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 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1888년 6월 20일 본당이 설립되어 풍수원에 세워진 현재의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것이다. 더욱이 지난 1982년에는 강원도에 의해 지방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바 있는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보여진다. 이 때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식솔을 이끌고 혹은 혈혈 단신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에서 신태보(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을 이룬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교우천을 형성하면서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는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유난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감히 다가들지 못하는 첩첩산중에서 이들 신앙 공동체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기도와 생활을 영위한다.
1855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 때 교우들은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피난처를 찾던 신자들을 불러 모아 큰 촌락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끼리 모인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우들은 처음 풍수원으로 찾아든 이래 무려 80여 년 동안을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 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룬 채 믿음을 지켜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그 이듬해 교우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가 상주해 돌보아 주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민 대주교는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신부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이(李) 신부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아직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간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열성은 가히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됐고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등 주위의 본당들은 모두 풍수원으로부터 분당되어 나온 것이다. 이처럼 강원 지역 전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풍수원 성당에는 오랜 세월 성숙된 신앙의 유산을 배우고 묵상하고자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현재 풍수원에는 대강의실, 5개의 온돌방, 유물 전시관 등을 갖춘 피정의 집이 세워져 있어 개인으로나 단체로 피정을 원하는 순례자들을 도와 주고 있기도 하다.
한편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