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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강좌 포교사(녹취) / (2007년 01월 02일)-2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한몸으로 같이 본다.
여기는 이제 五眼 이야기가 나오고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如來)-유육안부(有肉眼不)아
여래가 육안이 있는가?
여시(如是)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 유육안(有肉眼)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如來) 유천안부(有天眼不)아
여래가 천안이 있는가?
여시(如是)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 유천안(有天眼)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如來) 유혜안부(有慧眼不)아
여래가 혜안이 있는가?
여시(如是)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가 유혜안(有慧眼)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如來) 유법안부(有法眼不)아
여래가 법안이 있는가?
여시(如是)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 유법안(有法眼)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如來) 유불안부(有佛眼不)아
여래가 불안이 있는가?
여시(如是)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 유불안(有佛眼)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이거는 이제 육안, 혜안, 천안, 법안, 불안 이게 이제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눈인데 우리도 다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는데 부처님의 안목은 뛰어나다. 남다르다,
부처니까 佛眼이 있고, 진리를 잘 아니까 法眼이 있고, 이 세상 이치에 대해서 꿰뚫어 보니까 慧眼이 있고, 또 天眼은 저기 멀리까지 과거, 미래 다보고, 거리상으로도 엄청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다 안다 이거야. 이게 이제 천안이지요. 이걸 이제 거론해 놓고 그만큼 여래는 부처의 눈까지 다 갖췄다.
이렇게 해놓고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항하중소유사(如恒河中所有沙)를 불설시사부(佛說是沙不)아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숫자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여시(如是)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 설시사(說是沙)니이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이 모래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일항하중소유사(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유여시사등항하(有如是沙等恒河)어든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 여시영위다부(如是寧爲多不)아
한 항하강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이 이와 같은 모래 숫자대로 항하강이 있다고 하자, 그랬을 때 이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숫자, 그와 같은 숫자의 세계가 있다면은 얼마나 많음이 되겠는가?
예를 들어서 한 항하강의 모래만 하더라도 그 수가 무량무변한데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있고, 다시 그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숫자, 이건 뭐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죠. 그 숫자를 우리가 생각만해도. 얼마나 많은가 이러니까 그것이 모두가 하나의 세계라고 한다면은 그것 하나하나가 지구라고 했을 때 이런 뜻이죠. 얼마나 많겠는가?
심다(甚多)니이다 세존(世尊)하 불(佛)이 고수보리(告須菩提)하사대
심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이소국토중소유중생(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약간종심(若干種心)을 여래실지(如來悉知)하노니
그와 같이 많고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들의 또 많고 많은 여러 가지 마음들,
우리 중생들의 하루 생활 중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중생 하루의 마음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뭐 우리나라 인구를 4천만이라고 합시다. 4천만 중생이 하루 중에 쓰는 마음 숫자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비유를 든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이 많은 항하강이 있고, 그 모든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숫자와 같은 수의 지구, 그 지구위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 그 모든 마음들을 여래는 실지(悉知)하노니 그랬어요. 다 안다. 여래는 다 안다.
앞에서 五眼을 든 것이 바로 이 이야기 하려고 그럽니다.
여래는 五眼이 있기 때문에 다안다 이말이야. 五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뭐 肉眼은 당연히 있고요, 天眼은 TV나 틀어야 天眼이 조금 통하고, 그 다음에 慧眼은 있다 말다 하는 것이고, 法眼도 이건 순전히 귀동냥한 法眼이지 순 가짜 법안이고, 佛眼은 뭐 어림도 없고, 지금 그런 수준이죠 우리가. 그러니까 남의 마음 알턱이 있나, 남의 마음을 알턱이 없지 이정도 수준 가지고는. 남의 마음을 좀 알아야 남을 배려해줄텐데 도대체 남의 마음을 모르니까 배려를 못하는거야.
부처님은 이 다섯가지를 다 완벽하게 갖추어지신 분이예요. 그러니까 그 많고 많은 중생들의 그 많고 많은 마음들을 여래는 실지한다 그랬어요.
그렇다고 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데 이것까지 부처님이 뭐 위에서 내려다보고 다 살펴 가지고 네 이놈 니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이러고 있다는 말이 아니예요. 모두 그 생각을 하는 거야. 여래는 다 안다 하는 것을,
사실 그래 생각하는게 더 좋을지 모르지. 나쁜 생각 안할테니까, 부처님이 다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나쁜 생각 안한다 이렇게 알면 영 모르는 중생들에게는 그게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은 그런 식으로 안다는게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근본 자체를 안다 이거예요.
마음이라고 하는 근본자체를, 실체에 대한 그런 것을 확연히 알기 때문에 안다고 한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뭐 팔십통을 해서 알려면 마음 씀씀이까지 다 알지요. 좋은 생각을 할지, 나쁜 생각을 할지, 도둑놈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슨 보살생각을 하고 있을지 다 알기야 알지요. 알려고 하면 알지만은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고.
뭐라고?
하이고(何以故)오 여래(如來) 설제심(說諸心)이 개위비심(皆爲非心)일새 시명위심(是名爲心)이니
왜 그러냐? 왜 부처님이 그 많고 많은 마음들을 아느냐? 여래가 말하는 여러 중생들의 마음, 개위비심일새.
마음, 마음, 마음 하지만은 실은 그것이 마음이 아닐새.
그래서 그거 마음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마음 찾으려고. 마음, 마음, 마음, 하지만은 마음이 아니야, 찾으려고 하니까 도대체 뭐 손에 잡히는게 있어야지. 이게 제일 문제야. 순전히 마음 놀음인데, 사람 산다는게 순전히 마음 놀음인데 그렇다고 정작 마음을 찾아볼려면은 마음이 안잡히는거야. 손에 안잡혀요. 않찾을 때는 뭔가 가까이 있는 듯한데 정작 찾으려고 보면 저만큼 다른데 가있다고요. 참 불가사의하고 아주 요상한게 이 마음이라. 그래서 개위비심일새. 이 이름이 마음이니라.
소이자(所以者) 하(何)오 수보리(須菩提)야
그 유명한 말씀.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며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며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니라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한다.
여기 얻지 못한다 라고 하는 말속에는 찾지 못한다, 밝혀내지 못한다, 손으로 잡아낼 수가 없다, 이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득자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不可得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찾을 수가 없다. 볼 수 없다. 만질 수가 없다. 끄집어낼 수가 없다. 또 이러고 저러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런 의미가 이 不可得 과거심도 그렇고, 現在心도 그렇고, 未來心도 불가득이다.
이 대목에 와서는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대략이라도 한 번 짚고 넘어가야지요.
그 유명한 덕산스님과 승신, 용담 승신스님 또 거기에 노보살님, 떡장수 노보살님 관계,
덕산스님은 서기로 782년에 탄생하셔서 865년에 열반하신 당나라때 스님인데 본래는 팔만대장경을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도 금강경에 대해서 해박하신 분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대한 논문이 한 걸망이야. 얼마나 연구서를 많이 썼는지 한 걸망이야.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은 이 선종에서 남방선종에서 말하자면 卽心是佛이다. "마음이 곧 부처다" 라고 하는 그런 기치를 들고 천하를 횡행하고 완전히 자기가 사는 데까지 그 말이 들리고 매일 그 소식이 올라오는거야. 마음이 부처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기로는 천겁동안 부처의 행동을 배우고, 또 만겁동안 부처님의 미세한 생, 세세한 행동까지 다 배운 연후에사 성불한다 이렇게 알고 있거든, 교학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데, 부처님의 위와 부처님의 생을 어떻게 많고 많은 그것을 마스터 해야만 성불한다 라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들려오는 소식이 저 산중에서 卽心是佛이라고 계속 들려오거든.
마음이 부처지 뭐 삼천유의와 팔만세행이 그까짓게 무슨 소용이 있냐, 이렇게 들려오는거야. 그러니까 그야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내가 그동안 연구한 이 논문을 짊어지고 가서 이 마구니들 잘못된 이 소견들을 내가 꿰뚫어주고 불법을 바로잡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이제 남방으로 내려가다가 풍주라고 지역에 이르렀어요.
풍주에 이르러 가지고 길가에서 어떤 노보살님이 떡을 팔고 있었는데 거기에 걸망을 내려놓고 떡을 좀 사서 요기를 하려고 하는 중이라. 그래서 노보살님이 이렇게 보니까 스님이 걸망을 짊어지고 내려놓고 떡을 사먹으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떡은 차치하고 스님 그 걸망에 뭐가 그렇게 많이 들었습니까? 하니까, 아 내가 금강경을 평생 연구해서 금강경에 대한 논문이 이렇게 많다고. 아, 그래요 그럼 잘되었습니다. 그러면 금강경에 대해서 내가 평소에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 질문에 대답을 잘 하시면 내가 떡을 드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내한테서는 떡을 못사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동네에서는 떡을 굶어야 됩니다. 이렇게 거창한 약속을 해오는거야. 아 좋다고 금강경에 대해서 안그래도 입이 근지럽던차에 묻기만 하라고 뭐든지 대답하겠다고,
그래서 그때 떡장수 노보살님이 물은게 여기 범어사 올라가는데도 떡장수 있는데 함부로 생각하지 마세요. 대단한 보살일 수가 있어요, 절 밑에 사는 거지들, 특히 거지들, 그다음에 허름하게 살아가는 처사들, 부목들, 떡장수들 이런 이들 얕볼게 아니예요 자고로 다 문수보살 화현들이 대게 많아요.
그래서 이제 묻는데, 아이 스님, 그 금강경 일체동관분 제18분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하는게 있지요?
아 있지. 아이, 노보살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아 그 정도야 알지요. 이렇게 대답이 된거야.
그런데 스님이 점심하시겠다.
점찍을 占자, 마음心자, 중간에 뭐 요기삼아 먹는걸 점심이라고 그래. 심자가 마음심이 아니고, 중심이라는 심자거든요. 중간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래 뭐 정식으로 식사 하는게 아니고 잠깐 요기하는게 그게 점심이라. 그래 떡 사가지고 기껏 요기 좀하고 다시 또 가야할 그럴 판이니까, 그래 점심을 좀 하겠다고 떡을 청하니까,
그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인데 어느 마음에다가 요기를 하렵니까, 점을 찍으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요.
그러니까 덕산스님이 있다가 그참 묘한 질문이거든. 그건 도대체 경에 있는 말이기는 한데 거기에 대한 답은 없는 거야.
이게 도대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데 그 어느 마음이다. 과거심이다, 현재심이다, 내가 배고픈 마음이다, 뭐 떡 먹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거야 말하면 그건 경문하고 틀려버리니까. 뭐 떡 먹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해도 답이 한 70점짜리는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그거 틀린 대답이거든요.
그러니까 대답을 못한거야. 그래서 스님 뭐 괜히 그랬샀지 말고 여기 이웃에 용담스님이라고 아주 훌륭한 스님이 있으니까 보아하니까 스님 그릇도 대단하고 근기도 출중한 것 같은데 그 스님인데 한 번 가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용담스님에게 안내를 했어요.
그러니까 용담스님이 저기 법당 뒤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나와가지고 그대야말로 친히 용이 사는 못에 용담에 이르렀네.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그래 용도 없고, 못도 없는데 그런 소리를 하니까 이거 벌써 차원이 다르잖아요. 덕산스님은 현실을 보고 하는 소리고, 용담스님은 현실을 뛰어넘어서 하는 대답이야.
이게 이제 이런데 재미를 붙혀야 돼. 그래 가지고 이런 법도량도 불자들이 좀하고 그래야 되는데 괜히 쓸데없는데 정신팔리지 말고.
그래 이제 보아하니까 연세도 좀 높고, 벌써 완력으로 하면 못당하겠지만은 이게 완력으로 할 일이 아니라 그래서 기가 질리는거야 그래서 예배를 떡하고 그 스님방에 들어갔어. 용담스님 방에 들어가서 밤이 이슥하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나서, 용담스님이 저기 객실에 내려가서 자라고, 객실에 내려가서 자라고, 그렇게 하니까 덕산스님도 객실에 가서 자려고 나오는거야. 그래 스님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하고 발을 올리고 나오니까 밤이 깊어가지고 칠흑처럼 캄캄한거야. 밖이 그렇게 캄캄하거든.
그래 돌아와가지고 스님 밖이 너무 캄캄해서 신을 신을 수가 없는데 지촉(紙燭)에, 지촉이라 그래요, 촛불데다가을 불을 좀 댕겨주십시오. 이렇게 하니까 그래 용담스님이 촛불을 하나 건네줬어요. 건네주고 덕산스님은 문앞에서 이렇게 받아가지고 비칠려고 막 돌아서는 찰라에 용담스님이 자기가 준 촛불을 확 불어 꺼버렸어. 그러니까 촛불을 문앞에서 받아가지고 이렇게 가다가 눈이 얼마나 밝았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확 꺼버리니까 캄캄해진거야. 천지가 아득해진거지.
그래서 그 순간 말하자면은 마음의 눈이 확 떠진거야. 그래서 덕산스님이 비로서 천지가 캄캄해진 그 순간에 진짜 온 우주를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활연대오(豁然大悟)라 그러지요. 활연대오를 하고는 들어와서 예배를 하니까 인사를 하니까, 아니, 이 사람아 자네 왜 가지 않고 도대체 뭘 보았기에 나에게 다시 들어와서 예배를 하느냐? 용담스님은 다 알지 사실은.
그러니까 덕산스님이 있다가 저는 지금부터 앞으로 절대 천하의 노화상, 특히 선을 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을 절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 결코 내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지금 경험했습니다 이 말이야.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을 그렇게 고백을 했지요.
그리고 이제 그 이튿날 용담스님이 종을 치고 대중을 다 모아놓고 이 가운데 물건 하나 있다 이거야. 이 가운에 물건 하나 있다,
가중유개한(可中有箇漢)이랬어요, 이 가운데 한놈 있다. 그런데 그놈의 이빨은 마치 칼을 칼날의 숱과 같다 이빨은.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칼을 칼 만드는데서 많은 칼을 만들어서 번쩍번쩍 빛나게 갈아가지고 죽 세워놓은 것같이 그렇게 보이고,
구사혈분(口似血盆)이라. 입은 큰 단지에다가 피를 하나가득 담은 것같이 입속이 벌겋게 생겼다 이거야. 그런 놈이 하나 있다 이거야.
이건 뭐 얼굴이 괴상하게 생겼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큼 기개라고 할까 법의 그릇이라고 할까 사람 됨됨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자기가 느낀대로 표현한 것이죠.
그리고 이놈은 아무리 두둘겨패보아야 고개 한번 안돌린다 이거야. 몽둥이로 아무리 두둘겨패도 고개 한번 안돌린다. 끄떡도 않는다.
일봉타불회두(一棒打不回頭)라 그랬어요. 한결같이 두둘겨패도 고개하나 안돌리고, 끄떡도 않고, 눈썹하나 까딱 안하고 요지부동, 태산부동으로 그렇게 있는 놈이다,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랬어요.
이 사람 틀림없이 앞으로 최고 정상, 불교의 최고 정상, 법의 정상에서 나의 도를 크게 따를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크게 근사하게 인가한 사례가 됩니다. 뭐 가섭존자가 미소하니까 부처님이 나의 정법안장을 모두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시시하지 그거 다 표현이. 시시해요. 나의 정법안장을 마하가섭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이렇게 약해빠져 가지고 표현이 그거다 경전에 있는 소리거든 경전에 있어요. 경전에 문불소설 경전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용담스님이 덕산스님에게 인가한 말씀을 봐요.
불교의 최고봉에서 나의 법을 크게 따를 것이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선포를 해서 비로소 용담스님의 법을 하루아침에 그냥 하루저녁에 가서 촛불 하나 끄고 받아낸 거예요. 근본적으로 그릇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참선 오래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고, 이 깨닫는 것은 이치만 알면 그냥 깨닫는거예요.
그래서 그 이튿날 그리고는 바로 법문이 끝나고 바로 당신이 지고갔던 금강경 연구논문을 전부 법당앞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태워버려요.
태우면서 하는 말이,
궁제현변(窮諸玄辯); 부처님의 설법과 같은 변론을 통달하고 있더라도
야일호치어태허(若一毫置於太虛); 터럭 하나를 태허공에 날리는 것과 같다.
갈세추기(竭世樞機); 추기(가장 중요한 기관, 중심이 되는 것)를 내가 다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일적투어거학(似一滴投於巨壑); 큰 골자기에 물 한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더라.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세상에 가장 깊고 오묘한 어떤 변론을, 논리와 변론을 전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저 태양에다가 터럭하나 눈에 보일듯말듯 하는 머리카락 하나 던지는 것과 같다.
우리 몸뚱이 다 던진다한들 큰 허공에서 그야말로 미묘한 존재인데 거기에다 머리카락 하나 던지는 것과 같이 아주 보잘것 없는 것이다. 그래 당신은 그렇게 살았거든요.
정말 이론이니 박식함이니 동서고금에 온갖 이론을 다 겸비해 가지고 그렇게 살았는데 그것이 그야말로 이 태허공에 머리카락 하나 던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존재다.
갈세추기(竭世樞機) 사일적투어거학(似一滴投於巨壑);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것, 중요한 것, 대통령을 백번천번하고, 유엔 사무총장을 천번, 만번 하는 그런 중요한 일과 중요한 이치와 모든 중요한 일들을 자기가 다 처리하고 다 한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큰 바다에 물한방울 던지는 것과 같다. 큰 바다에 물한방울 던지는 것과 같다. 큰바다에 물한방울 던지면 무슨 표가 나겠으며, 무슨 흔적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최고로 뛰어난 일, 그야말로 폭포처럼 쏟아붓는 현론과 뛰어난 일, 가장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을 설사 한다손치더라도 그것 역시 이 도리, 이 법에서 볼 때 그야말로 그렇게 미묘하고 하잘것 없는 그런 존재다.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통해서 조그마한 그야말로 개미만한 인생,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작게 사는 그런 삶이 조금씩 조금씩 크게 확대되고 넓어지고 아주 커지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이런 게송을 보면 한 번씩 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이 대목에는 덕산스님이 노파를 만나서 떡 한조각 사먹으려다가 사실 큰 소득을 얻었죠. 떡은 못사먹었지만 그 노보살이 안내해준 용담스님을 만나서 용담스님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용담스님의 법을 이어받게 되어서 우리 불교사에 아주 큰 봉우리가 되었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금강경 이 대목에서 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입니다.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왜냐 공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본래 근본이 공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미워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지지고 볶고, 싸우고, 시기질투하고, 온갖 세상에 좋은 일도 다하고 그래 결국은 뭐냐?
이 마음도 無實無虛다. 實도 아니고 虛도 아니다. 실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것도 아니다. 그래 중도로 이해해야 돼. 결국은 중도로 이해해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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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바하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五眼을 갖춘다...바른 안목을 갖춘다... 사바하님 고맙습니다. _()()()_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도 사실은 그 實體가 없는 것,,, 無實無虛,,,實다운 것도 아니고 虛亡한 것도 아니어서 결국은 中道와의 歸結일 뿐,,,! 사바하 보살님, 정말 수고 많으셔요.
삼배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無實無虛 _()()()_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