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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無所化分 第二十五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汝等은 勿謂如來作是念하대 我當度衆生
이라 하라. 須菩提여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實無有衆生如
來度者니 若有衆生을 如來度者면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니
라. 須菩提여 如來說有我者는 卽非有我어늘 而凡夫之人이 以
爲有我니 須菩提여 凡夫者는 如來說卽非凡夫일새 是名凡夫
니라
반갑습니다. 6월 20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제25분 화무소화분부터 할 차례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을 통해서 사람들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을 相病이라 보시고 그 상병을 잘 다스림으로 해서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그런 무한한 복과 무한한 덕과 또 무한한 지혜와 온갖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삶, 그 최상의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이렇게 보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한 성인의 개인적인 관찰이 아니라 사실은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인생과 이 세상 모든 현상들을 환하게 꿰뚫어 볼 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금강경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는 단순한 한 권의 짧은 경전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의 상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또 상병을 치유하고 나서 비로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위해서 불교의 많은 경전 가운데 600권이나 되는, 소위 600부 반야부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600권이나 되는 그런 방대한 경전을 설하신 것입니다.
또 전통적으로 8만대장경을 교판(敎判) -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이렇게 하는데, 그 교리를 낱낱이 분석해서 심층과 순서와 차례를 정해서 이야기하는 입장에서는 49년 설법을 말씀하시거든요. 옛날부터.
그래서 금강경 서두에도 말씀드렸읍니다만은
아함12, 방등8 -아함경을 12년, 방등부 경전을 8년,
21재담반야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하고
종담법화우8년, 마지막에 또 법화경을 8년간 설했다,
그리고 화엄경은 깨닫고 나서 3 7일 동안, 21일 동안 깨달음의 경지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당신이 누리는 어떤 깨달음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것이 화엄경이다, 3 7일,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했다, 이렇게 교리를 분석해서 정리를 합니다.
그것을 근거해서 보더라도 반야부 경전은 21년간 설했다라고 할 수 있죠.
49년 설법 중에서 21년간이라는 긴 세월동안 설한 것으로 되어있고 실지로 우리가 남아있는 대장경에서 한 가지 부분 중에서 예를 들어서 화엄부, 법화부, 열반부, 상엄부 그 다음에 아함부, 등등 그렇게 하는데 그런 부 수 중에서 반야부라고 하는 것이 600권이나 된다고 하는 것은 참 놀랄 만한 그런 양이거든요.
그게 이제 많은 경전을 21년간 설하신 것으로 되어있고, 양은 600권이나 된다. 그러면 금강경은 그 가운데 577권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많은 600권이나 되는 가르침이 결국 인간의 相病이 가장 무섭고 또 그 상병 때문에 인간이 본래로 지니고 있는 것,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무한한 행복과 덕성과 지혜를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점만 제대로 이해하고 난다면 본래로 지니고 있는 무한한 행복과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하는
그런 시각에서 21년간 600권이나 되는 그런 방대한 경전을 설하시게 되었다, 이렇게 보는거예요.
지금 우리는 그 600권 중에 한 권인 금강경을 가지고 공부합니다만은 금강경 내용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600권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되고 우리가 늘 잘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의 이치도 물론 그 가운데 다 무르녹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금강경을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행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찰이 왜 없는가?
그것은 금강경 입장에서 보면 相 때문이다.
그럼 相이라는 것은 고정불변한 결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相이 없는데 중생들이 착각해서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 된다.
그래서 금강경은 無相으로 으뜸을 삼는다.
상이 없다는 사실을, 어떤 고정불변한 상이 없다는 사실을 그건 이제 無我라고, 어떤 실체가 없다, 주된 실체가 없다라고 그런 표현으로도 많이 되어있죠.
그렇게 이해를 하고 말하자면 상이 없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는 것,
상이 없는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과 복과 지혜를 누리고 살 수 있다하는 그런 종지(宗指),
금강경의 그런 종지를 늘 놓치지 말고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해야 되는 거죠.
금강경 제목이 그렇고 법회인유분부터 32분 전체가 그렇고, 또 구절구절이 다 그 종지를 無相爲宗이라는 그 종지를 놓치지 않고 이해를 해야만 제대로 금강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에게서 그 相病이라는게 그만치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도 우리가 이런 기회에 눈 여겨 두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 마음이 가는데 까지 相 문제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어야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그 化無所化分, 교화하되 교화한 바가 없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들을 교화한 이 사실은 인류사에 있어서 정말 전무후무한 위대한 업적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화한 바가 없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물위(勿謂), 이렇게 여기지 말라, 여래가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했다라고 그렇게 여래가 생각하리라고 여기지 말라,
물위- 여기지 말라, 여래는 그런 사람 아니다, 물론 여래가 제도를 많이 했지, 제도를 많이 했지만 제도 했다고 해서 제도했다는 먼지만한 생각도 가지고 있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먼지만한 흔적도 없고, 생각도 없고, 했다는 상이나 어떤 자랑이나 뭐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얼핏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인류에 그렇게 큰 업적을 남기시고 그랬는데 그런 생각을 좀 한들 뭐 잘못될 게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았는데 생각이 전혀 없기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수보리야, 막작시념(莫作是念), 수보리야 그런 생각 전혀 하지 말라,
도대체 너희들은 나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소치다 하는 것입니다.
하이고 실무유중생여래도자(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니라,
왜 내가 그런 문제를 너희들에게 당부하는가 하면, 그 까닭이 무언가하면 실무유중생여래도자라, 실로 물론 내가 제도했어, 그렇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어떤 중생이 있어 여래가 그 중생을 제도한 사실은 없다. 뭐 천지 부정합니다. 없다 라고 그렇게 합니다.
실은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한 바가 없느니라.
제도한 것이 없느니라. 실무유중생여래도자니라. 제도한 것이 있는데 왜 자꾸 없다고 하는가?
이것이 설사 빈말이라고 하더라도요 이걸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남기신 위대한 업적을 설사 이 말이 빈말이라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 우리는 뭐 조그마한 일을 하고도 그것에 대해서 사실은 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부터라도 그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중생들은 그 재미로 살고요,
상 조금씩 내고 자랑 조금씩 하는 장난삼아 하는 자랑이지만 조금씩 자랑하는 그 재미로 또 사는게 중생이거든요.
그런데 약간 자랑하는 재미 정도로 하는 상내는 거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고 좋죠. 서로가 이해하니까,
그런데 그것이 서로의 어떤 감정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하면 그때는 곤란하죠. 그때는 곤란합니다.
그래서 상병이 무섭다는 것이고 그래서 설사 빈말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자꾸 의식적으로 입으로 익히고 귀로 익히고 손으로 써서 익히고 다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줘서 들려주고요 가족들에게 들려주고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자꾸 이런 문제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정말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전혀 거기에 대한 수하한 생각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못나게도 이 조그마한, 알량한 자기 공덕을 가지고 알아주기를 바라고 못알아주면 섭섭해하고 알아달라고 해쌓고 서로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느냐? 우리 중생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다.
상 그거 실지로 찾아본들 어디 있느냐 이거여.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런 문제를 자꾸 반복을 해서 훈련을 쌓으면 아마 어느 순간 無相의 이치를 확연히 깨닫고 또 정말 어느 순간엔가 우리의 생활화 되지 않을까?
상을 내지 않는 삶이 생활화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과 기대를 또 해봅니다.
약유중생(若有衆生)을 여래도자(如來度者)라-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그대를 제도했다고 한다면
여래(如來)가 즉유아인중생수자(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그러면 어떻게 되겠느냐?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거기에는 아상도 있고 인상도 있고 중생상도 있고 수자상도 있는 게 돼.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는데 그건 훌륭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제도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중생을 제도했다는 그 일만이 존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온갖 구질구질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 비법상, 뭐 잘 났네 못 났네 하는 일체 상이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거여.
부처님이 중생 제도했다는 생각 한 번 일으키는데 있어서 중생을 제도했다는 작은 생각 하나 일으키는데 그만 저절로 팔만사천상이 따라오게 되고 그건 이제 부처는 부처로서 제로죠. 부처답지가 이미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이예요.
만약 중생이 있어서 여래가 제도했다고 한다면 여래가 곧 아인중생수자가 있음이 된다. 이쯤 해놓고, 아인중생수자가 있음이 된다 라고 해서 누구에게 있든지간에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가 아(我)가 있다, 인(人)이 있다, 중생(衆生)이 있다, 수자(壽者)가 있다 하는 있음은 즉비유아(卽非有我)라-
곧 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이 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자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 참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돼요.
내가 이야기를 하자니깐 편의상 아상이 있고, 인상이 있고, 중생상이 있고, 수자상이 있다,
또 여래가 중생을 제도했다고 하는 그 훌륭한 일에 대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거기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저절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따라오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깐 이거 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완전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또 할 수가 있어요.
실체가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상을 내느냐 안내느냐에 따라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무수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아니다. 즉비유아, 내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범부지인(凡夫之人)이 범부들이 이위유아(以爲有我)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있음으로 여기는 거여.
이위유아, 유아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있음으로 여긴다. 이위.
자꾸 사람들이 특히 범부들이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위라는 것은 있어서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 그렇게 여기는 것을 이위라고 해요,
이위유아, 유아라고 여긴다.
我라는 것은 아인중생수자를 생략한 거죠. 그 앞에도 전부 그렇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있음으로 여긴다.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범부들이 그렇게 여기기 때문에 내가 그 병을, 사실은 그게 있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참 부처님도 이 이상 더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많은 설명이 생략이 되었고요, 많은 설명이 생략되어서 이론으로라도 이해시키려면 이것 참 말이 많아야 됩니다.
말이 많아야 되는데 그걸 뭐 어찌 다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쯤 이야기했으면 저 앞에서 쭉 이야기해오던 것들과 연관시켜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겠죠.
여기는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했다는데 대한 無相,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無相,
그 다음에는 범부라는 낱말을 떠올렸어요 부처님이 문득.
처음 나왔죠, 여기서는, 범부라는 말을 떠올렸는데 범부라는 말을 하니깐 또 중생들이 그만 “아, 그렇지, 난 뭐 아인중생수자상은 없다 하더라도 모르겠어 난 범부야” 또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다구요. 그러니까 그 자취마저, 그 없는 흔적마저, 없는 그림자마저 쓸어버리려고
수보리(須菩提)야, 범부자(凡夫者)는 여래설즉비범부(如來說卽非凡夫)일새 시명범부(是名凡夫)니라.
수보리야 범부, 범부 하는 것은 여래가 말하기를 곧 범부가 아니야, 우리가 편의상 이야기하는게 이름이 범부니라.
금강경 공부 이쯤 하셨으니까 이 세상에 우리가 어떤 명칭을 가지고 사용하는 모든 것을 뭐 장난삼아라도 이런 논리에 맞추어가지고 이야기해 버릇하는 것, 이것이 공부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도 되고, 괜찮을 것 같애요.
제가 그 전에 어릴 때 경봉 스님 밑에서, 선방에서 두 철을 났는데 그 때 경봉스님께서 육십이 되셨는가 하여튼 육십 이쪽저쪽 쯤 되었을 거예요. 큰스님께서 늘 금강경의 원리를 잘 말씀하셨어요. 워낙 이 대목 이야기를 잘 하셔가지고 하루는 법상에 올라가tu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스님 계십니까? 라고 자기 방 앞에 와서 그전에는 그렇게 하더니, 내가 자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런 이야기를 여기저기, 금강경의 이야기를 자꾸 했더니 어떤 신도가 와가지고 당신 방 앞에 와가지고, 스님 계십니까? 하질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이러더래요.
그래서 경봉스님이 하도 기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래서 껄껄 웃으면서 문을 열어보니까 당신에게 자주 찾아오는 신도가 와서 자기에게 인사를 그렇게 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가 직접 법상 밑에서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참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죠. 그러면서 뭔가 즐겁게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훈련을 쌓는 그런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凡夫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라는 거죠.
범부, 범부 하지만 범부라고 고정된 불변하는 실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편의상 범부라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수보리야 여래가 말하길 범부는 범부가 아닐새 이름이 범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범부무상(凡夫無相)까지 이야길 했어요.
화무소화분 안에는 제도 무상, (制度 無相)
아상, 인상, 중생상 무상, (我相 人相 衆生相 無相)
또 범부 무상. (凡夫 無相)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6분 法身非相分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佛아 須菩提
言하사대 如是如是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佛
言하사대 須菩提여 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인댄 轉輪聖王
도 卽是如來로다. 須菩提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我解佛所
說義컨댄 佛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니라
그 다음 26분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이라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이런 말이예요.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여기서 법신하면 부처님께는 모두 세 가지 몸이 있다,
그런 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시는 말씀이죠.
뭔고하니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그러죠.
법신은 진리의 몸, 또는 마음의 몸-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고,
보신은 공덕의 몸, 과보의 몸, 어떤 영향력-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화신은 중생 제도를 위해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사람과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런 모습을 화신이라 하죠.
그래서 일체제불이 개유삼신이라 그런 말하고 또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같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들도 다 세가지 몸이 있어요.
우리 마음은 정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이나 나나 또 여러분들이나 그 누구도 똑 같이 위대한 존재로서 있는 그 마음을 법신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다음 우리가 얼마나 공덕을 지었느냐, 수행을 했느냐, 선행을 많이 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과거 생에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지은 어떤 힘에 의해서 그 영향력을 보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렇죠 사람들이 좋은 영향도 미치고 안좋은 영향도 미치고, 또 영향을 미쳐도 크게도 미치고 작게도 미치고,
예를 들어서 30촉 짜리 전등이라고 한다면 방 하나 정도 비칠 수 있죠.
그러나 200촉이나 300촉 쯤 되면 마당에 하나만 달아나도 온 마당이 환하죠.
그러나 동구 밖에 좀 넓은데 환하게 비치려면 예를 들어 1킬로와트쯤 되는 전구를 달아야 아마 환하게 널리 비출 것이고,
저기 2키로 3키로 서치라이트 같은 것은 바닷가에 비치는 서치라이트 그런 것은 아마 굉장할 거예요.
그와 같이 같은 전기의 성질은 법신이라면 그 영향력은 다르죠.
영향력은 와트 양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비치는게. 뭐 1촉 짜리도 있고, 3촉 짜리도 있고 그래요, 우리 법당에 켜놓은 것은 1촉 짜리나 될까요? 1촉이나 2촉 정도, 그저 신발도 찾을 수 없는 겨우 빠알간 정도의 전구죠. 그런 식으로 보신은 공덕의 몸이고 과보의 몸이고 또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를 들어서 한 보살님이 계신다면 집에서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또 아내로서, 또는 할머니로서 자기의 어떤 상황에 따라서 처한 입장에 따라서 그 사람의 모습이 있죠. 누구의 딸 일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또 무슨 어디에서 일하면 직원일 수도 있고, 그 정도의 어떤 그 위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 이게 화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걸 달로 비유를 하면 그것도 이해하기 쉬운 하나의 방법인데,
하늘에 떠 있는 그 원래의 달은 법신이라면, 그 마음의 달에 비유를 할 수 있죠,
그 다음에 초생달이냐, 보름달이냐 에 따라서 달빛이 다르죠. 달빛. 초생달은 아주 잘 안보입니다. 사람이 저만치 오는지 안오는지 겨우 그저 휘무끄fp해서 아무리 구름이 끼지 않았다 해도 빛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름달 환하게 보름달 같으면요 글도 읽을 수 있어요. 달빛에 글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목판으로 된 경전은요 달빛으로 경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해인사에서 저녁에 절을 지키는 소임을 볼 때는 밤을 새우거든요.
야경(夜警), 밤 새우는 야경을 학인들이 맡아서 했는데 그때는 밤새도록 도량을 거닐어야 하니까 그래서 책을 들고 환한 달빛에 목판본으로 된 큰 글자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만치 밝다구요.
그게 이제 보신입니다. 과보의 몸이고 영향력이죠. 그러나 하늘의 달은 똑 같습니다. 그믐달 구름에 가려도 하늘에 있는 달은 변함이 없고 초승달도 변함이 없고 보름달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제 초승달 중간달 그믐달 예를 들어서 보름달은 밝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化身의 입장이라면 흔히 화신을 이야기할 때 천강유수(千江流水) 천강월(千江月)이라 표현을 하듯이 물에 비친 달이죠.
컵에 물을 떠놓으면 컵에도 달이 비치고 연못에도 달이 비치고, 흐르는 여울물에도 달이 비치고 바다에도 달이 비치고 그렇게 그림자로서 나타난 달을 화신에 비유해서 우리가 이해를 합니다.
여기서 법신비상(法身非相)이라는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그랬어요.
그러면 뭐야 모든 부처님의 本身, 모든 사람의 본신, 그것을 생각할 수 있죠. 그것은 역시 형상이 아니다, 이런 표현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佛아
어떻게 생각하는가? 32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는가? 관찰 할 수 있는가? 저 앞에서는 견여래불아, 해서 볼 견자를 써서 견여래불아, 했습니다.
그러면 32상으로 견여래불아라는 말부터 다시 해석을 하면
32상 그대로 여래라고 볼 수 있느냐고 하니까 그때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2상을 가지고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면 여기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32상을 통해서 32상 저 너머에 있는 여래를 관찰할 수 있는가?
그 이면에 있는 32상 그 이면에 있는 부처님의 어떤 정신세계, 부처님의 마음세계를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가?
이런 뜻이죠. 그건 얼른 들으면 그럴 듯 해요. 그렇죠.
우리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을 처음 만났든 자주 만났든 간에 그 얼굴 그 모습이 전체라고 알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래서 수보리도 그렇게 물었을 때는 아닙니다. 눈 앞에 보이는 32상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죠. 이렇게 했어요.
그건 우리도 할 수 있어요. 사람 한번 보고 어떻게 압니까? 모르죠.
그런데 형상을 이렇게 보고 그래도 그 형상을 보고 미루어서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과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도 있듯이 짐작할 수는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 부처님의 모습을 통해서 그 이면의 부처님의 정신세계도 미루어서 이해할 수 있느냐 이렇게 이야길 했어요. 그러니까
수보리가 대뜸 말하길 예, 그렇습니다. 32상으로서 여래를 미루어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관여래(觀如來)입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불언(佛言)하사대 그래 그렇다면
수보리야 약이삼십이상(若以三十以相)으로, 잘 생긴 서른 두가지 모습으로 미루어서 여래(如來)를 짐작할 수 있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즉시여래(卽是如來)로다.
전륜성왕이라하면 우리가 중국 정도로 이해를 한다면 天子정도 돼죠. 小國을 많은 왕들을 다 지배하는 천자 정도,
또 인도 사회 같으면 인도의 16국 시대가 되었던지, 4대국 시대가 되었던지 간에, 그 전체 나라들을 통괄하는 왕을 전륜성왕이라 했습니다.
중국으로 치면 천자가 되겠구요.
그 사람은 역시 복력이 뛰어나서 부처님의 복력과 유루복은 같아서 32상을 갖추었다라고 전통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럼 그 사람도 그 훌륭한 모습 가지고서 여래라고 볼 수 있겠네? 이런 이야기예요.
그건 아니죠, 또. 아무리 훌륭한 형상을 똑같이 갖추었다고 해도 여래는 여래고, 천자는 천자고, 전륜성왕은 전륜성왕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 형상을 미루어서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짐작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엄연히 다른거죠. 그러니까 여기에 그만 수보리가 깜박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수보리(須菩提)가 백불언(白佛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생각해보니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컨대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불응이삼십이상(不應以三十二相)으로 관여래(觀如來)니이다.
삼십이상으로 미루어서 여래를 관찰할 수 없습니다. 그랬어요. 맞는 말이죠. 그러니까 見 자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그래도 32상을 근거로 해서 여래를 미루어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법신은 상을 떠나있는 것이다. 법신 비상이다는 거죠.
여기서 여래라는 것은 여래의 참모습, 여래의 법신의 모습,
달로 치면 하늘에 떠있는 달, 그러니까 물에 비친 달 가지고 하늘의 달을 이해할 수 있느냐?
우리는 하늘의 달을 이미 알고 나서 이런 문답이 오고 가니까 물에 비친 달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 달을 이해할 수 있느냐 어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이 나갈 수가 있겠죠.
그렇지만 물에 비친 달도 어쩌면 가짜일 수도 있고 그렇죠.
그래서 그것 가지고 하늘에 있는 달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틀린 말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응이삼십이상으로 관여래니이다. 32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시(爾時)에 세존(世尊)이 이설게언(而說偈言)하사대 세존께서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약이색견아 (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 (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 (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라. (不能見如來)
유명한 제3사구게죠. 자 또 사구게가 나왔으니까
제1사구게는 제5분에
범소유상 (凡所有相)
개시허망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 (卽見如來)라
그 다음에 제 2 사구게는 10분에 있었죠.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무소주 (應無所住)하야
이생기심 (而生其心)이니라.
육조 혜능 스님이 크게 깨달았던 바로 그 구절입니다.
불응주색생심하며 불으주성향미촉법생심이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니라.
이게 제2사구게, 10분에 있었던 제2사구게.
그 다음 오늘 여기에 26분에 있는 제3사구게입니다.
금강경은 그야말로 우리 불자들의 교과서이기 때문에 비록 한문으로 된 교재라고 하더라도 이건 뭐 환하게 알고 있어야 돼요.
환하게 알고 있어야되고 금강경 사구게가 몇 개냐? 그러면 네 개의 사구게가 있다, 제 1사구게, 제2사구게, 제3사구게, 제4사구게 , 이렇게 알아야 되고 또 그 뜻도 이해하고 설명도 해줄 수 있고 그래야 됩니다.
평생 이 금강경 가지고 공부하고, 이 금강경 가지고 강의를 하고, 불교를 소개해도 아주 훌륭한 그런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훌륭한 교재가 되죠.
정말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자꾸 이 대중 불교 시대에는 아무나 불교 공부해서 자기가 공부했으면 다 포교사, 법사 노릇을 해야 되는 그런 것을 가지고 대중 불교, 대승 불교 그래요.
그러니까 꼭 이런 정법을 공부했다면 자기 인연 따라서 아주 작게나마 한 사람이라도 앉혀놓고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이해시키려하는 노력이 꼭 뒤따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전법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열을 좀 올리는데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서 말하면 그런 뜻이죠,
만약 이 육신의 형상으로서 나를 알거나 나를 보거나 아니면 내 설법하는 소리, 음성, 얼마나 참 감동적이고 음성도 좋고 법문 내용도 좋고 얼마나 당신의 마음이 푸욱 담겨져 나오는 말씀이였겠습니까?
부처님 법문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과학이 아주 발달하게 되면 지금도 그 소리가 이 우주 공간에 있다는데 그걸 녹음할 수도 있다고 그래요.
아직까지는 가설이기는 합니다만 3000년전에 부처님 설법하신 그 음성을 지금도 녹음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이 개발 될 거라는 그런 이야기도 심심치않게 나옵니다.
어쨌든 그 음성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본래 그 좋은 출신에, 훌륭한 집안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고, 왕족으로서, 왕자로서 거기다가 6년이라는 피나는 고행을 했고,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큰 깨달음을 이루셨고, 그 넘치는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사람들을 교화하겠다고 하는 큰 원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그 음성 한마디 한마디에 얼마나 부처님의 생애가 담겨있고 부처님의 마음이 무르녹아 있겠습니까?
그냥이 아니예요. 그 한마디 한마디에 부처님의 온 생애가 다 담겨 있거든요.
전단나무향을 조각해서 불상을 조각했는데 불상만 전단나무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빚어가지고 던져버린 조각들이 다 전단향기가 나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위대함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훌륭한 음성 부처님의 인생이 편편에 묻어있는 그런 음성을 가지고도 나를 구한다, 나라고 안다, 나를 본다라고 한다면 시인행사도라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 어떤 철학, 어떤 성인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겠어요?
흔히 불교에 팔만대장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경전 책 한권 읽어보지 아니하고 무턱대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매도해 버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참 불교 경전이 많다는 것은 알텐데 팔만대장경이 있으니까요,
그 몇 권이라도 읽어보고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무턱대고 자기 깜냥대로 미루어 우상숭배, 이렇게만 하니까 참 안타깝죠.
우리가 법당에 가서 불상 앞에 절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 절이 아니거든요.
그런 우상숭배가 아니거든요.
세상에 그런 멍청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해석하는 식의 그런 예배가 어딨어요? 없어요.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모르면 우상숭배라 그렇게 피상적으로 보는데, 여기 보십시오,
살아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라고 하든지 그 뛰어난 음성, 음성 한마디 한마디에 부처님의 인생이 그 고귀한 인생이 무르녹아 있는 그 음성 소리 듣고도 부처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고 미신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시인행사도라,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부처님 보고도 부처님이라고 하면 그건 사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그 뛰어난 누구도 할 수 없는 설법을 듣고도 거기에서도 부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 역시 相이거든요. 그 너머, 그걸 걷어내야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우리가 집착하지 안해야 거기에 미혹되지 아니해야 진짜 부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만 보는게 아니라 진짜 나 자신을 보는 거죠.
우리들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을 보고 지극한 행복을 보고 무량 대복을 볼 수 있는 것이고, 한량없는 신통을 거기서 볼 수가 있죠.
온갖 것, 사람이 바라는 최상의 수승함과 가장 위대함을 거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우리가 빠지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미혹되지 말라.
거기에 빠지고 집착하고 미혹된다면 불능견여래라, 여래를 보지 못 할 것이고, 우리들 자신도 못보고,
내가 나를 못보는 것이고,
내가 나를 못보는데 어찌 남을 보겠습니까?
나도 못보고 남도 못보는데 어찌 부처님을 보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말짱 헛거죠 뭐.
그렇게 아는 것이 옳습니다.
아~ 대단한 가르침이죠~ 글쎄요 뭐 저 혼자만 이렇게 좋게 여기는 것은 아닐테죠?
이런 가르침을 좋은 시간에 여러 법우님들과 함께 한다고 하는 것, 이것도 또 부처님과 인연 맺은 값진 인연이고 정말 큰 행복이고 재산이라고 생각해도 아주 큰 재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오늘 금강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법문녹취:불퇴지)
염화실과의 큰인연..깊이깊이 고맙습니다..._()()()-
감사합니다._()()()_
삿된 곳 일수록 더 잘 빠지는 저희에게 큰 가르침 고맙습니다()()()
부처님과 인연 맺은 값진 인연...정말 큰 행복이고 재산이라는것에 늘, 감사합니다.._()_
가르침 감사합니다. _()()()_
무상을 위종으로 삼겠습니다.-덕운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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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가을 들녁을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상없이 일체상 없이 현상은 현상대로 수상행식할때 열반이고 평화다...
부처님의 큰 가르침 놀라울 뿐입니다...큰스님 법문 감사드립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制度 無相,我人衆生壽者無相,凡夫 無相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오늘도 귀의하옵고 비원하옵니다._()()()_
*我人衆生壽者 凡夫之人 以爲有我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邪道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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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身報身化身 無相 相病을 치료해야 최상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무량대복을 타고 났습니다 고맙습니다.()()()
무량대복을 타고 났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相病이 가장 무섭고 또 그 상병 때문에 인간이 본래로 지니고 있는 것,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무한한 행복과 덕성과 지혜를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점만 제대로 이해하고 난다면 본래로 지니고 있는 무한한 행복과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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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제26 법신비상분 觀如來佛아 오타입니다 佛이 아니고 不 입니다
감사합니다_()_()_())_
제3사구게를 공부하실 기회를 주신 큰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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