에 엮어 걸어 만든 무대에서 그림자들이 제각각 맡은 역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그림자극을 본 적 없던 사람들은 이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 마을의 숲에 나와 그림자극이 시작하기를 기다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많은 적든 구경한 값을 치렀고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단은 그동안 번 돈으로 낡은 자동차 한 대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자동차에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이라는 홍보문을 새기고, 넓은 세상을 두루두루 구경하면서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지난날 외로웠던 그림자들도 오필리아 할머니와 함께 세상 살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눈보라 치던 밤, 눈 속에 파묻힌 자동차가 오도 가도 못하던 밤,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 어떤 그림자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 그들 앞에 버티고 섰다. 지금껏 모든 그림자들을 받아주었던 오필리아가 먼저 입을 떼었다. “너도 아무도 원치 않는 그림자구나?” 그러자 그 커다란 그림자가 무거운 입을 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그의 목소리를 눈보라 속에서도 낮게 퍼졌다. 그림자들은 모두 몸을 움츠리고 오필리아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와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오필리아에게 무서운 그림자란 없었다. “너도 나한테 오고 싶은거니?” 오필리아의 용감한 제안에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자신의 이름부터 들어보고 판단하라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내 이름은 ‘죽음’인데 그래도 나를 받아들이고 싶소?” 그렇다. 오필리아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다. 눈보라가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오필리아의 대답만을 모두가 숨죽여 기다렸을 뿐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 때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고 차가운 그림자가 오필리아를 빙 둘러쌌다. 주위가 더 어두워졌지만 어둠 속에서 오필리아는 눈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오필리아는 천국의 문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찬란한 빛이 오필리아 앞에서 출렁거렸다. 모두 웃는 낯으로 오필리아의 방문을 반겨주었다. “당신들은 누구시죠?” 어안이 벙벙한 오필리아를 향해 빛의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우리들을 못 알아보시겠어요? 우리는 당신이 받아 준 남아도는 그림자들이었지요. 이젠 우리도 구원을 받아 더 이상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빛으로 변한 그들은 오필리아의 손을 잡고 빛의 궁정으로 데려갔다. 너무나도 화려한 궁정에는 커다란 황금빛 글자로 ‘오필리아의 빛 극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후 오필리아와 그림자들은 천사들 앞에서 인간들의 말로 지어진 인간들의 이야기를 공연했다. 소문에 의하면 하느님도 가끔 이곳에 와서 연극을 보았다고 하는데 정말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고 한다.
- 근원의 빛(原光) -
오, 붉은 장미여,
사람은 커다란 고난 가운데 있으며
또한 크나큰 고통 가운데 놓여있도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천국에 있고 싶다.
나는 넓은 길로 나왔고 그때
한 천사가 나타나 나를 돌려보내려 했다.
아 - 안 돼, 나를 거부 하지마...
나는 神으로 부터 왔으니 神에게로 돌아가리라.
사랑의 神은 나에게 빛을 비춰 주시리라
내가 영원한 행복을 얻을 때까지 그 빛을 멈추지 않으시리라.
말러의 교향곡 2번(부활) 중 4악장 콘트랄토의 독창부의 가사이다. 본래 민속시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서 가져온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말러의 평생 화두였던 '이승의 불안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행복의 바람'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그의 교향곡 2번은 5악장으로 구성된 총 80분이 넘는 대작이지만, 이 4악장은 연주자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해도 5분에서 6분 정도의 비교적 짧은 곡이지만. 곡조 또한 너무나도 아름다워 누구든 한 번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메조 소프라노인 크리스타 루드비히가 부르는 ‘원광’을 전설적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연주로 처음 이 곡을 접해서인지, 내게는 DG에서 출시된 이 앨범이 전범처럼 여겨진다. 사실 말러의 교향곡 2번은 말러의 라이프치히 시절인 1888년에 작곡되기 시작해서 1894년 4월 29일, 일요일, 개정판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빛을 보게 된 곡이다. 그러나 1895년 3월 4일 말러 자신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와의 협연했지만, 당시의 평은 좋지 못했다고 한다. ‘고문을 하는 듯한 뻔뻔스러운 불협화음’이라느니 ‘시끄럽게 떠벌리는 파토스’ 등의 악평을 듣게 되었지만, 1900년 겨울 뮌헨 연주에서는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다. 합창이 있는 교향곡으로 매우 복잡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는 교향곡 2번에 대한 평을 볼 때, 보수적인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세기말의 유럽인들의 가치관의 혼재를 살짝 눈치 챌 수도 있다. 이 교향곡의 백미를 어느 악장에 두느냐는 감상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4악장의 원광’이 갖고 있는 침착한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 태고부터 존재하던 빛의 세계로 귀의하고자 하는 염원은 무려 35분가량 연주되는 5악장에서 최고조에 이르러 카타리시스를 발휘한다. 지상의 온갖 고뇌를 겪은 영혼들이 껍데기인 육신에서 벗어나 빛의 분자가 되어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광경은 장대한 합창 속에서 숭고하게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Oh, glaube, mein Herz' 부분에서 트롬본이 받쳐주고 바순이 침통하게 흐느끼는 동안 북과 심벌즈가 터지는 장면은 이 지상의 삶을 무사히 마치고 부활을 약속받은 죽은 자의 행복한 도취를 느끼게 해준다. 성경의 고린도 전서 15장, 예수 부활에 대한 구절에서 인용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은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의 진정한 의미를 트럼펫의 나팔이 알린다. 그러면 고요한 정적 위로 코러스의 허밍으로 마음에 평화가 깃든 이들의 안식의 찬가가 시작되고 이 합창은 소프라노와 코러스의 합창, 콘트랄토의 독창, 다시 소프라노의 독창, 마지막으로 콘트랄토와 소프라노, 코러스의 총합창으로 이어지면서 승천하는 영혼들의 환희에 가득 한 모습을 그려낸다. 그들이 노래한다. ‘다시 얻은 나의 날개로 날게 되었네. 나는 이제 살기 위해 죽는 것이니. 빛줄기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다시 내 심장도 깨어나리라. 견뎌온 모든 것이 나를 신에게 이끌 것이니’ 라고. 이로서 대합창 속에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며 하늘의 광명과 부활한 자들의 환희는 트럼펫, 호른, 심벌즈의 장중한 선율에 실려 퍼진다. 태초의 빛을 만난 자들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방울이 명징한 천상의 종소리로 보답 받는 마지막 피날레.
솔직히 말하자면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은 내가 이 세상 최후의 침상에서 듣고 싶을 정도로 아끼는 곡이다. 또한 감상할 때 마다 흘리는 눈물로서 스스로를 치유하게 되는 진통제와도 같은 곡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너무 많은 말을 덧붙여 곡의 위대함을 헤치고 싶지 않은 곡도 이 <부활> 교향곡이다. 내게 있는 음반만 해도 12종이 넘으니 어느 음반을 추천해야 좋을지 난감하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도 곡의 해석이나 연주의 완성도에서도 역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레나드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 연주반을 골랐다. 1987년 뉴욕의 애버리 피셔 홀(Avery Fisher Hall)에서 녹음된 실황반이다. 브루노 발터와 빈 필하모닉,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 아바도의 시카고 심포니, 하이팅크의 베를린 필하모닉, 바빌로니와 베를린 필하모닉, 래틀과 버밍험 심포니, 샤일리와 로얄 콘체르토헤보우 오케스트라, 미하일 길렌의 SWR 신포니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어느 음반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명작들이다. 전부 아끼는 입장에서 번스타인의 87년반을 추천하기까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장 무난하고 편견 없는 선정이 될 것 같아 고민 끝에 결정한다.
괴테도 죽기 전에 “좀 더 빛을....”이라며 침상에서 말했다고 한다. 빛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기에 빛이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삶이다. 죽음이라는 그림자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서 태초의 빛이 충만한 세상으로 돌아간 오필리아 할머니와 신의 은총으로 빛의 존재로 부활하게 된 그림자들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첫댓글 매번 느끼는 거지만, 거울님 대단하십니다.
요한님.... 이런 저런 정리안된 생각이 고스란히 글에 반영되어 글이 봉두난발합니다.
그림책공부모임을 하면서 느끼고, 거울님의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림책 정말 쉽게 볼 수 없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