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아톤" 계기로 본 자폐 장애인과 그 가정
#17일 오후 4시 서울 공릉동 태릉초등학교 운동장.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운동장 트랙을 달리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면 육상선수 같지만 사실은 발달장애인(자폐증 환자)이다. 손빈호(20)군은 아무 말 없이 운동장을 열 바퀴나 돌았다. 그의 곁에서 어머니 이현숙(50)씨도 내내 함께 달리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째 해오는 일이다. 일종의 운동치료다.
#서울 월계동 남선자(50.여)씨는 "내 인생은 없어진 지 오래"라고 말한다. 아들 허재영(25)씨가 다섯살 때 자폐 진단을 받은 뒤 남씨는 수면시간을 제외하곤 잠시도 아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들이 어릴 때에는 신길동 복지관에 같이 다녔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3학년까지 교실 옆 자리에서 함께 수업을 받았다. 1993년 4학년 때 서울 장지동 특수학교로 옮긴 뒤 2001년 졸업 때까지 왕복 세 시간이 넘는 등.하굣길을 동반했다.
▶ 발달장애인인 손빈호군이 서울 공릉동 태릉초등학교에서 어머니 이현숙씨와 운동장을 돌고 있다. 이씨는 아들과 3년째 같이 뛰고 있다.[최승식 기자]
남씨는 "재영이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다. 손군의 어머니 이현숙씨도 같은 말을 했다. 차가운 현실세계에 홀로 남겨져 고통받을 자식 생각에 남몰래 흐느끼는 어머니들의 기막힌 심정이다.
발달장애인을 주제로 한 영화 "말아톤"이 개봉 20여일 만에 관객 수 320만명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발달장애인은 7600여명. 이 중 남자가 6270명이다. 전문가들은 등록하지 않은 사람을 합하면 3만~4만명, 경미한 증세를 가진 사람까지 포함하면 1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들 중 기초수급자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통계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자폐증은 2000년에서야 발달장애라는 이름으로 장애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동차 연료(LPG) 할인 등의 장애인 혜택 중 발달장애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없다.
특수학교나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이 생기면서 학교 교육여건은 다소 개선된 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 편중돼 있다.
더 이상의 복지 혜택은 없다. 그리고 나머지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 특히 어머니의 몫이다.
그래서 발달장애인의 어머니는 "수퍼우먼"이 될 수밖에 없다. 의사.특수교육 전문가 등의 역할까지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돈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들어간다. 조기에 치료하면 증세가 호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모들은 전 재산을 쏟아붓는다.
서울 양재동 김영호(8.가명)군의 어머니(35)는 "심리치료.언어치료 등에 180만원, 낮에 등산.수영.일상생활 지도 등을 담당하는 개인교사에게 150만원 등 월 330만원이 들어간다"며 "분당의 45평짜리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옮겼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는 월 500만~600만원이 들었다.
서울 동작구 최모(42.변리사)씨는 "국내에서 치료나 교육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2003년 2월 아내가 발달장애인인 큰딸(12)을 데리고 호주로 갔다"고 말했다.
고교 때까지는 특수학교에 가면 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성인이 되면 그나마 갈 데가 없다. 집에 박혀 있든지 생활(수용)시설로 가야 한다.
저소득층은 치료를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언어능력이나 인지능력이 개선되지 않아 자해 등의 돌출행동이 심해지기도 한다. 견디다 못해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경우도 있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시립 아동병원 정성심 정신과장은 "자폐는 평생 정기적으로 치료와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전혀 체계가 안 돼 있다"면서 "건강보험 적용, 발달장애인을 위한 자립 및 독립 기거시설(그룹홈) 마련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의 경우는 우리와 대조된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체텀시는 발달장애인 57명에게 주간치료 학교, 야간 그룹홈 비용으로 한 명당 연간 1억2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자폐증이란=뇌신경.호르몬 계통의 이상 등으로 생기는 장애다. 환자들은 대개 ▶의사소통이 잘 안 되고▶다른 사람과 사귀지 못하며▶같은 행동을 되풀이 한다. 자해.주의산만.편식.낯선 것에의 두려움.과잉반응.괴성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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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이슈] 이들을 절망케 하는 건 사회의 편견
영화 "말아톤" 계기로 본 자폐 장애인과 그 가정
최근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로 이사한 최모(34.여)씨는 아래층 사람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위층에서 시끄럽게 했다고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들(6세)이 발달장애 1급이기는 하지만 블록 쌓기나 인형놀이에 집착하기 때문에 보통 아이보다 크게 소란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요한작업장에서 발달 및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고무패킹 분리작업을 하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장애인 부모 10명이 1000만원씩 내 이 작업장을 만들었지만 운영비가 모자라 애로를 겪고 있다.[최승식 기자]
그래도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수차례 사과하고 과일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괴롭다며 "아이가 그러니(자폐 증세가 있으니) 그렇게 시끄러운 것 아니냐"는 말에 최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최씨는 "아래층 아주머니가 "자폐증이 있는 아이는 무조건 뛰고 소리 지른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어 실상을 얘기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억울해 했다.
자폐 증세가 있는 자식을 둔 부모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세상이 가진 편견이다. 자식 치료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헤쳐나가기도 버거운 판에 편견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나마 최근 자폐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등이 화제가 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다.
◆경제적 부담에 가정 해체까지=경기도 안성의 용국이(9.가명)는 매일 새벽 아빠 차를 타고 서울시립 아동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서 하루 6시간 동안 언어치료와 행동치료 등을 받는데 한 달에 200만원이 든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용국이를 돌봐줄 사람을 쓰는 데 50만원이 추가로 들어간다.
서울시립 아동병원은 국내 유일의 자폐증 전문 치료 및 교육 센터다. 이 병원에 들어가려면 최장 5년을 기다려야 한다. 용국이도 2년가량 기다렸다. 대학병원에서조차 치료나 교육을 하지 않는다. 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종교단체나 정부에서 운영하는 장애인복지관이 전국적으로 106곳이 있지만 이 시설을 이용하려면 역시 평균 2~3년을 기다려야 한다. 또 들어가더라도 2년 정도밖에 이용할 수 없다.
결국 장애인 부모들은 서울 강남 등에 있는 사설 교육기관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부모들은 하루에 사설 기관 서너 곳을 돌며 아이 치료에 매달린다. 서울 강남구 명우(7.가명) 부모는 그동안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3억원짜리 아파트를 팔았다. 저소득층은 치료를 포기한다. 서울 광진구 한모(49)씨는 지난 1월 아들 현수(가명.14)를 경기도의 미인가 수용시설로 보냈다.
아이 때문에 부모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도 적지 않다. 경기도 하남시 최모(38.여)씨는 발달장애인인 둘째(10)를 돌보다 애한테 화를 내는 등의 이상 증세가 생겼다.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고 6개월째 치료를 받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2001년 춘천 마라톤을 완주한 영화 "말아톤"의 모델 배형진(23)씨처럼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배씨는 요즘 악기회사에 취직해 정상적인 생활에 한발 다가섰다.
발달장애 2급인 김진호(부산체고 2년)군은 지난해 10월 열린 전국체전에 수영 부산대표로 참가했다. 발달장애인으로 전국체전에 출전한 선수는 김군이 처음이라고 한다. 어머니 유현경(45)씨는 "수영장만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진호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며 "3월부터 다른 일반인 대회에도 출전하기 위해 요즘 진호는 일반 학생들과 겨울훈련에 열심"이라고 말했다.
또 박장원(23.발달장애 3급)씨는 지난해 1월부터 서울 송파구 새세대육영회 부속 어린이도서관에 사서보조원으로 일하며 매달 70여만원을 받는다. 패밀리레스토랑인 아웃백스테이크 등 서비스 업체들도 발달장애인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감싸줘야=이렇게 직업까지 갖는 경우는 아직 드물다. 그래서 부모들은 성인이 된 뒤 자립할 수 있는 작업장과 주거공간(그룹 홈)이 합쳐진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발달장애인들을 취약층으로 보고 국가가 나서 해결해 줘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는 매우 부족한 상태다.
급기야 부모들이 직접 나서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요한작업장은 발달장애인 부모 10명이 1000만원씩 모아 설립한 시설이다. 배말인(52.여)회장은 "공간이 좁다는 등의 이유로 정부 인가를 못 받아 월 10만원씩 운영비를 모아 꾸려간다"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정착돼야 부모들이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발달장애인 전문 복지관을 설립하고▶일본처럼 성인 장애인의 통장을 관리하는 후견인 제도를 도입하며▶학교 보조교사를 대폭 늘리고▶일자리를 개발하고 알선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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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선 일반학교도 맞춤수업 20세 되면 자립할 수 있게 교육
"정신적.경제적으로 힘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하지만 서울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면서 아내와 큰딸이 "삶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걸 생각하면 참을 만합니다."
변리사 최모(42)씨는 2년 전 자폐 증상이 있는 큰딸(12)을 아내와 함께 호주로 보냈다. 그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큰딸이 호주에서 만족스럽게 사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최씨가 특히 만족스러워하는 부분은 발달장애인도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가 다니는 특수 학교의 체육 프로그램도 좋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민간 장애인 스포츠 시설도 많다. 장애인 스포츠 대회도 다양한 규모로 자주 열린다.
최씨의 딸은 수영의 경우 학교에서 주 2회, 민간 단체에서 주 2회, 또 개인레슨을 받으며 주 1회하고 있다. 볼링.체조.육상도 주 1회하고 있다. 또 공원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긴다고 한다.
직장인 김모(44)씨도 6년 전 두 아들과 아내를 미국에 보낸 "기러기 아빠"다. 특수교사조차 없이 허울뿐인 통합교육을 하는 학교에서 자폐증이 있는 둘째 아들과 아내가 하루 종일 부대끼는 모습을 보다 못해 내린 결단이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일반학교에서도 특수교사 4~5명이 아이 특성에 맞춰 다양한 수업을 해주고 이제 만 16세가 됐는데 벌써 직업까지 고려해준다고 했다.
"한국에선 부모가 온갖 돈을 쏟아부으며 특수교육을 잘 시켜놓아도 정작 성인이 되면 집이나 시설 외엔 갈 곳이 없잖아요. 그런데 지난 설 연휴 때 미국에 갔더니 학교 선생님과 지역 특수교육 담당자가 저희 부부와 아이를 불러 한시간 이상 진로상담을 해주더군요."
김씨는 그곳 특수교육 담당자가 아들이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을 알고 졸업 후 교회 반주하는 일 등을 알아봐 준다고 한 데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특수교육과의 박지연 교수는 "미국은 장애인도 20세가 되면 자립할 수 있도록 생활 및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발돼 있다"며 "우리 사회는 아직 장애인 역시 스포츠 등 자기생활을 즐길 수 있고, 훌륭한 직업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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