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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를 위한 법화경강의 제9강 1
(無比 큰스님, 문수선원, 2008년 10월 10일)
2. 방편품 8-13
세상의 이치나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나 본래 아주 단순하고 또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이런 분별을 할 이유가 없는 그런 자리인데 인간의 역사가 오래고 삶이 좀 복잡해지고 그렇다보니까 이런 저런 불필요한 일도 생기고 또 필요한 일도 생기고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 저런 가르침, 필요한 가르침, 어떤 의미에서는 또 불필요한 가르침
갑이라는 사람에게는 필요한데 을이라는 사람에게는 또 불필요하게도 되고 하는 그런 역사를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이렇게 반복해 오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여러 가지 가르침과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판단과 기준들이 축적이 잔뜩 돼 있어요.
많이 축적이 돼 있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축적된 여러 가지 주의주장들을 잘 분별하고 또 판단을 해서
존재의 원리에 맞게 살아가도록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이게 이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과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법화경이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제일로 꼽는 훌륭한 경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은 법화경이 설해지기까지 또 숱한 교설이 있었고, 그 교설들이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틀리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많죠.
그대로 우리나라에까지 불교가 전해져서 지금 우리 한국에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불교들도 사실은 올바른 가르침에 의해서 정리를 하고 정돈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바로 이 대승(大乘)의 가르침, 또 부처님 말씀 중에서도 최고가는 이런 법화경(法華經)을 통해서 하나의 기준을 삼고 정리 정돈을 해야한다고 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법화경 방편품, 서품이 끝나고 방편품(方便品)이 이 경전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안목(眼目)이다 그래요.
상권(上卷)에는 방편품 또 저 밑으로 가면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이 두 품을 법화경의 안목이다 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안목이라고 할 내용이 방편품에 많이 실려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 중에서 으레히 부처님이 누가 질문을 해서 설법을 하든 아니면 스스로, 묻지도 않는데 스스로 설하는 것 그걸 무문자설(無問自說)이렇게 하거든요.
무문자설을 하든 질문을 해서 설법을 하든 설법을 하시게 되면 으레히 순리적으로 설법을 그냥 합니다.
그런데 법화경만은 유독 이제 그만두자, 그만두어라.
부처의 경지라고 하는 것, 우리 마음의 깊고 오묘한 그 실제적인 내용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보통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봤자 이해도 못하고 또 그것이 도대체 무슨 구름 잡는 소린가 알려고도 잘 하질 않는 그런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 앞에서 보면은
여래(如來)의 지견(知見)이라고 하는 것은 광대하고 심원하다. 그리고 무량(無量) 무애(無礙) 역무소외(力無所畏) 선정(禪定) 해탈(解脫) 삼매(三昧) 이런 것들이 우리 본래 인간에게 갖춰져 있는 숱한 능력 온갖 덕상(德相) 온갖 지혜 이런 것들을 부처님이 확연히 드러내서
다시 말해서 그것을 잠재되어 있는 것을 개발해서 그것을 당신의 살림살이로 당신의 입장에서는 이미 인격화가 됐습니다.
지견이라든지 지혜가 광대심원해서 사무량(四無量) 사무애변(四無碍辯)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선정(禪定) 팔해탈(八解脫) 삼삼매((三三昧) 뭐 종류도 많아요.
이런 모든 것들이 이미 부처님에게는 인격화 돼버렸어.
그것이 자기에게는 부처님에게는 당신의 살림살이가 돼 버렸다고요.
우리는 이런 것들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가 되지 못하고 우리에겐 아직 인격화 되지 못했어.
그게 이제 요는 문젠데.
그래서 이러한 무궁무진한 보물창고가 결국은 사람인데 이걸 내가 드러내서 설명해 줄려고 해봤자 쉽게 이해하겠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희들은 제대로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쭉 보면은
여래가 가지가지로 분별(分別)하사 교설제법(巧說諸法)하사 언사(言辭)는 유연(柔軟)하고 여러 대중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사리불아 요점을 취해서 말하자면은 무량무변(無量無邊) 미증유법(未曾有法)을 부처는, 부처님은 다 성취(成就)했다.
여기까지 이제 우리가 살펴봤어요.
이렇게 잔뜩 칭찬을 해놓고는 그 다음에
8. 止하라 舍利弗아 不須復說이니 所以者何오 佛所成就第一
지 사리불 불수부설 소이자하 불소성취제일
希有 難解之法은 唯佛與佛이라사 乃能究盡 諸法實相하나니라
희유 난해지법 유불여불 내능구진 제법실상
그만두어라. 사리불이여, 굳이 다시 말할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취한 제일이며 희유하고 알기 어려운 법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이니라.
止하라
지(止)하라 그랬습니다. 그만두자.
앞에 요약해서 이렇게 내가 명칭만 거론한 이 내용을 낱낱이 이야기 할 수가 없고, 이야기 해봐야 믿지도 않을 것이니까 그만두자. 이런 말을 해요.
이런 이야기는 다른 경전에서 우리가 못 봅니다. 실컷 깊고 깊은 여래의 경지를 칭찬을 해놓고는 그만두자, 이거 뭐 설명해봤자 괜히 비난만 할 것이고, 이런 식 표현이예요.
舍利弗아 不須復說이니
사리불(舍利弗)아 불수부설(不須復說) 더 이상 다시 설할 것이 없다. 그러면서
所以者何오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왜 그러냐, 왜 내가 이야기를 접고 그만두자고 하는가, 이런 이유를 여기서 밑에 설명을 하는데
佛所成就第一 希有 難解之法은
불소성취제일희유(佛所成就第一 希有) 난해지법(難解之法)은 부처님이 성취한 제일가고 또 희유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 도리는
唯佛與佛이라사
유불여불(唯佛與佛)만이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 깨달은 사람들, 전부 깨달은 사람들끼리만이
乃能究盡 諸法實相하나니라
이에 능히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구진(究盡)한다.
모든 존재의 실다운 모습 제법실상(諸法實相) 제법실상이라는 말이 아주 법화경에서는 참 중요한 말입니다.
이 제법(諸法)하는 것은 꽃은 꽃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우리가 어떤 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 그것까지도 전부 제법에 해당됩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불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제법이야. 그러면
그 모든 존재의 실다운 모습, 그러니까 이 꽃이 여기에 국화꽃이 한 송이 있다. 그러면 국화꽃이 지금 이 순간은 여기에 요렇게 있지만은 이 한 송이 국화꽃이 여기에 이렇게 있기까지의 실다운 모습이 있다 이 말이야.
이건 어떤 예를 들어서 어느 산에서 피었든지 들에서 피었든지 아니면은 국화꽃을 재배하는 사람이 재배했든지 재배하기 이전의 또 씨앗이라든지 모종이라든지 오기 까지, 또 재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손에서 어떤 거름을 썼고 어느 지방에서 어떻게 길렀다 라고 하는 것, 설사 그래 길렀다 하더라도 여기 오기까지 몇 손을 거쳐서 여기 왔고, 그런데 어쩌면은 그 많고 많은 꽃들 중에서 왜 이 꽃이 여기에 왔는가, 이런 등등 아주 복잡 미묘한 모든 것들을 실상(實相) 그래요. 실다운 모습.
그런데 이것이 또 한편 그렇게 존재하는 입장으로 보면 그렇지만은
이것이 또 공(空)한 입장으로
불교에서 으레히 이야기하는 그런 인연에 의해서 여기에 눈앞에 나타났지만은 그 인연이 사실은 동원되기 전에는 꽃이라는 게 없다. 그리고 또 그 인연의 힘이 다하면 그 순간에는 이 꽃이 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연(因緣)으로 화합(化合)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없는 것으로 본다.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습니까?
불교에서는 언필칭 그래 하거든요.
꽃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우리 육신, 나라고 하는 내 자신을 두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명예나 부나 사회적인 업적이나 기타 무슨 가족상황이나 온갖 내가 ‘이것이다’ 라고 의지하고 있는 모든 존재, 내 자신을 위시해서 내 가족 내 친지 뭐 형제자매 뭐 아들 남편 아내 할 것 없이. 모든 내 주변에 있는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그걸 이제 아(我)와 아소(我所) 이렇게 말하거든요 참 불교는 그런 정의가 아주 뛰어나지요 ‘나’와 ‘나의 것’,
전부 나의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볼 때는 나는 여러분의 것이 돼요. 소유가 되는 거라. 자기 입장으로서는 주관이 되고 그 외에는 전부 객관이 되고. 그렇게 이제 분류를 하죠. 어쨌든 그런 모든 것들
이 꽃 한 송이나 내 자신이나 전부가 이것이 실다운 모습이 있는 거야.
그래서 눈에 보일 때는 알고 보면은 우리가 인연에 의해서 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서 이렇게 존재하지만은
그 연기의 힘이 다하면은 없어진다.
이건 정한 이치거든요. 다 아는 이치라 또 우리 불자들은.
그거 사실 철두철미하게 알면은 뭐 불교공부 어지간히 됐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우리가 들어서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아까 말했듯이 그게 내 살림살이 나에게 인격화 되기까지는 그건 쉬운 게 아니야.
예를 들어서 뭐 돈을 떼였다. 그러면은 늘 원망하는 마음 분한 마음 애석한 마음 앵통한 마음 그 마음만 있는 거지. ‘아 내가 돈을 떼일 인연이 되어서 떼였겠지.’ 그게 이제 나에게 인격화되기까지는 그건 쉬운 게 아니야. 참 어렵다고요.
그게 얼마만치 나에게 인격화 됐냐, 내 살림살이가 됐냐.
이거 가지고 진정한 몇 점짜리 불자(佛子)냐 하는 것을 매길 수가 있습니다.
그건 뭐 남이 매기는 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이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인데
참 그게 뭐 알기야 다 알죠. 다 인연소치다.
우리 불자들이 언필칭 하는 말, “모든 게 인연소치다” 그런 말 잘 하지요. 하지만은 가벼운 것은 인연소치라고 해서 체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큰 것, 단위가 높으면은 인연소치라고 쉽게 그렇게 소화해 내지 못해요 소화 못합니다 그거.
몇 년 전에 누구에게 좀 섭섭한 소리 들은 것, 그거 아직도 소화 안 되고 가슴에 있어요 지금도. 있다고요 그게.
'그거 다 인연소치, 내가 들을만 하니까 들었겠지. 그 사람이 오해를 했든지 아니면 내가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 들을 짓을 했든지.' 그렇게 이해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화가 잘 안 되는 거야.
그런 것을 빨리빨리 가뿐가뿐하게 소화해 낼 줄 알면 그게 그 사람에게 수행이 됐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참 불교가 그 사람에게는 인격화 됐다. 불교가 정말 그 사람 정신에는 살림살이로 자리매김한다. 이렇게 우리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뭐 아무리 뭐 먹물 옷을 그냥 수백 벌 쌓아놓고 매일 먹물 속에 산다 해도 그거는 이제 불교 아니예요. 그런게 소화가 안 되면 그건 불교가 아니야.
매일 법당에 가서 부처님 앞에 가서 엎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게 소화 안되면은 그건 불교가 아니고
불교하고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그런 게 제대로 소화 된 사람이 그게 그 사람이 불교인이라. 그 사람이 부처님한테 가까운 사람이라고, 이치가 그래 돼 있습니다.
그게 이제 그런 모든 문제들을 있음의 문제와 없음의 문제.
이것이 모두 인연으로 의해서 존재할 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존재하고, 그러나 이 아름다운 꽃이 누가 들고 갈 수도 있고, 갑자기 또 시들어서 없어질 수도 있고, 왜냐? 없었던 것이 생겼기 때문에 없어지는 건 또 당연한 거거든요.
한 송이 꽃을 가볍게 보듯이 내 인생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해관계도 그렇게 한 송이 꽃처럼 가볍게 볼 수 있으면 그 사람은 도인이야 그냥. 훌륭한 사람이지.
참 그거 그렇게 돼야 되는데 그러한 것들이 내 살림살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부처님 공부를 하는 건데
그런 모든 상황들의 내면을 제법실상(諸法實相) 그렇게 합니다. 제법실상.
법화경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제법실상이라는 말이예요.
제법실상(諸法實相) 모든 존재의 실다운 모습.
그 실다운 모습이 뭐냐?
빨간 꽃이라면은 빨간 꽃, 빨간 모습이 실상이냐? 아니다 이거야. 물론 빨간 모습도 진리야. 현재는 진리야.
그러나 이것은 피기 이 전에는 없었고, 또 나중에 며칠 후에는 없어질 거라는 것 까지도 공(空)한 것 없는 것도 또한 이 국화꽃의 진리라고.
우리가 버젓이 이렇게 살아있을 때는 내 몸뚱이 가지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화내고 웃고 떠들고 하지만은 이런 것이 당연히 이렇게 있고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야. 이것은 진리야.
그런데 뭐라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나는 없다 이거야.
나는 없다 이거야.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알고 보면 또 가만히 살펴보면 또 없는 거야 이게. 그것도 진리라고요.
두 가지 다 진리라. 그게 이제 두 가지 면인데 진리의 두 가지 면이라.
어떻게 보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은 모든 존재는 그렇게 존재한다. 이걸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걸 배우는 거예요. 그렇게 배우고
있을 때는 있는 대로 우리가 이해해 주고
없을 때는 없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거야.
왜냐? 다 진리니까. 있음도 진리고, 없음도 진리니까.
그것이 제법실상이라. 제법의 실다운 모습이라고요.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실다운 모습이고, 국화꽃이 여기 있을 때는 요 있는 게 현재로서는 진리야. 시들어 없어지면 시들어 없어진 그것이 또 진리야. 그러면 그 양면을 우리가 전혀 상반된 양면이죠.
있음이고, 나머지는 없음인데
없는 것 하고 있는 것하고 어떻게 그게,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뭘 하나를 선택해야지’ 라고 하는 그런 우리가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건 서양 사상이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동양사람들에게도 그런 ‘흑백논리’가 잠재되어 있어. 언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 가지고 잠재되어 있는데 그건 참 교육이 잘못된 거예요.
어디 있는 거만 있나? 분명히 없잖아요. 또 없는 거만 있는 게 아니라 있기도 하는 거야. 고 양면을 공히 우리가 수용할 줄 알아야 돼.
있음도 진리고 없음도 진리라고 하는.
사실이 그러니까. 사실이 그러니까 부처님은 사실대로 깨달으시고 사실대로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 불교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해서 진리를 모든 존재의 실상. 여기서 말한 제법실상, 제법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더 중요한 게.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공부하느냐?
불교는 목적이 이고득락(離苦得樂)이거든요.
고통을 떠나고 낙을 얻는 거야.
그러면 이 진리인 제법실상의 이치를 우리가 제대로 공부함으로 해서 결국은 무엇을 우리가 얻어내고자 하는가? 그거는 이제 이고득락을 얻어내고자 하는 거라.
그러니까 그렇게 이해하니까 고통스러울 것이 확 줄어드는 거야. ‘아 비록 단위가 조금 높은 것이지만은 내가 떼일만 하니까 떼였구나.’ 이렇게 정말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줄 알면은 그 앵통한 마음과 고통스러운 마음과 분한 마음과 미운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져요. 상당히 가벼워져.
그게 한 순간에 확 다 가벼워져 버리면 그건 도인이고 그 사람은
아주 삼분의 일만 가벼워져도 이건 상당히 불교 공부한 보람이라 그게.
불교 공부한 보람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볍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게 목적이예요 사실은.
진리 아닌 게 뭐 있습니까? 다 진리지. 그 나름대로 전부 진리야. 그런데 진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게 절대 아니예요 불교는.
그 진리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그런 소득을 주는 거라 그런 소득을. 그런 소득을 주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가 그게 소득이 좋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 공부하는 거예요.
소득하니까 만원 희사하고 한 일억 당첨 될까 그 생각을 얼른 하는 것 같은데 그 소득이 아니고 그런 이치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치는 불교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
우리는 아전인수격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춰서 불교를 만들어 놓고, 그런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구십구프로야. 여기에 있는 사람만 아니고 거의 딴 사람들은 다 그래(웃음) 하하하 그 전부 우리 마음에 맞는 불교를 만들어 놓고, 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언제 그렇게 만드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런 불교를 믿고 산다니까 사람들이.
진짜 소득은 원결심 미운 마음 속상한 마음 괴로운 마음 이것을 제법실상의 도리를 우리가 이렇게 공부함으로 해서 가뿐해지는 것, 가벼워지는 것
한 삼분의 일 정도라도 무게가 싹 없어져 버려.
‘아이고 그러니까, 에이’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면은 그게 진짜 소득이거든요. 그게 진짜 소득.
그게 이제 이고득락 아닙니까?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그런 어떤 상황에서 털고 일어나서 편안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 ‘아이 그거 뭐 빚 잘 갚았다.’ 빚 잘 갚았다 라고
이렇게 정말 시원스럽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래도 좀 찌꺼기는 남아있지. 그게 쉽나요. 그런데 그 찌꺼기마저도 어느날 깨끗이 비워내는 날이 온다고요 그것도.
그렇게 되면은 그건 아주 참 불교 공부 성공한 사람이고 정말 큰 소득이야. 그게 이제 제법실상을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예요.
모든 존재가 어떤 진리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은 우리에게 그런 큰 소득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제법실상의 이치를 공부한다 그런 뜻입니다.
9. 所謂諸法에 如是相이며 如是性이며 如是體며 如是力이며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如是作이며 如是因이며 如是緣이며 如是果며 如是報며 如是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여시
本末究竟等이니라
본말구경등
이른바 모든 법의 이러한 모양[如是相], 이러한 성품[性], 이러한 본체[體], 이러한 힘[力], 이러한 작용[作], 이러한 원인[因], 이러한 연유[緣], 이러한 결과[果], 이러한 보응[報], 이러한 시작과 끝[本末]과 구경(究竟)등이니라.”
所謂諸法에
소위(所謂) 그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소위 이른 바 제법에 있어서
如是相이며
이와 같은 모양, 예를 들어서 이와 같은 모양하면
예를 들어서 국화꽃이 여기 지금 이렇게 있는데 약간 붉은 색 자색 분홍색 흰색 이런 낱낱이 이와 같은 이것은 이대로 이와 같은 모양, 이것은 이대로 이와 같은 모양, 덜 핀 건 덜 핀대로 이와 같은 모양 다 핀 것은 다 핀대로 이와 같은 모양
갑이라는 보살은 갑이라는 보살대로 그와 같은 모양 을이라는 보살은 을이라는 보살대로 그와 같은 모양. 이 옷은 이 옷대로 이와 같은 모습, 저 옷은 저 옷대로 그와 같은 모습 이게 이와 같은 상이야 상, 모양 상(相) 그 다음에
如是性이며
여시성(如是性) 이와 같은 성품 하는 것은 이것 역시 이제
모든 존재는 그런 성질이 있어. 전부 성질이 있다고요.
예를 들어서 국화꽃은 국화꽃대로의 성질이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의 다 성질이 있고. 살은 살대로의 성질이 있고, 뼈는 뼈대로의 성질이 있고, 머리카락은 머리카락대로의 성질이 있고, 그게 이제 성(性)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에
여시(如是) 이와 같은 이러한, 이러한 성품, 이러한 성질.
그렇게 여시(如是)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지 않잖아요? 모양도 한결같지 않으니까 다 해당되거든? 여시라고 하는 말은 다 해당되는 거야. 어디든지,
이와 같은 이와 같은 이러한 이러한
그래서 이제 여시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如是體며
여시체(如是體) 그 다음 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체를 말하는 것인데 요건 어떤 모양보다도 어떤 성(性)하고 약간 비슷하면서 어떤 구성하고 있는 어떤 상태
말하자면은 모양과 성질을 가지고 있는 그 전체
고걸 이제 체(體)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그 다음
如是力이며
여시력(如是力)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는 으레히 그 나름대로 힘이 있어. 그 나름대로 힘이 있다고.
꽃 한송이가 여기 있지만은 꽃 한송이에게도 힘이 있어.
향기를 피우든지 아니면은 이것이 썩어서 냄새를 나게 하든지 여기에 뭐 벌레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어떤 조건이 된다든지 그 나름대로 전부 힘을 다 가지고 있어. 전부 힘을.
옷은 옷대로 머리칼은 머리카락대로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전부 그 나름대로 영향을 가지고 있어.
힘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래서 여시력(如是力)이야. 그 다음에
如是作이며
여시작(如是作) 그 다음 이건 또 작용이 있어.
힘하고 작용하고 달라. 힘이 있고, 그것이 힘이 어떤 동작을 하면 그것이 작용이 되죠. 그래서 작(作)자는 그런 작용. 그 다음에
如是因이며
여시인(如是因)했죠. 전부 원인이 다 있잖아요. 전부 원인이 있는 거야. 꽃 한 송이가 여기 오기까지의 원인이 있고.
한 벌의 옷이 내 몸에 걸쳐지기까지의 원인이 있고,
일체가 원인 없는 게 없습니다.
머리가 검으면 검은 대로 희면 흰 대로 전부 그 원인이 있어. 그래서 이와 같은 인(因)
다 해당되니까 ‘이와 같은’이라고 하는 거죠. 그 다음에
如是緣이며
여시연(如是緣)하는 것은 이제 조건이죠.
인(因)은 씨앗이라면 연(緣)은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서 꽃 한 송이를 여기 피우기까지에 씨앗이 있을 것이고, 인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물을 준다든지 비료를 준다든지 누가 김을 매준다든지 하는 그런 보조적인 조건, 그걸 연이라고 그래. 그 다음에
如是果며
여시과(如是果) 결과.
인(因)과 연(緣)과 그 다음에 거기 따른 결과(結果)
이 꽃이 이제 여기까지 와가지고 이렇게 있으면은 이 꽃은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가 이게 결과야.
이 결과가 여기 나타났는데
이 결과가 여기 나타나기까지 여러 가지 연이 있었어.
연이 있었고, 또 인이 있었고, 그래서 오늘날 이 결과가 되는 거라.
지금 우리가 이렇게 법화경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의 결과라고 이렇게 생각한다면은 결과가 되기까지 이 순간이 이런 결과가 되기까지
누가 가자고 했든지 뭐 보내줬든지 차를 태워줬든지 하는 그런 주변의 보조적인 조건, 연이 아주 많아.
수만 가지 연들이 있어. 그 다음에 씨앗은 뭔고 하니
‘아, 내가 불자로서 이런 좋은 공부가 있다는데 가서 공부해야지’ 하는 고 한 마음이 인이야.
고 한 마음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지만은 주변의 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뭐 집에서 못 가게 했다든지 등등 그런 여러가지 보조적인 연이 거기에 동원이 되지 아니하면은 오늘 이 순간에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이 결과가 말하자면 이루어지지가 않아. 매사가 그래 돼 있죠.
꽃 한 송이에서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또 뭐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어떤 일이라든지
일체 이 세상에 사람을 위시한 모든 존재가 전부 그런 인 연 과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 과(果)
그 다음에
如是報며
보(報) 그 다음에 거기에 따른 과보가 있어.
우린 붙여갖고 ‘인연과보’ 이렇게 붙여서 이야기도 하고 인연이라고도 하고 인과라고도 하고. 또 과보라고도 하고 우리가 잘 쓰는 말이 거기 다 있네요.
인(因)자 연(緣)자 과(果)자 보(報)자
그냥 우리는 한꺼번에 과보 이렇게 하는데 결과와 거기에 대한 보상
엄격하게 나눠서 이야기 하면 거기에 따른 보상이야.
아, 우리 공부했죠. ‘야 그거 아께 그 제법실상 이야기 들으니까 아 그럴 듯 하더라. 그거 하나만이라도 내 인생에 어떤 거울로 삼고 지침으로 삼고 살아가면은 그거 꽤 괜찮겠던데’ 라고 해가지고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적용을 한다 이거야.
제법실상의 도리를 적용을 딱 하면은 그만 가뿐해지는 거야.
가뿐해지는 거라.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안 나.
‘아이 그거 뭐 구태여 그렇게 미워할거 있나, 뭐 보복할거 있나.’ 이렇게 해서 자기에게 좋은 과보가 오고 좋은 갚음이 있는 거라. 그게 이제 보(報) 예요.
모든 것에는 다 그런 세밀하게 알고 보면은 전부 그런 갚음이 있어. 다 그게 이제 돌아오게 돼 있다고. 그게 보야.
우리 공부한 것 당장에 오늘 보가 돌아올 거라고.
공부한 것은 결과라면은
공부해서 그 효과 보(報)는 효과라 말하자면 효과.
그래 보신불(報身佛) 할 때 그것도 이제 어떤 공부한 효과로서의 부처님, 이게 보신불이거든요.
달로 치면은 그래요. 저기 저 하늘에 떠있는 달은 말하자면은 인(因)이 된다면은 달빛은 보(報)야. 그 다음에 이제 예를 들어서 물에 그림자가 비쳤다든지 하는 것은 과(果)야.
고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如是本末究竟等이니라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라 그랬는데
이와 같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에 평등하다.
본(本)과 말(末)이 구경(究竟)에 동등(同等)하다.
모든 존재는 전부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여시력(如是力) 여시작(如是作) 여시인(如是因) 여시연(如是緣) 여시과(如是果) 여시보(如是報)
이와 같은 본말(本末) 시종(始終) 그것이
구경(究竟)에 똑같다.
요러한 그 과정을 뭐 꽃 한 송이나 우리 한 인간의 삶이나 또 어떤 일이든지 예를 들어서 뭐 누구한테 미워하는 생각이 났다. 그것도 마찬가지, 그거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지만은 그것도 역시 이와 같은 그 여러 가지, 열 가지
십여시(十如是)라 그래요. 이걸 가지고 십여시라 그러는데
열가지 여시라고 해서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동등합니다. 구경에 평등하다.
이게 법화경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십여시장(十如是章)이라. 이걸 십여시장 그래요.
십여시(十如是)
여시(如是)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과(果) 보(報) 본말(本末) 이렇게 해서 열 번이죠.
중요하게 여기는 법화경의 아주 핵심도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이야기 해놓으면은 여기에 뭐 크게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이치는 없죠. 그러나 아께 이제 내가 한 마디로 제법실상을 조금 부연 설명했을 때 이러한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없음의 입장이라든지 있음의 입장이라든지
모든 존재의 있고 없음의 양면성의 진리,
진리의 양면성, 또 그럴 또 이중진리 그렇게도 해요.
이중으로 다 진리다 하는 그런 것.
“아 이게 진리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쉽게 받아들여져.
왜 나에게만 이렇게 원통한 일이 벌어지는가, 그래 자꾸 세상 원망하고 남 원망하고 그렇게 하게 되는데,
“아 이게 진리구나. 나에게 있어서는 최소한 이게 진리구나” 하면은 정말 그게 가벼워지는 거죠.
그래서 실다운 모습,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걸 이제 우리가 잘 받아들여야 되는 거죠.
10. 爾時世尊이 欲 重宣此義하사 而說偈言하사대
이시세존 욕 중선차의 이설게언
이 때에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爾時世尊이 欲 重宣此義하사
그 때에 세존이 이 뜻을 거듭 펴려고
而說偈言하사대
게송으로써 설해 말씀하사대
11. 世雄不可量이라 諸天及世人과
세웅불가량 제천급세인
一切衆生類는 無能知佛者니라
일체중생류 무능지불자
佛力無所畏와 解脫諸三昧와
불력무소외 해탈제삼매
及佛諸餘法을 無能測量者니라
급불제여법 무능측량자
“세상의 영웅이신 부처님은 헤아릴 길 없어
천신(天神)이나 이 세상 여러 사람과
여러 가지 종류의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을 알 사람 아무도 없네.
부처님의 힘이나 두려움이 없음과 해탈과
여러 가지 삼매들이며
그 밖의 부처님의 모든 법들을
누구도 측량하지 못하니라.
世雄不可量이라
세웅불가량(世雄不可量)이라 세상의 영웅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웅 부처님은 가히 헤아릴 수 없다.
諸天及世人과 一切衆生類는
제천급세인(諸天及世人)과 모든 천상사람, 그리고 세상사람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종류는
無能知佛者니라
무능지불자(無能知佛者)니라 부처님을 능히 아는 사람이 없다. 부처님의 세계를 능히 아는 사람이 없다.
요걸 이제 우리 마음의 깊고 깊은 내면에 온갖 능력과 무한한 생명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지혜와 자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몰라.
우리가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른다. 이렇게 해석해도 좋아요 이게.
저기 뭐 삼천년 전에 인도에 태어났던 그 석가모니 부처님을 두고 생각하면은 이게 안 맞아. 안 맞다고.
정말 진정 살아있는 부처님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마음대로 쓰고 작용하는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엄연한 이 신통묘용 이것이 진짜 부처이기 때문에 그 작용은 우리가 아주 억만 분의 일밖에 사용하고 있지 못하는 그런 작은 부분이라.
그것을 파고 들어가면은 우리의 마음의 내면에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어. 그 어마어마한 능력,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참으로 없다 그런 뜻입니다. 무능지불자(無能知佛者).
佛力無所畏와 解脫諸三昧와
불력무소외(佛力無所畏) 부처님의 힘과 무소외와 해탈과 그리고 여러 가지 삼매와 그리고
及佛諸餘法을 無能測量者니라
부처님의 여러 가지 나머지 법들을 나머지 도리들을 무능측량자(無能測量者)니라 능히 측량할 사람이 없느니라.
12. 本從無數佛로 具足行諸道이신
본종무수불 구족행제도
甚深微妙法은 難見難可了니라
심심미묘법 난견난가료
於無量億劫에 行此諸道已하시고
어무량억겁 행차제도이
道場得成果를 我已悉知見호라
도량득성과 아이실지견
본래부터 무수한 부처님을 따라
구족하게 모든 도를 행하였으므로,
매우 깊고 미묘한 그 법은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니라.
한량없는 억겁의 오랜 세월에
이와 같은 모든 도를 닦아 행하시고
보리도량에서 이루신 그 결과를
나는 이미 다 알고 다 보노라.
本從無數佛로
본종무수불(本從無數佛)로 본래 무수한 부처님으로부터
具足行諸道이신
구족행제도(具足行諸道)인 구족히 모든 도를 행한
甚深微妙法은
심심미묘법(甚深微妙法)은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은
難見難可了니라
난견난가요(難見難可了)니라. 보기 어렵고 가히 깨닫기 어렵나니라. 제대로 보는 게 아니예요 사실은.
우리가 뭘 누구를 안다 아니면 스스로 내가 내 자신을 안다 라고 이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백만 분의 일을 알까말까한 그런 정도라.
그래서 난견난가료(難見難可了)야. 보기도 어렵고 가히 깨닫기도 어렵다 그렇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가지고 이렇게 평생을 살지만은 정말 나의 모든 내용과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한 백만분의 일도 쓸까말까 하고 마는 거예요. 그래 이제 그것을 잘 개발한 도인들은 그걸 백 프로 다 쓰고, 석가모니 같은 이들이 그걸 백 프로 다 쓰고 가신 분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지요.
우리는 그런 엄청난 보물들을 두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해서 더욱 쓰는데는 뭐 더 어렵죠. 못쓰죠 그건.
조금밖에 못쓰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죠.
於無量億劫에
어무량억겁(於無量億劫)에 한량없는 세월에
行此諸道已하시고
행차제도이(行此諸道已)하시고 이 모든 도를 행하시고
道場得成果를
도량득성과(道場得成果)를 도량에서 과(果) 이룬 것을 보리도량이죠. 보리수 밑에서 과 이룬 것을
我已悉知見호라
아이실지견(我已悉知見)호라, 내가 이미 다 알고 보노라.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내용을 다 알고 다 본다.
13. 如是大果報인 種種性相義는
여시대과보 종종성상의
我及十方佛이 乃能知是事니라
아급시방불 내능지시사
是法不可示라 言辭相寂滅이니
시법불가시 언사상적멸
諸餘衆生類는 無有能得解요
제여중생류 무유능득해
際諸菩薩衆의 信力堅固者하고
제제보살중 신력견고자
諸佛弟子衆이 曾供養諸佛하고
제불제자중 증공양제불
一切漏已盡하야 住是最後身인
일체루이진 주시최후신
如是諸人等은 其力所不堪이니라
여시제인등 기력소불감
이와 같이 크나큰 과보인 가지가지 성품과 모양과 뜻을
오직 나와 시방세계의 부처님만이 이 일을 능히 아느니라.
이 법은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고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다른 여러 종류의 중생들로는
이해할 수가 없고
믿는 힘이 남달리 견고한 보살들만 아느니라.
그 외에 부처님의 여러 제자들이
일찍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도 하고
여러 가지 번뇌가 모두 다하여
중생의 몸을 최후로 받아 태어난
이러한 사람들의 힘으로서도
능히 감당할 수가 없느니라.
如是大果報인 種種性相義는
이와 같은 대과보(大果報)의 가지가지 성상의(性相義)를
십여시죠.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하는 그겁니다. 성품과 상의 뜻을 도리를
我及十方佛이
아급시방불(我及十方佛)이 나와 그리고 시방 부처님이
乃能知是事니라
내능지시사(乃能知是事)니라 이에 능히 이 일을, 이 일을 다 아느니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돼야 그 십여시(十如是)
모든 존재, 아무리 하찮은 국화꽃 한 송이 존재라 하더라도 그 궁극을 그 끝까지의 그 심오한 도리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만이 다 알 수 있다. 그런 말입니다.
是法不可示라
시법불가시(是法不可示)라 이 도리는 가히 보이기 어려움이라. 보이지 못한다. 그리고
言辭相寂滅이니
언사상적멸(言辭相寂滅)이다 말로써 어떻게 표현이 되지 않는다. 언사상에 적멸하다 라고 하는 말은 도대체 말로써는 표현이 안 된다.
뭐 부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고, 조사스님들이 얼마나 설법을 많이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실상의 그 깊고 오묘하고 불가사의한 그런 세세한 내용들은 말로 표현이 안 돼. 그래서 언사상이 적멸이다 그랬습니다.
諸餘衆生類는
제여중생류(諸餘衆生類)는 그런데 나머지 모든 중생의 종류들은
無有能得解요
무유능득해(無有能得解)요 능히 이해할 수가 없고, 이해하는 이가 없고
際諸菩薩衆의 信力堅固者하고
제제보살중(際諸菩薩衆)의 신력견고자(信力堅固者)하고 여기는 이제 여러 보살 대중들 중에서 신심의 힘이 견고한 사람을 제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문수보현 같은 그런 보살중에서 특히 신심이 견고한 그런 사람들은 안다 이거죠. 그런 사람들은 제하나니라 그런 말이예요.
諸佛弟子衆이
모든 불(佛) 부처님의 제자 대중들이
曾供養諸佛하고
증공양제불(曾供養諸佛)하고 일찍이 부처님께 공양하고 제불에게 공양하고
一切漏已盡하야
일체루이진(一切漏已盡)하야 일체의 번뇌가 일체(一切) 루(漏)가 이미 다해서
住是最後身인 如是諸人等은
주시최후신(住是最後身)인 최후의 몸에 머문, 그건 이제 중생으로서 더 이상 중생이 되지 않는 그런 순간에 이른 사람은, 이와 같은 여러 사람들은
其力所不堪이니라
기력소불감(其力所不堪)이니라. 그 힘이 감당하지 못할 바다. 그런 사람도 역시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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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