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F1 스튜디오 최상규 |
제4회 미당문학상 수상자 김기택씨는 회사원이다. 시업(詩業)과 생업을 병행해야 했던 탓인지 1989년 등단했는데도 김씨는 아직 시집이 세 권뿐이다. 과작(寡作)이다. 마침 세번째 시집의 제목이 '사무원'이다. 바쁜 스케줄 덕분에 당선 인터뷰도 저녁에야 가능했다.
어렵사리 만난 김씨로부터 명함을 받아들고 보니 한 식품회사의 'PRA팀 부장'이라는 직함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PRA'가 무슨 뜻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이던 김씨는 담담하게 "매장당 평균 매출을 뜻한다"고 답했다. 이후 한동안 이어진 이야기는 미당문학상 수상자와 나누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내용들이다. 김씨는 한 외국 브랜드 햄버거의 매출을 끌어올리는 마케팅 일을 하고 있었다.
바쁜 생업이 시 쓰기에 결과적으로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적지 않은 김씨의 시들이 생업의 현장에서, 또 그가 일터를 오가는 길 위에서 쓰여지고 있다.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부터가 그렇다. 시의 화자의 눈에 포착된 서류 나르는 그녀는 김씨의 직장 동료 여직원일 가능성이 크다. 시집 '사무원'의 표제시 '사무원'은 '어떻게…'와는 정반대로 사무실 풍경을 암울하게 그렸다. 시 속의 사무원은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는 무감각하고 폐쇄적인 사람이다.
세 권의 시집중 어떤 시에 애착이 가는지를 물었다. 김씨는 첫 시집 '태아의 잠'에 실린 등단작 '꼽추'와 '쥐''호랑이''거북이' 등 동물시, 두번째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에 실린 '얼굴''틈''구로공단역의 병아리들''먹자골목을 지나며' 등을 꼽았다.
시집 '사무원'의 좋은 시를 얘기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시론(詩論)을 드러냈다. '사무원'은 이전 시집들이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대상 묘사, 현미경적인 세밀함에 너무 치우쳤다는 반성에서, 쉬운 시를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을 묶은 것이다.
김씨는 "시인마다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다를 텐데 내 경우 대상을 냉정하고 세밀하게, 투시하듯 관찰할 때 시가 살아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김씨 시의 그런 특징을 '투시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대상의 본질적 국면을 관통하려는 상상적 언어의 힘인 투시적 상상력은 일상적 지각의 범주를 뛰어넘어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시도하고, 결국 내부의 들끓는 힘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투시적 상상력이 김씨 시의 작동 원리라면 그의 마음을 붙들어매는 화두는 먼지와 소음,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특정한 순간 실체를 드러내는 일상의 폭력성 같은 것들이다.
소음의 경우 김씨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생활 소음이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씨가 보기에 생명체와 인격체에 가해지는 폭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때문에 사람들의 습관과 생활방식, 말과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폭력을 견디는 눈물겨운 노력들, 몸의 사투 같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일하면서 시 쓰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아껴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직장을 그만둔다면 시 공부야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시가 더 잘 써진다는 보장이 있겠나"라고 답했다.
또 "아무리 한가해도 회사에서는 시를 절대 쓰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시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시상이 떠올랐을 때 짤막한 메모를 하는 경우는 가끔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선배들이 많은데 시력(詩歷)도 짧은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큰 상을 받는 것이 과한 보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