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나는 산사를 찾아가야 하는 미완성된 사람이다. 그 이유를 굳이 표현하자면 산사는 다른 곳보다 조용하고 깨끗하여, 헝클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을 뒤돌아보기에 알맞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10여 년 전 어느 날 서울 근교에 있는 산사를 찾아갔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기독교 정신에 흠씬 젖어 있어 교적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지만,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지 세상 풍파에 지쳐버린 인간으로서 스님들의 청초하고 흠 없이 고결한 삶을 예전부터 동경하고 있었다.
산사에 도착하여 처마 밑에 앉아 있는데,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대로인 행자승이 다가와 나에게 어떻게 왔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저 미소로 답변을 해야 했고, 대화 중에 안 일이지만 행자승은 나보다 나이가 연상이었음에도 그 마음속에 탐욕이 없어서인지 천진한 그의 얼굴에서 벽화 속에 있는 극락의 동자승을 본 듯하였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 같아 그와의 대화 내내 반말로 일관한 것이 미안하여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돈을 꾸기지 않고 넣을 수 있는 긴 지갑을 어린애처럼 갖고 싶다고 해 내가 다음에 올 때는 꼭 사 가지고 오겠노라 약속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차를 몰고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님에도 가파른 언덕길을 힘차게 올라와 절 마당에 급하게 차를 세우는 사람이 있어 눈길을 돌려 바라보니, 젊은 스님 서너 명이 차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얼굴도 잘나고 기골이 장대한 스님들이라 나는 호기심에 그들의 행동을 머릿속에 조심스럽게 입력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산사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불안한 눈초리였고, 그 때 노스님이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방문을 열자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다같이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이 조금은 거칠어 보여 나는 행자승에게 저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행자승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수도는 안 하고 말썽만 피워 노스님을 걱정시키는 스님들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연유로 하여 스님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번뇌를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하기란, 모질게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 나가는 것보다 더 버거운 일이라 여겨졌다.
그들이 젊음을 산사에서 불태운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닐 것이라며, 나 또한 중병을 앓듯 번민하는 자로서 그들에게 애틋한 연민의 정마저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산사를 떠나갔고 나는 한참 동안 마음을 정리하며 그 곳에 앉아 있다가 어둡기 전에 서둘러 하산을 해야했다.
산사가 생긴 지 오래 되었기에 조금만 내려오면 음식점이 즐비하게 지어져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지친 발걸음을 미소로 반기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버스를 기다려 타야 했지만 타고 보니 앉을 자리가 없어 뒤로 밀려가 서 있어야 했다.
버스는 꽤나 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바로 뒤에 몇 시간 전 산사 앞마당에서 본 차가 우연찮게도 뒤를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차안을 들여 다 볼 수밖에 없었고 그 안에 그들의 친구인 듯한 아리따운 여인들이 비좁게 타고 있어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나는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나무라지도 아니하시고 큰절을 초연히 받으시던 노스님의 깊은 마음을,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부모 형제를 뒤로하고 불가에 뛰어들어 오직 큰스님이 되겠다고 출가한 그들이 방황한다고 호되게 질책을 하면 무엇 할 것인가. 수도는 자기 스스로의 고행이지 누가 대신해 줄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세월이 약이었다는 것을 노스님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도 처음에는 얼마나 원대한 꿈을 갖고 학생들 앞에 섰던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여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했으나 교사 역시도 탐욕을 버릴 수 없는 인간이라 해맑은 얼굴들을 뒤로하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일관했던가. 또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모질도록 인색하지 않았는가.
그 후 세월이 흐른 후에 지나버린 발자취를 뒤돌아보며 교사로서의 헌신을 잊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는 아무런 의미조차도 부여받을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존재였음을 깨달았을 때, 그 오점으로 얼룩진 흔적을 부여안고 이슬에 젖은 밤을 홀로 지새우지 않았는가.
타인들은 찬란한 명예도 얻을 수 있고 부유한 재물을 취하여 제 모습을 과시하고 있는데, 교사는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위해 존재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교사로서 ‘교사는 무엇으로 자신의 입지를 존재케 하는가’에 대하여 고열을 앓듯 번민을 해 보았다. 밤 지새워 내린 결론은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 묘책이 내게는 없었다.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흙 속에 묻혀 초연히 썩어짐으로써 수많은 알곡을 거두어들이듯, 처절히 산화하여 한 줌의 재로 스러져야 한다는 명제 외엔 다른 방도가 없음에 어느 땐 교직을 잘못 선택했다는 갈등과 회의로 방황도 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면 썩은 고기만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보다는 차라리 눈 덮인 산 정산에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길 원하여 부딪힘도 많았다.
또한 찬란한 옥이 되기보다는 의미 없이 발끝에 채이는 돌이 되어, 이방원의 시와 같이 만수산 속에 뿌리를 깊게 내린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져 허허로이 살기를 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참다운 의술을 전달하기 위해 제자 앞에 자신의 몸을 초개와 같이 던진 유의태의 모습을 보고는 이전에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무엇으로 나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있는가. 강물같이 덧없이 흘러버린 유년의 시절을 잠시 생각하기로 한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철부지들의 장난은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광야를 맨발로 달리는 고삐 풀린 적토마와도 같았다. 그것을 한동안 두고 보신 강수명 선생님께서는 회초리를 드시고 한 사람씩 나오라 하신 후 엉덩이 부분을 두어 대 때리셨다.
다같이 맞고 난 우리들은 겁먹은 얼굴로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있었는데, 애를 써 말문을 이어가시던 선생님께서 울먹이시더니 이내 돌아서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고 계신 것이 아닌가.
그 일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아 나는 교사가 되어 지금까지 단 하루도 그 선생님의 눈물을 잊고 학생들 앞에 서 본 적이 없다. 그만큼 눈물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감동을 분출케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지금 생각을 해 보면 모르긴 해도 그 분은 우리들을 위해 남모르게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시라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가 교사로서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 분의 눈물이 나를 위로하고 내게 꺼지지 않는 용기를 갖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어느덧 유수 같은 날들은 덧없이 흐르고 자의든 타의든 나는 교사가 되었다. 많은 교사를 만나고 헤어졌지만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교장 선생님 한 분이 나의 뇌리 속에 화인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철없던 교사 시절 누군가 그분을 가르켜 삽으로 학교를 떠갈까 봐 잠을 못 이루시는 분이라고 조소 섞인 어조로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 말은 내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분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분이 방학중에 아니 일요일까지도 학교에 나오시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그분은 교회를 다니셨는데 주일날 예배를 드리시고는 꼭 학교에 들리어 한 바퀴 살피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운동부를 맡고 있어서 방학중에도 훈련을 시켜야 했는데 그 분을 학교 언덕길에서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는 며칠을 벼르고 있다가 그분께 매몰찬 질문을 하였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방학중인 데도 출근을 하고 계시는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지 그렇듯 고생을 하십니까.” 라고 나는 질문은 하였고 내 말은 들으신 그분은 자존심이 몹시 상한 듯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제가 이렇듯 학교에 매일 나와야 하는 건 제 자신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숙명인 것입니다.” 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얼버무리고 돌아서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지금까지 잊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 그 이유를 굳이 밝히자면 내가 그 학교에 10여 년 근무하면서 교장 선생님처럼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경우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문득 지난날을 회상해 보니 그분께 여러 모로 피해를 끼친 것 같아 조금은 늦었지만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픈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가까운 친척이 세상을 떠나 소복이 정돈된 무덤 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우연히 일생을 교사로 사신 한 분의 비석을 보았다. 그 비석에는 그 분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놓았는데 비석이 조금 컸더라면 하는 애석함이 들 정도로 그분의 업적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나는 그 무덤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살아 있는 자로서의 송구스러움에 호흡을 가다듬고 깊은 상념에 젖어야 했다. 인간이 한 세상 살다가 죽은 뒤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그가 이룩한 찬란한 명예나 부유한 재물이 결코 아니었음을 아주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한 마디로 무간 지옥과도 같은 아비규한이 아닌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성현들은 수시로 언급하고 있는데. 지금 우린 이웃을 경쟁의 상대로 보고 눈을 흘기며 미워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나는 교사 된 자로서 5년 동안이나 내 자신과 약속한 출근 시간 7시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내 자신의 힘겨움보다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도 거름이 없이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아내의 젖은 손끝을 대할 때마다, 내 영혼은 엎드리어 죄스러울 따름이다.
지구 위에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던 예수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었다. 또한 교육계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페스탈로치도 허리를 굽혀 운동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몸소 주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네가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쓰러진다는 강박관념과 경쟁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목이 붓도록 “너는 나보다는 잘 되어야 해.”, “너는 나보다는 행복해야 해.”, “너는 나보다는 부디 성공해야 해.”라고 매일같이 부르짖는 직업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옷자락에 매달려 물어보고 싶다.
지금 이곳에서 나는 교장 선생님의 뜻깊은 배려로 환경주임을 맡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해맑은 눈빛을 대할 때마다 부족한 교사지만 내 스스로 산사의 수도승처럼 청아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고가 나의 무지에서 온 오만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고는 차마 머리를 들 수가 없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민다.
나는 정녕 맑은 물까지도 씻어 마시는 수도승이 아니라 이제 산사에 비장한 각오로 입문한 행자승에 불과하다.
오늘도 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별같이 숱한 나날 속에서 내 자신이 부실하여 모르고 지은 죄가 산을 이루고 있는 듯하여 조금이나마 면죄 받으려는 심정으로 오늘도 휴지를 줍고 먼지를 쓸어 내리고 있다.
산사는 어른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곳이지만 학교는 티없이 맑은 아이들의 영토가 아닌가. 나는 빗자루를 들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정성을 기울여 들고자 한다. 과거의 찌들은 가슴 속 흔적들을 혼신의 힘으로 지워야 하는 행자승처럼 말이다.
첫댓글 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