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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1-33)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은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포부(aspiration)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있습니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에 사로잡힌 설교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a)는 말씀보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b)는 말씀을 더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는 단순히 시간적인 앞섬이라기보다는 우선 순위에서의 앞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더해 주시면 감사하고 더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 현장의 목회자들이 “이 모든 것”에 바탕을 준 번영신학을 선호하거나 집착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개척한지 1년만에 주일 출석 성도 50명 이상의 교회를 섬기게 된 한 목사는 신학을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번영신학은 자신과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목회 현장에 들어서 보니 친숙해지지 않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복 받아 잘 살게 된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열심을 낼 수 있도록 하는데 효과가 매우 높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특히 그는 지금 당장 열심을 내게 만드는 것을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지만, 가족들만 앉혀 놓고 목회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장 목회의 어려움을 충분히 경험해본 저로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 조종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만 가진다고 해서, 항상 무조건 복을 부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한다면, 그 분은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신학은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채워주는 수단과 도구의 하나로 전락시켰습니다. 누군가가 비행선을 타고 머릿속으로 들어가 조종을 해야 비로소 자신이 소유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징가 제트”로 전락시켰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관”(神觀)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가난은 잘 믿지 못한 결과요, 부함이 잘 믿은 결과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번영신학에는 하나님의 본질은 물론 기독교 신앙자체를 왜곡하는 치명적 약점들이 즐비합니다.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우순 순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입니까? 욥의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는 해박했습니다. 온화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깊이 있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깊은 체험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임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친구를 대면했습니다.
그는 친구의 운명에 일어난 갑작스럽고도 대단히 심한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동방의 갑부였던 사람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제공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은 친구의 격렬한 부르짖음을 들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궁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은밀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욥의 애가에 답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그는 욥의 참된 경건과 덕은 물론, 여러 사람들을 교훈하고 무릎이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돌본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하여 애써왔음을 인정했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로한 것까지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처참한 고난이 임했습니다. 그때 그는 욥을 향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자네에게 힘을 주지 않았는가? 자네의 소망은 흠 없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던가? 정직한 사람이 갑자기 죽던가?”(욥4:6-7, 쉬운 성경)라고 말했습니다. 더욱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고 살라고 격려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의인들은 망하지 않으며, 정직한 자들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4:8)라고 말했습니다. 7절과 같은 논지(論旨)의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신학적 기초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는 세상을 질서 있는 우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롭고 선한 분으로 보았습니다. 반드시 선은 보상을 받고, 악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주는 도덕적입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세 번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징계를 받습니다.
또 우주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이 존재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 도다”(시34:15-16)라는 시인의 고백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b)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도덕적 질서라는 원칙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심고 거두는 도덕적 원리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가장 기본적인 논리에 불과합니다. 사실 그는 사태를 전적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배경은 천상입니다. 하늘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사단의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허락하신 일입니다. 거기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가끔은 알 때도 있지만 항상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과 방법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또 세상에는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73:3)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실제적인 신앙생활 속에는 우리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가장 기본적인 논리를 전혀 적용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분명 네가 알지 못하는 불의를 심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은, 당신의 선한 뜻을 위하여 사랑하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상벌(賞罰) 이외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어떤 원칙이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입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만을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난 증거라고 인정하려는 자세는 아집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땅의 관점과 하늘의 관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지극히 제한된 신학과 불완전한 이성을 근거로, 특정한 고난을 특정한 죄와 무리하게 연결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파스칼(Pascal)은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무한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이성은 연약한 것일 뿐이다. 자연적인 것들이 이성을 초월할진대,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불완전한 이성에 기초한 논리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당한 일에 관한 한, 그의 주장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오늘날, 교회에 안에 팽배한 번영신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신앙의 본질 자체를 흐려놓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목사의 말에 순종하면,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면, 헌금 잘하면 무조건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신앙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지도 않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초인(超人)으로 둔갑시킵니다. 복을 기원하는 목사와 복을 받기 원하는 성도 사이에 있어서는 안될 서열을 매깁니다. 자신을 하나님 섬기듯 헌신적으로 섬기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사기 치고 있습니다. 도무지 상식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태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때로는 꿈과 깨달음 등 자신의 경험한 것에 특별한 권위까지 부여하기도 합니다. 엘리바스가 그랬습니다. 12-21절입니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어느 날, 막 잠자리에 들려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를 들은 그는 마음이 뒤숭숭해졌습니다.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를 덮었습니다. 뼈마디 하나 하나가 떨렸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한 영을 느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름이 끼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습니다. 잠시 후, 영은 그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이 자신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영은 죽을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으며,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깨끗할 수 없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불완전하고 지극히 유한한 인간은, 어떤 경우를 통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있는 인간은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아침에는 살아 있다가도, 저녁이 오기 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생명 줄이 끊어지는 순간,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도 펼쳐보지 못한 채 즉시 그냥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한편, 엘리바스가 이렇게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말한 이유는, 욥에게 임한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외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과응보에 입각한 자신의 주장에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번영신학에 사로잡힌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시고, 평소와는 다른 영적 체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정죄하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데 쓰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엘리바스의 말은 구구절절이 다 일리가 있습니다. 인생은 다 연약하고 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망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잘못과 어리석음과 불의와 잘못된 선택 때문에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금만 정신차리면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러다 결국 가슴을 치며 잘못 살아왔다고 후회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 엘리바스의 말은 백 번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일반적인 원리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하고, 정직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번영 신학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기입니다. “나는 번영신학을 증오한다! 부와 건강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쓰레기다”라는 파이퍼(John S. Piper) 목사의 말은 사실입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진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때지 않은 굴뚝에 연기 나는 일은 절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의인에게만 무조건 복과 건강과 형통이 임하고, 악인에게만 저주가 임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긴 하지만, 특별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서는 길밖에 없다고 단언하지 마십시오. 세상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 곧 경륜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부에 바쳐진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를 바르게 정립하십시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지라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그것을 통해 믿기만 하면 무조건 복이 주어진다는 번영 신학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형제 자매를 정죄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1. 욥기 강해(고난과 은혜 - 데이비드 앗킨슨 / 김진우, IVP)
2. 시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달라스 아쳐 / 정명화, 새순출판사)
3. 욥기 강해(C. 베일 / 신득일, 고신대 출판부)
4. 지혜의 위기(헐버트 라키어 / 윤종석, 기독 지혜사)
5. 신앙의 마스터 클래스(정병선, 대장간)
6. 욥기 이해(윌리엄 헨리 그린 / 윤영탁, 엠마오)
7. 고난이 가져온 축복(김서택, 생명의 말씀사)
8. 귀로 듣다가 눈으로 뵈오니(김흥규, KMC)
9. 반전의 희망, 욥(최형묵, 동연)
10. 욥기 강해(성선호, 금요철야 설교)
11. 욥기 설교(이재철, 100주년 기념교회 새벽설교)
12. 생명의 삶(SWIM) 묵상 자료
13. 번영 신학 비평(http://cafe.daum.net/worldjesuscell/RMt5/3)
14. 한국 교회여, 번영 신학에서 벗어나라.(이병왕, http://blog.naver.com/jnpower/150020963299)
15. 4영리에 기초한 성공/번영 신학의 파산(김준우,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19#)
16. 번영 신학에 대해(최승호, http://holynara.org/ez2000/ezboard.cgi?action=read&db=gan&dbf=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