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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전국 그리고 해외에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마음으로 시청하시는 교우 여러분들.
가깝게는 서운동 신자 여러분들, 한 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 어둠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은 제가 15년 전부터 인터넷 방송을 해왔다는 겁니다.
물론 생방송을 한 것은 2년 전이지만, 이전에도 촬영하여 유투브에 올렸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이런 때를 대비해 주님께서 미리 준비시키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이러스의 크기는 인간의 몸의 수억 분의 일이라고 합니다.
고화질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그 작은 바이러스에 인간은 무기력하게 무너집니다.
각 나라마다 쇄국정치를 쓰고 어둠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총이나 칼 ,전쟁 때문에 나라를 막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
누구한테 숨어있을지 모르는 그 작은 것 때문에 전 세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야훼이레’, 그 말씀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자꾸 어둡고, 우울하고, 슬프고, 분노가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밝은 빛을 향하여 몸을 돌립시다.
기도 안 하던 사람들이 기도하게 되는 축복의 시간, 하느님과 멀어졌던 사람들이 가까워지는
은총의 시간으로 전화위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피정 때마다 강조했던 내용이지만 해도 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얘기를 하려합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여러분에게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지는 신앙의 끈이고
교황, 주교, 사제라도 이것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것에 기초가 안 되어있기에
냉담자와 배교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대신덕(對神德)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망애(信望愛) 삼덕, 다른 말로 향주 삼덕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개신교 쪽에 온 단어입니다.
우리 천주교는 옛날부터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를 안 썼죠.
신덕, 망덕, 애덕이 바로 주님을 향하는 기초 덕이요, 대신덕이라 교리는 가르칩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 교황, 주교, 또 김웅렬 신부가 한평생을 신자들을 가르쳐서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보낸다 해도 자신이 향주삼덕이 없다면 천국 못 갑니다.
이 향주삼덕에 대한 기초가 없으면, 주교도 신부도 수도원도 흔들릴 수 있고,
평신도들이 냉담에 쉽게 빠질 수 있고 사이비 집단에 몰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울타리가 바로 향주삼덕 – 신덕, 망덕, 애덕입니다.
저는 이 기초를 가르치기 위하여 가장 강조하는 주제가 바로 향주삼덕이었습니다.
그럼 그 다음 단계, 신덕의 핵심, 망덕의 알맹이, 애덕의 알맹이가 무엇입니까?
뾰족뾰족한 밤의 가시를 벗기고 나면 그 안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밤알이 나오듯이
신덕의 껍질을 벗기면 신덕의 알맹이, 망덕의 알맹이, 애덕의 알맹이가 나올 겁니다.
그러면, 신덕의 핵심은 뭐에요?
많은 사람이 신덕이 뭐냐고 물으면 믿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은 너무 추상적인 단어죠. 신덕의 핵심은 믿음이 아니라 순명입니다.
신덕의 삶을 사는가는 얼마나 하느님과 교회와 양심에 순명하고 사는가에 있습니다.
망덕의 껍질을 다 까서 그 안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그 생명과도 같은 씨앗, 핵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바램’ 이라 답합니다. 아니에요.
망덕의 핵심은 기쁨이에요.
물론 망덕은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나 우거지상으로 하고 기다리느냐, 아니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느냐?
성경에는 그래서 망덕의 삶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수도 없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기쁘게 살아가느냐?
기쁨에는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기쁨이 있고 위에서 내려오는 영적인 기쁨이 있는데.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기쁨은 늘 짠물처럼 갈증을 일으킵니다.
손에 담은 물은 빠져나가듯 소유에 대한 기쁨, 남보다 나은 기쁨, 권력에 대한 기쁨은 늘 나를 실망시킵니다.
그래서 끝없이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은 소유하는 기쁨이 아니라 포기하는 기쁨입니다.
망덕의 핵심인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많은 단추를 채워야 하지만,
그 첫 번째 단추는 영적으로 철이 나야 된다고 교회와 성서는 가르칩니다.
영적으로 철이 나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신부가 되면, 수녀원만 들어가면 다 철이 납니까?
본당의 간부 맡고 있으면 다 철난 간부들입니까?
영적으로 철이 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얼마나 주는 사람’이냐의 물음입니다.
우리는 주면서 늘 돌아올 것을 기대하죠.
그러나 영적으로 철이 난 사람을 줄 때부터 아예 기대를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돌아와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언제 상처 받습니까?
Give and Take를 하다가 Give는 했는데 Take가 안 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애초 받을 생각 말고 주면 하느님이 그 빈자리를 기쁨이라는 선물로 채워준다는 겁니다.
신덕의 핵심은 순명이라 했고, 망덕의 핵심은 기쁨이라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애덕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너무 추상적이에요.
애덕의 핵심은 사랑이 아니라 바로 용서입니다.
내가 얼마나 애덕이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은 얼마나 용서하는 사람이냐에 있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주면 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 가지고 되는 거죠.
정(情)의 사랑, 그리고 의지의 사랑이 바로 용서입니다.
내가 언제가 말씀드렸죠?
여러분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명단 가운데 여러분의 속을 헤쳐 파낸 사람,
여러분을 지옥 밑으로 끌어내렸던 사람이 들어가 있느냐?
저는 없다고 그랬어요.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까지는 할 수 있는데, 사랑까지는 힘들어요.
신덕의 핵심은 순명이고, 망덕의 핵심은 기쁨, 그리고 애덕의 핵심은 용서라고 그랬어요.
오늘 향주삼덕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것이냐?
향주삼덕의 삶을 철저히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적 변화가 온다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타볼산에서 아름답게 변화하셨듯이 변화가 됩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살아가면서 아름답게 변화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데도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별히 사순절은 변화에 대한 묵상을 하는 시기입니다.
‘나 사순절 동안 예쁘게 살 거야.’ 그것은 생각입니다.
변화되려면 기초부터 하나하나를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그 기초가 바로 향주삼덕입니다.
내가 지금 신덕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망덕의 삶을 사느냐, 애덕의 삶을 사느냐?
다시 말하면 순명과 기쁨, 용서의 삶이라는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 입니다.
이 기초가 되어 있지 않는데 무슨 변화가 옵니까?
사순절이 그 사람한테 100번, 200번 지나가도 똑같은 겁니다.
아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교황도, 주교도, 사제도 향주삼덕의 기초가 안 되면 절대 완덕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향주삼덕의 삶을 우리들이 행하고 있다면 그 다음 찾아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 언제 구원받았어요?
세례 받을 때 물과 성령으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물과 성령의 세례 받았다고 다 천국 가는 것 아니라는 얘기죠.
구원의 문 밖에 있는 것과 문 안에 들어온 것은 천지 차입니다.
물론 구원의 문밖에도 익명의 크리스챤들은 많습니다.
삶 자체가 하느님과 교회를 향하는 선한 사람들은 많지만,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훨씬 쉽게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의 삶에 굉장히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않고 있을 때는 매사에 소극적입니다.
전례에도, 봉헌에도, 봉사에도, 전교도, 친교도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도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는 판에 누구를 전교합니까?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매사에 적극적이 됩니다.
전례에 임하는 자세도 다릅니다.
봉헌하는 것도 다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셨으니,
주님의 것을 주님께 다시 되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봉헌하고 봉헌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봉사할 때도 적극적이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봉사합니다.
전교하는 데도 앞장섭니다.
이 좋은 주님을 어찌 안 알릴 수 있을까?
전교해야 될 사람, 십자가 앞에 이름 석 자 붙여놓고 기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집에 평화신문, 가톨릭 신문을 보내주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교합니다.
친교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개인 구원이 아니라 단체구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친교를 통해 아픈 사람과 영적으로 힘든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야합니다.
친교를 통하여 못 걷는 사람은 등에 업고, 휠체어 준비해 주님을 향해서 나가야 됩니다.
이게 바로 친교입니다. 모여서 밥 먹고 헤어지는 것이 친교가 아니죠.
이렇게 향주삼덕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저절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다는 그 뜻입니다.
그러나 향주삼덕에 대한 기초가 안 되어 있을 때는 본당의 회장을 세 번, 네 번을 해도
‘회장님 구원받으셨습니까?’ 물으면, ‘잘 모른데요. 열심히 노력 중이래요.’
기도 안 찹니다.
개신교 신자들 부흥회에 3~4일만 나갔다 오면 난리 납니다.
나 구원 받았다고 시어머니 모시고 나갑니다.
냉담하는 남편에게도 구원받으러 나가자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성경 들고 ‘예수 믿으라.’는 것을 보면 ‘아이고, 극성, 저 광신자들’합니다.
천만에! 그건 부러움과 시기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못하는 것 저 사람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향주삼덕을 사는 사람의 영적 변화의 첫 번째 단추는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능력의 변화가 옵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뭡니까?
재벌 앞에서 돈 자랑하시겠습니까? 씨름 선수 앞에서 힘자랑하시겠습니까?
우리 교우들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은 십자가를 담대하게 전하는 능력뿐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어마어마한 힘이 있습니다.
통계가 나왔죠?
외인들과 식사하면서 식사 전후기도 하는 사람이 형제는 20프로, 자매는 40프로래요.
저는 식당을 들어가면 앉아 있는 사람들을 쫙 스캔을 합니다.
뭘 보냐? 손가락에 묵주반지가 끼워있는 지를 봅니다.
‘아 저 양반, 우리 교우구나. 분명히 묵주 반지구나.’
그럼 그 옆에 앉아서 그분을 위해 화살기도 막 쏩니다.
‘주님, 음식 나오면 외인들 앞에서 십자성호 긋고 식사 전 기도하고 밥 먹게 해 주세요.’
그날따라 기도발이 안 받았는지 밥이 나오자마자 밥부터 먹더군요.
밤늦은 시간에 어떤 분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제발 고백 성사 좀 보게 해 주십시오. 저 20년 만에 왔습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고백 성사를 본 후 성사를 보게 된 동기를 이야기해주었어요.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어느 형제분이 앉더니, 음식이 나오니 그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식사 전 기도를 하는 거야.
그 옆에 앉아서 밥을 먹던 신자는 충격을 받았죠.
‘맞아. 나도 옛날에 복사까지 섰었는데. 사제가 되는 마음도 갖고 있었는데.
관면혼배 받고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며 냉담한 지가 20년이 지났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저분의 십자성호 긋는 저거 하나 가지고 이 죄인을 깨닫게 해 주시는구나!’
우리가 무심히 길에서 십자성호를 그을 때, 묵주 들고 걸어갈 때.
차 안에서 삼종기도를 드리려고 십자성호를 그을 때,
그 자리에 있던 30년, 40년 된 냉담자가 그 십자성호를 보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고백성사를 볼 수 있다는 거죠.
향주삼덕의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성호 하나만 잘 그어도 많은 사람들이 내 십자성호를 보고 비뚤어졌던 마음을 바로 가질 수 있고,
신앙이 없던 사람이 다시 교회에 문을 노크할 수 있고, 이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현대인들이 제일 많은 악세사리가 십자가라고 합니다.
금으로 되어 있는 십자가, 은으로 된 십자가.
코에도 걸고 귀에도 걸고. 폭력배도, 마피아도 십자가를 걸고 다닙니다.
방마다 이태리제, 프랑스제, 화려하고 멋있는 십자가, 번쩍거리는 십자가만 좋아합니다.
십자가라고 다 같은 십자가가 아닐 겁니다.
향주삼덕의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이 갖고 다니는 십자가는 힘을 주고
그 사람이 표시하는 십자성호는 많은 사람을 회개시킬 것입니다.
십자가를 담대히 전하는 능력이 바로 두 번째 변화입니다.
세 번째 변화, 향주삼덕의 기초를 갖고 있는 사람의 영적인 변화는 세상의 법보다도,
자기의 법보다도 하느님이 가르쳐 준 길을 따르려는 변화가 옵니다.
오늘 창세기 12장, 제1독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향주삼덕의 첫 번째인 신덕의 핵심인 순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어딘 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여 떠나라했을 때 아브라함은 조건을 붙이지 않고 떠납니다.
약속된 땅으로 갔습니다.
갔더니 왠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줄 알았는데 먼지와 풀만 있는 박토였습니다.
그전에 살던 유프라테스 강가가 훨씬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성서 어디에도 불평 안 합니다.
나중에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그럽니다.
아무튼 많은 시험, 순명의 시험을 통과하고 난 후 아브라함에게는 큰 축복이 내려갑니다.
자신의 법, 종족의 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을 선택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그 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애칭이 따라다닙니다.
사제에겐 능력 있는 사제보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사제라는 것이 더 큰 칭찬이 될 겁니다.
어느 자매가 세례를 받고 보니 여러 가지로 사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그럽니다.
일단 애가 생겨도 낙태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가 다섯이나 생겼던 겁니다.
양심대로 장사하다 보니 수입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다섯 명의 아이, 낙태시킬 수 없어 키울 수밖에 없었던 그 다섯 명의 아이들 가운데서 사
제가 둘이 나오고 수도자가 하나가 나왔습니다.
믿음의 결과를 우리들은 현세에서 찾으려하기에 믿음이 자꾸 세속화됩니다.
믿음을 통해 그저 재물과 건강과 현세적인 복, 병이 낫고 사업 잘 되고 가정 편안한 것만 바라고 살아갑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나 십자가의 의미는 사라지고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로부터 격려와 힘을 받으십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처럼, 엘리아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예수님도 수난과 죽음이라는 골짜기를 건너셔야 되고,
그 끝에는 부활이라는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모세와 엘리아는 알려줍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예수님에게
‘힘내십시오. 우리 같은 사람도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고통은 잠깐이지만 세상을 구원하시게 될 겁니다.’
성령 충만한 두 예언자를 만나셔서 예수님은 변화되셨습니다.
두 예언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불안에 떠는 모습이었고 초조하고 슬픈 얼굴이었지만,
모세와 엘리아를 만나서 위로와 격려를 받고 난 다음에 이 세상 어느 마전장이도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바뀌셨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들도 이 사순절 동안 구체적으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추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변화가 되어야 됩니다.
이 사순절 동안 내 작은 악습 하나라도 고칠 수 있다면,
그 악습을 평화와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정말 우리는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악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을 잃어버립니다.
오늘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공관복음인 루카복음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화되셨을 때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라고 전합니다.
베드로가 졸다가 그 은총의 시간을 놓치고 생뚱맞은 말을 합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사세요.’
앞뒤 전후도 모르고 졸다가 일어나고 다음에 엉뚱한 말을 지껄입니다.
베드로가 졸음으로 인해 은총의 시간을 놓친 것처럼 은총의 시기인
이 사순절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깨어서 지내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