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폭풍전야
제4장 신군부와 민중의 대격돌
5. [5.17쿠데타](상)
17일 24시 0분, 병력 전남대 진입
김대중등 재야지도자들 예비검속
전두환, 위컴에 군대이동승인 요청
계엄령확대 저항 무마이해 전국 대학 휴교령내려
80년 5월18일은 길고 그리고 너무나 칠흑같은 새벽을 예고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날처럼 많은 사건과 사건들이 겹치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날은 일찍이 없었을 정도로 치닫는다.
5월17일 24시0분, 바로 18일의 여명이 아직 한창 남아있는 시각이다.
광주전남대 교정에는 낯선 사내들의 발자국들이 은밀하게 어둠을 헤쳐온다.
하나 둘 밀려오는 발자국들은 이내 한무리 긴 전투대열을 형성한다.그들은 어깨위에서 끊임없이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부딪쳐 쏟아진다.군인들이다.
검은 무리의 대열들은 신속하게 움직인다.마치 눈에 익숙한 지형들을 헤쳐가듯 그들은 바로 전날까지 학생들이 철야농성장으로 사용한 중앙도서관건물과 대학본부건물들을 차례차례 점령해 나간다.
같은 시각 조선대와 서울대, 부산대등에서도 낯선 군인들의 작전은 동일하게 진행된다.
다음날 아침해가 떠올랐을무렵 일차상황은 모두 끝난때다. 그즈음 국민들은 이 새롭게 눈앞에 벌어진 사태에 절망감과 분노,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기 시작한다.
한국 현대사는 바로 이날 그 칠흑같은 밤을 일컬어 「5·17쿠데타」로 명명한다.
권력장악 철저한 준비
5·17쿠데타는 신군부에 의해 주도된다. 신군부는 10·26에 의해 발생한 정치적 공백상태를 이용, 권력장악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는 터다.
특히 그들은 오랫동안 일종의 군사훈련을 실시해오고 있었는데 바로 「충정훈련」이 그것이다.
그들은 충정훈련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일거에 무력화시키고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본격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설 채비를 재빠르게 갖추어오고 잇는것이다.
국방부가 광주특위에 제출한 80년 5월의 군대이동상황자료는 신군부의 준비태세가 얼마나 치밀한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일지는 쿠데타군의 움직임이 이미 5월3일부터 가시화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날 육군작전명령 제 12-80호에 의거, 9특전여잔은 수도여단에 배속됐다.
이어 5일 육군참모총장이 국방장관에게 해병1사단의 1개 연대를 소요사태와 진압부태로 사용할수 있도록 건의했으며 6일 이 병력의 소요사태 투입지시가 내려졌다.
14일 본격적인 진압부태 투입준비지시가 08시 50분에 내려지고 13시 50분 소요진압본부가 개소된다.
15일 20사단은 60연대와 포병단을 제외하고 육군작전명령 제 16-80호에 의거, 12시 정각에 잠실운동장과 효창구장으로 이동한다.
바로 박준병소장이 이끄는 충정작전부대의 움직임이었으며 이 부대의 일단이 시민들에 목격되면서 군대의 동향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16일 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장관에게 육상작전 제 0-207호를 통해 수도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질서유지를 위해 20사단의 60연대와 포병단을 상용할수 있도록 요청하며, 한미연합군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20사단 60연대의 포병단을 사용하도록 승인한다.
17일 충정부대는 드디어 움직임을 개시 전국의 주요대학을 점령, 학교안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모조리 체포한다.
신군부는 이같은 군사작전의 진행과 아울러 군대이동의 승인을 위한 미국의 동의를 얻기위해 한미연합사 위컴사령관과 접촉했으며 보안사내의 권력장악 시나리오 준비팀으로 하여금 정부내 요식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게 한다.
신군부 1인자 전두환과 위컴의 접촉사실은 「미국정부의 성명서」를 통해 검증해 볼수 있다.
[위컴은 5월13일 전두환 장군과 만났다. 전은 북한이 있다며 남침의 결정적인 시기가 가까워졌는지 모른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위컴은 미국은 언제나 그러하듯 한국을 방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북한으로부터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는 없다고 대답했다. 위컴장군은 국내정세대 대한 전씨의 비관적인 평가와, 그가 북으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한 것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이 문서를 통해 당시 미국측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의도를 명백히 알게 되며 또한 신군부의 병력사용을 승인한다.
16일 전남대 조선대등 광주 지역에서는 도청앞에서 대중집회를 연 후 야간에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벌였으나 17일에는 시위를 자제하고 귀가하거나 학교에 남았다.
전국 55개대학의 학생대표자들은 16일 오후부터 이화여대의 모여 시위의 평가와 향후투쟁 일정에 대한 의견조정을 계속한다.
군지휘관에 결의 숙지
그러나 신군부만은 가장 숨가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두환은 16일밤 신현확총리와 이희성계엄사 사령과, 주영복 국방장관, 김종환 내무장관과 같이 청와대에 들어가 심야대책을 연다.여기서 신현확총리는 최규하 대톨령에게 국내상황을 보고했고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등은 비상계엄확대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17일 오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릴 예정이라고 보고한다.
드디어 17일 전두환은 보안사의 권력장악 시나리오 준비팀인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대공처장 허화평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등 심복을 최대한 가동시켜 주요 군지휘관들에게 회의결의 사항을 사전에 숙지시킨다.
이어 민주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비상계엄확대조치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전문대학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회간부들에 예비검속한다.
▲정치권의 세 김씨를 각각 상이한 명분으로 제거할수 있도록 그들의 과거행적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연행할 병력을 준비시킨다.
▲국회가 열려 계엄 해제를 결의하지 못하도록 군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한다.
▲사실상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혁명위원회의 역할을 할수 있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준비하고 알맞는 인물을 선정해둔다.
▲검열거부를 추진한 언론인들을 모두 제거하고 계엄확대조치를 옹호할수 있도록 중진언론인들을 확실하게 포섭한다.
신군부의 사실상 쿠데타에 가까운 이 계획은 곧바고 집행된다.
거칠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최성택 합동참모본부정보국장과 정용호 특전사령관이 회의준비를 맡았고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은 아침일찍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계획을 브리핑한다.
주영복장관은 9시부터 열린 각 군별 주요지휘관회의가 끝나기도 전인 10시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윤자중 공군참모총장,김종곤 해군참모총장,유병현 합참의장등 군의 수뇌부를 만나 비상계엄확대 선포와 국보위설치, 대학휴교령과 국회해산 및 정치인 예비검속 등을 설명하고 이를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통과 결의시키자고 제안한다.
유병현 대장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는 군 회의에서 다루기 힘들다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신군부는 이를 묵살하고 11시께부터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에에 이를 안건으로 상정한다.
이날 회의에서 정용호 특전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과,박준병 20사단장 등이 강경한 발언을 계속 했으며 일부 신중론이 제기 됐으나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군부대 전국대한 진압
이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는 약 4시간동안 계속된다.
회의가 끝나자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계엄사령관은 전군주요지휘관들의 연서명이 첨부된 신군부의 시국대책안을 들고 오후 5시께 신현확총리를 찾아간다.
신총리는 이중 국보위설치안에 대해서만 반대했고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인다.세사람은 곧바로 청와대로 찾아가 최규하대통령에게 군부의 시국대책안을 설명한다.
최대통령은 오후 7시께 이를 승인하고 신총리에게 비상국무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한다.
이시간 신군부는 이미 행동을 개시했다.
국무회의가 계엄확대안을 의결하기 수시간전인 6시께 이미 합동수사본부는 경찰병력을 이끌고 전국대학생대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이회여대를 급습, 다수의 학생대표를 체포했다.
충정부대 역시 초저녁부터 이미 작전을 개시, 전국의 주요대학으로의 진입을 시작해놓은터였다.
합동수사본부는 전국 주요 대학 학생회간부의 검거에 이어 정치권의 무력화작전에 들어갔다.
권력장악 시나리오대로 예비검속을 시작한것이다.
밤 10시를 전후해 합수부는 미리 작성해둔 명단에 올라있는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의 집을 급습,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송건호 한완상 이호철 함세웅 김승훈 이해환 고은 이영예 씨 등 각계민주인사들을 소요배후조정혐의로 체포했다. 또 김영삼등 야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가택연금시킨다.
첫댓글 연재 하시하 수고 하녔습니다.