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樹大士 見迦那提波來 先令侍者 將一鉢水 置面前 提波乃以一針 投之 樹云 定水澄淸 比方我德 彼來投針 欲窮其底
용수대사가 가나제바가 오는 것을 보고 먼저 시자에게 물을 한 발우를 가져오게 해서 그의 면전에 두었다. 가나제바가 이에 한 개의 바늘을 발우에 넣으니 용수대사가 말하기를,
“선정의 물이 맑고 맑은 것은 나의 덕에 견준 것이고, 그대가 와서 바늘을 넣은 것은 그 밑바닥을 다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교도와 논쟁하며 100만명 ‘개종’
포교하다 순교 … 라후라다에 전법
해설 : 가나제바(迦那提婆) 존자는 남인도 출생이다. 한 눈이 멀어 애꾸라는 뜻의 “가나”라는 이름이 붙었다. 용수(龍樹)보살과 함께 삼론종(三論宗)의 시조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복업(福業)을 구하며 변론을 즐겼으나 뒤에 용수보살에게 불교를 배워 공종(空宗)의 깊은 뜻을 깨닫고 법을 전해 받았다. 이교도들과 논쟁하여 100만 여명을 개종시켰다고 전한다. 뒷날 라후라다 존자에게 전법하였는데 불행히도 이교도들의 칼에 죽었다고 전한다. 불교를 펴다가 순교한 경우이다. 부처님의 제자 부루나 존자와 신라의 이차돈 성사도 전법을 위해 순교하였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주의주장도 많다. 어떤 종교이든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과의 인연을 따라 그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그들대로의 사상이 있고 주의주장이 있으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종종 그동안 믿어오던 종교를 등지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있다. 세존이 교화를 펴실 때 삼가섭과 사리불과 목건련 같은 분들이다. 개종하는 과정에서 부작용도 많았다. 그들의 스승들과 종도들은 지극한 반감을 가지고 세존을 음해하고 비난하였으며, 제자들을 헤치는 일까지 있었다. 세존을 직접 찾아와서 욕설과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세존은 묵묵부답으로 대치하였다. “동주도반 중에 악성비구가가 있을 때 묵빈대치(檳對治)하라”라고 제자들에게도 지시하신 방법이다. 결! 맞서 싸우거나 옳고 그름을 따져서 다투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옳고 그름보다 친화와 융화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가나제바 존자도 이교도들을 많이 개종시켰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불교 안에서도 종파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비방하고 음해하며 심지어 목숨을 헤치는 경우도 있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데도 오히려 종교가 사람을 헤치는 무기로 전락하였다. 중생들의 집착과 아집에서 기인한 일이다.
가나제바 존자는 <백론(百論)> 2권, <백자론(百字論)> 1권, <광백론(廣百論)> 1권, <대장부론(大丈夫論)> 2권, <외도소승열반경(外道小乘涅槃經)>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직지심경>에서 인용하였듯이 스승인 요수보살을 만났을 때 법을 거량한 것이 특이하다. 용수보살은 아무런 말이 없이 물 한 그릇을 떠오게 하였는데 가나제바 존자는 그 물그릇에 바늘을 하나 던져 넣어서 자신이 용수보살에게 스승의 법과 학덕을 끝까지 궁구하여 다하리라는 뜻을 가만히 드러냈다. 그러자 용수보살은 그릇의 맑은 물의 의미와 바늘이 물밑을 다하게 된 뜻을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참으로 빼어나다.
스승다운 스승을 만기도 어렵지만 제자다운 제자를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법의 그릇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 법을 전하지 못하면 사람을 잃어버린다. 반면에 법의 그릇이 되지 않는데 아무렇게나 법을 남발하면 법을 잃어버린다. 용수 보살과 가나제바 존자가 만난 것은 진정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만한 천고에 보기 드문 만남이다. 선종사에서 볼 때 불교는 언제나 이와 같이 훌륭한 스승과 훌륭한 제자가 서로 만나 오늘에 이른 매우 특별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법의 그릇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 법을 전하지 못하면 사람을 잃어버린다. 반면에 법의 그릇이 되지 않는데 아무렇게나 법을 남발하면 법을 잃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