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법규와 영국 수상
처칠이 어쩌다 운전사에게 차를 급히 몰게 했다. 그런데 교통 경찰관이 수상을 태운 자동차가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보고 제발 빨리 차를 세우도록 했다.
"수상께서 타셨소."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운전사가 말했다.
"알고 있소. 그러나 과속은 과속이오. 딱지를 떼겠으니 벌금을 물도록 하시오."
경찰관이 끄덕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처칠이 직접 나섰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처칠이 그 특유의 여송연을 입에 문 채 언성을 높였다.
"예, 얼굴은 우리 수상 각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질 않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결국 처칠은 딱지를 떼였다. 처칠은 의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올라와 경시총감을 불렀다. 그 딱지 뗀 경찰관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그 경찰을 찾아 특진시킬 것을 명했다. 그러나 경시 총감은 과속 차를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라는 규정은 없다고 거절했다.
*처칠 1874-1969 영국 정치인, 문필가, 영국 국방상, 수상 역임
법다운 법
영국의 헨리 4세는 법을 숭상했던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법을 어겼다는 하나만으로 자신의 아들을 감옥에 보냈을 정도다. 그런 헨리 4세 시대에 부녀자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 얼마나 사치가 심했는지 지나치다는 말도 모자랄 정도였다. 거듭된 계몽과 경고도 소용없었다. 마침내 헨리 4세는 황금이나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는 사치를 금한다는 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법이 공포돼도 효과는 없고 사치는 여전했으므로 왕은 난처했다. 그렇다고 법을 폐지하는 것은 왕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헨리 4세는 궁리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법안의 부칙에 단서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이 법은 매춘부와 소매치기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단서 조항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렇게도 심하던 사치 바람이 가라앉은 것이다. 누구도 매춘부나 소매치기로 인정받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대함
프랑스의 드 토크빌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미국의 위대성을 발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항구, 비옥한 토지, 광산이나 상업이 번창하고 있는 곳에서는 내가 찾고 있는 것들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미국의 한 교회에 가서 그 교회가 목사가 외치는 정의로운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미국의 위대한 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말하거니와 미국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미국이 그와 같은 선함을 영원히 간직한다면, 미국은 영원히 위대하게 남을 것이다."
*드 토크빌: 1805-1859 프랑스의 정치학자, 역사가, 정치가
감사하는 마음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 있는 아내에게 유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하였고,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약속은 지킴으로 고귀하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하룻밤 숙박 예정으로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시골길을 지나다가 7-8세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 아이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톨스토이가 가지고 있는 백합꽃 수가 놓인 린넬 가방을 보자, 그것이 부러워 어머니에게 졸라대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그 아이가 졸라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가 되돌아와서는 소녀에게 약속을 했다.
"내일만 지나면 이 가방이 필요 없게 되므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틀림없이 너에게 줄 터이니 울지 말고 기다려라."고 했다.
린넬 가방은 친지의 유품인 소중한 기념품이었으나 툴스토이는 소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약속을 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저 녁 어김없이 그 시골길로 돌아와 소녀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 소녀는 불행하게도 톨스토이와 헤어진 후 급한 병으로 죽게 되어 조금 전에 장례식을 끝낸 뒤였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모친에게 부탁하여 소녀의 묘지까지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린넬 가방 을 무덤 앞에 놓고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소녀의 모친은 눈물을 닦으면서 톨스토이게게 말하기를 "이제 아이는 죽었으니 이 가방은 가지고 가라."고 미안한 듯이 말하자, 톨스토이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으나 소녀와의 약속은 나의 마음에 아직 죽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는 머리를 숙였다는 것이다.
"하잘 것 없는 약속이라도 정확하게 지키면 신용은 물론이고 인기가 올라갈 것이니 힘에 미치지 못하는 약속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 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재능 살릴 담력 길러야 성공한다" -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짙은 구레나룻 수염의 넓적한 얼굴과 집채만한 몸집에서 우람한 소리를 뽑아내 전 세계 음악팬을 매료시키는 사나이. 그를 성악의 길로 이끈 인도자는 아버지 페르난도 파바로티였다. 제빵 기술자인 페르난도는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집안이 가난해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못 했지만 타고난 테너 목청으로 오페라 곡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다. 낙천적 성격이라 뜨거운 오븐 앞에서 일할 때나 쉴 때를 가리지 않고 아리아를 쭉쭉 뽑아대곤 했다. 따라서 루치아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노래 속에 온통 파묻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고향은 모데나. 로마에서 북쪽으로 3백50km 남짓 떨어진 볼로냐 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쯤 됐을 때 부엌 식탁에 기어올라가서 노래를 부르고선 출사표를 던져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난 자라서 테너가 될테야." 하지만 빵 이외에는 모든 게 부족한 집안 형편 때문에 성악가로부터 레슨을 받을 엄두도 못 냈다. 꿈을 잠재운 채 열두 살이 됐을 때였다. 고명한 테너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는 "언젠가 테너가 되고 말겠다"며 선언하고 돌아왔다. 꿈 많은 10대 시절. 자신의 장래를 놓고 생각이 왔다갔다하던 루치아노는 열아홉 살이 되자 비로소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께 계획을 털어 놓았더니 독학으로 깨친 오페라 창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충고했다.
"성악가의 길로 들어서기로 일단 결심했으면 길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확인하고선 모데나에서 가장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아리고 폴라 선생에게 데리고 갔다. 부자의 눈동자와 입에서 뿜어 나오는 성악에 대한 강렬한 의지에 감동한 폴라 선생은 레슨비도 받지 않고 루치아노를 제자로 받아 주었다. 그날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오던 길에 아버지는 평생 가슴 속에 간직해 온 비밀을 털어 놓았다. 젊은 시절 노래가 하도 좋아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지만 처음으로 독창할 날을 며칠 앞두고 대중공포증으로 인한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 아버지는 아들에게 딱 한가지를 당부했다.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지만 이를 마음껏 살릴 수 있는 담력을 길러야 성공한다."
폴라 선생의 교수법은 특이했다. 제자의 뛰어난 목소리는 전혀 고려치 않고 처음 6개월 동안 악보 읽기와 발성만 연습시켰다. 지겹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냥 성악가가 아닌 오페라 가수가 되고 말리라는 목표만 붙잡고 견뎌 냈다. 루치아노는 1961년 콩쿠르에서 처음 우승하고 오페라 무대에서 홀로 서기를 시작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승의 가르침이 옳았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페라 가수로 대성하려면 목소리 관리도 중요하지만 단어 하나 하나를 정확하게 발음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올바른 스승에게 인도하여 오페라의 정도를 밟게 한 아버지는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오페라 가락을 뽑아대면서 낙천적으로 살고 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 루치아노가 해외공연에서 돌아오면 "네 목소리가 내 정도만 돼도 팔자를 더 고칠 수 있을텐데"라는 우스개로 아들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곤 한다.
절개를 지킨 명장의 아내
솔로몬 왕이 신전(神殿)을 짓기 시작할 때 모든 나라의 왕후(王候)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그 분야의 명장(名匠)이라 불리는 기술자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일에 대해서는 응분의 보수를 지불하겠노라고 덧붙였다. 왕후들은 모두 그 요청에 응했다. 솔로몬왕의 분부를 거역할 용기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한 나라에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다른 나라로 나가서는 일을 하려 들지 않는 자가 한 사람 있었다. 이 사나이에게는 비길 바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내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나쁜 사나이가 아내의 몸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멀리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편지가 이 마을에 도착하자 영주는 그를 불러서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부탁했다.
"솔로몬 왕이 착수하고 있는 신전 건축을 거들어 주게나. 솔로몬은 권세가 이만저만이 아닌 왕인지라 나로선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단 말일세."
그는 울적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까닭을 묻는 아내에게 그는 영주가 명령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딴 나라로 떠나기를 꺼리시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면 당신 마음속에서 그런 걱정은 몽땅 털어 버리세요. 영주님 명령대로 안심하시고 여러분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떠나세요. 전 언제까지나 깨끗한 몸으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다소나마 가라앉은 그는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더불어 마지막 밤을 지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노라니 아내는 삼베 부스러기 속에서 반짝이는 석탄이 들어 있는 작은 유리 상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작은 상자를 목에 걸고 떠나세요. 삼베에 불이 붙지 않는 동안 죄 많은 불이 저를 더럽히지 않고 있다고 믿어 주세요."
명장은 작은 상자를 목에 걸고 떠났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신전 짓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솔로몬 왕은 날마다 작업장에 나타나 공사의 진행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명장의 목에 매달려 있는 작은 유리 상자에 눈길을 멈추고, 그 사연을 물었다. 그는 숨김없이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잘생긴 두 젊은이를 불러 명장의 마을로 가서 그 집에 유숙하며 그 아내를 유혹해 보라고 명령했다. 젊은이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명장이 사는 먼 나라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그들이 명장 집에 유숙을 청하자 명장의 아내는 상냥하게 맞아들여 한 식탁 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뒤 명장의 아내는 그들을 침실로 안내하더니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한 달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한편 솔로몬은 날마다 명장의 목에 걸린 작은 상자를 들여다봤지만 삼베 부스러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스스로 나서 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변장하여 두 종복(從僕)을 거느리고 명장의 고장으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하자 그 이름난 정숙한 여인 집에 유숙을 청했다. 그녀는 역시 상냥하게 맞아들이고 왕에게 어울리는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녀는 낱낱이 다른 색깔로 칠한 달걀을 듬뿍 접시에 담아 내놓고 나서 말했다.
"왕이여"
"누구더러 임금이라 부르고 있는 거냐?"
"나리의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제왕의 위엄이 빛나고 있습니다. 저는 나리를 섬기는 비천한 여인입니다. 이 달걀을 각각 조금씩 잡수어 보시고 그 맛을 살펴 주세요."
왕은 달걀을 먹어 보고 말했다.
"제각기 껍질 빛깔은 다른데 맛은 모두 한결같군 그래."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재빨리 말했다.
"저희들 여인도 이 달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얼굴 모양은 다 달라도 즐거운 맛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이 좀 잘 생겼다고 해서 머나먼 길을 오신다는 건 헛된 일입니다. 저는 나리를 섬기는 여인이므로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체 높으신 나리께서는 이 속세의 욕망은 모두 허무하고 죄가 많은 것임을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솔로몬은 여인의 현명하고도 사랑스러운 얘기를 듣고 난 뒤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쳐 댔다.
"그대에게 축복이 있으라. 그대의 정숙한 마음에 축복이 깃들라!"
그리고 앞으로는 자기 누이 동생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왕은 그녀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왕은 긍지 놓은 여인의 남편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고 남의 열배나 되는 보수를 지불하면서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그리고 네 아내와 행복하게 살도록 하라."
그리하여 명장은 고향 마을로 되돌아왔다. 그는 아내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지난 날 이상으로 아내를 소중히 대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변함 없는 우정이 명장 부부와 솔로몬 왕 사이에 맺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