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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도시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델리 |
21.4 |
23.7 |
29.4 |
35.9 |
40.4 |
39.1 |
35.2 |
33.9 |
34.2 |
33.6 |
28.4 |
23.2 |
6.3 |
9.6 |
13.9 |
19.8 |
26.0 |
28.1 |
26.7 |
25.8 |
24.2 |
17.9 |
11.0 |
7.2 | |
25.1 |
21.1 |
12.9 |
8.4 |
13.2 |
77.0 |
178.6 |
183.6 |
122.9 |
10.2 |
2.5 |
10.9 | |
봄베이 |
28.4 |
28.4 |
30.1 |
31.7 |
32.8 |
31.4 |
29.7 |
29.4 |
29.7 |
31.6 |
31.9 |
30.3 |
19.3 |
19.7 |
22.2 |
24.5 |
26.4 |
25.9 |
24.8 |
24.5 |
24.3 |
24.2 |
22.5 |
20.4 | |
3.6 |
2.0 |
1.3 |
0.8 |
16.5 |
484.1 |
616.5 |
340.1 |
263.9 |
64.5 |
13.5 |
2.0 |
엘로라 동굴군 ( Ellora Caves )
아우랑 가바드에서 29㎞떨어진 지점인 이곳 엘로라에는 34개의 동굴 사원들이 낫 모양을
형성하며남북으로 뻗은 언덕의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동굴들은 아잔타에 엄청난 동굴들을 조성해 왔던 세력과 장인들이 7세기 초에 이르러 이곳 엘로라로 그 대상지를 옮김으로써 시작된 것인데, 그들이 왜 아잔타를 방치한 채 갑자기 장소를 바꾸었는지는 아직도 그 이유가 선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내부에 그려진 벽화로 유명한 아잔타의 동굴들이 대부분 불교 동굴로만 이루어지고, 동굴의 배치도 시대순으로 되어 있지 않은데 비하여 엘로라의 것들은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것들도 있고, 동굴들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그 조성 시기와 종교에 따라 나뉘어 조성되어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잔타 동굴군 (Ajanta Caves)
엘로라동굴과 달리 불교동굴로 이루어진 아잔타동굴 전경
강물을 따라 말발굽 모양으로 형성된 절벽의 중간 부분을 뚫어 조성된 이곳의 동굴들은, 거의 조성된 순서대로 배열된 엘로라와는 달리 연대순으로 늘어져 있지 않다.
석존의 상이 없는 초기 불교 히나야나 시대인 BC2세기경엔 조성된 것들인 8-12번까지의 동굴들이 한가운데쯤 자리잡고 있다.
1번 동굴은 아잔타의 동굴 중에서 가장 나중에 조성된 것 중의 하나이다. 연꽃을 들고 있는 불가사의한 표정의 보살(보디사트바)을 묘사한 그 유명한 파담빠니 상이(연화수 보살) 이곳에 있고, 흑인 공주 등 풍만하고 생동력 있게 그려진 여인들이 많이 있음으로써 널리 알려진 동굴이다. 또한 이 1번 동굴에는 1개의 머리에 4개의 몸을 가진 사슴 조각이 있고, 조명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표정의 불상도 중앙에 있어, 이 동굴을 벽화와 조각이 유명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안내자와 함께 다니는 여행객들이 올때는 안에 있는 관리인이 중앙에 있는 불상의 조명을 달리 비추므로, 기다렸다 눈여겨볼 일하다.)
2번 동굴은 벽에 뿐만 아니라 천정에도 정교한 그림이 있다. 자타카의 이야기들과 함께 석존의 모친이 꾸었다는 코리 꿈 그리고 그네 타는 여인 등이 있는 그림들이 동굴의 벽화들중 알려진 것들이다.
9번 동굴은 10번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후대(마하 야나 시대)에 첨가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두 불상을 입구에서 볼 수 있는데,이 동굴 역시 차이티야에 속한다.
전부 4개가 있는 이곳의 차이티야 중 다른 둘은 19번과 26번 동굴로 이들은 마하야나 불교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10번 동굴은 아잔타의 동굴군 중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잔타에 4개가 있는 차이티야(신전 동굴)중의 하나이며 차이티야 중 가장 큰 규모의 동굴이다.
16번 동굴도 역시 늦게 조성된 동굴 중 의 하나이다. 석존의 이복동생인 난다의 부인 순다리가 그녀의 남편이 자신과 세속을 떠나 수행자가 되기로 작정했음을 듣고 그 슬픔에 못 이겨 죽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임종 즈음의 왕비라는 벽화가 이 동굴을 유명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 동굴은 슬픔과 고통을 묘사함에 있어 어느 그림도 이를 능가할 수 없다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7번 동굴에는 다양하고 많은 그림들이 있는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이기도 하다. 깨달은 후의 석존께서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아내였던 야소달하와 라후라의 거처로 탁발을 나가는 장면이나, 한 꼬마와 두 하인을 대동한 여왕, 왕과 왕비의 산책을 창문 뒤로 엿보는 두 여인, 사랑을 나누는 연인 등 알려진 벽화들이 많이 있다. 또한 17번 동굴에는 미륵불상인 마이트레야상도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19번 동굴은 양편에 서 있는 아름다운 불상들과 탑을 뒤에 두고 있는 인상적인 불상 그리고 눈 여겨지는 벽화들 등 동굴 안에는 볼만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동굴의 밖에 조각되어 있는 나가(7개의 코브라를 머리에 이고 있는 뱀왕)와 그의 부인들인 나긴스(옆의 두 여인)도 새겨 볼 만 하다.
26번 동굴은 열반에 즈음한 석존을 묘사한 입구 왼쪽에 있는 와상의 아름다움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곳으로, 마라의 유혹과 석존이 얽힌 이야기들도 조각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아잔타를 대변하는 벽화들을 여러 동굴에서 볼 수 있으나, 1,2,16,17 동굴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 동굴들은 벽화의 보존을 위하여 실내를 어둡게 만들고, 조명 시설을 갖추어 놓았는데 조명권을 구입해야 들어갈 수 있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와 뒤를 이어 이루어진 엘로라의 것과는 달리 모두 불교 동굴로써, 동굴 안을 장식하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벽화들이 몇 번을 보아도 놀랍도록 아름답다. 이처럼 그려진지 오래된 이곳의 벽화들은 돌벽 위에 쌀겨 가루나 돌가루 반죽 또는 점토 등을 두텁게 덧칠하여 그림을 그릴 바탕을 만든 다음, 다람쥐 털로 만든 붓을 사용하여 황토 흙이나 조약돌 등의 가루에서 만들어 낸 색을 칠하는 천연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벽화들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인해 이곳에 동굴 사원을 조성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그 무대를 엘로라로 옮긴 후, 이곳이 잊혀진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혀야 할 것이다. 비록 천여년만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그림들이라고는 하지만, 이곳 동굴들이 사람들의 완전한 망각의 늪 속에 은신하여 천여 년을 유유자적할 수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 치(Sanchi)
산치는 아쇼카의 대왕이 BC 2-3세기 경에 세운 탑 등이 남아 있는 불교 유적지이다. 북인도의 불교 유적지와는 달리, 석존 개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아쇼카 이후 수세기에 걸쳐 사원과 탑이 조성되었던 곳으로 그 중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다.
아그라 (Agra)
타지 마할
아그라는 타지마할의 도시로서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아그라는 16-17세기에 걸쳐 약 100년간 무굴 제국의 수도로서 영화를 누렸다. 아그라는 델리 남쪽 200km 정도 떨어진 야무나 강 유역에 있는 인구 약 80만의 도시다. 시가지는 타지마할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와 시민의 생활의 장인 북부로 나누어진다. 아그라는 델리․자이푸르와 함께 이루는 ‘황금의 삼각형(Goldem Triangle)’에서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타지 마할(Taj Mahal)
이 사랑을 위한 불멸의 금자탑은 이란의 쉬라즈 출신인 우스타드 이샤에 의해 설계된 것인데, 그의 설계대로 만들기 위한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차출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2만 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축을 위한 자재로는 운반을 위해 1,000여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야 했던 라자스탄 주의 마크라나에서 채취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해야 했던 여러 가지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준비 과정과 장인들을 동원하여 만든 타지 마할의 건축비는 당시 돈으로 500만 루피였다고 한다.
바라나시 (Varanasi)
갠지스강의 화장터
갠지스강의 일출
바라나시는 카시라(영적인 빛으로 충만된 도시)라고 하는데 이 도시에 년간 100만명이상의 순례자가 방문한다. 이 순례자 중 죽음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힌두 성지 중의 성지로 쉬바신의 성도이다. 힌두교의 대표적인 성지 바라나시는 갠지스강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도시의 거리는 미로와도 같고 힌두교의 성스러운 동물, 소 때문에 사람들의 길 찾기는 더욱 힘든 거리로 양편 가게에는 신에게 바치는 꽃이나 공물, 제례 때 쓰는 빨간색이나 오렌지색 가루, 향기 진한 향을 파는 소리가 요란하다. 일생에 한 번 바라나시의 가트(사람들이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계단, 일종의 공동 목욕탕)에서 갠지스 강물에 몸을 씻으면 보다 나은 내세가 약속된다는 신앙 속에서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 강물에 몸을 씻고 남자는 강속에서 요가의 자세로 명상에 잠기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죽은 사람이 화장되어 그 재가 강물에 뿌려지기도 한다.
사르나트 (Sarnath)
다섯비구께 처음 법을 설하신 곳 녹야원
불, 법, 승 삼보가 이루어졌으며, 우바새,우바이가 처음 생긴곳 녹야원
사르나트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성도한 다음 처음으로 설법을 한 곳이다.
보드가야에서 300km 걸으셔서(가야, 라즈기르, 나란다, 파트나, 바라나시 순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 7/7일 만에 부처님께서는 이곳을 찾아 최초로 4성제 및 8정도, 중도의 법을 설하여 교진여 등 5비구를 제도한 장소(차우칸디 스투파)로 한역으로 녹야원이라고 한다. 녹야원에 도착한지 3일째가 되는 저녁, 계속 침묵만을 일관하시던 부처님께서는 그 이전 1000분의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던 곳, 현재의 다메크 스투파 자리에 앉아서 다섯 제자들에게 최초의 법을 설하시게 된다. 그러자 그때 부처님 주위에는 구류손불 및 구나함불, 가섭불 등 현겁의 부처님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에워 쌌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흔들렸다고 한다. 이곳 녹야원은 5비구를 비롯한 야사등 많은 제가자의 출가로 불,법,승 삼보가 이루어지고 비구니를 제외한 우바새, 우바이가 처음 생긴 곳이기도 하다.
보드가야(BUDDH GAYA)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대탑과 성도의 나무 보리수
부다가야는 부처님께서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성도하신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성도하신 뒤에 교화하여 1,000명의 제자를 한꺼번에 두게 된 곳으로, 이곳은 가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 하여 특별히 보드가야(혹은 부다가야 BUDDHA GAYA)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6년간 정진을 하시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게 되었다. 성도 후 7/7 선정에 드신 후, 옛 도반인 5비구를 찾아 서북쪽으로 가셔서 바라나시 근방에 있는 사르나트에서 5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시고 다시 부다가야로 돌아와 가섭3형제(우루벨라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를 교화하신 곳이기도 하다.
1. 마하보디 대탑 (Maha boddhi Temple)
한역(漢譯)으로는 대정사(大精舍) 또는 대보리사(大菩提寺)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에 세워진 높이 52m의 9층 대탑이다. 동쪽 입구로 들어가면 정면에 금박의 불상이 있는데, 오른 손 끝을 땅에 대고 대오(大悟)의 수인(手印)을 보여주고 있다. 대탑 주위에는 4개의 소탑이 있고, 주위에 높이 2.5m 정도의 석주 92개가 서 있다. BC 1세기경에 세운 것으로, 본생담(本生譚)과 연꽃 등이 조각되어 있다.
BC250년경 아쇼카왕에 의해 금강좌 위에 사원이 건립되어 AD 5세기경 굽타 왕조때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되어 진다. AD859년에 다르마팔라왕이 힌두사원으로 건립 되었다가 AD1158 무슬림에 의해 페허가 되었다. 다시 1590년 가만디 기르라 불리우는 수행자가 승원을 건립하였고, 19세기에 대대적으로 고쳐 지은 것이다. 미얀마 왕이 부처님 성도하신 곳의 불교탑이란 소식을 듣고 이곳의 힌두왕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이 탑을 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나서 많은 사람을 보내 현재처럼 복원하고, 미얀마왕은 이곳의 왕과 함께 참배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부다가야 사원 경영위원회가 발족되어 힌두교인 4명 불교인 4명 정부관리 1명이 함께 관리하고 있는데 정부관리인은 반드시 힌두교인이어야 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에서 동편으로 앉아서 새벽 별빛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여 나무 동편에 대탑을 쌓았다고 한다.
2. 성도의 나무 (Bodhi Tree)
마하보디 대탑 서쪽의 자그마한 사원 옆에 서 있는 보리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명상에 잠기고 성도한
나무인데, BC3세기경 아쇼카왕의 딸 상가미타가 스리랑카의 보리수 묘목을 옮겨 심어 수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1876년에 어린 묘목으로 다시 심어 현재에 이른다.
나무 밑에는 부처님께서 좌선(坐禪)을 했던 금강보좌가 놓여 있다. 돌에는 아쇼카 시대의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3. 금강좌 : 원래의 금강좌는 사원 안에 모셔져 있었고, 현재의 금강좌는 굽타 왕조 초기에 조성되었다.
4. 불족적 : 금강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께서 첫발을 내디딘 곳에 새겨졌다는 바위. 길이 0.9m의 발바닥 형상에는 애초에는 법륜, 물고기, 챠크라 등의 형상이 있었다.
5. 아쇼카 석주 : 왕으로 즉위한 후 두 번에 걸쳐 이곳을 방문, 코끼리머리 모양 석주를 세웠다.
6. 반얀나무 :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좌정하고 계실 때 브라만이 찾아와 법을 청해 법구경을 설하셨다.
7. 무칠린다 용왕못 : 무칠린다라고 불리는 용왕이 부처님을 일곱 바퀴 둘러싸고 비바람, 천둥과 번개를 막아주고, 제석천과 범천으로부터 중생들에게 법을 설할것을 세번이나 간청받았다.
8. 보드가야 주변의 유적 : 니련선하강 건너의 수자타 집터, 전정각산(등게스와르), 유영굴 등, 가야를 향하는 길목에는 상두산이 있다. 상두산은 코끼리 머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라지기르 (RAJGIR, 왕사성)
부처님께서 성도후 법화경, 보적경 등 대승경전을 설하셨던 영축산
염화미소 정법안장을 하신 영축산에서 입정
독수리 형상의 바위
빔비사라 왕 감옥터에서 바라보이는 영축산
빔비사라왕이 기증한 불교교단 최초의 정사 죽림정사
바위산에 둘러싸인 견고한 요새 같은 분지이며, 마가다 왕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나, 불경에도 나오는 수행의 현장 판다바 산(白善山), 부처님께서 만년에 살았던 그리다쿠타 산(靈鷲山) 등을 볼 수 있다.
1. 영축산
2. 빔리사라왕 감옥터
구 왕사성 내성의 가장자리에 위치함. 현재는 사방 60m의 정방형의 터만을 알아볼 수 있게 얕게 돌을 쌓아놓았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8년 전에 빔비사라 왕은 이 감옥에 갇혀 창문을 통해 영축산을 바라보며 부처님께 예배드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3. 죽림정사 (竹林精舍)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께 바친 땅이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부처님은 명상에 잠기고 설법도 하였다. 지금은 그곳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목욕하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온천수가 솟은 곳도 있다. 불교교단의 최최의 정사였으나 지금은 사원터임을 추정할 수 있는 대나무 숲과 카난다 연못만이 남아있다.
나란다 대학 터(NALADA)
AD5세기경에 세워진 불교 최초로 최대의 규모로 세워진 대학
나란다대학 터
BC 250년경 아쇼카 왕이 이곳을 찾아 사리프트라의 부도에 경의를 표한 후 그곳에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불교의 쇠퇴를 방지키 위해 108개의 사원을 건립하였다.
바이살리 (VAISALI)
아쇼카석주
도솔천에 계시는 어머니 마야부인께 설법하시고 하강하셨던 "꿈의계단"에서 입정
꿈의계단에서 단체촬영
원숭이형상의 석주
부처님 발우탑
부처님사리 탑 터
아쇼카 왕이 벽돌로 쌓은 스투파의 유적과, 원숭이가 파서 석가모니에게 시주했다는 연못 라마쿤드 등이 있으며, 출토된 유물은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이곳을 자주 방문 했는데, 마지막 방문 때에는 불교에 귀의한 부유한 창녀 암파발리의 저택에 머물면서, 그녀가 울리는 공양을 받았다고 한다. 신분의 구별 없이 불법을 편 석가모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는 3개월후 입멸에 드신다고 예언을 하고 아난다와 쿠시나가르로 향해 떠나신다.
쿠시나가르 Kushinagar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곳 열반당
부처님 다비장 라마스투파
부처님의 입멸지인 쿠시나가르는 라즈기르에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시고 3개월 동안 아난다와 등창에 시달리며 25번을 쉬시며 오신 곳이다. 이곳 쿠시나가르에서 부처님은 대장장이 춘다의 수크라 맛따바(돼지고기요리의 일종)라는 요리를 공양 받고 심한 설사병을 얻어 히라야바티 강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사라쌍수 아래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하고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에게 법을 전하고 열반에 드신다.
1. 아쇼카 스투파 : 높이 60m로 원자력 발전소 모양으로 증축 현재에 이르고 있다.열반당 옆에 아쇼카왕이 세운 열반탑이있다. 발굴당시 에도 정상부를 포함해 45m나 되는 거대한 탑이였다고 한다. 이 탑 위에 허물어진 작은 규모의 유적지는 부처님을 25년간 시봉했던 아난다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2. 열반당 : 부처님께서 누워 열반에 드신 자리이다. 벽돌로 만든 큰 정사 안에 여래의 열반상이 있던 유적은 없어지고 지금의 열반사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5세기초에 하리바라 신자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것이라 한다. 열반상 기단 부에는 부처님 머리 쪽에 슬픔에 젖어 있는 프라세나짓왕의 부인 말리카 왕후가 조각되어 있다.
3. 대반열반탑(라마브라하 스투파) : 부처님 다비장. 열반 후 7일이 지나자 말라족들이 부처님의 시신을 열반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전륜성왕과 같이 장례식을 치뤘다고 한다. 이곳에서 화장이 되고 남은 부처님의 사리는 8군데로 나누어지고, 재와 사리를 담은 병까지 탑으로 모셔지게 된다.
쉬라바스티(기원정사,사위성)
부처님께서 24안거를 나시고 금강경을 설하신 곳 기원정사
교화의 중심지 기원정사
인도말로는 “베다바나”, 즉 “제다의 숲”이라고 한다. 제다 태자가 제공한 숲과 급고독 장자가 세웠다 고하여 “기수급 고독원”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줄여 기원정사가 된 것이다.
쉬라바스티의 부호였던 수닷타 장자는 아들의 혼삿일로 라즈기르에 갔다가,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의 법을 듣고 부처님께 귀의 해서 코살라국의 수도 쉬라바스티에 꼭 와줄 것을 간청한다. 수닷타 장자는 쉬라바스티로 돌아와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제타태자의 제타바나 동산을 찾아 정사 건립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타태자는 황금으로 동산을 깔아준다면 동산을 팔겠다는 말을 한다. 이에 수닷타 장자는 황금으로 동산을 깔기 시작, 이에 감동한 제타 태자는 황금을 깔지 못한 부분은 태자 자신이 부처님께 기증하여, 이곳에 불교 교단의 2대 정사인 기원정사를 건립하였다. 남북457M, 동서 152M 에 승원 유적지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24회의 안거를 지내시며 현존하는 경전 가운데서 70%를 설하시게 된다.
2. 사위성 (舍衛成, 마헤트)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잘라 모으던 앙굴리말라가 석가모니에게 귀의한 설화의 무대이자, 석가모니가 기적을 보여준 곳이다. 사헤트 북동쪽 약 600m 지점에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사위성안에는 궁성 건물터와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을 위해 세운 대법당 터와 수닷타장자의 집터, 앙굴리말라의 집터 등에 스투파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 앙굴리말라의 탑터와 수닷타장자의 탑터만 발굴되었을 뿐, 그 외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룸비니(Lumbini)
네팔에 위치한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의 마야데비사원
보리수 나무와 구룡포수 연못
아쇼카석주
1. 마야데비 사원 (Mayadevi Temple)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곳을 둘러싼 성원(聖園) 안에 있는 사원이다. 최근에 복원한 사원이 있는데, 신발을 벗고 당내로 들어가면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을 주제로 한 석상이 서 있다.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2. 아쇼카 석주
아쇼카 왕이 즉위 20년 되는 해(B.C. 250)에 이곳에 와 세우게 했다는 석주이다. 1895년 룬민 디 사원을 발굴할 때 발견된 것인데, 석주는 중간이 부러져 있다. 석주에는 이 마을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하였기에 이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생산물의 8/1만 징수하라는 기록이 새겨져있다.
첫댓글 정리하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안보살님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행복합니다 ^^♡
성불하십시오-()()()-
사진과 해설을 해 놓아서...이해 하기 쉽습니다.
감사합니다...성불하십시요...()()()...
불교공부 많이 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다시한번더다녀온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