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우리들 (5) : 언어에 깃든 사회적 전제들"
다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우리들 (5)
언어에 깃든 사회학적 전제들
1. 문화적 환경의 변화
이제 우리가 한글 및 한국어와 관련하여 논의해온 긴 여행이 마무리될 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글 및 한국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새삼스레 언어를 공부한다거나 국문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사소통 도구인 "한국어" 및 그 표기수단인 "한글"에 대해 고찰해봄으로써, "한국인"인 우리들이 망각할 수도 있는 기초적인 의식들에 대해 반성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순서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진 일반적 의식구조의 문제를 간략하게 검토해보기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진 관념들 중 하나가 "우리말은 정말 어렵다" 하는 생각인데, 특히 일상생활에서 존대말이나 어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인해 타인과 갈등을 일으켰다든지, 혹은 좀 어색한 느낌을 갖게 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국어는 존대말이 발달해서 참 어렵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 중에 경어법이 발달한 언어는 한국어뿐만이 아닙니다.
가령 한국어와 거의 어순이 동일한 일본어의 경우, 한국어보다 더 공손한 어법과 어미들, 그리고 한국어에는 많지 않은 겸양접두어들이 훨씬 더 발달해 있습니다. 또한 한국어의 경우 많지는 않지만 "밥을 먹다"는 표현이 "진지를 드시다"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존대형 단어나 어휘가 별도로 발달한 경우는, 이미 우리가 공부한 크메르어만 해도 한국어보다 상당한 수준에서 발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티벳어의 경우엔, 인간의 활동과 관련된 동사들은 거의 모두 평상형과 존대형이 별도로 있을만큼 경어법이 발달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티벳 문화나 일본 문화가 특이한 점은, 심지어 어린 아이에게조차 처음에 말을 걸 때는 가능하면 존대말로 말을 거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반면 일부 의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경우이겠습니만, 한국문화에서는 심지어 몇 살 위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적절한(?) 기회를 활용하여 반말로 대하려는 경향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한국어가 어려운 것은 이 언어가 특별히 문법적 구조가 복잡하다든지, 다른 언어에 비해 경어법이 발달해서 빚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비하시키려는 일부 "한국인들"이 가진 의식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최소 2가지 이상의 어떤 근거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 한국문화에서는 반말을 사용해야 친해지는 것이다.
(2) 한국어는 일종의 권력구조가 투영된 말이므로, 우선 말로써 상대를 좀 눌러야한다.
(2-1) 그러므로 나만은 좀 대접을 받아야겠다.
아마도 이러한 근거에 약간이라도 동의가 되시는 분들은, 한국사회의 문화적 구조에 대해 상당히 심도있는 이해를 가지신 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쉬운 말로 하자면, 한국사회를 꿰뚫어본다는 것입니다.
한국어 사용문화가 가진 "의식구조 속의 권력관계"는 사실 모든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위계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 속에서 안정을 찾아보려는 거대하고 오래된 강박관념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구조를 자연스레 인정할 수 있다면,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너무도 행복하고 세상에 대한 문제를 자각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심지어 한국 내에서조차도 "어, 한국말이 참 어렵네"라든가, "내가 저 양반한테 뭘 실수했나" 하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점점 더 많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어가 가진 "위계질서"는 농경문화 시대의 오랜 정신적 배경과 더불어, 촌락구조(혹은 주거지역)라는 지리적 조건을 전제로 합니다. 즉 과거 읍단위(10만명) 정도의 생활권이라면, 사실 이러한 권력구조는 상당히 정겹기까지 한 순기능도 갖고 있고, 또 일정 정도는 나이 및 해당지역 출신학교의 학년 등을 통해 정리가 되므로, 아무런 저항 없이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문화였던 것입니다. 과거의 이러한 시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지역"(region)이면서 동시에 "공동체"(community)였습니다. 그러나 굳이 세계화를 논하지 않고 한국이란 지리적 단위만을 생각할 때에도조차, 이제 그러한 지리적 단순성을 가진 공동체는 사실상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앞으로 생겨나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문제의 출발이 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상당히 "중층적인 정체성"(overlapping identity)를 가진 상태에서, 중층적이고 복잡한 문제들과 관계들이 교차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K씨는 어떤 기업의 부장이면서, 한 골프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고, 거주하는 아파트 자치위원회의 위원이며, 온라인 난초가꾸기 동호회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또 H씨는 낮에는 주로 자신이 경영하는 "세븐일레븐" 가게에 나가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밤 8시 이후로는 대리운전수로 변신하면서, 주말이면 살고 있는 구의 조기축구회 선수이고, 온라인상에서는 창업모임 사람들과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며 중국의 주식시장에 관심을 갖습니다. S씨는 정부의 한 부처에서 국장을 맡고 있고, 일주일에 3일은 자기계발을 위해 다니는 한 대학의 야간 대학원 과정 학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사례로서 또다른 K씨는 동해안에서 자라나, 서해안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호주에서 대학을 다닌 후, 아프리카 출신의 아내와 결혼해,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사업을 하다가, 화와이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아들과 손자들을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칠레를 방문하다가, 항공기의 기착지인 LA에서 사망한 후, 그 유골이 태평양 한 가운데에 뿌려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례는 너무도 다양하여 이제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 온라인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제 100만명이 있는 "지역"(space)에서 3,000만 개 이상의 "공동체"(community)가 탄생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반말과 존대말 사이의 긴장관계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관계맺기 문화는 더 많은 도전을 받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해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2가지 방식으로 대처하게 될 것입니다.
(1) 기존의 인간관계의 단순성을 찾아 그러한 문화를 허용하는 공동체로 이동하거나 결집.
(예: 동문회, 동창회, 전우회 등등)
(2) 관계맺기 방식에 대한 재검토 및 재반성
(2-1) 손해를 안보려는 강박관념에서 더 신중하게 위축되는 방향으로 움직임.
(2-2) 새로운 시대의 관계맺기를 위한 전면적인 인생과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과 변화.
이제 사회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다양성"(diversity), "다문화"(multi-culture), "다원주의"(pluralism)를 주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이 가진 자본이나 수단들은 무척이나 빈약해 보입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성직자들 중 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종단이나 교단 안에서 권력 쟁취를 위한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있고, "기업 내 다문화"를 강조하는 창업주들 중에도 자신의 자식에게만 상속을 시키려는 강박관념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화"를 강조하는 정치인들도 결국은 정치자금을 충분히 낼 수 있는 부유한 유권자들에게만 호소하려 하고 있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교수들 중에도 자신의 지도학생의 논문주제에 대해 통제를 하려는 현상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이제 "다양성", "다문화", "다원주의"라는 목표를 모두가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지, 또 어떤 것이 가장 기본적인 도구(tool)인지조차도 생각을 하지 못하는 혼돈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2. 역사적 과정
한국어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면해있는 정체성의 문제는 지식정보사회 및 통신과 교통의 발달이라는 환경적 요인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동일한 현상이 일본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발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다소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한국사회의 독특한 문화는 작금의 시대적 환경변화와 더불어, 지난 20세기에 한국사회가 걸어온 길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은 30여년의 일제 식민지를 거쳐, 1945년 해방에서 1952년 한국전쟁의 종전에 이르는 혼란기와, 이후 1987년의 민주화혁명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권력 및 이념투쟁이 있었고, 다시 그 이후로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다 관념화된 이념적 양극화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사회는 비교적 지식기반사회의 특성인 정보화사회로 빠르게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획일성과 이념적 좌우를 불문한 전투적 태도들이 목격됩니다.
학술적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한국역사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분석은 상당히 활발하게 이뤄져왔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정서적 변화와 심리학적 상처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해보입니다. 다시 말해 20세기의 여러 사건과 변화과정에 대한 물리적 설명, 혹은 이념적으로 ---- 보수적 입장이든 진보적 입장이든 ----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노력들은 있어 왔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고찰은 거의 전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치유"(힐링)가 필요한 이 공동체 전체의 심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한국사회는 해방 후에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싸웠습니다. 한국사회가 가진 심리학적 문제는, 식민지시대의 역사적 경험보다도 한국전쟁(6.25)이 가져다 준 엄청난 정신적 상처에 더 많은 피해를 당한듯 보입니다. 그것이 민족해방전쟁이었는지 아니면 누가 먼저 침략했는지 하는 논쟁 이전에, 그리고 그 전쟁에서 부모와 형제를 잃었다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차원의 슬픔과 원한의 문제를 떠나서, 현 시점에서 중요하게 다시 살펴볼 지점은, 바로 한국전쟁이 "형제끼리 서로를 죽이는" 행동구조를 가진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저 놈을 죽여야 내가 산다"라는 생존적 성격을 넘어서서, "저 빨갱이 쌔끼" 혹은 "저 반동분자 새끼"에 대해 "죽!일!거!야!"라는 매우 본질적 살의와 적개심을 가지고 형제를 죽인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이라크 파병이 첨예한 이슈로 등장한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원로 "참전용사들"께서 이 파병을 지지하는 시위도 하고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우연히도 저는 참전용사 모자를 앞에 놓고 운전하는 분의 개인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가진 "한국 진보주의자들" 및 "국제적 자유주의 시각"에 대한 적개심은 여기서 글로 형언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베트남전에서 적들을 많이 죽였다"고 발언하더군요.
미국의 경우, 베트남전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미군들이 전후에 겪은 정신적 질환과 방황에 대해서 많은 학술적 연구를 한 바 있고, 그 연구결과를 토대로 최근의 전쟁에서 병력관리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 중 우리가 주목할만한 점은, 전투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죽인 참전용사들은 그 정신적 내상으로 인해 말이 없어지고 우울증 등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 투입됐던 일부 공수부대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심지어는 전쟁에서 발생하는 합법적 살인조차, 그것이 주는 정신적 내상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저는 몇 가지 상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1) 시위중인 참전용사들이 정말로 전투현장에서 사람을 죽여보았던 이들인가?
- 혹시 후방지원부대 행정병들이나 수송병들은 아니었는가?
(2)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살인"에 대한 죄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저렇게도 많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사회는 과연 정신병리학적으로 정상적인 사회인가?
(3) 저들은 왜 살인이라는 경험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지 않고, 자식 세대로 대물림하려는
것인가?
"한국전쟁" 이후로도 총만 들지 않았을 뿐, 이러한 살의와 적개심은 다시 오래금 한국사회를 짖눌렀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자 한반도의 남쪽에서 다시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짧고도 잔인한 마지막 정리전쟁을 치뤘습니다. 그 과정에서 또 지리산과 제주도에서 "공비사냥"과 "양민학살"을 통해 많은 인명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익이 최종적 승리를 거두고 민주적 정통성이 없는 독재정권으로 구체화되면서, 다시금 "보수진영"과 "민주진영"(혹은 진보진영)으로 갈라졌습니다. 원래 극우적 성향을 지녔던 한국의 "보수진영"은 상대에 대해 "빨갱이"라 마녀사냥식 공격을 해댔고, 일부 자생적 좌파까지 합류한 "민주진영"은 상대에 대해 군사독재 혹은 그 앞잡이들이라고 비판해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금 총과 수류탄만 동원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오랜 기간 소규모 시가전으로 발전한 가두시위들을 연출해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의 대학생들은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던 분위기에서 청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혈기왕성한 청년들은 가두로 뛰어나갔고, 자신들의 대오를 방해하는 전경들이 보이면, "저 새끼들은 군사독재의 앞잡이들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있다" 하는 생각으로, "나쁜 새끼들, 죽! 어! 봐!" 하는 심정으로 작은 수류탄이나 다름없는 화염병을, 어제까지도 함께 공부하다 입대한 자신들의 친구들일 수도 있는 젊은 전경들에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투척했던 것입니다. 또한 보도블럭을 부수어 그 파편들을 이용해 투석전을 벌였고, 심지어는 이미 대오에서 이탈해 전의를 상실한 전경들을 집단구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빨갱이 새끼들! 너희들 땜에 집에도 못들어가고, 니네가 데모하면서 우리 동료들 화염병에 화상입었다. 그러니 너도 맞아봐라!" 하고, 경찰들은 학생들을 향해 "죽!어!라! 쌔끼들아!" 하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던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러한 폭력적 가학에 대해 너무도 죄의식을 망각한 나머지, 체계적인 고문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사명감있는 직무로 생각하기조차 했습니다.
한국의 20세기 중후반 역사는 6.25 전쟁에서 사용된 소총과 중화기 등의 무기 종류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보여준 심리적 양상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한국사회는 집단적 정신치료, 즉 사회 전체적으로 심리적 치유과정이 결여된 공동체라는 것을 자각해야만 합니다. 한국사회는 너무도 오랜 기간 대결에 익숙해진 사회이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제도개혁이나 정치세력의 교체가 아니라, 한국인 다수가 갖고 있는 내적 심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동영상) 1980년대의 한국 사회와 정치의 양극화는 새로운 전투적 음악들과 예술 형식들도 창조해냈다. 서정적 음유시인 정태춘 역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 참여를 했다. 20세기 한국의 뮤지션들 중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했던 이 음악가 역시, 이 시기의 음악 속에 처절한 한과 전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훗날 그는 이 시절의 자신들에 음악에 대해, 또 새로운 평가를 하면서 다시금 서정적 세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1980년대 후반 한국의 민주진영이 보여준 최고의 투쟁예술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될만한 것이다. 특히 가장 토속적 정서를 가진 한국의 마지막 포크 시인의 음악인생에서, 이러한 작품들은 처절했던 한 시대의 기록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말한 전투적 심성은 비단 정치적 투쟁과정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심리적 구조가 사회, 경제 활동에도 그대로 투영되었고, 게다가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들이 발생시킨 여러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승리하기 위해 남을 짓누르는 법에 대한 체계적 학습장치를 고안해냈고, 바로 그러한 측면이 한국인들의 언어생활까지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폐단은 아래로는 거리의 부랑배들로부터, 심지어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바 있습니다. 저는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한국사회의 한 역사적 전환점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의 언어사용이 또 한국이 가진 여러 폐단들을 잘 보여주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것은, 저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참 좋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언어문화가 가진 의식을 지배하는 본질적 속성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는, 그 분 역시 보통의 한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 '왕따'의 반대말인 '짱'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점은 대표적임)
"반말"을 통해 나타나는 서열문화는 사람을 이중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매우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왠만하면 나이로 들이 밀었다가, 나이가 안 먹히면 학번으로, 학번이 안 되면, 군번으로와 같이, 끊임없이 자기한테 유리한 걸 찾으려하는 좀 비열한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한 마디로 도구 하나로 여러 군데에 일관성 있게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동일한 한국어 문법을 사용하면서도, 현재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저지르는 것처럼, 타인을 비하시키는 문화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극동권에서 그 학문을 인정받았던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선생과 처음으로 만난 이후,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편지를 통해 학문적, 인간적으로 교유했고, 특히 1559년부터 1566년 사이에는 유학의 철학적 쟁점이었던 "사단칠정론 논쟁"(四七論辯)을 토론함으로써, 조선시대가 남긴 거의 유일한 철학사에 단 한두줄이라도 기록될만한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주)
(주) 어떤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철학사"(the history of philosophy)나 "사상사"(the history of thoughts)에 기록될만한 사건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 중 하나이다. 이러한 관념에 대한 역사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지역은 (1)그리스-유럽(중세 초기의 중동 포함) 문화권, (2)인도문화권, (3)중국문화권을 제외하면, 사실상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극동의 한국이나 일본 역사는 주변부 역사로서는 비교적 사상사적 사건들을 많이 포함한 문화이다. "크메르의 세계"가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는, 과연 캄보디아(크메르문화권)나 동남아시아에서 철학사나 사상사적 사건이나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까지는 "종교사"(the history of religion)에 포함될 주제들은 존재하지만, "철학사"나 "사상사"에 포함시킬만한 주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쉬운 점이고, 향후 지속적으로 탐색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볼 점은 "사단칠정론"이라는 철학적 주제가 아니라, 군주제 국가였던 조선시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물이었던 퇴계 선생께서, 당시로서는 26세나 연하인 까마득한 젊은 후학과 논리적이고 호칭부터도 예의를 갖춘 논쟁을 펼쳤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현재 일부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타인을 비하하고 비아냥거리는 문화는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진 문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20세기의 불행한 역사가 가져온 악영향이 심리구조와 언어생활까지 지배하면서 발생한 문화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한국인들은 우리 공동체가 그러한 정신병리학적 증상을 갖고 살아온 공동체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고, 그러한 자각으로부터 새로운 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상호 경칭과 존대말을 사용하면서도, 천하의 "참된 벗"이 될 수 있었던 조상님들의 미풍양속을 다시금 "의식적으로" 추구해볼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는 특히 반말과 존대말이라는 "언어게임"(language game)의 2가지 층위가 매우 직접적인 구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면서 "민주적인"(평등한) 생활문화를 만들려면, 기본적으로 "존대말"로 획일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반말을 사용하는 단계라면, 참다웁게 관계를 통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이었으면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간혹 영어는 존대말이 없어서 민주적이라고 하는 주장도 존재합니다. "민주적"이란 점에서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어는 존대말이 메인 언어게임", 즉 영어는 존대말로 평준화시킨 언어인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영어로 타인을 비하시키려 한다면 "슬렝"(slang: 속어)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게임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민주적이고 다원화된 관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 스스로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언어생활부터 다시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해 "반말을 사용해야만 친해진다"는 편견을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새 진정한 벗들과 형님들과 아우들이 여러분 주변에 모여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참된 선생님과 선배님, 그리고 후배님들과 더불어 즐거운 삶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3. "개인"의 발견과 사회적 체제
이제까지 언어를 통해 살펴본 한국문화의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이 되는 한 철학적 전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회가 "개인"(Individual)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앞에서 "다원주의"나 "다양성"이란 목표를 성취할 도구가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아마도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에 관한 반성이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한국어 사용권에서는 이 문제가 자꾸만 "이기주의"(Egoism)와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어서, 상당히 의미론적으로 오염되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철학이나 경제학의 영역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관한 논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자본주의"를 체제이념으로 도입한 사회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개념의 발전과정에 관한 방대한 사상사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와 체제의 가장 기본적 위치를 점유한다"는 가장 초보적 전제에 관한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논의할 "개인주의"는 철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직면하는 일종의 문화로서의 "개인주의"입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여러 부정적 문화들 및 앞에서 논의한 언어문화의 왜곡현상 등이, 한국사회가 "자본주의"(Capitalism)를 도입하고도, 그것을 생활과 문화 속에서 지지해줄 "개인주의 문화"를 함께 도입하지 못한 데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개인"을 "그냥" 개인으로 보지 못하고, "집단 속에서의" 개인으로 파악하려는 데서 문제가 출발합니다. 아시아권에서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등을 필두로 한 이들이 주장하는 "아시아적 민주주의"라는 것의 핵심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개인"을 그 자체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 속의 개인"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데 주요한 쟁점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집단 속에서의 개인"을 존재케해주는 "집단" 혹은 "공동체"가 이미 중층적 속성을 가진 것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학술적으로 복잡한 토론을 피하고 논의를 좀 단순하게 하기 위해, 다음의 표를 이용한다면 어떤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한 사회의 체제속성을 간단히 살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1]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요소와 그에 대한 태도
평가요소
가장 좌파적일 경우
가장 우파적일 경우
(1) 개인에 대한 관점
집단을 강조
-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개인 존중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2) 경제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부분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유재산권 인정)
사회민주주의 (국가개입 인정)
(3) 평등에 관한 관점
상당한 중점을 둠
온건한 인정 / 혹은 인정안함.
(4) 분배에 관한 관점
완전한 분배를 목표 / 부분 통제
자유방임
(5) 권력구조
민주주의 지향
독재주의 혹은 권위주의가 많음
민주주의 (선거를 통함)
자유주의
위의 [표1]은 편의상 좌우로 극단적인 내용들을 배치한 것으로, 실제의 경우엔 완전한 극단을 선택한 체제는 많지 않습니다. 다만 위의 표에서 각 항목별로 일관되게 좌측을 선택한 체제는 과거의 공산권 국가들과 유사할 가능성이 높고, 우측을 일관되게 선택한다면 이상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인데 양쪽 모두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해를 해보기 위해, 이 표를 이용해 몇 가지 체제를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그 체제의 특성입니다. 또한 그 특성이 특히 강한 경우엔 굵은글씨로 변화시켰습니다.
[사례1] 미국
평가요소
가장 좌파적일 경우
가장 우파적일 경우
(1) 개인에 대한 관점
집단을 강조
-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개인 존중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2) 경제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부분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유재산권 인정)
사회민주주의 (국가개입 인정)
(3) 평등에 관한 관점
상당한 중점을 둠
온건한 인정/혹은 인정안함.
(4) 분배에 관한 관점
완전한 분배를 목표 / 부분 통제
자유방임
(5) 권력구조
민주주의 지향
독재주의 혹은 권위주의가 많음
민주주의 (선거를 통함)
자유주의
보시다시피 미국도 완벽하게 우파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에서 우파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사례 2] 박정희 정권 시대의 한국
평가요소
가장 좌파적일 경우
가장 우파적일 경우
(1) 개인에 대한 관점
집단을 강조
-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개인 존중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2) 경제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부분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유재산권 인정)
사회민주주의 (국가개입 인정)
(3) 평등에 관한 관점
상당한 중점을 둠
온건한 인정 / 혹은 인정안함.
(4) 분배에 관한 관점
완전한 분배를 목표 / 부분 통제
자유방임
(5) 권력구조
독재주의 혹은 권위주의
민주주의 (선거를 통함)
자유주의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비교해서 파란색 부분들이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포진해 있습니다.
[사례 3] 노무현 정권 시대의 한국
평가요소
가장 좌파적일 경우
가장 우파적일 경우
(1) 개인에 대한 관점
집단을 강조
-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개인 존중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2) 경제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부분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유재산권 인정)
사회민주주의 (국가개입 인정)
(3) 평등에 관한 관점
상당한 중점을 둠
온건한 인정 / 혹은 인정안함.
(4) 분배에 관한 관점
완전한 분배를 목표 / 부분 통제
자유방임
(5) 권력구조
민주주의 지향
독재주의 혹은 권위주의가 많음
민주주의 (선거를 통함)
자유주의
이 표를 통해서 보면 박정희 정권에 비해 노무현 정권은 "평등"과 "분배"에서 좀더 강조가 된 것 외에는 훨씬 더 미국형 우파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례 4] 북한
평가요소
가장 좌파적일 경우
가장 우파적일 경우
(1) 개인에 대한 관점
집단을 강조
-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개인 존중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2) 경제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부분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유재산권 인정)
사회민주주의 (국가개입 인정)
(3) 평등에 관한 관점
상당한 중점을 둠
온건한 인정 / 혹은 인정안함.
(4) 분배에 관한 관점
완전한 분배를 목표 / 부분 통제
자유방임
(5) 권력구조
독재주의 혹은 권위주의
민주주의 (선거를 통함)
자유주의
북한 정권이 얼마나 불량한 좌파국가인지는 이 표의 파란색들이 몰린 양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미국과 반대되는 체제 중 하나일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위의 한국의 두 정권과 비교하면, 노무현 정권보다는 박정희 정권이 북한과 더 유사하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인 캄보디아도 아울러 살펴봅니다.
[사례 5] 훈센 정권의 캄보디아
평가요소
가장 좌파적일 경우
가장 우파적일 경우
(1) 개인에 대한 관점
집단을 강조
-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개인 존중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
(2) 경제체제
공산주의
사회주의 (부분적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유재산권 인정)
사회민주주의 (국가개입 인정)
(3) 평등에 관한 관점
상당한 중점을 둠
온건한 인정 / 혹은 인정안함.
(4) 분배에 관한 관점
완전한 분배를 목표 / 부분 통제
자유방임
(5) 권력구조
독재주의 혹은 권위주의
민주주의 (선거를 통함)
대체로 앞의 사례들과 비교하면, 뭐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형태로 나타납니다만, 그나마 박정희 정권 시대의 한국과 유사한 체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사례들에서 우리의 논의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미국만이 유일하게 보여주는 특성인 "개인"에 대한 완전한 존중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권리와 인격적 존중은 물론이고, 문화적(일상생활) 차원에서도 독자적 존재로 인정받는 것을 포함합니다. 미국이 그나마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성"이 잘 인정되는 국가 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개인"이라는 근본적 가치를 --- "집단 속의 개인"이 아니라 "그냥" 개인으로서 ---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양성의 인정은 실제로 미국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경제성장과 무관하게 중국에 대한 미국의 우위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아주 희귀한 영역에 대한 연구, 즉 아프리카의 어느 작은 부족에 대한 연구나, 아니면 불교나 인도철학, 혹은 과학기술의 가장 주요한 연구분야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정 정도 적대적 긴장관계에 있는 이슬람이나 중국 자체에 대한 연구조차, 그 최고 전문가들을 찾아보면 그들이 미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은 다양성의 존중이란 요소를 무기로 삼아, 지난 100년간 세계 모든 지역과 분야들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자신의 사회 속으로 빨아들인 국가입니다. 특정 분야에서 미국이 가진 전문가의 수가 소수인 경우도 많습니다만, 그러한 분야에서조차 그 중 일부는 일당 백의 연구력을 가진 일류 학자들이 즐비합니다. 따라서 최근 중국의 패권국 부상에 대한 예측과 무관하게, 이러한 문화적 기반 없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경제성장만으로는 향후 100년 정도는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개인의 존중"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체제의 근간이라 여겨, 이를 위반하거나 침해할 경우의 제재 역시 강력합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세계 여타 지역에서도 중요시하는 "인권침해"와 "사유재산권 보호"는 물론이고, 사소한 "사생활침해"나 "스토킹", 심지어는 매춘부들의 개인적 권리들과 초상권까지도 명예훼손과 관련되는 중요한 범죄로 다루고 있고, 그 민형사적 제재 역시 강력합니다.
가령 학교 내의 이지메현상 같은 것 역시 다수의 관점에서 개인을 유린하는 것이므로,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강력한 처벌대상이 됩니다. 한국의 경우 다소 달라졌다고는 해도 학교폭력을 폭력사범으로 입건하는 일도 많지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물론 학교폭력에는 학생들이 가해자인 경우도 있고 교사들이 가해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폭력을 교육수단으로 사용하는 교사는 가르치는 자질이 부족한 교사이므로,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더 이상 교사직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특히 교육을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들의 행동은 수많은 학생들에게 폭력성 중독의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가장 유능한 교사를 투입했는데도 교육적 성과가 없는 학생 역시, 학교를 떠나게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정말 좋은 교사들은 학습동기 부여에 교수법의 우선순위를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료 학생에 대해 가혹행위를 한 폭력유발 학생 역시 다른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동시에, 약자의 가공할만한 공포감을 덜어주고 보호하기 위해, 체제전복 사범에 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학생들 사이의 이러한 사태를 방치하면, 가해자들은 야비한 시민으로 성장하고 피해자들은 비겁한 시민으로 성장하여, 사회 전체의 건전성을 해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해자-피해자 구조에 직접적 연루에서 벗어난 대다수 중간지대 학생들은, 불합리한 체제에 순응하고 비굴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학교폭력은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한국에서 기존에 "보수진영"이라 불리던 정파와 "진보진영"이라 불리던 정파 모두, 참다운 의미에서 개인을 인정하고 존중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도의 차이는 상당합니다만 우리가 만족할만한 수준에는 있지 못하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개인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 제도적 존중 차원에서, 다시 더욱 나아가 일상적 문화로 자리잡는 것을 저는 "개인주의 문화의 정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훈련이 개개인마다 이뤄지는 단계가 되면,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거나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되어서도, 상호간 당당하고 존중받는 방식의 유연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주의"의 부수적 산물로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비로소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개인주의"가 바로 바람직한 "다문화"를 실현시켜 줄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크메르의 세계"의 운영자로서 제가 지향하는 체제를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물론 회원님들 개인마다 다소 차이가 나거나 다른 스펙트럼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은 이 글을 통해 밝혀놓음으로써 향후 보다 건설적 토론이 가능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는 방향은 "중도 우파적 관점"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위의 표들 중 미국의 사례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무한경쟁"을 주장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 될 것입니다. 제가 "무한경쟁"을 주장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 현상이 이제 거의 통제가 불가능한 추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한된 경쟁"이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긴 하지만, 동시에 비범하게 우수한 소수의 발걸음을 묶어두는 족쇄가 될 수도 있어, 인류가 가진 잠재성을 한계지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을 존중하되 그것이 "공정한 룰"을 통해야 된다는 점에서, 위의 표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공정성"(fairness)을 대단히 강조하는 체제를 선호합니다. 무한경쟁 상태에서 공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덩치 큰 주체가 모든 것을 독식하게 됩니다. 아니면 조금 더 후진적인 경우엔 권력층과 가까운 이들이 독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진영은 "공정성"에 대한 의식이 거의 결여된 수준에 있어, 우리가 우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한국의 진보진영의 경우, 보수진영에 비해 "공정성"에 대해 보다 많이 강조를 하긴 하지만, 이 요소를 체제의 근간으로 위치짓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가령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에게 실제로 어떤 이익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본사가 "한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S그룹"의 L모 회장이 저지른 경제 범죄는, 만일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징역 몇년에 해당할지 상상이 안되고, 혹은 그 기업이 분해당했을 가능성까지 존재합니다. 게임의 룰을 위반한 범죄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전복적 범죄이기 때문에, 그 제제가 즉각적이고 과감하게 이뤄집니다.
따라서 "크메르의 세계"가 추구하는 이념의 골격은
(1) 개인주의
(2) 자유로운 무한경쟁의 보장
(3) 공평한 게임의 법칙 유지를 위한 공정성 확보
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적 원리로서
(4) 강력한 사법제도 유지
를 중시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관점의 제시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우파가 나아갈 새로운 모델을 제안해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시도는 다문화 사회로 접어드는 한국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중 하나이길 희망해봅니다.
첫댓글 "다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우리들"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군요. 대단한 명문입니다.^^* 글 읽어 보면서 저 자신을 새롭게 되돌아 보고 있습니다.
공동 운영자께서 이런 과찬을 하시면, 우리 카페가 자화자찬하는 셈이라 부끄러워 집니다~ ^^ 하여간 카페 운영에 있어서, 한 단계의 매듭을 좀 지어보는 과정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500인 회원시대의 컬럼에서 좀더 정리토록 하겠습니다..
이 글 공감이 많이 됩니다..
쌩스 어랏~
동영상 보완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