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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강 - 疑問品-4
慧能이 與諸人으로 移西方於刹那間하야 目前에 便見케하리니 各願見否아 衆皆頂禮云,
若此處見인댄 何須更願往生하오리까 願和尙은 慈悲로 便現西方하여 普令得見케하소서
師言, 大衆아 世人의 自色身은 是城이요 眼耳鼻舌은 是門이니 外有五門하고 內有意門하며 心是地요
性是王이라 王居心地上하나니 性在면 王在요 性去면 王無라 性在면 身心從하고 性去면 身心壞니 佛은 向性中作이언정 莫向身外求니라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요 自性을 覺하면 卽是佛이니 慈悲는 卽是觀音이요 喜捨는 名爲勢至며 能淨은 卽釋迦요 平直은 卽彌陀며 人我는 是海水요 煩惱는 是波浪이며 毒害는 是惡龍이요 虛妄은 是鬼神이며 塵勞는 是魚鼈이요 貪嗔은 是地獄이며 愚痴는 是畜生이라
善知識아 常行十善하면 天堂이 便至하고 除人我하면 須彌壞하고 去邪心하면 海水渴하고 煩惱無하면 波浪滅하고 毒害亡하면 魚龍絶이니 自心地上에 覺性如來가 放大光明하야 外照六門淸淨하야 能破六欲諸天하고 自性內照하야 三毒卽除하면 地獄等罪가 一時消滅하고 內外明徹하야 不異西方이어니와 若作此修하면 如何到彼리요 大衆이 聞說하고 了然見性하야 悉皆禮拜하고 俱歎善哉하야 唱言, 普願法界衆生이 聞者一時悟解하야지이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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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자사라고 하는 육조스님의 제자가 두 가지 의문을 육조스님께 질문을 했지요? 하나는 진정한 공덕의 문제가 궁금하다고 해서 달마대사의 예를 들어서 공덕을 물었고, 그 다음에 정토! 西方淨土(서방정토)라고 하는 것이 불교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淨土宗(정토종). 淨土敎(정토교). 정토에 관계되는 경전도 몇 가지가 있고, 또 특히 중국에서는 정토를 수행하는 사찰이 상당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염불이 많이 발달이 됐어요. 일본도 정토진종이 있고요. 그래서 이 정토 문제에 대해서 위 자사가 궁금해서 육조스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을 설명해 나가는 중간에, 설명이 아직 미쳐 덜 된 부분이지만, 어지간히 설명은 했습니다.
대개 10만 8천억 국토를 지나서 정토가 있다는데, 그것이 어떻게 된 거냐? 진정 어떤 의미가 있느냐?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어디에다가 마음을 두고 하시는 것이냐? 부처님의 속뜻은 도대체 뭐냐? 이런 질문으로 받아 들여서, 그런 입장에서 육조스님께서는 설명을 하셨습니다. 사실 육조스님말씀은 어떻게 생각하면 정토 문제를 순수하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대단히 충격적인 설명인데, 그러나 또 그 말씀은 도저히 어떻게 달리 반박할 길이 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동방 사람은 염불해서 서방정토로 간다고 하면, 그럼 서방 사람은 염불해서 동방으로 간단 말이냐? 지역의 동 서에 과연 정토라고 하는 것. 불교의 이상세계가 과연 있느냐? 이런 문제. 정말 확실하게 증명 돼야할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정토를 거의 설명을 하고 육조스님께서 아예 여러분들 앞에 정토를 보여 주겠다. 이렇게 까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慧能(헤능)이 與諸人(여제인)으로 移西方於刹那間(이서방어찰나간)하야 目前(목전)에 便見(변견)케하리라→ 내가 여러 사람들로 더불어 함께 서방정토를 옮겨가지고, 그것도 순식간에. 찰라 사이에 옮겨가지고서 눈앞에 보게 하겠다. 그렇게 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各願見否(각원견부)아→ 각각 보기를 원하느냐? 아, 그거 원 하지 않을 사람이 없지요.
衆皆頂禮云(중개정례운)→ 대중들이 모두들 머리를 발에다가, 또는 땅에다가 대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
불교에서 예배할 때 대개 이마 頂자를 써서 頂禮. 이런 표현을 써요. “예의 극치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마는 사람의 가장 존귀한 것. 제일 높은데, 이마로서 부처님 발에다 예배를 했다는 이런 표현이 있는데, 발은 인체에서 제일 낮은데 그렇습니다. 제일 높은 것으로서 제일 낮은 데에다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의 극치다.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마 頂자를 써요. 이마로 예배를 올리고 말했다.
若此處見(약차처견)인댄→ 만약에 우리가 앉은 이 자리에서 본다면
何須更願往生(하수갱원왕생)하오리까→ 어찌. 모름지기 다시 왕생을 원하겠습니까? 만약에 차처견. 이 자리에서 본다면 왕생을 원할 까닭이 뭐 있겠습니까? 이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고서, 가지 않고 이 자리에서 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왕생을 굳이 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願和尙(원화상)은 慈悲(자비)로 便現西方(편현서방)하여→ 원컨데 화상께서는, 큰스님께서는 자비로 서방정토를 나타내서 普令得見(보령득견)케하소서→ 모두들 널리 다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청을 드린 것이지요.
師言(사언)→ 육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大衆(대중)아 世人(세인)의→ 대중들이여 세상 사람의
自色身(자색신)이 是城(시성)이요.→ 극락세계하면 거기엔 예를 들어서 城도 있을 것이고, 또 땅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여러 가지 왕 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지 않느냐?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色身. 이 육신의 몸뚱이. 이것은 그 극락정토를 둘러싸고 있는 성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은 단순한 육신이 아니라 거기엔
眼耳鼻舌(안이비설)은 是門(시문)이니→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혀가 있고. 이런 것이 있는데 이것은 門이다. 이겁니다. 우리의 의식이 출입하니까요.
눈을 통해서 어떤 사물을 보는 그런 어떤 출입의 문의 역할을 하고, 귀는 소리를 분별하는 그런 문의 역할을 한다.
일찍이 경전에서 육근을 六根門頭(육근문두)그래요. 또 六根門(육근문). 그런 말을 하는데, 문은 여섯 개 인데 그 안에는, 예를 들어서 원숭이 한 마리를 넣어 놨다.
그래 원숭이를 부르는데 왼쪽에서 부르면 왼쪽 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오른쪽에서 부르면 오른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동쪽에서 부르면 동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렇게 여섯 문에서 각각 사람이 부르면 얼굴을 다 내밀지만, 결국 원숭이는 한 마리입니다. 우리 의식은 하나이지요.
그런데 각각 눈의 문. 귀의 문. 코의 문. 혀의 문. 이런 등등의 그 문을 통해서 의식이 출입을 하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인식 작용을 하는 것을 出이라면, 그 하나의 인식 활동이 다른 인식 활동으로 전환할 때, 그것은 이미 入이고, 또 새로운 出이 시작 되겠지요.
그래서 늘 마음의 변화에 따라서. 의식의 변화에 따라서 인식을 달리 하는 것을 出入(출입)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안. 이. 비. 설 이런 것들이 문이지요.
外有五門(외유오문)이다→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內有意門(내유의문)→ 안으로 의문이 있으니까 여섯 문이 있다고 합니다. 안. 이. 비. 설. 신 까지는 5문이고, 몸뚱이 전체로 볼 때는 그것은 城(성)이고, 그 하나의 성에 다섯 문이 있고, 안에 意門, 마음의 문이 하나 있으니 그래서 6문이 된다는 육조스님의 특유의 설명입니다.
그리고 心是地(심시지)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그 城의 근저가 되는 땅의 입장이다.
性是王(성시왕)이라→ 性品(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 城의 주인인 王이다. 그래요. 여기 心과 性이 나오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心과 性을 함께 생각하기로 하면서 또 이런 때는 달리 이해해야 되게끔 봅니다. 그래서 마음의 모든 작용 중에 성품 性자를 왕이다. 그랬어요. 그런데 이 마음 心자. 이것이 하나가 들어가지고서는, 모든 마음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전부 마음 心자가 다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다 푸를 靑(청)자를 더하면 情(정)이 되고, 선비士(사)를 더하면 志(지)인데 아주 좋은 뜻이지요. 그 다음에 우리가 마음을 생각할 때는 意志(의지). ←이렇게 해서, 어떤 세운 뜻.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작용시킨다는 의미가 되겠고요. 뭘 인식한다 할 때는 言(언)+忍(인). ←이렇게 해서 認識(인식)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의 전부가, 예를 들어서 性 과 다른 점이 뭐냐?
性은 生命(생명)의 의미가 있어요. “마음이 난다.”이겁니다. “어떤 식으로 나느냐?”하는 것은 情(정)의 입장으로 나느냐? 知慧(지혜)의 입장으로 나느냐? 意(의)의 입장으로 나느냐? 또 뭐 많지요. 마음 심자가 들어간 글자가 아주 여러 가지가 있어요. 심방변에 찾아보면 글자가 수십 자가 넘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나든지 간에 나오는 그 작용. 그 자체에만 볼 때에는 성품 性(성)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탕이 되는 것이지요. 바탕...
모든 작용하는 마음의 바탕이 되는 것을 性이라고 그래요. 이 心자는 근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地라고 그러지요. 땅. 나오는 입장으로. 그러니까 땅에서 모든 식물이 나오는 입장으로 볼 때는 性品(성품)이고, 그것이 무엇으로 나느냐? 情으로 나오면 그 때는 푸를 靑(청)를 더하고, 志士(지사)가 나올 때는 志가 되겠고요. 이런 식으로 분별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心 다음에 性이고, 性 다음에 지엽적인 것은 여러 가지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 마음작용을 우리가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心과 性이 같으면서도 또 미세한 입장에 들어가서는 좀 달라요.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도 우리 마음 작용의 총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性品(성품)이다.”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性是王이다. 心 = 地. 땅의 입장이고 性은 그 땅의 王이고. 그러니까 왕이 王居心地上(왕거심지상)하니→ 마음 땅 위에 왕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마음이 나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서 성품을 삼고, 어떤 마음이냐 푸른 마음이냐 무슨 지사의 마음이냐 선비의 마음이냐 하는 그런 분별은 미세한 성질. 나오는 마음의 어떤 성격을 규정짓는 글자가 되고 그렇겠지요.
心是地요 마음은 땅이 되고,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입장이다. 왕이 마음땅 에 居하니 性在(성재)면 王在(왕재)요→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은 왕이 있다는 뜻이고, 性去(성거)면 王無(왕무)라→ 성품이 가 버렸다고 하는 것은 왕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性在(성재)는 身心從(신심종)하고→ 이럴 때 身心이라고 하는 것은 心是地의 그런 心이 아니라 마음의 모든 입장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할 때, 그냥 일반적인 마음이지요.
성품이 있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있고,
性去(성거)면→ 성품이 가 버릴 것 같으면,
身心壞(심신괴)다→ 몸과 마음이 그래서 무너진다.
佛은→ 부처님을 말하면 向性中作(향성중작)이언정→ 성품. 성품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성품에서 지어질지 언정. 성품을 향해서 지어질지 언정
莫向身外求(막향신외구)니라→ 몸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라. 우리가 따지고 보면 몸과 마음이 하나거든요. 그 하나 속에서 분류하면 둘도 되고 셋도 되고, 6근도 되고 6식도 되는 온갖 그런 분별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그러한 성품. 그러한 성품을. 우리는 그냥 마음 해 놓으면 인식이 안돼요. 성품이라고 했을 때 비로소 인식이 됩니다.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되요.
生(생)! 생의 의미! 마음이 이렇게 생동하는 그런 뭐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인식이 가능 하거든요. 그래서
自性(자성)을 迷(미)할 것 같으면 卽是衆生(즉시중생)이다→ 자성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걸 가지고 중생이냐 부처냐 그런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自性을 迷하면 卽是衆生이다. 自性(자성)을 覺(각)하면→ 자성을 깨달으면 卽是佛(즉시불)이니→ 즉시 부처라고 한다. 그런 말입니다. 자성 아는 것을 부처라고 한다. 그런 말입니다.
慈悲(자비)는 卽是觀音(즉시관음)이요.→ 우리의 자성 자리에서 자비심이 나오는 그런 입장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喜捨(희사)→ 기쁜 마음으로 베푸는 것. 그것이 喜捨 거든요. 名爲勢至(명위세지)며→ 그건 이름이 대세지보살이다.
희사의 입장은 세지다. 자비를 베푸는 입장은 관세음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그 순간 관세음보살이예요. 그 다음에 喜捨.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뭔가 베풀면 그것은 그대로 대세지보살입니다. 그리고 能淨(능정)은 卽釋迦(즉석가)요.→ 능히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곧 석가모니부처님이다. 그리고 平直(평직)은 卽彌陀(즉미타)다→ 마음이 평탄하고 곧으면 아미타다.
마음의 여러 가지 입장들을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또 불경에서 여러 가지 聖人(성인)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으신 그 깨달음의 내용에서 볼 때, 그 깨달음은 한 두 마디로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그 깨달음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그 중요한 인간의 마음작용을, 또 깨달은 사람의 어떤 마음작용을 석가다. 미타다. 관음이다. 지장이다. 대세지다.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이렇게 육조스님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人我(인아)는 是海水(시해수)요.→ 人相(인상). 我相(아상). 그러지요. 그것은 예를 들어서 바닷물이다. 그 바닷물 안에는 파도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악한용이 있을 것이고, 귀신도 있을 것이고, 자라. 고기 뭐 이런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고, 그런 모든 8만4천 번뇌의 根本(근본)은 물 아래 있는 여러 가지 종류를 8만4천 번뇌라고 보고, 그 8만4천 번뇌의 근본은 나다. 남이다하는 이 分別心(분별심)이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별심. 인상. 아상. 나다. 남이다하는 自我意識(자아의식)이라고 할까. 또 남이라고 하는 어떤 差別意識(차별의식)이라고 할까. 나와 남을 분별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四相(사상)을 이야기 할 때도, 我相(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 그렇게 순서가 되어 있지요.
我(아)와 法(법). 아상. 인상. 나다. 남이다하는 그런 분별심이 기본이 되어서 거기에서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나다. 남이다 하는 거기에 전부 기준을 맞춰가지고 내것. 네것. 이렇게 분별하고, 내 것은 지켜져야 하고 네 것은 지켜지든지 말든지 관심 없고. 내 것이면 좋고 네 것이면 안 좋고, 모든 인간의 번뇌가 나다. 남이다하는 거기에서부터 기초를 두고 물결이 일기 시작해서 온갖 문제가 야기된다. 그래서 고통도 나다. 남이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해수라고 그래요. 바다의 물. 지극히 단순 하면서도 상당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海水지요.
그래서 煩惱(번뇌)는 是波浪(시파랑)이다→ 번뇌는 물결이다 이겁니다. 시파랑이다. 번뇌는 물결. 거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작용들이지요. 그것이 파랑이다.
毒害(독해)는 是惡龍(시악룡)이요→ 우리 인간의 마음에 독해적인 要素(요소)가 있는데, 그런 요소는 말하자면 악한 용. 바다의 악한용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식인 상어라고 해도 좋고요.
그 다음에 虛妄(허망)은 是鬼神(시귀신)이다→ 우리 마음에 허망한 입장을 귀신이다. 그렇게 했어요. 이것 참, 생각해보면 아주 묘한 그런 표현입니다. 虛妄은 鬼神이다. 정말 허망한 것이 귀신이고 귀신은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塵勞(진로)는→ 진로는 번뇌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塵勞라고. 번뇌라고 했을 때는 번거롭고, 머리 복잡한 것. 번거롭고 뇌롭고 괴롭다 그런 말을 해요. 아주 골치 아프다. 그것이 번뇌의 정확한 표현인데, 또 塵勞라고도 번뇌를 표현 한다 이겁니다.
진은 먼지 塵자니까 거울에 먼지가 끼었으면 잘 안 보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깨끗한 마음을 흐려놓는다고 그래서 塵자 를 쓰고, 또 사람이 피로 하면, 눈이 피로해도 잘 보이지 않고, 또 몸이 피로 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능이 떨어지지요.
그래서 제 역할을 못한다 해서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塵勞다.
그런 입장으로서는, 是魚鼈(시어별)이요.→ 바다 속의 고기와 자라다. 그래 海水안에 그것이 다 있지요. 그 다음에 貪嗔(탐진)은 是地獄(시지옥)이다→ 탐심과 진심은 지옥이다. 지옥의 요소는 전부 탐심 진심에서 생기는 것이지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 또 같은 나라에서도 그 편을 나눠가지고 두 동강이 나서 서로 싸우고 하는 것. 발단은 전부 貪心(탐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배하고자 하는 또, 자기의 지배영역을 좀 더 넓히고자하는 그런 탐욕심에서, 자기가 지배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기에 또 한 가지는 예를 들어서 어떤 원한관계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嗔怒(진노). 嗔心(진심)에 해당 되겠지요. 그것이 조금 加味(가미)가 될 수가 있습니다. 보복하는 것. 보복하느라고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요. 있지만...
전쟁의 시발은 대개 貪慾(탐욕)입니다. 그것이 탐심 이예요. 과거의 전쟁이든 현재의 전쟁이든 미래의 전쟁이든 정말 전쟁은 없어야 돼요.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 저지른 어리석은 일중의 하나예요. 사실은...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자기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막 그냥 어리석은 국민들을 충동질해가지고 무슨 주의니 사상이니 이런걸, 있지도 않은 그런 것을 괜히 만들어서 막 부추겨서는 그저 생명을 걸고 싸우게 한다고요. 그 속심은 뭡니까?
자기의 지배욕 충족을 위해서 사람의 생명을 갖다가 그렇게 막 무자비하게 갖다 밀어 넣는 거예요.
자기의 지배욕 충족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 지배욕 충족이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외에...
그러니까 이 민중은 어리석으니까 그 속심을 모르잖아요? “무슨 주의다.” 이래 놓으면 그만 거기에 혼용이 되어가지고, 거기에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보다.’하고 “아, 우리는 뭘 위해서 어쩐다.” 하고 그냥 그 귀중한 생명을 바치고 그러는데, 알아도 영악하게 아는 사람들이 제일 나쁜 사람들이지요 사실은...
정상적으로 제대로 선량한 지식. 선량한 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聖人(성인) 쪽. 수행 쪽으로 나가고.
그렇지 않고 아주 영악한 지식. 姦知(간지)를 가진 사람들은 정치 쪽으로 어떤 자기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리석은 민중들을 동원해서는, 자기 야욕을 충족시키는데 그냥 갖다 다 바치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전쟁의 역사입니다. 다른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지고보면... 전부 貪(탐)입니다.
그 다음에 원한관계. 분노지요. 그것은 분노의 관계. ‘이런 것이 지옥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해석입니다.
그 다음에 愚痴(우치)는 是畜生(시축생)이라 그렇게 표현했어요.→ 이것은 경전에도 이런 식으로 표현을 많이 합니다. 천수경에 十願六向(십원육향) 이라는 말이 있는데, 불도수행을 통해서. 불교공부. 불교를 믿어서 어떤 효과를 우리가 기대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답인데, 거기에 [我若向畜生(아약향축생) 自得大智慧(자득대지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치와 지혜는 반대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불교공부를 해서 어리석은 축생과 같은 그런 마음을 지혜로 전환시키자고 하는 그런 데에 뜻이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우치는 축생이라 그래요. 어리석음 그 자체가 축생과 같은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민중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축생노릇밖에 못하는 겁니다. 축생노릇밖에 못한다고요.
사상이니 주의주장이니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실 알고보면... 본래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것은 어느 편에서 보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지요. 어리석음은 그대로 축생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불교는 축생 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지혜를 얻도록 하자고 하는 것. 이것이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소나 돼지를 우리는 축생 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어리석음 그 자체가 그대로 이미 축생이다. 이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래 제가 천수경에 이 구절을 설명할 때, 축생이 지혜를 얻으면, 천수경말 대로라면 “축생이 지혜를 얻게 해야 된다.” 그럼 “소나 돼지가 지혜를 얻으면 어떻게 된단 말이냐?” 결코 부처님은 그런 식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거든요. 경전에... 돼지가 지혜를 얻으면 뭐 맛이 더 있는가? 무게가 더 나가는가? 그거 아무 관계없는 거라고요. 돼지는 어리석을수록 좋지 지혜는 뭐 하려고 지혜를...
그거는 인간을 두고 하는 소리예요. 인간...
우리가 어리석으면 “개. 돼지만도 못하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어리석다.”고...
“아~ 소같이 어리석다.”고... 우리가 그런 말을 곧잘 쓰는데 전부 천수경 영향이라고요. “축생 같은 우리 어리석은 마음에 지혜가 얻어지이다.”라고 하는 그것이 [아약향축생 자득대지혜] 천수경의 교훈입니다.
여기 육조스님은 우치는 그대로 축생이라고 그랬어요. ‘어리석으면 그대로 축생이다.’ 너무나도 참 확실한 표현이지요.
善知識(선지식)아 常行十善(상행십선)하면→ 항상 열 가지 善을 행할 것 같으면, 天堂(천당)이 便至(편지)다→ 바로 천당이 내가있는 곁에 이르러 온다. 이겁니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천당이 저절로 내 한테 온다는 것입니다. 열 가지 善. 열 가지 善을 행할 것 같으면 바로 천당이 우리곁에 온다. 지난 시간에: (27강) 10선 8사에 대해서 소개를 했지요?
天堂이 便至다. 除人我(제인아)하면 須彌(수미)가 壞(괴)한다 그랬어요.→ 인 아상, 我相(아상). 人相(인상). 나 라고 하는 생각. 남이라고 하는 생각. 그런 차별의식. 그것이 제해진다면 수미산이 무너진다. 그랬어요. 수미산이... 수미산이라고 하는 것이 아상 인상이라고 하는 산을, [我人山上(아인산상) 長無明(장무명)] 아 인 산위에 무명이 자라난다. 그런 말이 있듯이, 산 중에도 제일 높은 수미산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사실 어른이고 아이고 간에 자기자존심. 자기자존심을 건드린다든지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든지 하면, 뭐 부부 아니라 우 부부라도 그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라도 자존심에 상처주면, 그것을 용납할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을 용납할 부부는 없고, 그것을 용납할 친한 친구는 없어요. 그런데 하물며 남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상. 인상의 자존심산이, 나 라고 하는 그 아상의 산이 사실은 형상이 없어서 안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수미산 같이 높다는 겁니다. 저 금정산 한 10배 20배되는 것이 수미산이거든요. 그와 같이 높은 것으로 버티고 있다 이겁니다. 그걸 누가 감히 건드리겠어요? 그걸 누가 감히 침범하겠어요? 침범했다가는 안 돼는 거예요. 산과 산이 부딪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我人을 제거할 것 같으면 수미산이 무너진다. 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육조스님 같은 이들은요. 환하게 인간의 마음의 세계를 아주 너무나도 미세하고 그리고 밝게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깨달은 분들이 우리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들의 아집. 내세우는 아집을 보니 수미산처럼 높거든요. 수미산처럼 그렇게 높게 느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인아하면 수미가 무너진다.
去邪心(거사심)하면→ 삿된 마음을 제거할 것 같으면,
海水渴(해수갈)하고→ 해수가 말라 버린다. 바닷물이 말라 버린다. 要(요)는 삿된 마음에서부터 해수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인. 아는 해수요. 여러 가지 표현들을 했는데, “삿된 마음”이것에서 온갖 어리석음. 또 탐심. 진심 내지 108번뇌. 8만4천 번뇌가 전부 삿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煩惱(번뇌)가 無(무)하면 波浪(파랑)이 滅(멸)하고→ 번뇌가 없어질 것 같으면 물결이 소멸하고,
毒害亡(독해망)하면 魚龍絶(어룡절)이니→ 독해가 없어질 것 같으면 어룡이 절한다. 고기와 용이 거기서 없어진다. 바다 속에 노는 여러 가지 짐승들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번뇌의 모습들을, 이렇게 독해. 남에게 해로움을 주는 요소들을 어룡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自心地上(자심지상)에→ 자기의 마음 땅위에,
覺性如來(각성여래)가→ 깨달음의 성품여래가 우리들 마음 땅위에, 放大光明(방대광명)하야→ 자기들 心地上에. 우리들 마음 땅위에 각성여래가 있어요. 깨달음의 성품. 그냥 성품이라고도 할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깨달을 수 있는 요소로서의 우리 마음을 각성! 깨달음의 성품! 그거는 곧 여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부처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佛性人間(불성인간)” “불성인간” 그런 표현을 잘 쓰지요.
覺性如來(각성여래)가 放大光明(방대광명)이라→ 큰 광명을 놓아가지고서,
外照六門(외조육문)해서→ 밖으로 여섯 문을 淸淨(청정)하게 해서→ 밖으로 6문을 비춰 청정하게 환하게 해서,
能破六欲諸天(능파육욕제천)하고→ 능히 욕망의 모든 하늘들을 다 깨뜨린다.
육욕제천이라고 하는 것은 六欲天(육욕천)이라고 해서 他化自在天(타화자재천). 四王天(사왕천). 忉利天(도리천). 兜率天(도솔천). 化樂天(화락천). 夜摩天(야마천)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여섯 개의 하늘을 이렇게 표현해서 육욕천이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육조스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역시 그 하늘은 아무리 33천이라고 하더라도, 도리천이라 하더라도 아직까지 욕심이 남아 있다 하는 거기에 뜻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런 소승 교리에 해당되는 이런 육욕천이니, 25유니, 三界(삼계)니 하는 이런데 관심이 있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욕망으로 이루어진 모든 세계들을 뜻하는 겁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모든 세계들이 깨뜨려진다. 그러니까 우리들 마음에 긍정적인 요소가 覺性如來(각성여래)라면,
부정적인 요소는 아까 이야기한 어리석음. 貪心(탐심). 嗔心(진심). 毒害(독해). 煩惱(번뇌). 塵勞(진로). 人我(인아). 虛妄(허망) 이런 것들이 부정적인 요소지요.
그래 兩面(양면)이 우리 마음속에 이미 갖춰져 있어요. 그 양면이... 그런데 각성여래 쪽으로, 佛性(불성)인한, 불성의 입장으로 그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삶의 모습들. 그것이 뭡니까? 6문이지요. 안. 이. 비. 설. 신. 의를 통해서 우리는 활동을 하고, 그 활동을 우리는 삶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뭡니까?
속에 있는 불성인간이 外照六門(외조육문)하는 것이지요.→ 밖으로, 6문으로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해서 그것이 청정해가지고서 욕망의 모든 세계를, 육욕제천. 욕망으로 이뤄진 모든 세계를 능히 깨뜨려 버린다는 겁니다.
인간사에 가장 몹쓸 전쟁 같은 것. 이것이 전부 욕심으로부터 일어났으니까 그래 육조스님께서도 육욕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그 육욕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욕심의 세계는 드넓고 아주 크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自性內照(자성내조)하야→ 자성을 안으로 비춰서,
三毒卽除(삼독즉제)하면→ 삼독이 곧 제해질 것 같으면. 탐. 진. 치 이것이 번뇌의 기본이니까요.
탐진치 삼독이 곧 제해질 것 같으면, 地獄等罪(지옥등죄)가→ 지옥이니 하는 뭐 그런 그 좋지 않은 축생이니 하는. 천수경에 六向(육향)으로 본다면 刀山(도산). 火湯(화탕).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 불로 지지는 듯한 그런 뜨거움. 이런 인간의 그 고통들. 이런 것들이 제거된다.
그런 죄가 一時消滅(일시소멸)이라→ 그런 세계가 일시에 소멸하고, 內外明徹(내외명철)해서→ 안과 밖이. 몸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不異西方(불이서방)이라→ 아미타경에서 서방정토를 아주 휘황찬란하게 그려 놨는데, 그 즐겁고 휘황찬란한 서방정토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우리 마음의 부정적인 요소 입장은 앞에서 설명하고, 그것을 긍정적인 각성여래의 입장으로서,
그 覺性如來(각성여래)가 放大光明(방대광명)해서 外照六門(외조육문) 해서 淸淨(청정)할 것 같으며는, 그것이 전부 우리 중생의 세계를 다 정화해가지고 그대로 극락의 삶을 누린다. 不異西方이다. 서방과 다르지 않다.
若作此修(약작차수)하면→ 만약 이러한 수행을 지을 것 같으면 如何到彼(여하도피)리요.→ 뭐 하려고 저 10만 8천억 국토를 지나간다고 하는 그 먼 곳에 있는데 이르러 갈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 때문에 거기에 이르리요? 거기에 “이를 필요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觀(관)! 이러한 觀點(관점)이 마음에 확연히 이해되고, 거기에 대한 어떤 확신이 딱 들어서면 실천하는 건 저절로 따르게 되어 있고, 또 이러한 것을 여기서는 수행이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大衆(대중)이 聞說(문설)하고→ 대중이 말하는 것을 듣고,
了然見性(요연견성)해서→ 환하게 성품을 보았다. 性品(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를 했고, 또 보통 우리가 말하는 見性成佛(견성성불) 하는 그런 차원에 이른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悉皆禮拜(실개예배)하고→ 모두들 일어나서 “아~! 고맙다.”고 감사해서 예배를 드리고,
俱歎善哉(구탄선재)하야→ 야~! 신기하다. 신기하다고 모두들 탄복을 했지요. 그리고 唱言(창언)하대
普願法界衆生(보원법계중생)이 聞者一時悟解(문자일시오해)하야지이다→ 널리 다른 사람들도, 이 법문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이해하고 깨닫고 좀 그렇게 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못 깨닫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텐데 하는 그런 마음을 모두들 일으켰다. 그런 말을 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오래 병을 앓다가 어떤 의사를 만나서 아주 간단하게 오래 동안 앓던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 그랬을 때, 한 사람의 예가 거의 같은 말을 해요. 같은 말을 하는데, 몰라서 못 나은 사람이 참 많을 거다. 몰라서 못 나은 사람이...
그래 여기서 알았더라면. 많은 사람이 치료를 받아서 이 병은 잘 나을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말을 한결 같이 합니다. 거의 비슷한 말 이예요.
여기에도 정말 시원한, 정말 어떻게 보면 아주 혁명적인 소리지요? 그 당시 염불종의 가르침에다 대비해 보면 이것은 정말 파격적인 소리이고, 아주 혁명적인 말씀인데, 그러나 너무 통쾌하고, 또 어떤 의미에선 상당이 충격적이고, 그러니 신심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것이 깨달음 이예요. 요연견성이지요. “아! 우리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이구나! 정말 마음속에 이러한 것만. 제대로 긍정적인 이러한 面(면)만 제대로 살려낸다면 그대로 극락인 것을, 이런 좋은 법문이 있단 말인가?” 하고,
보원법계중생들이 문자일시오해하여지이다.→ 널리 원 하노니 법계 모든 중생들이, 이 법문을 듣는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모두 깨닫고 이해하기를 원한다. 하는 그런 말을 모두들 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와서 듣지, 왜 못 왔는가? 이런 선지식! 몰라서 못 와서 못 들었을 것이다. 와서 들었더라면 전부 우리들처럼 마음이 이렇게 환해졌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모두들 표현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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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