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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역면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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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 북쪽의 남양면에 조선시대 벽사도 찰방9역의 하나인 양강역이 있어 역을 지나왔다하여 과역이라 칭함 - 원주도 백일도등은 전라좌수영 산하 여도진(점암면여호리)이여도 만호의 관할 하에 있음 - 진이 폐지 조선 말기 후 백일도는 돌산군 옥정면에 속함 - 1914년 돌산군 화정면 백일 리가 본면에 편입 - 1931년 남면을 과역면이라 칭함 - 1937년 남면과 남양면의 일부 폐함 현재 신곡, 백일, 연등, 호덕, 석봉, 과역, 노일, 도천 8개리 관할 - 1937. 5. 31 과역리 175번지에 청사 신축 34평(현 복지회관 위치) - 1976. 9.15 과역면사무소 구청사 신축(100평) - 1988. 12. 1 면민 종합복지회관 건립(110평) - 1997. 8. 23 과역면 과역리 404-7번지에 현 청사 신축 이전 (부지 2117평, 연건평 235평) | |
지역특성 | - 5일 정기시장 및 북부 6개면 통합 농협 소재지 ☞ 북부 지역의 교통, 경제 중심지 - 주민의 80%가 농어업에 종사, 간척지 이용 양질미 생산 - 동서 청정해역의 고막, 굴 등 신선한 수산물 생산 | |
행정구역 | 8개리, 자연마을 32개 | |
지명유래 | ||
신곡리 |
구곡 |
元來 新谷里 地域에 속하며 마을의 地形이 풍수지리상 九龍爭珠形이므로 마을名을 "九龍"이라 하였으며 마을의 좌우에 있는 오병산의 줄기가 아홉골짜기이므로 九谷이라 改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 휘하에서 大功을 세운 여산인 宋希立장군을 제향하는 사우가 있고 고령신씨 제각인 추모제가 있다. |
심포 |
元來 新谷里地域에 속하며 옛날 바닷물이 마을앞 150m까지 들어왔다고하여 마을명을 "지푼개"라 불리어왔으나 1930년 일제시대에 지방 행정구역개편시 마을名을 한자화할 때 깊은심(深) 개포(浦)를 한자로 想起하여 深浦로 改稱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신기 |
마을 地形이 돼지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저洞으로 이름하여 일명 "도수골"이라 불리어오다가 마을확장으로 마을뒷산 地形이 잉어와 같이 생겨 "잉어등"이라 하였으나 한일합방이후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통폐합시 제방축조로 인하여 새로터를 잡은 마을이라하여 마을名을 新基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인학 |
元來 新谷里地域에 속하며 옛날 설촌시 안인이란 부자가 살던 古基라고 전하여 마을뒷산 形局이 鶴처럼 생겼다하여 부자의 이름은 安仁의 어진 仁자와 새 鶴자를 따서 마을名을 仁鶴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지금도 安仁의 부자집터의 옛집 기와장이 발굴되고 있다. | |
백일리 |
내백 |
조선시대에 여도진에 속하였다가 鎭이 없어진 뒤에 突山郡 옥정면에 편입되었으나 1914년 지방행정구역폐합시 고흥군 남면에 소속되었는데 섬안에 日月明地가 있어 밝고 흰 것을 나나낸다는 뜻으로 마을명을 "해나리"라고 불리어오면서 이를 한자로 白日島라 하였으며 해방이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白日里의 안에 있는 마을이므로 마을名을 內白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원주 |
당초에는 突山郡 玉井面에 소속되었을시 마을名을 돈 圓자에 구슬 珠자를 합하여 圓珠로 하였으나 일제초기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폐합에 따라 고흥군 남면에 편입되면서 마을의 섬 地形이 구슬 같다고하여 또는 새우가 구슬을 건진다는 뜻으로 구슬 珠자를 따서 마을 명을 元珠로 改稱한 이래 독립마을로서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외백 |
조선시대 전라좌수영관할 여도진에속한 마을로서 돌산군 옥정면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폐합시 고흥군 남면으로 편입되었으며 그후 1937년 남면과 남양면 일부가 폐합되면서 過驛面으로 소속되었는데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섬밖에 위치하므로 마을 명을 外白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設村당시 崔忠이 심은 고목이 좋아 마을名을 朴吉島라고 칭했다함) | |
옥금 |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마을 명은 未詳이나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폐합시 고흥군 남면으로 편입되였으며 다시 1937년 과역면으로 편입되면서 마을 뒷산이 玉女峯이라 불러 山의 地形이 玉女彈琴形이라 하였고 마을 옆으로 띠박금이라는 곳이있어 그곳에서 金이 나왔다하여 玉자와 金자를 따서 마을명을 玉金으로 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연등리 |
독대 |
元來 과역면의 가장 북동쪽에 위치하여 마을의 地形이 거미(독)와 같은 形局이며 또 마을 대지가 짐승같이 생겼다고하여 독垈라고 부르다가 獨垈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임진왜란때 흥양현감 裵興立이 충무공 위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장군의 충현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가 2001년 과역면 소재지 현충탑 비석거리로 이설되었다. |
연등 |
元來 蓮燈里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앞 산이 蓮花山과 玉燈山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어 蓮花山의 蓮자와 玉燈山의 燈자를 合하여 마을名을 蓮燈이라 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슬항 |
元來 蓮燈里 地域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 해변에 가까운 곳에 마을이 形成되어 그때 부터 마을名을 찬물이 많이나는 곳이므로 "찬물등"이라고 불렀으며 마을뒷월악산의 山勢가 선인 무수형국으로서 玉女가 비파(瑟)를 안고 비파를 울리면 선인이 가무를 즐길것이라하여 마을명을 다시 瑟項으로 改稱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외호 |
약 300여년전 밀양박씨와 제주고씨가 設基했다고 전하는데 본래 섬에 形成된 마을로 地形이 마치 자라(鼈)와 같다는뜻으로 鼈島로 불리어 온것을 간편하게 吳島로 불리어 오다가 연륙제방공사로 육지와 연결되어 마을명을 호수밖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1986년 外湖로 改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호덕리 |
호덕 |
마을 뒷 主山이 伏虎形局이라 하였으며 아래 마을이므로"虎洞"이라 불렀으며 主山인 虎德山 옆에 개형국의 산이 있어 호랑이의 먹이가 풍부하여 호랑이가 덕이 있어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는 뜻으로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마을名 虎洞을 虎德으로 改稱한 이래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여동 |
元來 虎德里地域에 속하며 마을을 애워싸고 있는 山의 형국이 까치집과 같으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다고하여 작포(鵲浦) 즉 "작개" 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마을안의 꽃이 많아 화려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名을 麗洞이라 改稱한 이래 1986.7.14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법정마을로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화덕 |
元來 虎德里地域에 속하여 당초 設村시에 마을명은 "터예"(垈禮)라하였는데 옛날 소태봉에서 풍수들이 동쪽으로 뻗어 있는 능선을따라 大明地가 있다고하여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 번창할것이라는 뜻으로 집터垈자와 예도禮자를 써서"터예"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초기 1914지방행정구역폐합시 마을뒷산의 形局이 화로와 같으므로 마을명을 다시 火德으로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석촌리 |
석촌 |
元來 石鳳里地域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 마을앞에 큰 바위가 박혀있어 이 바위가 동쪽으로 비스듬이 누워있을 때 마을이 貧村이었으나 어느 스님이 마을앞 큰 바위를 바로 세우면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 하자 전 동민이 바위를 바로세웠으며 마을명을 바윗돌을 상징하여 "돌배기"라고 불리어오다가 1936년 일정때 마을명을 한자화할 당시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뜻으로 石村이라 改稱현재에 이르고 있다. |
봉촌 |
元來 石鳳里地域에 속한 마을로서 처음 기계兪씨가 設村할 때 마을名을 "진목정"이라 칭하였으나 1640년경 보성吳씨가 入村할때에 마을동쪽산의 地形이 봉과같으므로 봉이 바다로 날은다는 뜻에서 "동봉포"(桐鳳浦)라고 改名한 후 1830년 朝鮮朝 哲宗年間에 이르러 여산송씨와 김녕김씨 합의하에 다시 마을名을 한자로 鳳村이라 改稱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가산 |
元來 石鳳里의 중심지에 해당된 마을로서 마을東쪽산의 形局이 "개"의 모습과 같아 마을명을 "개뫼"또는 "狗山"이라고 入鄕祖가 命名했다며 그후 1929년 일제시대에 五岡書院출신 金永一 학자가 마을뒷산形勢가 아름답다는 뜻으로 마을명을 아름다운 佳자를 붙여 佳山으로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월악 |
元來 石鳳里地域에 속하며 옛날 月樂山이 높이 솟은 마을 형국이 소쿠리형으로 생겨 해와 달이 떳다가 반나절 밖에되지 않는다고하여 마을名을 "다래기"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地形이 月體형으로서 마을뒤의 月樂山이 五行상 仙人無柚가 있다하여 끝자를 樂子로 마을명을 다시 月樂으로 칭한 이후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과역리 |
원등 |
元來 過驛里에 속한 마을로서 조선후기에 흥양현 관내 5개院中 하나인 卜梯院이 있었던 곳이라하여 마을名을 "院燈"이라 불리어 왔으며 일제초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폐합시 과역리에 속하였다가 1936년 리동행정 구역개편에 따라 독립마을로 분리된 이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송학 |
元來 현송학과 원등마을의 중앙부에 5일과 10일 市場이 形成되고 있어 마을명을 "구장터"라고 불리어 오다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폐합시 구장터를 송학과 원등으로 分里 될 때 마을주변의 노송이 울창하고 천연기념물인 학이 마을 노송에 날아와 수없이 서식하여 마을名을 松鶴이라 改稱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민등 |
元來 過驛里地域에 속하며 1940년 珉燈저수지가 시설되기 이전에 큰 연못이 있어 연못에서 마을에 비추는 물빛이 마치 구슬같이 보인다고하여 마을명을 구슬珉자에 등불같이 밝다는 뜻으로 등불 燈자를 써서 珉燈으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과역리 |
유동 |
당초 마을名을 粉海라 하였는데 設村당시 마을앞 약1km지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치 海水가 가루처럼 보인다고하여 粉海라 불리어오다가 식수(샘물)가 가장 좋은 마을이라하여 한때는 "샘골"로· 불렀으며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마을주변에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마을지형이 버드나무처럼 휘늘어 졌다는 뜻으로 버드나무 柳자와 골 洞자를 써서 마을명을 柳洞이라 改稱한 이래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상분 |
元來 過驛里地域에 속하며 마을 뒷 산 伏虎山의 地形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호랑이 꼬리 形局이라하여 마을名을 "虎尾洞"이라고 불리어 왔으나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마을앞을 흐르는 河川에 虎糞가루가 흐르는 곳이라 하여(糞川, 분내)마을 名을 粉川으로 改稱 도로 윗쪽을 上粉 아래쪽을 下粉으로 名名 법정마을로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하분 |
元來 過驛里地域에 속하며 마을 뒷 산 伏虎山의 地形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호랑이 꼬리 形局이라하여 마을名을 "虎尾洞"이라고 불리어 왔으나 1914년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폐합시 마을앞을 흐르는 河川에 虎糞가루가 흐르는 곳이라 하여(糞川, 분내)마을 名을 粉川으로 改稱 도로 윗쪽을 上粉 아래쪽을 下粉으로 各各 법정마을로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노일리 |
내로 |
元來 老日里의 中央 마을로서 당초 마을명을 흥양군 남면(남양면과 합병당시)"노나리"라고 불리어오다가 서기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 과역면 2代면장 趙芳浩가 마을名을 老日里의 중심 마을이라하여 老羅里안쪽이라는 뜻으로 안 內자를 써서 內老로 改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집단주택지가 4군데로 분리되어 形成됐다하여 지금도 골몰, 양짝, 세돔, 음짝 등으로 부른다.) |
호곡 |
元來 老日里地域에 속하며 마을 뒷산 복호산이 호랑이의 발(足) 形局이며 호랑이 발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마을名을 "족소리"(足所里)로 불리어오다가 設村당시 柳榮澤이 호랑이가 살았던 복호산 밑 골짜기의 마을이므로 마을名을 虎谷이라 改稱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외로 |
당초 마을명 興陽郡 南面 노나리라고 불리어오다가 서기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 분리하면서 안쪽마을을 內老라고 하였고 本 마을은 노나리 북쪽편 밖에 있다하여 外老라고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도천리 |
상송 |
처음 마을앞 전답에 삼을 재배하여 질삼을 많이하는 마을이라하여 "삼밭골"이라 불리어오다가 設村당시 入鄕祖 金承龍이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많고 중군산 계곡물이 사계절 마을앞에 흐르고 있다하여 소나무 松자와 냇 川자를 붙여 마을名을 松川이라 하였으며 1920년경 일제초기에 지방행정구역개편에 따라 松川이 2개마을로 分里되면서 윗쪽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上松이라 改稱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하송 |
서기 1580년경 朴尙東이 設村당시 흥양현 남면 "솔래"라고 마을名을 命名하였으며 1810년 朝鮮純祖때 마을의 중앙지에 소나무가 무성하고 중군산 계곡물이 흐른다는 뜻으로 마을名을 松川으로 改稱한 후 다시 下松으로 분리되면서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방란 |
元來는 과역면 노일리 地域에 속하여 마을名을 "우천"으로 불리어 오다가 1952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마을주변에 란초와 꽃나무가 많아 풍경이 좋은 마을이라하여 마을名을 꽃다울 芳자와 란초 蘭자를 합하여 芳蘭으로 改稱한 이래 1986년 7월 14일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법정마을로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도야 |
당초 마을명은 文氏가 처음 入村하였다고하여 문사동(문사골)이라고 칭하다가 서기 1900년경 분산되어 있는 상·하송 방란을 송천이라고 하였으며, 본 마을을 合하여 솔도야(송도야)라고 개칭하였다고 한 그후 마을 앞 간척지 제방이 축조되면서 두원면과 남양면을 연결하는 길목이라고하여 길道자 이끼也자를 출합하여 道也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첫댓글 역시 회장님이시군요
좋은 자료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마을마다의 특징들과 역사가 재미있군요
근디~
분천은 태초부터 타마을과 다른면이 있었군요
호미동이라 하여 이미 도시형성의 기미가 보인것
아니었나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