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3. 6 경북 선산~1980. 5. 24 서울.
1945년 9월 경북사범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김천중학교의 교사로 재직중 1946년 9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육사 제2기로 그해 졸업·임관했다. 이승만(李承晩) 집권기에는 이종찬(李鍾贊) 계열의 장교로 인식되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종찬 장군의 도움으로 군에서의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6·3사태 때에는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후 보안사령관·3군단장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1973년 3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그해말 중앙정보부의 차장으로 임명됐다. 1974년 9월 건설부(지금의 건설교통부)장관에 취임, 중동건설 수출을 적극 추진하는 일을 맡았다. 이어 1976년 12월 제8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시는
유신체제가 그 스스로의 한계상황을 노출시키면서 와해되던 시기로서 1975년 발동한 긴급조치 9호 등의 억압적 조치로 명맥을 유지하던 때였다.
한편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여성노동자를 강제 해산시킨 것도 그의 중앙정보부장 재직중의 일이며, 학생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이 부산·마산 지역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시민들의 항쟁이 가속화될 것으로 입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 말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를 점차 잃었으며 경호실장 차지철과도 심각한 마찰을 야기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의 안가(安家)에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실질적인 제2인자로 권력을 행사해온 차지철을 살해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과 사형집행 직전까지 '10·26민주회복국민혁명'을 시종일관 주장했으나, 1980년 5월 24일 서울 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0·26사태
차지철
1934 서울~1979. 10. 26 서울.
군인·정치가.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하여, 공수부대의 대위였던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박치옥 공수단장의 소개로 박정희 장군의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1962년 예편하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이래 경기도 이천·광주 선거구에서 1978년까지 4선의원이 되었다. 35세이던 1969년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을 계기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인책되자 그 후임으로 경호실장이 되었다.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월권 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마찰이 잦았다. 재야와 야당문제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대응했으며,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하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가 나자 군 명령계통을 무시하고 공수단투입을 명령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전횡(專橫)으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피격당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