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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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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26일 발생한 인도네시아 해안 지진은 그 규모가
리히터 규모 9.0에 이르고 이로 인한 해일 피해는 동남아 11개
국에서 17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한국인 피해도 2005년
1월 9일 현재 사망 12명, 실종 8명에 이르고 있다. 동남아에서
발생한 이번 재앙은 그 피해가 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이번에 사망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며, 앞으로 닥칠
여파는 전염병의 확산, 기후의 변화는 물론 세계의 정세까지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며 우리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이번의 자연재앙을 계기로 세계 각국이 처음으로 하
나가 되어 유엔을 중심으로 서로 경쟁적으로 피해복구를 지원하
기로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렇게 자연재앙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류가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한편 이라크에서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인간
들이 자초하였으며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 이라크에서의 파괴는
동남아에서 발생한 자연재앙보다도 더 커다란 정신적, 문화적
재앙이다. 이라크가 바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문명
의 발생지이며 인류 最古의 문화유적지이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에 대해
고대 그리스인이 붙인 지역명으로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를
뜻한다.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 그리고
강을 따라 있는 광범위한 지역, 오늘날의 이라크와 시리아, 터
어키 일부를 포함한다. 바그다드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신이
부여했다'라는 의미이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곳에 Al-Qurna라는 메소포
타미의 옛 도시가 있다. 이곳이 바로 전설과 성서가 전하는 에덴
의 동산이 있다. 아담은 이 성스러운 지상의 낙원, 에덴의 동산
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담의 나무를 길렀다.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기도하던 때는 BC 2000년이라고 옛 글은 전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
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이기에
통일성과 지속성을 보여준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
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 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
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오늘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인류 최고의 문명지 메소포타미아
의 역사를 둘러봄으로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살펴보고 우리의 앞
날을 그려보자.
사라진 메소포타미아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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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가르쳐주는 사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기술되어져야 한다. 사료란 과거를 알기 위한 흔적이다. 문헌사
료는 물론,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모든 문화유산이 귀중한
사료이며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사료들을 발굴, 해석
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여왔다. 또한 이러한 문화유산은
그 희귀함과 예술적 가치에 의하여 기호가들과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의 목표물이 되어왔으며 도굴꾼들의 목표물이 되어왔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유산이 이라크 전쟁중에 사라졌다.
제 2차 세계 당시 베르린에서 사라진 독일의 금괴, 월남의 패망
과 함께 사라진 사이공의 금괴들의 운명과 같이 사라져버렸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이 이처럼 이라크 전쟁과 함께 사라져버렸
다는 사실은 전쟁과 혼란과 우리 인간들의 본성의 또다른 한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2003년 4월 10일부터 사흘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이 약탈당한 것이다. 카크(Karkh)지역에
위치한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은 28개의 전시실이 있는 중동 최
대의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로서 최초의 달력이라
고 여겨지는 만년전의 돌결무늬가 있는 가죽과 5000년전의 수메
르인(Sumerian)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유물 등이 있었
다. 이곳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에서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 17만여점 중 상당수가 사라졌다.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이라크 지역 박물관 9곳에서 2000여점
의 유물이 사라졌다. 일부 유물은 시민들이 반환을 했거나 서방
언론사 직원들이 갖고 국경을 넘으려다 들켜 반환됐다. 전문가
들은 사라진 유물 대다수가 국제적 유물 암시장에서 거래돼 개
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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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전해오는 이라크의 뉴스는 우리에게 '바그다드'뿐만 아니
라 '모술'이라는 도시도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술이
야말로 우리에게 잊혀진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세계인에게 처
음 알게 하여준 곳이며 한때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모술은 이라크 북부, 티그리스
강 상류의 서쪽 연안 위치하며 이라크의 제 3의 도시이다.
3000여 년간의 영화를 자랑하던 메소포타미아문명지는 알렉산더
가 BC 331년에 바빌론을 정복한 후 이라크는 종교적으로나 다
른 어떤 측면에서도 아랍 지리학자들 이외의 어느 누구의 관심
도 끌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지인 이라크는 시리아-아랍사
막 건너편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지중해 동쪽 해안의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로 둘러싸인 팔레스타인만 기원 첫세
기부터 많은 사람들, 서양인들의 발길이 닿았다. 기독교의 모태
가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AD 363년 로마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이 지역을 원정갔다가 현지에서 사망하고 난 후로
는 이곳은 세계인으로 부터 완전히 망각되어버렸다.
이 변방 메소포타미아를 잊혀진 사람들의 망각 속에서 처음 발견
한 사람은 프랑스 남서부와 스페인 북부에 걸쳐 있던 옛 왕국
나바라의 유대교 목사 뱅자맹 드 튀델이었다. 그는 1160년경에
모술과 그 주변을 방문하여 형태도 가늠하기 어려운 폐허를 보았
다. 찬란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남긴 잔해였다. 그후 로
마인, 프랑스인, 덴마크인 여행자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
서 이곳이 한때 어떤 문명의 중심지였었다는 것은 인식하기 시작
하였으나 19세기에 이르도록 그 이상의 지식은 가질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진상이 현대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
들의 설형문자의 비밀이 1803년 독일의 라틴어 청년 교사에 의하
여 밝혀지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모술 즉 니네베의 폐허를 처음 발굴하여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BC 721-705)의 거주지였던 고대 두르샤르킨, 즉 코르
사바드의 성벽을 발견한 것은 1842년 프랑스 영사관의 발령을 받
고 모술에 도착한 폴-에밀 보타에 의해서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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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농경사회(BC 9000-BC 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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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가장 오래된 BC 9000년의 농촌유적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북방에 있는 산기슭(Karim Shahir in Zagros
foothills)에서 발견되었다. 인류가 씨를 뿌려 야생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개와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식
량을 채취하던 인간이 손을 써서 식량을 생산하는 문화, 즉 농업
을 시작 한 것이다.
BC 7000년의 주거지인 자르모(Jarmo)에서는 천연의 진흙 집들과
밀, 염소, 양, 돼지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들 북방의 농업인들의 이주는 BC 6000년에 이르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렀다. 티그리스강 상류, 모술에서 남방
40km에 위치한 하수나 문화(Hassuna culture)는 벌람하는 강의
홍수로부터 작물을 지키고 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관
개망을 구축하였으며 도기, 영구 주거 등을 도입하였다. 1000여
년 계속된 이들 문화는 페르시아만부터 지중해 연안까지의 교역
도 지배하였다.
수메르(Sumer) 이전 시대(BC 5000-BC 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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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생산의 진보에 따라 농사에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
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 이러한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새로운
일을 하게되었다. BC 5000년경 우바이드 사람들은 이렇게 최초
로 분업을 도입하였다. 진흙 벽돌로 도시를 건설하였고 최초의
작은 신전을 에리두에 세웠다.
BC 4000년경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로부터 유목민 셈족이 메소
포타미아 남부로 친입하여 우바이드 사람들과 혼합되었다. 銅
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금속시대의 시작이다.
수메르(Sumer) 시대(BC 3500-BC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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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BC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
동하여 강력한 왕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를 출현시키고, 인류 최
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발생시킨 것은 수메르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이미 靑銅器를 사용할 줄 알
았다. 청동은 구리에 8-12%의 錫을 섞어 만든 양질의 합금으로
청동시대는 이후 3000년 동안 계속됬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로
그림문자로부터 쐐기문자(설형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하였으며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
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
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
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
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청동기를 사용하는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
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
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수메르는 채색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
으며 최초로 맥주를 빚어 마셨다. 12 진법과 태음력을 사용하였
다. 인류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세계 최
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 우르남무라
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들은 도시국가 체계를 만들어 왕은 독재정치가 아닌 어느 정
도 민주주의적인 성격으로 통치하였고 국가가 중심이 되어 경제
문제를 주도해갔다. 도시국가들도 자립하였지만 위기시에는 군
사적으로 연합하였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이 후대의 제국
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
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
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되었다.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
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다. 지구라트라
신전은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
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
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
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노아의 홍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수전설을 담고 있으며 기
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바빌론과 앗
시리아인들은 길가메쉬 서사시를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
고 있다.
아카드(Akkad) 시대(BC 2350-BC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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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35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에 살던 아카드인(셈족)들
이 수메르와 주변국가를 정복하여 처음으로 통일왕국을 세웠다.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2100년경: 수메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셈족으로 몰아내고
Dung가 왕이 되어 다스림
*셈족:
구약성서 창세기에 셈의 자손이라고 전해지는 민족으로서 셈제
어(諸語)를 사용하는 제민족의 총칭이다. 셈어는 다음과 같이
대별된다.
1. 동(東)셈어파(메소포타미아):
아카드어(바빌로니아어, 아시리아어)
2. 북서(北西)셈어파(시리아, 팔레스티나):
아무르어, 우가리트어, 가나안어(페니키아어,
헤브라이어), 사마리아어
3. 남서(南西)셈어파(아라비아반도, 이디오피아):
아라비아어, 이디오피아어
고(古)바빌로니아(Babylonia) 시대(BC 2100-BC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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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인들이 BC 2100년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로
들어가 아무르 왕조의 바빌로니아 왕국를 세웠으며 수메르문화
의 색채가 농후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제 6대 함무라비 대왕
(Hammurabi, BC 1792-1750)은 바빌로니아 전토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며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
립하였다.
이 시대를 '아무르시대'라고도한다. 아무르인은 고대의 서(西)
셈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아모리인이라고도 한다. 아카드어로
아무루, 수메르어로는 마르투이다. 아무루는 서방을 뜻한다.
아모리인은 지중해 연안 가나안 주변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해
BC 3000년 무렵 시리아의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정착했었다.
古바빌로니아는 BC 1531년 카시트(Kassite)에 의해 멸망되었
다.
카시트(Kassites)와 히타이트(Hittites)의 시대(BC 1531-BC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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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너머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히타이트는 인도유럽
어족으로 BC 2000년 경 말, 전차,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현 터어
키인 아나톨리아를 장악하고 오리엔트 최강국가(BC 2000-BC 1190)
를 이룩하였다. 히타이트는 우선 시리아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였
다. 히타이트왕 무르실리슈 1세는 함무라비왕이 죽은 뒤 국력이
쇠퇴한 바빌론 제 1 왕조를 BC 1531년에 멸망시키고 약탈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왕국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카슈인이 바빌로니아에 카시트왕조(카슈왕조)를
세웠다. 카슈인은 이란 서부 자그로스산맥 지방을 원주지로하는
산악민족으로 BC 2000년 무렵부터 바빌로니아지방을 침입하였다.
카슈인은 히타이트와 같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계통이다.
카시트왕조는 왕이 신하에게 준 면세지 봉토로 국토가 분할되어
왕가의 권위가 약해진 지방분권적 봉건사회였다. BC 1169년 아시
리아에게 멸망되었다.
아시리아(Assyria) 시대(BC 1169-BC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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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원주민은 셈족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한
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
력을 가지게 되고, 언어 ·풍습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다.
그 중심이 된 아수르는 BC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되었는데,
수메르 문명의 북변(北邊)의 전진기지(前進基地)이기도 하였다.
수메르인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는 악조건에서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닌 셈계의 아시리아인이 형성되었다. 아시리아의 중
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바빌로니
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 ·보석 ·목재 ·석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고 점차 군사(軍事)국가로서 발전하였다.
BC 13세기에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고, BC 11세기 전에는 히타
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BC 8∼BC 7세기에 이르자 사르곤 2
세(재위 BC 722∼BC 705) 등의 용감한 왕들이 나와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까지를 정복하여 일찍이 없었던 세
계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
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강대하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
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
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이다. 또 니네베와 코르사
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築城)에 능하였
고, 예술면에서는 석조(石造)의 환조(丸彫)와 부조(浮彫)로 뛰
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猛獸) 사냥 등 잔인한 행위
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年代記)도 편찬하였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짓고 각종 사료(史料)
를 수집 ·정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신(新)바빌로니아 시대(BC 612-BC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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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12년 아시리아는 메디아에게 멸망되었으나, 칼데아의 나보
폴라사르(재위 BC 625∼BC 605)가 재차 바빌론을 수도로 칼데아
제국, 즉 신(新)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 시대(BC 538-BC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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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에서
비롯되었다. BC 815년경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
에는 파르스지방을 영유하였고,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
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을 일으켰
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
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
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도 허
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다리우스 1세(BC 521-BC 485)는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
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
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 2,400 km의 왕도를 건설하고, 역전제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
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
로로, 전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
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
년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
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
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
었다.
다리우스 1세 이후 페르시아는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
고 국세의 쇠미가 뚜렷이 드러났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
더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도처에서 페르시아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하더니 BC 331에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BC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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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31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
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
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
를 분할하였다.
카산드로스 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
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 등 세
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
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史)》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헬레니즘문화는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이다.
BC 331년 알렉산더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
(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
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메소포타미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거쳐 파르티아와 로마,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셀레우코스(Seleucos)왕조 시대(BC358-BC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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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왕조는 귀족 안티오코스가 세운 왕국이라 안티오코스
(혹은 안티고노스)왕조라고 한다. 셀레우코스1세(BC358-280)는
마케도니아의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바빌로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시리아제국의 셀레우코스왕조를 건설하였다. 메소
포타미아는 이때 셀레우코스왕조에 편입되었다. 그는 한때 에우
메네스에게 패하여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회복하여
영토를 이란과 마케도니아와 그리고 인도 북서부까지 다스리고
찬드라굽타와도 관계를 맺었다.
안티오코스1세(BC280-262)는 광대한 영토에 자기 이름의 도시를
많은 건설하여 지배의 기초를 만들었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에게 패하여 영토를 잃었다.
안티오코스2세(BC261-247)는 부왕이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안티오코스3세(BC247-187)는 알렉산더처럼 되려고, 그를 흉내
내어 그가 간 길을 따라 인도까지 침공하였다. 지중해로 진출하
려다가 동진 해오는 로마와 충돌하여 제1차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하였다. BC191년 로마에 대패하여 소아시아를 분할하여
주었다.
제1차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로
마와 싸운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전쟁에 패하여 이곳으로 도망
왔으나 로마가 신변을 요구하자 한니발은 자살하였다.
안티오코스4세(BC215-163)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현존하는
신)이라고도 자칭 하였다. 로마서 볼모로14년간 있다가 부왕의
죽음으로 즉위하여 헬레니즘문화의 제국을 건설하려고 유대교를
박해하다가 마카베오(마카비)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전쟁에 패
하여 하스몬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BC163년에 동
방원정에서 죽고 왕조는 쇠퇴하였다.
파르티아(Parthia)왕조 시대(BC 247-AD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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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왕조는 BC 247년 이란 북동부에 살던 이란계통 유목민
인 파르니족의 족장 아르사케스가 셀레우코스왕조로부터 탈출하
여 세운 왕국으로 건국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라 아르사케스
왕조라고도 했다. 그 뒤를 이은 동생 틸리다테스는 시리아의 셀
레우코스 2 세에게 패배하였으나 그 뒤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BC 171년 무렵 즉위한 미트리다테스 1 세의 치하에서 왕국은 광
대한 영토를 얻었다.
미트리다테스 1 세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지역의 박트리아왕국
과 셀레우코스왕조의 영토를 정복하고 바빌로니아에도 침입하였
다. BC 123년 무렵 즉위한 미트리다테스 2 세 시대에 아르메니
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팽창해온 로마제국과 충돌하였다. 왕은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었으나 그 뒤에도 양국간 싸움은 계속되었
다. 파르티아의 조직화된 경무장 기병은 로마의 중무장한 보병
에 대해 승리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아도 왕위계승분쟁과 북방민
족의 위협 등 여러 문제가 있었으므로 싸움은 장기화되었다. 파
르티아는 오랜 세월에 걸친 전투로 국력이 탕진되어 226년 파르
스지방에서 일어난 신세력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 세
에게 멸망하였다.
사산(Sassan)왕조의 페르시아 시대(AD226-AD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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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민족이 고대에 페르시아제국을 만들어 알렉산더에게 망하고
후에 파르티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고대 페르시아인 들이 다시
파르티아제국 위에 페르시아제국을 재건설한 국가가 사산왕조이
다. 사산은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사산(Sassanian)
손자이며 군주인 파파크의 아들 아르데시르 1세가 창시하였고,
이 나라는 신정(神政)국가이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260년 시리아에서 로마황제 P.L. 발레
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등 사산조의 기초를 굳혔다. 샤푸르
2세 때 발전기를 맞이하였고, 쿠스루 1세 때는 인도 굽타왕조와
국경을 맞대고 활발히 교역을 하였으며, 시리아·예멘을 점령하
여 사산조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동쪽으
로는 돌궐 등 유목민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서쪽으로는 시
리아·아르메니아 영유권을 둘러싸고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간
에 항쟁과 평화의 시대가 반복되었다. 그 항쟁은 종교전쟁의 성
격을 띠었는데,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사산조는 그
때까지 보호하였던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이미 로마제국과
연합하여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는 조로아스
터교로의 개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에 패배하자 신
앙의 자유를 승인하였다.
쿠바드 2세 이후에는 혼란기를 맞아 아랍인 이슬람교도의 침입
을 받았다. 예즈디기르드 3세가 642년 네하벤드싸움에서 패전함
으로써, 이란 전국토가 이슬람 교도에게 정복되어 갔다. 예즈디
기르드 3세는 호라산의 메르프로 망명하였지만, 651년 암살되었
다.
사산왕조는 국가 체제가 모범적으로 잘되어 후에 무굴제국과 회
교국에 계승되었다. 이란민족의 힘을 잘 발휘한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아라비아에게 망하였다. 이란인은 스스로는 아리야
(Ariya)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귀한-숭고한' 뜻으로 쓰인다.
평화의 조화를 연꽃으로 상징한다고 한다.
이슬람제국의 시대의 개막(AD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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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났는데,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단은 계속된 전쟁으로 쇠약해진 사산조 페르
시아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슬람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예언자 마호메트(570-632)는 교우들에게 성전 코란과 공동체 및
무슬림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의 모범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여러 부족들의 배교로 한때 붕
괴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칼리프)로 선발된
공동체의 지도자(이맘) 아부 바크르(Alb-Bakr 632-634)가 다시
통일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Umar 634-644)는 대정복을 시작하
여, 이슬람 세계를 아라비아반도의 동·서로 확대시켰다. 이 정
복을 수행한 세력은 아랍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 전사
단이다. 그 뒤 3대 칼리프 오트만(Othman 644-656)으로부터 4대
알리(Ali 656-661)로 넘어가자 공동체는 다시 내란 위기에 직면
했다. 이것은 알리와 옴미아드가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
었으며, 이에 깊이 관련된 파가 하와리지파였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격파이며, 공동체의
급속한 확산에 의한 세속화를 종교적 위기로 보아,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 두 파와 싸웠다.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해 암살되자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이 났으며,
이후 90년 간 공동체 지도권은 옴미아드가(옴미아드왕조)가 독점
했다. 이러한 기존 이슬람체제(훗날의 수니파)에 대하여, 공동체
지도권은 예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 속한다고 주
장하는 시아파 그룹과 옴미아드왕조 체제를 비非이슬람적이라 하
여 인정하지 않는 하와리지파는 함께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이라크의 대다수는 시아파이나 지난 70여년을 인구의 20%에 불
과한 수니파가 이라크를 통치했다. 소수인 수니파인 후세인은 이
라크를 공포와철권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란은 시아파다.
옴미아드 왕조 시대(66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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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옴미아드왕조 움직임에 대하여 옴미아드왕조는, 신앙은 행
위(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무르지아파의 설을 근거로 체제
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탄압을 가했다. 이 옴미아드 왕조
시대에도 이슬람의 정복은 계속되었으나 정복에 의해 즉시 이슬
람화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
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
유를 누렸다. 옴미아드 왕조 말기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서쪽으
로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북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옛
비잔틴제국령 및 에스파냐, 동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를 멸망
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더스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의 영역확대에도 불구하고 옴미아드 왕조 시대의
공동체는 평온하지 않았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과 아랍을 중시
하는 정책이 비非아랍무슬림 및 경건한 신도들의 불만과 반발을
낳았으며, 이것이 시아파·하와리지파 등의 운동과 결부되었다.
또한 아랍의 부족대립이 이것과 얽혀 반정부운동이 자연발생적
으로 일어났다. 750년 옴미아드 왕조는 붕괴되고 정권은 아바스
왕조로 넘어갔다. 옴미아드 왕조의 지도자들은 이슬람공동체를
확대하고, 그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유지, 발전시켰지만
공동체를 이슬람적인 성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무엇이 이
슬람적인가에 대한 기준도 세우지 못했다.
초기 옴미아드왕조시대에 이슬람제국의 중심은 시리아에 있었으
나, 아바스왕조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도는 이라크의 알쿠파·바
그다드에 설치되어 당(唐)나라의 장안(長安), 비잔틴제국의 콘
스탄티노플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아바스 왕조 시대(750∼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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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는 국가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 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
가통치의 기초를 구했다. 그리하여 쿠라이시족 출신의 칼리프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아래 단일국가로 지배하는 정치형
태를 실현했다. 그리고 교역의 발달과 함께 고대오리엔트·헬레
니즘·기독교 및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이슬람
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1세기 뒤 칼리프의 실권은 약해졌으며,
각지에 독립·반(半)독립 왕조들이 나타났다. 특히 10세기 무렵,
이집트에서는 시아파 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 왕조가 칼리프를
칭했으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시아파 내 카르마트파가 지배했
다. 에스파냐에서는 같은 수니파인 후後옴미아드 왕조가 칼리프
를 칭하면서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와 대립했다. 또한 10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시아파 부
와이 왕조의 아미르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1세기 중엽, 동방에
서 일어난 수니파의 셀주크 왕조에 의해 칼리프의 권위는 회복
되었으나, 실권은 술탄이 장악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세계의 혼
란과 분열을 한층 깊게 한 것은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의 침
공이었으며, 1258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아바스 왕조 칼리프
가 멸망했다. 몽골군의 살육과 파괴는 이슬람세계에 타격을 주
었으며, 아랍적인 고전이슬람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
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역
사는 새로운 담당자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었다.
AD 1258년: 아바스왕조는 재난을 초래한 홍수피해로 갈팡질팡하
는 사이에 몽골족의 침입으로 멸망당했으며 칼리프는 처형당했
고 바그다드는 황폐화되었다. 더욱이 14세기 말에 티무르가 이
끄는 몽골군이 공격해 들어와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개시
설을 파괴하였다.
AD 1534년: 오스만 터키의 손에 넘어가 속주(屬州)로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여러 차례 터키군과 사파비왕조의 이란군이 싸우
는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내부 반란과 이란을 비롯한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AD 1899년: 오스만 터키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철도부설권을 내준
바 있으며 이에 자극 받은 영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기간중
이라크를 강제 점령해 버렸다.
한편 제 1 차세계대전 때에는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측에 참
전하였는데, 영국군과 인도군이 바스라 부근에 상륙하여 1918년
터키를 제압하고 이라크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이라크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고조되어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0년 산레모회의에서 이라크의 위임통치권을 승인받은 영국은
21년 메카의 하심가(家) 출신인 파이살 1 세를 국왕으로 맞아들
여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였다. 파이살국왕은 그 뒤 여러 차례 영
국과의 조약을 개정하면서 독립으로 나아갔으며, 32년에는 국제
연맹에 가입하여 독립을 성취하였다.
AD 1932년: 이라크의 완전한 독립이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친 독일정책을 고수해 1941년 영국에 재점령되었으며, 대전
후에는 정치소요가 계속됐다.
제 2 차세계대전과 전쟁 뒤의 혼란이 석유이윤으로 인해 경제가
윤택해지기 시작한 53년에, 젊은 파이살 2세가 즉위하였다. 국왕
의 지지 아래 누리 아사이드가 총리로서 독재적인 지도력으로 정
국도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58년 7월 카셈 준장이 이
끄는 군사쿠데타로 국왕·황태자와 많은 왕족과 총리 등이 살해
되고 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AD 1958년: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진 뒤 군사쿠데타가 계속되
다가 1968년 사회주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1979년 바트당
의 막후 실력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사담 후세인이 최고 권
력자로 등장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쿠웨이트 침
공에 따른 걸프전쟁(1991), 미국의 대 이라크전(2003) 등이 잇
따르게 되었다.
연이은 전쟁과 저항세력의 공격으로 현재 이라크의 사회 인프라
는 철저히 붕괴된 상태다. 전화보급대수는 인구 100명당 3대에
불과하고, 지상전화 교환기가 완전 복구되지 않아 수도인 바그
다드조차 시내전화 상당수가 불통되고 있다. 전력난 또한 심각
해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
전기를 필수품으로 구비하고 있다. 의료장비 및 시설도 크게 부
족해 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108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이라크로부터 전해 내려온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문화재
들도 전쟁과 사회혼란의 와중에서 다량으로 약탈당하거나 유실
됐다. 요행히 전쟁의 참화를 면한 문화유적이나 시설물들도 시
급한 복구와 개·보수를 요하고 있다. 이라크는 사우디에 이어
1120억 배럴에 달하는 세계 2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지만
채굴시설 미비로 일일 생산목표 600만 배럴 달성은 2010년이 되
어서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300불
내외에 머물러 있다.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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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라크의 분쟁은 오늘날만의 분쟁이 아니며 그 분쟁의
역사는 인류역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하였다 아니할 수 없다. 비
록 희망적은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노력하고자함은 세계평화,
인류의 평화가 어느 한지역의 분쟁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정이 또한 그러할 진대 대저 어찌할 찌고!
- 끝 -
부록:
메소포타미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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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은 오늘날 종교들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신앙
과 의식의 기초이다. 신화는 고대인이 인생의 의미와 더불어
신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증거이다. 여러 신화들에는 창조,
홍수, 거짓 신과 반신 반인, 불멸의 영혼, 태양 숭배 등이 공통
줄거리로 나타난다. 또한 역사적 사실의 핵심 내용이나 인물 혹
은 사건이 나중에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신화가 된 경우가 매우
흔하다.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의 신(神)들의 체계와 신화는 선주민인 수
메르인이 그들의 문자·종교·제도와 함께 탄생시켰으며 바빌로
니아인·아시리아인·가나안인·히타이트인 등이 계승·발전시
켜 대성한 것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
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 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 인들의 세계관에 영
향을 끼쳤다. 자연의 혜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 데 힘써야 했
던 수메르 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
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현세적 다신교로
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
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
인 특징이 강하였다.
수메르 신들의 체계는, 태초에 안(하늘)·키(땅)와 엔키(물)등
이 있었으며, 안(하늘)과 키(땅)는 결합하여 엔릴(大氣)을 낳았
는데, 이 엔릴(大氣)은 후에 키(땅)의 지위를 빼앗았다. 엔릴
(大氣)에게서는 난나(또는 난나르;月)가, 난나(月)로부터는 우
투(태양)와 이난나(사랑과 아름다움;金星) 등의 신들이 생겨났
다고 한다. 이 체계가 바빌로니아·아시리아에 들어와 안(하늘)
은 아누(하늘)가 되고, 난나(月)는 신(月), 우투(태양)는 샤마슈,
엔키(물)는 에아, 이난나(사랑과 아름다움;金星)는 이슈타르로
이름이 변하였다. 또한 에아(물)와 이슈타르(金星)는 아다드
(폭풍)와 함께 아누(하늘)의 자녀가 된다. 수메르의 엔릴(大氣)
은 바빌로니아에서는 단순히 벨[主]이라 하며, 정중히 숭배되고
있었는데, 함무라비왕(BC 1750년경) 이후에는 바빌론의 토착신
마르둑이 이것을 대신하였다.
창세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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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에서는 창세신화라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은 발견되지 않으
며, 주로 바빌론의 마르둑신의 유래설화인 《에누마 엘리슈(전 7
장, 현존하는 것은 약 1000행)》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바빌론
의 신년제(新年祭;아키투祭) 때에 낭송된 것으로 추측된다.
태초에 아프수(담수의 바다;男神)와 티아마트(염수의 바다;女神)
가 있었는데, 이들이 결합하여 라흠과 라함이 생겼고, 그로부터
운시알과 키시알이 생겼다. 다시 여기에서 전기(前記)의 아누가
생겼으며, 아누로부터 에아가 생겼다. 에아는 현명하고 민첩하여
결국에는 아프수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에아와 담키나에게서 태
어난 마르둑은 늠름해져 옛 질서를 파괴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티아마트는 이와는 달리 11개의 괴물을 만들어낸 뒤 킹구라고 하
는 신을 지휘관으로 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그래서 천상의 신
들은 티아마트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마르둑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양쪽의 군대는 교전 상태에 들어가 마르둑의
군대는 티아마트의 군대를 격파하고, 티아마트는 죽음을 당하였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둘로 잘라 한쪽으로는 하늘을 만들고,
다른 한쪽으로는 수면(水面)에 덮어 씌워서 육지를 만들었다.
또한 지휘관 킹구를 죽여, 그 피로 인간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신들을 숭배하게끔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인간들은 마르둑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바빌론시(市)를 만들고 그 중앙에 마르둑을 위
한 신전을 세웠으며, 또한 마르둑의 활을 하늘에 걸어두었다.
길가메쉬(Gilgames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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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길가메시(Gilgamesh)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로서, BC 2000년경에 성립되었
다고 한다. 주로 니네베에서 출토된 아시리아판(현존하는 것은
약 2000행)과 약간의 바빌로니아판, 그리고 히타이트어 단편(斷
片)과 후르리어 소단편(小斷片)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수메르어판 전래의 몇 개의 신화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길가메쉬란 수메르 에레크시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이다. 후일에
서사시와 전설상으로 반인반신의 영웅이 된 실제 역사상의 위인
이다.
그는 BC 2700경에 바빌로니아의 우룩(Uruk)시에서 살았다. 우룩
시는 현재의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남부, 유프라테스강가에 위
치한다. 그가 유명하게 되었던 것은 후기의 설형문자 문헌에서
위대한 영웅과 인간 현실의 구현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
메르 문헌에서 그는 대단히 많은 신화들에서 중요 인물로 나타
난다.
즉 길가메쉬와 키쉬의 아가(Gilgamesh and Agga of Kish), 길가
메쉬와 하늘의 황소(Gilgamesh and the Bull of Heaven), 길가
메쉬와 생명의 땅(Gilgamesh and the Land of the living), 길
가메쉬, 엔키두(Enkidu) 및 지옥세계(the Nether World) 등의
것들이 있다. 길가메쉬의 성격묘사에 따르면 그는 영웅적인 미
덕.힘.충성 등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고 저차원적인
것들, 즉 책략.포학 등등의 것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은 문
학전승은 셈족 계통의 아카드족과 그들의 바벨론 계승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길가메쉬는 아카드 문헌에서 빈번하게 언급되
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엮어진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집은 열두개의 토서판으로 된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이 열두
개 토서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가메쉬는 그의 우룩(Uruk)시를 포학하게 다스렸다. 사람들은
신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여신 아루루(아를)는 점토를 침으로
이겨서 엔키두라는 야성의 사나이를 대초원에서 만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에게
신전의 매춘부를 보냈다. 엔키두는 유혹에 넘어가 버림으로써
평범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엔키두는 길가메쉬와 겨루지만 싸움은 엔키두의 패배로 끝나고,
두 영웅 사이에서는 일생에 걸친 우정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일련의 모험을 시작했다. 불을 뿜는 거인(괴물) 훔바바
(Humbaba/후와와, Huwawa)를 샤마시의 도움으로 죽였다.
중략
이슈타르(Ishtar)가 길가메시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길가메시
는 이슈타르의 변덕과 바람기 를 지적하면서 그 유혹을 거부했
다. 격노한 이슈타르는 아누에게 하늘의 황소가 지상을 파괴하
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두 영웅는 그 황소를 죽였다. 그러
나 신들의 분노가 거세어져 엔릴은 그들의 오만에 대한 처벌로
엔키두를 병에 걸려 죽게 만들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에 상처받은 길가
메시는 대초원을 방황했다.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마
법의 땅에 사는 우트나피슈팀(Utnapishtim)을 찾아갔다. 우트나
피쉬팀은 신들에 의해서 대홍수에도 살아 남기로 되어 있었던
인물이다.
'토서판 XI'에는 우트나피쉬팀이 고도한 양식의 서사시로 읊은
대홍수의 기사가 쓰여있다. '토서판 XI'은 오랫동안 연구의 대
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며 창세기에 나오
는 기사와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기이하게도 유사하다. 19세기에
범바빌로니아 학파에 속한 어떤 독일 학자들은 이 전집과 길가
메쉬의 성격을 그리스도와 메시야적 직임의 가능한 표본으로 보
았다. 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전적으로
배척해 왔다.
코르사바드에 있는 사로곤 2세의 궁전에서 가져다 놓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대한 부조는 사자를 목졸라 죽이고
있는 거대한 길가메쉬의 모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
다.
길가메시가 마법의 땅에 사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는 도중,
세계를 둘러싼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이슈타르의 변신인 시두리
가 말을 걸었다. 시두리는 인간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포도주
나 마시자고 길가메시를 유혹했지만 길가메시는 엔키두가 매장
되도록 좌시하지만은 않겠다고 하며 엔키두의 시체의 코에서 벌
레가 기어나올 때까지 이레 낮 이레 밤을 애도하기만 했다. 시두
리는 길가메시에게 '신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점지하고, 자신들은
영원히 산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굴의 영웅은 마침내 '천상의 술집 주모'로부터 우트나
피슈팀이 죽음의 바다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러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루터의 사공인 우르사나피의 도
움을 얻어야만 했다. 길가메시는 사공을 찾아냈고특별한 나룻배
를 만들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 신들이 우트나피슈팀 부부에게
영원한 거처로 준 "만강(萬江)의 입구"로 갔다. 우트나피슈팀은
길가메시에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말한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불사의 풀"에 걸고 우여곡절 끝에 심해에서 그 풀을 구
한다.
우르크로 돌아오는 도중, 샘가에서 자고 있는 동안에 한 마리의
뱀이 그 풀을 먹 어버렸다. 뱀은 즉시 허물을 벗을 수 있게 되
었다. 길가메시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기가 죽을 운명임을 깨닫
고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다른 문헌에는 길가메시는 이난나를
도와 뱀, 바람, 독수리가 보호하고 있던 나무를 잘라 넘어뜨리
는 얘기가 나온다. 이난나와 길가메시는 그 신성한나무로 마법
의 북과 북채를 만들었는데, 훗날 길가메시는 우연히 그것을지
하세계로 떨어뜨리게 된다.
엔키두가 그 북과 북채를 되찾아오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받은 특별한 가르침을 잊는 바람에 영원히 지
하세계의 포로가 되었다. 이 죽은 영웅의 영혼은 에아가 대지에
열어놓은 구멍 밖으로 한 줄기 바람처럼 나타나 왕자들이 하인
이 되고 지상에서의 신분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먼지의 집", 곧 저승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모험이 끝난
후, 지하세계에서 왕궁을 부여 받아 죽은자들의 하위신
(lessor god)으로 숭배되었다.
첫댓글 근데.. 내용이 하나도 안써있는데요?
쓰고 있는 중이며 우선 그림들만 올리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