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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二는 自財를 不悋하고 他物을 莫求어다
기이 자재 불린 타물 막구
三途苦上에 貪業이 在初요 六度門中에 行檀이 居首니라
삼도고상 탐업 재초 육도문중 행단 거수
慳貪은 能防善道요 慈施는 必禦惡徑이니 如有貧人이 來求乞이어든 雖在窮乏이라도 無悋惜이니라
간탐 능방선도 자시 필어악경 여유빈인 내구걸 수재궁핍 무린석
來物一物來요 去亦空手去라 自財도 無戀志어니他物에 有何心이리오 萬般將不去요 唯有業隨身이라
내물일물래 거역공수거 자재 무연지 타물 유하심 만반장불거 유유업수신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니라
삼일수심 천재보 백년탐물 일조진
頌曰
송왈
三途苦本因何起오 只是多生貪愛情이로다
삼도고본인하기 지시다생탐애정
我佛衣盂生理足커늘 如何蓄積長無明고 其三은 口無多言하고 身不輕動이어다
아불의우생이족 여하축적장무명 기삼 구무다언 신불경동
身不輕動則息亂成定이요 口無多言則轉愚成慧니 實相은 離言이요 眞理는 非動이니라
신불경동칙식란성정 구무다언칙전우성혜 실상 이언 진리 비동
口是禍門이니 必加嚴守하고 身乃災本이니 不應輕動이니라 數飛之鳥는 忽有羅網之殃이요
구시화문 필가엄수 신내재본 불응경동 수비지조 홀유라망지앙
輕步之獸는 非無傷箭之禍니라 故로 世尊이 住雪山하사 六年을 坐不動하시고 達摩가
경보지수 비무상전지화 고 세존 주설산 육년 좌부동 달마
居少林하사 九歲를 黙無言하시니 後來參禪者인들 何不依古蹤이리오
거소림 구세 묵무언 후래참선자 하불의고종
頌曰
송왈
身心把定元無動하니 黙坐茅菴絶往來어다
신심파정원무동 묵좌모암절왕래
寂寂寥寥無一事하니 但看心佛自歸依어다
적적요요무일사 단간심불자귀의
其四는 但親善友언정 莫結邪朋이어다
기사 단친선우 막결사붕
鳥之將息에 必擇其林이요 人之求學에 乃選師友니 擇林木則其止也安하고 選師友則其學也高니라
조지장식 필택기림 인지구학 내선사우택림 목칙기지야안 선사우칙기학야고
故로 承事善友를 如父母하며 遠離惡友를 似寃家니라 鶴無烏朋之計어니 鵬豈鷦友之謀리오
고 승사선우 여부모 원리악우 사원가 학무오붕지계 붕기초우지모
松裏之葛은 直聳千尋이요 茅中之木은 未免三尺이니 無良小輩는 頻頻脫하고 得意高流는
송리지갈 직용천심 모중지목 미면삼척 무량소배 빈빈탈 득의고류
數數親이어다
삭삭친
頌曰
송왈
住止經行須善友하야 身心決擇去荊塵이어다
주지경행수선우 신심결택거형진
荊塵掃盡通前路하면 寸步不移透祖關하리라
형진소진통전로 촌보불이투조관
반갑습니다. 오늘 2월 28일 2월달 마지막 날이네요
오늘 염화실 인터넷 방송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자경문 열 가지의 경책 조항 중에서 오늘은 두 번째 其二(기이)는 自財(자재)를 不悋(불린)하고 他物(타물)을 莫求(막구)어다 내용부터 할 차례입니다. 서론과 제1문이 끝났고,
제 2문 其二(기이)는 자기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말고 또 다른 사람의 물건을 구하지 말지어다. 그런 말입니다.
수행자로서 되도록이면 탐욕을 부리지 말고 검소하고 무소유로서 청빈하게 청빈으로써 어떤 편안함을 삼는 그런 자세를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경문이니까? 야운스님이 자기 자신을 두고 아주 심하게 경책하는 그런 내용이죠.
三途苦上(삼도고상)에 貪業(탐업)이 在初(재초)요
지옥, 아귀, 축생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지옥과 같은 삶, 아귀와 같은 삶, 축생과 같은 삶, 그러한 인생
지옥 같은 인생, 축생과 같은 인생, 아귀와 같은 인생, 따라서 또 아수라와 같은 인생 그러한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왜 그러한 삶이 전개되는가 하면은
貪業(탐업)이 在初(재초)라 그랬습니다.
탐하는 그런 업이 맨 처음에 있다
물론 다른 원인도 있지만 대다수가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다.
첫째 물질에 대한 것 여기에는 물질에 대한 것을 두고 하는 소리죠.
명예에 대한 것, 벼슬에 대한 것, 대접받고자 하는 것, 어른 노릇 하려고 하는 것, 모두가 자기 분이 있고, 자기의 복이 있으면 물질이든 벼슬이든 모든 부귀영화가 자연스럽게 오죠.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자기 지은 그런 공이 있다면 저절로 오게 돼 있는데...
그러한 인연을 모르고, 그러한 이치를 모르고, 또 그러한 자기 분을 모르고 무턱대고 욕심가는 대로 그렇게 탐하다 보면 모두가 지금 뭐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 경전상에 나타나는 그런 설사 그런 지옥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서 그대로 지옥과 같은 그런 삶을 겪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대게 이제 벼슬이 높은 사람 또 많이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대개 많이 가죠. 보면, 평생 겪어서는 안 될 그런 수모도 겪습니다.
보면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고 또 대게 많이 가진 사람들이에요.
크게 뭐 벼슬도 없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수모를 겪지 않습니다.
그냥 조금 가난하다 보니까 불편한 점은 있을지언정 그렇게 뭐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은 그런 삶은 겪지 않는 거죠.
여기에 이제 그런 표현입니다.
六度門中(육도문중)에 行檀(행단)이 居首(거수)니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우리 불자가 닦아야 할 여섯 가지 덕목
이건 불자뿐만 아니라 모든 좀 의미 있게 그리고 보람되게 좀 사람답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이 실천하는 여섯 가지 덕목을 육바라밀이라고 그러는데 그중에서 첫째가 보시 하는 일이다.
행단, 단바라밀은 행하는 것이 머리에 있다. 그런데 단바라밀은 보시 바라밀이죠.
보시를 행하는 것이죠. 베푸는 일을 하는 것이 맨 머리에 있다 그랬습니다.
보시에 대해선 불자들은 기본이죠. 상식이죠.
법보시가 있고 재보시가 있고 무애보시, 또 무재칠시라 해서 재물이 들어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일곱 가지 보시라든지 이런 등등을 많이 소개되어서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니까? 여기는 자기 재물에 대한 아끼는 마음이 없어야 되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재물 이걸 괜히 탐욕부리지 말라 이거죠.
순리로 모든 것이 자기 지은 업대로 돌라오게 되어있고
순대로 모든게 풀려나가야 자기 재산이 되는 것이지
욕심만 가지고 자기분도 아니고 자기능력도 아니고 자기복도 아닌 것을 억지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하다 보면
으례히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런 사실들을
慳貪(간탐)은 能防善道(능방선도)요
아끼고 탐하는 것
아낀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재물을 아끼는 것이고 탐하는 것은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죠.
대게 자기 것 아끼는 사람은 대개 남의 것을 탐합니다. 그리고 남에 것을 탐하는 사람 자기 것 남 안줍니다. 잘 아낌이다. 대게 아끼죠.
그게 늘 따라다니죠. 慳貪(간탐)이라 그래요
시식문에 보면
破除幹貪(파제간탐) 法財具足(법재구족)이런 말이 있습니다.
간탐을 깨뜨려버리고 법의 재산을 구족하도록 하라 영가를 보고 타이르는 말인데
제발 아끼고 탐하는 자기 물건을 아끼고 또 남의 것을 탐하는 그런 마음을 다 깨뜨려 버리고 법의 재산을 구족하라
진리의 재산 이치의 재산, 깨달음의 재산, 지혜의 어떤 눈을 갖추는 그러한 재산을 구족하도록 하라 라고 이생을 마지막 떠나는 영가에게 그런 당부를 하지요 그렇습니다.
자기 것 너무 아끼는 사람은 남의 것을 탐하고 남의 것을 많이 탐하는 사람은 으례히 남 주줄 모른다.
참 늘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能防善道(능방선도)요
좋은 삶의 길, 아주 바람직한 아름다운 인생길을 능히 막아버린다 이말 입니다. 선도
慈施(자시)는 必禦惡徑(필어악경)이니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자비로서 베푸는 것은 반드시 악한 길을 막아 버리느니라.
악한 길을 막아버리면 좋은 길 선도만 있게 되어 있죠. 악도 선도 이렇게 추상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만은
선도라고 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삶의 길을 말하는 것이고 惡徑(악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분에 맞지 않아서 허덕이는 삶이라든지 이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외 또 따라오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구체적인 좋은 일과 구체적인 고통스러운 나쁜 일들도 물론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는 말이죠.
如有貧人(여유빈인)이 來求乞(내구걸)이어든
만약에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와서 구걸하거든
雖在窮乏(수재궁핍)이라도
비록 궁핍한데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이 비록 줄 것이 없고 궁핍하더라도
無悋惜(무린석)이니라
아끼지 말라, 힘닿는데 까지 베푸어 주는 그런 마음을 가지라 그랬습니다.
각축이 심한 우리 현실, 세상살이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말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늘 베풀려고 하는 그런 마음 그게 중요하죠.
사실 많이 베풀수록 당장에 내 주머니가 빌지는 몰라도 결국은 말하자면 거기서 복이 생겨서 더 많은 소득이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계산상으로는 임시계산으로는 손해인 것 같지만은 좀 장기적인 계산으로 보면 아주 이익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그런 이치를 믿지 않는다면 참 불교 헛공부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인과의 도리고 모든 이치가 그렇게 되어있죠.
우리가 씨앗 예를 들어서 벼를 하나 심어면 거기에서 맺히는 열매가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것이 그래요 씨앗하나 심어놓으면 그거서 맺히는 열매가 몇 배가 되거든요
물론 잘 가꾸어야 되겠죠. 잘 가꾸어야 되겠지만 으례히 열매는 몇 배, 몇 십배, 몇 백배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 이걸 우리가 믿고 산면은 세상은 좀 부드럽고 살만하고 또 베푸는 우리 마음이 참 편안하죠.
來物一物來(내물일물래)요 去亦空手去(거역공수거)라
올 때는 하나의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고, 갈 때는 또한 빈손으로 간다.
절에서 空手來 空手去(공수래공수거)라고 얼마나 우리가 자주 듣는 소리입니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올 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안이 했고,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간다.
來物一物來(내물일물래)요 去亦空手去(거역공수거)라
이 구절 하나만 외워놔도 참 좋을 것입니다.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베푸느냐? 이문제가 늘 마음에 걸리죠.
그래서 잡보장경인가요, 거기에는 無財七施(무재칠시)라 해서
뭐 일곱 가지 가진 것이 없어도 우리 마음만 잘 쓰면 충분히 布施(보시)를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죠.
眼施(안시)라 해서 눈으로써 상대를 보는데 아주 좀 경계하는 눈으로 볼게 아니라 아주 친화적인 마음을 가득 담아서 우호적인 마음을 가득 담아서 사람을 보라
和顔施(화안시)라고 해서 아주 화기어린 얼굴로써 남을 대하라
그대로가 좋은 보시거든요. 어쩌면 돈보다 더 좋은 보시일지 모릅니다.
아주 평화로운 그런 얼굴빛으로 모나리자 미소 같은 그런 얼굴빛으로 사람을 대한다.
평소 혼자 있을 때보다도 사람을 대할 때 그것도 다 좋은 보시라는 것입니다.
言辭施(언사시)라 해서 말을 늘 겸손하고 남을 칭찬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돈 들지 않고도 아주 좋은 보시 아닙니까.
오히려 돈 보시하는 것보다도 더 복을 많이 얻고 더 상대에게 필요한 보시일 것입니다.
가족관계에서 더 그렇죠. 남에게 크게 뭐 사실은 그런 것이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가족관계, 이웃관계, 친척관계, 형제관계 이런 가까운 사람들끼리 그런 보시를 할 줄 알아야 돼요.
늘 온화하고 웃는 얼굴빛으로 부드러운 말로 늘 이제 상대를 칭찬해지는 말로
그리고 또 床座施(상좌시)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자리라고 하는 건데요.
좋은 자리에 먼저 차지하려고 하지 말고 좋은 자리는 양보하고 좋지 않는 자리에 자기가 앉는 것.
우리 신도님들 보면 부처님 앞에가 좋은 자리고 복을 많이 받는 자리인 줄 그렇게 참 잘못 알고 있죠.
보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제일 부처님 가까운 곳에 초파일 등 달 때도 그렇죠.
제일 부처님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제일 복 많이 받는 줄 알고 기도할 때도 부처님 정면하고 가까운 곳에 앉는 것이 제일 복을 많이 받든 줄 알지만은 어떻게 그렇겠습니까? 반대죠.
아주 어둡고 외지고 부처님하고 거리가 멀고 하는 그런 곳에서 아주 열심히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복을 더 많이 받지 딱 부처님 정면에 앉아가지고 뭐 얻을 게 있다고 부처님이 무슨 떡 나눠주듯이 그렇게 나눠주는 것 같으면 모르지 더 큰 것 잡기 위해 앞에 있으면 빨리 얻을지 모르지만 불교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그런 천박한 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런 것도 상좌시라해서 자리를 보시 하는 거다. 그랬습니다.
자기 앉는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
물론 시내버스나 전철 타고 갈 때 좋은 자리는 노약자들 앉게 배려하는 그런 마음 훌륭한 보시 아닙니까?
뭐 돈이 있어야 됩니까? 그게 그런 보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말로 하는 보시
옛날에는 나그네가 다니다가 어디에 잠자리가 참 불편하죠. 그럴 때 房舍施(방사시)라 해가지고 하루 밤 재워주는 것 이런 것도 아주 좋은 보시라고 했습니다. 하루 밤 재워주는데 그것 뭐 돈 들 까닭이 없죠.
요즘은 그게 사실 가정집에서 낯선 사람을 재워 준다게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옛날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고,
또 뭐 가져갈 것도 없고, 또 가져갈 그런 관계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나그네에게 하룻밤 재워주는 보시는 큰 보시라고 경전에는 나와 있습니다.
이런 등등 보시도 얼마든지 있는데 꼭 보시하면 돈부터 떠올리고 재산부터 떠올리고 주머니부터 생각하게 되고 하는 그런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또 그런 보시 보다 도 더 돈도 안 들고 아주 우수하고 값지고 한 보시가 뭐 있죠.
法布施(법보시)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지가 믿음을 가지고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이치 하나만이라도 상대에게 잘 일러준다 이거죠. 뭐 인연의 이치 같은 것이 좋죠.
예를 들어서 마성비구가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諸法從緣生(제법종연생) 諸法從緣滅(제법종연멸)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고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진다.
부처님은 늘 그런 말씀을 하신다. 인연에 대한 이치 일체가 다 연기의 도리로써 생성소멸 변화 발전한다는 그런 이치를 조근 조근 알아듣게 이렇게 이야기 해주면
설사 집안에 사업이 망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인연으로 이해시켜주고
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도 또 인연이치를 가지고 이해시켜주고 그렇게 하면 얼마나 훌륭한 보시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돈으로 계산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결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런 아주 값지고 멋진 보시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법보시 이 세상에서 훌륭한 보시가 많이 있지만 법보시가 제일이다
공양도 별별 공양이 많이 있지만 법공양이 제일이다. 이런 말씀을 누누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정통으로 전통적이고 정통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우리 염화실 법우님들은 좀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또 소신을 확실히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노력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自財(자재)도 無戀志(무연지)어니
자기 재산도 뭐 그렇게 크게 아끼고 사랑하는 뜻이 없거니
他物(타물)에 有何心(유하심)이리오
다른 사람의 물건에 무슨 마음이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특히 이제 야운스님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萬般將不去(만반장불거)요 唯有業隨身(유유업수진)이라
만 가지를 다 가져가지 못함이요 오직 업만 몸을 따라갈 뿐이다.
참 기가 막힌 이야기죠. 우리가 죽어서 가져가는 게 뭐 있습니까?
수억 짜리 들어있는 통장을 아무리 손에 쥐고 죽은들 그건 뭐 명 떨어지고 나면 그 통장 자식들이 서로 빼앗으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 통장 쥐고 죽은들 가져가 집니까? 업만 가져가는 거죠. 거참.
다음 생에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재산이 아니다.
다음 생에 가져갈 수 있는 공덕, 또 진리에 대한 어떤 깨우침,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선행을 많이 해서 닦은 공덕 이것만이 다음 생에 가져가는 거죠. 이게 진짜 재산이죠.
통장 그것 손에 쥐고 죽어봐요 그것 어디 가져가 집니까.
논밭 뭐 아무리 수백억 수천억 재산이 자기 앞에 등기되어 있다 한들 그게 다음 생에 까지 등기이전 됩니까?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萬般將不去요 唯有業隨身이라 만 가지를 다 가져가지 못함이요 오직 업만 그 몸을 따라갈 뿐이다.
三日修心(삼일수심)은 千載寶(천재보)요 百年貪物(백년탐물)은 一朝塵(일조진)이니라
하...이말은 아주 마지막으로 확인 사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아주 천하에 명구 중에 명구죠.
불교에 이글이 소개되고 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새기고 곳곳에 이것이 소개되는 그런 구절이죠.
삼일동안 마음 닦은 것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 동안 물질을 탐하는 것은 하루아침의 먼지가 된다.
제가 그렇다고 꼭 무슨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말은 아닌데.. .
어릴 때 내 또래 되는 어떤 마을 이웃에 사찰이 있었는데 그 사찰에 자주 놀러 갔습니다.
내 또래 되는 동자승이 있었습니다. 뭐 16~7세정도 되니까 뭐 걸핏하면 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랬는데
하루는 그 스님이 이 초발심자경문의 이 구절을 소개하는 거예요.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니라
이 소리를 딱 듣고는 내가 그 동안도 좋은 말 많이 들었지만은 이것을 문자로 젊은 동자스님이 문자 쩍 이렇게 외우면서 해석을 해주는데 그만 가슴이 쏴~하다가 나중에는 하~ 바로 이거구나
내가 공부할 길이 바로 이런 길이구나 하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또 그다음에 이어서 소개하는 글이 그런 글이 있습니다.
장자를 표현한 장자의 글인데
畵虎畵皮難畵骨(화호화피난화골) 知人知面不知心(지인지면불지심)
사람이 호랑이를 그리는데 가죽은 그리고 뼈는 그리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을 아는데 그 얼굴을 알았지 그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하는 그런 소리를 또 이어서 하는 거야.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에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畵虎畵皮難畵骨(화호화피난화골) 知人知面不知心(지인지면불지심)소개 받고는 아주 완전히 마음을 굳혔죠.
어떻게 하면 출가 입산하는 기회를 만들까? 하고 그것만 그때부터 궁리하게 된 거에요.
딴생각 아무 것도 못하고 오로지 기회만 생각하는 거죠. 기회를 잘 타야 되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 구절이 출가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지금도 저의 고향부근에 조그마한 절을 해서 살고 계신답니다.
나는 그 외 한번 딱 만나고 그다음에 이제 승려가 되고 한번 만나고 그 후로는 못 만났는데 그 지역의 출신 스님들에게 간혹 물어요. 물으면 그 스님에 대해서 내력을 잘 아시는 스님이 있어서 소식은 자주 듣습니다만 자경문의 이 구절이 저하고 인연이 깊고 뭐 저 뿐만 아니라 이 글은 많은 곳에 소개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 역시 저처럼 감동을 받지 않을까 이런 생각합니다.
게송에 가로대
三途苦本因何起(삼도고본인하기)오
지옥, 아귀, 축생 삼도의 고통의 근본은 무엇을 인해서 일어나는가?
지옥 같은 생활, 축생과 같은 생활, 아귀 같은 생활은 도대체 어째서 그런 생활이 우리에게 닥쳐오는가?
只是多生貪愛情(지시다생탐애정)이로다
다만 다생동안 많은 생을 탐착하고 애착하는 마음 때문이다.
또 우리가 팔만 사천 번 뇌중에서 108번뇌, 거기서도 10가지 번뇌, 10가지에서도 가장 큰 삼독 번뇌를 제일로 치죠. 그중에서도 탐, 진, 치,
탐 탐욕 하는 것을 첫자리 놓습니다.
팔만 사천 번 뇌중에서 탐욕을 맨 첫 자리에 놓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제 분노 화내는 것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화내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어리석음 이런 것들이 있는데 여기서도 탐욕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여러 번하고 있습니다.
我佛衣盂生理足(아불의우생이족)커늘
우리 부처님께서 수행자에게 내리신 옷, 그것은 가사죠. 승복, 가사, 盂 발우 이것이 살아가는데 충분하거늘
如何蓄積長無明(여하축적장무명)고
어찌하여 재산을 축적해서 무명만 키우는가?
참 절절한 가슴에 파고드는 그런 소리죠
발우하고 가사만 있으면 어디라도 밥 얻어먹는다는 이거야
가사 입고 발우대 들고 나가면 밥한 끼 안줄 사람 이 누가 있느냐 이거죠.
또 한 집에서 한 끼 못 얻어먹으면 칠 가식하면 되는 거고,
일곱 집 이제 한집에 두숟가락씩 얻어서 일곱 집만 빌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이 그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생리족 살아가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이거야
그런데 뭣 때문에 재산만 늘려서 무명을 키우는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수행하는 사람들, 승려 생활하는 사람들의 현실과 생각해보면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런 감이 없진 않습니다만 은
그러나 참~ 신선 같고 그림 같은 뭐 700년 전의 스님생활이긴 합니다. 만은 너무나도 신선 같은 그런 향기가 풍깁니다. 참으로 이것은 향기죠.
이런 향기가 이렇게 전통적으로 남아있고 우리가 100분의 1천분의 일을 따라가지 못 한다 손치더라도
그래도 이런 글을 공부하면서 한번씩 감동하고 마음에 새기고 아~ 참 근사하다. 우리가 그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렇게 살수 있었으면 얼마나 조촐하고 청빈하고 안빈낙도 하는 그런 삶이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그런 생각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인연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其三(기삼)은 口無多言(구무다언)하고 身不輕動(신불경동)이어다
입으로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몸은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그랬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으로써는 말을 많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죠. 물론 세속에 사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좀 뜻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말이 그렇게 많지가 않죠.
그리고 몸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身不輕動則息亂成定(신불경동칙식란성정)이요
몸이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지러운 마음을 다 쉬어가지고 선정을 이루게 되고 그렇죠.
첫째 몸이 좌복위에 탁 앉아서 좌선하고 있어야 중생들은 마음이 들 움직이거든요.
물론 앉자있어도 마음은 움직입니다. 만은 그래도 일차적으로 우리가 방편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몸이 안 움직이고 이렇게 딱 이렇게 앉아있으면 그래도 선정이 아무래도 쉽게 이루어지거든요
경을 읽어도 그렇고 사경을 하나 참선을 하나 염불을 하나 그렇죠.
몸이 막 움직여가지고는 그것이 될 일이 안이지 안습니까?
口無多言則轉愚成慧(구무다언칙전우성혜)니
말이 없을 것 같으면 저절로 어리석음을 굴려가지고 지혜를 이룬다.
어리석은 사람이 말이 많거든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묵묵히 그저 내명이라고 그러죠. 안으로 환하게 밝습니다.
그 뭐 말 많이 해 봐야 자기 밑천만 남에게 들어나고 속으로 딴사람들이 이제 비웃죠.
또 비웃는 줄도 모르고 그냥 떠들어댑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합니까?
그러면은 내 어리석음 더욱더 어리석어지고 지혜는 더 어두워지는 거죠.
實相(실상)은 離言(이언)이요 眞理(진리)는 非動(비동)이니라
실다운 모습은 말을 떠났고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입으로는 말을 하지 말고 몸은 그렇게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하면서
뭐 실상, 어떤 존재의 참모습은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니지요.
어떤 사건도 말로 표현해야 어디 표현이 잘 됩니까
안되지요. 어떤 자기가 느끼고 보고 들은 것을 또 말로써 전달 해봐야 그것이 제대로 안 전달되죠.
전달될 리가 없습니다. 그냥 말이 없는 것이 나아요.
차라리 오해, 오해하면 오해한대로 내버려 둘 일이지 그걸 뭐 바로 이해시키려고 말을 해봐야 오해만 더 깊어질 뿐입니다.
眞理는 非動이니라
참다운 이치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움직이는 것이 진리하고 위배된다 하는 그런 듯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口是禍門(구시화문)이니 必加嚴守(필가엄수)하고
입이라고 하는 것은 재앙의 문이다 이거예요.
말 잘못해서 얼마나 오해와 문제가 많이 생깁니까?
손해도 보고 문제도 생기고 무단히 싸움이 벌어지고 오해생기고 그러죠.
구시화문 불교에서나 유교에서나 참 많이 쓰는 말입니다. 구시화문이다. 참 그야말로 명심보감입니다
뭐 입이라고 하는 것은 재앙의 문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더욱더 엄하게 지키라
身乃災本(신내재본) 이니 不應輕動(불응경동) 이니라
이 몸뚱이라고 하는 것은 재앙의 근본이다
그러니까 함부로 그렇게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數飛之鳥(수비지조) 忽有羅網之殃(홀유라망지앙)이요
자주 나는 새는 수라고 발음 않고 자주라고 한때는 삭이라고 발음합니다.
자주 나는 사는 홀연히 그물에 거릴 그런 재앙이 있고 그렇죠. 자주 날다보면 결국은 그물에 걸릴죠.
輕步之獸(경보지수)는 非無傷箭之禍(비무상전지화)니라
가볍게 걸어다는 짐승은 화살에 상할 재앙이 없지를 않다. 화를 당하게 된다 이거예요.
가만히 숨어 있고, 꼭 움직일 필요가 있으면 움직이지만 덮어놓고 쫓아다니면 짐승도 화살을 맞을 그런 화를 만나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뭐 말을 많이 한다든지 함부로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한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고 재앙만 불러온다. 그리고 공부에 큰 손해다
故(고)로 世尊(세존)이 住雪山(주설산)하사 六年(육년)을 坐不動(좌부동)하시고
세존께서 설산에 계시면서 六年을 坐不動(육년을 좌부동)이라 육년을 앉아서 움직이지 안이했다.
물론 부처님의 생애를 우리가 읽어보면 많은 스승을 찾아 여기 저기 다녀지만은 그래도 이제 이것을 통칭 설산에 들어가서 육년간 고행을 했다 이렇게 알려져 있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뜻입니다.
6년간 가만히 있어서니까 그게 이제 본보기다 이것입니다.
達摩(달마)가 居少林(거소림)하사
달마대사는 소림에 계시면서
九歲(구세)를 黙無言(묵무언)하시니
9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6년간 설산에서 앉아계신 것은 신 몸이 움직이지 안이한 것을 뜻하는 것이고
달마대사가 소림사 달마굴에 계시면서 9년을 계신 것은 말이 없음을 표한 것이다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뱃대를 했는데 참~ 아주 배대도 잘 했고 아름다운 글로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後來參禪者(후래참선자)인들 何不依古蹤(하불의고종)이리오
뒤에 참선하는 사람들인들 어찌 옛 자취를 의지하지 아니 하리오
그러니까 우리 모두도 옛 자취를 의지해서 살아야 된다.
야운스님은 조사관문이라든지 참선이라든지 또 관문이라든지 조관이라든지 조사관문 공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자주 쓰시는 걸로 보아서 반드시 고려 말이니까
전통적인 간화선법을 수행하는 그런 스님으로 미루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선하는 사람이라는 더욱더 말이 없어야 하고, 몸이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거죠.
뭐 해제했다고 막 그냥 돌아다니고 어디 멀리까지 여행을 하고 그래 가지고 뭐 결제 중에 조금 마음안정 시켜놓은 것을 다 흔들어가지고 산통 다 깨버리고 그래 가지고 공부 하나마나 하는 이런 상황들이 참 많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공부에 매진하는 이들은 이런 가르침을 늘 가까이 두고 읽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기에 경허스님께서 평생을 읽으셨다고 합니다.
천하의 대선지식인 경허스님께서 하~ 머리가 아주 영리하고 천재시고 그래 가지고 동학사에서 강사하시다가 발심해서 참선해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그 분의 글이 얼마나 뛰어납니까?
그런 분인데도 평생을 초발심자경문을 옆에 두고 늘 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글들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됐고, 표본이 됐겠습니까?
그다음에 게송
身心把定元無動(신심파정원무동)하니
몸과 마음을 잡아 안정시켜 원래 동함이 없으니
黙坐茅菴絶往來(묵좌모암절왕래)어다
동함이 없게 하고 묵묵히 모암에 앉아서 잔디로 지은 집에 앉아서 왕래를 끊을 지어다
뭐 번듯한 그런 기와집 고래 등 같은 참선방에 산 것이 아니지요.
茅菴(모암) 그야말로 잔디로 얽어서 만든 그런 그야말로 토굴이죠.
흙을 파서 언덕배기에 흙을 파서 겨우 드나들만한 그런 모암에 앉아서 왕래를 끊고 공부를 했다.
寂寂寥寥無一事(적적요요무일사)하니
고요하고 고요해서 아무 일도 없으니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어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
뭐 말 안하고 행동 안하고 하니까 번거롭게 온갖 반연을 맺어가지고 오느니 가느니 오라느니 가라느니 하는
그런 일들이 전혀 없는 거죠.
그래서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아서 스스로 귀의한다. 그렇습니다.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 참 좋은 말이죠.
身心把定元無動(신심파정원무동)하니 黙坐茅菴絶往來(묵좌모암절왕래)어다
寂寂寥寥無一事(적적요요무일사)하니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어다
다만 마음의 부처를, 마음의 부처를 본다 이거야
이것이 선사상의 기본이죠.
내 마음이 부처다 하는 그런 정신 하에서 거기에서 귀의하고 하는 것이지
뭐 그저 보통 일반적인 신앙생활처럼 낮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죠.
其四(기사)는 但親善友(단친선우)언정 莫結邪朋(막결사붕)이어다
다만 선한 벗을 선우, 선지식도 좋고요 선한 벗을 친근히 하고 삿된 벗을 맺지를 말라
친구를 잘 만나야 공부를 이룬다. 그랬어요.
생아자는 부모요. 성아 자는 붕우라는 그런 말이 있죠.
생아 나를 나은 사람은 부모고, 나를 나 되게 하는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붕우, 벗이다. 여기도 만찬가지입니다.
鳥之將息(조지장식)에
새가 장차 쉬려고 할 때
必擇其林(필택기림)이요
반드시 그 숲을 선택을 하고
人之求學(인지구학)에 乃選師友(내선사우)니
사람이 공부하려고 함에 이에 스승과 벗을 선택한다. 그렇죠.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벗을 또한 잘 만나야 됩니다. 도반을 잘 만나야 되는 거예요.
도반 잘못 만나면 놓으면 내 놀러 다니다 볼 일 다보고 뭐 승속을 막론하고 마찬가지 입니다.
擇林木則其止也安(택림목칙기지야안)하고
숲과 나무를 새가 쉬려고 할 때 잘 선택을 해서 앉으면 그 그침이 거기서 쉬는 것이 편안해
그렇지 않고 뭐 차가 왔다 갔다 하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길목의 어떤 나무위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자기를 헤치지나 않을까 늘 불안하죠. 편안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는 잠깐 쉬었다 가더라도 그 숲이나 나무를 잘 보고 선택해서 앉습니다. 잠깐 앉는데도 그래요.
그런데 평생을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스승과 벗을 그리고 다니는 사찰 그 사찰의 지도를 맡은 스님들의 사상 이런 것들을 우리가 선택해서 하지 않는 다면 이건 큰 문제가 있습니다.
종교 안 믿어도 되는데 공부 안 해도 되는데 거기다 더 보태어서 우리가 종교를 믿고 불교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 잘 선택해서 해야 한다. 이건 철칙입니다.
選師友則其學也高(선사우칙기학야고)니라
스승과 벗을 잘 선택한 즉은 其學也高(기학야고)그 공부가 높아진다 이거야
소견이 뚜렷해지고 아주 밝아지고 정상적이고 모든 것이 전통적이고 정통적이고 그래서 바른 믿음 바른 이해 바른 실천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 스승과 벗을 잘 만나야 할 필요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故(고)로 承事善友(승사선우)를 如父母(여부모)하며
그런 까닭에 선한 벗 받들어 섬기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부모 받들어 섬기듯이 하고
遠離惡友(원리악우)를 似寃家(사원가)니라
나쁜 친구 멀리 떠나버리기를 원수의 집과 같이 하라
원수 집이 있으면 한동네 같이 살기 싫죠. 이사 가버리죠.
그렇듯이 나쁜 벗은 그렇게 원수를 멀리 하듯이 그렇게 하라
鶴無烏朋之計(학무오붕지계)어니
학은 까마귀하고 벗할 생각이 없죠.
고고한 학이 어떻게 새까만 까마귀하고 친구하겠습니까.
鵬豈鷦友之謀(붕기초우지모)리오
붕새, 한 번을 날면 팔만리의 파도를 일으키면서 구만리장천을 나는 대붕새가 어찌 뱁새와 벗할 그런 생각이 있겠는가? 참 근사합니다. 너무 아주 근사해요. 자경문 같이 멋진 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번 우리가 감동을 받음으로 해서 그래도 내 자신을 돌아보고 또 사람을 만날 때 이런 글이 생각이 나서 우리도 좀 주위를 기울이게 되고 조심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죠.
특히 이제 초발심자경문으로써 처음에 막 들어온 사람들에게 필독서로써 이렇게 정해놓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말이겠습니까? 막 이제 출가해서 수행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너무너무 긴요한 좋은 가르침이다 이런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松裏之葛(송리지갈)은 直聳千尋(직용천심)이요
소나무를 의지한 소나무 속에 있는 칡넝쿨은 천길을 타고 올라간다.
왜냐 소나무를 의지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소나무를 의지하지 안이하면 칡이라고 하는 것은 넝쿨이기 때문에 땅으로 그냥 밑으로 땅으로 기어요. 1m도 위로 올라 올 수가 땅위로 올라 올 수가 없죠.
그런데 소나무를 의지하면 10m~ 20m 그냥 소나무보다 더 높이 타고 올라간다고요
그와 같이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비록 못나도 좋은 스승과 좋은 벗을 만나 놓으면 그 덕택에 소견이 넓어지고 생각이 바르고 사상이 좋고 아주 진취적이고 계속 앞서가고 발전적이고 그래서 남보다 한걸음 앞서가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는 거죠.
茅中之木(모중지목) 은 未免三尺(미면삼척)이니
잔디에 자라는 나무는 삼척을 면치 못한다.
꼭 뭐 잔디밭에 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삼척보다 삼척이상 안 큰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그래도 상징적으로 얼마나 근사합니까?
못난 사람 옆에 살면 결국 자기 자신도 못나게 된다. 친구를 못난 사람 사귀면 자기 자신도 못나게 된다.
잘난 사람을 사귀게 되면 자기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다. 너무너무 아주 필요한 말이고 근사한 말입니다.
그러니 無良小輩(무량소배)는 頻頻脫(빈빈탈)하고
어질지 못한 아주 못난 무리들은 자주자주 벗어버리고
자주자주 벗으면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인연이 되죠.
인연이 되면 그런 사람은 멀리하라 이말 입니다.
得意高流(득의고류)는 數數親(삭삭친)이어다
뜻을 얻은 높은 무리들은 그런 사람들은 數數親(삭삭친)이어다 자주자주 친할 지어다.
그래야 뭐 한마디라도 들을게 있고 배울게 있죠.
頌曰(송왈)住止經行須善友(주지경행수선우)하야
머물고 그치고 어디에 경행을 하고 다니는데 있어서 선우 좋은 벗을 구해서
身心決擇去荊塵(신심결택거형진)이어다
몸과 마음을 잘 결택을 해, 선택을 하라 이말이야.
몸과 마음을 잘 선택 가려내서 형진을 제거할지어다. 荊(형), 가시와 먼지를 제거하라.
우리의 몸가짐과 정신상태 마음가짐 또 영혼에 온갖 너저분한 것이 많이 끼어 있을 수가 있죠.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이 좋지 아니한 습관들이 몸에 밸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다 떨어내라 이런 뜻입니다.
荊塵掃盡通前路(형진소진통전로)하면
가시와 먼지들이 소진 다 떨어져 나가서 절로 앞이 툭 터질 것 같으면
寸步不移透祖關(촌보불이투조관)하리라
한 걸음도 옮기지 않으며 바로 그 앉은 자리에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바로 조사의 관문을 뚫게 될 것이다
조사의 관문은 이제 전통적으로는 마음 깨치는 것, 화두를 깨닫는 것, 뭐 같은 뜻 입니다.
또 불법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 이런 것을 조관 조사의 관문이다. 이렇게 표현하죠.
그러니까 제대로 스승과 벗을 선택을 해서 공부를 잘 하면 불법을 하루아침에 알게 되고
그렇지 못하고 사사로운데 만 그저 걸려 다니고 그러면 결국은 아무런 널 푼수가 없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오늘 자경문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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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녹취 : 자혜성】
첫댓글 자기의 재산도 아끼고 사랑하는 뜻이 없거늘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하는 마음이 있겠는가(야운 스님 자신).만가지를 다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만을 가지고 갈 뿐이다.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물은 하루 아침에 먼지가 된다.입으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몸을 가볍게 하지 말라. 실다운 모습은 말을 떠났고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입은 재앙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키며 몸은 재앙의 근본이니 가볍게 움직이지말라. 자주 나는 새도 홀연히 그물에 걸릴 재앙이 있고 가볍게 걸어다니는 짐승도 화살에 당할 재앙이 없지 않다.다만 선한 벗을 가까이 하고 삿된 벗을 맺지 말라.
새가 쉬려고 할때도 숲을 선택하며 사람이 공부하려고 함에 있어서도 스승과 벗을 선택해야 한다. 학은 까마귀와 벗을 할 생각이 없는데 붕새가 어찌 뱁새와 벗을 할 생각이 있겠는가? 소나무 속에 있는 칡 넝쿨은 천 길을 타고 올라가고 잔듸에서 자란 나무는 삼척을 면치 못한다.어질지 못한 못난 무리들을 자주 자주 벗어버리고(멀리하고) 뜻을 얻은 높은 무리들과는 자주 자주 친할지어다.몸과 마음을 잘 가려서 가시와 먼지를 제거하여 다 떨어져 나갈것 같으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바로 이 자리에서 조사의 관문을 뚫게 될 것이다._()()()_
늘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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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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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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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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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日修心(삼일수심)은 千載寶(천재보)요 百年貪物(백년탐물)은 一朝塵(일조진)이니라 - 삼일동안 마음 닦은 것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 동안 물질을 탐하는 것은 하루아침의 먼지가 된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각합장()()()
임진년 새해 모두 분들께서 복 많이 지으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萬般將不去(만반장불거)요 唯有業隨身(유유업수진)이라.
만가지를 다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만을 가지고 갈 뿐이다.
三日修心(삼일수심)은 千載寶(천재보)요 百年貪物(백년탐물)은 一朝塵(일조진)이니라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물은 하루 아침에 먼지가 된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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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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