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문제작. 시조 (『유심(惟心)』201107/08호에서 발췌)
현대시의 혼돈과 시조의 항심(恒心)
이 경 철
진정성과 오리지널리티에 목마른 문화
‘전망 없는 정체와 혼돈이 우리 시단의 전체적 분위기를 감싸고 있다.’ 금세기 들어서면서, 아니 지난 세기 말부터 우리 시단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의 단적인 표현이다. 많은 시인과 독자들이 유령 같이 떠도는 그런 매캐한 분위기에 답답해 하다가 드디어 말문을 터뜨리고 있다.
최근 오세영,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등 중진시인들이 잇달아 시집을 펴내며 시단에 대한 우려와 각오를 비장하게 밝히고 있다. 최동호 시인은 장황하고 난삽하여 소통부재의 시들이 갖는 몽환적 속박에서 벗어나 서정시 본연의 길을 찾자며 이 시인들의 ‘서정시학 서정시 선집을 기획했다.
오세영 시인은 “나는 시의 영원성과 감동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라며 우리 시단을 다음과 같이 질타했다. “시를 기업의 상품 마케팅과 같은 전략으로 팔고 사는 듯하다. 포퓰리즘, 센세이셔널리즘, 저널리즘, 커머셜리즘에 편승한 한탕주의식 문학적 판매기법을 현대미학이라 포장하여 강변하기도 한다. 예컨대 충격, 해체, 자해, 폭력, 무의미, 패륜과 같은 방식의 시선 끌기들이다.”라고.
이하석시인은 “서정이란 어느 시대든 시의 기본 바탕이라며 ”내용에서나 형식에서나 과도하게 독자에게 부담을 주는 지금의 한국 시는 반성이 필요하다.” 고 밝혔다. 조정권 시인도 시집을 펴내며 “요즘의 길고 어려운 시들에는 시인인 나부터도 권태감과 피로를 느낀다.”며 지식으로 분석되거나 해석당하지 않는, 짧고 경제적인 시를 시도해보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시인들은 짧고, 지식이나 이론으로 분석을 원하는 것이 아닌 감동으로 소통되는 시세계를 펼쳐보았다.
이같이 중진시인들의 서정시, 아니 시의 본류를 다시금 강조하는 움직임과 함께 TV에서 ‘나는 가수다’가 감동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소위 엔티테이너들의 말장난, 아이들 가수들의 너무 말쑥해 인조적인 춤과 허튼 음색에 짜증나 공중과 TV를 멀리해온 나 역시 ‘나가수’에는 감동했다.
몸속에서 충분히 삭은, 온몸을 뚫고 올라오는 가수들의 혼의 소리에 나 또한 울컥했다. 오랜만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의 진정성 혹은 오리지널리티에,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이게 우리시대와 문화가 본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혼란과 혼돈을 접고 정체성이나 본류를 돌아볼 때 의당 떠오르는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법고창신(法故創新)’이다. 그리고 우리 시에서 이런 말 자체가 양식화된 것이 현대시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리듬과 언어로 짧게 정형화해 친근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시조가 자유시의 본류 찾기에 길잡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시를 압도하는 시조의 정제되고 세련된 이미지
1.
바닥에 이르러서도 더 내려갈 곳이 있어
바다가 그어놓은 썰 밀물의 눈금을 따라
가두리 방파제 그늘에
사다리가 놓이고,
어느새 열길 물속, 세상 속을 알아버린
바다의 손바닥을 묵묵히 오르내리는
대물린 어부의 맨발이
물고기를 닮았다.
2.
찢긴 그물 새로 떼 지어 빠져나간
연근해 치어들이 화살 한 촉씩 물고 와서
고단한 도두포구의
새벽잠을 깨울 때
플라스틱 물병 속에 밤새 목이 타던 바다
포구에 이르러서야 온 살갗에 경련이 이는․․․
바다가 어부의 손 끌며
그
계
단을
오른다.
-고정국「어부의 계단」 전문 (『유심』2011.5/6)
바닥을 치고 올라온 언어들이 혼을 울리는 시이다. 그런 언어들이 직조한 이미지들이 맨 살갗과 차가운 정신에 다가와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시이다. 오리지널리티와 진정성이 바깥풍경과 시인의 내면 풍경을 겹치게 하며 다시 한 번 더 읽고 또 읽게 하는 좋은 시이다.
읽을수록 더 허허롭게 진해지는 우리네 실존적 풍경과 함께 그런 풍경이 곧 “바닥에 이르러서도 더 내려갈 곳이 있”는 ‘시인의 계단’, 그 천형(天刑)의 시 쓰기임에 몸을 떨게 한다. 고정국 시인이 태어나고 자라 지금도 바라보고 있는 수평의 바다가 수직으로 내면화되며 바닥 모를 삶과 시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1장에서 수평과 수직을 함께 싸안으며 그 깊이를 드러내는 시어는 “사다리”. 그 사다리는 “열길 물속, 세상 속”을 오르내리는 수직의 구체적 이미지이면서 썰물, 밀물이 가없이 교차하며 그은 “눈금” “바다와 손바닥”의 ‘손금’ 같은 수평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대책 없이 바다에 내던져져 갇혀있으면서도 수평의 넓이와 수직의 깊이를 대물려 “묵묵히 오르내”려야 하는 실존의 풍경이 1장에서 아프게 그려지고 있다.
2장에서는 “플라스틱 물병 속에 밤새 목이 타던 바다”라는 선명하고도 목마른 이미지 한 행으로 단박에 실존의 비극양상을 드러내며 삶의 의지가 곧 시 쓰기는 아닐는지 묻게 한다. 그러면서 “연근해 치어들이 화살 한 촉씩 물고” 온 그 화살이 시인의 언어임을 환기시킨다.
밤새 목이 타던 가두리바다 “찢긴 그물 새로 떼 지어 빠져나”가 물고온 화살은 수평과 수직의 바다 혹은 삶의 너비와 깊이를 오르내리며 길은 시인의 언어, 그런 시어로 직조한 이미지들이 행마다 화살촉 같이 꽂히며 <어부의 계단>을 ‘실존의 계단’ 혹은 ‘시인의 계단’으로 읽히게 하며 온몸과 혼을 떨게 한다.
<어부의 계단>은 두 장, 각 장 단시조 두 수씩으로 이뤄진 연시조이다. 각 수 초장 중장은 두 행씩 잡아나가다가 마지막 수 후반구만 4행으로 잡아 계단의 형상을 그린 형태시로 맺고 있는 시조이다.
매 수 3장6구 45자 내외, 매장 4음보라는 정형의 교과서식으로 따르고 있는 시조인데도 내겐 잘 절제되고 정제된 자유시로 보인다. 왠가? 우선 이 시조는 1,2장 모두 두 수가 한 문장으로 이뤄져 행이나 연 나눔 없이 산문시로 읽어도 좋을 시이다.
자유시에 비해 시조의 특장이랄 수 있는 맺고 끊고 후려치는 율격과 숨구멍을 <어부의 계단>은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다. 현대시조이 관행이 되다시피 한 종장의 두 행처리가 단적인 예, 리듬이나 이미지를 끊으며 숨통을 막거나 틀 때, 외재율이나 내재율의 필연적 욕구가 터질 때 행 갈음해야 하는데 초장 중장 같이 이어진 문맥과 이미지인데도 종장에서는 이유 없이 행을 나눠놓은 것 같다.
압권일 정도로 빛나는 이미지에 시조의 율격을 살려 숨통만 터줬다면 귀신도 무릎 치며 추임새를 넣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중략>
시조, 만물조응(萬物照應)을 후려치고 맺는 괄약근
토막말 겨우 맺는 병상의 어머니가
함박눈 펑펑 터지는 창 밖을 외면한다
세상 일 모른다는 듯 희뜩희뜩 웃는 눈
보름째 곡기를 끊어 내 끼니가 민망한 날
어머니 빈 수저만 소복하게 쌓아놓고
봄은 다 부질없다고 헛손질로 내리는 눈
-이 승 은<헛손질의 봄> 전문(<<유심>>5/6)
두 수로 이뤄진 연시조이다. 한 장을 한 행 한 연으로 잡아 앞뒤 수 구분은 없지만 시조 정형의 종장처리로 자연스레 두 수로 나눠읽히게 한다. 특히 이 시 종장에서 앞 수에서는 함박눈과 어머니의 '눈'의 이미지가, 뒤 수에서는 내리는 눈과 어머니의 헛손질의 행위가 겹쳐지며 시세계를 증폭, 심화시키고 있다.
눈 많던 올해도 3월말까지는 눈이 내렸다. 봄이 와서 딱히 좋아지고 펴질 일은 없지만 이제나 저제나 봄에 대한 기다림을 3월에 내리는 눈은 여지없이 다시 겨울로 내몰고 만다. 그러다 찾아드는 환장할 봄, 그러나 한창 흐드러진 봄은 느끼지 못하고 이울 무렵에야 또 아쉽게 보내는 것이 기다림이고 사람살이 아니겠가.
임종에 이른 듯한 어머니와 철 늦은 눈을 대비한 <헛손질의 봄>에서는 "세상 일 모른다"는 "다 부질없"는, 부질없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삶의 폭과 깊이가 묻어난다. 이 폭과 깊이는 물론 자유시에서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시조의 정형, 특히 종장미학의 천착에서 우러난 것이다.
25년여 동안 시조와 인연을 맺어온 필자는 처음부터 시조가 우리 현대시의 항심(恒心)임을 믿어왔다. 자유시와 시조를 함께 선(選)하고 평(評)해 오며 그런 내 믿음은 한층 더 강화돼 왔다. 속도를 따라잡기에 어지러운 첨단문명사회에서 인간 본디의 항심을 지키게 하는 것이 시의 중요한 존재이유일 것이고 그게 양식화돼 온축(蘊畜)된 장르가 시조 아니겠는가.
지난 연말 한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서 옆에 앉은 한 평론가가 느닷없이 물었다. "그렇고 그런 시조는 이제 시조로서 생명을 다한 양식이 아니냐"고. 그 황당한 물음에 "요즘 시조를 제대로 읽어나 보았느냐, 도대체 시 속살의 맛을 알기나 하는 것이냐"며 대뜸 화부터 치밀었으나 다음과 같은 요지로 찬찬히 말한 것 같다.
시조는 온갖 이론 다 들이대며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서구의 시론(詩論)을 정형이란 양식 자체에 내장하고 있는 시이다. 그러니 이론 들이 댈 틈도 없이 독자들에게 그냥 친밀하게 직격해 들어가는 시이다.
자유시와 시조를 같이 읽으며 선할 때 장르를 떠나 내게 뽑히는 시들은 의외로 시조가 많다. 왜냐? 우선 짧다. 둘째 리듬이 있다. 정제된 이미지들이 리듬을 타고 있어 눈으로 읽으며 귀로도 읊조리게 한다. 무엇보다 완결감, 종결감이 있다.
빼어난 시조의 종장을 보며 나는 문득 '우주의 괄약근'이란 말을 떠올리곤 한다. 삼라만상 죄다 풀어놓고, 마음 속 살갑고 깊은 정 다 풀어놓고, 한 우주 통속에서 그 둘을 나남 없이 확 싸매버리는 종장, 당신들이 구구하게 말하는 만물조응, 그 코레스 퐁당스가 내장돼 있기에 자유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의 숨통, 시안(詩眼)을 시조는 양식상 찾게 하는 것이다.
그래 그 평론가가 시조를 건성으로 보며 말했듯 그렇고 그런 양식으로서 생명을 다한 시조들도 부지기수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또 얼마나 많은 시인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시조의 정형을 지키며 지금 우리 시의 시성(詩性)을 견인하려 애쓰고 있는가. 지금 이 난이 진정한 시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끝-
이경철 : 문학평론가. 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중앙일보 문화부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문예중앙』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현대시 100년기념 명시>>명화 100선 시화집<<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첫댓글 감동적인 작품, 좋은 평 잘 읽었습니다. 시의 본질에 충실해야함을 다시금 새기고 갑니다^^.
후우~~~ 숨도 쉬지 않고 읽었더니 가슴이 터질 듯 합니다. 다시 올라가서 새로 읽고 또 읽어야겠습니다. 시원한 심사평, 얼음 동동 식혜맛이 나는 작품 .
이렇게 깊게 투명하게 보는 사람들이 평론가군요...평론을 읽고 다시 시를 읽으니 좀 알 것도 같네요...시감상과 평론 잘 읽었습니다..^^
플라스틱 물병속에 밤새 목이 타던 바다// 세상을 울린다.
왼쪽 오른쪽 기울임없이, 아무런 댓가없이, 남에게 잘 보일려고 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건조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수긍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화려함에 눈길이 가고, 목소리 큰 사람에게 고개가 돌려지는 게 인지상정이라면, 깊고, 정갈함, 제 자리 굳건히 지키며 묵묵히 제 할 일 해내고 있는 이들에게 세상은 결국 다시 돌아가리라는 진리도, 진리임을 믿습니다. 난삽함과, 장황함과, 인맥을 쫒아, 작품의 수준이 결정되어지는 이 때, 묵묵히 제 자리 지키고 시조의 본질을 뚜벅뚜벅 밟고 나가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시조를 같이 공부하는 우리들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그런 것일 것입니다. 본질에 충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쏙쏙 들어 옵니다. 토요 강의를 음미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