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재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기록상 기원전 2,500년경 청동기 시대부터 도시국가가 생성 발전하여 기원전 1,900-2000년에는 쵸룸 지역(앙카라 동북방)을 중심으로 히타이트(헷 족속)제국이 번성하였다. 기원전 1,200년경 이후에는 서쪽의 에게해를 배경으로 한 희랍(헬라) 세계가 10세기 가까이 찬란한 에게(Ege)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와 함께 서부 및 중부 내륙지방에서는 프리기아 왕조를 비롯하여 우랄루트, 리디아 그리고 이오니아 왕조들에 의해 맥을 이어 오다가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전 지역이 마침내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포함)의 속지로서 천 수백년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동쪽에서 이동해 온 투르크족이 11세기 초에 이르러 마침내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아나톨리아 반도는 터키를 새 주인으로 맞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1)핫티(Hattians BC 2,500-BC 2,000)
선사시대의 문명으로 남아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원주민들을 핫티((Hattians)라고 한다. 이들의 존재는 이 후에 영향을 받은 히타이트인(Hitties)들에 의해서 알려졌다. 핫티들은 중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부족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고유 언어를 사용했으며, 히타이트 왕들의 이름도 핫티어를 사용한 것들이 많다.
이들은 황소를 하늘신의 상징으로, 사슴을 대모신의 상징으로 숭배했다. 또 우주의 상징으로 둥근 원을 그려서 표현했다. 핫티인들은 세계가 소의 뿔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황소가 머리를 흔들면 지진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2)히타이트(Hitties BC 1,800- BC 700)
|
BC 2000년경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대규모 전쟁의 있었음을 증명하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화재 등으로 잿더미가 된 아나톨리아 반도에 새로운 문명을 형성한 사람들이 히타이트인(Hitties)이다. 히타이트인들은 북쪽지방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오게 되었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인종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에 200-250년간에 걸쳐 서서히 평화적으로 정착했다.
물실리 2세때(BC 1,339-BC 1,306) 전성기를 이루어 시리아로부터 밀레토까지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투타리아 4세( BC 1,250-BC 1,220)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히타이트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슈피루리우스 2세(BC 1,190-BC 1,180)때는 프리기아의 공격을 받아 히티이트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 후 몇몇 히타이트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무너짐으로써 히타이트 제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히타이트 왕국은 처음에는 부족들이 연합하여 건설한 봉건국가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봉건제도는 사라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 왕권국가로 변했다. 군인들은 긴옷을 입었고, 활과 창을 사용했다. 이들은 주로 농업과 목축업을 했으며, 설형문자를 사용했다.
(3)프리기아(BC 850-BC 300)
|
히타이인들과 마찬가지로 프리기아인들도 유럽인종이다. 프리기아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BC 1,000-BC 800경으로 본다.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킨 이들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요지역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앙카라에서 서쪽으로 94㎞ 떨어진 고르디온을 수도로 정했다.
(4)알렉산더 대왕과 헬레니즘(BC 334-BC 30)
알렉산더대왕은(BC 356- BC 323) BC 334에 아시아 정벌에 나서서 페르시아 및 이오니아를 정복한 다음, 이소스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완패시켰다. 이 후 이집트와 페르시아 본토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영토를 인도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3세의 젋은 나이에 죽었다. .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장군들이 주도권 싸움(BC 323-BC 280)을 벌인 결과 크게 4지역으로 즉,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시리아,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 또 이집트의 프톨레 마이오스 왕조로 나눠졌다. 이들은 때때로 전쟁을 벌이거나 외교적인 분쟁을 일으켰다. 마케도니아는 BC 160년경에 붕괴되었으며, 이 때 등장한 로마에 흡수되었다. 다음은 셀레우코스가 무너지게 되고, 시리아와 비티니아(비두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아르메니아, 콤마게네,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죽음후 로마황제의 직속 속주가 되었다(BC 30).
(5)로마의 진출(BC 133-AD 395)과 비잔틴 제국(AD 395- AD 1453)
아나톨리아 반도의 페르가몬(버가모) 왕국의 마지막 왕인 앗탈로스 3세가 왕국을 로마에 자진 헌납함으로써 로마는 아나톨리아 진출의 매우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로마는 에페스(에베소)를 소아시아의 수도로 정하고 인접한 군소 왕국들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로마는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를 아시아란 이름으로 하나의 ‘주’로 편성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AD 395년에 로마제국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둘로 나누어졌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동쪽을, 호노라우스 황제는 서쪽을 통치하게 되었다.
|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르스 해협에 있는 비잔티움(이스탄불)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이것은 AD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거리)이라 불리게 되었다.이곳을 중심으로 존속한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흐멭 2세가 점령함으로 멸망하였다. 1000여년에 걸친 이 제국을 후대 사람들은 비잔티움의 이름을 따서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이념. 제도를 이어 받았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기초로 하였다.비잔틴 제국은 북쪽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스텝의 유목민족과 동방의 사산왕조 페르시아인 그리고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과 투르크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쪽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또 동유럽 제국의 형성 초기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여 그 기초를 마련해 주었고, 계속적인 교섭을 통해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터키 민족의 이동 역사
(개관)
|
터키(Turkey)는 국명이고 투르크(Turk)는 종족을 일컫는 말인데, 터키족과 투르크족이 라고 할 때에는 종족의 기원상 동일 하나, 현재 터키 공화국이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한 민족을 터키족, 이전의 중앙아시아에 거주했던 민족을 투르크족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민족이나 국가의 명칭으로서 투르크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돌궐제국(기원후 6세기)이었다.
투르크족은 인류학적으로 몽골로이드 계통으로 분류되는데 최근에는 이와 달리 4대 백인종 그룹 중 하나인 유로피드 투라니드 계통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슬람 종교의 구전에 따르면 투르크족은 중앙 아시아의 알타이-샤안 산맥의 남서지방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해오다가 일부가 중국 서북 부로 이동하면서 흉노(훈)족(B.C.4세기)의 조상이 되어 실크로드를 장악, 한동안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기도 했다. 그 후 중국의 한나라에 의해 흉노(훈)가 멸망한 후 A.D.6세기 에 이르러 투르크족에 의해 세워진 돌궐 제국이 스텝 지역을 통일하고 내륙 아시아를 지배하면서, 이로부터 투르크족은 정식 종족 명으로, 또 국가 명으로 사용되었고, 이 후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족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투르크족은 7세기 중엽 아랍.이슬람군의 동방 정복과 중앙아시아 진출로 처음 이슬람을 접한 이 후, 9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슬람 국가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대규모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비잔틴 제국의 쇠퇴를 틈타서 아나톨리아 반도에 장착하게 되었다.
(1) 민족의 대이동과 훈(흉노)제국
|
▲ 흉노의 카펫트 |
알타이-우랄 산맥 사이 카스피해의 북서쪽에서 시작된 투르크인들은 유목생활로 인해 지속적인 이동을 계속해 오다가 기원전 2000년경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것으로 본다. 그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터키인들의 대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 이동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1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들이 이동하게 된 주된 이유는 오랜 기근과 타민족의 침략, 인구증가 및 목초지 고갈 등으로 볼 수 있다. 터키 민족이 이동한 방법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정복하기도 하고, 관리, 군인, 노동자 등으로서 부족 전체가 대 규모로 잠입하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중국땅의 북방 민족으로 흉노족이 있었다. 흉노족은 몽골족과 투르크족이 혼합된 민족이다. 터키인들은 이를 훈족이라고 불렀다. 흉노족은 그 용맹이 뛰어나서 중국의 진시황제도 흉노족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기마와 궁술에 능했던 흉노족도 결국은 한무제에 의해서 정복됐다. 흉노족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일부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훈 제국을 세웠다. 나머지 대부분은 다시 유목 생활로 돌아감으로 중국의 통치하에 예속되었다.
(2) 돌궐제국
|
▲ 돌궐시대 여신상 |
돌궐제국은 흉노족에 이어 두 번째로 투르크 문화를 표방한 투르크 제국이다. 돌궐은 GOKTURK 란 말로서 ‘하늘에 속한 신성한 투크크인’ 이란 뜻이다. 기원후 535년에 부민에 의해서 시작된 돌궐제국도 기원후 582년에 동 돌궐과 서 돌궐로 다시 나눠졌다. 그 후 약 50년간(603-680)의 암흑기를 지내면서, 지도력의 부재, 동족간의 대립, 중국의 이간 정책 등으로 거의 패망 상태에 있게 되었다. 이 때 아쉬나가의 쿠트룩이 독립투쟁을 시작하여 후 돌궐을 세웠으나, 결국 745년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3) 위구르 제국
터키인들은 돌궐제국의 멸망으로 흩어져 있던 민족들을 규합하여 새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위구르 제국이다. 위구르는 중국 문화권과 마지막으로 대결한 마지막 투르크 제국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인들의 위상을 위구르 제국도 13세기 몽골족이 중앙아시아의 새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4) 셀축 제국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투르크인들 중에 ‘오우족’이 있었다. 오우족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터키 공화국 국민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간주된다. 기원후 1000년경에 오우족도 키메크족에 멸망을 당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주요 세력인 셀축가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셀축 제국이다.
셀축 제국은 기원후 11-14세기에 투르키스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셀축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계는 재통일되고 한 차원 높은 조직과 문화로 성장하였다.
셀축이란 이름은 오우족의 한 장군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오우족의 한 장군 두카코가 오우족으로부터 독립하였고, 그의 아들 셀축이 용맹스럽게 싸워 셀축과 그의 추종자들이 추후에 셀축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셀축은 오랜 내분과 가혹한 세금 등으로 정치적 혼란에 빠진 비잔틴군을 말라즈기르트 성채에서 격퇴하고 아나톨리아 진출을 확보하였다(1071년) 터키 셀축은 1077년 처음에는 이즈닉(Iznik)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가 나중에는 콘야로 수도를 옮겼다. 1081년 비잔틴 황제와 셀축이 평화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통치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 터키 셀축은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처음으로 아나톨리아가 투르크족의 땅이라는 의미의 투르기아(Turcia)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셀축 왕조는 예언자로 자칭한 바바일랴스가 반란과 이어서 몽골 군과의 쾩세다흐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멸망이 가속화 되었다. 몽골의 간섭 정책으로 셀축 왕조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분열된 공국 중에서 오스만 베이에 의해서 수립된 오스만 공국이 나중에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5) 오스만 제국
오스만 공국은 부르사를 점령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세력을 확장시켰다. 오스만 공국은 전쟁을 이슬람의 성전과 연결을 시켰다. 그들은 이슬람전파라는 종교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성전을 선포하였다. 1453년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킴으로서 오스만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술탄 술레이만의 통치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되었다가 군사행정 재정면에서 문란이 가속화되면서 쇠퇴기를 맞이했다. 술탄에게 집중된 국가업무를 재상들에게 위임하고 술탄은 하렘에서 궁녀들과 쾌락과 휴식을 취하는 경향이 농후해 지면서 술탄대신 공적인 업무를 절대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재상들의 힘이 커지면서 이슬람의 칼리프였던 술탄이 더 이상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정치적인 부패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충성심의 분산과 중앙권력의 약화로 제국은 쇠퇴기를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패배하였다. 연합국은 세이블조약으로 터키 분할을 꾀하고, 그리스는 잃은 땅을 되찾으려고 아나톨리아 서쪽으로 칩입하였다. 그러나 1922년 아타투르크의 외교와 전략으로 이들을 타파하고 1923년 로잔조약에 의해서 현재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6) 터키 공화국
1923년 10월 23일 안카라를 수도로 정하고 터키 공화국이 발족되었다.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정책, 터키어 창안, 태양력 채용 등 여러 방면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52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등 반공. 친서방 노선을 취하였다.
|
▲ 터키 초대대통령 아타투르크의 무덤앞에 모인 군중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