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Salon 2011-11-1 (번역) 크메르의 세계
[인물] 브레톤 시아로니 : 캄보디아 최고의 미국인 브로커
America’s fixer in 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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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캄보디아의 훈센(좌) 총리가 브레톤 시아로니(우)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기고 : 켄 실버스타인 (Ken Silverstein)
(프놈펜) — 캄보디아 내 미국인 교민이자 과거 로날드 래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의 이론가로 활동했던 브레톤 시아로니(Bretton Sciaroni)는 현재 캄보디아에서 가장 범상치않은 권력 중개인(브로커)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만한 체격을 지닌 시아로니는 전직 크메르루즈(Khmer Rouge) 당원이었던 훈센(Hun Sen) 총리 정부에서 공식적인 자문위원 직함을 갖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시아로니에게 '무임소 장관 각하'(Minister Without Portfolio and His Excellency)라는 직함을 부여했다.
그의 사무실은 프놈펜에서도 특수한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그 이웃에는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의 당의장(=총재)도 거주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대신하여 비지니스 거래를 중개해주는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거래들은 종종 시아로니 자신과 같이 연줄 좋은 개인들이나 기업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포함된다.
시아로니는 미국 정부와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서 가장 주요한 중개인 역할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캄보디아는 최근 수년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부상했다. 훈센이 '1997년 유혈 쿠테타'를 일으키자 미국은 캄보디아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지만, 10년 뒤에 원조를 재개했다.
미국은 역내에서의 영향력 증대와 성장중인 교역에서 중국과 경쟁하는 가운데, 미국은 캄보디아가 생산한 섬유(의류) 제품의 절반 이상을 구매하며 가장 주요한 수출대상국이 되었다. 최근의 양국 관계가 온기를 띠게 된 것은 이면에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캄보디아가 석유를 발견하고, 그 중 가장 가능성 높은 광구를 '셰브론'(Chevron)이 차지하게 된 일도 그다지 기분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원조활동에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이어 3번째로 큰 수혜국이 되었다. 그리고 시아로니는 적어도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캄보디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인이 되었다.
올해 초, 나는 '래플스 호텔 르 로얄'(Raffles Hotel Le Royal)에 있는 '엘레판트 바'(Elephant Bar)에서 한잔 하기 위해 시아로니를 만났다. 시아로니는 밝은 색상의 자켓과 노란색 넥타이를 맸고, 금테 선글라스와 짙은 금색의 팔찌를 찬 채, 그의 제2의 고향인 이 나라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주었다.
그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인 '샤또 바따이'(Chateau Batailley)를 한모금씩 홀짝거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는 대단히 이머징한(급성장하는) 경제를 갖고 있고, 민주주의 국가이다. 상당한 정치적 진전이 있었다. 집권당은 더 이상 야당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
그는 캄보디아에서의 자신의 일을 설명하면서, 상당히 이타적인 분위기를 잡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은 당신이 다르게 해보고 싶으면 해볼 수 있는 나라이다. 만일 당신이 정부 관리 한사람에게 어떤 제안을 해서, 그가 좋다고 보면 그렇게 된다." |
하지만 독립성을 지닌 대부분의 업저버들은 훈센이 통치하는 캄보디아에 대해 시아로니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훈센은 1997년 쿠테타 이래로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캄보디아 인구의 40% 정도는 하루 1.25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고 있고,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 HRW)나 '글로발 위트니스'(Global Witness) 같은 국제적인 단체들은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부정부패와 정치적 탄압에 대해 보고서들을 발행하기도 했다. '글로발 위트니스'는 '2007년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캄보디아는 도둑 정치형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국가로서, 그들은 특히 천연자원과 같은 공공자산을 노획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 |
야당인 '삼랑시당'(SRP) 소속의 손 차이(Son Chhay) 의원은 시아로니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시아로니는] 현 정부의 실정을 덥으면서, 자신의 연줄을 이용하여 훈센 정부에 대해 미국이 계속해서 지지토록 설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캘리포니아 주 지역구로 공화당 소속인 대너 로러배처(Dana Rohrabacher: 1947~ ) 하원의원은 개인적으로는 시아로니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내게 훈센 총리가 [통치의] 참다운 적법성을 갖지 못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렛(Brett: 시아로니의 애칭)은 민주적이지도 못하고 정직하지도 않은 캄보디아 엘리트 도당들과 한 통속이 되었다." |
레이건의 엉터리 측근
시아로니는 열렬한 극우 반공주의자였고, 올리 노스(Ollie North)(역주1)의 오랜 친구이다.

(역주1) 올리버 노스(Oliver North: 1943~ )의 애칭. 미 해병 장교 출신의 정치평론가이자 군사 역사가로서,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 작기이기도 하다. 그는 '이란-콘트라 사건'(Iran-Contra Affair) 당시 논란의 주역이었다. '이란-콘트라 사건'에 대해 <브리태니커 한국어판>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다 --------------------- 음 ---------------------
미국의 정치 스캔들.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NSC)가 비밀무기거래 등 의회에 의해 금지되었거나 행정부의 공식 정책에 위반되는 활동에 개입한 사건이다. 1985년초 NSC의 로버트 C. 맥팔레인 의장이 이란에 충성하는 시아파 테러 집단들에게 레바논에 억류중인 다수 미국시민의 석방을 조건으로 대전차의 대공 미사일을 이란에 판매했다. 이것과 1986년 여러 차례에 걸친 대이란 무기판매는 이라크와 전쟁중인 이란을 원조하지 않을 것이며 테러 집단과의 흥정을 거부한다고 표명한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란이 국제 테러 활동을 지원한다고 믿고 있었다. NSC는 이란이 무기 대금으로 지불한 4,800만 달러 중 일부를 빼돌려 니카라과 반군인 콘트라에게 주었으며, 당시 반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산니스타 정부를 정복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러한 자금 전용은 NSC의 참모인 올리버 노스 중령이 맥팔레인의 후임으로 NSC 의장이 된 존 M. 포인덱스터 해군 소장의 승인을 받아 단행했다. 노스와 그의 동료들은 콘트라 지원을 위한 민간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4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볼런드 수정법, 즉 콘트라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간접적인 일체의 군사원조를 금지한 법률을 위반한 것이었다. NSC의 불법적인 활동은 1986년 11월에 폭로되었으며, 즉각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포인덱스터와 노스는 실직했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대외적 이미지도 손상되었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테러 활동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나라로서 미국의 신용이 약화되었다. |
그러한 그가 어찌하여 캄보디아에서 노후의 마지막을 보내며 한때 공산 크메르루주 게릴라였던 한 남자, 즉 훈센을 위한 변론자를 자처하고 있는가? 훈센은 크메르루주에 참가하여 미국이 후원한 정권에 맞서 싸웠고, 베트남이 침공하여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시키자 그 수장이 된 인물이다.
그들 사이에는 너무도 큰 이념적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의 돈줄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그를 위해 자신의 지적인 곡예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시아로니의 가장 주요한 재능이다. 그 재능이 시아로니로 하여금 워싱턴과 프놈펜 양쪽 모두에서 공히 잘 해나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나는 프놈펜에서 그와 인터뷰를 가진 이후, 반복해서 논평을 들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있을 때 겪었던 '이란-콘트라 사건'이나 여타 정치적 활동들은 물론이고, 현재 캄보디아에서 행하고 있는 사업적 활동이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질문들에 답변하기를 사양했다.
1984년에, 젊은 브레톤 시하로니는 'UCLA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한지 5년 정도 된 상태였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듯이 보였다. 그는 2곳의 우파 성향의 싱크탱크 기관에서 잠시 일한 후, 레이건 행정부에서 상무부의 정무직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직함은 대통령 직속 '정보 감시 위원회'(Intelligence Oversight Board)의 선임자문(chief counsel)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레이건 행정부의 '스타워즈 계획'(Star Wars scheme: 전략방위구상)을 진행시키는 일 및 의회가 금지시킨 니콰라과의 '콘트라 반군'(Contras)(역주2)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위한 법률적 논거를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역주2) 니콰라과의 '콘트라 반군'은 사회주의 계열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에 대항하는 각종 반군들의 집합체였다. 그 안에는 우파 성향의 집단도 있었지만 그 이념적 성향은 다양했다. 산디니스타 정권과 투쟁할 때는 인권유린과 만행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
'이란-콘트라 사건'이 발생한 후 조사관들은 절차에 따라 그를 심문했다. 조사관들은 그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정부가 백악관이나 법무부의 보다 노련한 변호사들이 아니라 그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시아로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도 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찌하여 내 의견이 유일한 선택지였는지를 모르겠다." |
하지만 그 이유는 분명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며 테러 용의자들을 고문한 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존 유(John Yoo)(역주3)나 여타 보수주의자들에 의지하여 사기극을 꾸몄던 것과 마찬가지로, 레이건 행정부는 충성파로 여겼던 시아로니가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주3) 다음은 존 유 교수에 대한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의 설명이다.
------------------ 다 -------------------- 음 ---------------------

존 춘 유(John Choon Yoo: 1967~ )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다. 2001~2003년 미국 법무부에서 고문 사용을 정당화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부시 행정부의 고문 사용에 법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논란으로 유명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현재 UC 버클리의 법대 학생들은 존 유 교수의 해고를 요청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Fire John Yoo라는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네오콘의 싱크탱크 기관인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의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유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필라델피아에서 자랐다. 1989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미국역사학 학사학위를 취득, 92년 예일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2009년 스페인 최고형사법원(Audiencia Nacional)의 발타사르 가르손 수사판사에 의해 관타나모 수용소의 고문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스페인에서 진행중인 사법적 절차는 전쟁범죄 혐의에 관한 것이다. |
실제로 시아로니에 대면, 존 유는 [자유주의자이자 인권 옹호에 노력했던 미국의 가장 위대한 법조인으로 꼽히는] 올리버 웬델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41~1935)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시아로니는 1986년에 일련의 의견들을 문서로 남겼다. 그 중에는 메모도 1건이 포함되는데, 의회가 "니콰라과에서의 군사적 혹은 민병대적 작전의 계획이나 실행에 참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어떠한 교육훈련도 단호하게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메모에서 올리버 노스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이 적법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시아로니는 의회의 금지조치가 '포괄적인' 군사원조를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고 결론내렸다. 그가 생각한 '포괄적인' 군사원조는 굉장히 넓은 의미로 정의된 것으로서, 저격이나 첩보활동, 그리고 진지구축과 같은 범주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후에 콘트라 반군에 대한 불법 원조에 관한 언론 보도 내용을 조사하는 감찰위원회에서 한 상관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자, 시아로니는 그러한 보도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결론내렸지만, 그 근거는 대부분 올리버 노스와 나눈 단 한번의 5분 동안의 대화가 전부였다. 노스는 모든 것을 부인했고, 시아로니에게는 그로써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아로니는 곧 깨지고 말았다. 1987년 의회의 '이란-콘트라 사건'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면서, 그가 3개 주를 옮겨다니며 4번이나 시험을 치른 끝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는 점과, 이전에 어떠한 법률적 활동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선임자문이란 직위에 임명됐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이후 공직을 잃었고, '미국 보수주의연맹'(American Conservative Union: ACU)에서도 제명됐고, 엘살바도르의 살인적인 군사정권과 유착되어 있던 한 엘살바도르계 우파 단체를 위한 무료 로비스트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93년, 그는 로러배처 의원으로부터 훈센 총리가 단기 계약직으로 미국인 변호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시아로니는 재빨리 이 기회를 붙잡았다. 그는 1993년 5월에 최초의 총선이 열리기 직전의 캄보디아에 도착했다. 당시의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주 정권기 및 오랜 내전을 마치고 유엔(UN)이 조직한 선거를 준비중이었다. 선거에서는 왕당파인 '푼신펙당'(Funcinpec)이 승리했지만, 훈센이 무력으로 위협하며 승복을 하지 않자 결국 권력을 공유한다는 데 동의했다.
시아로니는 '엘레판트 바'에서 나와 함께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선거에서 승리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두달 후에 미국으로 귀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거에서 져서 패닉에 빠져버렸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몇 가지 점들을 적어주었더니, 그들은 내게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다." |
철저한 보수주의자이자 1993년 이래로 훈센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인 로러배처 의원이 시아로니에게 캄보디아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은 기묘하게 보인다. 하지만 나와의 전화통화에서 로러배처 의원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로러배처와 시아로니는 대학 시절부터 알던 사이로서, 두 사람은 중도 보수주의 청년운동 단체인 '미국 자유청년단'(Young Americans for Freedom: YAF) 및 '레이건 청년단'(Youth for Reagan)의 회원이었던 것이다. 로러배처 의원은 내게 말했다.
"'이란-콘트라 사건'이 있은 후, 브렛의 모든 친구들이 그를 떠났다. 그런 일은 워싱턴에서는 전형적인 것이다. 당시 캄보디아계 미국인 의원 한 사람이 내게 오더니, 훈센이 자유 선거를 치르려 한다고 말했다. 훈센은 공정한 선거법 초안을 작성할 변호사를 찾고 있었고, 보수도 최고로 줄 작정이라고 했다. 나는 브렛이 정말로 돈이 필요한 상황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일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일을 잘 했다. 그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최초의 선거를 치른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훈센이 선거에 졌는데 결과에 승복을 안 한다는 것이었고, 우리 미국 정부가 그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졌으면 나가!'라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타협에 응했고, 결국 훈센이 2명의 총리들 중 1명(제2총리)이 된 것이다." |
로러배처 의원은 그 결과에 분노했지만, 시아로니는 계속해서 훈센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로러배처 의원은 시아로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한 소설에 등장하는] 로드 짐(Lord Jim)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지면서 자신의 조국에서 버림을 받게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으로서, 외국에 나가 새 삶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던 것이다." |
억압을 변론하기
시아로니와 훈센 정권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특히 훈센이 1997년 유혈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틀어쥔 다음부터 더욱 두드러졌다. 당시의 쿠테타로 야당 인사 41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아로니는 훈센 파벌에 합류하여 워싱턴에 대해 직접적인 로비를 벌이거나, 공보팀을 통해 쿠테타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그러한 선전전의 백미는 '푼신펙당'이 CPP에 대해 먼저 "도발 적전"을 채택했으며, 그래서 훈센은 정당방위 차원의 선제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주장한 '백서'로 나타났다.
<워싱턴 타임스>(Washington Times)는 이러한 선전활동을 폭로했고, 캄보디아 내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분노가 촉발되어, 시아로니의 우파 동지들 중 일부는 미국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워싱턴 타임스>는 시아로니에게 이 백서를 발행하는 데 있어서 어떤 자문이나 공헌을 했는지 물어보았지만, "시아로니는 얼굴을 찌푸리며 '노 코멘트'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이듬해, 시아로니는 훈센이 조직하고 수월하게 승리했던 제2기 총선을 위해, 또 다른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리타 콜로리토(Rita Colorito)는 시아로니가 그 선전활동을 위해 선정했던 미국의 로비 회사에서 일했다. 그녀는 나중에 <어느 보도대책 보좌관의 고백>(Confessions of a Spin Doctor)이란 기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권 CPP는 인권 상황의 진전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구미에 맞는 언론보도가 나와서 새로운 국제 원조만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센이 고용한 미국의 홍보팀은 '터무니없는 수사법'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
하지만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티나 로젠버그(Tina Rosenberg) 기자를 캄보디아로 불러 훈센의 고무적인 지도력에 대해 보도해주도록 설득하려 했을 때, 시아로니의 선전활동은 불발에 그쳤다. 로젠버그 기자는 훈센의 지도력에 그다지 감명을 받지 못했고, "총선을 준비하는 훈센"(Hun Sen Stages an Election)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1975년 이래로 "캄보디아는 일련의 끔찍스런 정권들 하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훈센은 그 모든 정권들에 존재했다"고 적었다.
로젠버그의 기사가 그들로 하여금 이익이 될만한 계약을 실패하게 만든 데 넋이 나가서, 홍보팀은 이 기사를 희석시킬 '긴급 전화 회의'를 가졌고, 훈센으로 하여금 보이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은 상태라고 설득했다.
훈센은 분명 이러한 설명을 수용했다. 훈센의 정부는 2002년에 시아로니에게 캄보디아 시민권을 발급했던 것이다. 그 이후 시아로니는 "크메르 민족을 위한 정의"를 공개적으로 떠들어대면서, "그들과 함께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 것"이란 바램을 피력했다.
미국 사업체 및 정부로 통하는 교량
시아로니의 성공은 단순한 진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전세계 어디서나 정치적 접촉들은 원래 비지니스의 시녀지만, 캄보디아처럼 좁은 물에서 서로 얽히고 섥혀 있는 정치 경제적 엘리트들을 가진 국가에서는 그 엘리트들이 더욱 더 생동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사진: Phnom Penh Post) 브레톤 시아로니.
프놈펜에 거주하는 한 서양인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캄보디아] 정부와 친하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의 호감을 사야만 한다." |
이 사람은 시아로니의 인적 컨넥션이 넓고도 깊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렛은 매우 초창기부터 이곳에 살았다. 당시엔 모든 게 상당히 거친 시대였다. 외국인도 많지 않았고, 브렛은 거의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
수많은 소식통들이 내게 말하기를, 캄보디아의 현 정권에서 시아로니가 가장 친한 인물은 속 안(Sok An) 부총리 겸 관방부장관이라고 전해주었다. 시아로니는 속안 부총리가 캄보디아의 대표로서 '세계은행'(World Bank, 월드뱅크)과 같은 국제기구들과 회담을 가질 때 동반을 하곤 한다.
미국 국무부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인권 상황에 관한 연례보고서는 캄보디아의 집권 CPP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CPP는] 국가의 주요 3부 및 여타 국가 기관들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언론과 보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고...... 때때로 집회의 자유도 방해하곤 한다." |
하지만 하지만 내가 시아로니를 만났을 당시,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보다 장미빛 평가를 해주었다.
"방송 매체들은 정부가 모두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출판 매체들은 자유로우며 때로는 무책임할 정도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방송 매체들은 좀 나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
2007년에 캄보디아에서 개최된 한 투자설명회에서, 시아로니는 훈센 정권의 권위주의적 간판이 비지니스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처럼 추켜세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거래할 관리들에 대한 안정성 때문에 투자자들의 확신은 강화된다. 새로운 관리들이 오더라도 커다란 정책적 동요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
지난 2009년에 버지니아 출신의 짐 웹(Jim Webb) 상원의원이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도 시아로니는 훈센 정권을 추켜세웠다.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 대사관 전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아로니는 캄보디아 정부가 민간 부문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갖고 있다며 칭찬했다.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캄보디아에서만큼 '암챔'(Amcham: 해외 주재 '미국 상공회의소'[American Chamber of Commerce])이 주재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도 없다고 확신에 차서 단언했다." |
시아로니는 1998년에 창립된 '캄보디아 주재 미국 상공회의소'(AmCham Cambodia) 회장을 맡고 있다.
내가 대화를 나눠본 야당의 손 차이 의원이나 훈센 정권에 대한 여타 비판자들은 시아로니가 미국의 대 캄보디아 정책을 부드럽게 만들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인권상황에 대해 상당한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과 캄보디아의 교역 및 군사 협력은 상당히 떠들썩하게 진행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캄보디아인 운동가 한사람은 다음과 같이 내게 말했다.
"미국은 캄보디아 정부와의 '대화' 필요성에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고, 그(시아로니)가 그 일을 위한 교량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
시아로니는 자신이 고객들을 위해 일하는 내용에 대해 수치심 같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다. 2007년에 개최된 투자설명회에서 연설하면서, 알루미늄 괴를 수입하는 데 7%의 관세를 부과하여 투자를 망설이고 있던 한 미국 회사에게, 자신의 회사가 어떤 방식으로 주요한 세제혜택을 볼 수 있게 해주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다양한 관리들을 만나면서 신속한 성공을 거뒀다. 관리 중 한사람이 '[세율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해당 회사는 '0%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 세율이 0%가 된 것이다." |
시아로니의 또다른 고객들 중에는 '셰브론'과 '미츠이석유개발'(三井石油開発, Mitsui)도 포함되는데, 이들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유력한 석유 광구 사업권을 갖고 있다. 그리고 'BHP 빌튼'(BHP Billiton), '미츠비시'(Mitsubishi), '옥시아나'(Oxiana) 같은 국제적인 광산 기업들도 그의 고객들이다. 또한 내가 입수한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시아로니는 '랩터 산림'(Raptor Forestry)과도 일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캄보디아의 목재 및 농업 부문에서 대규모 "잠재력에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시아로니는 법률적 서비스 및 자신이 가진 '지역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대가로 지분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료사진: '정부-민간부문 포럼'[GPSF]) 좌로부터 찰스 완(Charles Vann) '카나디아 은행'(Canadia Bank) 부행장, 호 완디(Ho Vandy) GPSF 관광분과 공동의장, '옥냐'(Okhna) 칭호를 갖고 있는 갑부 떼 따잉 뽀(Te Taing Por), 브레톤 시아로니.
시아로니는 파리에 본사를 둔 '시티스타'(CityStar)에도 법률적 자문을 하고 있는데, 이 회사의 캄보디아 내 자회사의 이사회 의장으로 등록되어 있다. '시티스타'는 2007년 초부터 캄보디아에 개점을 했다. 이 사업은 엄밀히 말하면 캄보디아 정부가 시하눅빌(Sihanoukville)에 위치한 개발용 공공용지를 팔아치웠기 때문에 가능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로, 연줄 좋은 기업들이 대중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호화로운 비치와 섬들, 그리고 보존구역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시티스타'는 국립공원 1곳과 시하눅빌 해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2곳의 개발사업 지역들에서 2건의 양허권을 획득했고, 럭셔리한 호텔들과 빌라들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시아로니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과거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덧없는 출세를 했던 경력을 캄보디아에서 보다 큰 일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도 사용했다. 최근 몇년간 미국 정부와 캄보디아 정부의 관계가 온기를 띠고, '제네랄 일렉트릭'(GE), '듀퐁'(DuPont), '마이크로 소프트'(Microsoft) 같은 미국 기업들이 캄보디아로 진출하면서, 시아로니의 사업적 전망은 더욱 밝아 보인다.
시아로니는 내게 캄보디아를 설명하면서 "기회는 많다"고 말했었다. 비록 그가 캄보디아에서 자신이 얻은 개인적 행운을 정리해서 말했다고 하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지만, 그는 캄보디아를 "대단한 환경을 가진 곳"이라 말했다.
[필자소개] 켄 실버스타인(Ken Silverstein)은 <하퍼스>(Harper’s) 매가진의 객원 편집자이고, '오픈 소사이어티'(Open Society: 열린 사회)의 회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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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시아로니란 사람이 가끔 나타나서
뻘 소리를 해대길래..
어떤 인물이길래 여타 서구인들과는 달리
캄보디아에 대해 호도하는가 했더니..
사연이 많은 사람이네요..
흥미롭구만요..
아울러 실버스타인도 참 대단한 언론인이네요..
나오는 글마다 감탄하게 하는군요..
하지만 원래 독일 출신인 것인지
영어 문장 자체는 때로 깔끔하지 못한 단점은 있습니다만..
집요한 언론인이란 생각이 드네요
관점도 올바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