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작은 대포알 같은 패싱 샷을 황혼 속으로 날릴 필요가 없었다. 유명한 윔블던 쌍둥이 자매의 승패를 갈랐던 날카로운 두 번째 서브도 없었다. 두려움과 용기가 번갈아 교차하는 순간들도 없었다. 갓 태어난 행성처럼 번쩍이며 쏟아지던 플래시 세례도 없었고, 먼지투성이 녹색 벽을 기어올라 관계자들과 포옹하며 감격을 나누는 일도 없었다.
2008년, 라파엘 나달의 첫 번째 윔블던 단식 우승이 윔블던 대회의 역사와 대회 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될 획을 그었다면 나달의 두 번째 윔블던 우승은 다분히 냉담한 분위기가 풍겼다. 나달은 뒤늦게 두각을 드러낸 강적 토마스 베르디흐를 완파했다. 장신인 베르디흐는 위협적이지만 기복이 심한 선수이고, 2주에 걸쳐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원동력인 당당하고 힘이 넘치는 랠리를 이날 경기에서 보여주지 못했다.
위대해지고 있는 나달 나달은 베르디흐를 3-0(6-3, 7-5, 6-4)으로 제압했다. 베르디흐는 정신력이나 경기 내용면에서 나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로써 나달은 비외른 보리 이후로 오픈 시대에 채널슬램(롤랑가로스와 윔블던에서 연달아 우승하는 것)을 2차례 이상 달성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리의 기록은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보리의 경기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두 대회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나달과 로저 페더러가 각각 그 일을 해냈다. 나달의 말처럼 “보리(1980년) 이후로는 채널슬램을 달성한 선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그 일을 해낸 선수가 두 명이나 나왔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자, 이제 윔블던 결승전의 주요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살인적인 서브와 재빠른 그라운드 스트로크로 무장한 베르디흐는 존 이스너와 니콜라스 마유가 경기를 끝낼 때까지 (그들은 장장 사흘-11시간 동안 혈투를 벌였다) 서비스 게임을 지킬 능력이 충분한 선수지만 , 1세트 7번째 게임을 나달에게 내주었고 나달은 그 기세를 밀고 나가 1세트를 마무리 지었다. 2세트에서 나달은 매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임이라고 여겨지는 13번째 게임을 따냈다. 만약 베르디흐가 그 게임을 내주지 않았더라면 2세트는 타이브레이크까지 갔을 것이다. 베르디흐 같은 선수가 상대일 때 타이브레이크는 언제나 도박이 될 수밖에 없다. 3세트에서도 나달은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했다. 두 게임을 먼저 따내 2-0으로 앞서나갔고 결국 6-4로 세트를 결정지었다. 베르디흐의 가장 큰 실수는 원래의 전략(나달을 베이스라인 플레이로 끌어들인 것)이 실패했을 때 다음 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두 세트에서 베르디흐는 세트가 끝날 때까지 나달과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디흐의 패배는 정신력의 패배라고 할 수 있겠다. 베르디흐는 결정적인 포인트를 따는 데 실패했다. 나달은 6차례 잡은 브레이크 포인트에서 4차례 자신의 게임으로 연결시킨 데 반해, 베르디흐는 브레이크 포인트를 5차례 맞아 한 번도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베르디흐가 잃은 서비스 게임은 7개뿐이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그는 서비스 게임을 3개 잃었는데, 이는 이번 대회에서 잃은 총 서비스 게임의 30%를 넘게 차지한다.
왼손잡이의 위력 반면 나달은 이번 윔블던에서 서비스 게임을 8개 잃었다. 이 수치는 나달이 서브 실력까지 갖춘 선수임을 입증해 준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나달의 에이스 기록은 54개로, 베르디흐가 뽑아낸 111개의 절반 수준이다. 베르디흐는 이번 대회 최다 에이스 기록 보유선수 리스트 2위에 이름을 올렸고 나달은 22위를 기록했다. 라파엘 나달의 삼촌이자 코치인 토니 나달은 조카의 전반적인 기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08년만큼 좋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서브를 포함한 몇 가지 기량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나달은(스피드보다 플레이스먼트에 유리한) 날카로운 왼손 슬라이스를 앞세워 잔디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왔다. 그러나 나달이나 역대 테니스 선수 중 나달과 가장 비슷한 보리가 잔디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요인은 외견상은 똑같다. 모두 빠른 발 덕분이다. 나달은 “나는 잔디 코트에서 경기하기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난 잔디 위에서 움직임이 아주 좋은데, 그것은 경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말한다. 베르디흐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나달의 가장 큰 무기는 왼손이다. 왼손잡이 선수는 많지 않다. 알다시피 왼손잡이 선수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상대방의 가장 큰 강점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을 노출시키는 경우라면 그 어려움은 몇 배로 커지게 마련이다. 윔블던 결승에서는 나달의 민첩함이 베르디흐의 상대적으로 둔한 움직임과 대비되었다. 경기가 계속될수록 베르디흐의 수비는 점점 더 약해지는 듯 보였다. 세트 후반에는 힘없는 백핸드 슬라이스가 빈발했고, 그렇게 네트를 넘어간 공은 날랜 나달에게 쉬운 먹이감이나 다름없었다. 나달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연습할 때마다 모든 볼을 100% 집중해서 친다. 그것이 내가 더 빨라진 이유다. 아마 어릴 때는 지금보다 더 집중해서 연습했을 것이다. 어릴 땐 진짜 미친 듯이 연습했다.” 아무리 평생을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온 테니스 선수라도 이렇게 의욕적으로 연습에 매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아마도 이것이 나달이 작금의 성공을 거두고 지금과 같은 경기 스타일을 보여주게 된 근본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런 성실하고 의욕적인 태도에 바로 테니스에 대한 나달의 열정이 녹아 있는 것이다. 테니스 광팬 테니스 선수들이 솔직하지 않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글은 절대 읽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 아름 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자주 포착되곤 한다. 또한 테니스 선수들은 일단 토너먼트에서 떨어지면 결승전 시청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틀림없이 TV 앞에 자리를 잡고 채널을 맞춘 다음, 윗몸 일으키기를 하며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릴 것이다. “저게 나일 수도 있었는데.” 일전에 나달에게 작년 로저 페더러와 앤디 로딕의 결승전을 보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경기를 봤습니다. 무척 인상 깊은 경기였죠. 테니스를 좋아하니 경기를 보는 내내 아주 즐거웠습니다” 라고 대답했었다.
테니스 광팬이 아닌 테니스 선수가 테니스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어보았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테니스를 칠 때 그 순간을 즐긴다고 해서 라파엘 나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을 살고, 무엇보다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나달이 되는 것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 경기를 해야만 하고, 포인트 하나하나와 인생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을 감상할 뿐인 관중들 앞에서 경기를 해야만 할 때라 해도 말이다. 나달은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윔블던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그래도 나달이라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