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 가울호
기획․1
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정여송
충북 영동 출생․부경대학교 대학원(문학석사)․1995년 수필과 비평 등단․2005년 무원문학상, 2006년 신곡문학상 본상․한국문협, 부산문협,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현대수필문학회, 수필문학진흥회 회원․작품집 『힘쓰는 여자』, 『마중물』
│대표 작품│
千字文 외 4편
정 여 송
千 개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모은다. 구백구십구 개도 안 되고 한 개가 덤으로 얹혀도 싫다. 반드시 千 개라야 한다. 그것을 메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 매의 눈초리가 닿지 않고 야수의 왕자도 밟지 못한 길. 거닐면서 남다른 생각을 건져 올리고 낯선 언어를 찾아내어 새로운 文型을 그린다. 야무지고 익살스러우면 더없이 좋겠지.
한석봉 필 천자문. 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言才乎也로 끝나는 그 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들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 책임과 의무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 차서 넘친다.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질서와 체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내가 쓰려는 천자문은 그런 대단한 글이 못된다. 천자문에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다. 하지만 쌓아 올린다. 정자든 초가든 슬래브든 빌딩이든 글자로 집을 짓는다.
字판을 두들긴다. 상상의 줄이 끊기니 손가락도 따라 쉰다. 아무리 타자치는 속도가 빠르다 해도 생각이 앞서지 않으면 허사다. 이야기 길을 뚫으려 자판을 들여다본다.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세상이 천자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자판 위에도 있지 않은가.
있다, 있어. 모든 것이 있다. 육친과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의 정이 있고, 어릴 적의 봉이와 경옥이와 명자가 있다. 천사의 아름다운 노래와 악마의 화려한 춤이 있다. 꽃, 바람, 구름, 기쁨, 슬픔으로 돌고 도는 계절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마음속 깊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유행가 가사도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도로 님이 되는 인생사라나. 웃음과 울음이 있다. 육체를 치유하는 힘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희망의 길을 가리키는 금빛 이정표가 있다. 온갖 삶의 근본이 쫙 널려 있다. 백여섯 개 자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있다, 있어.
文을 세운다. 건축가가 되어 집을 짓는다. 닮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겉모양만 다르게 줄지어 선 카페들은 질색이다. 볼품은 없지만 들어서면 편안해지는 집.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참멋을 아는 사람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집. 외형보다 내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말을 걸 듯 겸손하게 다가오는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 그런 글집을 짓는다. 그곳에서 사람을 읽고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보수가 있다면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 등의 평가가 아니다. 언어를 다듬어서 집을 짓는 즐거움이고, 마음속에 진득하게 똬리를 튼 생각의 짐을 벗어 버리는 해방감이다.
무엇이 부러우리. 무엇이 두려우리.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은가. 정녕 엽기다. 가로 열쇠와 세로 열쇠를 풀어 가며 퍼즐 게임 하듯 열 손가락은 신이 나서 뚝딱 뚝딱 文을 세운다. 千字文이란 현판을 내어 건다.
세상 나누기
대박 터졌다!
커다랗게 부푼 흥부네 박 하나가 두 동강이로 갈라져 나둥그러진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 박을 켜던 사람들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두 쪽이란 생각에 잡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상품 광고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어디를 배경으로 잡을까. 어떻게 스케치를 할까. 무슨 색상을 입힐까. 몇 달 며칠을 생각에 잡혀 끌려 다닌다. 하나인 세상을 명징하게 나눠 봐? 짓궂은 착상에 갑자기 닻을 내린다. 옳거니! 불끈 쥔 주먹이 허공에 대고 힘을 찍는다. 기를 모은다. 포개 놓은 기왓장을 깨듯 손날을 세운다. 내리친다. 강 얼음이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음양(陰陽), 선악(善惡), 명암(明暗), 흑백(黑白), 진퇴(進退), 천지(天地), 미추(美醜),
진위(眞僞), 주야(晝夜), 종횡(縱橫), 강산(江山), 이해(利害), 냉온(冷溫), 내외(內外),
시종(始終), 빈부(貧富), 왕래(往來), 고저(高低), 장단(長短), 상하(上下), 경중(輕重),
전후(前後), 좌우(左右), 유무(有無), 강약(强弱), 요철(凹凸), 피아(彼我), 건습(乾濕),
출몰(出沒), 공사(公私), 허실(虛實), 자타(自他), 신구(新舊), 이합(離合), 좌립(坐立),
상벌(賞罰), 출입(出入), 손익(損益), 득실(得失), 수지(收支), 다소(多少), 원근(遠近),
이동(異同), 개폐(開閉), 시비(是非), 단복(單複), 발착(發着), 귀천(貴賤), 생숙(生熟),
진가(眞假), 청탁(淸濁), 완급(緩急), 송수(送受), 문답(問答), 호부(好否), 정동(靜動),
승패(勝敗), 영육(靈肉), 찬반(贊反), 표리(表裏) …
영영 맞서서 경쟁만 할 줄 알았다. 웬일인가. 상극에 치닫는 단어가 둘이서 손을 잡고 나란히 붙어 선다. 서로 다르면서 어울리는 방패와 창처럼. 우호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방어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 상호 모순된 충동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둘 사이에는 1:1의 평행선상을 유지하면서도 1+1=2의 순리를 빚어낸다. 손을 잡는 것은 기댈 수 있음의 여지이고 서로 돕자는 증표이며 합하여 키우는 힘이다. 그래도 둘의 힘보다는 셋의 힘이 클 터, 다시 내리쳐 셋으로 나눈다.
천지인(天地人), 의식주(衣食住), 진선미(眞善美), 육해공(陸海空), 유불선(儒佛仙),
상중하(上中下), 불법승(佛法僧), 대중소(大中小), 풍여석(風女石), 공가중(空假中),
지인용(智仁勇), 양상제(養喪祭), 일월성(日月星), 자검겸(慈儉謙), 법보응(法報應),
덕공언(德功言), 전현후(前現後), 정신기(精神氣), 조중석(朝中夕), 군사부(君師父),
적녹청(赤綠靑), 초중종(初中終), 지덕체(智德體), 적황청(赤黃靑), 위촉오(魏蜀吳),
조용조(租庸調) …
삼 행에서 풍겨나는, 숨 막히는 언어의 진경을 발견한다. 삼총사의 의리가 서린다. 셋의 어울림. 톡톡 튀면서도 서 있는 순서와 차지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그어진다. 그러나 생각이 자꾸 막히면서 둘만큼 잘 나눠지지 않는다. 억지가 붙는다. 게다가 불안한 한 가닥 기분은 어찌하지 못한다. 힘은 커졌으나 세력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 고독감이 창조의 힘을 분출시키는 도구라 할지라도 셋 중 하나가 너무 외로움을 탈 것 같다. 한 번 더 내리쳐 넷으로 나눠 그 마음을 보듬는다.
천지일월(天地日月), 동서남북(東西南北), 춘하추동(春夏秋冬), 건곤이감(乾坤離坎),
회삭현망(晦朔弦望), 단주모야(旦晝暮夜), 남녀노소(男女老少), 수화토석(水火土石),
효제충신(孝悌忠信), 도천지왕(道天地王), 경사자집(經史子集), 지수화풍(地水火風),
갑을병정(甲乙丙丁), 흥망성쇠(興亡盛衰), 생로병사(生老病死), 동서고금(東西古今),
신언서판(身言書判), 건곤간손(乾坤艮巽), 기승전결(起承轉結), 가감승제(加減乘除),
이목구비(耳目口鼻), 형제자매(兄弟姉妹), 매난국죽(梅蘭菊竹), 연월일시(年月日時),
길흉화복(吉凶禍福), 사농공상(士農工商), 조율이시(棗栗梨柿), 시서예악(詩書藝樂),
문행충신(文行忠信), 원형이정(元亨利貞), 관혼상제(冠婚喪祭), 예의염치(禮義廉恥) …
힘도 힘이려니와 꿍짝꿍짝 율동이 있으니 흥이 돋는다. 네 박자는 안정감마저 불러와 버팀목으로 선다. 나 홀로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인 중창이다. 사방 풍광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넓은 파문은 여운을 크게 그린다. 가늠하기 어려운 통찰력과 포용력을 싸안고 있다. 장성한 4형제가 나란히 선 듯 든든해지기도 한다. 호연한 기운이 솟는다. 내친김에 다시 한 번 더 내리쳐 다섯으로 깨트린다. 생각을 굴리고 펴고 다듬는다. 그런데 내내 보물찾기만 한다.
희노욕구우(喜怒欲懼憂),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
지신인엄용(智信仁嚴勇), 황백적홍청(黃白赤紅靑),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한열풍조습(寒熱風燥濕), 시청후미촉(視聽嗅味觸),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청황흑녹적(靑黃黑綠赤),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희노애락욕(喜怒哀樂慾),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개걸윷모 …
찾아낸 보물 다섯 조각을 주섬주섬 꾸러미에 꿴다. 다층적이고 풍부한 울림을 토해 낸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든다. 도와 모 사이에 개와 윷이 끼어 서자 걸이 또 그 사이를 파고들어 나란히 선다. 글자들이 늘어서서 동갑내기들 모양으로 어깨동무를 한다. 하얗게 쌓인 눈이 밭고랑을 없애듯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엇비슷해진다. 나누어질수록 차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어우러진다. 가까이서 보면 색종이만 있을 뿐인데 멀리서 보면 일사불란한 변화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매스 게임이듯 공동체를 이룬다.
무엇이든 힘들여 이루면 애착이 가기 마련이다. 나눠진 조각 세상을 열 맞춰 세운다. 두 조각, 세 조각, 네 조각, 다섯 조각. 글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뜻을 밝히는 범위가 나눈 만큼 넓어진다. 나눌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기쁨처럼, 인정처럼.
쪼갠 조각들을 유수히 들여다본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시근이 멀쩡하고 당당하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비장한 구호는 내세우지 않는다. 서로 손잡고 뭉쳐야 여물고 단단해진다는 이치를 꿰뚫고 있다.
얼마든지 나누고 자르고 쪼개어 보라. 아무리 가른다 해도 세상은 언제나 하나일 뿐이다.
마중물
여기 있었네그려. 이런 산골로 들어오니 만날 수 있구먼. 얼마 만인가. 근 사십년만이 아닌가 싶네. 그러고 보니 우린 죽마고우일세.
내가 초등학교라는 데를 막 들어갔을 때 말이야. 그 시절에 자네는 신식이란 바람을 몰고 왔어. 어린 눈으로 처음 봤을 때 괴물이라고 생각했었지. 사람 형상을 했으면서도 머리가 없었고, 반기듯 양팔은 벌렸지만 짝짝이 팔을 가졌고, 한 다리로 서 있는 것이 볼썽사나웠다네. 야트막한 판자 지붕 밑에 혼자 있는 모습은 왜 그리 측은해 보이던지. 선생님이 자네를 가리키며 펌프 우물하던 생각이 생생하구먼.
차츰, 여느 동네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지. 자네는 젊은 아낙이었던 우리 어머니들의 물 긷는 힘을 덜어 주었어. 퍽 좋아들 하셨다네.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속 얘기를 흥건하게 토해 냈잖아. 알 수 없었던 것은 열심히 일하다가도 쉼이 길어지면 한없이 나태해졌어. 피식피식 바람 새는 소리도 냈지. 그러다가 한 바가지 물로 목을 적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지런쟁이가 되곤 했다네.
그러네. 자네에겐 몸속 깊이 간직한 많은 물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작은 물이 있었다네. 한두 바가지의 그 물 말일세.
깊은 물을 마중하러 나가는 물
물씨
마중물
마․중․물, 마중물, 마중물
어감이 좋아 자꾸 불러 보게 되는구먼. 마중 나가는 그리운 추억 때문인가 보네. 우리 집에는 마당 한가운데 너른 화단이 있었는데 꽃나무가 아주 많았다네. 그 숱한 꽃 중에서도 수수꽃다리(라일락)와 불두화와 능소화는 지금도 가슴속에 피어 바람만 불어도 일렁거리지. 향나무 가장자리에 빙 둘러 피던 노란 달맞이꽃은 또 어떻고.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무렵이면 들려주던 신기한 소리를 자네도 들어 봤을 거야. 톡, 톡톡, 톡톡, 톡…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달마중하느라 벙그러지던 그 소리를 말이야.
내겐 언니가 넷이 있지. 언니들을 참 좋아했네. 셋째와 넷째 언니가 외지에 나가 공부했는데 주말이면 집에 왔어. 언니들을 마중 가서 손잡고 걸어오던, 양옆으로 키 큰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길. 마중이란 말만 들어도 그 길은 곰살스럽게 눈물샘 위로 떠오른다네.
내가 공직에 있을 때 말인데, 좀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 있었지. 그런 날이면 노모도 어김없이 나를 마중했어. 그때도 손을 잡고 걸었지. 어머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무언의 사랑을 흘려 보냈다네. 그때마다 전광석화가 지나가는 듯한 전율을 느끼곤 했어. 어떠한 불덩이가 그보다 뜨거울까. 그리워서 얼굴 내미는 추억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열도 아니라네.
고요한 대낮. 실로 오랜만에 한적한 산골에서 자네를 만나니 반갑네그려. 손 한번 잡아 볼까나. 목이 마른가 보구먼. 함지박에 담겨 있던 물이라네. 한 모금 마셔 보게나.
보이지 않지만 자네 몸속으로 흘러드는 마중물의 몸짓이 보이는 듯하네. 자네의 한 팔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힘질을 해 보네. 콸콸콸콸… 호탕하고 질퍽한 웃음소리를 쏟아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네그려.
겉은 차갑고 흉해도 속은 따스하고 늡늡하던 자네 아닌가. 갈증 난 목을 축여 주는 한 모금의 물을 감지덕지하며 몇 십 배, 몇 백 배로 불려 주는 마음. 본받아야 할 심성이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몰라. 지금은 아는 게 많은 것보다도 가진 것이 풍족하여 흥청거리며 쓰는 수도족(水道族)이어야만 알아주는 세상이라네. 자네 같은 펌프족은 여운 가득한 古자가 붙었으니 이제는 동화 나라로 이민이나 가서 터를 잡아야 할걸세. 넉넉하지만 함부로 퍼내지 아니하는 자네의 뜻을 알기나 하겠어. 마중물로 먼저 입맛을 당기려는 자네의 고집이 난 좋네그려. 운치야 우물족이 최고이긴 하지, 소박하기도 하고. 그러나 두레박을 올리고 내리는 수고만큼만 주는 깍듯함이 있잖아. 흘러넘치게 퍼 주거나 덤으로 얹어 주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는 고지식을 가지고 있지.
해가 우리를 보며 따스히 웃고 있네그려. 자네에게서도 온기가 흐르는구먼.
마중물에 대해 생각을 해 보네. 그저 한 바가지의 물인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몸속으로 들어가 고인 물을 흔들고 깨워서 세상 밖으로 솟구치게 하는가. 필경 제물로 쓰는 희생양 같네그려. 자비지심이라고 해야 할까. 운동하기 전에 몸을 푸는 기본 체조라고 해 둘까. 아니면 일상을 촉진시키는 자극제로도 풀어 보고 싶구먼.
이 보게. 내 삶에 있어서도 마중물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 나도 그거 하나 소중히 간직하고 싶네. 마시지 않고 다시 토해 내야 하는 첫 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들이켜면 삶의 의욕이 살아나고, 아름다운 어휘들이 쉴 새 없이 솟구쳐 문장을 이루도록 말일세. 그래서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향기를 남길 수 있으면 좋겠네. 간혹은 바다와 같은 왕양한 기상이 뿜어 나오고, 파도와 같은 격렬한 정열도 부려 보기도 하며 구름같이 발발한 야심도 펼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함께 있어도 저마다 고독한 세상이라네. 그래서 마중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립다네. 책 속에서 만난 성인들의 희생심이나 보리심에서 볼 수 있었던 그것 말일세. 가끔은 수고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가는 낮은 자리의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지. 그들은 빛보다도 소금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네. 밝지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빛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스스로 녹으며 말없이 도와주는 소금 말일세.
그 사람들의 삶이 끌어올린 물로 나는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며 화분에도 시원하게 뿌린다네.
나는 누구의 마중물이 될꼬!
목변석(木變石)
몇 천만 년이 아롱져 있다. 침묵이 두껍게 흐를 뿐 어느 한 곳에서도 느슨함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장구한 세월이 농축된 만큼 단단함의 서슬이 빛을 낸다.
멀리서 볼 땐 영락없는 나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돌덩이다. 손으로 만져본다. 차다. 생각에 잠겨 응시하면 어떤 덩어리의 형체가 다가오고 또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텅 빈 공간으로 펼쳐진다. 경북 영덕을 지나 강구라는 곳. 경치 좋은 해변 도로의 휴게소 같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것들이 모여 있었다.
규화목이다. 광물화된 나무의 유체(遺體). 미라. 제2전시실에는 그것들의 속내를 발가벗기기라도 할 듯이 단면을 매끄럽게 가공하여 전시해 놓았다. 표면에는 쌓인 시간이 눌려져 있고 발자취가 그려져 있으며 기쁨인가 고통인가 싶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알지 못할 어떤 뜻을 한입 크게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가가 가만히 안아 본다. 그것에 녹아 있는 삶을 마음으로부터 읽는다. 희미한 여백만 보인다. 조그마한 손전등이라도 들어야 할까 보다. 다시 닭이 모이를 쪼듯 낱낱으로 쪼갠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가 되고 만다.
세월이 과도하게 흐르면 나무도 돌이 되는가. 나무는 돌이 되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돌은 나무가 되기 위해 열병을 앓았나 보다. 신탁이듯 운명이듯 만난 돌과 나무. 그것들은 서로 배격하거나 대립하지 않았다. 되레 희망을 가지도록 위로하였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나가 되었다. 그랬더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가 사라졌다. 확고한 사실이나 진리라고 여겨 왔던 것들도 무너져 내렸다. 나무 반, 돌 반이 될 수 있었던 증빙 서류감이다.
옛날, 아주 멀고 먼 그 옛날. 수용성규산은 진작 알아차렸다. 생물은 죽으면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또한 어떤 특별한 환경을 만들어 주면 화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랬기에 지각 변동으로 쓰러지게 된 나무를 살려내고자 모험을 걸었다. 보통을 넘어선 생각으로, 뭔가 다른 관점으로, 보이는 면이 아니라 숨겨진 다른 면을 이해하려고 깊이 헤아렸다. 속 깊은 근심 걱정이고 거부할 수 없는 애정이었다.
어쩌면 괜한 일이라며 빠지지 말라고 붙잡는 생각과, 벅찰 정도의 커다란 짐이 될 수 있다는 부담과, 너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유혹 사이에서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했을 성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다면 하는 것이고 하기로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밀고 나갔다. 수용성규산의 숭고한 흐름이 시작되었다. 무지하게 오랜 세월을 쓰러진 나무 속으로 사려 깊게 배어들고 또 배어들었다. 산소를 차단시키고 침입자와 전투를 벌이며 나무를 보호하였다. 지극 정성으로. 그 대담성은 반 범죄적이기도 하지만 영웅적인 행위이기도 하였다. 수용성규산 스스로를 축복하는 질탕하면서도 엄숙한 축제였다.
쓰러진 나무의 속내도 엿들어 본다. 꺼져 가는 생명에 불꽃을 댕겨 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방랑자가 되었다. 애먼 일이었으니 그대로 소멸되기란 억울한 부분이 있지 않았겠는가.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이었다. 때마침 찾아든 수용성규산. 나무는 정체불명의 말뚝에 강하게 묶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불안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도 생겼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무서운 밤길을 같이 걷는 기분이었겠지. 한두 걸음 옆에 동행자가 있다는 믿음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을까. 머리는 여러 군데를 바라볼 수 있지만 마음은 바보처럼 한군데만 볼 줄 아는 법. 단 하나인 마음의 눈으로 해바라기를 할 수 있었던 나무는 수용성규산에 온전히 의지한 채 부활을 꿈꾸었다.
하얀 규화목. 나무의 결은 숨을 쉬고 박힌 돌은 빛을 내며 조화를 이룬다. 줄거리 없는 섬세한 영상만으로 긴 울림을 주는 드라마다. 그것들은 암흑과 위험으로 가득한 이야기나, 끝부분이 걱정되어 알기 싫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대하거나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 나무는 그저 변화무쌍한 기후에 시달리다 쓰러졌고, 수용성규산은 주어진 길을 어김없이 조금씩 성숙의 자세로 나아갔을 뿐이다. 그런 연후에 제 속도에 맞춰 운동량을 늘이듯이 천천히 변화하였다. 점점 화석화되면서 오팔처럼 수정처럼 굳어져 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져 거대한 규화목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규화목을 걸작, 사랑의 완성이라고 말하련다. 세상을 향해 영원한 사랑이라고 소리치련다. 사랑가를 창하듯이 노래하련다. 갖은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면서 끌어안은 불멸의 사랑. 나무는 돌을 믿어 주었고, 돌은 나무에게 힘이 되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이해를 넘어선 완전한 사랑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복잡다단한 사람과 단순한 사람과의 화합을 만든다. 이념과 사상이 다른 나라와 나라의 벽을 허문다. 나무와 돌이 하나가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창조해 낸다.
규화목을 에로스가 만든 문화재라 일컫는다.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요, 전설이며 신화이다. 그래서인가. 그것 앞에서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되었다.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것들의 힘겹고 두려워하던 모습, 흉측하면서도 황홀한 상처, 아름다운 듯 고귀한 자태에 조용히 옷깃을 여민다.
트랜스젠더
꽃의 향기는 여하튼 매혹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은 소리 나지 않으나 울림 있는 명문장과 같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듯이 추는 춤이고, 어느 누구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부르는 노래이며,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 같은 사랑이다.
꽃의 자태와 향기는 여인을 연상케 한다. 연하고, 부드럽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기에 꽃=여자의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그래서인지 뭇 여인들은 꽃에 비유되는 것을 우쭐한 기쁨으로 여긴다.
가끔 예외를 만난다. 본디 예외는 독특한 존재다. 외돌토리의 슬픔을 독차지하는가 하면 보통을 초월한 깊은 구석을 지니고 있다. 특별한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평범한 무리로부터 따돌림 대상 1호다. 그러나 그것을 서러워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밤느정이에서 예외의 능청스러움을 발견한다. 진심이란 꽃말과는 유다르게 꽃의 생김새부터 레게머리를 한 청년의 머리채 모양이다. 아니 도가머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향기 또한 여느 꽃들과는 달리 특이한 색조를 띠고 있다. 여자들이 밤느정이에 비유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연유가 된다.
산골짜기 잔설들이 녹아내리는 소리,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소리, 여인들의 마음이 날아다니는 소리, 봄바람에 실린 그런 소리들이 귓등을 타고 놀 때면, 연초록 잎들이 산날망으로 기어오르고 물푸레나무가 물빛 마음으로 흥얼거린다. 하얀 밤느정이도 예서 제서 피기 시작한다. 점점… 페스티벌이 절정을 향해 무르익어 가고, 초대된 벌떼들의 향연도 펼쳐진다. 뭉뭉한 열기가 틈도 없이 운집해 있다.
밤느정이는 꽃 잔치가 무색하지 않도록 향내를 쉴 새 없이 토해 낸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고, 은은할수록 사랑받는다는 정황을 모르나 보다. 풍족한 것만이 능사가 아닌데, 넌지시 찔러주는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분별없는 저 헤픔을 어찌 막을까. 제 성질이고 제 고집이고 제멋인 것을. 그러나 제멋에의 도취가 남부럽잖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가까이하기엔 왠지 거북스러운 강한 냄새는 숨 쉬기조차 용천하다. 마치 후손에게 물려주는 미토콘드리아의 DNA처럼 나타나는, 페로몬 향기라고 해야 할까. 남자의 그 냄새와 흡사한 꽃 비린내를 풍겨낸다. 그 특이함과 강렬함은 멀미마저 일으킨다.
오호라! 남성을 상징하는 꽃? 그럴 리가? 아니,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의 나무에서 잎겨드랑이를 통해 피어나는 미상(尾狀) 꽃차례이고, 소스라칠 일은 이 중 짙은 향기가 수꽃에서 난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낯익었던 현실이 낯설어진다.
억지스런 발상이라 해도 좋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얘기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해도 할 수 없다. 가끔은 환상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도 더 사실적일 때가 있다. 말이 된다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해서 나는 밤나무에서 자연의, 자연에 의한 성전환 수술이 자행되고 있다고 감히 상상을 한다.
열광의 축제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밤느정이는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야기와도 같은, 남성적에서 여성적으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천천히, 몇 달 동안 시나브로 진행된다. 그 시술은 은밀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남성적 밤느정이가 하염없이 지고 또 지면서 포침을 박은 각두로 성을 쌓고, 단단한 갈색 껍데기로 담을 치며, 얇은 속껍질로 챙챙 울을 여미는, 여성적 변신에의 혼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여자이고 싶은 그 마음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소망이어라
온전한 여인이 되기까지 아무도, 심지어 하느님도 엿보지 않는다. 시간마저 말없이 잠잠하게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만분의 일이나마 얻을 무엇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허기인지 목마름인지 모를 그 기다림을 가져야 한다.
밤송이는 두어 계절이 지나도록 자연을 따르고 섬긴다. 그리고 내기에 생을 바친다. 지독한 뙤약볕의 단근질을 견뎌내기. 심술 고약한 태풍에 맞서 이겨내기. 즙액을 빨아 먹는 왕진딧물, 잎살을 먹는 데 죽살이치는 깍지벌레,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어스렝이 나방의 헤살을 버텨내기에 목숨을 건다.
그러구러 좁은 각두 속에서 인내와 함께 여물어 가고, 소슬바람이 불면 단정한 제 매무새를 드러낸다. 차 오르는 몸을 죄던 철퇴 같은 갑옷을 찢는다. 성곽을 무너뜨린다. 아니 남성적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굼뜬 듯한 무던함과 진중한 참을성과 질박한 성품이 있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굴속에서 사람 되고자 빌며 기다리며 웅녀가 된 수곰처럼.
딱딱한 밤송이. 그 껍질의 완강함은 융통성이 없어선 줄 알았다.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말하려는 고백인 것을 차마 몰랐다. 아뿔싸!
찢어진 각두를 반쯤 걸치고 드러낸 알밤이 토실하다. 탐스러운 자태에 마음마저 풍성해진다. 고동색 외피에 자르르 흐르는 윤기에서 앞가르마 곱게 빗어 넘긴 여인의 쪽 찐 머리가 엿보인다. 단정함과 곧은 절개가 섬광처럼 스친다. 조심스럽게 겉피를 벗기자 보늬 차림에서 속치장을 잘한 속곳 바람의 여인이 아름답다. 가슴을 동여맨 속치마의 말기가 얼비친다.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는 여인의 고고함과 넋이 묻어 있다. 다시 보늬를 벗긴다. 몇 달 동안 하양을 달이고 달인 상앗빛 속살이다. 보는 이의 숨소리를 잦게 하는 서늘하면서도 고결한 백자가 아닌가. 터질 듯이 차 오르는 만월이요, 어떤 삿됨도 끼어들 수 없는 꽉 참이다. 절세가인이다.
│정여송 작품론│
심미적 취향, 절경의 미학
― 정여송의 수필을 중심으로
권 대 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열며
정여송 수필에 대한 이 평설은 수필이란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어야 한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문학적 접근, 즉 수필이 일상의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문학적 장치를 예술적 장치로 승화시켜 나가는 노력하에서 집필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다. 수필의 예술적 접근만이 수필의 잡문성을 해소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폄하되어 온 수필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여송 수필은 적격이다. 그래서일까. 여러 평론가들이 앞 다투어 그녀의 작품에 꽃을 얹었다. 경이와 찬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정여송의 수필은 누구나 쓰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써지는 글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인식이 세상의 저변에 깔리지 않는 한, 수필의 운명은 서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정여송 본격수필이 갖는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평자는 오래 전부터 이제 수필 쓰기의 출발점은 문학적인 취미에서가 아니라 심미적 취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적어도 감성과 지성의 균형 있는 조화를 통해 사물과 사회 현상의 실재와 작가 스스로의 인생관을 동시에 노출한 작품이 나와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심미적 의무와 무엇이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아는 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가 붓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필이 문학 단계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상위 개념으로 나아간 예술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는 식으로 진술되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런 질문에 답을 주는 정여송의 수필을 감상해 보자.
II. 심미적 취향과 절경의 미학
정여송은 부산 출신으로 1995년 격월간 『수필과 비평』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필마의 기운을 머금고 오직 본격수필만을 위해 실험 정신과 낯설게 하기 수법 등의 작가 정신과 창작 기법의 연마를 통해 좋은 수필을 써 왔고, 여러 수필평론가들로부터 대단한 수필가라는 호평을 받아 온 작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수필을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새로운 수필 쓰기를 통해 이제 그 내용부터 작법까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상식과 편견, 그리고 평범을 온몸으로 거부하면서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을 새로 보기, 다시 보기, 낯설게 보기 등을 통해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수필을 통해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수필을 읽고 나면,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예술성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요, 문학성이 없으면 유명한 수필가가 쓴 글이라 해도 수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을 갖춘 글 가운데 예술성, 즉 문학성이 제고된 수필다운 수필만을 수필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수필의 문학성이란,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어 가는 구조적인,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방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강렬한 제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 그녀의 실험적 수필, 「천자문」은 삼단 구성으로 초장이 두 단락 333자, 중장이 두 단락 333자, 종장이 두 단락 334자, 도합 1,000자로 된 수필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로 된 천자문을 한글 천자로 새롭게 형상화한 것이다. 이 수필은 발견의 전형이다. 「세상 나누기」란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이자 성어가 60개, 삼자 성어가 32개, 사자성어가 32개, 그리고 오자 성어가 15개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자가 하나의 단어가 되어 세상의 이치를 이루는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세 자, 네 자, 다섯 자로 확대하면서 상극의 반의적 어의를 상생의 가치로 끌어올리는 그녀의 이원적 세상에 대한 인식은 상식을 훌쩍 넘어선다. 치밀한 전략적 글쓰기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창조적 사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적 사유와 관조 미학이 빛나는 「목변석」은 세련된 응시의 결과물이다. 「마중물」은 형이하학적 제재로부터 형이상학적 인생의 원리를 구축한 수작이다. 「트랜스젠더」 역시 참신한 관조가 빛나는 상상력의 보고요, 절경이 놓아진 그림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문학으로서 수필이요, 예술로서 수필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을 짓는 일이듯이, 수필가는 마음의 풍경을 넘어서서 독자에게 절경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 절경이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풍경을 낯설게 느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 인상과 절경
본래 수필은 작가 자신의 자기탐색 혹은 자기성찰의 성격이 짙은 산문문학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수필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 삶에 자신의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그만큼 독자가 수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해석하는 데 드는 품은 타 장르에 비해 그리 크지 않게 되고,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수필은 이해와 해석이 용이한 언어적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수필적 특성과 한계 때문에 수필은 예술의 문턱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잡문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정여송은 이런 수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넘어서서 예술로서의 수필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려면 재료의 차원을 넘어 디자인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논어』에서도 문질빈빈이라 하여 표현을 중시하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술성이나 마음의 풍경에 중점을 두는 서정성에 더하여 미학성을 추구하여야 하는 일은 본격수필 창작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언뜻 그녀의 수필이 생경하거나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예술수필은 본질적으로 인상적인 모습과 절경을 추구하므로 그런 낯선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전략적으로 글을 쓰려는 노력은 바로 본격수필가가 가져야 할 자세다. 정여송의 수필을 읽으니, 문득 칸트가 말한 심미적 취향이란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일상적인 것을 인상적으로 포착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컬러로 칠하는 데 재주가 뛰어나다.
예술수필은 경계를 넘어서는 데서 생성된다. 그 경계는 바로 일상성이다. 일상성에서의 이탈에서, 예술은 싹을 틔우는 것이다. 누구나 겪는, 누구나 아는, 누구나 보는 일상적인 풍경이 아니라 일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다가오는 인상적인 절경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절경을 독자에게 느끼게 해야 한다. 천 개의 글자를 모으고, 자판을 두들기고, 문을 세운다로 요약되는 「천자문」은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는가.라는 문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 천 자의 글자를 이용해 아무도 설계해 내지 못할 언어의 집을 짓고, 문패까지 단 그녀는 참으로 짓기 어려운 집을 지은 것이다. 이것이 절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천자문」과 「세상 나누기」는 이런 경계를 넘어선, 일상에서 끊어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현실이나 상황 앞에 선 심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 정여송의 수필 정신과 문학 정신을 그대로 보여 주는 수작으로 그녀의 세계관과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이미 여러 평론가들이 심도 있게 다뤘던 관계로 아쉽지만 그 가치와 의의 정도만 언급해 두고자 한다.
「세상 나누기」 역시 언어의 건축가 정여송이 글자 하나하나가 모여 둘을 이루고, 셋, 넷, 그리고 다섯을 이루어 각각이 표방하는 가치를 윷놀이에 빗대어 풀어내고, 이를 주제 의식으로 구체화한 작품이다. 언어를 부리는 솜씨가 그녀의 인식 능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얼마든지 나누고 자르고 쪼개어 보라. 아무리 가른다 해도 세상은 언제나 하나일 뿐이다.라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친다.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목적지는 더불어와 함께라는 가치 창출이다. 그녀는 세상 나누기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평범을 넘어 다름을 지향한다. 일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different에서 아름다움을 얻게 되며, simple이나 easy에서 오는 미가 아니라 difficult하고, complicated한 데서 미학이 싹을 피운다는 것을 정여송은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이를 「세상 나누기」란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는 데서 누구보다도 프런티어적인 수필가다. 익숙한 일상이 아닌 낯선 인식에서 풍경은 절경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절경을 보는 눈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이런 글이 어찌 하루아침에 쉽게 창작되었을 리가 없다. 목적성과 선택성, 그리고 적절성에 기대어 그녀는 밤낮으로 머리를 싸매고 한 편의 수필을 빚기 위해 절차탁마했으리라 본다. 본격수필의 고지를 향해 필마의 기운으로 달려갔으리라. 수필의 정체성,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와 같은 실험 정신은 참신성의 확보 측면에서,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2. 체험과 묘사
공감이 가지 않는 인식 능력만으로 장면에서 장면으로, 정경에서 정경으로 옮아간다면, 아마 독자는 싫증이 나서 지쳐 버릴 것이다. 이 말은 수필의 내용을 이루는 글감이 적어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나 감동은 수필의 육체요, 미는 그 혼이기 때문에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이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사실 개념 차원에서 수필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가치 개념의 차원에서 본격수필의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성은 평범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독자가 알고 있는, 독자가 살아가면서 느껴 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감동을 엮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술로서의 수필은 감동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다.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여송의 세 번째 수필 「마중물」은 바로 경험을 넘어서는 체험의 세계를 보여 주는 본격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인법적인 기술을 통해 수필 소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이 수필은, 일찍이 수필의 아버지로 불렸던 피천득 선생이 강조한 대우성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 작품이다. 우선 수필적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부터 신선하다. 차가운 쇳덩어리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어 생명의 옷을 입히는 작가의 휴머니즘적 시도도 훌륭하지만, 추억의 유년 시절을 여유 있게 더듬어 가는 모습이 이미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보인다. 절제된 감정으로 그리고 사물을 보는 따스한 눈빛으로 사십 년 만에 만나는 펌프 우물에 대한 의미 부여와 가치 발견은 그녀의 범상치 않은 인식 능력에 힘입어 강한 감동을 부여한다. 마․중․물, 마중물, 마중물 하고, 자꾸 불러 보게 됨의 원인을 마중 나가는 그리운 추억과 결부시켜 풀어낸 것은 주제 구체화의 한 방법으로 훌륭했다. 꽃망울이 달마중하느라 벙글어지며 내는 톡, 톡톡, 톡톡, 톡, 펌프 우물의 팔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힘질을 할 때 쏟아내던 호탕한 웃음소리, 콸콸콸콸 등의 어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독자의 시청각을 자극한 점도 정서 환기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의성어의 활용이 정여송의 수필에서는 수필의 격을 떨어트리기는커녕 실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런 감각화되고 구체화된 언어들이 춤을 추며 벌이는 인식의 축제는 사오십 대를 넘긴 중년을 유년의 시절로 데려간다. 환기적 요소가 강한 구어체의 활용과 수필의 대우성적 특성을 힘껏 발휘하는 그녀의 문체는 물의 유연한 상징과 함께 생명적인 심상을 가져와 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 하겠다.
이 수필의 백미는 과거 회상에서 시점이 현재로 유턴되면서 시작되는 주제의식의 의미화 작업에 있다. 작가는 제재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 체험을 실생활 속에 용해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수도족, 펌프족, 우물족 등의 비유를 통해 삶의 유형을 범주화하고, 이를 주제 의식에 활용하는 수법은 인식 구조로써 수필이 가지는 특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객관적 상관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이어 정서 이입, 그리고 의미화 수순을 밟는 창작 과정에 있어서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그저 한 바가지의 물인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몸속으로 들어가 고인 물을 흔들고 깨워서 세상 밖으로 솟구치게 하는가. 하는 작가의 물음표는 삶의 활력소란 답을 이끌어 내고, 작가는 수필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 즉 독자와 함께 공감대에 서기 위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하여 대상으로부터 이탈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 그녀는 함축된 주제 의식을 구체화한다. 결말부로 진입하면서 작가는 함께 있어도 저마다 고독한 세상이라네. 그래서 마중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립다네. 하고 작가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풍경을 독자들이 그려 보게 만든다. 나아가서 인간의 삶과 주제 정신을 조우하게 한다. 이것이 수필이 갖는 힘이다. 수필의 성공 여부는 독자의 마음을 상상과 연상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할 때, 정여송의 이 수필은 미적 구조와 인식 구조 면에서 조율이 잘된 성공적인 작품이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나는 누구의 마중물이 될꼬!는 주제 의식을 음미하게 하는 의미화 작업이면서 동시에 여운적인 마무리다. 자기화를 통해 주제 의식을 상상화하는 수법도 일품이다.
수필이 아무리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기록만으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넘어서는 변형과 보수가 있어야 문학이 되는 것이다. 조형성, 함축성, 탄력성이 통일성을 기반으로 문장 속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감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깊은 의미에서 문학은 아니다. 그것은 풍경의 재생이다. 있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일은 아니다. 수필은 fact가 아니라 reality를 추구하는 글이다. 「트랜스젠더」는 밤느정이를 제재로 해서 트랜스젠더의 은밀한 내면을 해부한 작품이다. 작가는 밤나무에서 나는 짙은 향내를 통해 자연의, 자연에 의한 성전환 수술을 연상한다. 미학적 관조에서 벗어난 생물학적인 이해를 통해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트랜스젠더의 고뇌와 아픔을 읽어낸 이 수필 또한 감동을 준다. 감성과 지성이 조화된 세련된 묘사가,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이 수필은 녹차의 다도와 같다. 생잎을 따 아무리 달여도 차의 색, 향, 미는 음미할 수 없다. 붓 가는 대로 써 대는 글이 수필이라면 누군들 못 쓰겠는가. 찻잎을 채취하여 덖거나 볶고 펄펄 끓는 물을 식혀 가면서 관조와 여유로 달여낼 때, 두 번 세 번 우려내도 그 색향미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남자의 그 냄새와 흡사한 꽃 비린내를 맡으며, 작가는 그 속에서 외톨이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발견하려고 얼마나 애썼겠는가. 수필은 이렇듯 치열한 관조와 탁월한 상상력이 묘사된 체험의 문장인 것이다.
이 작품의 정점에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견뎌야 한다는 작가의 인생 철학이 녹아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밤낮으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밤나무의 성전환 시술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녀가 얼마나 대상을 치열하게 관조하며, 수필에서 부족한 상상력의 보완을 위해 힘쓰는지를 알 수 있다. 시술의 고통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 밤의 울음과 밤꽃의 냄새가 씨줄과 날줄로 교차되면서 트랜스젠더를 떠올리게 된다. 남성적 밤느정이가 하염없이 지고 또 지면서 포침을 박은 각두로 성을 쌓고, 단단한 갈색 껍데기로 담을 치며, 얇은 속껍질로 챙챙 울을 여미는, 여성적 변신에의 혼혈을 기울이는 그런 기다림의 인고 끝에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밤송이가 탄생된다고 적고 있다. 그 인고의 과정을 밤송이가 내기에 생을 바친다고 묘사하는 부분에는 생명 외경 정신이 녹아 있다. 딱딱한 밤송이가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말하려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낸 사실은 이 작품의 쾌미다. 그것을 작가는 차마 몰랐고, 치열한 관조를 통해 그 의미를 캐내었으니, 이런 훌륭한 수필이 탄생된 것이다.
결말 단락은 찢어진 각두를 반쯤 걸치고 드러낸 알밤의 묘사로 짜여졌다. 주제 의식이 상상화된 부분이다. 절세가인의 여인, 트랜스젠더의 이미지가 오버랩 된다. 타고난 미인보다 고통을 이기고 여자가 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견뎌내기를 통해 탄생된 트랜스젠더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에서, 그리고 작가는 견뎌내기를 통해 탄생된 밤의 묘사를 통해 인생은 견디는 것이란 교훈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담한 접근이며, 용기 있는 관찰이고, 참신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밤이 익어 가는 과정을 트랜스젠더화에 결부시킨 상상력 그리고 섬세하고 세련된 묘사는 그녀의 수필을 본격화하는 데 기여한다.
Ⅲ. 닫으며
수필가가 쓴 글이라고 해서 모두 수필이 될 수 없다. 수필에 예술성이 있어야만 자신의 글이 평론가에 의해 더 높이 평가될 수 있다. 내 인생을 내가 그린다고 모두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수필의 개념을 알고, 문학을 알고, 예술을 아는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고, 적어도 예술적 차원으로 수필미학을 끌어올릴 수 있다. 정여송이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필 창작에서 통섭이 요구되는 시대이니만큼, 수필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데 대해 정여송은 답을 주는 작가다. 어찌 여기에 대한 답뿐이겠는가. 정여송은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수필가는 고뇌해야 한다는 점을 창작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유와 언어의 조탁이 따르는 예술성은 대상과의 처절한 투쟁이나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에서 얻어진다는 것 또한 그녀는 이들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정여송의 수필처럼 수필문학의 심미적 기능을 제고할 때만이 수필문학의 본령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상상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수필을 쓴다고 하더라도 정여송의 수필처럼 치열한 관조가 배어야 문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국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예술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실험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수필을 끊임없이 예술로 끌어올리려 노력해야 한다. 수필의 개념이 이런 식으로 예술의 바운드리 안에서 엄격히 제한될 때, 비로소 수필의 가치와 격이 높아진다는 것을 정여송이 보여 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한국 수필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누군가 정여송의 수필을 만나면서 희망의 등 하나를 다시 내어 건다고 했다. 위대한 작가다. 예술성이 충분히 제고되어 있는 정여송의 수필이야말로 진정한 본격수필이 아니겠는가. 한국 수필의 미래를 그녀에게 걸어 본다.
│문학적 자전│
노동, 그리고 놀이
정 여 송
열흘 후면 아랫집이 이사를 간다. 문 하나 열면 만날 수 있는 지척이 원로(遠路)가 될 터이니 한 달에 한 번이나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 한 잔 마시자며 부른다. 바람도 쐬잔다. 나서려는데 자동차 키를 찾는다. 늘 놓았던 자리에 없는가 보다.
가방을 뒤진다. 부엌 싱크대 위, 서랍을 들춘다. 화장대 심지어 화장실까지 놓아둘 만한 곳을 더툰다. 머릿속에 담아 둔 녹음 짙은 나무와 그 사이로 난 시원한 길, 상쾌한 바람과 마음을 씻어 줄 풍경이 그만 민들레 홀씨가 된다. 작디작은 열쇠 하나가 온 머릿속을 다 점령한다. 친구는 기억 회로를 열고 어제 일들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결국 입고 나갔던 바지 주머니에서 찾아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글쓰기와 무작위로 닮았다.
정신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찾으면 없어진 물건들. 아무리 챙겨도 내 품에서 떠나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언제나 가방 속에 있으려니 했던 볼펜, 어느 장소에선가 공손히 빠뜨리고 온 우산, 실밥이 풀려 아무도 모르게 떨어져 나간 단추, 셔츠를 벗을 때 소맷자락에 말려 나가 행방불명된 묵주 팔찌, 살결처럼 숨 쉬며 눈길과 목소리와 체온을 나누던 것들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린다.
한동안 나를 잃어버리고 산 적이 있다. 여느 아낙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도 부모와 남편과 아이들만 있었다. 아이들이 성큼 자라 내 손의 필요성이 덜어졌을 때 문득 바람 부는 광야 같은 허허로움에 시달렸다. 두려움마저 동반한 허전함은 나의 모든 것을 결박해 버렸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은, 홀로 표류된 듯한 나머지 함께라는 개념조차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꿈을 키워야 했다. 꿈이 크면 클수록 그림자도 짙다고들 하지만 숨바꼭질하는 재미로 촛불을 들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오래 전에 했던 것처럼 책을 읽어 댔고, 늦은 공부에 열중했다. 한 땀 한 땀 시간을 꿰맨 것이다. 세월을 적잖이 걸어왔으니 촛불 하나로 추위와 어둠이 걷히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녀린 촛불은 작은 대로 밝고, 작은 대로 따스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자신을 방치한 채 모르고 살아가는가. 아깝기가 그지없는 일이다. 잘나지 못했지만 나는 찾고 싶었다. 또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휘영함을 달래고 메우기 위해서다.
늦춤 없이 나를 발견하는 일에 전념했다. 매진하다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나오는 의외성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나는 고여 있지 않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른다. 순한 듯한데 당돌한 데가 있는 것 같고, 나약하지만 꼿꼿한 구석도 있다. 소극적 방위로 대처하면서도 발발(勃勃)한 의기를 뿜어내기도 한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가도 밉고 싫을 때가 한두 번인가.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때가 허다하다.
어떤 때는 집념과 용기, 소신과 적극성, 당당함과 대범함 등으로 뻔뻔하였다. 혹여는 내 감각에 어긋나거나 불필요하게 느껴진 것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치기도 부렸다. 우스꽝스럽게도 자기를 절대시하는 자기도취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구각(舊殼)을 벗으려 정진했다. 치열함으로 거듭나려고 애를 썼다. 순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당차게 요체도 잡아내었다. 그러다 보니 언뜻언뜻 운기 생동하는 자아를 만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휘영함을 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정체성과 내면의 힘을 실은 사고의 깊이를 재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도대체 먼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정신을 찾겠다고 건 모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었든 고이 잠들어 있는 잠재력을 발굴하는 것, 자아를 재발견하는 일. 그것은 순간의 경이감에 젖어 보려는 열정 어린 놀이였다. 겁나게 흥미로운 놀이였다.
하지만 그 놀이의 시작은 언제나 노동이었다. 때로는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면서 매운 연기에 목은 경련이 일어나 쿨룩거리고, 충혈된 눈은 눈물 범벅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과정을 언제고 거쳐야 했다. 더러는 면벽하고 있는 달마대사 앞에서 먹히지도 않는 거래를 제안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되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어 보고, 힘 있는 음성으로 말을 걸며, 꼿꼿한 자세로 기세를 펼쳤다. 천수관음보살 같은 손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되살려 내는 데 기력을 쏟았다. 순전히 노동이었다. 그쯤에 이르러서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장작더미를 태우게 되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하는 즐거운 놀이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내는 일, 숨어 있는 나를 이끌어내는 일, 보이지 않는 나를 그려내는 일. 그것은 참말로 힘든 노동인 동시에 신나는 놀이다. 나아가서는 내 문학의 발판인 동시에 삶의 여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