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표 산쟁이, 윤대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설악의 토왕골 로 달려간 손칠규 씨는 1978년 2월2일 악우회의 토왕폭 등반대와 합류했다.
신성삼. 임근성. 백승기. 이진섭. 이진우 대원의 지원을 받은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대구 왕골산악회의 손칠규 대원과 자일을 함께 묶고 다음날 오전 11시30분 토왕폭 하단에 붙었다. 하단의 동굴을 거치지 않는 왼쪽 루트를 통해 먼저 오르기 시작한 윤대장 은 오후 1시 무렵 동대테라스에 올라섰다. 그는77년2월 악우회 후배인 유한규 대원과 토왕폭 에 도전했을 때 동대테라스에서 심한 낙수를 만나 돌아서고 말았었다. 그때 유대원 은 발톱을 여섯 개나 뽑아야 하는 심한 동상에 걸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줄기가 동대테라스의 오른쪽으로 트여 다행히 등반루트에는 낙수가 심하지 않았다.
뒤따라 오르던 손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에 완전히 올라섰다. 4시간 30분 만에 하단 등반을 끝냈다.
2월4일 오전 11시40분. 윤대표 대장과 손칠규 대원은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토왕폭 상단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대표 씨 라면 대표라는 이름 그대로 국가 대표 급 산악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낳고 이름 지어준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수 있는 인ㄱ 스포츠 종목의‘대표. 가 아니라. 도대체 밥이 나오길 하나 돈이 되 길하나 부른 배마저 쉽게 꺼져 버리고 마는 그놈의 산에 미쳐버린 ’등산대표, 가 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이 같은 탄식은 아들의 이름을 ‘대표. 로 지은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윤대표의 아버지 윤선 씨는 윤대표 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윤선 씨가 알고 있는 윤대표 라는 이름은 자랑스러운 대표적인 대장부였다. 아버지는 그런 대표적인 장부가 되라는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대표라고 지었다. 아버지가 바랐던 ’장부대표, 와 지금의 산대표가 된 윤대표 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대표 는 체격은 작은 편이나 ‘겁 없는 산사나이, 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한눈에 야무진 외골수임을 느끼게 한다. 검고 반듯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짙은 눈썹은 당겨진 활시위에 놓인 화살 같은 긴장감을 준다.
윤대표 는 산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결벽증을 가진‘윤대표 의 산,이다.
그에게는 오직 산만 산이다. 삶의 다른 국면을 산으로 대체하는 산쟁이들이 있지만 윤대표 는 그마저 거부한다. 술도 담배 도 모른다. 그에게 술과 담배는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다. 말도 그에게는 산이 아니다. 입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단다. 파트너란 어떤 벽을 겨누고 뜻을 같이 했을 때 함께 오르는 동료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도 산이 아닌 것이다. 그런 친구를 따라 가는 곳은 강남일 뿐, 산이 아니다.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자일을 함께 묶을 수 있고, 그만한 파트너가 없을 때는 혼자 오른다.
그런 윤대표 씨를 산에 입문시킨 사람은 친형인 윤인표 씨다. 대학에서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던 형은 70년 고교를 막 졸업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도봉산 선인 봉 의 남쪽 코르를 올랐다. ‘형제 산행. 은 그 후 3년간 계속됐다.
23 ‘시라우스. 윤대표
형과 자일을 묶고 지냈던 1973년 무렵 윤대표 씨는 신문에 실린 회원모집 공고를 보고 엠포로 산악회에 가입했다. 엠포르 산악회 에서 최고의 공격수 로 떠오른 그는 어느 날 서울 합정동 로터리를 자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위스제 헹케 비브람(겨울 용 중등산화)을 신고 있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유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은 걸었다. 그 비브람 의 주인이 악우회 회원 백승기 씨였다.
그 인연으로 윤씨는 1976년10월 악우회 에 몸담게 됐다.
악우회 회원들과 77년 도봉산 선인봉의 모든 코스를 연결해 오르는 연장등반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설악산 선녀 봉을 초등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손칠규 씨와 자일을 함께 묶고 토왕폭 제3등에 도전한 것이다.
무예의 고수처럼 세 자루의 아이스 해머를 적절히 휘두른 윤씨는 78년 2월 4일 오후 4시쯤 토왕폭 상단 3분의 2지점에 자리 잡은 테라스에 오라섰다. 뒤이어 손칠규 씨는 5시15분쯤 테라스에 닿았다.
그 테라스 위쪽의 이른바‘얼음 골짜기, 에서 윤씨는 토왕폭 등반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얼음 골짜기는 암벽 위를 살얼음으로 살짝 도배해 놓은 듯했다. 그 얼음 층이 너무 얇아 아이젠과 아이스해머의 이빨을 제대로 물어주지 못했다.
그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윤씨는 정신이 아득 해졌다.
피로와 허기로 지쳐가는 몸으로 사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토왕폭 의 사나이를 두고 해는 함지덕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동시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 손의 감각과 의식을 잃어가든 윤시는 푸석푸석한 얼음에 얼굴은 마구 문질렀다. 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상황임을 몸에 일깨워주려고 윤 대장은 자신의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다.
자꾸만 허물어져 내리는 도배 빙벽이어서 아이젠의 앞 이빨을 박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이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유씨는 킥 스텝으로 억지 발 디딤을 만들거나 양 무릎을 얼음벽에 바싹 붙이며 어둠 속의 얼음 골짜기를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야 했다.
오후 7시40분, 그렇게 사투를 벌여 얼음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윤씨는 뒤따라 올라온 손씨를 정상에서 뜨겁게 껴안았다. 1박2일에 걸쳐 12시간30분 만에 이룬 토왕폭 빙벽 제 3등이었다.
이 등반에서 토왕폭 빙벽 3백m 구간을 앞장서 오른 유씨는 1년 뒤인 79년과 80년 두 차례에 걸쳐 당시 한국산악계 최대 과제였던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북벽. 마터호른 북벽. 그랑드 조라스 북벽)을 한국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위업의 자일 파트너 엿 던 허 욱 씨와 연계시켜 윤씨가 산 악계 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겨울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라는 별에 비유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