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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C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문학자였던 알베르트 까뮈는 "오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중국 어느 한 마을에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는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인 동시에 오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나간 그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두운 삶을 살고 있던 그들에게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질투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돈이 많아 보이는 남자 손님이 투숙하면, 그에게 마취제를 먹여 목 졸라 죽인 다음 금품을 빼앗고 강물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이 그들을 괴롭혔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것마저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처럼 보이는 건장한 신사가 그들의 여인숙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습관적으로 손님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을 법한 금품을 빼앗기 위해 지갑을 뒤졌습니다.
그때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달랑 낡은 사진 한 장과 신분증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낡은 사진을 보는 순간 큰 충격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딸은 실신해버렸고, 어머니는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죽인 건장한 청년은 다름 아닌 지난 28년 동안이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들이요 오빠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해 깊은 절망에 빠진 모녀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까뮈는 이 글을 통해 인간 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부조리와 죄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결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닿을 수 없는 산 정상을 향해 돌을 올리고 또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죄를 행하고 또 행하다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 이해는 두 가지로 타락한 인간과 갈등하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죄가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죄로 인한 갈등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롬3:2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6:5절에서 이사야는 "...화(禍)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난 선지자가 감사하거나 기뻐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렇게 울부짖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 앞에 선 인간의 실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9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신을 포함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롬1:18-32절을 통해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선언했습니다. 2장에서는 이방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유대인들 역시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 곧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계시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각종 계시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될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의 죄악에 빠지도록 버려 두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탁 곧,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이방인들의 범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그들 역시 똑같은 범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한 채 범죄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24)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인간의 실존은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10-12절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14:2-3절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또 시53:3절은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으로 벌을 주시거나, 확인되지도 않은 반역의 소문을 듣고 무분별하게 대량 학살을 명하는 전제 군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내면 구석구석을 살펴보십니다. 죄를 달아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의인을 찾으셨던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치우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쑤르"(soor)는 "떠나다, 잡아 찢다, 반역하다, 방향을 바꾸어 들어가다"는 뜻으로 "변절과 배교"를 의미합니다.
또 "함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드"(yakh'ad)는 "일심으로, 전체적으로, 모두 합쳐서"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고,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고집 센 암소처럼 어떤 멍에도 메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목자를 떠나 다른 길을 걷기 좋아하는 양들처럼 목자가 예비한 초장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자기들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과 율법을 버렸습니다. 모두 함께 악을 행하는 더러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세 번에 걸쳐 강조했고, 바울 역시 본문을 통해 "없나니, 없으며, 없고, 없고,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라는 말씀대로 세상은 심판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악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3-14절입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벵겔은 범죄가 말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열린 무덤을 사람을 삼키는 굴혈로 해석했습니다. 열린 무덤이 그 속에서 썩어지는 송장 냄새를 발산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이 말을 통해서 끊임없이 발산되어 나와 듣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막7:20-23절을 통해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淫亂)과 도적질과 살인(殺人)과 간음(姦淫)과 탐욕(貪慾)과 악독(惡毒)과 속임과 음탕(淫蕩)과 흘기는 눈과 훼방(毁謗)과 교만(驕慢)과 광패(狂悖)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속에는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②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풉니다.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도 사람뿐이지만 그 말을 거짓으로 쓰는 것도 사람뿐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들은 말로 거짓말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는 "사자같이 잔인한 짐승 가운데 사는 것이 오히려 거짓말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속이는 거짓말은 그렇게 나쁜 것입니다. ③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시140:3절은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혀를 날카롭게 한다, 또는 간다"는 말은 극단적이고 엄청난 수다를 뜻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생물체 중에서 뱀보다 더 빨리 혀를 놀리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뱀이 세 개의 혀를 가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이렇게 쉴 새 없이 악한 말을 쏟아 놓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남을 해치고 심지어 죽게까지 하는 독이 있는 것입니다. ④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저주는 남이 망하기 원하는 마음 상태를 말하고, 악독은 그것이 겉으로 표현된 모양을 말합니다. 특히 "혀 밑"은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는 악인이 단순히 악한 말을 할뿐만 아니라, 그런 말 자체를 즐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10:7절은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26:2절은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참새도 이유 없이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비 역시 먼 이국 땅을 향해 날아갈 때에는 그 목적지를 분명히 정하고요. 이렇게 참새와 제비 같은 미물(微物)들도 이유와 목적 없이는 행동을 취하지 않듯이, 인간의 삶에도 이유 없는 결과 특히 악한 저주는 까닭 없이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할지언정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은 반드시 행위를 부릅니다. 15절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발은 행동을 의미합니다. 말은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사59:7a절은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에 대한 문자적인 의미는 "그들의 발은 악으로 달리며"입니다. 또한 "악으로 달린다"는 것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진 자들에게 임하는 것은 파멸과 고생입니다. 16-17절입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사59:7b-8절은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평강은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화평 혹은 자신의 양심에 있어서의 심적인 평안을 가리킵니다. 또 굽은 길이 "부정직과 자만과 속임수"의 상징이라면 "바른 길"은 "성실과 진실과 정직과 곧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시125:5절은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곧은 길로 행하는 정직한 자와 굽은 길로 행하는 악한 자 두 종류의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이 두 종류의 길을 왔다갔다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굽은 길에서 정직한 길로 돌이키는 사람보다는, 정직한 길에서 굽은 길로 돌이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사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길, 곧 정직한 자의 길을 떠나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버림받은 그에게 임한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파멸과 고생이었습니다.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중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는 거룩한 영혼의 평강이 임합니다. ① 이 평강은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위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② 어떤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내면적인 평강입니다. ③ 또 이 평강은 지극히 외면적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을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 밝고 환하고 긍정적이면서 적극적인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④ 지극히 보편적입니다. 이웃과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함께 누리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눈과 귀와 미각과 후각과 감정과 모든 지체와 모든 욕구가 함께 누리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을 받은 사람은 사단과 세상과 존귀와 부와 쾌락을 추구하거나, 그것 때문에 동요하지도 않습니다. ⑤ 또한 영원한 평강이며 결코 방해받지 않는 평강입니다. 영원하고 다함이 없는 원천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⑥ 또 무엇보다 중요한 이 평강의 특징은 신적(神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의 거룩한 평강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환난과 시험 중에도 오히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들은 결단코 이 평강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파멸과 고생이 임합니다. 영원한 절망인 죽음이 임합니다.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행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의 중심부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계산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칼빈(Calvin)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이므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10:12절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복된 길을 제공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또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24:14)고 외쳤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한 여호수아는 그것을 근거로,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고 신앙적인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종교적 굴레를 씌우려했던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를 통해 생생하게 역사 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깨닫게 한 후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결단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사50:10절은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聽從)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향해, 혹독한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의 신실한 손에 전적으로 맡기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또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31:19절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공급하실 것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쌓아 두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택하신 자들에게 생길 수 있는 모든 결핍 상태를 보충하기 위해 풍성한 은혜를 제공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와 축복을 항상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할뿐만 아니라,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시103:13절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대하시되 당신의 긍휼이 필요한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부모들에게는 자식들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고난에 처한 자식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할 수 있으면 자식들의 고통을 대신 지려고까지 할 것입니다. 자식들의 신음과 한숨소리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되 더욱 세심하게 대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제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삶을 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연 만물과 양심과 신 의식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이 어디계시냐"는 어리석고 미련한 말을 두려움도 없이 의기양양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스스로 파멸과 고생의 길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영화 슈렉에 나오는 거울은 파콰드 영주에게 살해 위협을 느낀 나머지, 피오나 공주의 행방을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거울은 비록 깨지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주는 것이 사명인데, 거울답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설공주에 나오는 거울은 거울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공주를 시기하는 왕비 앞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백설공주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 어떤 거울보다 정직합니다. 어떤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줍니다. 그래서 때로 성경에 비춰진 우리의 모습은 더럽고, 추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성경은 우리의 좋은 면만 비추지 않고,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비춰 줍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콰드 영주같이 성경을 달래거나 얼르거나 위협하기도 합니다. 외면하고 덮어버리거나 무시하고 심지어는 욕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는 죄인이라고 고소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손안에 든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 저수지에 담긴 엄청난 물과 같습니다. 갈수록 그 수위는 높아지고 물의 양이 너무 많아 방류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댐의 수문을 막아 놓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물을 터놓는 날에는 그 물살은 그만큼 더 빠르고 거셉니다. 여러분의 악행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까지는 집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절대 안전'이라는 자가 진단 직후 끊어진 끈을 넘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로 쏟아 부어질 것입니다. 그 진노는 투항을 거부한 원수에게 가해지는 무차별 공격이며, 끝도 쉼도 취소도 있을 수 없는 영원한 진노입니다. 이 큰 진노와 무한한 비참의 위험 속에서 매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그들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엄격하고 진지하고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았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심판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위험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를 갖지 못한 인간의 상태는 참으로 위태롭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14:6절을 통해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죽음의 절망에서 건지실 유일한 구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 윌리암 제이는 "나의 기억력은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만은 결코 잊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세주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죽음의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모셔들이십시오. 그것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십시오. 뿐만 아니라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던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까지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